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제목 ‘슬픔을 쓰는 일’이 요 며칠 자꾸 '슬픔을 내놓는 일'로 읽힌다. 내놓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그렇다. 출간은, 특히 내게 있어 책을 내는 일은 '사연 팔이'이다. 이것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며, 모든 글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쓴 사람의 사연이 스며들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잘 알면서도 내놓는 일은 늘 새롭게 감수해야 하는 부끄러움이다.

내적 여정 세미나든 글쓰기나 꿈 작업에서든, 많이 내놓는 사람이 많이 성장한다. 그런 모임에서 내놓아야 할 것은 포장지로 싸고 싸고 또 싸매 뒀던 이야기들이다. 자랑스러운 것을 꽁꽁 싸매 둘 리 없다.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내놓는 순간 취약해진다. 갑옷 안에 감춘 연한 살이라고 할까, 아니 상처 난 피부 같은 것이다. 말 한마디, 눈길 하나로 더 아파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용기 내어 감수하는 사람들이 치유와 성장을 경험한다. 무수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다. 먼저 내놓고 많이 망가지는 사람이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 이것을 안다. 잘 안다. 안다고 쉬워지진 않는다. 알기에 다시 내놓지만, 빛나는 보상이 거저 주어지진 않는다. 부끄러움과 아픔을 다시 마주해야 하고, 모르는 발길에 차여야 할 것도 각오해야 한다.

안다고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알기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내놓고 얻는 소중한 것을 알면서 내놓지 않을 방법이 없다.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내놓지 않을 방법이 없으면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피할 길도 없으니, 이렇듯 징징거리기라도 하려고. 오늘 종일 마지막 교정을 보려고 한다. 일단 펼치면 금방 할 텐데, 첫 페이지 펼치기가 이렇게 어렵다. 조금만 징징거리다가 여자답게, 힘차게, 냉정하게 펼쳐야지.

일단 서문 전체를 내놓는다. (페이스북에는 엊그제 서문 일부를 찔끔 내놓았다.)

<슬픔을 쓰는 일> 서문

쓰인 글
이 책은 쓴 것이 아니라 쓰인 글이다. ‘미친년 글쓰기’라는 원색적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제 와 이름을 붙이자니 ‘애도 일기’이지, 당시에는 슬퍼하거나 애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글을 한 편 썼는데, 그러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쓰고 나면 읽을 힘이 생겼다. 애도에 관한 세상 모든 책을 읽을 기세로 읽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읽기 위해, 하루를 살기 위해 썼다. 이런 날들을 지내며 ‘미친 정신’이 제정신으로, 쓰이던 글이 쓰는 글이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첫 글이 ‘쓰인’ 글이라면, 장례 후 육 개월 즈음에 쓴 마지막 글은 ‘쓴 글’이다. 탈상이다! 힘을 다해 마지막 문장을 쓰고 강한 의지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니 첫 글과 마지막 글 사이는 쓰인 글과 쓴 글의 그러데이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쓰인 글에서 쓴 글로 바뀌게 된 힘은 사람, 독자에게서 왔다. 나는 어떤 글이든 의식적으로 독자를 세우려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읽을 만한 글이 된다. ‘쓰인’ 글에서는 독자를 상정할 수 없다. 그저 나 자신 쓰는 사람이며 동시에 읽는 사람이었다. 실은 그런 의식조차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랜 습관대로 독자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아니라 아홉 살에 엄마를 잃은 친구, 그리고 중학교 때 엄마를 떠나보낸 제자, 두 여성이 명확하게 내 안에 떠올랐다. 글을 써서 그나마 숨도 쉬고, 밥맛을 느끼게 되니 엄마 잃은 다른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싶었다. 이 나이에, 글로 애도할 힘이 있는 나도 이렇게 막막한데 친구는, 제자는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쓴 글
심리치료를 공부하고 아픈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오늘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애도하지 못한 언젠가’에서 기인한 것임을. 그때 충분히 울었어야 했는데 울음을 삼키고 슬픔을 막아버린 탓에 몸과 마음의 숨 쉴 구멍들이 하나둘 막혀버린 것이 오늘의 고통이라는 것을. 과연 재난 같은 슬픔 앞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조차도 글을 쓰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애도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어쩌다 내가 글로 숨을 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은총을 혼자 누릴 수는 없으니 엄마 잃은 누군가를 위해 어떻게든 끝까지 써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쓰인’ 글이 ‘쓰는 글’로 온전히 탈바꿈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의 마음, 엄마 잃은 딸의 마음을 내보여 같은 상실을 경험한 이들과 연결되고 싶어 졌다. 이제라도 내 글을 읽으며 뒤늦은 슬픔을 느끼고, 애도의 공간으로 들어갈 누군가를 상정하니 힘이 났다.

쓰게 한 글
내 슬픔을 누군가의 슬픔에 잇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숨 쉴 공간이 생겨났다는 증거다. 연결은 치유의 증거다. 나에게 글쓰기는 치유이자 연결이다. 일찍 아버지 없는 아이가 된 나를, 엄마마저 잃을까 봐 두려움에 볼모 잡힌 나를, 엄마를 잃고 따라 죽고 싶은 나를 오늘의 나, 생명을 사는 나와 이어주는 것이 글이다. 외로움과 자기연민으로 고립된 나와 아픈 이웃을 이어주는 길이다. 글이 내는 길, 글을 쓰다 열린 길이다. 출간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하염없이 써야 했을 것이다. 탈고를 핑계 삼아 마지막 글 ‘탈상’을 썼다. 그리고 작정한 바는 없었는데 숙원인 글쓰기 모임을 열었다. 치유 공동체로 일구고 있는 연구소 프로그램으로 여성들의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뚜껑을 열고 보니 나를 위한 애도 작업의 연장이었다. 짧은 강의를 내어주고 투명한 글을 선물로 받았다. 각자의 ‘그때’ 충분히 울고, 충분히 분노하지 못한 기억을 글로 써서 낭독하며 숨 쉴 공간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물론 내게도. 특히 나에게 그러했다. 쓰인 글이 쓴 글이 되고, 이제는 ‘쓰게 한 글’이 길이 되고 있다. 글이 낸 길은 이렇듯 사람들로 가 닿는다. 글이 아니라 글을 읽어주는, 들어주는 사람이 치유인지 모른다.

