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어?" 씻고 자러 들어가는 찰나, 쓱 보고도 마음을 읽어내는 현승이가 말했다. "아니이, 일은 무슨 일이 있어? 강의 준비하는 거야." "왜애? 강의 준비가 잘 안 돼?" "아니, 준비 다 했는데... 내일은 강의가 아니라 설교야. 아, 설교가 아니라 늘 하던 강의이긴 한데, 주일 설교 시간에 하려니 좀 다르네. 부담이 많이 돼. (가끔 주일 설교 시간에 초대받아 갈 때가 있는데, 매주 설교 준비로 예민해지는 남편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현승아, 자기 전에 기도해줄래? 기도 안 하던 사람이 하면 잘 들어주시는데.... 하하. 기도해 줘." 다음 날 강의 또는 설교를 하며 정말 현승이가 기도했구나, 싶었다. 알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느껴졌다. 활활 불태우고 돌아온 나를 맞으며 현승이가 말했다. "잘했어? 엄마? 나 진짜로 기도했는데." 네가 진짜로 기도한 걸 엄마는 벌써 안단다!


"그 강의 언제라고 하셨죠? 몇 시예요?" 마음으로 '루디아'라 부르는 분이 있다. 내적 여정 벗님인데, 다른 얘기하다 흘러 나온 내 일정들을 기억하고 가끔 다시 묻곤 하신다. 기도하기 위해서. 새벽기도, 일정한 시간의 향심기도, 화살기도를 일상으로 사는 분이다. "기도하겠습니다!" 닳고 닳은 영적인 인사치레다. 그래서 기도하겠다는 마음이 들어도, 기도하고 있어도 "기도하겠습니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진부한 표현에도 진정성이 담긴다는 것을 그 루디아의 말로 안다. 연구소 하며, 내적 여정 안내하며 비틀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나를 믿는 힘이 없어서 그렇다. "오늘 그 강의하시는 날이죠? 새벽에 나리(연구소에서 쓰는 내 별칭)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나를 믿는다는 격려로 들린다. 나도 못 믿어주는 나를 믿어준다는 뜻으로 들린다. 루디아의 기도는 믿어준다는 말로 들리는데, 가끔은 주님의 말씀으로도 들린다. 다리에 힘 풀려서 스텝 꼬이는 날에 힘이 되는 기도이다.


갑작스런 진단과 수술, 그리고 조바심 속에 검사 결과 기다리기. 주중에 교회 집사님 가정에 있었던 일이다. 딸에게 닥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 어쩔 줄 모르는 부모님과 동일시된 남편이 한 주 내내 초조해 보였다. 목사가 교우를 생각하며 보내는 초조한 시간은 그대로 기도니까. "하나님, 이러시면 안 돼요. 하나님, 정말 이러시면 안 돼요." 내내 그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나도 기도했는데, 나도 집사님 부부와 딸을 위해 기도했는데 남편이 했다는 기도에 눈물이 났다. 남편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도 강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안 된다고 하는 걸 두 번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좀처럼 하지 않는 표현이라 낯설고, 낯설어서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주일 대표기도 하시는 집사님은 같은 상황을 놓고 "하나님, 제 베프 000 집사의 고통을 보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기도밖에 할 게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한 교회, 같은 공동체라고 하지만 하나라고 느껴지는 일이 많지 않다. 고통 앞에서는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 그저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고통 앞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고 서서 서로 기도할 때만 그렇다.


연구소의 여러 프로그램을 줌으로 진행한다. 내적 여정 세미나를 제외하곤 내가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더 많다. 글쓰기도 꿈작업도. 가만히 듣고 있는데 울렁거리고, 아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상황이 흔하다. 그럴수록 더 몸과 마음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잡는다. 어디서도 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낭독하고, 갑자기 떠오른 아픈 경험을 내놓는 분들 앞에서 뭔가 반응해야 할 것 같은 유혹이 늘 있다. 그 유혹은 '내가 당신의 아픔에 공감합니다'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 끝은 결국 나는 당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좋은 사람입니다, 인 경우가 많다. "똑똑한 사람은 알맞게 옳은 말을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때맞춰 침묵할 줄 안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에 나오는 말인데.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단지 똑똑한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저 텅 빈 시간을 갖는다. 굳이 피드백하지 않으려고. 그러다 보면 말 없음의 여백이 많이 생긴다. 그 아슬아슬한 시간, 언젠가부터 내게는 기도 시간이다. 방금 글을 낭독한 분을 위해, 말씀하신 분을 위해 가만히 기도하게 된다. 하루 그 어떤 기도 시간보다 뱃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절함으로 기도한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최하층 없이 최상층이 설 수 없다. 향심기도를 하고, 관상의 상태를 꿈꾸지만 삶의 구체적 경험 없이 영성의 고매한 경지란 없다. 필요를 구하는 기도, 기도 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기도가 진실하여 아름답다. 새삼 그 아픈 아름다움을 만나고 있다. 기복적 기도, 기복신앙을 혐오하고 미워하며 마음이 냉랭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의미의 복이든 복을 구하고 있었다. 기복, 祈福, 복을 기원하는 것 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 주말 어느 교회 청년 리더들에게 '삶과 신앙의 무기력, 기쁨' 같은 것들에 대한 강의를 했다. 강의 마치고 담당 전도사님이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강의에 힘입어 중요한 결정을 했노라고. 기쁘고 충족한 상태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상황이 많지 않다. 아프게 통화를 마치고 메시지를 보냈다. 기도하겠다고. 기도하겠다, 는 문자를 치고 있는 순간 이미 기도는 시작되었다. 기도해주세요, 기도할게요,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기도에 돌입한다.


사진은 우리집 베란다 앞 풍경이다. 집 앞에 저렇듯 교회가 있고, 커어다란 십자가가 치솟아 있다. 앞이 뻥 뚫리고 멀리 산이 보이는 시원한 뷰를 망치는 '옥에 티'라고 생각했다. 전에 명일동 살면서 명성교회 십자가를 얼마나 분열적인 마음으로 바라보았던가. 그때 기억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저렇듯 미학은 고려하지 않은 채 크기와 높이로만 승부하는 십자가일까, 개신교의 민낯 그대로 같다는 생각도 하고. 어느 날 남편이 "늘 옥에 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침대에 누워 저 십자가를 마주했는데 바로 기도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그 말 듣고 며칠 후, 새벽 일찍 일어나 베란다 앞에 섰는데 동트는 하늘 배경의 십자가가 조금 달리 보였다. 뻥뚫려 거칠 것 없는 뷰의 걸림돌인 것은 맞지만, 눈에 띌 때마다 나도 기도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
이 글을 써서 올리고 카카오톡 열었더니, 세상에 이런 음향 편지가 와 있었다. 이건 그냥 아가 목소리를 입고 온 성령님의 피드백이다. 이 글에 달리는 성령님의 댓글이다. 소리만 올릴 수 없어서, 목소리 주인공 모자 사진에 대고 다시 녹화하여 올린다.

기도을 계톡하꾸 기도에 감타암으로 깨어 있뜨라. 골롯태서 타장 이즐 말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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