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 개소 3주년을 맞았다. 3이라는 숫자가 담은 무겁고 풍성한 것을 그대로 느낀다. 고요하게 느낀다. 벼르고 벼르던 신소희 수녀님의 '베긴(Beguine) 특강' 3주년에 맞출 수 있었다. 팬데믹 상황, 수녀님의 건강 등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결국 성사된 것 역시 '3'이라는 숫자에 부합하는 신비이다. 수녀님을 다시 만나 수녀님께 배우고, 무엇보다 '베긴 영성'을 만나지 않았다면 연구소 3년은 무겁기만 하고 아프기만 한, 향방 없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몇 백 년 전 여성들의 선택과 삶, 삶과 신앙, 그렇게 일군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여성들의 공동체가 가슴을 뛰게 했다. 혼자 뛸 수 없어서 연구원들에게 소개하고, 우리끼리만 알고 누릴 수 없어서 특강을 마련했고 2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했다. 가족처럼 친밀한 사람, 모르는 사람, 심지어 가톨릭 신자도 세 분이 참석하였다. 어떻게 듣고 가셨든, 각자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수녀님께서 커다란 꽃다발을 해오셨다. 어쩐지 수녀님께 어울리지 않는 선물이다. 아니나 다를까 민망하신 듯 말씀하셨다. "제가 커다란 꽃다발 못 사요. 그런데 어제 집 앞에 꽃집에서 이걸 사는데 같은 돈을 받고 두 배로 만들어 주시는 거예요. 꽃다발이 꼭 연구소 선생님들 같죠? 제 돈은 반 밖에 안 들어갔어요. 반은 하느님이 내신 거예요. 그분이 연구소를 정말 축하해주고 싶으시구나, 했어요. 제가. 허허허." 수녀님의 존재가 꽃다발이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일깨우는 매개자라는 것을 아실까? 베긴 영성가 '하데위히'를 연구한 수녀님의 박사 논문을 읽으며 연구자로 수도자로 살아오신 수녀님 인생을 자꾸 생각해보게 된다. 그 고독한 연구와 수도의 삶이 오늘 내게 어떤 선물이 되고 있을지, 수녀님을 아실까?

베긴 영성을 오늘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궁금증으로 특강에 참여 하셨는데, 다 듣고 나니 "어떻게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사랑을 살까"라는 질문이 남았다는 후기로 가슴이 뜨겁다. 연구소 3년, 아니 여성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공부도 강의며 자주 좌절하고 분노한다. 앤 윌슨이 말하는 '중독 사회'의 벽 앞에서다. 교회고 사회고 가릴 것 없이 '중독 사회'이다. 세상 모든 일은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있고, 정답이 있고, 그 정답은 최종 권력자에게 있고, 파이는 정해져 있어서 누군가 누리는 만큼 나는 누릴 수 없으니 투쟁해야 하고 경쟁해야 하는 사회이다.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야 하고, being 하지 않으며 끝없이 doing 해야 한다. '백인 남성 시스템'이며 다른 말로 '중독 사회'라 부른다. 절절하게 공감한다. 이 피라미드 꼭대기부터 아래까지 견고하게 지탱하는 시스템이다. 그 맞은편에는 중독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동반 의존으로서의 여성 시스템'이 있고, 대안은 따로 있다고 앤 윌슨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대안은 '과정으로서의 공동체'이다. 연구소 3년, 이걸 한 번 해보자고 다짐하였다.

쉬운 일은 아니다. 중독 사회에서, 나 역시 이미 중독된 존재인데 제 3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은. 연구소를 아니, 과정으로서의 인생 살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새로운 힘을 준 영성이 '베긴 영성'이다. 특강 마지막에 들려주신 무명의 베긴 여성이 쓴 시가 있다. 급진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동체가 기존의 신학과 잣대로 규명되지 않자, 사제들과 남성 신학자들은 탄압하기 시작했다. 마녀로 지목되어 화형 당한 지도자도 있다. 그들의 탄압에 반응한 어느 베긴의 시라고 한다. 시 자체가 가르침이다. 최근에 공저로 내신 책 <이 시대에 다시 만난 여성 신비가들>과, 책 안쪽에 남겨주신 메모 또한 3주년에 받는 소중한 선물이다. 아래 시는 도미니크 수사에 의해서 편집된 글이라고 하는데, 수녀님이 번역하여 나눠주신 것에도 두 단어(배우고 -> 분석하고, 검사하고 -> 검열하고)를 내가 바꾸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행동하기로, 분석하는 대신 고요히 응시하고 머물기로, 흘러오는 일상의 강물에 몸을 맡기고 춤추기로... 다시 새로운 마음을 가져본다.

당신은 말을 하고, 우리는 행동한다.
당신은 분석하고, 우리는 응시한다.
당신은 검열하고, 우리는 선택한다.
당신은 씹고, 우리는 삼킨다.
당신은 노래하고, 우리는 춤을 춘다.
당신은 꽃을 피우고, 우리는 열매를 맺는다.
당신은 맛을 보고, 우리는 향기를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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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Icon healed 2021.12.06 23:25 신고

    간직하고 싶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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