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내 얼굴 자체도, 화장도, 골라 입은 옷도 전반적으로 마음에 드는 날. 그런 날이었다. 주일 아침이었고. 아침 루틴, 눈 뜨자마자 기타를 껴안고 띵가딩가 하는 현승이 방 앞에 섰다. "엄마 갈게!"라고 했다. "엄마, 엠마 스톤 같애. 라라랜드." 와, 그대로 노란 원피스 ‘미아’가 되어 날아올랐다. 현승이에게 라라랜드는 '세상의 모든 영화'이고, 라라랜드가 세상의 모든 영화인 이유는 거기 나오는 엠마 스톤 때문이니까. 온종일 기분이 좋았다.
도서관에서 늦게 돌아온 현승이가 또 밤의 루틴 중이었다. 기타를 껴안고 띠디딩 딩딩 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얼굴을 쑥 내밀고 "안녕? 엠마 스톤이라고 해."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몸서리 치듯 흔들었다. "아니야, 엠마 스톤 아니야. 내가 아침에 엠마 스톤이라고 했어? 아니야. 가." 종일 하늘을 날던 마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안방으로 가 거울을 봤다. 아침 그 사람이 아니다. 절레절레 절로 고개가 흔들어졌다. "엠마 스톤 아니네. 아니야, 엠마 스톤."
야간자율학습 하는 고3이라 마주앉아 긴 수다 떨 시간이 없네. 짧게라도 농담 따먹기 하는 게 참 재밌는 아들인데... 테이블 맞은 편 저 자리에 와 서성거리면 놀자는 얘긴데, 그럴 시간이 없다. 주말이 좋다. 오랜만에 돌아온 내 농담 따먹기 친구!
엄마, 나 음식 쓰레기 버리고 한 바퀴 돌고 올게. 돌고 올게. 알았지? 그래, 갔다 와. 엄마, 돌고 들어오면 엄마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어떻게? 뭐? (상상이 안 되네) 돌았냐? 돌았어? 이렇게 한 마디 해 줘. 알았지? 깔깔깔깔.... 이런 개그 너무 좋아. 내 소중한 농담 친구!!!
아, 며칠 전 아침. 준비를 너무 빨리 했다면서 현관에 서서 밍기적거렸다. 그 짧은 시간, 취향저격 몇 말씀 남기고 등교하셨다. 애는 나갔는데 현관 근처에서 말의 여운이 종알종알 남았다. 혼자 키득거리며 기분 좋은 아침을 보냈었다. 옛날 에피소드도 떠오르고.
엄마, 내가 확실히 이제 다 큰 거 같애. 어른이 된 거 같애. 학교에서 똥 싸는 게 그렇게 어렵지가 않아. 아침에 배아프면 학교 가서 똥 마려울까봐 불안하고 그렇거든. 이젠 좀 그런 게 편해졌어. 그냥 학교에서도 편하게 화장실 가. 아, 물론 놀이터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건 오래 됐지. (* 아래 글 참고) 그런데 맥도날드 보면 설레지? 당연하지! 그렇지? 아직 어른 아닌 거야. 빨리 학교나 가.
고3이 되어 야자의 삶을 사는 현승이와 주말 데이트를 했다. 2001아울렛 지하에서 가성비 좋은 회전초밥을 맛있게 먹고 집에 오늘 길. 고3 맞이 몸만들기 운동 차 겨울 동안 다녔던 구미도서관 옆을 지나는 중이었다.
"내가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그 애를 데리고 구미도서관에 한 번 오며 재밌겠다. 공부하던 곳도 보여주고, 매일 가던 미정국수에 같이 가서 밥도 먹고... 재밌겠지?"
"아빠가 너 도서관 갔다 온 날 늘 하는 얘기 있지? 엄마빠 헤어졌다가 우연히 다시 만났다는 고덕도서관. 거기서 자판기 커피에 초코칩 쿠기 먹고, 매점에서 우동 먹은 얘기 알지?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는 얘기. 거기 아빠가 대학생 때 다니던 도서관이거든. 아빠가 지금 너한테 고덕도서관에 같이 가자고 하면 어떨 것 같아? 아빠랑 같이 가서 자판기 커피 뽑아 먹고, 우동 먹고 그러자고 하면."
