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포나루를 헤집다 땀범벅이 되어 들어온 현승이는

잽싸게 샤워를 하고 벌써부터 잠옷으로 빼입고는 우크렐렐렐레.... 하고 있다.

밥을 차려놨는데 부르던 노래 한 곡이 끝나질 않아서 아직 도롱도롱 우크렐렐레 중이다.

사랑했지마~안 그대를 사랑해앴지마~아안......

원곡 가수의 분위기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소리.

(도롱도롱 도로로로롱 도롱) 그저 이이러케 멀리서 바아라 볼 뿐......

 

 

#2

 

엄마, 엄마는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뭘로 태어나고 싶어?

나는 엄마, 개미로 태어나고 싶어.

엄마, 개미가 인간이 보기에 제일 무시하기 쉽고 하찮은 거지? 그런 거 같지 않아?

개미도 생각이나 이런 게 있을까?

개미가 꼭 되어보고 싶어.

 

현승아, 밀림의 왕자 사자, 라이언 킹 이런 게 돼보고 싶지는 않아?

 

아아아니! 전혀.

나는 가장 작은 개미가 되어서 어떤 느낌인지 살아보고 싶어.

아, 그런데 개미가 느낌이나 생각이 있을까? (걱정이네)  있겠지? 없을까?

 

 

#3

 

현승, 너 오늘 사회 시험 잘 봤어?

 

어, 잘보긴 잘 봤는데 100점은 아닌 것 같아. 한 개 틀렸어.

내가 교.과.서.적으로 생각했어야 했는데 상.식.적으로 생각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이, 엄마. 교과서는 교과서의 틀이 있잖아. 딱 정해진 틀.

시험은 그렇게 봐야 하잖아.

그런데 내가 갑자기 상식적으로 생각한 거야.

문제가 뭐냐면 '다음 중 정부가 하는 일이 아닌 것은?' 이거였는데.

정답은 뭐냐면 '모든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해준다' 였는데

나는 '국민들의 재산을 보호해준다'로 했어.

무료로 진료해주는 게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인 것 같았어.

 

흠....

넌 좀 덴마크적인 애구나.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의 덴마크가 생각나는데!

우리 나라가 현승이의 상식에 걸맞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네.... 그랬으면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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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가 사줬어요. 부드러워요"

말을 하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부끄럼쟁이 현승이가,

묻는 말에도 부끄부끄 대답이 어려운 현승이가,

안물!

아무에게나 다가가 했던 말입니다.

말이 저절로 나올 만큼 좋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고모가 사준 옷이 부드러워요.

 

현승이는 '부드러운' 것에 집착해왔습니다.

부드러운 천,

부드러운 엄마 살,

부드러운 말투,

심지어 먹는 것도 부드러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빵이 베이글이었습니다.

입에 들어가면 살살 녹아야 빵이지.

엄마가 먹으라니까,

안 먹으면 부드러운 엄마의 말투가 딱딱해질테니 억지로 먹는 거지

질겅질겅 씹어 먹는 빵이라니 딱 질색이었습니다.

 

코스트코에 가면 (저렴 리스트 상품 1순위라) 꼭 사와야 하는 것이 베이글.

며칠 새 베이글 열두 개를 뚝딱 다 먹어치웠습니다.

입짧 위짝(입 짧고 위 작은) 가족에게 흔한 일이 아닌데요.

현승이가 맛있다며 아침 저녁으로 찾아 먹은 탓입니다.

 

우리 현승이가 달라졌어요!

김현승이 어떻게 이렇게 베이글을 좋아해?

식성이 싹 바뀌었네.

엄마 아빠가 뼈 있는 농담을 했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뇌가 뒤집어진다고 합니다.

또는 뇌가 전격 확장공사에 들어가기 때문에 '공사 중' 상태가 된다고요.

채윤이 두뇌 확장공사가 끝나는 시점이라서 느낌 알죠.

덕분에 엄마 아빠는 그런 감각을 조금 익혔습니다.

두뇌 재개발 공사 시작하려고 공사 자재 들여오는 소리가 들린다니까요.

현승이 두뇌 공사 시작입니다.

그 전조 증상인지 식성이 살짝 뒤집어지니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한 2년 공사가 진행되려면 집안이 좀 시끄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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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휴지걸이를 떼내고 얼기설기 수제품 휴지걸이로 교체.

심심해서 그냥 만들어봤다고 하는 현승이 작품입니다.

