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에서 오른쪽의 얼굴 크고 훤한 분이 내 동생이다.
지난 3년간 교회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했는데 사실 엄마한테 말을 못했지만 늘 불안했다.

동생이 하는 일은 싸우는 일이었고 싸움의 대상이 주로

돈, 권력, 명예, 힘 가질 것 다 가진 큰 교회 목사님들이기 때문이다.   

강아지 같은 어린 애가 졸졸이 셋 있는 아빤데 저러다 으슥한 골목길에서 뭔일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몸 성히 3년의 사역을 정리하게 되었다.

동생을 생각하면 항상 엄마랑 분리되지 않는다.

엄마가 바라는 좀 더 안정적인 길로 왜 가지 않을까?
안전하고 안정된 기회와 길이 없는 것이 아닌데도 

왜 항상 저렇게 가난하고 위태위태한 길을 골라 다닐까? 

그러기로 따지면 나도 엄마한테 할 말이 없다. 
평생 남매를위해서 기도해온 엄마는

'두 남매 새벽별 같이 빛나길' 기도하셨고, 

사실 그 기도는 두 남매가 이 세상에서 높은 길, 성공의 길로 가길 바라는

엄마 나름의 축복기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엄마는 성공한 엄마라는 생각을 늘 한다.

엄마 바램대로, 엄마의 기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평생 해오던 돈걱정을 아직도 하며 살고 계시지만 말이다.
<뉴스앤조이>에 난 동생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다.

엄마의'새벽별 같이 빛나라'는 기도는

궁극적으로 하늘의 길을 선택하여 걸을 때만 다다른 수 있는 빛이기 때문이다.

<뉴스앤조이>에서 퍼온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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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오성 목사(좌)와 정운형 목사는 인상이 좋다는 소리를 듣는다. 교회 개혁을 하기에 너무 순해 보인다고 하지만 삶에서 개혁을 해온 경험에서 개혁의 힘이 나온다. ⓒ 뉴스앤조이 김세진  
 
말한 대로 살고 사는 대로 말하는 사람은 신뢰할 수 있다. "말과 삶이 나란히 간다면 그것은 철학의 완성이다"는 베네딕트 수도회 조안 치티스터의 말을 교회 개혁 현장에 적용한다면, 개혁을 외치는 말과 삶이 나란히 가야 그것이 개혁의 완성일 것이다.

교회개혁실천연대 전 사무국장 정운형 목사(40)와 현 사무국장 남오성 목사(41)는 한국교회를 개혁하기 위한 시도를 각자의 자리에서 해 왔다. 그렇기에 이들이 한국교회를 향해 외치는 소리는 공허하지 않다.

정운형 목사는 나름대로 안정적인 중형 교회의 부목사 자리에서 나와 3년 동안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있다가 다시 작은 교회의 부목사로 돌아갔다. 남오성 목사는 세습하라는 교회에서 굳이 나와 교회 개혁의 최전선에 있는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왔다. 권력과 자본이 집중된 교회와 교권을 감시하고 자정하라고 외치는 일은 거친 일에는 틀림없다. 남오성 목사 스스로 개혁연대를 '특공대', '총알받이'라고 부른다. 알면서도 무슨 이득을 보자고 특공대에 자원했을까.

부흥하는 교회에서 떠나고, 세습 유혹 떨치고

정운형 목사는 안정적인 중형 교회의 부목사 자리를 내놓고 나왔다. 교회 회복을 바라는 마음에서다. 담임목사의 전횡 때문에 교회에 문제가 많은데, 정 목사가 맡은 부서는 사람이 많아졌다. 오래 고민하다가 "교회가 엉망인데 혼자 사역을 잘하고 있는 게 개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담임목사는 "개척을 시켜주겠다"며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나왔다. 사임한 후에도 오랜 시간을 기도한 뒤 담임목사를 찾아가 충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교회를 나온 후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가자 정 목사의 어머니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중대형 교회에서 안정적으로 사역하기 원하는 어머니의 바람과 다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께 "교회의 허물은 내 아픔과 같고, 그 기도 제목은 곧 어머니의 기도 제목"이라고 설득했다.

