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아직 아기인데 그런 생각을 해보냐 할 지 몰라도...

나는 생후 36개월 까지의 모습이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은, 진정으로 타고난 기질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채윤이만 해도 '부끄러워' 라는 말을 하면서 주변을 인식하는 사회성이 많이 발달했기 때문에 벌써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암튼, 더 자라면서 관찰할 일이지만 환경의 양육방식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생애 초기에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두 아이가 자라서 자기를 찾아갈 때 매우 유용하게 쓰일 거라는 생각이다.


일단 지금 보이는 두 아이의 행동은 외향형에 가깝다. 사람 많은 것 좋아하고 비록 낯가림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낯선 환경에 가서 적응하는 시간이 짧다. 목소리 크고 자기표현이 정확하다. 이런 걸 떠나서 엄마빠가 느끼는 느낌이 그렇다. '둘 다 정신실 아들 딸이야. 내 딸, 내 아들 아니야' 라고 아빠가 자주 말하는데 아이들에게서 '외향형'의 냄새가 강하게 날 때 그렇게 말한다.


채윤이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보통 구체적인 사실을 암기하기인 것 같다. 그래서 언어발달이 빨랐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어른들이 쓰는 단어도 일단 한 번 들으면 절대 까먹지 않는다. 아주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이름 (자기 친구들은 물론이고 어른들의 이름까지도) 기억을 잘 했고 한 마디로 말해서 '별걸 다 기억하는 여자'다.


요즘 한참 인지가 발달하는 김현승을 보면서 '이해하는 수준이 채윤이와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말하자면 표현언어의 발달은 채윤이보다 훨씬 느린데 말을 이해하는 게 때로는 놀랍다. 할아버지가 늘 하지는 말씀이 '다 알아 들어. 참 내! 다 알아들어' 이러신다. 오늘 남편과 함께 얘기하다가 채윤이는 S(감각형)고 현승이는 N(직관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두 녀석이 정보를 수집하는 방식이 그렇게 확연하게 다르게 느껴지니 말이다.^^


인형놀이나 스킨쉽에서 보여지는 것으로 현승이는 F(감정형) 채윤이는 T(사고형)에 가깝게 느껴진다.


아직 많이 드러나지 않은 것이 네 번째 생활양식인 듯한데....채윤이는 일단 P(인식형)에 가깝고 현승이는 J(판단형)에 가깝게 보인다. 이건 좀더 두고 볼 일이다.

채윤이 현재 45개월, 현승이 15개월. 일단 추정되는 성격유형.

김채윤은 ESTP 또는 ESTJ.

김현승은 ENFJ 또는 ENFP.


아빠는 INTJ 엄마는 ESFP.

그래서 세 E를 감당하기에 아빠의 에너지가 역부족인듯 보일 때가 있다.^^



김인아 : 우리 남편은 자신의 에너지에 스스로가 지쳐..ㅋㅋㅋ (04.08.02 15:41)


정신실 : 푸하하하...그렇지! (04.08.02 15:52)


김종필 : 우아하하 현웅 형! 대단하십니다요! (04.08.02 23:13)


이지희 : 어.. 나 ESTP였는데.. 채윤.. 역시..언니랑 닮았어..ㅋㅋ (04.08.02 23:20)


 정신실 : 그러니? 지희?^^ (04.08.03 08:53)

더 지나면서 지켜봐야겠지만,

채윤이는 S, 즉 감각형으로 추정이 되고, 현승이는 N, 직관형으로 추정이 된다.

두 아이의 노래 지어 부르는 걸 보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음악치료사 딸 아들이라서 노래 지어 부르는 건 거의 음악치료사 수준인데....


감각형 채윤이는 이렇다.

자신의 귀(감각)로 들은 것에 충실하게 노래를 지어부른다.

즉, 새노래를 배웠는데 노래를 모르겠으면 노래 가사 전체의 맥락보다는 자신의 귀에 들린 대로,

그 발음에 가장 충실하게 일단 불러 재낀다.

감각으로 얻은 정보에 충실하고 숲보다는 나무를 보는 감각형 채윤이의 song writing!


'천국은 마치 마태같은 인보와(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

'숟가락 무릎에 강물처럼 말쎄(숲처럼 푸르게 강물처럼 맑게)'

'호까인형을 가르치는 호까인형을 가르치는(   )' 이런 식이다.


