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제 부모가 낳은 자식 본문

인간의 얼굴을 가진 리뷰

제 부모가 낳은 자식

larinari 2012.01.09 23:53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김훈의 소설 <흑산>을 읽다가 한 문장이 목에 걸려 다음 장으로 넘어가질 못하고 있다.
정약현이 딸 내외를 서울로 이사시키면서 '육손이'라는 종을 딸려 보낸다.
떠나는 날에  마지막 절을 하며 우는 육손이를 보고 정약현이 사위 황사영에게 이르는 말이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황사영은 이 말의 단순성에 놀랐고,
시간이 지난 후에 이 말의 깊이에 놀라며 육손이를 종의 몸에서 풀어주고 면천해준다.



밖으로 보여지는 것처럼 인간관계가 그닥 원만하지 못한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여전히 쿨하지 못한 관계맺음으로 상처받기가 일쑤다. (상처받기는 그대로 '상처주기'로 읽어도 틀리지 않다는 걸 안다)
아직까지도 내 발목을 잡고 있는 치명적인 관계들이 있다. 수 년 전에 그 엉킨 관계를 풀어보자 나름대로 어설픈 노력을 할 때 있었던 일이다. 그에게 나는 이중인격자에 돈으로 관계를 따지는 사람이었고 그 오해를 풀어보고자 되도 않는 애를 많이 썼었다. 해명하고 애를 쓸수록 서로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과정에서 나는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다.
그 때 내가 그 사람에게 표현을 했는지 안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되뇌었었다.
'나는 우리 엄마 딸이고, 우리 엄마한테는 내가 진짜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다. 그것 만은 알아달라'라고. 그 사람에 의도했든지 아니든지 내가 받은 느낌은 아무리 해도 내가 이 사람에게 인간으로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없겠구나 싶었었던 것 같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그 얘기일 것이다.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있지만 결국 정약현도 황사영도 육손이도 천주귀신이 들린 자로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이다. 이 모두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들이었다. 또한 당신도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다. 제 부모가 낳은 자식임을 인정해 주는 것은 나와 아무리 맞지 않아도, 때로 내게 극악무도한 짓을 저질렀다 할찌라도 마지막 존엄성은 인정해주는 것이다.
부모가 되어 핏덩이 아이를 안아보고, 그 아이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어줄 때, '엄마'라고 불러줄 때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사랑보다 더 뜨거운 경이로움을 알기에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 어떤 존재인 지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나도, 당신도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이다.
그걸 잊지 말자.

 

4 Comments
  • 프로필사진 신의피리 2012.01.10 12:00 헨리 나우웬의 <안식의 여정>을 읽다가 참 나우웬 다운 고백을 봤어요. 여전히 소심한 자신, 여전히 기도에 헤매는 자신... 60이 넘은 영성의 대가의 고백, 그 문구 그대로 보면, 내 일기장의 고백과 비슷한 면이 있더라구요. 그런데 그게 읽는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도전이 되는지 몰라요. 관계와 영성의 더딘 성장에 좌절이 되다가도 나우웬의 글을 보고 나면, 더 인내하게 되고 더 자신을 잘 수용하게 되고, 더 성장하고픈 마음이 들더라구요.

    지금 당신의 글이 또 그런 역할을 하는 거 같아요. '상처 입은 치유자'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1.11 10:39 신고 잠자기 전 헨리 나우웬 한 페이지,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데 참 좋은 시간 같아.(요. 남편님께서 존대말 드립하시니 이건 뭐 반말로 얘기해야 할 지 존대말로 얘기해야 할 지...ㅋㅋ)

    부끄러운 속마음을 드러낼 때 쿠션처럼 받아주는 당신이 있어서 높고 낮은 언덕을 넘어가는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참 좋은 '상처 입은 치유자' 남편!

    (둘이 참 훈훈하다...ㅋㅋㅋ)
  • 프로필사진 지구반대편에서 여씨아쥼마 2012.01.11 13:16 오랜만에 찾아왔다가 신실님의 마음의 여정과 두 분의 훈훈한(ㅋㅋ) 대화에 힘을 얻고 갑니다.. 한참 질퍽거리는 요즘, 띤띨님께서 가까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만 해봅니다... 잠옷바람으로 달려가서 차 한잔 하고싶은 밤입니다....ㅎㅎ
  • 프로필사진 BlogIcon larinari 2012.01.11 20:02 신고 댓글을 읽자니 지구반대편에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로 마음이 가깝게 느껴지네요. 왠지 제 글의 행간의 숨은 많은 부끄러움과 질퍽거림을 읽어내신 듯하여 나도 같이 차 한 잔 하고픈 맘 굴뚝 같아요.
    봄에 들어오시면 나란히 안수를 받을 수 있는 걸까요?^^ 봄이 오면 한결이를 안아보겠네요. (한결인 지금 컴퓨터가 있는 책상에서 저를 올려다보고 있어요.ㅎㅎㅎ 너무 예쁘 달력과 카드 고맙구요)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