남오성 목사는 교회를 세습하라는 요구를 거부하기까지 갈등이 심했다. 교회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세습해도 문제되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최근에 교회는 남 목사로 인해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남 목사는 개인 구원에 집중하던 교인들의 시각을 사회 참여로 확장시키기 위해 애썼고, 담임목사인 아버지를 계속 설득했다. 목사 아들이라는 이유로 교인들이 남 목사를 잘 따랐다. 남선교회가 장애인을 찾아가고, 청년회가 외국인 노동자를 섬기고,  고난 받은 이들을 위한 성탄 모임 등에 함께하는 것은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지금 교회를 떠나면 그마나 있었던 개혁의 움직임이 도루묵이 될 것 같아서 갈등했다. 반면 마음 한구석엔 "아버지가 목회하는 교회를 물려받으면 최소한 평생 굶지 않고 애들 대학 등록금 걱정은 안 하고 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이 깊어져 주변에 신뢰할 수 있는 분에게 조언을 구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도 물었다. 어떤 사람은 가지 말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그런 세습이라면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더러 어찌하든 좋다고도 했다.

동일한 처지였던 김장생 박사를 만났는데, "남 목사가 교회를 물려받는 게 이 교회에는 유익할 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에는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는 타격이 있지만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것에는 세습을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남 목사는 망설임 없이 세습을 포기했다.

독단적인 목사, 가식적인 교수가 바로 나

정운형 목사와 남오성 목사가 교회 개혁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생뚱맞은 일이 아니다. 그들 삶의 연장선인 셈이다. 본인이 살았던 대로 한국교회에 말하기 위해서고, 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기도 하다. 하지만 조심스럽기도 하다. 나날이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게 되기 때문이다.


 

   
  ▲ 개혁연대 7,000인 찾기 프로젝트 전국 투어하면서 지방의 분쟁 교회를 찾아 예배하고 모임하던 사진. 사무실 직원들이 한사코 사양해도 지방에 있는 개혁연대 회원들은 멀리 찾아 왔다며 밥을 사려고 했다. ⓒ 뉴스앤조이 김세진  
 
정운형 목사는 교회 문제를 상담하면서 자꾸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어 힘들었다. 독단적, 파행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목사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신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난 것 같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받았고 거듭 채찍질하면서 성찰하려 애썼다.

남오성 목사도 웨신에서 교수로 있을 때, 허위와 가식이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봤다. 교수가 되니 사람들이 엄청난 권위를 실어줬다. 같은 말을 해도 이전과 다르게 주의 깊게 경청하고 모두 꾸벅 인사했다. 연봉도 괜찮았고 사회의 존경을 받는 자리였다. 어느새 즐기고 있는 자신을 봤다. 그런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기에 교만할 수 없다고 했다.

중국에서 추방당하고, 교수직에서 물러났지만

정운형 목사와 남오성 목사가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사역하다가 한계에 부딪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하지만 정 목사나 남 목사는 이를 실패라고 생각하기보다 사명이 거기까지려니 생각했다.

정운형 목사는 탈북자를 돕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추방당하면서 깊은 좌절을 경험했다.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부터 탈북자 사역에 관심이 있었기에 교인들과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중국행을 결심했다. 정 목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20여 명이 함께 모이던 가정 교회가 공안의 단속에 걸렸다. 중국에서는 외국인이 내국인을 대상으로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이 위법이다. 같이 일하던 중국인 전도사가 잡혀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조사를 받으면서 따귀를 맞고 협박을 당하기도 했지만 동료 선교사의 이름을 대지는 않았다.

조사 끝에 바로 추방을 당해 공항으로 가는데, 마음이 허탈했다. 1년의 시간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절한 무기력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중국에 가서 탈북자들을 돕겠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를 하실 것이다 하는 마음은 어쩌면 자신에 대한 기대였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하게 쫓겨나면서 마음이 어찌나 절박했던지, 공항까지 동행한 공안에게 마지막으로 전도했다.

당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 목사는 중국에서의 시간을 통해 교회 개혁적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중국에서 초대 교회 형태의 '날복음'을 접했는데 그에 비해 한심하기 그지없는 한국교회의 상황을 봤기 때문이다. 탈북자들은 당장 생존하는 문제로 고민하며 "하루라도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며 살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교회 건축과 직분자 임직식에서 돈 내는 것 때문에 싸우는 모습이 너무나 한심해 보였다. 그 경험을 하니 개혁의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남오성 목사는 사실 교수가 되기엔 조금 부족한 스펙이었다. 박사 과정을 공부하다가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할 수 없이 휴학하고 귀국했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웨신에서 교수와 기획처장 제의를 받았다. 근본주의였던 웨신을 개혁적으로 바꾸는 일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남 목사가 개혁을 위한 실질적인 일의 진행을 맡았다. 웨신이 개혁연대, 성서한국, 성토모 등과 제휴를 맺고 '기독교 경제학과 사회 윤리' 같은 과목을 개설한 것도 남 목사가 있을 때 일이다.

