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글쓰기 모임에서 “천국에서 만나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라는 제목으로 편지글을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가장 많이 담지한 대상이 떠오르겠지요. 수신자의 대부분이 ‘아버지’라는 것이 익숙한 놀라움입니다. 공원 산책을 하다보면 카메라에 담고 싶은 아이와 아빠의 모습이 정말 흔합니다. 목마를 태우고, 자전거 타기를 가르치고, 위태한 걸음마를 호위하며 아이 곁을 지키는 아빠들. 내적 여정이나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아빠들과는 사뭇 다릅니다.


며칠 전 십 수 년 아이들이 잠들기 전에 책 읽어주는 아빠가 책을 읽어주던 아빠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 경험으로 책도 쓰셨고, 개인적으로 많이 배우고 싶은 분입니다. 네 살 아이가 열여덟이 되도록 꾸준히 지속한다는 것이 놀랍고, 다 큰 청소년 아이가 그 시간을 좋아한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더욱 주목하게 되는 것은 ‘책 읽어주는 아빠’의 시작과 끝이 가족, 특히 아이와의 ‘정서적 연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근, 야근, 야근, 야근....의 나날 끝에 이건 아니구나 하며 시작한 것이 퇴근 후 몇 분이라도 책을 읽어주자는 것이었다고요. 그렇게 십몇 년 지나고 돌아보니 얻은 것이 ‘행복, 좋은 삶, 관계’라는 것입니다.


강의 중 본인의 아버지와 정서적 관계는 물론 아버지의 직업 상 물리적으로도 같이 한 시간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즉 많은 남성들이 그러하듯 좋은 부성은 커녕 부성을 느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지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아빠는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부성(父性)을 어떻게 배우고 구현하신 걸까요?

 

심리학에선 어린 시절의 결핍이 어떻게 오늘의 성격적 결함을 낳는지, 자기방어와 신경증을 낳는지 그 설명과 이론이 무수합니다. 그러나 ‘결핍’ 속에서도 건강한 인격으로 꽃피우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은 빈곤합니다. 어떤 결핍이 어떤 심리적 장애를 낳는다는 이론보다 더 신비로운 것은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강사님께 그 부분을 질문했습니다. 흔한 심리학적 원리를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여쭈었습니다. 즉 내 아버지와 정서적 관계맺음의 경험 없이 아이와 끈끈한 정서적 유대를 일궈내신 힘이 무엇인지 말이지요.(저는 ‘책 읽어주기’라는 행위보다 선행하는 것이 이이와의 진정한 관계맺음을 향한 내적인 지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상했던, 그러나 다시 새로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 가족의 고유한 아픔들을 입에 올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치심이란 말도 쓰셨습니다. 그러다 젊은 날 만난 안전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한 번도 입에 올리지 못했던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에게 내놓은 것이 아니라 신(그분께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한 발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자신이 가진 경험의 어두운 부분들을 하나님이 수용해주시는 것을 경험했고, 그 경험으로 스스로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수용하니 절로 타자를 수용할 힘이 생겼고, 누구보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상처를 내어놓는 아빠. 내 아버지에게 받고 싶었던 바로 그것을 받지 못해 아픈 상처를 인식하고 내놓을 수 있는 아빠가 흔히 말하는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게 된다는 것이군요! 부끄러운 상처를 내어놓는 것은 또 다른 상처를 받겠다는 용기일 수도 있습니다. 멋지게 차려 입은 사람들 앞에서 혼자 옷을 벗는 느낌이랄까요. 치유와 성장의 열쇠는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좋은 부성을 경험하지 못해도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비이고, 참된 의미의 기쁜 소식입니다!



라고 페이스북의 연구소 페이지에 글을 썼습니다만.

심리학과 영성 사이에서 치유를 꿈꾸기,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결핍의 존재이며 동시에 하나님 형상인 우리. 사랑에 목말라 중독에 빠지나 이미 사랑이 부어진 존재로서의 인간. 둘 사이를 오가며 공감과 연민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상처 입은 치유자의 태도인 것은 알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응원해주세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