심심해서? 일 없으면 발바닥이나 긁어, 라고 말씀하시던 우리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데.

차마 그 목소릴 들려주지 못했고.

저게 뭐냐, 없어 보이게, 라고도 하지 못했고.

그냥 웃으면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여러 생각이 납니다.

 

현승이의 손길에서 아버님의 향취가 느껴집니다.

아버님은 수선의 손을 가지고 계셨고 뭐든지 고치셨지만 미학에는 도통 관심이 없으셨지요.

예를 들면,

우리 신혼집이 구옥이긴 했어도 당시로서는 흔치 않았던 샛노랑으로 도배한 예쁜 집이었습니다.

여름이 와서 현관에 발을 걸어야 했는데

심사숙고 끝에 파스텔톤의 야리야리한, 보기만 해도 왈랑왈랑 신혼 분위기 물씬의 발을 사서 걸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길이가 짧네요.

그래도 뭐 예쁘니까.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와보니

아버님 수선의 손이 다녀가셨나봅니다.

천도 아니고 폴리에스테르도 아닌 그 무엇이 야리야리 발 아래 덧대어 있는 겁니다.

창고에서 찾아내셨을 법한 자재를 손바느질로 얼기설기.......

아~번~니~~~~~임.

 

현승이가 서너 살때 하늘색 오리털 파카를 입었었습니다.

하도 침을 흘려대서 앞자락이 얼룩얼룩하긴 했지만 예쁜 파카였습니다.

그 안에 쏙 들아가서 침 질질 흘리던 오통통한 내 너구리가 그리워지네요.

파카의 지퍼가 고장났는데.....

또 어느 날 퇴근해보니. (퇴근이 문제였나? 당시 퇴근을 없앴어야 했나?)

하늘색 파카에 빨간색 지퍼가 한 땀 한 땀 흰색 실로 바느질 되어 있는 겁니다.

얼기설기 손바느질 말이죠.

아~번~님~~~~~~임.

 

그땐 참 속상했던 일인데 이렇게 그리움과 그리움으로 추억하게 될 줄이야.

피는 못 속인다는 말 이상이 느낌입니다.

한 사람의 이 세상을 다녀가고, 

삶의 방식과 향기가 그가 사랑하던 사람에게 흔적처럼 남겨진다는 것.

 

벚꽃이 피기 시작할 때니 다시 이별의 계절입니다.

하남 신안아파트 옆 개천길에 볒꽃이 흐드러지던 날 아버님이 암선고를 받으셨지요.

퇴원하시는 아버님이 뒷자석에 계신데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며 운전하다

옆에 앉아 시누이라 하릴없이 벚꽃 얘길 했었습니다.

 

수선의 손 아버님 돌아가신 이후로 주방의 칼이 늘 성이 차지 않습니다.

칼은 정말 기똥차게 갈아주셨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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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플래쉬>를 본 채윤이 누나는 더욱 재즈에 빠져들어,

현승아, 누나랑 이 음악 같이 듣자했샀는,

<위플래쉬>를 같이 본 현승이, 영화는 좋았다면서도 노! 싫어. 

그러며 여전히 혼자 듣는 노래는 이런 것입니다. 

인생이란 강물 위를 끝없이 부초처럼 떠다니다가 어느 고요한 호수가에 닿으면.....

김광석 아저씨이거나

언젠가 오랜 이별 뒤에 잊혀진 나의 이름이 너의 마음 속에 되살아날 때.....

신승훈 아저씨의 발라드이거나

네모난 상자 안에 갇힌 동그란 마음..... 우린 검증받지 않은 번역가들....

따밴 이승윤 형아.

 

제 병을 제가 아는 듯,

엄마, 나 노인병 걸린 거 아닐까? 왜 나는 요즘 노래가 좋지 않고 옛날 노래만 좋지?

하더니만  병세가 악화되고 있는지 요 며칠 거실에 울려퍼지는 음악이 심상치 않습니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말 있네....

이 밤이 지나가면 나는 가네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 남겨진 웨딩케잌만.... ♬

외갓집에 가서 영화 <세시봉>을 보고 온 탓입니다.

영화와 거기 나온 노래들에 꽂혀서 결국 아빠를 꼬여 집에서 한 번 더 보고 말았습니다.

왜 그리 좋아하는지 쉽게 이해되진 않지만 그러려니 해봅니다.

