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친구 엄마들과의 만남을 안 좋아한다. 시간이 안 되기도 하거니와 영어 뭐해요?수학 어느 학원 다녀요? 깔대기 대화에 어디 낄 자리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가끔 현승이 수영하는 걸 기다리느라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서 흘려 듣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된다. 언젠가 2월 말 어느 날 수영장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엄마들 수다 주제는 다음 학년 담임 선생님 얘기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벌써 몇 반에 어느 선생님 정보는 물론, 선생님의 스타일이며, 좋아하는 아이 유형까지 꿰고 정보를 나누고 있는데 기겁을 했다. 이렇게 말하면 애 키우면서 부모 마음이 다 그렇지 너는 뭐 그리 고상을 떨었쌌냐? 돌이 날아올 수도 있게지만 어쨌든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자리가 학교 엄마들과의 만남이다.


그런데 솔까말.


신앙 좋은 여자들 모여서 '하나님, 은혜, 축복, 기도, 감사...' 이런 몇 단어만 가지고 얘기하는 모임보다는 학교 엄마들 수다가 차라리 낫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이고 무조건 감사에다 성령은 충만한 나눔이면 여기 역시 낄 자리 없다고 느낀다. 그렇게 말하는 분들의 삶이 진정 말과 같아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분들이라면 모를까. 말과 삶의 괴리를 피차에 아는데도 공식 나눔 시간만 되면 은혜, 감사, 축복 이럴 때 참 듣고 있기가 어렵다. 한 두 사람이 그럴 수 있지만 분위기가 그렇게 거룩해지기 시작하면 어쩔 수 없이 믿음은 없는데다 까칠한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의 늪에 빠지게 되기도 한다. 무소부재한 하나님라지만 우리 일상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자주 힘겹고 막막하다. 은혜의 하나님이지만 그 은혜를 삶에서 몸으로 느끼기엔 얼마나 막연한 것인가.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만 정말 내가 사랑받는다고 느끼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그러니 차라리  학교 엄마들처럼 있는 말과 욕구가 일치하는 얘길 듣는 걸 참아내는 것이 더 쉽다고 느껴진다.


그런데 솔까말.


균형잡힌,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자신의 거친 욕구와 그림자를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을까? 하나님의 부재로 인해서 메마른 나의 삶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공동체를 나는 경험해 보았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마치 이것을 진하게 경험해 본 사람처럼,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이름 붙이고 나는 갈망한다. 진실로 갈망한다. 언젠가 모든 것이 갖춰진 사람들이 모였을 때 가능할 거라고 믿었던 시절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온전한 공동체에 대한 가능성도, 불가능성도 각각 100%라는 생각이다. 너무 어려운 일지만 아주 쉬운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안다. 래리크랩이 <영혼을 세우는 관계의 공동체> 초반에 말하는 것처럼 그것은 어쩌면 나란히 앉아 있던 사람들끼리 의자를 돌려 마주보고 앉는 것과 같은 단순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단순한 선택은 인간이라는 복잡한 존재를 규명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래리크랩 식으로 표현해보자. 인간 마음에는 윗방도 있고 아랫방도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내 영혼의 윗방도 분명 존재하지만 뱀이 기어다니고 구정물이 이는 내 아랫방에 대한 직면하고 통과하지 않고 내 윗방으로 올라갈 수 없다. 아니, 윗방을 사는 것과 누리는 것은 아랫방에서 뒹굴고 있는 나를 인정하면서 '내게는 윗방도 있는데 난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가'라고 묻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다. 참된 공동체는 자신의 아랫방의 욕구들을 두려움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곳이고, 드러내고 받아들여졌을 때 비로소 함께 꿈꾸고 누릴 수 있는 곳이 윗방이다. 그러면 모두 누가 누구를 안전하게 받아줘야 하는가? 나를 거절하지 않고 수용해줄 안전한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라도 자신 안의 선함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다. 사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운 것이어서 아주 작은 한 방울이 떨어져 적시면 이내 흥건해지고 이리저리 흐를 만큼 불어난다. 때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어난다. 한 방울을 떨어뜨려서 상대에게서 더 선한 것이 더 많이 흘러나오는 것을 맛본 사람은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대한 꿈을 놓을 수 없다. 설마 내게서 이렇게 좋은 것이 나갔을 리가? 라고 물으며 다시 한 번 자기를 포기하고 한 방울 떨어뜨리기를 시도했을 때 우리들의 의자가 서로를 향해 돌려지기 시작한다고 믿는다. 부부관계에서 그렇고 사춘기 아이와 그렇고, 소그룹 공동체에서도 그렇다.