"아, 안 되겠구나! 말도 안 되게 싫으네. 이런 거구나... 와, 나중에 아빠 같이 될 것 같은데... 와..."
채윤이가 닭껍질 좋아하는 거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후라이드 치킨, 백숙 가리지 않고 닭껍질은 다 좋아한다. 돼지고기 살코기 없이는 먹을 수 있지만 비계 없이 먹을 수 없다. 엄마지만, 어른이지만 진심 존경한다. 정말 나는 아직도 돼지고기 먹을 때 몰래 비계 떼어내고, 백숙 닭껍질은 먹을 생각도 못한다. 튀긴 닭 껍질의 고소한 맛을 겨우 좀 안다. 그것도 정말 채윤이 덕이다. 하도 어릴 적부터 "나 껍질만 먹으면 어때? 안 돼?" 했쌌길래 경쟁심에 먹어보다 맛을 들였다.
얼마 전 닭 백숙을 먹다 현승이가 내지른 말이다. "나도 껍질 좋아한다고!" 누가? 누가? 현승이가? 니가 무슨 닭껍질을 좋아하냐고, 조금만 입에 껄끄러워도, 조금만 느끼해도 다 뱉어내는 놈이, 일찍이 "배트맨"이란 불렸던 놈이 무슨 닭껍질을? 했더니. 후라이드 치킨의 껍질은 싫어하지만 백숙은 아니란다. 백숙 닭껍질을 좋아한다며 뺏어가지 말라고 하는 말이었다. 와아~씨. 백숙 닭껍질이라니! 그걸 가지고 싸운다니!
현승이는 태어나서 며칠을, 아니 몇 달을 그렇게 울어댔다. 산후조리원부터, 집에 와서까지 조그만 자극에도 그렇게 울어댔다. 그때는 그저 막막하기만 했고, 얘가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런가 두렵기만 했었는데. 현승인 낯선 모든 것이 힘든 아이였다. 태어나본 넓고 환한 세상이 낯설어서, 어쩔 줄 모르고, 벌쭘해서 그랬나 보다. 한 20년 가까이 키우면서 영혼의 생긴 모양을 보니 그렇다. 음식도 그랬다. 낯선 음식은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뱉고 봤다. 배트맨이었다.
그런 현승이가 회를 좋아하고, 육회에 환장하더니 흐물흐물 닭껍질까지 접수하는 것은 순전히 누나 효과이다. 누나 채윤이는 태어나본 세상이 만만했고, 맞서볼 만했다. 뭐든 오기만 와라 부딪혀 이겨줄 테니! 하며 다가가는 영혼이었다. 그런 누나를 앞잡이 삼아 놀고, 또 놀다 보니, 그런 누나의 살아 있는 장난감으로 생애 초기를 살다 생긴 감각이 있다. 닭껍질을 즐기는 감각이랄까. 그런 감각들.
누나 효과 뿐이랴. 엄마 효과도 있고, 아빠 효과도, 어릴 적 키워주신 할아버지 효과도... 자라서는 친구 효과도 있었겠지. 닭껍질 먹는 열아홉 현승이 되기까지. 현승이 뿐이랴. 나도, (그리고 당신도) 인생길 걸어오면 만난 수많은 사람들 효과로 오늘 이 모양을 살고 있겠구나.