채윤이는 이어폰 꽂고 '위플래시''카라반'에 목과 턱을 앞으로 뒤로 흔들흔들 흐느적 흐느적,

현승이는 볼륨을 낮추고 '조개 껍질 묶어' 몸을 통째로 삐그덕삐그덕 흔들흔들.

 

입만 열었다 하면 또 이 얘깁니다.

엄마, 송창식 아저씨하고 윤형주 아저씨하고 아직도 사이 안 좋아?

- 아저씨 아냐. 저번에 양화진 음악회에서 봤잖아. 할아버지야.

그러니까 사이가 안 좋냐고? 엄마도 세시봉 음악감상실 이런 데 가봤어?

엄마는 왜 그렇게 몰라?

- 야, 엄마는 그 영화 세대가 아니야. 다음 세대야. 세시봉은 대전 외삼촌 그 시대야.

아, 그래? 내가 개념이 없구나. 그러면 도대체 엄마는 어떤 시대야? 일제 강점기야?

- 야!!!!!!!!!!!!! 얘 진짜 개념 없네. 1945년에 해방이고 이순자 할머니가 1947년 생이거든. 아 진짜 얼척 없어.

그렇구나. 어, 나 늦었다. 빨리 가야겠다. 학교 갔다 올게 엄마.

현관 쾅.

 

이제 밤도 깊어 고요한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흥얼흥얼, 계단 쩌렁쩌렁)

 

일제 강점기 세대 엄마도 설거지 하면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다 짜증 남.

 

헤어지자 보내 온 그녀의 편지 속에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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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날씨 : 반팔을 입어도 딱히 춥지 않는 따뜻한 날

 

춥다 춥다 하다가 결국 봄이 왔다.

나도 내 일기장을 보는데 첫 번째 일기부터 보니 점점 날씨 표현이 따뜻해지는 것을

눈에 띄게 볼 수 있었다.

6학년 첫날까지만 해도 굉장히 추었지만

지금만 해도 굉장히 따뜻하다.

나는 봄이 한 계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여름을 위한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봄이 빨이 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래야 여름이 빨리 오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봄이 따뜻해져서 좋긴 하지만

여름이 빨리 오면 좋겠어서 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추운 겨울보다는 따뜻한 봄이 훨씬 낫다.

 

 

================

 

이 일기, 봄이 보면 좀 그렇겠다.

윽2

상처 받겠네.

봄도 현승이에게 존재 그대로 사랑받고 싶을텐데.....

여름으로 가는 길목일 뿐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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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통화하고 난 현승이)

 

엄마, 할머니 텔레비전이 고장 나서 화면이 안 나온대. 지금 소리만 듣고 계신대.

.....................

너무 불쌍해. 엄마는 안 그래? 할머니 가엾지 않아? 나는 너무 슬퍼. 엄마.

방법이 없어? 아니이, 텔레비전을 고치는 방법이 아니라 크게 해결하는 방법 말야.

그래, 말하자면 그런 거. 같이 살면 엄마가 힘들어?

같이 살면 할머니는 좋지. 할머니가 뭐가 힘들어. 나는 그런 말이 이해할 수가 없어.

혼자 사시는 게 편해? 외롭잖아.

 

(한참 얘기를 나눴는데, 많은 말이 튕겨 나왔다. 그리고 잠깐 말이 없었다.

거실에 엎드려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딸랑딸랑 슬픈 말소리를 냈다)

 

엄마, 사람이 언제부터 어른 마음으로 바뀌어?

나는 어른 마음이 되고 싶지가 않아.

그냥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고 애들처럼 행동을 했으면 좋겠어.

왜 어른들은 많은 걸 생각해? 책임? 나는 그걸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그게 어른이 되는 거라면 나는 끝까지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그냥 좋은 걸 하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거야.

아이들처럼 그렇게 하는 게 안 좋은 거야? 꼭 어른처럼 되어야 하는 거야?

 

(책임감 때문에 한 가지만 생각할 수 없는 어른의 입장을 변론하다 항복하고 말았다)

 

현승아, 니 말이 맞아.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좋은 걸 하는 아이같은 마음이 좋은 것 같아.

생각해보니 엄마도 그렇게 살고 싶은데 그런 마음을 너무 많이 잃었어.

잃었는데 찾는 방법은 잘 몰라. 너무 오래전에 잃어버려서 그런가 봐.

 

(결국 엄마의 항복을 받아낸 후에야 입을 다물었는데 뭔가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은 말씀을 읽어도 마음에 잘 들어오지 않고, 어젯 밤 현승이 목소리만 귓가에 맴돈다.

