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백일이 안 된 아이가 끙끙 몸을 뒤틀다 뒤집는 걸 보면서 놀라고 행복해 뒤집어졌던 기억. 현승이 성장을 보며 잊을 수 없던 순간이었다. 성장과 발달. 먹이고 씻기고 재웠을 뿐인데 세워 안으면 끄덕끄덕 하던 목에 힘이 들어가고, 천장만 보던 아이가 뒤집고, 혼자 앉고, 배밀이로 기동력을 장착하는 것, '엄므, 엄므'하고 부르는 것.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몸과 마음이 발달하듯 신앙과 영성도 발달단계가 있다. 애 둘 쯤 키우고 나면 말이 조금 늦는다고 안달할 일이 아니구나, 알게 된다. 개인차가 있지만 결국 말을 하고, 응가를 가리게 되더라는.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성장한다.
유아세례 받았던 현승이가 2020년 송년주일에 입교를 했다. 아이의 신앙 발달의 변화가 블로그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섯 살 현승이는 무소부재 하시는 성령님께 총을 쏠까 고민했었다. 열다섯 살 현승이는 차별과 폭력을 그대로 두시는 하나님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열여섯 쯤 되었을 때, 사춘기의 정점에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운운하는 엄마 아빠를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교회를 싫어라 했고, 늘 분노에 차 있었다. "나는 하나님 안 믿어. 아빠가 목사니까 교회는 안 빠지고 가는 거야." 차라리 이렇게 말할 때가 낫다. 말보다 찰나의 눈빛, 그 강렬함이라니! 그 냉소의 눈빛은 좌우에 날이 선 검이 되어 내 마음을 베어냈다. 아이들은 내 말이 아니라 삶을 보고 배운다. 교회를 향한 실망, 그 이상의 절망, 절망 그 이상의 냉소는 내가 가르친 것일지 모른다. 강요로 얻는 건 강요하는 그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발심일 뿐임을 안다. 더는 혼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강압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엄마, 나 하나님께 실망했어."라고 말하면 "엄마도 가끔 그래."라고 공감해 줄 수도 있었다. 헌데 그 차가운 눈빛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목사 아들이니 교회는 빠지지 않고 가지만 하나님께는 가까이 가지 않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그 지점에선 심장이 툭 떨어지고 기도만 나왔다. 기도하기 때문에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기대는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신앙 발달,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났지... 이제는 제 몫이고, 그분과 현승이 둘 사이의 문제야, 하면서.
2020년 송년주일에 현승이가 입교를 했다. 자발적인 입교다. 신앙고백서를 썼다. 혼자 쓰고 입교를 집례 하는 목사인 아빠에게 제출했다. 현승이를 안고 나란히 서서 유아세례 받던 2003년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17년 후 목사가 되어 현승이 입교 집례를 하게 될 줄이야. 현승이 신앙 고백문을 읽으며 여러 대목에서 울컥했다. 유아세례는 우리 부부의 선택이었지만 입교는 현승이 자신의 선택이다. 부족한 내 삶과 신앙으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했다. 그런 마음으로 키우겠노라 다짐하며 유아세례를 선택했다. 입교는 아이이 몫이다. 내 삶과 신앙이 너무 큰 걸림돌이 되지 않길. 우리 아이들이 자기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에서.
신앙고백_김현승
나는 작년 그리고 제 작년에 입교를 받을 상황이 되었고 받는 게 시기상 맞았지만 받지 않았다. 스스로 입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믿음에 확신이 있고 하나님에 대해 의심할 부분이 조금도 없는 사람만 입교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주일학교 다른 형, 누나, 동생이 입교를 받는 것이 조금 섣불러 보였고 어리석게 보였다. 이런 내가 이번에 입교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내가 아주 간단하면서 어려운 사실을 하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확신과 의심에 관한 사실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에 대한 질문이 많이 있었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성경에 오점을 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을 것을 결과적으로 아셨을 것인데 그렇다면 왜 굳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놓으셨을까? 가룟 유다는 왜 스스로 죽었을까 부끄러움 때문인가? 가룟 유다가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 아닌가? 이렇게 성경에 대한 질문, 약간은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하는 질문을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생길 때마다 아빠에게 물어봤다. 아빠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처음에는 ‘엥’ 했지만 결국에는 ‘아’하고 이해가 되었다. 아빠랑 입교에 관해 얘기하던 어느 날 아빠가 내가 입교를 받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고 그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백 프로 확신이 없어도 입교를 받는 것도 괜찮다고 말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오래 생각해봤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백 프로 확신이 있나? 아니다. 그럼 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나? 맞다. 나는 확신이 없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많다. 성경에 대한 질문이 많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은 것도 많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이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힘들 때 좌절될 때 결국 내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이 힘들어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때, 유럽 여행을 가서 친구들 새로운 환경에 적응 못 해 두려워할 때 결국 나는 하나님께 나를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믿고 확신이 있다는 증거 같다. 나는 질문이 생기는 확신은 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의 말을 듣고 내 삶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니 내가 하는 하나님, 성경에 대한 질문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구나 싶었다. 내가 질문하는 이유는 못 믿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알고 싶어서 질문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고 믿는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 더 궁금하고 더 알고 싶다. 이번 입교 교육을 받고 입교, 세례에 대해 생각했던 기간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