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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에는 늙으신 고모 두 분이 있는데...
그 중 작은 고모는 내가 해 드린 꽃게찜 맛을 한 번 보시고는 어디가서든 게요리만 나오면
평안도 사투리로 '게찜은 신실이가 잘해~ 고거이 젤 맛있어' 하신다.
고모들이 오시는 추도식에 빠질 수 없는 메뉴다.
의외로 만들기 쉬움.

1.일단 게가 싱싱하고 무지무지 커야 한다. 웬만한 싸이즈의 게라면
찌게를 하거나 게장을 담그는 것이 좋다.
2. 게 손질은 엄마한테 물어봐서 할 것.
3. 양념장 : 고추장, 고춧가루, 된장, 청주, 마늘, 물엿..에 또 대충
그런 것
4. 넓은 남비(전골남비보다 조금 깊은 것)에 게를 먼저 깔고 그 위에
엄청난 양의 콩나물을 덮는다(콩나물은 찜용으로 디게 굵은 거로
한다) 그리고 양념장을 쭉 뿌린다.
5. 웬만큼 익으면 파와 붉은 고추를 넣고 다시 익힌다.

------------------------------------------------------
사진에서는 게가 다 밑에 깔려서 안 보인다.
오늘 엄청 맛있었다. 진짜다. 우리 남편이 1년에 두 세 번 내 게찜 맛을 보기 때문에 때마다 정직하게 맛을 평해주는데 오늘은 맛있었다 그랬다.
나는 평소 양을 항상 눈대중으로 적당히 하기 때문에 양에 대해서 물어보면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그 이유로 실패도 가끔한다.ㅋㅋㅋ

한샘! 미안~ 선생님이 따라할 수 있게 조목조목 말해줘야 하는디....


이지영 : 아흑~~국물맛두 끝내줬어여~!! 게살두 으찌나 많던지..ㅋㅋ 울 고모짱~~~~ (12.17 10:10)
김인아 : 해볼께..근데 게는 언제가 제철이가? (12.17 13:44)
김종필 : 게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사야 큰 놈 볼 수 있습니다. (12.18 23:02)
함영심 : 콩나물의 영양소는 머리가 아니라 꼬리에 있다는거 아시죠? 그래선지 요리집의 찜요리의 콩나물은 머리가 없답니다. 모양도 그게 더 깔끔해보이는듯... (12.23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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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김종필이 가장 활기가 넘칠 때는 소그룹 공동체를 주도적으로 섬기고 있르 때다.

공부할 때 또는 책을 볼 때 가장 김종필스럽기는 하지만 김종필은 공부가 삶과 연결되지 않는 것을 죽을 만큼 못견뎌 하는 사람이다. 김종필의 철학과 공부의 대부분은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 삶으로 드러날 때 아름다운 것 같다.


남편은 '대화' 그 중에서도 '듣기'의 철학에 매료돼 있는 사람이다. 매료돼 있는 만큼 잘 듣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내게는 잘 들어주는 사람이고, 목장이나 소그룹 공동체 안에서는 그런 것 같다. 소그룹 공동체를 더 의미있게 나아가게 하고, 그 안의 사람들을 일깨우는 프로젝트에 김종필은 남다른 감각이 있다.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워 하는 것 같다. 남편에게 목회를 하기 위한 어떤 은사나 리더쉽이 있는 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목회를 위한 리더쉽이 따로 있는 지 조차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편의 이런 점은 목회를 할 때도 장점으로 작용할 것이라 믿는다.


남편이 설교를 잘 할 지 어떨지 모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설교가 형편없는 목사님은 정말 사절이다. 남편이 좋은 설교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돕겠다는 생각이 있다. 열심히 연구하고, 남의 것 인용해서 자기 것처럼 말하는 것 못하는 김종필이기에, 또 설교가 삶의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선언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을 못 견디는 김종필이기에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혹 목사가 돼서 그런 기준에 도달하는 설교가 안 된다고 여겨지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하겠지.ㅎㅎㅎ


집 밖에서는 여성운동을 돕고 페미니즘을 외쳐대면서 정작 자신의 아내에게는 다른 기준을 요구하며 사는 '무늬만 페미니스트'인 남성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모님은 자신의 남편인 목사님에게 '여보 우리 이불 가지고 강단에 가서 삽시다' 한다고 한다. 설교하는 것처럼 가정에서 살아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필씨는 아내에게 부모님께, 장모님께, 형과 누나, 처남, 조카들의 검증에서 합격 판정을 받은 인격의 소유자다.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그를 지켜본 어머님이 남편 인격의 제 일의 덕목으로 '정직'을 꼽으신다. 이것 역시 신학을 하려는 김종필씨가 가지는 또 하나의 메리트다.


굳이 마지막 몸부림을 해보려는 내 이기심일 뿐이고...주께서 쓰시겠다 하시면 뼈도 여물지 않은 어린 나귀가 예수님을 태울 수 있는 것이니까. 어떤 사람에게든 장점 그 곳에 항상 약점이 있는 것이니까 쓸데 없는 자부심 내려 놓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루 하루 일구어 나갈 뿐이다.


