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상담이나 치유 그룹에서는 흔히 별칭을 쓴다.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생소하고 오글거리지만 의미 있는 일이다. 내 이름 정신실을 두고 '나리'로 불리는 건 나와 거리를 두는 일이다. 2인칭 또는 3인칭으로 불러 나를 타자화 시키는 방법이다. 새롭게 만난 그룹에서 직업도, 성별도, 나이도 구분 없이 부르는 별칭은 페르소나를 지양하는 뜻이 담기기도 한다. 언젠가 나도 오글거리던 적 있었지만 이젠 별칭 짓기 권하는 자리에 자주 앉는다. 드물게 바뀌지만 나의 별칭은 주로 '나리'이다. 나리꽃의 그 나리. larinari의 nari 역시 바로 '나리'이다. 굵직한 별칭 만남들의 마침표를 찍었다.


5,6월 8회기의 글쓰기 자조모임을 동반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라고 쓰기도 싫은, 그러나 분명 그 끔찍한 일을 겪고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아니, 잘 살아가지 못하는 '나'들이다. 8주간 함께 쓰고 읽으며 나도 쓰고픈 말이 많이 일렁였다. 아니, 쓰고 싶은 말이 없었다. 모임이 있는 금요일엔 늘 새벽까지 깨어 있게 되었다. 매주 생각보다 많이 웃었고, 조용히 울었다. 제가 오히려 배우고 치유 받았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은 8주였는데. 마지막 8주차에는 '네, 저도 치유고 배움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싶네요' 하고 뛰쳐나와 가해자 목사를 찾아내 단죄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여기서 나는 '나리'였다.


작년 가을부터 준비한 여정 캠프, 그러니까 싱글들을 위한 2박3일 캠프가 있었다. '나를 찾는 길 위에서 너를 만나다'라는 부제를 붙여봤는데 '에로스를 찾다 아가페를 만나다' 이런 사심을 품기도 했다. 하긴 부제로 붙일만 한 사심이 한 둘이 아니다. 소개팅과 결혼 압박에 지친 싱글들의 힐링 캠프. 전에 해보지 않은 재미있는 연속 소개팅. 나는 왜 사랑이 두려울까, 두려움 극복 프로젝트. 매칭 부담 없는 매칭 프로그램. 등등.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지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해야겠다. 생면부지 15명의 청년들 캐릭터부터 날씨, 장소, 나눔, 상담, 케미, 피날레. 여기서도 나는 나리였다.

 

캠프 떠나기 하루 전인 수요일엔 에니어그램 심화 세미나가 있었다. 아침 일찍 운전을 하고 가는데 음악을 듣다 툭,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전 주 금요일 글쓰기 자조모임 이후 차분히 감정 돌볼 시간이 없어서였을까. 연이은 묵직한 강의 압박 때문이었을까. 마침 이날 심화과정의 주제는 '감정'이었다. 예언 같은 울음이었을까. 미처 울지 못한 뒤늦은 울음이었을까. 그렇게 '나리'로 살았던 6월은 끝났다. 오늘 주일 예배에선 여정캠프에서 만난 15명, 에니어그램 세미나의 6명, 글쓰기 자조모임의 4명.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흩어져 이어지는 그들의 일상을 떠올리며 다시 또 울었다. 울음이 아니라 기도라고 하자.  



'나리'라고 불리는 또 하나의 그룹이 있다. 매주 만나는 꿈과 영성생활이다. 2박3일 여정캠프를 지원하고자 모인 사람들처럼 카톡으로 무한 에너지를 보내왔다. 캠프가 있었던 연천으로 가는 길을 전화 통화로 함께 하며 얘기를 들어주고 깨달음을 주는 벗이 있었다. 연천의 한옥호텔에 도착하여 긴장 속에 자기소개를 마쳤다. 물론 나를 '나리'로 소개했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호텔 주변을 산책하는데 어머나, 정원에 지천으로 핀 꽃이 나리꽃이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님! 신경 많이 써주셨군요! 나리는 마태복음 6장 28절의 '들의 백합화'이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있는 그대로 족한 들꽃이다. 




캠프에서 상담하는 중 세 사람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강의하고 상담하는데 에너지가 많이 들 것 같은데 어떻게 충전하는가, 조금 걱정된다, 는 뜻도 담긴 것 같다. 나리는 나리가 되고 참나무는 참나무 되는 것으로 족한 만남에서 끝없이 재충전 한다고 대답할 걸 그랬다. 돌아가 그런 벗들이 있고, 벗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살아있는 숨결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 그 숨결의 근원이신 분을 만나기도 한다고 고백할 걸 그랬다. 나는 나임이 부끄럽지 않다. 나를 나리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온몸으로 하고픈 말이기도 하다. 각자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그분의 큰 뜻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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