반면 현승이는 이렇다.

일단 모르는 가사가 있으면 나름대로 채워서 부르되 앞 뒤 뜻을 연결 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직관형들이 흔히 하듯 숲을 본다는 것이다.

'사과같은 내 얼굴'의 '사과'가 생각이 안 날 경우,

'바보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라고 불러서,

자신이 모르는 가사 다음에 나오는 '~같은'에 적절하게 어울리는 가사를 집어 넣는다는 얘기다.


아니면,

'도는 도는 도깨비..............'하고 노래를 부르는데,

'파는' 하고 시작하길래 귀를 쫑끗하고 들었다.

'파는.....

.

.

.

.

파깨비'란다.

이렇게 큰 틀에서 창작을 해낸다.


참, 이렇게도 다르다.^^

나 책 한 권에서 너무 뽕을 빼는 것 같다. ^^;;

<사람 vs 사람>에서 심은하와 김민기를 주제로 쓴 글에서는 융이 말하는 내향과 외향에 대한 정신분석적 설명이 있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내용이라서 정리해 두려고 한다.


우린 보통 수줍거나 말이 없으면 내향적이고, 사교적이거나 적극적이고 활달하면 외향적이라고 얘기하지만 본래의 정신분석적 의미는 좀더 정교하다. 내향성/외향성의 분류는 정신분석가 융의 이론에 의한 것이다. 융은 심리학적 유형의 하나로 인간을 '외향형'과 '내향형'으로 구별하였는데, 그들은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어떤 사람의 행동과 판단을 결정하는 기준이 주로 객체에 의한 것일 때 그의 태도는 외향적이며, 반대로 객체보다도 주체에 의해 결정되면 내향적이라고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미술전람회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면서 신문의 호평이나 화가의 지명도에 근거해 특정한 그림을 좋다고 평가를 내린다면 그의 태도는 외향적이다. 객관적 규준에 따라서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평이 좋고 그 화가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해도 자신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판단한다면 그의 태도는 내향적이다. 그의 판단기준은 주관적 측면이 객관적인 사실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다.

두 유형이 가지는 차이점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우연히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외향형과 내향형이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외향형의 사람은 모차르트의 내력과 세계적인 명성, 음악평론가들의 평가 등에 관해 이야기하는 데 반해 내향형의 사람은 주로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자기의 느낌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같은 음악가를 좋아한다는 기쁨도 잠시, 외향형인 사람은 내향형인 상대방이 의외로 모차르트에 대한 지식이 너무 빈곤하다고 실망하고, 내향형은 외향형인 상대방이 공연히 지식만 늘어놓고 아는 체하지만 실상은 모차르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똑같은 내향령이라고 그 안에서 다시 수십 가지의 심리유형을 보일 수 있지만, 정신의학적으로 내향형의 가장 큰 특질은 '내면에의 깊은' 통찰이다.

요즘은 주일 아침예배 때 짧은 기도시간에 생각지 못했던 통찰들이 주어집니다.
그게 바로 은혜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일주일의 삶을 돌아보면서 나와 내게 주신 사람들 공동체를 떠올리다 보면 이런 저런 좋은(?) 생각들이 마음에 차 오릅니다. 그 때 그 때 글로 잘 남기지 못해서 흘려버리는 것들도 많이 있지만요...

한동안 MBTI로 볼 때 완전히 반대유형인 남편을 보면서 혼자 뒤집어지고 엎어지고 난리 부르스였습니다. 글래서 박사의 <결혼의 기술>이라는 책을 공부할 일이 생겨서 읽고 있었는데 그 영향인듯 싶기도 하구요. 글래서 박사 역시 사람들이 가지 고유한 '욕구 프로파일'이라는 심리적인 특성들을 말하는데 대체적으로 이것이 맞는사람끼리 살아야 한다는 주의였습니다. 결혼하기 전에 상대방의 욕구 프로파일을 잘 살펴보고 맞춰보라는 것이었죠.
그걸 공부하다보니 정서표현이 자주 안 하는 NT 김종필씨에게 서서히 화가 나기 시작하더니만 혼자 생각에 빠져가지고 가만히 있는 김종필씨 쪼아대고 난리가 났었습니다.