이제 남편이 신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큰 마음의 짐들과 염려를 내려 놓았다. 올 해 신학을 시작하든지, 아니면 내년에 하든지, 그리고 우리 가정의 먹고 살 일 등에 대해서는, 심지어 내가 사모가 되어야 한다는 그 부담까지도 별로 큰 걱정이 되지 않는다.

6년 전에 신학을 할 수도 있었고, 4년 전에 신학을 할 수도 있었는데....그 세월 동안 기윤실에서, 연대 대학원에서, 교육개발원에서, Young2080에서 했던 일과 맺었던 관계들이 또 다른 김종필로 성숙시켰고 그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고 믿는다.


결혼 초 부터 우리 부부를 일으켜 세웠던 그 한 마디로 긴 글을 맺을까 한다. 앞으로 또 어떤 마음의 시련이, 삶의 시련이 닥칠지라도...우리는 그렇게 살 것이다.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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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한영교회 청년회 시절에 한영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선배가 한 분 계셨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선배는 교직을 정리하고 기윤실 간사로 자원하여 들어갔다.

그 시절 교회가 떠들썩 했었다. 장로님들 대표기도 하실 때마다, 혹 기윤실 관련 광고에 그 분의 이름이 거명될 때마다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좋은 직장, 안락한 직장을 포기하고 대신.....'하는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기윤실로 가신 선배는 지금 기독교 시민운동에서 내로라 하는 현역 전문가로 활동 중이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셨던 최영기 목사님은 인생에서 가장 화려했던 어느 날 모든 걸 버리고 신학교로 가셨다. 실리콘 밸리에서 위 아래로 인정받는 공학박사 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에 부름을 받아셨단다. 해서, 훌훌 다 털어버리고 순종하여 신학을 시작하셨단다. 지금 최영기 목사님은 '셀교회, 가정교회'를 시작하고 성공적으로 안정시킨 것으로 한국교회에 정말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 일하고 계신다.


어릴 적부터 너무 많이 들었던 얘기다. 하나님이 일꾼으로 부르셨는데 순종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해도 실패만 하고, 그래도 순종하지 않으면 나중에 매 맞고 신학교 가게 된다. 외적 소명, 즉 같은 공동체 안의 사람들이 공감해 주지도 않는데 충만한 내적 소명만을 가지고, 이 일 저 일 그야말로 실패만 거듭하다 '선지동산'을 향하는 사람들을 나는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던가?


박수 칠 때 떠나라?!


적어도 내 남편이 신학을 하려면 화려한 자리를 박차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폼나는 장면을 연출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누가 말하는 것처럼 그래야 목회에도 성공을 할 수 있지 않겠나 말이다.

내 마음의 바닥에서는 이런 부끄러운 욕망과 좌절이 꿈틀대고 있었다. 자존심 상하게 '신학으로 도피한다'는 평을 들으며 신학을 하다뉘....말이다.


평소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잘 부르지 않았던 찬양 '똑바로  보고 싶어요' 의 가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맴돌았다.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초라한 모습으로 만들어 놓으셨나요?' 왜 진작 남편의 신학으로 보내지 않았을까? 오늘의 이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 신학의 '신'자도 꺼내지 못하게 하고, 또 신학을 하기로 결정을 했어도 마음으로 지지해주지 않았던, 결국 이렇게 막다른(?) 길까지 유보하고 유보하게 한 내 책임이 아닌가?



나 자신에 대한 분노, 자책감, 거기다가 자기연민,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결심한 남편 옆에는 내가 가장 든든히 서서 지켜줘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그다지 정리되는 것들이 없었다. '주님! 이 낮은 자를 통하여 어디에 쓰시려고...' 하면서 원망어린 기도를 했고 내가 나락에 떨어질지언정 남편은 흔들리지 않도록 붙들어야겠다 싶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남편의 반응이다. low self-esteem인 김종필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옆에서 보는 내가 자존심 상해서 죽겠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상황인데 정작 김종필씨 자신은 이상하리 만큼 허허로운 것이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괜찮다는 것이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더 주도적, 적극적이 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전부였다.

남편 특유의 low self-esteem이 발동되어 '역시 나는 안되겠나봐' 하면서 자기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대략 예측되는 시나리온데 의외의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오래 전, 남편과 교제하고 얼마 안돼서 결혼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중압감 등으로 인해서 헤어졌었다. 곡절 끝에 다시 만났을 때 김종필은 예전의 우유부단하고 결혼 얘기만 나오면 회피하고 자신없이 굴었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신실누나와 결혼할 것이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남편 답지 않게 확언을 할 때가 생각이 났다. 


