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돌아와 일주일이 지나고 보니 뉴질랜드 남섬을 꿈에 봤던가 싶다. 탄성이 절로 터져나오는 大, 大, 大자연에 압도되었었는데, 이제 와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장면은 이 장면들이다. 사진은 대브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찍은 것이다. 달리면 본 풍경이라는 뜻이다. 저런 장면을 보고 싶었고, 시시각각 옆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자동차 뒷좌석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저 풍경,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떼의 풍경이 정말 좋았다.
여행에서 각자 역할 분담을 했는데, 유흥담당 '오락부장'으로서 음악에 심혈을 기울였다. 아침 음악, 저녁 음악, 달리는 차 안에서의 음악. 저 풍경 때마다 바흐의 칸타타 BWV 208 "양들을 평화로이 풀을 뜯고"를 듣고 싶었는데. 희한하게 그때마다 인터넷 연결이 좋지 않아서 결국 듣지 못했다. 저 풍경을 바라보면서 꼭 들었어야 하는데...
오늘은 비도 오고 하니 목소리 대신 피아노 듀오로 듣는 이 음악이 적절하다. 나의 하루, 그의 하루, 우리의 하루가 평화로운 시간이길 바라면서...
안식을 위해 집을 떠나는 남편을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 바로 집으로 올 수 없었다. 짧은 안식을 위해 남편과 함께 찾곤 하던 카페에 가서 얇은 책 한 권을 끝내고 돌아왔다. 나는 점심으로 동네에 국수 먹으러 가면서도 가방을 챙긴다. 남편은 늘 어이없어 하며 놀린다. 국수 먹으러 가는데 가방은 왜? 가방 안에 책은 또 뭐야? “아니이… 국수 먹고 카페에 갈 수도 있잖아…” (갈 일 없고, 가능성 제로!)“그냥 애착인형 정도로 생각해줘. 몸 근처에 책이 없으면 불안해서 그래ㅋㅋ"라고 이실직고. ㅜㅜ
책 중독이다. 중독은 늘 어떤 고통스러운 느낌을 피하고자 하는 선택이다. 감정과 영성을 강의하고 안내하는 일을 하면서, 이렇듯 감정을 피해 책으로 도망치는 짓을 한다. 자주 한다.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말이다.
차 안에서 남편이 묻지도 않은 마음을 꺼내 놓았다. 자신의 감정을 알겠다고.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느끼고 체험하고 있노라고. 수치심, 설교자로 목회자로 살면서 느끼는 수치심을. 죄책감, 마음이 무너진 어머니를 어떻게도 잘 도울 수 없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어떤 분노, 막막한 내일과 함께 오는 불안. 그 모든 감정들을 '느낀다'라고 했다. 안식월을 맞아 쉬러 가는데, 왜 그런 부정적 감정이냐 할 수 없다. 안식이 시작되어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자기 자신이다. 반갑고 고맙다. 그 모든 감정 꾹꾹 누르며 역할에 충실했던 시간, 잘 버텼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여기에 더해 나와 아이들을 두고 집을 떠나려니 또 다른 힘든 마음이 된다고 했다. 전에 신대원 다닐 때 월요일마다 느끼던 그 감정이라고. "그건 슬픔이야..."라고 이름 붙여주었다.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실은 나도 그렇다. 채윤이가 일곱 살이었던 그때. 월요일마다 기숙사로 보내고 울면서 음악치료 다니던 그때 그 감정이 문득 살아났다. 슬픔과 함께 그리움이었다. 감정을 만나는 일은 어렵다. 그래서 없는 셈 치고 일에 매진하거나, 무엇에든 몰입하여 산다. 하지만 감정을 만나지 않으면 진실한 나로 살 수가 없다. 50이 된 남자 사람 목사가 있는 그대로의 자기감정을 만나고, 이름 붙이고, 표현할 수 있다니. 자랑스럽고 고맙다.
남편 블로그 제목은 '아픈 바람'이다. "방금 나를 지나간 그 바람은 어떤 바람 됐을까"라는 홍순관 노래의 가사가 대문에 걸려 있다. 거기서 '바람'은 실은 감정이라고 말했다. 맞다. 감정은 끊임없이 바뀌고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내가 붙들지만 않으면, 감정은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흘러간다. 나는 늘 감정을 강물로 표현하곤 하는데, 남편에겐 바람이었구나! 감정을 모른다고, 그래서 공감을 못한다고 평생 구박해왔는데. 남편은 원래 감정의 결이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생애 후반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자발적 광야에 들어간 남편은 살아서 돌아올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수치심에 죄책감에 불안에 분노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그 감정을 만나고 글을 쓰고 성찰하면서 살아 돌아올 것이다.