머릿속에 무성한 계획과 염려를 딱 끊어내고 좋은 일을 하는 삶, 그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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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강아지는 바리스타 강아지 ♪

 

핸드드립은 커피의 맛과 향을 가장 잘 담아내는 추출방법이고,

느림의 미학을 몸으로 느끼게 하고,

지금 여기에 깨어있도록 하는 영성적 도구.......

다 좋은데.

귀찮은 게 문제다.

물 끓이고, 잔 데우고, 원두를 갈고, 여과지를 접고, 1차 2차 추출......

 

엄마 아빠 소파에 앉아 있다가 '현승아~' 하고 부르면.

우쒸, 싫어. 커피 준비 안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조마조마 했어.

왠지 커피 준비하라고 할 줄 알았어. 하다가도.

투덜투덜, 드륵드륵, 쫄쫄쫄쫄.....

그래서 우리집 강아지는 바리스타 강아지이다.

 

원고도 안 풀리고 마음도 싱숭생숭한 엄마가 멍 때리고 있으니까

엄마, 내가 커피 준비해줄까?

짜증 안 내고 한 번 준비해줄게.

나 이제 드립만 배우면 돼. 다 할 수 있어. 

어디 카페에 가서도 준비까지는 다 할 수 있겠어.

아우, 오늘 커피는 약하게 볶아서 가는데 힘들다. 나는 강볶음 커피가 좋아. 잘 갈려.

 

그런데 엄마 사진 안 찍어?

사진 찍어서 블로그에 올리지~이.

엄마 블로그에 내 팬이 많다며.

내가 이렇게 커피 내릴 준비 잘하는 걸 알면 또 뭐라고 할까?

정말 많아?

내 팬이 몇 명쯤 될까?

 

우리집 바리스타 강아지가 연예인 병에 걸려 화보 욕심까지 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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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내가 비밀기지에 하트 돌 있다고 말했지?

바로 이거야.

가져와서 엄마 보여주려고 했는데 비밀기지 벽을 쌓는데 공사용으로 써버렸어.

진짜 엄마 놀랠 걸.

우리가 만든 기지를 보면.

그래서 아예 비밀 동아리를 만들었어.

아! 그리고 엄마. 오늘 M를 비밀 동아리에 가입시켜줬어.

원래는 W와 나 둘이었잖아.

M을 가입시키고 처음으로 기지를 알려줬어.

원래 뽑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아까 셋이 한강에서 자전거 타면서 놀았거든.

서울과 경기도 경계까지 갔다 왔어. 거기 디~이게 멀어.

엄마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멀 걸.

돌아올 때는 시합을 했어. 아무 길이나 선택해서 빨리 도착하는 걸로.

걔네 둘이는 빠른 길로 갔고, 나는 원래 길로 왔는데 내가 이겼어. 하하.

그러다가 그냥 M에게도 기지를 알려줬어.

나는 기지 지킴이고, 부장이야.

대장은 W야. 왜냐하면 비밀 동아리를 만들자고 한 건 W거든.

M은 오늘 가입한 신입회원이지.

 

W가 집에 먼저 가고 M이랑 둘이 비밀기지 공사를 더 했어.

오늘은 화장실을 만들었고, 갈대를 더 많이 모아서 안 보이게 덮었어.

그런데 엄마 M은 이런 놀이를 처음 해보는 거야.

M이 조금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거든.

어린애처럼 말할 때가 있는데 나한테 살짝 이렇게 말했어.

'나는 친구들 중에 너하고 노는 게 제일 재밌어'

 엄마는 별로 안 놀라는 것 같은데 M은 진짜 이런 놀이를 안 해봤고 안 좋아해.

걔는 컴퓨터 게임만 하는 애거든.

그런데 나랑 둘이 공사하면서 너~어무 재밌대.

재밌어서 막 흥분이 된대.

진짜야. 엄마. 이런 놀이를 처음 하게 된 거고,

이렇게 노는 게 재밌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 거야.

엄마가 그렇게 응응 할 사소한 일이 아니라니까. 

말하자면 이건 내가 게임에 빠진 친구를 구원한 거야.  

응? 엄마~아. 진짜 대단한 일이라니까.

 

(한강공원 망원지구에는 게임에 빠진 친구를 구원한 비밀기지가 있습니다.

당신이 앞으로 뒤로 손뼉치며 파워워킹으로 지나다니는 길, 바로 그 길가입니다.