그 때 처럼 어떤 확신있는 말을 내지 않지만 흔들림 없는 남편을 느낄 수 있었다. 나 처럼 뒤집어졌다 엎어졌다 난리를 치지도 않고, 자존심 상해 하지도 않고...참으로 건.강.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나 역시  지난 한 두 달 오버가 심했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충분히 알고 있는 남편의 약점인데 내 안의 어두운 것들에 비춰져서 오버에 오버를 거듭하며 분노하고 그랬었나보다.


목사인 동생이 그랬다. '하나님의 목적은 내가 누구를 돕고, 뭔가를 하고, 이루는 것에 있지 않고 그 모든 일을 통해서 나 하나 사람 만드는 것이 있는 것 같다'고....이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일은 인간 정신실 사람 만들기 프로젝트 였는지 모르겠다.  인간 정신실, 아내로서의 정신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시고 사람되라고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음성'이었는지 모르겠다.


주변에서도 그랬다. 우리 엄마의 사위에 대한 평은 늘 이렇다. '사람이 점잖고, 찬찬하고....차~암, 저 사람은 어찌 저렇게 찬찬한지...' 우리 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평은 이렇다. '걔가 어릴적 부터 점잖았었다'

그렇다. 우리 남편은 겉보기 점잖은 사람이다. 입에 발린 말, 조금이라도 정서상 오버가 된다 싶은 말, 결정적으로 어떤 말이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되는 말은 거의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어쩌면 남달리 내가 김종필에게 빠진 이유는 그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자신은 드러내지 않는(어쩌면 때로 인정하지도 않는) 가능성들을 보았다는 것.

때문에 나는 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해서 사는 동안 남편의 low self-esteem 성향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가끔 '좀 나서지, 좀 드러내지'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 정도로 좋았다. 오히려 내가 할 일이 있는 것 같아서 좋기도 했다. '이렇게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인데 내가 살면서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고 인정해 줄 때 정말 좋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거야'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정혜신의 말처럼  남편의 low self-esteem 적인 성향은,

제3자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의 안정감, 자신이 서 있을 지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다.


이렇게 나는 오히려 남편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며 이 부분을 존경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런 확신에 가까운 생각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남편이 신학을 결심했던 때부터다. 아니, 정확히 신학을 결심했다는 것은 주변에 알리기 시작한 때부터다.

'김종필이 신학을?' '과연 김종필이 목회에 적합한가?' '김종필은 카리스마가 없는데...리더쉽이 약한데....' 하는 반응들을 보면서 부터이다. 반응들이 이렇게 나오는데 정작 김종필씨 자신은 별로 시원한 답을 하질 못한다. 결국 다시 김종필에게 돌아오는 반응은 '김종필은 지금 정말 신학이 절실해서가 아니라 썩 만족스럽지 못한 현실의 도피로서 신학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 같은 것들이었다.


신학을 하는 문제로 처음으로 우리 부부가 나름대로 신뢰하는 어떤 분을 만나러 같이 갔다.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터질듯 답답함으로 우리는 대화를 잘 풀어갈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도 여전히 남편은 늘 하던 방식대로 미온적이고 수동적으로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얘기했다. 적극적인 지지를 받고 싶어서 찾아갔던 그 분은 '당신은 성공해본 경험이 있냐?' 하는 질문으로 내 자격지심 충만한 상상력을 건드렸다. 즉, '목회자는 어떤 일에든 성공을 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가 볼 때, 너는 그다지 성공을 경험해보지 않은 것 같다. 그래도 니가 하겠다니 해야지 어떡하겠나? 하는 메세지로 들리는 것이다.


남편의 직장은 헤드가 되시는 분은 우리나라 청년사역에서 내로라 하는 권위자이시다. 신학을 하겠다는 남편에게 그 분께서 조심스레 물으셨단다. '당신의 은사는 무엇인가? '라고 물으셨단다. 그리고 후문으로 들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길 '김종필 간사 보다 그 와이프가 목회를 하면 잘 하겠다고...'

역시 나의 자격지심과 상상력은 다시 한 번 의기투합 하였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별 은사라고는 없다. 목회를 하려면 은사(다른 말로 '다재다능')가 있어야지...차라리 당신의 아내가 MBTI도 잘 하고, 글도 잘 쓰고 다재다능 한 것 같다. 목회는 그렇게 다재다능한 사람이 해야한다' 라고 튀들어서 들어버렸다.


이런 저런 일들로 나는 현기증이 나도록 가슴이 무너졌다. 그렇게도 자기 안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남편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나 자신에게 화가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떤 유능한 여자들은 결혼을 끝으로 자신의 능력을 다 사장시켜 버리고 마는데 나는 결혼을 통해서 더 당당해지고, 사람들 앞에 더 드러나게 되었다. 그 유일한 이유는 남편 김종필의 관용과 협조과 인정과 격려였다. 유치부 지도교사를 하라면서 스스로 고등부 총무 교사를 포기하고, 찬양대 지휘를 하라면서 청년부 교사로 봉사하기로 작정한 것을 포기하고.....그 때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하면서 칠렐레 팔렐레 하고 설쳐댔으니.....


