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이 살아와 자신의 작품 ‘엘리제를 위하여’가 소비되는 방식을 확인하면 어떤 표정 지을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수업 시작 종, 초인종 소리, 심지어 쓰레기차 후진 알림 멜로디. "이렇게나 쓸모 있는 유용한 음악을 내가 만들었단 말인가!" 하며 좋아할까요?


칼 융이 살아온다면요? 자신의 심리유형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졌다는 MBTI가 쓰이는 방식을 본다면요? "딱 보니 너는 ESTJ라서 그래. 아, 그 사람은 INFP라서 그래. 는 어쩔 수 없어....." 유형으로 이름표 붙이고 규정하는 하나님 놀이를 어떻게 볼까 싶어요.


칼 융 최후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을 찬찬히 읽자니 그간 했던 수많은 MBTI 강의를 되짚어 보게 됩니다. 반성, 또 반성하게 되네요. 융은 '나의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 실현의 역사다.'라고 했습니다. 인간 내면에 대한 끝없는 질문의 역사가 칼 융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든 현상이든 만들어진 틀에 끼워 넣고 이해하면 쉽습니다. 쉬운 만큼 게으른 방식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틀로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게으름이야말로 악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에니어그램을 '거울'이라고 합니다.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에 티만 잡아내는 인간의 본성, 자기의 얼굴은 결코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자기중심성을 비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신기하게도 안다 하는 순간 어리석음으로 떨어지고, 섰다 하는 순간 넘어지는 인간입니다. 신비롭게도 안다 하는 순간 나의 새로운 면을 비춰주고 깨닫게 해주는 것이 에니어그램이 가진 알 수 없는 힘입니다. MBTI도 자기를 객관화의 도구로만 쓰인다면 이보다 신박한 거울이 없을 것입니다.


칼 융이 그린 무의식의 지도는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은 물론 많은 영성가들의 가르침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인격의 빛과 그림자, 남성성과 여성성의 일방향에 치우치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으며 온전함을 추구하는 태도. 그 지난한 고뇌와 깨달음의 여정이 <기억 꿈 사상>에 담겨 있습니다. 빨리 쉽게 읽히지 않는, 차마 죽죽 밑줄을 그어댈 수 없는 책입니다. 경외감을 느끼며 읽었습니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칼 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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