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과연 부부의 성을 공개적으로 타인에게 드러내고 말하는 것은 어떤가? 그것이 과연 독자들에게 의미 있고 유익하게 읽혀질 여지가 있을까? 여러 논의 끝에 우리 두 사람은 기독교세계관에 흠뻑 젖은 부부의 성 얘기를 공개하기로 했다. 남편이 설득하고 아내가 수용한 형국이라 아내에게는 정말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성을 말하기 :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
JP
결혼을 몇 주 앞둔 즈음에 장모님께서 우스개 소리로 하신 말씀이 있었다. “결혼을 하기로 했으면 얼른 해야 되는디... 왜냐하면 남자가 힘들거든. 어이구~ 김서방 얼굴에 살빠진 것 좀 봐!” “? ...” 정말 그랬다. 보는 사람들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안됐냐고 한마디들 했었으니까.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친구, 선,후배 할 것 없이 죄다 하는 말이 “야~ 얼굴 좋아진 것 좀 봐라!” “형! 결혼하고 나니 굉장히 자신감 있어 보이는데?” “아니! 칙칙한 예전의 오빠의 모습이 어디 갔지?” 하며 결혼의 위대함을 찬미하곤 했었다. 아내도 그런 내 변화를 두고 지금도 종종 놀려대곤 한다. 아니! 도대체 내 이미지가 어땠길래?
총각 때 모습을, 기억을 거슬러 더듬어 보니 참으로 우습기 그지없다. 소심국의 황태자라고나 할까? 나는 큰 키에 비해 몸매는 참 못났다. 비쩍 마른 상체에 비해 허벅지는 꼭 운동선수 같았고 게다가 자존심은 또 얼마나 강했던지, ‘매력 없음’으로 인한 콤플렉스에 적잖이 시달렸던 것 같다. 그리고 가슴이 떡 벌어진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었던지! (그건 뒤집어 보면 성적 자신감의 결여와 다를 바 없다!) 매력적으로 보이고자 한 갈망과 매력 없음이라는 현실적 자가진단의 아슬아슬한 불협화음은 사실 ‘성의 은폐와 성의 승화’ 사이에서 엇갈리는 부조화의 소음과도 같았다. 그리고 성적 욕구의 분출과 신앙적 교훈의 검열이라는 치열한 싸움과 부조화는 내게 있어서 ‘칙칙한 삶의 양태’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조심스러운 판단이지만, ‘칙칙한 남자들’은 대개 성적으로 소심한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내 모습은 결혼 초에 ‘과연 아내가 나에게서 성적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을 갖게끔 했다. 이제 욕구는 원할 때마다 대개는 충족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욕구 뒷면에 붙어있는 또 다른 욕구인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의 인정’이 사뭇 궁금해졌다. 육체적 매력 없음과 그로 인해 꼬여버린 내 자아상 모두 말이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말로 나오던가! 성적 욕구는 대책 없이 때가 되면 솟아나건만 어째서 ‘그 일’은 늘 미완의 아쉬움으로 남는 것인지... 왜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고, 어찌하여 영화(와 소설) 속 장면들만이 끊임없이 나를 속이려고만 하는 것인지... 나는 왜 아내 앞에서 나를 위장하는 일로 에너지를 소비해야만 하는 것인지... 무엇보다도 답답한 것은 대화의 물꼬를 틀 방법을 도무지 찾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다가 아내가 우연한 기회에 목사님 댁 서재에서 책 한권을 발견했는데, 우리는 지체없이 그 책을 구입했고 즉시 연구(?)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책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은 기독서적들에서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것들과는 달리 추상적 원리가 아닌 실제적 지침을, 거룩한 설교가 아닌 뜨거운 경험담을, 절제로서의 성 의식이 아닌 즐거움으로서의 성 놀이를, 그 밖에 우리가 궁금해 하는 것들의 대부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 책을 함께 읽는 것을 계기로 성생활에 대해 서로가 기대하던 바를 조금씩 진실하게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물꼬가 터진 대화는 마침내 마음속에 쌓아 두었던 두려움과 거절과 불신의 담들을 휩쓸어 갔고 우리는 성생활이라는 바다를 즐.겁.게. 항해할 수 있게 되었다.