한 동안 내 자신이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편이 내가 표현하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고 이 일, 저 일을 선수쳐 버린 내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로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칠렐레 팔렐레 '나는 남편 잘 만나서 결혼하고도 내 일, 교회 봉사 포기하지 않고 이렇게 잘 나간다' 하며 살고 있는 한심한 내 자신. 그런 일들의 반복으로 결국 남편은 점점 더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잃어 갔던 건 아닌지....어쩌면 지난 한 두 달 그렇게도 몸이 아팠던 이유는 몸이라도 아파서 그 죄책감을 면해 보려는 또 다른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부분에서 여전히 나는 내 자신을 온전히 용서할 수가 없다.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으로 손색이 없었던 청년 김종필. 그 청년 김종필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은 김종필이 목사가 되어 있을 거라고, 아니면 언젠가는 목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신실과 결혼한 지 6년 차가 된 김종필을 향해서는 '신학을 하겠다'는 그 결심 하나에 애정의 발로든 무엇이든 간에 왜 이리 걸려오는 딴지가 많은지....것두 가장으로서의 책임 같은 현실적인 상황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김종필씨 자신이 목회에 적절한 자질이나 은사가 구비가 안됐다는 식으로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김종필씨의 low self-esteem은 더 이상 미덕으로 다가오질 않았다. 좀 자신에 대한 피알좀 하고 살지. 누가 없는 것 가지고 피알을 하라하나? 자신이 남편으로, 아빠로 어떻게 인정받고 살아가는지, 얼마나 독서량이 많은지, 목장에서 얼마나 자주 성공적인 경험을 하는지, 아이디어가 얼마나 많은지..........좀 드러낼 때 드러내고 살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귀하게 나의 손으로 창조하였'다고 찬양하면서 자신이 얼마가 귀하고 대단한 존재인지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인식하며 당당해지지. 나 자신에 대한 '용서되지 않음'을 투사하여 필요 이상으로 남편을 원망하기도 하였다.

최근 더위도 잊을 정도로 심취해서 읽고 있는 책이 있다.

정혜신 이라는 정신과 의사가 쓴 '사람 vs사람' 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첫 장에는 이명박과 박찬욱 얘기가 '백미러 없는 불도저의 자신감  vs 상향등 없는 크레인의 자존감'이라는 부제로 붙어서 나온다.


이 첫 장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남편 김종필이 박찬욱과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박찬욱이 <올드 보이>로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자리에서 했다는 말이 저자는 '소박하다 못해 의아한 수준'이라고 했다. '로만 폴란스키 같은 거장을 직접 만나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은 것만 해도 충분히 영광이었다' 며 '위대한 감독들이 경쟁 부문 후보에 많이 올라이렇게 큰 상을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기쁨을 나타냈단다.


그러면서 저자는 박찬욱의 이 발언에 대해서 'low self-esteem'에 가깝다고 평을 했다.  'low self-esteem' 즉 '낮은 자존감' 대학원 공부할 때 얼마나 많이 들어본 말인가? 정신과든 특수아동 분야든 '낮은 자존감'은 음악치료의 목적영역 중 빼놓을 수 없는 치료 목적이다.


남편에게 '당신하고 박찬욱이 닮은 데가 있어' 했더니 허허허 웃으면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며 중학교 때 경험을 하나 얘기해 주었다. 중학교 때 전교 회장을 뽑는 자리에 후보로 올랐단다. 말하자면 정견발표 같은 걸 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 자리에 선 것 만으로도 영광입니다' 라고 했단다.

박찬욱이 서 있던 자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두 사람의 반응이 어쩜 이리도 비슷한가? 그렇다. 나도 가끔 남편을  'low self-esteem' 쪽으로 추측해 본 적이 있다.


김종필씨는 도대체 자신에 대해서 떠벌일 줄을 모른다. 나는 내가 운동신경이 지독하게 무디기도 하거니와 때문에 신나게 운동하는 사람들이 너무 너무 부러워서 남자들의 운동에 관심이 많다. 운동을 잘 하는 남자인가? 아닌가?는 내가 남자들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그런 남자들이 있다. '농구하면 나지. 족구? 내가 잘 하지. 내가 축구 좀 해'하면서 무슨 운동이든 다 잘 한다고 떠벌이는 사람들 말이다. 막상 경기하는 걸 보면 그저 뭐 중간 정도랄까? 잘 봐줘서 중상 정도? 그런 사람이 그렇게 심하게 떠벌이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내 보기에 김종필씨는 못하는 운동이 없다.(최근에 하고 있는 축구는 확실히 썩 잘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 해도 심심치 않게 골을 터뜨리니 아주 못한다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족구, 탁구, 농구, 배드민턴....