남편을 보내고 카페에 가서 책 한 권을 뚝딱 하고 온 것은 어떤 감정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였다. 슬픔, 그리움, 연민, 분노, 불안... 이런 복합적인 것들인데. 실은 이 감정들을 피하지 않고 파고, 파고, 파고, 파보면... 그 뿌리는 모두 사랑에 닿아 있다. 그러니 이 불편한 감정들은 사랑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불편해서 피하고자 하면 사랑도 잃게 되니, 아픈 바람을 나도 피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말하는 것이다.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집에 가면 김치찌개가 끓여져 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으로 돌아온다. 긴 여행을 떠났다 집에 왔을 때, 김치찌개가 끓여져 있는 집이면 좋겠다. 몇 년 전, JP이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을 때, 여행 내내 체한 느낌으로 식사를 거의 못했다고 했다. 김치찌개였나, 김치말이국수였나. 집에 도착하는 시간에 딱 맞춰 준비했는데, 그걸 먹자마자 체기가 쑥 내려갔고 깨끗하게 나았다고 했다. 집은, 집밥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문제는 내가 집에 없으면 그걸 해줄 엄마가 없다는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왔는데, 깨끗하게 청소된 거실에 채윤이 마음이 담겨 있었다. "청소는 해놨네!" 기특하고 대견하다 싶었는데. 주방에 가서 놀랐다. 가스렌지 청소까지 해놓은 것이다. 하이고, 이건 대견한 것이 아니고... 나마스떼!다!! 보글보글 끓는 김치찌개 남비가 올려져 있는 가스렌지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답다. 내가 가르치지 않은 예쁜 짓, 생각지 못하게 마주한 아이들의 선함에 경외감을 느낀다. 주말에 집에 왔다 간 현승이는 화장실 청소를 해놓았다고 한다.
JP와 나누는 대화가 대부분 좋지만 남들은 안재미, 우리만 재미있는 농담따먹기가 참 좋더라. 뉴질랜드 컵에 모닝커피 마시기로 했는데, 오늘의 원두는 큰아들 또는 작은아들이다. 뉴질랜드에서 가져온 두 개의 원두에 붙인 이름이다. 원두를 선사해준 각각의 두 가정을 우리끼리 그렇게 부른다. 뉴질랜드에는 두 아들이 있는데, 우리 아들이 아니라 이번 뉴질랜드 원정대 대장이셨던 '서쉐석목짠님'께서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다. ㅎㅎ 뉴질랜드 펠로우십교회와 교회를 개척한 이들에게 쏟는 목짠님의 정성과 애정, 또 목짠님을 따르고 존경하는 그들을 보면 영락없이 아버지와 자녀이다. 그 사랑의 덕을 우리 부부가 보았다.
뉴질랜드 남섬 대자연이 봉기하여 결혼 25주년을 축하해주었다. 눈 앞에 펼쳐진 풍광에 감탄사보다 먼저 나오는 소리가 "이거 실화냐!"였다. 사진 무지 많은데, 눈으로 본 감동을 다 담을 수가 없었다. 차차 공개해 볼 예정. 그리고 저 컵 얘긴데. 오른쪽은 2년 전 뉴질랜드 코스타에 갔던 JP가 사온 것이고, 왼쪽은 이번에 사온 것이다. 다녀오니 보이는 게 있다. 두 컵에 같은 새가 그려져 있고, 저 새와의 만남은 마주했던 어떤 풍광보다 깊고 진한 감동으로 남아 있다. 이 얘기도 차차 공개할까, 혼자만 간직할까 생각 중이다.
뉴질랜드 여행에서 돌아온 밤. 집에 계시지 아니하시는 딸 아드님 대신에 현관 앞에 기다란 박스 하나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뭣이다냐? 미나리도 한 철! 이 계절에만 나온다는 한재미나리가 마중 나와 계신 것이었다. 첫 끼니로 떡볶이를 했다. 요즘 계속 국물떡볶이를 밀고 있는 중인데. 당면을 넣고 바짝 졸여서 끈적한 떡볶이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미나리 먹기 위한 소스인 셈이다. 떡볶이에 아삭하고 향긋한 미나리 섞어서 맛있게 먹었다. 뉴질랜드 남섬 양고기... 까지는 아니어도… 살살 녹는 맛이었고! 저녁으로는 초무침을 했다. 증말... 내가 무쳤지만 감동의 맛이다! 내가 만들고 폭풍흡입 했다. 내 솜씨를 사랑한다! 늘 이때 서프라이즈~ 미나리를 보내곤 하시는 나의 은경샘, 귀국 날짜에 딱 맞춘 것도 야심 찬 서프라이즈였을 것이다. 이런 계획을 도모하면서 혼자 좋아서 헤헤 웃으시는 것도 다 보인다. 미나리의 마중은 감동, 만사가 감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