SS
신혼 초 얼마 안 됐던 기간 동안 나는 꽤 답답함을 느끼며 지냈던 것 같다. 남편에게 하고픈 말은 가슴에 많이 쌓여 있는데 그게 말로 잘 나오지 않는 답답함이었다. 어떤 말들은 남편을 비난하는 말이 될 것 같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말이 될 것 같고, 어설피 말하면 내게 되돌아 올 화살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을 꺼내서 솔직한 대화의 장으로 나가기 어려웠던 것 중 하나가 ‘성’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런 부분에서 적극적으로 의사를 개진하는 것’이 여성으로 별로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 문화로부터 알게 모르게 배운) 의식과 더불어 생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말들이기 때문이었으리라. ‘성’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한다는 자체로 죄의식을 가지게끔 자라왔으니까. 거기다가 결혼 전 교제시절 ‘스킨십’에 대한 고민과 죄의식(?)의 기억까지 더해져서 말이다.
그런 답답함과 숙제들을 안고 <그리스도인의 애정생활>을 함께 읽기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 책을 읽을 때는 한 사람이 먼저 읽고 기다렸다 다음 사람이 읽는 방식이 보통인데 이 책은 침대에 누워 한 권을 가지고 함께 읽는 방식을 택했다.(이 대목에서 독자들 혀를 차겠군요. 신혼부부가 침.실.에.서 독.서.를 하다니!!!!) 이것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책 자체의 탁월함은 물론이거니와 두 사람이 ‘성’에 대한 한 권의 텍스트를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함께 본다는 방식에 있어서 말이다. 책의 내용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독서방식 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비닐로 싸인 19세 미만 구독 불가의 책이다. ‘기독교서적에 <19세 미만 구독 불가>의 책이 있다니?’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19세 미만의 모든 책은 불온서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깨준 책이기도 했다. 또 이것의 의미는 ‘결혼’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성적 자유’를 부여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용 자체가 그리 새롭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 책은 우리부부의 성에 대한 대화에 ‘자연스러움’이라는 선물을 준 것 같다.
책에서 주는 정보를 가지고 시작한 대화는 점점 그 주어가 ‘나는’으로 명확해 지면서 우리 자신의 두려움, 답답함이 서서히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정작 남편이 자신의 두려움을 하나 씩 내게 말했을 때 내게 아무런 문제되지 않는 것들이었고, 나 역시 두려움을 가지고 남편에게 건넨 말들이 이해되고 수용되는 것 느낄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한편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성’에 관한 정보가 얼마나 보잘것 없고, 때로는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었던지를 알게 되었다.
구성애의 아우성이 아무리 명강의라 한들 자발적으로 읽고 토론하며 참여하는 세미나식 수업만 하겠나? 세미나식 성교육! 그거였다. 돌이켜 보면 신혼 초 책읽기를 통한 ‘성’에 대한 정면돌파는 우리 부부에게 단지 성문제에 국한 되지 않고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해서 언제든 진실한 대화로 풀어가기’의 원칙을 세우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것 같다.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연습은 내게는 참 필요한 훈련이다. 이 때의 대화는 개인적으로 내게는 솔직하게 말하기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가시게 해 준 것 같다. 침실에서는 물론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평등한 부부되기를 추구해 갈 수 있도록 구체적 방식들을 보너스로 얻기도 했던 것 같다.
일상으로서의 성, 놀이로서의 성 : <야야툰>
SS
나는 늘 유머를 추구하며 수시로 낄낄거리고 깔깔거리길 좋아한다. 근엄하게 드리는 예배시간에도 내 뇌의 한 영역은 유머를 찾아 활발히 활동한다. 그러나 솔직한 대화의 물꼬가 터졌다고는 하지만 순식간에 ‘성’에 대한 부담감이나 두려움, 막연한 죄책감 등에서 완전한 자유로 옮아가지는 못했다. 조금씩, 조금씩 자유로워지고 여유가 생겨갈 무렵 손에 넣게 된 책이 홍승우의 <야야툰>이라는 만화책이다.