날아든 글
원고를 다시 읽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출간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피하고 싶었다. 쓰던 그 순간과 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끝까지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더는 미룰 수 없었고, 어느 밤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날 오후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 내가 산다는 것은>이란 제목의 번역물이었다. 작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친필 엽서와 함께였다. IVP 신현기 (당시) 대표님이 직접 번역하신 것이었다. 앞장에는 이런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이 번역본은 정신실 작가의 저술 참고용에 한하여 사용하도록 초역하여 제공한 것으로,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전부 혹은 극히 일부라도 복사는 물론 열람할 수 없습니다’. 번역물을 펼치기 전 그 문구에 머물러 한참을 울었다. 공식 문안일 텐데, 공식적 문장에 이렇듯 위로받을 수 있다니. 그리고 그 밤, 그 글을 읽으며 제대로 치르지 못한 엄마의 장례식을 마저 치른 것 같다. 차마 읽지 못했던 내 글을 다시 읽고 탈상, 아니 탈고를 할 수 있었다. 쓰인 글도, 쓴 글도, 쓰게 한 글도 아닌 ‘어떤 글’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신현기 대표님께 그때 감정에 복받쳐 차마 전하지 못한 감사의 말씀을 뒤늦게 전한다. 편집자 심혜인 간사님 아니었으면 블로그 한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할 글이었다. 따뜻한 독자로, 날카로운 편집자로 들어주고 다듬어주고 함께 해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출간 과정 자체가 애도 작업의 연장이었는데, 두 분과 IVP 출판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슬픔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내 곁에서 ‘오늘이 선물’이라고 한결같이 노래해 준 남편 김종필과 채윤 현승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한다. 아기가 된 엄마를 마지막까지 돌보고 보살폈던 올케 이선영에게 특별한 감사와 미안함을, 매일 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웃게 했던 조카들 수현, 우현, 세현이에게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내 동생 정운형. 나와 똑같은 아버지 상실, 엄마 상실을 겪었지만 나보다 강한 사람으로 서서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동생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인생의 동지이며 믿음직한 글벗이기도 한 운형아, 고맙다. 마흔다섯 늦은 나이에 나를 낳고, 그리고 또 동생을 낳아준 엄마가 가장 고마운 것 같기도 하고.

김영봉 목사님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을 비롯한 여러 저서, 박정은 수녀님의 <슬픔을 위한 시간>, 박미라 선생님의 <치유하는 글쓰기>. 일찍이 책으로 만난 좋은 선생님 덕에 애도와 글쓰기에 대해 예습을 할 수 있었다. 세 분 추천사에 미치지 못하는 글의 무게가 부끄럽지만, 그래서 더욱 큰 위로가 된다. 세 분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세 분의 글이 나를 준비시켰듯, 나의 글이 어느 독자에게 닿아 온전히 슬퍼하고 다시 살아 살아낼 힘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부모를 잃은 사람, 언젠가 부모를 잃은 사람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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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긴 장례식'이라며 쓰기 시작한 글.

'애도 일기'라는 보다 객관적인 이름을 붙이고 매만진 끝에

<슬픔을 쓰는 일>이라는 얼굴로 세상에 나온다.

네 개의 최종 표지 시안이다.

 

애도 일기의 시점이 '현재'라면

국화 한 송이 표지가 적절하다.

노란 표지는 말 한마디 필요 없는 슬픔 그 자체이다.

적나라한 슬픔, 그 무엇도 아닌 슬픔 그 자체의 노랑이라면

분홍의 국화엔 엄마와 딸이 어른거린다.

 

이것은 찬란한 슬픔이다. 

보자마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내가 전화통 붙들고 찬송으로 통곡했던 그 순간,

엄마와 동생과 내가 전화기로 연결되었던 시간을 일컬어

맨 처음 남편이 붙인 이름이다.

찬란이라니, 그런 사치스러운 형용이라니.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느새 받아들이고 있는 나다.

 

출판사에서 표지를 두고 페이스북에 독자 투표를 했는데,

"찬란한 슬픔"이란 말을 떠올리신 분이 있어 깜짝 놀랐다.

그중 한 분은 한때 이웃사촌이셨던, 우리 아이들의 털보 아저씨 김동원 선생님.

 

넷 중 어느 하나도 쉽게 버려지질 않는다.

책을 출간하며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편집 일정에 맞춰 자연스럽게 부각되는 표지 하나가 있기 마련인데,

갈수록 자연스럽게 네 표지 모두 다른 의미로 아름답고 소중해지니 말이다.

어쩐지 이번 책은 내 마음속에 네 개의 표지로 남는 책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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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사춘기』 출간한 지 1년 하고도 몇 개월 지났다. 개인적, 국가적, 전 지구적인 위기를 통과하는 시간이 끼어서인지 한 10년은 된 일 같다. 아직 좀 살아 있어야 하는 책인데...... 소도시에서 목회하며 6,7년 꾸준히 책모임 해오시는 목사님들과 '저자와의 만남'이란 거창한 이름의 소소한 '만남'을 가졌다. 만남은 좋은 것이다. 만남이 좋다고 말해서는 소용이 없다. 만나봐야 만남이 좋음을 알게 되는 것. 어쨌든 만나보니, 만남은 좋은 것이다. 덕분에 내게도 희미해진 책 신앙 사춘기』를 다시 떠올렸고, 무엇보다 그 아픈 글을 써낸 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독서 모임에서 읽으셨다는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과 , 신앙 사춘기 두 권 모두 보통의 목사님들에겐 불편한 책이다. 어떻게들 읽으셨을까. 보수적인 도시에서 목회하시는 분들께 특히 신앙 사춘기』가 어떻게 다가갈까. 상상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저자를 만나고자 하시니 긍정적으로 보셨던 걸까? 도둑 제 발 저리는 느낌으로  "책이 불편하진 않으셨냐?"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흔들리는 동공과 주고받는 눈빛으로 답해주셨다. "불편했죠." 그래서 '불편'을 기본값으로 깔고 시작했다.