내가 눈으로 확인한 건 그 정도다. 사람들이 김종필씨를 보면서 '운동을 디~게 못하는 줄 안다' 몸도 기다랗기만 한데다가 잘 내색도 안 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 평을 들으면 내가 오히려 흥분이 된다. 남편보다 운동을 못하는 사람들이 그 앞에서 한 수 가르치고 잘난 척을 해도 김종필 자신은 별다른 내색이 없다.


운동 뿐이 아니다. 기타도 한 기타 치고, 찬양 인도도 한 인도 하고, 예전에는 노래 자작곡도 잘 했고, 그만하면 글도 좀 쓰고.....


객관적으로 얼마나 잘 하는지는 나도 알 수 없다. 그저 내가 답답하게 느끼는 것은 김종필씨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 낫다는것이다. 김종필씨에게 있어서 자신은 언제나 '부족한 나'다. 그래서 자랑을 못하는 것 같다. 늘 자기 자신의 기준에 못 미치니까 말이다.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과 함께하는 자리가 가끔 있다. 이런 자리에서 남편을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뭐 또래 모임에서도 말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암튼 더 현저하게 말 수가 주는 것이 사실이다. 논의 되는 주제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듣기만 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유는 그것이다. 나이도 어린 자신이 섣불리 말하는데 끼어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특히나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좋은 점이 드러나는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는 것 같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저자가 박찬욱에 대해서 하는 말을 보면,

박찬욱은 휘몰아치거나 내세우지 않는다. 스스로가 쑥스러워서 그렇게 못한다. '외면의 자기'가 인정받는 것에 비해 '내면의 자기'를 낮게 평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겸손과는 조금 다른 얘기다. 일반적인 사람의 평균치보가 더 'low self-esteem' 쪽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제3자에게 '안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스스로 잘 통제하고 있는 사람을 볼 때의 안정감, 자신이 서 있을 지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다.


병리적인 수준의 'low self-esteem'이 아니라면 미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주 적절한 자신감을 가지기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넘치거나 모자른 수준의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라면 모자른 자신감이 어쩌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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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나이에 그것도 결혼과 더불어 선교에 헌신한 두 젊은이가 있습니다. 두 사람을 개인적으로 접해보지 않고 이런 얘기만 들으면 대충 상상을 하게 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뜨거운, 그래서 입만 열면 선교, 하나님, 비젼...이런 얘기들이 마구 튀어 나올 것만 같은...'그런 젊은이를 상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런 우려을 하게 되기도 하겠죠. '선교가 열정만으로 하는 게 아닌데 말야...' 그렇습니다. 선교는 열정이나 비젼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저희 목장의 두 선교사님을 통해서 배운 것이지요.^^

2.
진태훈, 오윤선 두 사람은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가장 비슷한 점은 둘 다 '듣기'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두 사람이 AP목장에 온다고 했을 때 저는 청년부에서 리더를 했고, 선교에 헌신한 두 사람이 목장에 와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까? 하는 생각을 막연히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용했습니다. 조용히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귀를 쫑끗 세우고 있는 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얘기할 때 누구보다 열심히 말하는 사람을 쳐다보고 때로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들어주는 자세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말 잘 하는 사람, 말 잘 하는 젊은이는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잘 들어 주는 사람' 특히 '잘 들어 주는 젊은이'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저는 거의 못 만나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어쩜 그렇게 똑같이 '잘 듣는 사람' 입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얘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과 얘기 나누고 싶어할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도 잘 듣는 당신의 자녀에게 당신의 비밀을 더 많이 보여주실 것 같습니다. 저보다 어리지만 정말 배우고 싶고 존경스러운 모습들 입니다.

그러다 자신들의 차례가 되어 나누게 되면 뭐 거창한 선교 얘기를 쏟아 놓지 않습니다. 주중에 남편을 아내를 이해하고 섬기려고 애썼던 얘기들, 선교 훈련을 받으면서 있었던 사소한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희한한 것은 사소한 듯 보이는 그 얘기들 속에 성령님의 일하심이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3.
제가 두 사람을 통해서 배운 너무 소중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 선교 훈련을 다녀와서 나눔 시간에 들은 얘기 입니다. 타 문화! 선교사는 결국 타 문화를 향해서 가는 것인데....그 타 문화가 선교지에만 있는 것일까? 두 사람의 깨달음은 No! 였습니다. 실은 가장 가까이 사는 남편과 아내 끼리도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고 갈등하게 되고, 부대끼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타문화권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타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고 끌어 안는 것이 '선교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알았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도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모습이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미 '선교'라는 것을요.
어쩌면 두 사람의 '잘 듣는 태도'는 이런 마음의 밭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의 '타문화' 얘기를 듣고 저는 개인적으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부모님의 '타문화'에 대해서 잘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타문화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이후로 부모님을 섬기는 일이 한결 쉬워진 것 같습니다.^^

4.
저는 사실 결혼하고 나서 어느 부부를 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을 잘 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만하면 우리 부부는 서로 많이 이해하고, 수용하고, 사랑하며 산다고 자부하는, 일종의 교만 같은 것이 있었나보죠?^^ 그런데 두 사람의 서로에 대한 태도와 마음을 보고 있노라면 부럽다 못해 질투가 느껴집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편으로 그려집니다. 이들이 선교지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지, 함께 동역하는 선교사님을 어떻게 대할지, 아주 잘 그려집니다.
두 사람은 '인격 선교'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고 기도합니다.