아이 친구 엄마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신앙적 가면을 쓰고 은혜 축복을 반복하는 모임에서 편치 않은 나 자신이 까칠하고 약간 재수없는 아줌마라는 것을 인정한다. 내가 잘못된 것은 아닌가. 은근한 불안이 밀려올 때가 많다. 불안하지만 이대로의 나를 옳다 여기며 살기로 한다. 래리크랩의 책 속 세상에서는 불안한 나의 정체성까지도 받아들여지고 있으니까.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꿈꾸는 아줌마가 이렇듯 까칠한 캐릭터라는 적에게 알리지 말라! 그러나 포기하진 않는다. 그 어디나 가장 안전한 곳 되도록 깨진 나를 드러내고 깨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노력 만큼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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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큐티진 > 8월호, '藥이 된 冊' _ 래리크랩의 <파파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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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려 ‘여보세요’하고 받기가 무섭게 ‘엄마다’ 하면서 친정 엄마의 거룩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너 기도 해야겄다. 니 외숙모 말이다. 지난 번이(에) 넘어졌잖냐. 그려(래)서 허리를 아주 못 쓰게 됐단다. 니 외삼촌 어쩐다냐. 그려(래)서 다 합심혀(해)서 기도허(하)자구 전화혔(했)다. 내가 지금 이모들이랑 다 전화혔(했)는디(데) 아무튼지 간에 합심혀(해)서 기도허(하)자. 니 외숙모 화장실 출입 정도는 허(하)게 혀(해)달라고 기도혀(해). 그려(래)야 니 외삼촌이 살지, 꼼짝도 못허구 누워 있으면 워쩌~어. 너 어렸을 적부터 니 기도는 잘 들어주시 잖여~ 알었지. 꼭 기도혀(해)라. 나는 오늘 저녁이(에) 철야 간다. 끊는다.’ 딸깍!

매 주 금요일마다 밤을 꼬박 새우며 철야기도를 하시고, 매 학기가 시작되는 3월과 9월에는 아예 한 달 내내 철야기도로 헌신하시는 80을 넘기신 노 권사님의 기도이다. 오늘도 엄마는 밤을 지새우면 외숙모와 외삼촌의 성함을 부르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화장실 출입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로 허리가 회복되게 해주시라’고 애타게 기도하실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 명령을 하달 받은 권사님의 교만한 딸은 ‘하나님! 외숙모가 화장실 출입 정도는 하도록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는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주님 뜻대로 인도하옵소서. 주님, 당신의 뜻이라면 외숙모를 회복시켜 주시고 외삼촌을 위로해 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고상을 떨 확률이 많다.


기도! 특히, 기도의 응답! 믿음의 여정을 걷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가슴 벅찬 소망을 안겨주는 말이다.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면 들어주신다.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다’ 이런 확신이 마음에 차오르면 당장 돈이 없지만 내일이면 밀린 월급을 받을 사람처럼 답답한 마음에 소망의 빛이 반짝하고 비치는 것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소망을 품고 기도한다. 또 ‘기도응답의 조건’은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니까 ‘될 줄로 믿쓉니다’를 빼 먹지 않고 기도한다. 그.러.나. 그렇게 구했던 많은 기도의 제목들이 ‘응답’ 아닌 ‘거절’ 판정을 받았다고 느껴졌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입사원서를 내고 기도했던 회사에서 ‘죄송하지만 다음 기회에 모시겠습니다’하는 답신을 받거나, 찍어두고 기도했던 형제나 자매로부터 ‘미안한데 사귀는 사람 있어요’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말이다. 나의 친정어머니는 기도로 사시는 분이다. 매일 새벽기도와 일주일에 한 번 밤을 꼬박 새우는 철야기도, 1년에 두 달은 아예 매일매일 철야기도를 하시며 한평생을 살아오셨다. ‘나는 기도 안하면 죽는다’라고 고백하시는 분이다. 이런 어머니조차 많은 기도응답의 간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하게 표현하면 응답된 기도만큼이나 기각 내지는 미결인 기도제목도 많다는 것을 나는 안다. 될 줄로 믿고 기도했으나 딸이 대입에서 낙방을 하기도 했고, 당신의 혈압이 떨어지기를 기도했으나, 허리의 통증이 나아지길 기도하셨으나 여전히 고통을 지닌 채 기도로 밤을 지새우신다.