 

마침 우리 아버지가 속하셨던 교단의 목사님들이다. 신앙 사춘기』 쓴 배경 설명을 아버지 얘기로 시작했다. "아버지가 저를 58세에 낳으셨어요." "네~에?" 여기서 다들 놀라시지만 총알이 하나 더 있다. "더 놀라운 얘기 해드려요? 저한테 동생도 있어요. 동생은 환갑 둥이예요."(기본값 '불편감' 20% 제거 : "세상에 이런 일이!") "아버지는 평안도 철산 출신인데, 1.4 후퇴 때 월남하셨어요. 평양신학교를 다니던 신학생이었고, 월남해서는 부산으로 이전한 '평양신학교'를 다니셨습니다. (불편감 10%  또 제거 : "우리 대선배님이시네!") 홀로 목회하시다 늦은 나이에 교회 집사와 목사로 엄마를 만나셔 결혼하셨고, 그렇게 늦게 저희를 낳으셨어요. 저는 목사의 딸로 태어나서 교회의 딸로 자랐어요. 고등학교 때 주일 끼어서 가는 수학여행 당연히 가지 않았고요. 청년 시절, 토요일 주일은 밥도 못 먹으며 봉사했어요. 청년부 주보 편집, 성가대 지휘에. 직장 생활하는데 주일 출근하란 말에 사표 내고 나왔고요. (불편 값 20% 제거 : "태생이 삐딱한 건 아니구먼. 청년 시절로 치면 나하고 비슷하네!") 한 교회에서 만난 남편이 결혼하고 한 6년 후에 신학을 했어요. 모교회에서 부교역자로 봉사하면서 신앙 여정에서 지진이 났지요. 내 인생 가장 존경하던 목사님이 저런 분이었어? 교인들 대하는 얼굴과 부교역자 앞에서 얼굴이 이렇게 다르다고?!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신앙에 균열이 오기 시작했어요. 그로부터 한 10여 년 그야말로 신앙의 사춘기를 겪었고, 그 시절을 통과하고 나서 쓴 글이지요."

 

이런 얘기를 하는 동안 불편감이 조금씩 제거 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무장해제 되었고, 긴장이 사라졌다. 첫 질문하신 목사님께서 "사실 처음 책을 읽었을 때는 불편했는데, 지금 말씀해주신 것으로 이미 다 이해가 되었다"라고 하셨다. 오랜 시간 독서 모임을 이끄셨고, 내 책을 모임에 추천하셨고, 저자와의 만남을 주선하신 목사님께서도 솔직한 말씀을 하셨다. '책을 추천하고 나눔을 하면서 당황했다. 책을 추천하고 나눔을 준비하며 좋은 반응을 기대했다. 내 기대와 달랐다. 나는 저자를 아니까,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한데 책만 읽은 목사님들의 반응이 달라서 당황했고, 나눔을 진행하다 내가 준비한 모든 것을 포기했었다.'

 

사람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안다는 것은 얼굴을 마주하는 일이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나눈 대화는 책 너머의 진실을 전하고 듣는 시간이 되었다. 나도 안다. 의식하고 썼다. 신앙 사춘기』는 치우친 책이다. 부러 목사를 몰아세웠다. 목사에게 상처받은 사람이 많아서 그랬다고, 서문에 썼지만 더 아픈 뜻도 있다. 내 아버지, 내 남편이 목산데 목사가 욕먹는 현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내가 던지는 낫겠다 싶어 선택한 '위치'인지 모르겠다. 내가 먼저 던지자. 내가 먼저 큰 돌을 던지자. 실은 내 마음은 목사님들, 교회 개혁 따위 모르는 착한 교인들에게 가 있다. 신앙 사춘기』를 써내놓고, 여기 담긴 글들이 교회를 조롱하고 목사들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소비되는 것이 가슴 아팠다.

 

여하튼 불편감이 많이 해소 되었다. 책이 아니라, 글이 아니라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 나누니 불편한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함께 하신 목사님들의 불편감을 얘기가 아니라 내 것을 말하는 것이다. 쓸 때도 알았고, 출간하고도 알았지만 "아, 나 그때 일부러 치우치기로 작정하고 썼던 거구나! 맞아, 그랬지. 그래서 한 편 한 편 쓸 때마다 울지 않을 수 없었어." 치우치기로 작정했기에 더 멀어진 반대쪽을 바라보며 울 수밖에 없었음을 다시 알겠다. 그 반대쪽에는 우리 부모님이 있고, 불과 얼마 전까지의 내가 있고, 목사로 살아야 하는 내 남편이 있으니까. 불편한 곳에 머무르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인가. 불편한 곳에 머물러 내가 쓴 글의 이면을, 나의 이면을, 내 마음의 이면을 새롭게 만났다.

 

인사말로 50% 정도의 불편감은 해소되었다. 대화가 무르익어 가면서 나머지 50%가 해소된 것은 물론이고 200%의 공감으로 연대감이 형성되었다.  그 이야기...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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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이 최근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자신이 내놓은 작품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소비할 때 작가는 뭔가 제재를 해야 한다고. 본인은 그러지 못했고, 돌아보면 그래야 했었다는 얘기였다. 어떤 마음인지 알겠으나 막을 수 있는 일인가 싶다. 출간은 물론이거니와 신변잡기 한 줄이라도 SNS에 쓰는 행위는 읽는 사람 마음대로 읽히기를 각오하는 일이다. 저자거리에 내놓을 때는 이미 독자의 것이다. 현시욕에 불타 자기를 쓰고 드러낼 수 밖에 없는 사람이 감수해야 할 마땅한 짐이다. 라고 생각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하늘빛 향기'에 출연한 영상이 한 주간 방송되고 유투브에 올라왔다. 내 영상 오글거려 못본다는 칭얼거림도 그만 해야겠다. 남편과 함께 방송을 봤다. 첫 시청자이고, 가장 많이 신경 쓰이는 시청자이니 평이 궁금할 수 밖에. 어째 표정이 좋질 않았다. (언제는 표정이 좋은 사람인가요?) 안타까운 마음이라고 했다. 책 내용은 더 비판적이고, 무엇보다 구조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지나치게 개인적인 간증으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내 표정에서 더 얘기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읽혀졌다고 했다.


촬영하고 나서는 홀가분하고 마음이 가벼웠는데 남편의 말에 덮어두었던 감정과 생각이 올라왔다. 처음 방송 섭외가 왔을 때 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매체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다. <신앙 사춘기>가 담지한 날것의 감정들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진보 언론에 기고한 글을 '간증'이라는 형식으로 말로 푸는 것인데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솔직하게 말씀 드렸다. 담당 작가님 말은 괜찮을 거라고 했다. 


방송 전 인터뷰를 하고 나서는 자괴감이 들었다. 역시나! 책에 담은 바로 그 이야기가 나오질 않았다. 간증이라는 형식의 한계이자 은혜로운 방송이라는 제한 때문이었다. 하지 말 걸 그랬다. 방송에 나갈 걸 생각하니 기도가 절로 나왔다. 작가가 책을 내고 책에 담은 얘기를 솔직하게 할 수 없다는 건 최영미 시인이 말하는 원치 않는 방식으로 소비되는 일에 작가 스스로 앞장 서는 일이 아닌가. 