그 길, 강이 인접한 쪽에선 비밀기지 공사가 한창이고,

때론 기지에서 나온 요원 세 명이 옷에 갈대를 꽂거나 덤불을 뒤집어 쓰고 잠복도 한답니다. 파워워킹 하는 당신의 씰룩거리는 엉덩이를 유심히 관찰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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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식을 하고 새 교과서를 받고, 통지표를 받아 온 아이들과 함께 종업 파티다. 백 점을 맞아온 날보다, 그 어떤 날보다 많이 축하하고 싶은 날이 종업식 날이다. 방학식 날엔 피자 또는 치킨 중에서도 비싼 걸 시키고 콜라도 1.5 리터로 통 크게 쏘면서 축하 파티를 벌이곤 한다. (부재가 일상인 아빠는 빼고. 미안~) 올해도 무사히 !보다는 올해도 잘했어! 진짜 잘했어! 적극적인 의미로. (현승이 표현대로 자랑은 않.이.지.만) 어릴 적에 종업식을 떠올리면 통지표와 함께 받은 상장 한두 개가 늘 있었던 것 같다. 그걸 가지고 집에 가서 대단한 칭찬을 받진 못했지만 한 학년을 마치며 받는 기분 좋은 보상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종업식은 늘 무언가 풍성했던 기억이 있다.

 

채윤이도 현승이도 학교에서 상을 받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현승이는 글을 잘 쓰니 상을 많이 받아오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상 받을 만큼 특별한 실력이 못 되기도 하겠거니와 엄마의 지성이 부족하기도 할 터. 특별한 실력이 없으면 엄마가 열심히 학교 일도 하면서 상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선생님께 피력해야 한다는데, 이 엄마는 '의지가 약해소~' 아이들에게 '스마미생, 아니 스미마생'이다. 상이 없어도, 통지표으; 성적란이 빈약해도 우리들의 즐거운 종업 파티, 고고씽.

 

종업식 마치고 일찍 집에 와 뒹굴다가 '엄마, 언제 와? 출발했어?' 전화해대는 현승에게 '아직 멀었어.' 뻥을 쳐놓고 깜짝 파티 장을 봐왔다. 망원시장에서 제일 맛있는 '순이네 고릴라' 떡볶이와 순대, 현승이가 그렇게나 먹고 싶었던 딸기, 채윤이가 사랑하는 마카롱이 오늘의 메뉴. 양손에 든 검은 비닐봉지를 빼앗듯 받아 풀어헤치는 두 녀석이 흥분해서 난리가 났다. "와, 엄마 나 종업식 했다고 드디어 비싼 딸기를 사 왔구나. 이 비싼 딸기를! 내가 좋아하는 이 딸기를!" (아우 찔려. 한 팩에 삼천 원짜린데) "오 마이, 오 마이, 오 마이 마카롱!" (얘는 감동받아 흥분하면 이렇게 자연스럽게 영어가 튀어나오는데 성적표의 영어 점수는 왜 그 모양?) 삼천 원짜리 딸기 한 팩, 천사백 원짜리 마카롱 두 개에 이렇게 행복해하다니. 저렴한 녀석들.

 

떡볶이 2인분과 순대 내장 섞어서 1인분을 먹는다. 품절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간, 허파, 오소리감투, 순대, 떡볶이. 1차로 간이 품절되고 골라먹던 허파가 마지막 한 조각 남았을 때, 두 녀석 포크가 동시에 꽂혔다. 그러자 현승이 재빨리 자기 몫의 마카롱을 내놓으면서 "누나, 마카롱 줄게. 허파 내가 먹게 해줘." 아, 물론 계산 빠른 된장녀 누나는 "콜!" 마카롱 확보하고나서 다 들리는 혼잣말로  "이런 바보는 처음 봤어. 진짜."