5.
저는 두 사람의 몽녀여서 행복했습니다. 다른 목원들 역시 목자 목녀를 귀하게 대접해 주시지만 두 사람은 저희의 '권위'를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주변에 좋은 멘토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직접 저희에게 물어봐 줍니다. 이럴 때 얼마나 감사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는지...쥐뿔도 모르는 삐리삐리한 목자 목녀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언제든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하는 태도니까요.
아~ 그래서 같이 훈련 받은 선교사님께서 최종 파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랬다죠. '제발 이번에는 예예 하고 따르지 말고 너희들에게 편하고 필요한 것을 따져라' 이런 식으로요.(정확한 말은 생각이 잘 안 나는군요^^)

6.
저는 훨씬 더 많은 두 사람의 장점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 젊은 사람들이 성숙하면 얼마나 성숙하겠냐고'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위에 적은 것들은 정말 작은 부분이죠. 더 많이, 더 구체적으로 열거하게 되면 두 사람에게 오히려 부담이 될 것 같아 줄여야겠네요. (이미 이런 공개적인 얘기가 조금이라도 부담이 된다면 그 부분 두 사람에게 미안합니다^^;;)
저는 요즘 마음 한 켠에 늘 조그마한 슬픔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들과 헤어지기 싫은 아주 자연스러운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 때문이죠. 할 수만 있다면 늘 함께 있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평생을 두고 함께 하고픈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 들게 하는 두 사람이 어디 가선들 사람의 마음을 사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두 사람의 사역은 이미 반 쯤 성공하고 들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앞 날에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기도와 마음을 쏟아 축복합니다. 선교지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좋으신 하나님이 두 사람을 안아서 지켜주시길 기도하고 또한 확신합니다.
두 사람이 네팔을 품은 것처럼 저희 가정과 목장도 함께 네팔을 품겠습니다.

윤선자매! 태훈형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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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 정목사님.
이제 또 다른 정목사님. 정운형 목사님의 시대가 도래하였도다!

생기지도 않은 아들을 놓고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습니다.'하고 서원기도 하신 부모님.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이 정해 놓으신 꿈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으로 살아온 동생이다.
마치 자신이 원하는 다른 길을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조차 '죄'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자 할 때마다 '어차피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결국 쓰시게 되어있다. 어차피 돌아서 돌아서 그 길을 가게 되어있다'하는 말에 올무가 되어 날개조차 펴 보지 못한 꿈들이 허다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이 쓰실 사람은 이렇게 목사 안수를 받고 말았다.

목사님은 무얼하는 사람일까? 목사의 자질은 무엇일까? 나는 평신도로서 어떤 목사를 원하나?
설교? 중요하다. 요즘 나는 설교에 목말라 있다. 들을수록 갈증나는 설교 말고, 한 방 들으면 말씀에 대해서 순종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 그런 설교,,,,, 정말이지 듣고 싶다.

꼭 그렇다고 설교만은 아닌 것 같다.

목사가 목자라면, 예수님처럼 양을 먹이는 목자라면 '한 마리의 양'이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마음 아닐까?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마음 말이다. 그리고 양의 필요를 가장 잘 알고, 그 필요를 채우주기로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 목자. 그런 면에서 내 동생을 딱 목자이고, 목사이다.

나는 내 동생이 목사인 것이 자랑스럽다. 많은 목사들이 목사란 이름에 부끄럽게 스스로를 '직업'의 하나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생각이 될 때 더더욱 그러하다. 설교 한 편을 준비할 때마다 밤을 새우며 산고를 치르듯 하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목사'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을 조금이라도 이용하지 않으려, 정직하려 애쓰는 모습이 자랑스럽고, 무엇보다 탈북자 한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가진 것 무엇이라도 다 주려고 준비된 모습이 자랑스럽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 스스로 너무 높은 기준을 가지고 '정직, 사랑, 헌신 결벽증'을 앓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도 된다. 결혼을 앞둔 동생이 '목사로서의 정체성'과 '남편 또는 아버지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잘 조화시켜 갈 지가 기대가 되고 또 염려가 된다.

이 모든 과제를 안고 동생은 안수를 받자 마자 홀로 기도하러 떠났다. 마치 예수님이, 사도바울이, 다윗이 광야로 갔던 것 처럼 외롭게 기도하러 떠났다. 그렇게 기도하러 떠난 동생을 바라보면서 왜 이리 마음이 시린지 모르겠다.