막상 촬영 때는 편했다. 동창 윤유선과의 반가운 만남 덕이기도 하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구획을 확실하게 긋었기 때문일 것이다. 막상 방송을 보고 남편의 반응을 보니 조금 서글퍼졌다. 연재를 시작할 때 '찌르고 싸매는 글'을 쓰겠다고 했다. 그 말이 올무가 되어 벌벌 떨며 찌르느라 울고, 싸매느라 다시 울며 썼다. 헌데 이번 방송에서는 싸매기만 한 것 같아 드는 자괴감이다. 


하루 이틀 마음에 담고 묵혀보니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뉴스앤조이 연재 당시에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소비되지는 않았다. 그 역시 매체의 특성 때문이었을 것. '찌르면서 동시에 싸매기' 위해서 그토록 고통스러웠는데 정작 독자들은 자기 입맛에 맞게 찌르는 용도로 공유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교회가 싫고 특히 목회자를 혐오하는 이들이 자기 방식대로 가져다 쓰는 것을 보면서도 자괴감이 들었었다. 


쓰는 나의 마음 그대로를 읽어줄 독자가 어디 있겠는가. 가당치 않은 일이다. '책만 보는 바보'라 불리는 나 역시 책을 통해 나를 읽는다. 찌르는 칼이 되든 싸매는 붕대가 되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어쩌면 그리고 나는 (아직) 착하고 순한 그리도인들에게 더 애정이 많다. 책의 표현대로라면  종교중독자, 착한 나쁜 그리스도인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런 이들은 회개할 것이 있다. 


생각해 보니 내가 바라는 바, 강사로 작가로 소비되고 싶은 방식은 일단 싸매고 서서히 찌르는 식이다. 청년들이 멘토를 찾아 돌아다니며 묻지 말고 스스로 의심하고 책을 읽는 주체적인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는 청년들이 답답하다. 하지만 이미 그러고 있는, 자의식 충만한 청년들은 가르칠 것이 없다. 책하고는 담 싼 청년이 한 권이라도 읽게 만들고, 자기 안의 힘을 믿고 주체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내 기쁨이다. 한 사람, 한 권이면 된다.


페미니스트로서 더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지만 교회 안의 착한 자매들을 얻고 싶어서, 여성의 편이 되고 싶지만 성인지 감수성이 개발되지 못해 죄의식 속에 분노하는 남성을 잘 설득하고 싶어서, 목회자에게 당한 성폭력이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인 줄 알아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조차도 채근과 압박으로 듣는 생존자들과 연결되고 싶어서 늘 어정쩡함에 머문다. 역시나 자괴감 만발이지만 내게 닿은 한 사람을 잃지 않으면 된다.    


찌르든 싸매든, 

칼이 되든 붕대가 되는 

그것은 읽는 사람, 보는 사람 마음이다.

쓰고 말하고 설쳤던 나의 어정쩡함은 내 몫의 짐이다.

칼로 쓰든 가위로 쓰든, 화장실 휴지로 쓰든 마음껏 쓰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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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 사춘기 · 저자 · 분노 · 슬픔 · 시간 · 정신실


강의 제목을 오래 들여다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리고 제목에 담긴 단어를 곱씹다 풀어 헤쳐본다. 내가 하고 싶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정리가 된다. 요즘은 좀 이런 식으로 하고 있다.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 썩 마음에 드는 제목을 뽑았다. 통, 하고 튀어 나와 의식 안으로 떨어진 순간, 됐다! 강의 준비 끝났다! 싶었다. 내가 하고픈, 할 수 있는 얘기는 바로 이것이다. 게다가 포스터가 마음에 든다. 


 <신앙 사춘기>의 주요 독자가 이러이러한 이들일 줄 알았다. 예상이 빗나가 저러저러한 분들이 더 크게 호응을 하셨다. 한 편 한 편 구체적 얼굴을 떠올리며 글을 썼고, 상상했던 독자층이 있는데 어쩐지 빗나가고 있다. 생각지 못한 분들께 뜨거운 공감을 받기도 한다. "아니, 이 글을 언제 쓰셨어요? 우리 교회 얘기를 그대로 다 쓴 거 아녜요?" 노 장로님이 하신 말씀인데, 심지어 이 교회는 이단으로 알려진 교회이다.(최근에 배임 횡령 혐으로 징역 3년 형을 받은 목사) 물론 바로 그 교회 개혁을 위해 싸우고 있는 분들이다. 


교회 개혁에 관한 한 직간접적으로 무수한 경험을 했다. 그 경험으로 '신앙 사춘기'를 쓸 수 밖에 없었다. 경험적으로 상상되는 그림이 있다. 내겐 가장 아프고 안타까운 부분이며, '신앙 사춘기'를 눈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교회 개혁의 기치를 내건 건강한 작은 교회에 관심도 애정도 많다. 교회로 인해 고난을 겪고 광야로 내몰린 교인들이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모아 일군 교회가 아닌가 싶어서 그렇다. 흔한 교회 사태를 겪은 후에 어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떠난다. 또 신앙은 더 절절하되 밝아진 귀와 눈 때문에 어느 교회도 나갈 수 없는 이들도 있다. 자포자기식으로 아무데나 가까운 교회로 가 선데이 크리스천을 자처하기도 한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선택 중 하나일 것이다. 바라고 꿈꾸는 그 좋은 교회를 우리 손으로 만들자! 이런 교회들에 마음이 간다. 당연히 끌린다. 정말 잘 됐으면 싶다. 교회가 무너진 시대 마지막 희망의 보루로 여겨진다. 그 교회들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가 커진다.

