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먹기 좋은 겉절이 김치와 함께 편지 한 장을 받았다. 시어머님이 주신 것이다. 처음 받아보는 편지이다.
글쓰기의 치유력을 익히 알고 있다. 그 힘을 삶으로 경험했고, 함께 쓰고 읽는 사람들의 글과 말로 확인했다. 수년 전에 시어머님의 자서전을 써드렸었다. 신산한 삶을 살아오신 어머님, 어린 시절부터 겪은 고난을 몸이 그대로 기억하고 있어서 여러 증상을 앓으셨다. 여러 곳 병원에 모시고 다니고, 상담과 영성 피정 등에도 보내드렸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신체적 심리적으로 더 허약해지셨고, 나로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낸 것이 자서전 쓰기였다. 배움에 결핍감을 가지고 계시지만 타고난 '활자 지향형'이신 어머님께 좋은 기회가 될 거라 믿었다. 한 발 물러서서 당신의 인생을 바라보고, 삶을 구술하시는 동안 새로운 관점이 생길 거라 믿었다. 이현주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돌아보면 발자국마다 은총이었네' 고백하시겠지! 치유의 글쓰기의 진수를 경험하실 거라고!! 야심찬 계획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원고를 완성하고, 책으로 편집해주시던 언니가 말했다. "자기야, 이 책의 주제는 세상의 나쁜 년들아!야. 이 책에 등장하는 분들이 읽으시면 어머니 더 힘들어지실 것 같아. 자기가 서문 격으로 해명하는 글을 하나 써라" 아닌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억울함과 자기 연민의 독백이었다. 어머님 자신이 얼마나 의로웠고, 헌신했는지.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몰라줬고, 오히려 배은망덕했는지. 얼마나 억울하고 또 억울하신지. 결국 서문 하나를 써서 집어넣고 책을 찍었다. 어머니 예상과 달리 흥행에 실패했다. 흥행은 커녕 읽는 이마다 말을 잃고 묘한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내 좌절이 더 컸다. 책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어머님의 태도 때문이었다. 책 작업을 하는 동안 이미 지쳐있었다. 성찰을 위한, 치유를 위한 야심찬 계획이었는데.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성찰이 아니라 자아팽창에 일조한 것 같았다. '여기까지가 끝이구나' 이때로부터 어머님 치유를 위해 애쓰던 노력을 그만두었다. 전 같지 않은 내게 대놓고 섭섭함을 표현하시고, 수시로 돌려까기 하셨지만 더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어제 받은 편지이다. 어머님이 자발적으로 자녀들에게 편지를 쓰시는데, 편지 내용이 감사와 사랑이다. 전에 자서전의 그 어머니 글이 아니다. 내게 하시는 감사와 사랑의 말씀에 감동이지만 관점의 변화! 이것이 더욱 놀라운 것이다. 자기 연민과 억울함의 호소가 아니라 감사와 연민이다. 자서전 작업을 통해 꿈꿨던 바로 그것!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몇 년 전 쓰신 글에서 당신 안의 어둠을 토해내길 잘하신 거다. 감사와 사랑의 진실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억울함과 분노의 늪을 정직하게 통과해야 하는 것이었다. 의지만으로 쉽게 초월되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나 감정의 정화, 내적 성장이라는 것이. 빛으로 가는 길은 그림자에 있다. 거리를 두고 나쁜 며느리를 무릅쓴 시간 동안, 에라 모르겠다, 어머니를 포기하고 지낸 시간 동안 어머니는 어머니의 여정을 걸으신 것이다. 각자 자기만 아는 자기 길을 가고 있다. 나도 내 길을 비틀비틀 걷고 있다.
자서전 <혹덩이에서 복덩이로>에 붙인 서문
“내 얘길 다 하려면 책 열 권을 써도 모자란다.” 황혼 어르신들께 자주 듣는 말입니다. 어느 인생인들 책 열 권 분량의 사연이 없을까요?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륜이 쌓인다는 것은 인생의 이야기 분량이 쌓여간다는 뜻일 겁니다.
저의 어머니도 당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열 권, 스무 권으로 다 담아내지 못 할 이야기입니다. 몇 날 몇 일 밤을 지새워도 끝나지 않을 70 평생의 이야기를 이 작은 책 하나에 담았습니다. 어머님이 쓰셨습니다.
열 권 분량의 사연이 있다고 해서 모두 책을 쓰지는 못합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70을 바라보시는 어머님은 결국 이렇게 인생을 써내셨습니다. 게다가 어머니의 고백처럼 평생 ‘배우지 못한 한’을 아프게 품고 살아오신 분입니다. 결국 이렇게 써내신 어머니께 박수를 드립니다. 어머님이기에 가능하신 일이었습니다.
상담을 하고 나면 ‘이렇게라도 털어놓으니 후련하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렇습니다. 혼자 붙들고 아파하던 것을 어디에든 쏟아내기만 해도 견딜만해지고 가벼워집니다. 이 작은 책은 어머님의 ‘털어놓음’입니다. 어린 시절을 혹덩이로 기억하시는 어머니는 오랜 세월 마음의 병을 앓아오셨고 두통과 불면증으로 고생하셨습니다. 부디 이 털어놓음으로 인해 남은 인생에 더 밝은 이야기들이 쌓여 가기를 기도드립니다.
이 책에 나오는 많은 일을 함께 경험하신 분들은 어머님과 다른 기억을 가지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기억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개인에 의해 ‘경험’된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 인생 이야기가 지어져가는 것일 겁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치유하는 ‘내면아이 치유’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시절의 치유는 다름 아닌 ‘기억의 치유’라고 합니다. 각자 기억이 다르고, 어머니의 기억 또한 세상 그 누구와도 같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어머님의 내면아이 치유, 기억의 치유를 위한 아픈 고백임을 기억해주시고, 따스하게 바라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표지사진을 찍던 날 어머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은 아이처럼 반짝반짝 빛났고 표정은 더없이 행복해 보이셨습니다. 발그레 상기된 볼하며, 20여 년 가까이 어머님을 곁에서 뵈며 그렇게 예쁜 모습은 처음이었습니다. 그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스스로 혹덩이라 여기며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을 보낸 어머님이, 오직 당신만을 사랑스럽게 따스하게 바라봐주는 눈길을 얼마나 얼마나 바라셨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험한 세월을 약하디 약한 몸으로 견뎌 오신 것은 분명 어머니 마음속엔 ‘사랑의 눈길’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의 다른 이름은 ‘믿음’일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의 눈길을 거두지 않으시는 하늘 아버지. 하나님 사랑에 대한 믿음 하나로 혹덩이 어머님이 복덩이가 되셨습니다.
어머님 남은 생애, 그 따스한 주님의 눈길을 더 많이 느끼고 발견해가시며 행복한 황혼을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외롭고 고독한 시간에 더욱 주님을 붙드시는 믿음의 길은 사랑의 길임을 믿습니다. 혹덩이 어머님, 복덩이 어머님을 사랑합니다.
막내며느리, 정신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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