 

마카롱을 허파 한 조각과 바꾼 남자. 그 남자는 통지표를 가져와서 그랬다. "엄마, 우리 선생님 정말 날카로우셔. 내가 맨날 그랬지? 우리 선생님 애들을 일일이 다 파악하고 계신다고. 진짜야. 내 통지표 보니까 정말 그렇지? 통지표를 비슷하게 대충 써주신 게 아니고 진짜 그 애에 대한 얘기를 쓰신 거 같지 않아? 와, 다른 애들도 이렇게 써주시려면 정말 힘드셨겠다. 그런데 우리 선생님이 원래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아이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셨을 뿐 아니라 긍정적인 방향성까지 담긴 날카롭지만 따스한 코멘트라고 생각했다.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친구들 사이에서는 활기차나 대외적으로는 수줍음이 많아 잘 나서지는 않음.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판단력도 있어서 어른스러움을 엿볼 수 있음. 학습 면에서는 이해력이 좋으나 수업 중 잡담을 줄이고 공부하는 것에 대해 귀찮아하는 마음을 좀 더 긍정적으로 바꾼다면 실력향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됨. (관계 지향적) 혼자 있기보다는 같이 어울려 지내는 것을 좋아하여,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냄. (예체능) 몸의 움직임이 빨라 공놀이 게임을 잘하며, 음악 활동에 즐거움을 느끼며 적극적으로 참여함. 

 

허파를 좋아하는 남자는 색칠한 부분을 다시 읽으며 '헐, 이걸 어떻게 아셨지?' 감탄해 마지 않았다. 나도 음악치료 하면서 치료 계획서, 진보기록, 종결평가서 등을 쓰면서 머리 쥐어뜯어 본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선생님의 세심한 관찰과 노고에 두 배로 감사한 마음이다. 이래저래 기분 좋은 종업 파티에 들떠 두 아이 엽기사진도 여러 장 찍었는데 공개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중2, 초5. 잘 마쳤다. 장하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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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을 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라디오를 켜는 것.

이것은 20여 년의 습관입니다.

온종일 집에 있는 날은 93.1이 내내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했죠.

시부모님과 한 집에 살던 시절 가장 힘들었던 것은

뉴스와 아침 드라마로 시작해야 하는 하루였습니다.

요즘, 20여 년 된 습관을 자주 잊어버립니다.

정상 출근하는 날(비정상 출근은 새벽기도가 곧 출근인 그런 출근) 남편이 

"요즘에 음악을 안 들어?' 하며 라디오 켜는 일이 많았습니다.

 

4월 16일 이후로 어쩌다 보니 스르르 잊힌 습관입니다.

그럴 수 있다며 깊이 생각해보진 않았습니다.

 

오늘 아침 오랜만에 음악을 트니 현승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아침에 장일범 아저씨가 얘기하는 라디오 틀면 짜증내는 거 알지?

왜 짜증 나는 줄 알아?

음악이랑 그 아저씨 말이 꼭 약 올리는 것 같아.

나는 졸립고 학교 가기 싫어 죽겠는데

편안하고 좋은 음악이나 들어라~

이렇게 말하는 게 내 마음이랑 맞지가 않고 약올리는 것 같단 말야.

 

아, 그렇구나! 현승아.

엄마가 음악을 잃어버린 이유였어. 

장일범 씨의 명랑하고 세월 좋은 목소리가 화가 날 정도였어.

그래서 특히 그 시간대엔 라디오를 건드리지도 않았지.

 

길바닥에 엎드려 우는 사람들을 약 올리고 빈정거리는 사회.

그 슬픈 마음이랑 맞지 않는 설교들.

의도적으로 맞추지 않는 언론의 주파수들.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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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엄마는 나를 어른 취급하는데! 나는 아직 아이라고, 아이!

엄마 아빠가 생각이 좋은 엄마 아빠라서 나를 이렇게 키우는 건 알겠지만

나도 집에 티브이가 있고 컴퓨터 게임도 할 수 있고,

그런 걸 너무 부러워하는 아이라고.

엄마 아빠는 어른이라 아이 적의 마음을 잊어버린 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그래.

이렇게 자라는 게 좋다는 건 알지만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운지 알아?

애들은 원래 부러워하는 거야.

아니, 아니! 지금 알아주는 것보다 더더더 내 마음을 알아줘야 해.

나를 큰 애로 대접하지 말고 아이로 대접하라고.

예를 들면, 나는 아직 아이라서 비엔나 소시지 이런 반찬 좋아해.

그러니까 비엔나 소시지에 케챱으로 해주는 반찬도 해주고 그러라고~오.

 

 

어, 여기.....

비엔나 소시지 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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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심심해.

어, 너 심심해? 나는 심심달.

아, 진짜. 아빠 싫어. 재미도 없는 걸 맨날 해.

재밌고만. 여보, 난 재밌어. 당신은 심심달~ 그럼 나는 심심별.