이건 적나라한 그림의 만화다. 한겨레신문에 <비빔툰>이라는 만화를 연재하고 있는 홍승우가 신문에 그릴 수 없는 부부간의 성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것이다. (앞으로 소개할 기회가 있겠지만) 작가 홍승우의 <비빔툰>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30대 부부의 일상이 덜함도 더함도 없이 드러나는 만화다. 더도 덜도 아닌 일상이 그렇게도 감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 매번 보면서 놀라운 만화이기도 하다. <야야툰>은 주인공 정보통과 생활미의 성생활 이야기이다. 처음 만화를 펼쳤을 때, 그걸 보는 내 눈을 의심할 만큼 그림이 적나라하고 충격적이었다.(이 글 나가면 <야야툰> 잘 팔리겠는걸...)
그러나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에게는 신문에서 <비빔툰>을 보는 정도의 감흥 이상이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좀 신선한 점이라 하면 다른 부부의 침실을 훔쳐보는 짜릿함 정도일까? 왜일까? 그렇게도 적나라한 그림들이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은 작가 자신이 <야야툰>에 그리는 성은 <비빔툰>에서 그리고 있는 일상의 연장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만화를 보는 우리 부부 역시 ‘일상의 미학’의 범주로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성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30대 부부의 침실을 엿보고 나서는 나는 훨씬 더 여유가 생긴 것 같다. 부부가 함께 하는 재미있는 ‘공부하던 성’에서 ‘놀이로서의 성’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그래서 폴 스티븐스는 <영혼의 친구 부부>에서 ‘성’을 ‘부부놀이’라고 표현 했나보다.
JP
익살녀인 당신이 진지남인 내게 그 책을 들이밀던 날 내 표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요? 아니 돈 주고 이런 책을 사오다니... 글쎄, 남의 부부의 침실을 들여다보는 거,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어느새 손은 슬쩍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지요. 그러다가 소리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 앉아 배꼽 움켜쥐고 눈물도 닦으면서 낄낄거리며 책을 읽었던 게 생각나요. 공부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심지어 놀이와 성도 늘 진지하고 의미 있게 하려고만 드는 내게 당신과 당신이 권한 <야야툰>은 오늘 여기서 일상을 즐기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군요. 비록 집에 TV는 없지만 TV보다 재밌는 당신이 있어서 난 정말 일상이 즐거워요.
성찬예배와 성 : <영혼의 친구 부부>
JP
허무개그 하나 :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하시던 전도사님과 선배누님이 결혼했다. 은밀하게 데이트를 즐겼던 두 분이 폭탄선언을 한 후 일사천리로 결혼식이 거행됐다. 축복 속에 결혼식을 마친 두 분은 청년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이제 두 분은 청년들 앞에 앉아 청문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여러 질문들이 오가고 드디어 모두가 기다렸던 핵심질문을 누군가 터트린다. “신혼 첫날 밤 얘기해 주세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윽고 전도사님의 입이 열린다. “손잡고 기도하고 그냥 잤어” “뜨아~” “그럼, 둘째 날 밤 얘기해 주세요!” “성?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도 재미없더군. 결혼하면 다 알게 돼. 자, 오늘의 본문은...” “에에~”
대한민국의 모든 전도사님들이 모두 이럴 리야 없겠지만 성을 너무 거룩하게 여긴 나머지 첫 날 밤을 손만 잡고 기도만 한 후 그냥 잠드는 부부도 있다고 들었다. 아님 아예 신혼여행을 기도원으로 가서 철야기도 하면서 첫날밤을 보냈다든지...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성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성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 그 이후로도 성을 건강하게 여기지 못했다는 증거는 내게 수없이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그 일화들을 여기에서 다 밝힐 수야 없지 않겠는가!) 어째서 나는 성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바가 없었을까? 워낙 스스로 성을 금기시 여기려는 태도가 우선 문제였겠지만 더 큰 문제는 그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학교에서건 교회에서건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렇다면 성은 부부가 침실에서 서로 지속적인 실습을 통해 자연 섭리로 알게 되는 것일까? 혹 목사님들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에 가르침의 목록에서 성을 생략하는 것인가?