MBTI 끝에서 삶을 비추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ESFP 조차도 마음이 마구 마구 메말라 있을 때 기쁨이고 뭐고 없습니다. MBTI 끝에서 만난 분은 성령님이셨습니다.
사랑, 기쁨, 오래 참아주는 것, 화평케 하는 것, 자비로움, 착함, 규모 있는 삶, 충성스러움.....로 마음을가득 채워주시는 분. 지난 주일 성가대 찬양이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을 편곡한 곡이었는데 '메마른 땅에 단비를 내리시듯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생명 주옵소서'가 메마를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MBTI로 아무리 내 마음을 알았다해고 결국 얻을 수 없는 천국의 마음. 그것은 성령님께로부터만 오는 선물이었습니다.

성령의 충만함.
MBTI로 드러난 나의 장점과 약점 위에 단비를 촉촉히 내려 풍성하게 해 주시는 분.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하게 넘치는 삶을 기도합니다.
 
보물 Level 1 자유로움을 경험하다

MBTI와의 첫 만남 이후, 짧지 않은 ‘내면으로의 여행’을 통해서 흔히 말하는 나의 유형(true type)을 찾았다. 자타가 함께 인정하는 나의 유형을 찾은 이후에, 말하고 행동하는데 전에 알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맛보게 된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를 알았을 때, 내 마음에 충실한 행동을 할 수 있음이 나를 한 없이 자유롭게 한다. 부모님이나 주일학교 교육의 요구에 의해 ‘나’인줄만 알고 살았던 버거움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만으로 족했다. MBTI와의 만남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였다.

보물 Level 2 장점을 은혜로 알게 되다

나는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잘한다. 고로 나처럼 공동체에 필요한 여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람들의 사소한 것들을 잘 기억하고 챙긴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남달리 충만한 사람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잘 해주고 칭찬을 잘 한다. 고로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다. 나는 융통성이 있어서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수용을 잘 해준다. 고로 나는 인격이 훌륭하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둘 깨지기 시작했다. F인 나로서는 사람들을 칭찬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다는 것. SF인 나로서는 도대체 정보라는 것은 사람들에 관한 사소한 것들 외에는 잘 입력되지도 오래 기억되지도 않는다는 것. P인 나로서는 상황상황에 융통성을 발휘하지 말라고 하면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공동체에서 분위기를 좀 띄울 줄 아는 것은 ‘재미’가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ESFP인 내 자신에 충실하며 나 자신이 재미있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는 것.
점차로 이런 것들이 깨달아져 갔다. 예전에 나 스스로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 유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게는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이 지옥 같은 삶이었을 것이니, 내 장점 안에서 ‘나의 공로’는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그것은 내 본성 안에 숨기신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었다. 이것을 발견하고는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제껏 내 것이라고 생각한 내 인격의 부분들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이었음을 MBTI가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보물 Level 3 나도 모르던 속마음을 알게 되다

칭찬하지 않는 사람들은(T) 무조건 사랑이 없는 사람이다. 소그룹 모임에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사람들은(I) 대부분 내숭떠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고 늘 원론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N) 진실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사람과는 얘기할 맛이 안 난다. 시간 좀 안 지켰다고 열 받고 화내는 사람들은(J) 인격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사람들이다.

나도 모르게 내 생각 깊숙한 곳에 있었던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각들이었다. 겉으로는 문제없는 듯, 모든 것을 수용하는 듯 대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렇듯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밀어내고 있었다. MBTI는 내가 형제 자매들을 어떤 잣대로 바라보고 정죄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하였다.

보물 Level 4 죄를 깨닫게 되다

혼자 있는 시간을 주님과의 깊이 있는 교제의 시간으로 만들지 않고 끊임없이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서 관계를 찾아 가기.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이라는 피드백이 없으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누군가의 칭찬에 의해서만 일을 하고 움직이기. 진지하고 지루한 얘기들은 무조건 듣지 않고 귀를 막아버리기. 충동적으로 시간을 쓰고 충동적으로 구매하며 규모 없는 삶을 살기.

결국 MBTI는 ‘나’라는 독특한 존재가 독특하게 범하는 죄를 깨닫게 하였다. 내 영성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 역시 바로 내 성격유형 안에 숨겨져 있었다. 이것을 깨닫고 나서는 깊이 회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영성의 길을 걷는 것이 한결 수월해진 것이다. 내 안에 있는 아군과 적군을 모두 알았으니 그 싸움이 손에 잡힌 것이 아니겠는가?