 

이렇게 심심해, 심심달, 심심별 하는 시간이 많으면 듣보잡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싱크대에서 나무 젓가락 몇 개를 가져가 제 방에서 끙끙거리더니,

엄마, 이리 와 봐. 나 집 지을 거야. 벌써 기둥 다 세워졌지?

그리고 한참 있더니,

엄마, 이게 뭐~어게? 정육면체! 딩동댕. 직육면체도 돼. 원래 정육면체는 직육면체도 되는 거야.

그리고 또 심심해 심심달 심심별의 시간이 흐른다.

마침내 계획에 없던 작품출시.

제목은 '네모의 꿈' 

 

 

 

 

TV도 컴퓨터 게임도 휴대폰 게임도 없는 세상.

답답한 세상. 짜증나는 세상.

가끔씩 이 세상의 여왕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다른 아이들도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여왕을 만나 이상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수록 빡친다.

(의식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엄마, 엄마가 몰라서 그러는데 내 친구들은 정말 컴퓨터 게임 많이 해. 걔네들이 게임 얘기할 때는 나는 그냥 먼 산을 바라 봐. 이젠 부럽지도 않아. 그렇지만 엄마가 알아야 해. 다른 애들이 컴퓨터 게임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재규랑 우노랑 만나서 막 놀다가도 조금 시간이 지났다 싶으면 '야, 이제 놀 것도 없는데 각자 집에 가자' 이래. 그거 왜 그러는 줄 알아? 게임 생각나서 그러는 거야. 그러면 둘 다 집에 가서 게임한다고. 애들이 온통 게임 생각만 하는 거 알아?  엄마는 진짜! 으이구!!! 진짜!!!!

궈래? 그러면 너도 닌텐도 해. 30분 해.

꺄악! 진짜? 진짜 30분 한다. 예~~~~

(방금 전까지 입가에 침 고여가며 성토하던 것 싹 잊었음)

 

 

 

 

친구들 이야기에 끼지 못하는 그 결핍감을 내 어찌 모르랴.

결핍감이 엄마에 대한 분노로 돌변하는 건 시간문제이다.

엄마의 죄를 엄마가 알기에 달게 받으려고 한다.

결핍감과 결핍감에서 오는 분노와 엄마를 향한 원망과

매일 심심해서 뒹굴면서 볶아대는 것을 감수하겠다는 뜻이다.

그것은 엄마인 나의 선택이고

그로 인해 잃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잃고, 감수하는 것이 책임이니까.  

 

심심해, 심심달, 심심별.

심심한 시간 속에 뒹굴다 가끔은 저런 유치한 작품활동도 하고.

(본격 사춘기에 돌입, 가출을 하고 싶거나, 야동을 보기도 하는 친구도 있는 5학년임)

저러고 '네모의 꿈'을 부르며 특유의 삐걱댄스 안무까지 곁들인 동영상도 있는데 그건 공개하지 않기로 한다.

 

 

현승이가 그리는 네모의 꿈은..... 음, 뭔지 딱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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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승아, 너가 어젯밤에 수건 접어놨어?

 

- 어.

 

- 왜애?

 

- 다른 빨래는 어떻게 접는 건지 잘 몰라서.

 

- 그러니까, 왜 빨래를 접어?

 

- 엄마가 주방에 계속 서 있어서..... 일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 그런데 왜 접었다고 말도 안 했어?

 

- 다 접고 졸려서 나도 모르게 그냥 잤어.

 

 

모름지기 남자라면!

가사를 대하는 이런 자세.

머스트 해브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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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고사를 치르고 있는 누나가 열공 중이다.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서 엄마의 태도가 전에 없이 나긋나긋하다.

홍삼도 주고,

졸려서 힘들다 하면 밀크 커피도 타준다.

관심받고 싶은 현승이는 괜히 노래를 틀고,

말을 시키고,

누나를 찔러보고 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누나의 짜증과 엄마의 '누나 편들기'였다.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면서 온갖 구박을 받다가 결국 정식으로 삐쳤다.

그런데도 엄마는 따뜻하게 돌봐주지 않고 

알았어, 닌텐도 20 분 해!

차겁게 말했다.

안!!!!!!해!!!!!!

쾅쾅쾅쾅 걸어 다니며 씻고 옷을 갈아입더니 휙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버렸다.

 

그냥 재우는 건 아닌 것 같아 곁에 가서 안아주고

찔러보고 얼르고 달래도 침대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도 들지 않는다.

곁에 누워서 등을 긁어주려 해도 손도 못대게 한다.

