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을 위해 집을 떠나는 남편을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 바로 집으로 올 수 없었다. 짧은 안식을 위해 남편과 함께 찾곤 하던 카페에 가서 얇은 책 한 권을 끝내고 돌아왔다. 나는 점심으로 동네에 국수 먹으러 가면서도 가방을 챙긴다. 남편은 늘 어이없어 하며 놀린다. 국수 먹으러 가는데 가방은 왜? 가방 안에 책은 또 뭐야? “아니이… 국수 먹고 카페에 갈 수도 있잖아…” (갈 일 없고, 가능성 제로!)“그냥 애착인형 정도로 생각해줘. 몸 근처에 책이 없으면 불안해서 그래ㅋㅋ"라고 이실직고. ㅜㅜ

책 중독이다. 중독은 늘 어떤 고통스러운 느낌을 피하고자 하는 선택이다. 감정과 영성을 강의하고 안내하는 일을 하면서, 이렇듯 감정을 피해 책으로 도망치는 짓을 한다. 자주 한다.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말이다.
 
차 안에서 남편이 묻지도 않은 마음을 꺼내 놓았다. 자신의 감정을 알겠다고.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느끼고 체험하고 있노라고. 수치심, 설교자로 목회자로 살면서 느끼는 수치심을. 죄책감, 마음이 무너진 어머니를 어떻게도 잘 도울 수 없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어떤 분노, 막막한 내일과 함께 오는 불안. 그 모든 감정들을 '느낀다'라고 했다. 안식월을 맞아 쉬러 가는데, 왜 그런 부정적 감정이냐 할 수 없다. 안식이 시작되어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다. 반갑고 고맙다. 그 모든 감정 꾹꾹 누르며 역할에 충실했던 시간, 잘 버텼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여기에 더해 나와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나려니 또 다른 힘든 마음이 된다고 했다. 전에 신대원 다닐 때 월요일마다 느끼던 그 감정이라고. "그건 슬픔이야..."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실은 나도 그렇다. 채윤이가 일곱 살이었던 그때. 월요일마다 기숙사로 보내고 울면서 음악치료 다니던 그때 그 감정이 문득 살아났다. 슬픔과 함께 그리움이었다. 감정을 만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없는 셈 치고 일에 매진하거나, 무엇에든 몰입하여 산다. 하지만 감정을 만나지 않으면 진실한 나로 살 수가 없다. 50이 된 남자 사람 목사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감정을 만나고, 이름 붙이고, 표현할 수 있다니. 자랑스럽고 고맙다.
 
남편 블로그 제목은 '아픈 바람'이다.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라는 홍순관 노래의 가사가 대문에 걸려 있다. 거기서 '바람'은 실은 감정이라고 말했다. 맞다. 감정은 끊임없이 바뀌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내가 붙들지만 않으면, 감정은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흘러간다. 나는 늘 감정을 강물로 표현하곤 하는데, 남편에겐 바람이었구나! 감정을 모른다고, 그래서 공감을 못한다고 평생 구박해왔는데. 남편은 원래 감정의 결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생애 후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발적 광야에 들어간 남편은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수치심에 죄책감에 불안에 분노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그 감정을 만나고 글을 쓰고 성찰하면서 살아 돌아올 것이다. 
 
남편을 보내고 카페에 가서 책 한 권을 뚝딱 하고 온 것은 어떤 감정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슬픔, 그리움, 연민, 분노, 불안... 이런 복합적인 것들인데. 실은 이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파고, 파고, 파고, 파보면... 그 뿌리는 모두 사랑에 닿아 있다. 그러니 이 불편한 감정들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불편해서 피하고자 하면 사랑도 잃게 되니, 아픈 바람을 나도 피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말하는 것이다.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뉴질랜드 남섬, 마운틴 쿡을 향해 가는 후커 밸리 트래킹 중. 그늘 없는 길을 걸어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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