보물 Level 5 믿음은 기질을 뛰어 넘는다

이렇게 MBTI를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장점이 있는 그 지점에 바로 내 약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때론 좌절스럽다. 저 사람과 내가 이렇게도 다르게 생겨 먹었는데 어쩔 것인가? 나와 정반대의 유형을 가진 저 사람과 대체 어느 지점에서 만나서 대화와 삶의 일치점을 찾을 것인가?

그 때 들어야 하는 한 마디가 있었다. ‘믿음은 기질을 뛰어 넘는다!’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낼 줄 아는 사람은 언젠가 이렇게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형제자매를 위해서 기질을 한 번 두 번 뛰어넘던 우리들은 주님과 더불어 MBTI 검사결과를 볼 날이 있을 것이다. 그 분의 온전하심 같이 우리도 온전해지는 그 날에 우리 모두의 MBTI유형은 EI-SN-TF-JP!! 이것이 되지 않을까?

<MBTI와 공동체 세우기> 마지막 글
QTzine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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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천국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 -NF기질

청년부 회장 L씨는 청년부의 모임과 뒤풀이가 어때도 상관없다. 때론 모임이 좀 학술적이어도 좋고, 때론 놀자판이 되어도 좋다. 출석률이 저조한 것도 그러려니 할 수 있고 임원들이 좀 열심을 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으니…, '모임이 쓰잘 데 없이 되는 것, 즉 모임이 의.미.없이 흘러가는 것!' 그것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다. L 회장은 때로 진지하게 말씀에 대해서 나눌 수도 있다. 어떤 때는 속이 없는 사람처럼 푼수 짓을 해서 사람들을 웃길 수도 있지만 푼수가 되는 그 순간에도 L회장의 목적은 하나다. '의미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

이제껏 소개한 세 가지 유형(NT, SP, SJ)에 비해서 NF 유형에 대한 설명은 좀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NF들은 이상적인 것 외에는 관심이 없다고 한다. NF들의 목적은 너무 이상적인 것에 있기 때문에 그들 자신조차도 그 목적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세 유형들이 NF와의 대화에서 보다 더 어려움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한 SP가 NF와의 오랜 대화를 마치고 마음에 떠오르는 한 마디가 '천국의 언어를 말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반면 좀 통하는 NF들끼리의 대화는 '쩍하면 짝이고' '어하면 아'하고 알아듣는다니 NF들은 천국의 사람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NF들의 기본적인 욕구는 자아실현 내지는 자아통합이다. 이것은 독특한 자신만의 주체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검증은 아마도 따뜻한 관계들 속에서 오는 피드백을 통해서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NF들에게는 남달리 정서적 유대 내지는 정서적 관계, NF들 자신의 표현방식으로 말한다면 '의미 있는 관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NF들은 공동체 안의 따뜻한 햇살이다. 정서적인 교류에 대한 남다른 욕구와 감각이 있는 만큼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고 보살피는 역할을 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불사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NF일 것이다. SJ들이 끝없는 책임감으로 공동체를 지켜나간다면 NF들은 자신이 가진 어떤 것도 아끼지 않고 무한히 공동체를 향하여 자신을 통째로 쏟아 부을 것이다. 흔히 좀 다루기(?) 어려워서 대부분의 조장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폭탄 조원이 있다하자. 이 폭탄을 어느 NF 조장이 맘먹고 찍었다 하자. 아마도 그러면 다른 어떤 조장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깊은 관계를 만들어 가면서 그 폭탄을 무장해제 시키고 공동체 안으로 정착시켜 놓고야 말 것이다.

NF들에게는 '의미'가 중요한데 그 '의미'는 NT들의 것처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의미'가 아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부여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의미'를 추론하는 과정과 결론이 다른 사람에게는 숨겨진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게다가 NF들이 유형의 특성상 조목조목 따져서 잘 설명을 하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 같다. NF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여 결정하는 것들이 다른 유형에게는 '그 때 그 때 다르다'고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일의 리더가 NF라면 자신의 의미법칙에 충실한 결정에 아랫사람들은 '일관성이 없는 결정'이라는 불평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또 이것이 반복되다보면 혹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비쳐지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진실한 자아의 통합, 진실한 관계'를 삶의 목적으로 하는 NF가 '진실하지 않다'는 평은 최악의 평이 아니겠는가? NT들에게 '무능하다'라는 평은 가급적 삼가 해야 하는 것처럼 NF에게 '진실하지 않다'라는 평도 극도로 피해야 할 말이다.

