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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이 지켜보고 있다_천형(天刑)이 된 시선

larinari 2016.01.15 01:45




<뉴스앤조이>의 목회멘토링 사역원에서 3월에 목회 멘토링 컨퍼런스를 엽니다. 컨퍼런스에서 선택강좌 중 하나를 맡았는데 제목은 '목회자 부부의 탈진과 정서적 돌봄'입니다. 사역원 소식지에 실을 글을 하나 썼고, 소식지 인쇄본은 아직 못 받았으나 <뉴스앤조이> 홈페이지에 걸렸으니 제 집 대문에 걸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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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저나 은수저는 몰라도 나는 성경책을 옆에 끼고 태어난 것이 분명하다. 태어나보니 아버지는 목사였고, 내 이름은 교회 냄새 물씬 나는 신실이였다. ‘신실아부르는 소리는 목사 딸이라는 보통명사처럼 들렸다. 초등학교 1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무슨 일인지 우체국 안에 있던 전화국에 놀러 갔다. 처음 보는 교환원이 나를 보고는 교회 집 딸이구나. 79번 집!’ 우리 집 전화번호이다. 딱 부러지는 인상의 교환원 언니 입에서 79번이란 말이 떨어지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우리 집 전화번호를 알고 있어. 게다가 나를 알고 있어. 무언가가 어린 나를 긴장시켰다. 아버지는 사사로운 일로 전화를 쓰지 못하게 했다. 전화는 물론 전기 등도 마찬가지였는데 교회 돈이 나간다는 이유였다. 교환언니의 입에서 79번이 나왔을 때 어린 나는 왜 움찔했으며 그 기억이 이토록 선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버지 몰래 전화를 써도 교환원 언니는 다 알고 있다는 것. ‘너는 목사의 딸로서 전화를 아껴서 쓰고 있는가, 전기는? 똑바로 해라.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 평생 나를 따라다니는 중요한 목소리이다.

 

어린 눈에 아버지가 훌륭해 보였다. 도덕적이고 양심적인(이런 말을 알기 전부터) 좋은 목사님이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일찍부터 아버지의 딸로 살았으며 자부심도 컸다. 부모님의 목사 딸 교육법으로 나는 나쁘지 않은 아이로 컸다. 그래서 속이 쓰릴지언정 겉으론 미소 지으며 내 권리를 포기할 수 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미움으로 맞서지 않고 이를 악물고 스릉흠미다하기도 한다. 문제는 목사 딸 교육법이 드리운 그림자이다. 착한 행실 뒤에는 사랑보다는 두려움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목사의 딸로서 일찍이 내가 터득한 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사는 법이었다. 이미 천국에 계신 아버지, 모든 짐을 벗고 자유로우실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할 마음은 없다. 누군들 위선적으로 살고 싶겠는가. 목사와 목사 가족이라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신도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고, 그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게다가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강했던 아버지는 목사로서 신도들에게 책잡힐 여지를 한 톨도 남기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내가 목사의 딸이라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랑의 법을 배웠다면 어땠을까. 하나 마나 한 상상이다. 자신이 살지 못하는 것을 자녀에게 가르칠 수 없는 법. 교인들의 가지각색 기대와 시선을 천형처럼 지고 누구보다 자신들을 옥죄면서 한평생을 사신 부모님이다. 아니 우리 부모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뒤늦게 목사의 아내가 된 나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이 땅의 목사님들과 그 가족은 모두 ‘79번 집 사람일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 할 수 없는 것은 목회자만의 실존이 아니다. 남의 눈치를 보며 마음에 없는 말과 행동을 하고 뒤돌아서 자신을 혐오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딜레마이다. 칼 융(Carl G. Jung)은 인간이 세상과 만나는 얼굴, 인격의 가장 겉부분을 페르소나(Persona)'라 명명하였다. 목사, 장로, 선생, 엄마, 아들 등의 직함이나 역할은 사회적 얼굴이다. 페르소나는 타자의 시선(기대)에 의해 형성되며 소속된 집단에 충실하면서 강화된다. 가면이라고도 하는 페르소나는 벗어버려야 할 불온한 것이 아니라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융에 의하면 페르소나가 진짜 나인 줄 아는 동일시가 인격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이 동일시가 극도에 다다라 페르소나와 내가 구별되지 않을 때, 의식과 무의식의 단절이 일어나 흔히 말하는 마음의 병,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 목사(종교지도자)는 역할의 특성상 보다 쉽게 페르소나와 동일시할 수 있어서 위험한 위치에 있다. 융의 투사(projection)이론이 이 메커니즘을 잘 설명해준다.

 

투사(projection)’란 말 그대로 프로젝터(projector)를 통해서 스크린에 비췬 영상을 보고 그것이 컴퓨터 아닌 스크린에 있다고 믿는 심리 현상이다. , 나쁜 것은 자기 마음(컴퓨터)에 있는데 자기 속에 있는 줄 모르고 밖의 타인(스크린)에게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공연히 미운 사람, 싫어도 너무 싫은 사람, 나도 모르게 격렬히 비판하게 되는 대상 등 강렬한 감정에 휩싸일 때 투사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의 어둠만 투사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부분까지 밖으로 투사하게 된다. 목사님들을 향한 과도한 존경과 기대가 그 예일 것이다. 이런 투사는 내가 살아내야 할 거룩한 삶을 대신 살아주기 바라는 책임전가와도 같다. 융 심리학자인 로버트 존슨(Robert A. Johnson)은 이것을 황금투사라 한다. 자기 안의 금과 같이 소중한 것을 투사함으로 더 고귀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박탈해버리는 것이다. 이 투사는 목회자의 부정적인 면을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과도한 존경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받는 대상 또한 문제이다.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예수님 같은 분입니다.’ 같은 칭찬과 기대로 표현되는 황금투사를 넙죽넙죽 내면화하는 목회자는 감당할 수 없이 무거운 황금 목걸이를 목에 거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자신을 실제보다 크게 생각하는 자아팽창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투사의 드라마에 갇혀 있는 한, 신도들은 성장하기 어렵고 목회자들은 자기 자신이 되어 살기 어렵다. 이것이 오늘 목회자와 목회자 아내들의 비극이 아닐까. 사모는 활달해야 하고 동시에 차분해야 하며, 적당히 세련되어야 하고 동시에 외모가 화려하면 안 된다는 등. 서로 상충하여 말이 닿지도 않는 목회자와 그 아내에 대한 기대,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가. 춤출 수 없다! 그것은 장단이 아니기에. 실체가 아닌 스크린에 비춘 그들의 마음일 뿐이다. 그것을 분별해내는 눈과 황금투사를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이 비극에서 벗어나는 방법일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목회의 길을 가는 동안 나란히 가는 마음의 여정이어야 할 것이다. 나를 움찔하게 했던 ‘79번 집 딸이구나!’ 이 한 마디의 위력에서 벗어나는데 수십 년의 시간과 기도가 들었다. 여전히, 아직도 가야 할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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