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맘에 한 노래 있어 4

 



교회 울타리 안에서 공식 비공식적인 상담한지 오래다. 그 사이 내 귀에 깔때기하나가 생겼다. ‘사모님, 공동체가 뭐죠? / 저 올해 리더 그만 둘래요. /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이 뭐죠? / 사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 우리 교회는 성경공부가 너무 약한 것 같아요.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회로 가야겠어요.’ 여러 정황 속에 나온 말이지만 대부분 사랑받고 싶어요의 다른 표현임을 알게 되었다. 시쳇말로 관종이라고 한다. 관심이 필요한 종자들이라는데 실은 우리 모두 관종 아닌가. SNS에 사진 올리고, 일기인 듯 일기 아닌 일기를 올리는 이유도, 심지어 갑자기 프로필 사진을 제거하는 이유조차도 나 좀 봐 주세요일 터. 단지 봐달라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선한 관심 즉, 사랑을 보여 달라는 뜻이니 SNS 타임라인에 울려대는 알림은 그저 이 노래의 가사 자체일 듯하다.

  

곳곳마다 번민함은 사랑 없는 연고요

측은하게 손을 펴고 사랑받기 원하네

 

어떤 사람 우상 앞에 복을 빌고 있으며

어떤 사람 자연 앞에 사랑 요구 하도다

 

기갈 중에 있는 영혼 사랑 받기 원하며

아이들도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찬송가 503세상 모두 사랑 없어’. 교회에서 흔히 불리는 찬송이 아니다. 곡의 길이나 특유의 늘어지는 분위기 때문만은 아니지 싶다. 이렇게 적나라한 가사는 불편하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필요하다고 노래하는 것 같지만 결국 이것은 나도 사랑이 필요한 존재라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로 시작하는 가사는 내 깔때기 귀에는 이렇게 들린다. 세상이 너무 추워. 나는 사랑이 필요해! 이것을 인정하는 것은 불편하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적에게 약점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스스로 무장을 해제하고 무력함을 인정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에두르는 방식으로 표현하는지도 모른다. 괜히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거나, 토라지거나, 일의 성공에 목숨을 걸거나, 방어막을 치고 동굴 속으로 들어가거나. 이 대목에서 다른 찬양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나는 이 찬양을 부를 때마다 그들를 대입했다가 다시 한 발 물러나 그들을 그들로 부르기를 반복한다. 주님, 아니 사랑이 필요한 그들을 온전히 타자로 세울 수는 없는 탓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사랑이 필요한 존재이며 동시에 그들의 사랑을 채워줘야 하는 딜레마에 놓이는 것이다. 내 코가 석자인 주제에, 누구 못지않은 관종인 주제에 사랑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오늘의 찬송이 등을 떠민다.

 

먼저 믿는 사람들 예수 사랑 가지고 나타내지 않으면 저들 실망 하겠네

저들 소리 들을 때 가서 도와줍시다 만민 중에 나가서 예수 사랑 전하세

 

쥐어 짜내서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리는 비에 장독대 뚜껑을 열어두면 빗물이 가득차고, 가득 찬 후에는 흘러넘친다. 흘러넘치는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랍시고 쥐어짜 내주고 난 후에는 내가 너에게 해준 게 얼만데본전 생각나기 십상이다. 우리 영혼은 장독대 같은 빈 그릇일지 모른다. 장독대가 스스로 자신을 채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을 생성해낼 수 없는 존재이다. 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가페라 불리는 오는 사랑이 가득 채워질 때 흘려보내는 유통자, 그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부어져 있다. 우리 존재에 이미 부어져 있는 사랑을 믿는 것은 사랑이신 분을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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