NF들이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용어들을 좀더 다른 사람들의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노력 없이 살아갈 때 이 땅에서 하늘의 삶을 사는 힘겨움이 남다를 것이다. NF들에게 교회를 포함한 이 세상은 너무도 가볍고,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듯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 안에 있는 이상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될 때 더욱 빛을 발하고 더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겠다.
QTzine 4월호 <MBTI와 공동체 세우기
 

갑자기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져 사람들이 집을 향해 걷는 걸음이 빨라지는 수요일 저녁. 이런 날 잡혀있는 기도회 모임이 그나마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다면 그건 아마도 SJ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늘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한 번 맡은 일에 대해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책임을 다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SJ들이다.
SJ들이 있어서 연말이면 개근상 받을 사람들이 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우리의 모임은 늘 최소한의 인원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SP들의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성경공부 시간은 빼 먹지 않고 시간을 채우게 될 것이며, 공작에 실패한 SP들은
결국 혼자 '땡땡이'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

SJ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단어를 찾으라 하면 '의무'이다. 이들의 남다른 욕구는 어딘가에 '소속' 되는 것, 그리고 그 소속된 곳에서 '의무'를 가지며 그 '의무'를 지켜나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자유롭고 독립적이고 충동적이기를 원하는 SP들과는 상반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SP들이 일을 해도 노는 것처럼 보인다면 SJ들은 놀아도 일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SJ들의 관심은 자신이 늘 의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것처럼, 자신이 속한 공동체도 해야만 하는 것을 하기 원하기 때문에 전통이 지켜지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련회나 특별행사를 계획하는 임원 모인에서 SJ들은 '작년에도 이렇게 했으니까, 늘 이렇게 해 왔으니까' 하면서 이제껏의 방식을 유지해 나가기를 원할 것이다. SJ들이 그렇게도 예전의 방식, 전통을 따르고 싶은 이유는 이것이다. NT들이 자신의 유능감을 확인하는데서 안전함을 느끼는 것처럼 SJ들은 자신이 어딘가에 속해 있고 그것이 흔들림 없다는 것을 확인할 때 안전함을 느낀다. 잦은 변화는 흔들림 없는 소속감을 그야말로 흔들어 놓는 듯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보배라 불린다. 결석이나 지각이 별로 없이 늘 자리를 지켜주는 SJ 구성원들이 많은 소그룹의 리더에게는, 그들이 얼마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는가!게다가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SJ들은 상사나 웃사람의 권위를 인정하고 잘 복종하는 사람들이다. 또 보호자적 기질인 SJ들은 한결같이 충성스럽게 공동체를 섬기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소그룹의 리더들이 역시 또 욕심 부릴 일이 아니다. 소그룹의 다수를 SJ로만 구성한다면 그 그룹은 때로 조금은 지루한 모임이 될 지도 모르며, 늘 일을 하듯 모임을 하고 일을 하듯 모임의 뒷풀이를 해야 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SJ 리더라면 자신이 소그룹을 이끌어 가는 방식이 다분히 일중심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조원들을 지나치게 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SJ의 수준에서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통제의 수위는 대부분의 SP들과 어떤 NT 또는 NF들에게는 보다 심한 압박(?)으로 느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SJ들에게 좋은 격려는 '일을 잘했다', 즉 이들의 '노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다. 최선을 다해서 수련회를 준비하고 마치고 뒤처리까지 확실하게 해내는 SJ총무를 그냥 돌려보내지 말 것이다. 그가 꼼꼼히 준비하고 진행한 수련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잘 치러졌는지에 대해서 한 마디 격려의 말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SJ자신들은 열심히 근면하게 노력하는 삶 속에 하나님이 일하실 틈을 남겨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이 지상 목표가 되어 혹 하나님의 은혜가 설 자리 조차 스스로 밀어내는 것은 아닌지 자주 돌아보면 어떨까? 하나님께서는 SJ들이 맡겨진 많은 일들을 완벽하완벽하게 끝까지 책임지기 전에 이.미. SJ들을 보배롭고 가치있게 여기신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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