 

그러나 어쩐지 갈수록 우려가 깊어진다. 보란 듯이 잘 되어야(?) 건강한교회가 잘 되고 있다는 얘기를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언론이나 SNS에 비치는 것처럼 건강하지도, 공동체적이지도 않은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건강함을 표방하는 교회들의 아픈 사람을 많이 만나는 탓이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목회자는 물론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유하며 교회의 주인 되기로 한 이들이 만든 공동체라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은혜로, 기도로덮다 악까지 덮어버리는 획일화 된 집단보다는 갈등이 있는 공동체가 더 은혜로울 수도 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헌데, 그럼에도 나는 건강한 교회의 건강을 묻고, 안녕을 묻게 된다. 자꾸 묻게 된다. 갈등하고 논쟁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교회의 온전함이 거기에만 달린 것은 아니다


 <신앙 사춘기> '건강한 교회 아픈 사람들' 중

이런 분들의 건강, 진정한 의미의 건강을 기도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공감 독자들을 만나 강의를 하고 조금 놀랐다. '우리 성도들 너무 많이 아픕니다. 정말 치유가 필요합니다' 강의 요청하신 리더들이 수도 없이 하신 말씀이다. 어떻게 아프실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익히 보아온 사춘기 교인들의 흔한 태도가 있지 않은가. 게다가 싸움이 진행 중이며 싸움의 대상은 독재자에 가까운 목회자이니, 이러이러한 긴장, 냉소가 흐르겠구나 싶었다. 그러나 예상이 빗나갔는데 완전히 빗나갔다. 긴장과 냉소 대신 여유라니, 이런 여유라니!


강의 앞뒤로 나눈 대화에서 일정 정도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여유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아니, 몇 가지 이유를 찾았다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것이 무엇이든 얼굴을 마주한 만남은 항상 상상 그 이상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다.  


예상은 빗나갔지만 꼭 하고 싶었던 말을 잘 전하고 왔다. 능력의 종이 안수기도 한 번 한다고 치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일어날 수도 있다.) 치유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성장'을 위해서도 시간이 필요하다. 사춘기 아이가 눈 한 번 감았단 뜬다고 어른 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로선 속이 터져 미쳐 죽어버리겠지만 할 만큼 해야, 충분히 해야 끝이 난다. 충분히 분노하되 분노의 대상을 명확히 하여 이름 붙이고,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이름 붙여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분노를 위한 시간, 슬픔을 위한 시간.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시간, 내게 필요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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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윤유선과 고3 때 같은 반이었어요. 저는 기억하는데 그는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고3 때였고, 그는 연예인이었고, 예체능 입시 준비로 학교도 많이 빠졌죠. 그럼에도 금세 추억여행 수다로 달렸습니다. 학교 앞 떡볶이집 ‘하얀집’얘기. 무엇보다 담임 선생님! 첫 발령 받으신 젊은 남자분이었는데 한 번씩 기타 들고 들어오셔서 ‘사랑의 바람’ 같은 노래를 불러주셨으니! 반 애들이 죄다 심쿵심쿵이었지요. “우리가 그때 선생님 말고 서로에게 관심이나 있었느냐!” 하며 웃었지요.

진행자와 출연자로 한 시간 마주보고 촬영 했습니다. 마치고나서 “장난 가득한 눈동자 보니 이제 기억 난다”고 했습니다. 장난 많이 치고, 선생님 놀리던 친구!... 였었어요. 제가.... 그러고 보니.

<신앙 사춘기>에 담은 이야기로 방송출연 했습니다. 연재했던 매체 ‘뉴스앤조이’를 모르거나 모르고 싶은 분들께 다가가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신앙 사춘기, 가나안 교인 같은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고 내적 갈등에 휩싸이신 분들. 겉은 착한 교인으로, 내면에선 팥죽 끓는 심정으로 지내시는 분들께 닿는 글이 되었으면 싶었는데요. 아프지만 따뜻한 수다로 다가가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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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다 아실텐데, <신앙 사춘기> 클라우드 펀딩 목표 달성하여 책이 나왔습니다. 후원하신 분들께 전달 되었고, 어제 날짜로 온라인 서점에도 얼굴을 내밀었고요. 저는 약속 되었던 텀블벅 리워드 강의와 집단상담 소화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방식의 출간을 경험하며 또 배웁니다. 하고픈 많은 말이 있지만 한 마디로 하자면 '나 잘난 맛'에 살던 날에의 회개입니다. 한 분 한 분,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분들의 '밀어줌'의 무게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가까이서 멀리서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신용카드를 긁는 분들을 상상해보며 그렇습니다. 이딴 글이 뭐라고, 이딴 책이 뭐라고, 내가 뭐라고.

 

작은 책 한 권이 지탱하기엔 무거운, 과분한 것 같아 고맙다 못해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리워드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은 참 잘한 선택인 것 같습니다. 막연한 독자가 아니라, 얼굴로 다가오는 존재의 만남이라니 말입니다. 글쓰기 강의로 만난 분들을 통해 저의 신앙 사춘기의 시작과 끝을 언어화 할 수 있었습니다. 집단상담을 통해 제가 헤쳐온 숲길이 고유하다는 것을, 때문에 누구에게도 표준으로 제시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어두운 숲에 각자의 길을 내며 걷다 교차하는 순간이었고, 그래서 좋았습니다.

 ​


추천사 써주신 두 분의 글과 존재의 무게는 특히 책이 지탱할 수 없을 만큼 무겁습니다.


추천한다는 자체가 책의 진가와 본질을 훼손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감동적인 글 모음이다. 순진하기만 했던 신앙의 유년기를 지나 모순된 교회의 현실에 눈뜨며 겪게 된 격렬한 반항과 회의와 울분으로 점철된 신앙 사춘기를 아프게 지나온 작가의 솔직 담백한 이야기가 읽는 이의 가슴에 깊은 울림과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진지함과 해학이 적절히 섞여 있어 글 읽는 재미도 크다. 무엇보다 신앙의 회의에 빠져서 혹은 기존 교회에서 상처받고 실망하여 교회를 떠났지만 기독교 신앙 자체는 떠날 수 없어 외롭고 힘겹게 비슷한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따스한 위로를 안겨 주는 길벗 역할을 한다.

- 박영돈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저자


나는 아이러니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좋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삶에서 아이러니를 경험하는 이들의 이야기만을 신뢰한다. 자기 삶에서 모순과 역설을 경험하는 사람만이 단순한?그렇기에, 또 한 번 폭력이 되는? 답을 함부로 남발하거나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정신실 작가의 신앙 사춘기에서 제일 좋았던 것도 이렇게 솔직하고 용감하게 노출하는 자기 속 모순과 갈등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비판은 단순한 냉소에 그치지 않고, ‘신앙 사춘기를 심하게 겪는 이들이 지금의 시간을 부인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대신 새롭게 보고 해석할 수 있는 언어와 공간을 제공한다. 영적 학대, 종교 중독, 교회 언어, 목회자, 기도 등 우리가 매일 한국 교회에서 부딪히는 문제들과 씨름한 이 글은 내게 생생한 교회론’, ‘희망을 주는 성령론이었다

- 신동주 (CBS 기독교방송 프로듀서)




실은 글쓰기 강의에서 시키지 않은 노래를 했습니다. 연재 마치고 만든 노래 '떠나서 다다른 사랑'. 채윤이가 아주 귀찮아 하면서 mr을 만들어 준 덕입니다. 앞부분에 우리 엄마 목소리의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이 있는데 영상에 담기질 못했네. 부끄럽지만 영상 공개합니다. 


