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못 쉬는 것은 미세먼지 때문만이 아니다.

밀폐된 공간이 뿜뿜 뿜어대는 자아 팽창의 호흡으로 충만할 때

공간은 마음의 이산화탄소로 가득 차 영적 호흡곤란 상태가 될 지 모른다. 

온통 '나'로 가득 차 빛 하나 들어올 틈 없는 자아숭배의 공간이라면 그렇다.

빈 가지 사이로 바람과 햇살의 길을 내주는 겨울나무 겨울의 숲처럼

여백이 있어야 한다. 숨 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





주일예배 광고 시간이었다.

마지막 광고를 마칠 즈음 회중석 뒤편에서 작지만 큰소리,

주보에 없는 소리라 더 크게 들리는, 어느 집사님 한 분의 목소리였다.

"목사님, 저기..... 광고 하나...... 오늘 점심은 버섯 밥이었는데요, 맛있게 잘하려다 보니까......

어쨌든 밥이 안 됐어요. 그래서 점심이 없어요. 

대신 버섯과 쌀을 싸드릴 테니 집에 가지고 가셔서 맛있게 해 드세요."

미소 섞인 작은 웅성거림과 함께 예배는 끝났다.

덜렁덜렁 버섯 섞인 쌀 봉지를 들고 돌아가시는 교우들의 뒷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책나눔 계획이 있던 청년부와 함께 밥솥째로 집으로 가져와 맛있게 먹었다.


 


이런 예기치 않은 사고가 좋다.

식사 당번 집사님들이 밥솥 뚜껑을 열었을 때, 

쌀과 버섯이 앉힌 그대로 있는 걸 보고 기겁을 하셨겠지만, 

어떡하냐, 어떡하냐 당황도 하셨겠지만.

그것이 주보에 없는 광고가 되고, 미소 섞인 웅성거림이 되고, 

덜렁덜렁 마음은 허전하고 손은 좀 무거운 발걸음이 되는 것이 좋다.

기계가 아니고, 로봇이 아니라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그렇다.

살아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란 이렇듯 예측 불가의 공간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 공간에서 때로 당황하고, 허허 허탈한 웃음 웃으며 자아의 빽빽한 숲에 빈터가 생긴다.

'내'가 지켜내는 무엇, 무엇, 무엇들이 얼마나 하릴없는 것인가.

엄격, 근엄, 진지. 각 잡고 예배 드리던 엄근진의 숲에 사람 냄새 실어오는 바람이 불었다.


작은 교회 와서 좋았던 기억은 생뚱맞게도 이런 일, 이런 순간이었다.  

미세먼지 걱정 없이 심호흡 크게 하는 날처럼 마음의 숨 크게 한 번 내쉬는 일주일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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