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포기 본문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

포기

larinari 2013.05.30 13:37

제목 : 포기

자기가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최고의 거리까지 왔어'라고 하고 그만두는 것은 자기가 갈 수 있는 최고의 거리까지 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만둔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갈 수 있는 최고의 거리까지 가는 건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가다 나도 어쩔 수 없게 쓰러지면 그거야말로 자기가 갈 수 있는 최고의 거리까지 간 것이다.
(2013. 5. 26)


일기에 사연이 있다. 현승이 수영 마치고 합정역에서 만나서 병원을 들러 오는 길이었다. 순대국 먹고 싶다고 해서 2인분 포장했다. 버스 정류장에 마을버스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걸어가자고 하니 힘들어 죽겠단다. 순대국 포장한 걸 들고 버스 타는 게 그렇다고 하니 알겠단다. 걷는 길이 힘들긴 힘들었다. 수영하고 지친 몸에 배까지 고프니.
중간에 '엄마, 나 여기서 그냥 주저 앉고 싶어. 그냥 여기 앉아서 순대국 꺼내서 먹고 싶어. 한 발작도 못 걷겠어.' 입은 가만 놔두지를 않았다. 그러다 잠시 입이 쉬는가 했더니 저 얘기를 하는 것이다. '킥킥킥, 엄마 그런데 내가 더 이상 못 걷겠다고 하는 건 사실 더 이상 못 걷는 게 아니다. 그냥 내가 포기하는 거야. 더 이상 못 걷겠으면 그 말도 못하고 그냥 갈 데 까지 다 가고 쓰러지는 거야.' 라면서 썰을 풀어대기 시작한 거이다. 중간중간 추임새도 넣고 질문도 해주면서 걷다보니 어느 새 집 앞에 도착. 그렇게 조잘거리던 얘기를 짧은 글로 정리해낸 것이 더 놀랍다.


 

* 페이스북에 먼저 올렸었는데 달린 댓글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복사해왔다.

김정길 역쉬~ 멋진엄마의 아들~

김성수 아! 심오하당...

권경우 글씨만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인데 내용은 고등학생 수준이네요. 일기의 소재도 그날 누구랑 놀고 무슨 일이 있었다의 수준이 아니라 사색한 내용을 일기로 쓰다니... 몇 살인가요?^^

배명희
제가 어린이들의 글쓰기에 애정이 평균 이상인 편인데요, 이렇게 지적인 글쓰기를 하는 대한민국 어린이는 정말 오랫만에 보네요.(애정이 넘치는만큼 오바스런 개인적 의견에 불과하니 참고해주세욤...)추상적인 관념을 언어화하는 능력은 이렇게 삐뚤빼뚤 글씨를 쓰는 시기에 발달하기엔 이른데 말이죠. 아마 뇌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댁의 아드님은 대뇌피질 전두엽부위 발달 정도가 남다릅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ㅎㅎ 대견키도하고, 부모님들이 나름 많은 생각과 고민도 들고 그러시겠어요.

제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안타깝게도 이런 소중한 사유의 어린씨앗을 대한민국 공교육이 얼마나 건전하게 키워줄 수 있을지에 대한 근심이에요 ㅠ.ㅠ

이런 글쓰기에 소질을 보이는 아이들을 주변에서 그저 '특별한' 어떤 범주로 제한하고 가두어두는 경향이 있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쉽게말해 학년이 올라갈수록 백일장 스타일 글쓰기로 정형화되어가는 과정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아이의 사고도 그만큼 제한이 되는 것이죠. 때로는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무조건적인 글 솜씨 자체에 대한 찬사가 아이의 글쓰기를 방해하는 경우도 아주 많구요. 아이에게는 이유가 불분명한, 무조건적인 칭찬 보다는 침묵이 오히려 백배 이로울 때가 많은데 칭찬의 의미가 사이비 육아전문가들 땜에 많이 오해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글에서는 자신만의 다부진 논리와 의지가 엿보여서 정말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자기주장하는 애들을 보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잖아요....이 다부진 논리를 가령 '그럼 포기는 자기가 택할 수 없는 개념인거야?'같은 질문으로 부드럽게 그 틈을 파고들어 현승이 사고의 외연을 매시간 확장시켜주고 계실 사모님의 부드러운 빈칸매꾸기식 알흠다운 육아(저의 롤모델이 된!)가 눈에 막 그려지네요.

대한민국 교육현실에 너무 비관적인 한 애 엄마가(문예반 출신으로 너무 긴 시간을 낭비해버린 당사자이기도 한), 걱정이 앞선 나머지 오지랖 댓글 남겨봤습니다...

곽명손 ^-^ 공감에요. 그러고 보니 저는 최선을 다해본 적이 별로 없군요. ㅠㅠ

이은섭 뉘기 아들~

Jae Yoon Um 와~~ 대단하네요. 부모님이 정말 자랑스럽겠어요.

Keyoak Cho 배추 셀 때는 포기가 필요하다고 좀 얘기해줘요~ 휘리릭~~^^

한지선 대박! 아 이아이 어떻게 자랄것인가

Reminisce Ontheroad 어디로 모셔서 한강좌 마련해드리고 우리 모두 경청해야 할 듯 싶어요.

박동선 현승이는 생각하는 힘 뿐만이 아니라 글로 표현하는데도 익숙하구나. 청출어람 청어람이랄까 ㅎㅎㅎ. 신실이 긴장해야 되겠다 샬롬!

이영애 아~~어려워ㅠㅠ 전 현승이의 대화상대로 한참부족할듯ㅠㅋㅋ

최용승 기대가 되네요 머잖아 대한민국에서도 노벨문학상이 보이는듯합니다

정 수원 우아....

Kummi Lee 벌써 철학적이군... 나중이 궁금하네요.^^ 기대합니다.

 

 

 

 

'어린 시인, 꼬마 철학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기'로 복수하기, 공격하기  (2) 2013.06.25
매실  (8) 2013.06.20
포기  (2) 2013.05.30
왕따  (0) 2013.05.26
책 읽기가 특기  (6) 2013.05.09
가장 강력한 무기 '말'과 가장 좋은 선물 '말'  (6) 2013.05.04
2 Comments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