[떠나서 다다른 사랑]

                                                 

                                                                                작사 정신실 / 작곡 김종필

(엄마 노래)
예수 사랑허심은 성경이서 배웠네
우리덜은 약허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승경이 쓰셨네 아멘


(딸의 노래)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들었네
엄마의 눈물 엄마의 걱정 그건 엄마의 기도
예수 사랑 그 사랑 나는 엄마에게 배웠네
엄마의 노래 엄마의 한숨 그건 엄마의 사랑
그 눈물이 나에게 더욱더 큰 슬픔이 되었고
그 걱정은 내게 와 더욱더 옥죄는 두려움 됐네
눈물 어린 찬송 걱정 담긴 기도
나 떠났네 나 버렸네 버거운 그 사랑

날 사랑하심 음음 날 사랑하심 음음
예수 사랑 그 사랑에 나 닿고 말았네







책을 낳는 일은 '저자 소개' 쓰기로 끝이 난다. 출판사에서 써주는 경우도 있고 내가 직접 쓰기도 한다. 이 지점에서도 뿌리 없는 잡글 작가의 고충이 있다. 나온 책들이 서점에서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꽂히질 못하지 않은가. 그러니 한 번 쓴 저자 소개를 재탕할 수가 없다. 실은 개정판으로 다시 쓰는 '나'라고 생각하면 쓰는 재미도 있다. 『신앙 사춘기』에 들어갈 저자 소개를 썼다. 책에 이대로 나오진 않는다. 일단 구구절절 써봤다. 버리고 덜어내어 더 간단하게 보냈다. 써놓고 보니 개정판 정신실이 자랑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아서 마음에 든다. 

 

 

『신앙 사춘기』 저자, 정신실


발달장애 아이들의 비밀 같은 마음에 노래로 노크하는 음악심리치료사로 젊은 날을 살았다. 기꺼이 영향 받고자 하는 말랑한 마음, 천국에 가까운 마음들에 접속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목사의 딸로 태어나 교회의 딸로 자랐다. 천국의 언어가 난무하지만 바로 그 언어에 기대어 그보다 더 완고할 수 없는 심장을 가진 어른들을 보며 혼란스러웠다. 말랑함과 완고함의 분열은 다름 아닌 내 마음이었다.


분열적이고 파편화된 마음을 느낄 때마다 읽고 쓴다. 신앙과 인격의 합일, 천상을 담은 일상을 살고 싶은 높은 꿈을 쓰고 또 쓰다 작가가 되었다. 심리학과 영성, 개신교와 가톨릭을 넘나드는 공부 여정을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리 놓는 자’의 이름으로 늘 새로운 ‘지금 여기’에만 정착하기로 하였다.


뜻과 마음을 같이 하는 벗들과 비영리단체인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를 열었다. 인간의 고통은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진정한 내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진 소외된 자아에서 기인한다는 믿음으로 연구하고 상담하는 치유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일상과 마음의 여정을 그대로 담은 저서들이 있다.

사랑과 연애에 대한 칼럼모음 오우연애』 『연애의 태도

남편과 함께 쓴 결혼 이야기 와우결혼
육아와 자녀교육의 기쁨과 고뇌를 담은 토닥토닥 성장일기』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들은 자란다
마음을 비추는 거울인 오래된 에니어그램을 소개하는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에니어그램
여성 일상의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낚는 글쓰기의 열매인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책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뉴스앤조이>에 연재했던 ‘신앙 사춘기’가 단행본으로 나오......면 좋겠습니다. 

책이 나오려면 함께 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글을 좀 더 썼고 매만졌습니다. 

텀블벅 펀딩으로 출간하게 됩니다. 텀블벅은 쉽게 말하면 선구매를 통해 출간 비용을 먼저 마련하는 것이고요. 

자세한 사연은 맨 아래 링크 따라가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신앙 사춘기 : 신앙의 숲에서 길 잃은 그리스도인들에



흔히 책과 함께 리워드 굿즈가 따라 붙는데요. 

경험상 고심하여 제작해도 굿즈는 그저 받을 때 신선함 뿐인 것 같아 저 자신을 굿즈 삼기로 했습니다. 

신앙 사춘기를 통과하는 분들과 소그룹으로, 글쓰기 강의로 얼굴을 마주하는 것으로요.

‘정신실과 함께 하는 디톡스톡은 다섯 분 모셔서 교회, 신앙, 일상의 이야기 나누는 집단상담입니다. ‘신앙 사춘기’라 이름을 붙일 때 명료함이 주는 위안이 있습니다. 그리 이름 붙이고 다리 덜덜 떨며 껌 짝짝 씹으며 교회를 미워하는 그 두려운 얘기 나눠 보려고요.

글쓰기 대중 강연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직 쓰고 읽는 것으로(사실 기도도 치열하게 했습니다) 신앙 사춘기의 어두운 숲을 통과해 왔는데요. ‘자기를 지키는 글쓰기, 하나님을 만나는 글쓰기’ 여정을 나눌 것입니다. 표지에서 보시는 것처럼, 한 사람의 존재에서 나오는 빛으로 어두운 숲을 가로지릅니다. 그 빛을 존재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 발화하고, 쓰는 것이지요.

솔직히 원고 싸들고 다이아반지 끼워줄 것 같은 부자 출판사를 찾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 덴 물론 없습니다) 뉴스앤조이 대표님과 기자 님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마음과 현실을 알기에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고,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거짓 뉴스와 그 유포자들의 대책 없는 폭력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뉴스앤조이>를 응원하시는 분들, 제 책이 아니라 뉴조를 위해 펀딩에 함께 해주세요. 단지 돈이 아니라 함께 하는 마음, 연대가 필요하니까요.


아래 링크에 가시면 다양한 밀어주기가 가능합니다. 

책 한 권, 또는 노트 포함 책 한 권 사주기.

책과 집단상담, 책과 글쓰기 강연 사주기.

책을 5권, 10권 통 크게 사주기.

사지 않고 그저 1000원 정도 밀어주기도 있네요.

좀 밀어주시겠어요?

