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을 읽는다. 소설, 특히 연애소설은 젊었을 때도 거의 눈길을 주지 않던 분야이다. 중년의 아줌마가 카페에서 연애소설을 읽고 있는 풍경이라니.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에 양 갈래로 묶은 머리처럼 부조화하지 않은가. 그래도 읽는다. 재미도 있다. <내 연애의 모든 것> 대한민국 보수정당 남자 국회의원과 진보정당 대표인 여자 국회의원이 사랑에 빠지는 얘기다. 중반까지 아주 재밌었다. 연애라인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면서 집중적으로 연애 얘기만 나오기 시작하니 급 재미가 없어졌다. 연애는 주변인들, 다양한 정황들과 맞물려서 흐릿한 스토리 라인일 때가 제 맛이다.


연애 상담을 하면 길게 잡아 10분 안에 그 친구가 가장 힘들어하는 관계문제, 자아상, 의존문제, 부모와의 관계 등 본질적인 문제로 다가갈 수가 있다.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흘러간다. 연애 문제는 단지 로맨틱 러브에 그치지 않고 싱글들의 삶 자체에 혈액을 공급하는 심장박동 같은 것이다. (연애 하든 안 하든, 스스로 인식하든 못 하든) 그래서 연애는 전인격적이다. 인생이 문제는 결국 '궁극적 사랑'에 대한 갈망이 아닐까. 넓은 의미에서 로맨틱 러브 역시 사랑이고 그 사랑은 전인격에 달라붙을 수밖에 없다. 


박원순 시장님과 스쳐 지나간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몇 년 전에 연대 앞 창천 교회에서 '데이트 코칭 스쿨'인가? 하는 스쿨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몇 주 과정이었는데 나는 두 번의 강의를 맡아서 했다. 그분의 블로그에 갔는데 창천 교회 앞에 내걸린 '데이트 코칭 스쿨' 플래카드를 찍은 사진에 '요새는 데이트를 가르치는 학교도 있군요.'라는 조금 어이없다는 멘트를 날리셨다. 댓글에 '제가 거기 강사예요.'라고 밝히고 주절거렸다.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데이트란 전인격적인 문제다. 자아상, 소명과 진로 등 젊은 날의 총체적인 고민과 맞붙어 있는 것이 연애 문젠데 다면적인 접근으로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블라블라....  했더니 역시 원순님답게 '아, 그럴 수 있겠다'며 수용을 하셨더랬다. 


'연애 강의'라 하면 어떻게 좀 남자(여자)를 잘 꼬셔보는 꼼수나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 교회 안팎의 연애 강사들이 뿌린 걸 스스로 거두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연애 강의를 하는 나 자신조차 '연애 강의는 기술이거나 설교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누워서 침뱉기식 선입관을 가지고 있으니. 상대방을 특히 여성을 대상화하는 연애강의, 나이 많은 자매들을 희화하는 것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연애강의에는 분노에 가까운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엄밀히 따져 '수요자'가 아니라 '공급자'이기에 피로감이 아니라 책임감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책에 다 나와 있는데 왜 고민을 할까?'라며 인생의 모든 문제를 독서로 풀고자 하는 강박 같은 것이 내게 있다. 사람들이 다 나 같은 줄 알고 대화 중에 엄청 책소개를 하고 흥분하는 적이 많다. 청년들과 더 가까이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대부분 청년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 생각보다 더 읽지 않는다. 어려운 책은 아예 읽지 않는다!

<오우연애>나 <와우결혼>을 앉은 자리에서 한 방에 다 읽어 버렸다는 말을 가끔 듣는다. 칭찬이라고 하는 말씀들이지만 살짝 내 마음엔 팔자 주름이 생긴다. 쉽게 읽힌다? 내용이 없다는 얘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책 읽지 않는 청년들에게 읽히는 책을 써서 어쨌든 읽게 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고 격려한다. 


내가 싱글일 때와 달리 지금은 모든 좋은 것이 과잉인 시대라 연애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책들이 매우 많다. 청년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더 많이 읽어서 내 강의에 더 많은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또 다른 강박에 시달린다. 어려운 책들을 읽어서 쉬운 말로, 말랑말랑한 말로 전해주는 것이 내 소명일까.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에 양 갈래 머리처럼 어울리지 않는 책을 붙들고 '아이구, 내 팔자야' 한다. 좋으면서 싫은 척.


연애는 전인적인 문제라 심리학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이성과의 관계맺기를 말하면서 부모와의 관계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아무도 울지 않는 연애는 없다>는 딱 정신분석적인 연애상담이다. 필요하다. 이런 접근.
모든 연애가 다 개인사기인 하지만 '사랑'은 단지 심리학적인 문제만은 아니다. 연애와 사랑을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볼 때 나이 먹은 자매들은 늘 '내려놓겠다'고 한다. '눈을 낮추겠다'고 한다. 어디서 연애강의만 듣고 오면 내려놓겠다는데 뭘 얼마나 더 내려놓아야, 얼마나 더 자신을 바꿔야 애인이 생긴다는 말이다. 사랑이 아픈 이유를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도 이해하게 해주는 <사랑은 왜 아픈가>는 고마운 책이다.
심리학적, 사회학적으로 설명 해도 '사랑이 왜 아픈지'에 대한 답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랑은 원래 아픈 것이니까. 사랑의 존재인 우리는 사랑의 근원과 단절되어 있을 때 아플 수밖에 없다. 사랑의 근원으로 연결되는 길은 '고독, 홀로 있음'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 배웠다. 기독교의 언어가 아니라 정신분석학자의 목소리로 듣는 '홀로있어 자기 자신이 됨'에 관한 통찰이 내게는 신선하다. <고독의 위로> 좋다.


연애에 관한 수 많은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로 귀결된다. '연애'는 내게 재미있는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연애를 빙자한 올 카인즈 오브 존재론적 고민은 흥미진진진진진. 연애 강의라는 낚시밥을 던지고 룰루랄라 강의하러 다니며 이 나이에 연애계를 못 떠나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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