끝날 듯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사춘기. 내가 '신앙 사춘기'에 대한 글이나 강의에서 자주 쓰는 표현인데. 진짜 사춘기가 그렇다. "엄마, 나랑 산책 한 번 할까? 오늘 한 번도 안 나갔잖아?" "오늘 친구랑 미금역에서 죽전역까지 걸었어. 얘기하면서 걸었지." 현승이가 이런 말을 할 때, '녀석 사춘기가 완전히 끝났네'라고 생각한다. 사춘기를 알리는 여러 지표가 있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걷기 싫어하기'로 그 신호탄을 터트렸다. 채윤이 5학년 때, 영월 하루 여행 갔다가 '걷기 싫어하기' 증상이 발현하여 '한반도 지형'을 코앞에 두고 보지 못하고 돌아온 일은 유명한 일화다. 그 어간 설악산에 가서 흔들바위까지 걷고 돌아오는데, 어르고 달래고 혼내면서 울산바위 올랐다 내려온 에너지를 썼다고나 할까. 여행 가서 '기분 잡치기'의 시작은 생각해보면 '걷기'에 있다. 여하튼 두 아이 다 사춘기가 끝나고 집에서나 밖에서나 크게 문제가 없다. 성향이 다른 성인 넷이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 느낌. 여름휴가에서 모처럼 속 뒤집어지는 걸 경험했다. 날씨도 선선하여 걷기 딱 좋은 날씨, 양떼목장을 걷는 느낌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쓰레빠 신고 마스크로 가린 입이 댓 발 나온 한 녀석만 아니었으면 완벽했는데. 속은 뒤집어지지만 기분까지 잡치지 않기 위해 피차 조심하다 조용히 타협했다. "나는 저 아래 가서 기다리고 있을래. 셋이 갔다 와." 하이고, 바로 내가 하려던 말이었다. 셋이 마음 편히 신나게 걷고 사진 찍고 돌아 내려오니 나무 아래 저러고 먼 산 보고 앉아 계시는 분. 사춘기는 지나갈 듯 지나갈 듯, 쉽게 끝나지 않는다.
엄마빠 사이에서 '우웃짜' 하면 걷는 것 좋아하는 유아기.
엄마빠랑 어딜 가도 좋아서 뛰고 날고 하는 아동기.
엄마빠랑 어디 가는 게 귀찮고 싫고, 특히 걸어가는 건 더 싫은 사춘기.
엄마빠랑 어디 갈 때마다 맥락없는 지랄 떨었던 사춘기 시절에 대한 성찰과 함께 미안함으로 애써 함께 잘 놀아주는 성인 초기.
(여기까지 키워봤다.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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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쩌다)
걷는 게 무조건 좋은 중년기.
"내 방만 업쒀~어! 여긴 내 공간이야아~! 이거 치우라고! 여기 앉아 있찌 말라고~오!" 라고 강짜를 놓으며 살고 있는데, 올여름은 좀 진심 미안하게 되고 있다.
말하자면 거실 탁자가 작업실인데, 글이 안 써지고 강의 준비가 풀리지 않으면 옆에 알짱거리는 아무라도 붙들고 신경질을 낸다. 너 때문에 지금 정신 산란해서 글이 안 써지는 거야!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집중을 할 수 있겠냐고! 그러고 보면 내 성질에 딱 맞는 작업실이다. 남 탓하기 좋아하는 내게, 어떻게든 사람과의 끈이 있어야 일을 하는 내게 말이다. 그런데 여름이고, 뜻밖의 줌 강의가 상시로 있는 요즘. 에어컨 있는 유일한 공간을 혼자 차지하고 있으니 보통 미안한 일이 아니다. 가족들은 각자 자기 방에 갇혀 선풍기 하나 씩 끌어안고 더운 공기를 돌리며 버티고 있다. 찍소리도 못 내고... 강의 쉬는 시간이면 찜질방 가족들 숨 쉬는 시간. "하아, 쉬는 시간이야?" 하고 나와 물 마시고, 에어컨 쐬고 들어간다. 과연 현승이가 별명을 잘 지었지. '마키아신실', JP&SS는 종필과 신실의 사랑이 아니라 '조폭신실'. 올여름 가족들에게 진심 미안하게 생각함. "미안해, 내 방이 제일 좋아!"
온종일 밥하고 먹을 때 외에는 거실 탁자에 앉아 있다. 일찍 자러 들어갔다 아침에 나온 현승이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난 나를 보면 "엄마, 설마 어젯밤 그 상태로 밤새고 앉아 있는 건 아니지?"라고 한다. 안 놀아주고 노트북과 책만 들여다보는 엄마의 주의를 끌기 위해 별 짓을 다 하기도 한다. 현승이 어떤 면에서 창의력이 뛰어난 아이인데, 방학이라 어디 발휘할 데도 없고, 그렇다고 전처럼 시를 쓰거나 하지도 않으니 쓸데없는 곳에 창의성을 과소비하고 있다. "현승아, 주방 가는 길에 냉장고에 있는 보이차 좀 갖다 줘." 주문하고 하던 일 하고 있으면, 괴이하고 귀여운 알바 복장으로 배달을 온다던가. 책상 위 아무거나를 걸치고 나와 노트북 너머에 가만 앉아 있는다든가, 호롱불 들고 베란다로 나가 유리창 사이에 두고 얼굴을 들이밀기도 한다. 적극적일 때는 남매가 같이 엽기춤을 만들어 말없이 추고 사라지기도.