[신앙 사춘기] 출간 밀어주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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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이가 지낸 꽃다운 친구들(청소년 갭이어) 얘기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이수진 대표가 1부를 쓰고, 저는 2부에 큰 아이 채윤이가 경험한 ‘꽃친’ 간증을 했습니다.

곡절 끝에 현승이도 올해 학교를 째기로 했습니다.

꽃친 4기가 됩니다. 마침 내일 4기의 1년 방학을 시작하는 방학식이 있는 날이네요.

자세한 책 소개 대신 에필로그를 나눕니다.



학교의 시계를 멈춰 세우고 자기만의 열일곱 한 해를 보낸 채윤이는 이제 꽃다운 스무 살이 되었습니다. 꽃친을 하든 바로 고등학교에 가든 어차피 후회는 있을 거라 스스로 예언하더니 가끔 아쉬워하고 대부분의 날에 만족하며 열여덟, 열아홉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춘기 끝에 멈추며 꺾인 채윤이 인생항로는 대체로 순항입니다.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며 두려움으로 했던 선택이 무색하도록 꽃친 이후의 항해가 순조로웠습니다. 감수해야 할 어려움이 없었단 말은 아닙니다. 결국 대학입시 앞에 섰고, 헤쳐 나가야 할 암초들이 있었지만 딱 한 뼘씩 자기만의 항로를 찾아나갔다는 점에서 순항입니다. 이제 법정 성인입니다.

 

아이들의 시간은 멈추지 않습니다. “엄마, 누나 깨울까?” 늦잠으로 여는 누나의 열일곱 하루가 고통스럽도록 부러웠던 둘째가 어느 새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누나 채윤과는 전혀 다른 아이, 또 다른 우주입니다. 남다른 선택으로 튀는 것 자체가 싫은 아이는 행여 부모가 누나의 길로 보낼까 나는 꽃친 안 해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중학교 다니는 동안 학교생활로 지쳐본 적이 없다며 멈추어 쉴 이유도 명목도 없다는 것이지요. 내심 안심이 되었습니다.

 

예상대로 되는 아이가 없습니다. 둘째는 올해 꽃친 4기가 됩니다. 이유도 명목도 없다던 아이가 꽃친을 하겠다고 합니다. 솔직히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너는 어차피 공부할 건데, 그냥 쭉 가면 안 되겠니!’ 아이의 선택보다 저 자신의 반응에 더욱 놀랐습니다. 꽃친 전도사란 말이 무색하지 않게 살았거든요. 때를 얻든 못 얻든 꽃친을 전했습니다. 두려워 주춤거리는 부모에겐 일단 한 번 해보세요. 후회할 일이 없어요.’ 진심으로 전도했지요. 헌데, 내 마음의 머뭇거림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많은 사람이 가는 길에 묻어가는 것, 타고 가던 기차를 쭉 타고 가는 것이 편하지. 관성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은 역시나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것이었어요. 한 존재를 멈춰 세우는 선택은 아이나 부모나 용기라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불가능한 일입니다. 처음처럼, 마치 청소년 안식년을 처음 경험하는 것처럼 해야 할 고민은 다 한 후에 둘째 아이의 멈춤을 선택했습니다. 이 책에 쓴 많은 이야기를 바로 제게 들려줄 때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한 마디로 정리해 들려줄 수도 있습니다.

 

학교의 시계가 멈춰도 아이는 자란다!

학교의 시계를 멈춰 세우니 아이의 시간이 시작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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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왔습니다.

지난 책 <토닥토닥 성장일기>는 최순실의 농단으로 빛을 볼 새가 없었습니다.

출간되자마자 터진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 대한민국 전체와 함께 먹혀버렸지요.

의도한 것도 아닌데, 심지어 이번에 출판사도 달라졌는데 시의적절한 출간 일정이 되었습니다.

그 뜨거웠던 광장의 촛불 잔치, 가슴 떨리던 탄핵 인용, 그리고 장미 대선입니다.

이 설레는 날에 새로운 책을 소개할 수 있다는 것에 개인적으로 위안이 넘칩니다.


QTzine에 연재했던 <나 자신이 되어 연애하기>가 단행본의 옷을 입고 나온 것입니다.

글 전반에서 연애의 기술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태도 점검을 촉구한다는 의미에서

<연애의 태도>라 이름 붙였습니다. 

저를 소개할 때 '연애 강사'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연애 강의도 합니다.'라고 하지요.

그것이 제게는 중요한 차이입니다. 


연애로 낚아서 사랑에의 갈망을 일깨우고, 

사랑받고자 애쓰는 자기 모습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하여

자기로 충분하기까지 성장하도록 부추기고,

결국 있는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더 큰 사랑을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제 인생이 나아갈 방향이고, 제가 하는 모든 강의와 글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나이 오십에 하는 연애 강의 자체가 썩 재밌지는 않지만 소중합니다.


책이 가볍습니다. (사실 아직 보지는 못했습니다. ㅎㅎㅎ)

할인하여 만 원 이하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딱 그렇습니다.

청년들끼리 선물하고 자녀들에게 선물하시기도 좋아요. 

성원 부탁드립니다. 


알라딘에 있는 <연애의 태도>

예스24에 있는 <연애의 태도>

인터파크에 있는 <연애의 태도>    

갓피플닷컴에 있는 <연애의 태도>






누군가(과연 누군가! ) 이런 메시지를 붙여 공유한 영상이랍니다.

40분 동안 오글오글 주절주절거린 이야기를 짧게 정리해준 내용이 마음에 드네요. ^^

용기를 얻어 블로그에 공개해봅니다.

네, 제가 출연한 <새롭게 하소서> 영상입니다.


며칠 갑자기 블로그 방문자수가 많아져 제가 이 근처에 얼씬거리질 못했습니다.

방문자수도 다시 안정을 찾아가고,

겨우내 기다리던 눈도 내려 마음도 풍성해졌으니 링크 걸어 볼게요.











간증, 또 하나의 제자도.

CBS의 오랜 간증 프로그램 <새롭게 하소서>를 아시죠?

그 프로그램의 케치프레이즈입니다.

지난 12월에 녹화했고, 다음 주에 본방 재방해서 여러 번 방송된다고 합니다.

다녀와서는 민망하고 부끄러워 혼자 이불킥 여러 번 했습니다.

메이컵 받다 정신차려보니 머리에 후까시(외에 달리 표현한 말이...ㅜㅜ)가 과하게 들어갔습니다.

카메라에선 괜찮을 거라고 하시니 한껏 커진 머리를 하고 녹화장에 들어섰습니다.


'간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설 때 진솔해질 수 있을까요?