아들을 서원하여 드린 것이 또 다른 무슨 죄처럼 매일 밤 눈물의 기도로 아들의 방황과 성숙을 지켜봤던 우리 엄마. 목사 안수를 받는 예배에서 쏟으신 눈물의 의미는 어쩌면 엄마와 하나님 사이의 말할 수 없는 사연일런지도 모르겠다.
그런 엄마의 기도가 있는 한, 동생의 사역이 때로 힘들고 어려울지언정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시간이 많이 자나도 동생의 처음 마음에서 변질되지 않고, 작은 한 영혼을 향한 사랑의 순수함을 지켜 나가고, 무엇보다 그로 인해서 기쁨의 열매를 많이 거두는 그런 앞으로의 나날이 되리라 믿는다.

목사의 길을 가는 내 동생을 온 맘으로 축복하며.....
친구는 친군데.....명선이를 만나면 마냥 의지하고 싶어진다.
예전부터 그랬다. 결혼 전부터 명선이는 마냥 의지하고 싶은 친구였다.

20대 후반에 교회 청년회에서 만난 동갑내기 친구 명선이. 명선이를 처음 만난 지 얼마나 지난 다음인지는 모르겠다. 청년회에서 춘천에 놀러가는 일이 있었다. 여러 대의 자가용으로 나눠 타고 갔었고 오는 길에 같은 차에 탔다. 그 때 내가 명선이에게 말하자면 사랑고백을 했는데.....
이렇게 했다.
'너는 사람이 참 담백한 것 같다. 니가 말하면 다 진실인 것 같고 신뢰가 가~' 이렇게.
그랬다. 명선이의 장점은 그런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걸러지지 않는 말이나 표현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객관적인 말을 한다. 당장 듣기 좋으라고 하는 허접한 위로가 없어서 명선이가 해주는 상담이 좋았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일로 혼란스러울 때는 명선이를 찾았다. 그럴 때 명선이의 객관적이고 담백한 말들은 내게 그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었다. 그러고보니, JP를 처음 만나 교제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에서 늘 명선이가 함께 있었다. 헤어져서 죽을 것 같이 힘들던 그 순간에도 명선이가 곁에 있었다.

'맞아! 음악치료는 너한테 맞겠다.니가 한 번 해 봐' 이렇게 하는 말도 명선이가 하는 말이라서 무게가 있었다. 해서, 명선이의 이 말은 음악치료의 길을 가는데 주저함 없도록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수요예배에 찬양 인도 하면서 어떤 어른으로부터 참기 어려운 모욕을 당했을 때도 명선이가 함께 있었다. 찬양인도 하는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 마주 보고 앉아서 OHP 가사를 넘겨주면서 순간순간 내게 힘을 주었었다.

30의 고개를 함께 넘으면서 우리는 함께 결혼을 준비했다. 우리에게 적절한 사람이 어떨지에 대한 고민을 내 일 처럼 하고, 소개팅 한 것이 있으면 미주알 고주알 보고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했다.
난 늘 명선이를 생각하면서 이 찬양을 되뇌었다.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이 찬양으로 명선이를 축복했다.

어느 새 다섯 살 짜리 딸을 둔 아이 엄마들이 된 우리. 명선이는 볼 때 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다. 가끔씩 만나는 명선이는 '사모님' 이라는 호칭이 썩 잘 어울리고....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단지 새벽기도를 빠짐 없이 하고, 불편한 시골 생활을 기꺼이 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이서 명선이를 지켜본 나는 명선이가 얼마나 독립적인 사람인 지 안다. 명선이의 자취하던 방이 얼마나 깔끔했는지, 인간관계가 얼마나 깔끔하고 담백했는지, 자기관리가 얼마나 칼 같이 되었는지...... 그러면서 웬만한 사람들이 쉽게 그녀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의 명선이는.............
교회와 맞붙은 목사님 사택에 사는 사모님이다. 매주일 명선이 집에서 전교인이 식사를 한다. 주방에는 명선이 살림이 있고 또 교회 살림이 따로 있다. 집안의 가구 배치도 주일 점심식사가 용이하도록 하는 것을 최대한 고려해 놓은 듯 하다. 단지 물리적인 공간만 그러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명선이네 세 식구가 사는 집'이라는 울타리 자체가 없는 듯 하다. 맞다! 울타리! 바로 그거다!
예전의 명선이는 울타리를 분명하게 치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게 없어졌다. 이 부분에 생각이 닿으면 뭔가 뜨거운 것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차올라와 눈을 통해 나오고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삶을 드리겠다고 결단할 수 있다. 삶을 드리겠다는 것은 뭔가? 탁 까놓고 말해서, 삶을 다 드릴 수 있다고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보다 내게 익숙한 작은 습관을 고쳐 헌신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 아닌가? 그래서 진정한 헌신은 후자가 아닌가 말이다. 어쩌면 명선이 자신도 대단치 않게 여길 헌.신. 내 눈에는 달라진 명선이 모습 속에서 바로 그 '헌신'의 모습이 보인다. 그 헌신에 감동 되어 가슴이 뜨거워진다.
며칠 전 명선이를 만나고 온 이후로 감동의 실체가 무엇인지 집요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답을 얻었다.