쓸데없이 낭비하는 어떤 것들이 더운 격리 세상을 버티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 창의력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현승이 사진들 올렸다 심의에 걸려 바로 내렸습니다. 줌 강의 준비하며 카메라를 거울 삼아 단장하는 엄마와 엄마를 찍는 채윤이, 엽기 댄스 추는 남매 사진 정도 허락받아 걸어봅니다. 조폭신실, 마키아신실 다 죽었습니다.
태어난 지 백일이 안 된 아이가 끙끙 몸을 뒤틀다 뒤집는 걸 보면서 놀라고 행복해 뒤집어졌던 기억. 현승이 성장을 보며 잊을 수 없던 순간이었다. 성장과 발달. 먹이고 씻기고 재웠을 뿐인데 세워 안으면 끄덕끄덕 하던 목에 힘이 들어가고, 천장만 보던 아이가 뒤집고, 혼자 앉고, 배밀이로 기동력을 장착하는 것, '엄므, 엄므'하고 부르는 것.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몸과 마음이 발달하듯 신앙과 영성도 발달단계가 있다. 애 둘 쯤 키우고 나면 말이 조금 늦는다고 안달할 일이 아니구나, 알게 된다. 개인차가 있지만 결국 말을 하고, 응가를 가리게 되더라는.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성장한다.
유아세례 받았던 현승이가 2020년 송년주일에 입교를 했다. 아이의 신앙 발달의 변화가 블로그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섯 살 현승이는 무소부재 하시는 성령님께 총을 쏠까 고민했었다. 열다섯 살 현승이는 차별과 폭력을 그대로 두시는 하나님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열여섯 쯤 되었을 때, 사춘기의 정점에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운운하는 엄마 아빠를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교회를 싫어라 했고, 늘 분노에 차 있었다. "나는 하나님 안 믿어. 아빠가 목사니까 교회는 안 빠지고 가는 거야." 차라리 이렇게 말할 때가 낫다. 말보다 찰나의 눈빛, 그 강렬함이라니! 그 냉소의 눈빛은 좌우에 날이 선 검이 되어 내 마음을 베어냈다. 아이들은 내 말이 아니라 삶을 보고 배운다. 교회를 향한 실망, 그 이상의 절망, 절망 그 이상의 냉소는 내가 가르친 것일지 모른다. 강요로 얻는 건 강요하는 그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발심일 뿐임을 안다. 더는 혼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강압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엄마, 나 하나님께 실망했어."라고 말하면 "엄마도 가끔 그래."라고 공감해 줄 수도 있었다. 헌데 그 차가운 눈빛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목사 아들이니 교회는 빠지지 않고 가지만 하나님께는 가까이 가지 않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그 지점에선 심장이 툭 떨어지고 기도만 나왔다. 기도하기 때문에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기대는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신앙 발달,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났지... 이제는 제 몫이고, 그분과 현승이 둘 사이의 문제야, 하면서.
2020년 송년주일에 현승이가 입교를 했다. 자발적인 입교다. 신앙고백서를 썼다. 혼자 쓰고 입교를 집례 하는 목사인 아빠에게 제출했다. 현승이를 안고 나란히 서서 유아세례 받던 2003년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17년 후 목사가 되어 현승이 입교 집례를 하게 될 줄이야. 현승이 신앙 고백문을 읽으며 여러 대목에서 울컥했다. 유아세례는 우리 부부의 선택이었지만 입교는 현승이 자신의 선택이다. 부족한 내 삶과 신앙으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했다. 그런 마음으로 키우겠노라 다짐하며 유아세례를 선택했다. 입교는 아이이 몫이다. 내 삶과 신앙이 너무 큰 걸림돌이 되지 않길. 우리 아이들이 자기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에서.