오염될대로 오염되어 본연의 의미를 찾기 어려운 교회의 용어들이 많은데 그중 대표적인 말이 '간증'입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의 성공을 부각시켜야하는 것이 흔한 간증이지요.

같은 이름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고,

몇 년 전에 코스타에서도 '삶의 현장'이라는 간증의 자리에 섰던 적이 있었습니다.

두 번의 간증을 통해 배운 바가 있습니다.

한 번은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말아야지' 결심을 했고,

다른 한 번은 안전한 자리에서 나의 부끄러움과 약함을 고백함으로 치유를 경험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된 것이지요.

언어를 오염시킨 것도, 그 언어를 다시 정화하는 것도 사람입니다.


전에 다녔던 교회에서 '수단'이 된 간증의 경험들로 혐오증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목자(소그룹 리더)를 했더니 연봉이 오르고, 명퇴하는 줄 알았으나 더 좋은 자리로 영전되었고,

아이가 좋은 대학에 가고, 가정이 화목해지고......

교회를 섬겨 일이 잘 되고 성공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들었던 그 무수한 간증이 꾸며낸 얘기도 아니었고, 당사자들에겐 분명 축복이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수단화 되는 것,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목회적 수단이 된다면 치명적인 죄이지요.

간증을 수단화 하고자 하는 유혹은 그때 그 시절 그 교회의 리더나 목회자만이 걸려든 덫이 아님을 압니다.

바로 내 앞에, 우리집 문지방 앞에 놓인 덫입니다.


블로그를 하면서 늘 갈등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가족의 세세한 일이며, 부부 사이의 대화, 갈등은 물론 스쳐지나는 지질한 감정까지 드러내는 글.

어쩌다 작가된 얼치기로서 그나마 소명이라 붙드는 말이 '일생愛 천상에'입니다.

일상에 들여놓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살고 써내는 것이라고 멋지게 표현해 볼게요.  

일상의 기쁨과 슬픔, 잘 되고 안 되는 일, 성공하고 실패하는 것이 필터링 없이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헌데 아주 못나고 지질한 나를 드러낼 때조차도 결국은 주체하지 못하는 현시욕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때문에 글을 써서 '발행'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심장이 조여들곤합니다.

결국 나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라면 '간증'이라 포장된 자기현시와 무엇이 다른가 싶지요.


드러냄과 숨김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저는 늘 이렇습니다.

이왕 강사라는 이름을 얻은 이상 '드러냄'을 선택한 것 아닌가. 

이왕 이렇게 되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나를 드러내고 자기홍보에 매진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순간 발목을 잡는 '숨김' 본능.

'써야 사는 여자'라서 쓰는 일 외에는 할 수 없어서 블로그에 끄적거려 발행합니다만.

나름의 여러 장치를 끼워 넣습니다.

스크롤 압박감을 위해 짧은 글도 길게 늘어놓습니다. 

빙빙 얘기를 돌리는 사이 인내심 없는 사람들 나가 떨어진 후에 정작 하고 싶었던 얘기를 하지요.

나로서는 쓰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제발 아무도 읽지 마라, 읽지 마라.....

그러나 다시 블로그 조회수에 신경을 쓰고, 댓글 알리미 소리에 일단 기분이 좋아지고, 

어느 댓글 하나로 날아갈 듯 한 하루를 보내기도 합니다. (댓글 압박 아닙니다. 편하게 하세요. ㅎㅎ)

사석에서 만난 분이 '글 잘 보고 있어요'하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지만 돌아서면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새롭게 하소서> 녹화 이후의 이불킥은 이런 내적 갈등의 표현입니다.

'아무에게도 안 알려줄 거야. 헤어스타일 때문에 일단 머리 크기 장난 아니고, 

주제가 왔다 갔다, 말도 되게 못했고, 맡투도 엄청 가식적이었어. 오글거림 장난 아닐 거임'

묻지도 않는 말을 혼자 자꾸 떠들어댔지요.

역시 드러내고 싶으나 숨기고 싶고, 숨고 싶지만 드러나고 싶은 [나의 투쟁] ^^ 

아무튼 저는 이 방송 못 봅니다. 


간증, 또 하나의 자기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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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소 싱크대 앞>과 이번에 나온 <토닥토닥 성장 일기> 두 권 함께 북 콘서트 엽니다. 출판사 블로그에 올라온 정성 가득한 홍보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자세하게 안내받으실 수 있고요. 홍보글 만큼이나 정성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주어는 고마우신 저의 출판사 식구들이시구요) 한 분이 오시더라도 가장 극진하게 대접하고 맞이하자는 것이 북 콘서트 컨셉입니다. <성장 일기>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덕을 크게 보고 있습니다. 출간되자마자 딱 먹혀 버렸네요. 그래서 조금 우울하고, 늘 그렇듯 정성스럽게 책을 만드시는 출판사에 죄송한 마음이네요. 어찌 됐든 아이러브 죠이북스입니다. 


결코 실망하게 해드리지 않을...... 예정입니다. 영유아 돌봄 서비스까지 해드리는 북 콘서트 보셨남요? 2부 진행을 맡은 사회자는 제가 만나자마자 반해버린 분입니다. 웃기는 걸로는 남부럽지 않다고 자부하는 제가 바로 그 앞에 꿇어버렸습니다. 웃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생각의 깊이 또한 장착한, 교계에서는 보기 드문 이.빨.(히히) 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3부에서는 '일상을 쓰다'라는 제목으로 제가 감히 글쓰기 강의 한 번 하려고요. 


여하튼 와주셔야 합니다. 도와주십쇼! 들킬세라 발끝 들고 조용조용 블로그 드나드셨던 분들, 댓글 한 번 안 달고 무임승차 하는 것 같아 혼자 캥기셨던 분들도 이번에 오시면 면죄부 드립니다. 이 블로그를 통해 1이라도 자극받으셨던 분들은 꼭 오셔야 합니다. 블로그의 채윤이 글 보면서 한 번이라도 터졌던 분/뉴스, 페북, 인스타 다 훑고 정말 볼 게 없을 때 심심풀이 오징어 땅콩으로 활용하셨던 분/좋아서가 아니라 제 글이 싫어서 '어디 잘 하나 보자' 하며 오시는 분/속으로 악플 달면서도 자꾸 오게 되는 분들도 해당됩니다. 초대합니다. 여러분, 도와주십쇼!


** 사실, 이런 기사도 있어요. ---> <영성 작가에게 듣는 육아와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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