결혼 후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는 말의 의미를 알기 위해 자주 골몰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결혼생활도 더 풍부해질 수 있으리라 믿었고, 그 화두의 해결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보장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측과 상식에만 머물 뿐 오래 묵혀 있다가 이제야 천방지축 나대는 이 놈의 성에 대해 혼자만의 해석 가지고는 도무지 그 신비를 풀어낼 재간이 없었다. 그 누구한테 물어봐야 식상한 대답만 나올 뿐이지 정말 내겐 새로운 해석이 절실히 필요했다.
최근 폴 스티븐스의 <영혼의 친구 부부>를 읽던 중 ‘성과 한 몸’의 신비로운 함수를 풀 수 있는 열쇠를 발견하게 되었다. 저자는 장 바니에라는 분의 말을 인용하면서 ‘부부 성관계’를 감.히. ‘성찬 예배’에 비유하려 했는데, 이게 무지 흥미롭고 새로운 자극이 됐던 것이다.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교회에서 하는 성만찬의 본연의 위치는 원래 가정이었고 집례자는 부부였다 한다. 부부는 각각 서로에게 지은 죄, 예컨대 마음에 쌓아두었던 분노와 불신들, 부당한 권리 행사와 배우자의 소리에 귀 기울여 경청하지 않은 불성실 등을 서로서로 고백하고 용납한다. 그렇게 진실한 대화가 오간 후에 거행하는 헌신과 애정의 일치로서의 성관계는 고백과 용서를 축하하는 증표요 잔치이다. 그 시간은 두 사람이 한 몸이요 한 마음이 될 뿐 아니라 한 영이 되는 시간이니 그것이 곧 성찬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부부의 침실이 이와 같다면 “ 이것은 당신을 위한 내 몸입니다” 라고 말하며 기꺼이 드릴 수 있고, 또 그 연합 안에는 하나님이 임재하실 터이니 예배의 본질이 거기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폴 스티븐스의 글을 읽는 순간 나는 회한과 감동으로 가슴과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간 용납과 받아들임, 고백과 기댐의 과정을 과감히 생략한 채, 곧장 욕구만을 채우려고 했던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 성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확인시켜준 폴 스티븐스 목사님에 대한 감사, 그리고 비록 꼬여있고 틀어진 채 음지에서만 활동하던 성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받아주실 수 있는 길, 그것도 예배로 받아주실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에 대해 얼마나 감사해 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부부 성관계 후 둘이 꼬옥 안고 가지런히 꿇고 앉아 기도했던 것이 생각난다. 돌이켜 보니 그 날은 폴 스티븐스의 말처럼 우린 ‘한 몸’이 되어 성찬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했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선물로 지금의 배우자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혼식 날 하나님과 증인들 앞에서 서약했듯 오래도록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부부되길 원합니다. 아멘”
SS
동감이예요~ <영혼의 친구 부부>는 우리에게 ‘몸과 영혼이 하나됨’을 더 진지하고 즐겁게 추구하도록 격려하고 꿈을 준 것 같아요. 근데, 여보! 나 사실 처음에 당신이 기도하자고 했을 때 엄청 황당했어요. 평소에 기도 별로 안 하는 사람이 이런 순간에 웬 기도? 그러니까 그게 성찬예배를 끝내는 기도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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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라하이, <아름다운 애정생활>, 권명달 역, 보이스사
홍승우 , <야야툰>, 문학과 지성사
폴 스티븐스, <영혼의 친구 부부>,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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