하동 일박 여행 중.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 앞 대나무 숲 산책에 나섰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 옆구리 쪽 어딘가를 맴돌았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참 발길을 붙들었다. 언제부턴가 노랑, 나비, 노랑나비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냥 아쉽고 안타깝고 그리운 모든 존재들이다. 한참을 놀다 헤어졌다.


섬진강가에 서서 화장실 간 남편을 기다리는데 다시 나타났다. 작은 노랑나비가 "안녕, 여기 있었네" 하는 것처럼 다가와 팔락거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비 따라 옮겨 다니며 한참을 놀았다. 


차밭 사이를 걷는데 또 그 노랑나비다. 이쯤 되니 예사 나비가 아니지 싶다. 자꾸 따라오는 걸 보니 나비 쪽에서도 영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모양. 이렇듯 나를 그리워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엄마? 엄마인가 보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가녀린 양쪽 날개는 하나는 그리움, 하나는 아쉬움. 내 마음에 있던 엄마가 나비 되어 함께 걷고 있다. 습기 가득한 산책 길이, 안개에 싸인 지리산 능선이 더욱 아련해졌다. 엄마가 보고 싶다. 많이 보고 싶다.


짧은 여행 동안 이상하리만큼 '초록 사이 노랑'이 눈에 띄었다. 초록 풀잎 사이 노랑나비는 물론이고, 섬진강변 가로수들은 초록 사이사이 노랗게 변한 잎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동네 텃밭에서는 참깨 꽃을 처음 봤는데 초록잎 사이 노란 꽃이었다. 내내 가는 곳마다 초록과 노랑만 눈에 보인다. 


초록은 (나와) '동색'이다. 에니어그램 유형을 알기 훨씬 전부터 나는 초록이었다. 초록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고, 초록 잔디를 보면 그저 눕고 싶었다. 초록을 보면 살 것 같았다. 특히 봄의 연둣빛을 보면 그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연두 안에 숨은 '노랑'이 아픔과 슬픔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길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좋던 한여름의 신록에도 전 같은 환호가 나오질 않았다. 그때가 언제냐 물으면 딱히 답할 수는 없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노랑을 곁들이 초록, 또는 초록 사이의 노랑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엽록소가 빠져나간 헐거워진 느낌의 초록이랄까.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흔들거리는 내 뱃살과 닮았다. 빛바랜 초록이 추레해 보이기도 한다. 그 사이 노랑나비가 어른거리니 얼핏 구별이 안된다. 내 노안 탓일 수도 있고. 빛바랜 초록과 연약한 노랑의 조화가 마음 깊은 곳을 툭툭 건드린다.


하동을 출발해서 섬진강변 드라이브가 끝나고 산청에 이르렀는데 차창 밖으로 또 노랑나비! 여기까지 따라왔어? 동영상과 함께 이 얘기를 연구소 단톡에 올렸는데. 안동으로 여행 가신 선생님이 동영상을 보내셨다. "소장님 따라다니던 갸가 여기까지 왔어요." "갸가 아니고요, 저희 엄마예요. 정중하게 인사드리세요." 했다. "어이쿠, 결례를... 용서하세요." 하하. 내겐 엄마고, 선생님에겐 또 누군가이거나 무엇이겠지.  


초록은 나와 동색이다. 초록이 나이고 내가 초록인, 상징색이다. 집착에 가까운 애착물로서의 작은 화분들이 그러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휘를 그만두었던 때, 의식에선 모든 상황을 쿨하게 받아들였던 그때 꾼 꿈이 아직 생생하다. 다른 사람 눈엔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내 딴에는 정성을 다해 키우던 화분을 누군가가 싹 치워버렸다. 꿈에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며칠 몸에 두드러기가 나며 앓고 난 후에 그 상실을 받아들였었다. '지휘' 역시 내가 지나치게 동일시하던 나와 동색인 무엇이었다. 


빛바랜 초록과 한 마리 나비가 쓸쓸하다. 텅 비어 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텅 빈 곳이 어쩐지 알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상징은 설명할 수 없다. 느끼고 간직할 뿐이다. 선물 같은 천년차밭길 산책 끝에 숙소 앞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마음을 뺏는 컵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지만,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진 꽃 한 송이 핀 컵에 딱 꽂혔다. 너다! 빛바랜 초록을 만난 2020년 휴가는 너로 간직하겠다! 이런 경우 흔쾌히 지갑을 열어주는 남편이 고맙고. 채윤 현승 사다 주려고 보던 팔찌 옆에 머리끈이 또 바짓가랑이를 잡네. "여기도 노랑 초록 있습니다!" 그것까지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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