남 목사는 지난 2월, 3년여 일했던 웨신 교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모두가 선망하는 교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었지만 남 목사는 홀가분하다고 했다. 교수라는 옷이 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그 옷을 입으면 뒷목이 당기는 듯 불편했다. 학교에서 나오면서 "하나님이 가식적인 것을 털어버리라고 좋은 자리 주셨나 보다" 하고 마음을 먹었다.


 

   
 
  ▲ 남오성 사무국장이 '사랑의교회 건축, 어떻게 볼 것인가' 포럼에서 사회를 보고 있다. ⓒ 뉴스앤조이 유연석  
 

웨신에서의 경험은 남 목사를 교회 개혁의 현장과 연결해 주었고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게 해 주었다. 연봉이 괜찮고 존경받는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싸움이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이 개혁 운동의 교두보가 되었다.

교수 자리에서 나왔다고 남 목사가 신학 교육을 통한 교회 개혁 운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웨신에 있을 때도 활동가였고 지금도 활동가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개혁연대에서도 특히 교육 사업에 힘을 쏟을 생각이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교육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교인들과 함께 교회사를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에서 내 좌표가 어느 위치에 있고 내 임무와 교회 임무는 무엇인지를 아는 역사의식이 있으면 문제를 달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지금 한국교회가 중세 시대와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둠이 깊기에 희망도 있다. 남 목사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있다"는 말을 인용했다.

교회 분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지만 현장에 있기에 감사

이제 인수인계한 지 한 달여 지났는데 정 목사는 아직 교회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담했던 교회의 이야기가 아직 머릿속에 꽉 차 있다. 잘 때도 밥 먹을 때도 교회 문제에 관한 생각이 멈추지 않는다. 한국교회의 왜곡된 구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것이 사무국장의 일이다. 하지만 안 좋은 사건을 주의 깊게 들으니 감정이 이입되어 덩달아 힘들다. 그들 문제는 대부분 간단하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힘을 얻기도 하지만 힘에 부칠 때도 있다.

어느 날은 너무 지쳐 상담하기 싫은 마음이 생겼다. 힘든 마음을 안고 강남제일교회가 여는 '양들을 위한 음악회'에 참석했다. 분쟁을 겪고 있는 강남제일교회가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다른 교회 교인들을 초대해 위로하는 자리였다. 음악회에 참석한 교인들이 "땅 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찬양하는데 눈물이 났다. 교회에서 불의가 이기는 것 같아도 감춰진 것들이 밝히 드러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교인들이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보았다. 교인들은 불의에 동조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무국장으로서는 일을 잘하기 위해 학자의 혀, 듣는 귀, 철면피 같은 얼굴을 달라고 기도했다. 개혁연대에 부임하기 전, 금식 기도를 하면서 마음에 이사야 50장에 나오는 고난 받는 종의 기도를 하라는 울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도는 곧 하나님의 정의를 잘 설명하고 잘 듣고 어떤 상황에서도 견디는 힘을 달라는 기도였다. 개혁연대 협동 사무국장으로 있는 지금도 그 기도를 하고 있다.

정 목사는 이제 뜨인돌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한다. 담임목사와 교인들이 정 목사에 대한 기대감을 내보이지만 부담스럽다. 그동안 개혁 운동을 하면서 했던 비판의 잣대를 자신에게 들이댈 생각을 하니 두렵다. 개혁 운동의 기운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긴장감 있게 매사에 임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단순히 목사라는 이유로 교인들이 교역자를 우대하는 것을 지혜롭게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목사와 교인이 하나님 앞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남 목사는 개혁연대 사무국장으로 오면서 두 가지를 생각했다. '아침에 즐겁게 출근할 수 있을까'와 '저녁에 보람찬 마음으로 퇴근할 수 있을까'였다. 지난 한 달여는 감사한 시간이었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없어졌고, 분쟁 교회 상담이 힘들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어렵고 답답한 얘기를 참고 오래 들어주는 것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 목사는 이제 더 이상 <뉴스앤조이>에 실린 교회 문제 기사를 읽고 화가 나서 씩씩거리고만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힘이 난다. 눈물 흘리고 답답해하는 대신 직접 개혁 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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