이렇듯 기도에 대한 깊은 갈망과 더불어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일말의 의혹을 품고 나는 늘 기도한다. 기도할 뿐 아니라 기도에 대해서 제대로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만난 김영봉의 <사귐의 기도>를 비롯한 여러 책들에서 분명하게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지 지니 요정을 불러내는 요술램프가 아니라는 것 말이다. 맞다. 간청하는 기도는 기도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내 마음에 사는 어린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싫어. 나는 아빠가 날 사랑한다는 것보다 지금은 사탕이 더 좋아. 당장 지금 사탕을 사 줘. 그래야 날 사랑하는 아빠가 의미가 있어. 사탕 사 줘’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는 것도 좋지만 당장 눈앞에 산적한 나와 이웃의 고통의 문제들을 해결되는 기도가 더 좋다고 솔직하게 아주 은밀히 나는 고백한다. 아니, 최소한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하는, ‘기도할게. 하나님께서 선하게 인도하실 거야’ 라는 말이 피차에게 궁색하거나 공허한 위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하나님을 갈망할 뿐 아니라 하나님 손에 들려진 쇼핑백 안에 있는 선물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운동이든 어떤 기능이든 처음 배우기 시작하는 초보자에게는 아주 능숙한 전문가보다는 나보다 조금 먼저 시작한 선배의 코치가 더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그 분야의 대가가 된 사람은 이제 시작하는 내가 겪는 어려움들에 대해서 너무 멀리 가 있기 때문에 ‘쉽게 가르치는’ 것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래리 크랩의 <파파기도>를 펼치고 초반부부터 안심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그가 목사님도 아니고 신학자도 아닌 상담심리학자라는 것,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취약점 중에 하나가 ‘기도’라며 기도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기도 콤플렉스가 있는 나를 안심시키고 무장해제 시켰다. 안심을 하다못해 ‘이런이런... 래리 크랩이 젊은 시절에 이랬다면 지금의 나보다도 못한 거 아냐?’ 하며 은근 자만심까지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래리 크랩 특유의 마음을 읽어내는 전술에 휘말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파파기도’를 입게 달고 살았다. 운전을 하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심지어 남편과 갈등에 휩싸일 때조차도 바로 ‘나의 파파’를 부르며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파파기도는 너무 쉬운 기도이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의 나를 그대로 하나님께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기도이다. 그러나 파파기도는 아주 어려운 기도이다.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안다는 건 얼마나 긴 영적여정인가? 이렇게 되면 기도는 단지 기도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누구이신 것과 내가 누구인 것을 규명하는 문제는 믿음의 본질을 꿰뚫는 문제가 아닌가?

PAPA기도를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서 단지 기도가 아닌 ‘나’와 ‘그 분’이 계신 정확한 지점을 찾아내 정확하게 붉은 동그라미를 칠 수 있게 된다.


Present : 내 안에 어떤 일이든 간에 파악 가능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리기.

Attend :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예의 주시하기.
Purge :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이든 쏟아놓기.

Approach : 하나님을 나의 ‘1순위’로 여기고 나아가기.


이 순서에 따라서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서 비로소 PAPA의 손에 들려진 쇼핑백이 아니라 PAPA와 눈과 눈을 마주대할 수 있다. 그러면서 응답받지 못했던 기도에 대한 혼동과 오해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말이다. 무엇보다 좋은 이 책의 효능은 책을 읽다말고 기도하기 위해 책을 내려놓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연애를 잘 하기 위한 책을 들고 아무리 공부한들 연애를 잘 하게 되겠는가. 기도는 결국 그 분과 더불어 대화하고, 몸과 마음과 영혼을 할 수 있는 한 다 열어 그 분의 말씀을 들어보는, 기도 그 자체로 배워지고 깊어지는 것이 아니겠나.


잠이 빨리 깬 새벽에, 잠이 오지 않는 깊은 밤에,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이 상한 날에, 때로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열심히 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 느껴지고 삶의 모든 것이 공허해질 때, 아이들에게 버럭 화를 내고 다스려지지 않는 분노로 꽝꽝거리며 설거지를 하다가도 바로 그 순간에 파파를 부를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파파에게로 가 진실하게 내 상황을 보고하고, 왜 더 빨리 파파에게 올 수 없었는지를 고백하고, 그 순간 무엇이 내게 1순위였는지를 고백한 후에 귀 기울여 파파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다. 그렇게 기도하는 날이 오랠 때 나도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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