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좋아하는 현승이는 금요일 밤엔 무조건 영화 한 편이다. ‘피아니스트(2002)’를 보고 나오더니 괜히 카펫을 발로 차고 심술이 난 것처럼 왔다 갔다 한다. 혼잣말인지 들으라는 말인지, “도대체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겠어. 그렇게, 그런 걸..... 그런 홀로코스트 그걸 겪고 어떻게 하나님이나 신 같은 걸 믿을 수 있어! 김주혁이..... 연예인이 한 사람 죽어도 우리가 그렇게 충격받고 그러는데..... 세월호에서 삼백 몇 명이 죽고 우리가 다 그렇게 힘들었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그것도 그렇게 잔인하게 죽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종교라는 걸 믿을 수 있어” 했다. 곧 울어버릴 것처럼 울분에 차서 말했다. 무고하게 고통 당한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들에게 마음을 포갠 현승이 자신이 믿을 수 없다는 얘기인 줄 안다. 그런 하나님을 가슴으로 믿기는 어렵다는, 오히려 화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 없다는 뜻임을.  


별 말을 할 수 없었다.


꼭 계셨어야 할 순간에, 당신이 꼭 필요한 곳에 왜 계시지 않냐고 물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이 시작되더라는 것을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렇게 부재로만 현존 하시는지, 당신을 찾는 타는 목마름 속에 희미하게 드러내시는지, 울분에 찬 물음 속에 신앙의 길이 있더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현승아, 엄마가 읽은 책에 이런 말이 나오는데...

하느님께는 증오나 폭력이 없으시다. 역사에서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도록 절대적으로 허용하신다는 사실은 하느님께서 폭력적일 수 없으며, 징벌을 내리시거나 심지어 통제하시지도 않으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만일에 하느님께서 폭력적인 분이라면,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폭력으로 막으셨을 것이다.-역자 주). 하느님은 종교재판의 고문이나 홀로코스트의 가스실을 막지 않으셨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 우리들 자신의 실수, 심지어 악 자체를 이용하셔서 우리 모두를 온전한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재난으로 우리를 벌 주시지 않으며, 심지어 재난을 막지도 않으신다. 예수님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에 대해 "자기 죄 탓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요 9:3)라고 말씀하셨다. 하느님께서 완전히 사랑에 헌신하시는 것은 완전히 자유에 헌신하시는 것인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강제와 통제를 포기하셔야만 했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분명히 경찰이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과 우리가 지불해야만 하는 큰 대가이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달리 행동하실 방법이 없으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이다(요일 4:8, 16).

리처드 로어 <불멸의 다이아몬드> 중에서


어때? 알아 들어져? 실은 엄마인 나도 이 말을 알아들었다, 못 알아들었다 해. 알겠다가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은데 조금 알겠고... 이렇게 비틀비틀 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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