신앙고백_김현승
나는 작년 그리고 제 작년에 입교를 받을 상황이 되었고 받는 게 시기상 맞았지만 받지 않았다. 스스로 입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믿음에 확신이 있고 하나님에 대해 의심할 부분이 조금도 없는 사람만 입교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주일학교 다른 형, 누나, 동생이 입교를 받는 것이 조금 섣불러 보였고 어리석게 보였다. 이런 내가 이번에 입교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내가 아주 간단하면서 어려운 사실을 하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확신과 의심에 관한 사실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에 대한 질문이 많이 있었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성경에 오점을 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을 것을 결과적으로 아셨을 것인데 그렇다면 왜 굳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놓으셨을까? 가룟 유다는 왜 스스로 죽었을까 부끄러움 때문인가? 가룟 유다가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 아닌가? 이렇게 성경에 대한 질문, 약간은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하는 질문을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생길 때마다 아빠에게 물어봤다. 아빠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처음에는 ‘엥’ 했지만 결국에는 ‘아’하고 이해가 되었다. 아빠랑 입교에 관해 얘기하던 어느 날 아빠가 내가 입교를 받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고 그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백 프로 확신이 없어도 입교를 받는 것도 괜찮다고 말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오래 생각해봤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백 프로 확신이 있나? 아니다. 그럼 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나? 맞다. 나는 확신이 없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많다. 성경에 대한 질문이 많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은 것도 많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이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힘들 때 좌절될 때 결국 내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이 힘들어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때, 유럽 여행을 가서 친구들 새로운 환경에 적응 못 해 두려워할 때 결국 나는 하나님께 나를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믿고 확신이 있다는 증거 같다. 나는 질문이 생기는 확신은 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의 말을 듣고 내 삶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니 내가 하는 하나님, 성경에 대한 질문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구나 싶었다. 내가 질문하는 이유는 못 믿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알고 싶어서 질문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고 믿는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 더 궁금하고 더 알고 싶다. 이번 입교 교육을 받고 입교, 세례에 대해 생각했던 기간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정리하고, 그다음에 정리한 다음 또 정리하는 나날. 정리 대장 아빠가 인형 보따리를 풀었다. 한 번씩 "이번엔 싹 다 버리자" 해놓고도 막상 하나 씩 눈을 맞추면 또 집어넣게 된다. 이건 할아버지가 사주신 거, 이건 학교 바자회에서 처음으로 산 것, 내가 이렇게 하고 들고 왔잖아... 한 놈 한 놈이 다 사연이 있다. 가장 오래된 미키 미니 인형은 데이트 시절 남편에게 처음을 받은 선물이다. 철학과 4학년 학생 JP가 나름 큰돈 썼던 거고, 당시 미키 미니 덕질에 빠져 있던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못 버림. 테디 베어 네 마리는 채윤이 현승이 각각 두 마리씩 소유인데, 어쩌면 그렇게 어릴 적 채윤 현승을 꼭 닮았다. 특히 교복 치마에 츄리닝 바지까지 입은 테디는 당시 중학교 1학년 김채윤 그 자체. 그래서 못 버림. 결국 하나도 못 버리고 깨끗이 빨아 각자 사연의 주인공들이 끌어안고 흩어졌다.
그 와중에 구원받을 것인가, 버려질 것인가, 기로에 서서 아니 누워서 운명의 선택을 기다리는 애들을 놓고 잔인한 놀이 중인 열여덟 살 현승이. 양손에 주방 집게 하나 씩 들고 '인형 뽑기' 놀이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노트북 쳐다보고 있다 옆에서 저러는 열여덟 살 보고 녹았다. 이런 게 그렇게 좋더라. 나는.
일이 있는 날이라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빠지면 당연히 무산될 줄 알았는데. 이런, 쿵떡쿵떡 시간 계획을 세우더니 셋이서만 다녀왔다. 어, 이 사람들 봐라! 마키아신실, 조폭신실(JP&SS), 우리 집 실질적 군주인 나를 제쳐두고 나들이를 도모해? 3할 정도 섭섭, 7할은 홀가분이었다. 돌베개 출판사의 책 몇 권과 도서목록을 한 보따리 싸들고 와서는 전에 없던 관심 폭발이다. 엄마 우리 집에 신영복 선생님 책이 있어? 엄마는 뭐뭐 읽었어? 감옥에 몇 년을 계신 줄 알아? 나는 이제 한자 공부를 좀 하려고. 한자를 알아야 책이 잘 읽어지는 것 같아....... 사연인즉슨, 돌베개 출판사의 편집주간이신 S선생님을 만나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꿈과 진로가 1년에 한 번씩 바뀌는 현승이가 최근 아빠에게 '책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묻고 한참 얘길 나누곤 했다. 그 대화 끝에 아빠가 나름 뜻을 가지고 계획한 나들이였던 모양이다.