누나 이번 시험이 중요해서 그래.

누나를 좀 배려해줘.

누나가 저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것 봤어?

대견하잖아. 그리고 안 됐잖아.

 

그게 아니고,

엄마가 내 맘도 몰라주고.

닌텐도 (따위)나 하라고 하고.

내가 닌텐도 (따위)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아?

마음을 알아줘야지!

그리고 누나한테만..........  아니야.

 

(누나한테만 친절하고! 나는 질투의 화신이라 내 앞에서 엄마가 누나한테 진심을 다하는 거 봐 줄 수가 없다고!!!! 이 말을 하고 싶을 것) 

 

그래도 계속 찌르고 얼르고 했더니,

하지 마!

난 엄마랑 싸울 거야!

엄마를 속상하게 할 거라고!

계속 속상하게 할 거야!

엄마가 속상해하는 것이 보기 좋아!

 

원래도 그리 속상했던 건 아닌데

속상해 하는 것이 보기 좋다는 말에 너무 웃겨서 속이 하나도 안 상해져가지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해버렸더니

화가 나서 눈알이 튀어나오려고 하다가.

그래도 엄마가 수습을 못 하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했더니 그게 또 너무 웃겼는지,

저도 따라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면서 엄마랑 싸우기로 결심한 것을 잊어버렸다.

 

얼핏 사춘기 아이 느낌이 나기도 하고,

네 살 때 처음 남좌의 향기를 풍기며 싸우는 놀이 하겠다고 주먹을 쥐고 달려들던

그 느낌이 살아오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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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누나! 이거 봐. 으흐흐흐흐흐.
손에 머리카락 한 뭉텅이를 들고 방에서 나와 엄마와 누나가 기겁을 했습니다.
으악, 이거 뭐야? 어디서 났어?
으흐흐흐흐. 그리고 이것도 봐.
이거 엄마 머리에 파마하는 거, 깨끗해졌지?
여기 붙은 머리카락 내가 다 떼어냈어.
재밌어. 엄마, 봐바. 깨끗해졌지?

몇 년 쓰면서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싹 떼어내 새 것 같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빠로, 아빠에게서 현승이로  '수선의 손, 정리의 손' 대물림입니다.
아버님은 수선의 달인이셨습니다.
결혼 후 첫 여름을 맞아 신혼집 현관에 예쁜 발을 사다 걸었습니다.
그런데 길이가 짧아서 밑으로 모기 다 들어오게 생겼습니다.
어느 날 퇴근했더니 아버님 수선의 손이 지나간 흔적이 보입니다.
전혀 다른 재질의 천이었던가,
정말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어떤 것을 덧대어 바느질로 붙여놓으셨습니다.
신혼집이었는데.....
현승이가 입던 오리털 파카의 지퍼가 고장난 적이 있습니다.
수선집에 맡겨 고치려고 했더니 아버님이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퇴근하고 들어와보니 현승이 파카에 다시 아버님 수선의 손의 흔적.
지퍼를 바꿔 달어놓으셨는데,
하늘색 파카에 빨간색 지퍼라는 게 함정.
철저하게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수선을 하시되 미학적 관점은 과감하게 집어 던지셨죠.
남편은 아버님의 수선의 손을 물려받되 다행히 지킬 건 지킬줄 아는 심미안도 있습니다.
시간이 많으면 집안의 구석구석에 훨씬 손을 많이 댔을 것입니다.

3 대째 내려오는 수선의 손, 정리의 손.
현승이는 주로 엄마 지갑의 영수증 정리 같은 것들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머리 마는 구루프(정확한 명칭이 뭘까요?)의 머리카락 청소는 수선의 손도 손이지만
인내심이 많이 요구되는 작업이었을텐데요.
아, 그러고보니 할아버지로부터 아빠를 통해 내려오는 미덕 중 하나 인내심도 있네요.

아무튼, 깨끗하게 만들어줘 고맙다 했습니다.
다음 날 현승이는 학교 가고 외출준비를 하면 머리를 말려고 구루프를 찾는데 눈에 띄질 않습니다.
갖고 놀았나? 현승이 방에 가봐도 없구요.
아무리 집안을 뒤져도 찾아지질 않습니다.
포기하고 화장을 하다 발견!
커텐에 다닥다닥 구루프 열매가 맺혔네요.
가계를 흐르는 선하고 아름다운 수선의 열매를 하나 씩 따서 머리 예쁘게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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