'휴먼 라이브러리'라고, 두 아이들 모두 안식년 '꽃친'을 하면서 했던 활동이다. 말 그대로 다양한 어른을 직접 찾아가 만나 대화하면서 배움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영락없이 휴먼 라이브러리였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진 않았지만 두 아이 모두 새롭게 책에 관심을 가지고, 주신 책을 집에 와 앉은자리에서 읽어버렸다. 채윤이는 그 다음날 바로 중고서점에 가서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사 왔다. 현승이는 대안학교에 가서 한참 느슨한 생활을 하다 성적표 날아온 날, 조폭신실 엄마에게 벼락을 맞았다. 벼락을 내렸으니 제우스 신실. 참고 참았던 걸 한 번에 터뜨려 줬더니 식겁해서는 자발적(벼락 맞은 후니까 자발적이 아닌 건가?)으로 몇 가지 절제 규정을 정하고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책을 다시 열심히 읽겠다며 김훈의 <남한산성>을 뚝딱 읽더니 <칼의 노래>를 붙들고 있는 중이다.
정말 좋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으면 좋은데, 어느 새 커서 김훈, 신영복 같은 거장의 책을 함께 읽고 자연스러운 수다를 떨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렸을 적부터 "읽고 쓰는 것을 꾸준히 하고, 즐거워한다면 어떤 직업을 가져도 된다."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다고 책을 열심히 사주거나 독서 일기를 쓰게 하거나, 제대로 교육을 하지도 못했다.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있고. 보니까 채윤이는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엉덩이가 아닌 것 같다는 섣부른 판단을 하기도 했다. 현승이가 한때 솔직한 일기를 쓰고, 시를 짓기도 했지만 정말 '한때'였다. 다 큰 아이들을 억지로 읽고 쓰게 할 방법은 더더욱 없다. 대학에 간 채윤이가 제 안의 궁금증을 책으로 풀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도록 반가웠다. 내 책장의 페미니즘 책을 기웃거리고, 어떤 저자에 꽂혀서 읽고, 필사하고. 그 어떤 모습보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읽고 쓰는 힘이 제일이다. "나는 모른다. 배울 것이 있다. 배워야겠다”라는 태도로 읽고, 그러다 한 저자에게 푹 빠지고, 그 저자가 소개하는 다른 저자를 새로운 선생님으로 만나고. 이럴 수만 있다면 좋은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한다. 또 자기 경험을 글로 쓸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과 아픔을 겪더라도 결국 그 상처를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무늬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이고,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드는 확신이다.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다 보면, 어쩌면 그렇게 다양한 아픔이 있을까 싶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를 진행하던 처음 얼마 동안은 매 시간 글로 나온 고통의 무게에 압도되어 몸과 마음 가눌 수가 없었다. 회가 거듭되면서, 사람 사람 글이 이끄는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서 달라졌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에겐 자기 존재를 지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이 아무리 커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 고통보다 더 큰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참여자들은 글이 이끄는 길을 따라 필연 내면의 아픔을 만나게 된다. 글을 듣다 보면 늘 명치 부분에 통증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압도되진 않는다.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아직 인정할 수 없지만 발설하는 고통보다 그분 안에 있는 더 큰 힘이 내겐 보인다. 글을 쓴다는 것, 정직한 글을 쓴다는 것을 그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평생 쓰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보여주기 위한 글, 허세 가득한 글이 아니라 절실하고 진실한 글 말이다. 작가가 되는 글이 아니라, 자가 치유와 자가발전의 기반이 되는 글 말이다.
성인이 되어 자기를 찾느라 흔들리고 방황하는 채윤이도, 청소년기 끝에서 막막한 나날을 사는 현승이도 그저 읽고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