명선아!
사랑해!
목사님과 너, 하민이를 위해서 매일 매일 축복하며 기도할께.
너랑 친구인 것이 너무 좋고, 감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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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복상 글을 쓰면서 많이 생각 났던 선배님이다.
'박선생님' 이라고 불러왔다. 박선생님과 박선생님의 부인 되시는 '정신언니'는 내 20대에 너무도 선명하게 흔적을 남긴 분들이다. 난 아직도 이 분들과 보낸 시간들이 그립고, 그립다 못해 마음 한 켠에서 통증을 느낄 때가 있다.

예전에 삼일교회에 다닐 때 선배님들이다. 함께 초등부를 섬겼었다. 정말 신나게 섬겼다.
내 마음에는 '이 분이 말씀하시면 정~말 따를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따르겠다'라고 마음을 정한 분들이 계시다. 몇 안 되는 그런 분 중 한 분이다.

'돈'에 대한 주제로 복상 글을 쓰면서 박선생님이 많이 생각난 것은 이제야 비로소 그 시절 박선생님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박선생님은 가끔 만나서 맛있는 것을 사주셨다. 나 뿐만 아니라 여러 후배들에게 그러셨다.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어떤 후배에게는 용돈을 주기도 하셨던 것 같다.아낌 없이 사 주셨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치원에 근무하면서 '저도 이제 돈 버니까 제가 사드릴께요'하면 언제나 같은 대답 '니가 나보다 돈 더 많이 벌면 사!' 어렴풋이 박선생님이 늘 넉넉하시진 않으실 거라는 느낌은 있었어도 마음으론 항상 넉넉하게 느껴졌다.

어느 핸가 대학청년부 수련회에서 박선생님이 '돈'에 대한 강의를 하셨다. 기억에 남는 한 두 마디가 있다. '여러분들이 지금 얼마를 벌든 지금 버는 것에서 십일조 하고 구제하지 않으면 더 많이 벌 때는 더 하기 어렵습니다. 아주 적은 것이라고 지금해야 합니다' 그 날 강의에서 나는 그 말씀을 가슴에 새겼던 것 같다. 해서 언제든 '바로 지금' 이라는 부담을 늘 안고 살았던 것 같다.

딴 얘기 같지만....
최근에 목장 분가를 하고 목장을 섬기면서 매주 식사 준비를 한다. 물가가 많이 올라서 식사 준비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다. 식사 준비까지는 어떻게 해 보겠는데 과일부분에서 갈등이었다. 이만원을 육박하는 수박을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렇게 갈등하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서글퍼지기도 하고, 약간의 불평도 있는 것 같고....몇 번 이런 생각이 들고 나서 마음을 깨끗하게 정리했다. '내가 못 먹는 한이 있더라도.....당장 채윤이 피아노 렛슨 시키려고 했던 것 좀 유보하는 한이 있더라도! 넉넉한 마음으로 나누자'
그 이후에 목장에 가서 목원들이 식사비 염려를 할 때 '우리가 목자로 헌신할 때는 식사준비며 비용까지 다 헌신한 것이니 맘 편히 가지라'고 말했다. 진정 그러했다. 그리고 목원들이 그런 걱정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박선생님 생각이 났다. '그 때 박선생님이 넉넉하심이 단순히 물리적인 넉넉함이셨을까?'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셨다는 것을 안다. 자신에 대해서는 검소하지만 후배들을 위해서 언제 어디서나 넉넉하게 베풀어주셨던 그 마음이 이제야 알아진 것이다. 아마도 말 없이 그렇게 베풀어주셨던 그 사랑이 오늘에 와서 깨달아지고 '나도 그렇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 가짐을 가지게 했는 지 모르겠다.

오늘 밤,
삼일교회 마석 기도원과 박선생님, 정신언니 그리고 그 신났던 초등부 성경캠프. 그 시절 박선생님이 사 주시던 맛있는 것들. 그리움이 차올라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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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부터 하루 한 번씩은 꼭 들었던 기도...
'우리 신실이 에스더 같은 믿음 주시고 우리 운형이 다니엘과 요석(셉)과 같은 믿음 주시옵소서......
새벽별 같이 빛나게 하여 주~씨 옵소서'

그러니까 함 계산해보자.
우리 엄마가 저 기도를 매일 가정예배 드릴 때 마다 했고, 새벽기도 드릴 때마다 했을테고, 금요일 철야기도때마다 했을테니...
36(년) * 365(일) * 2(번) = 26,280 (가정예배, 새벽예배)
36(년) * 52 (주) = 1,872(철야예배)
그 외에 1년에 두 달씩 철야하는 건 빼고라도.....토탈 28,152 번.

우리 엄마가 나를 향해서 '에스더 같은 믿음....새벽별 같이 빛나게....' 이렇게 기도하신 거이 30,000번에 가깝다는 얘기다.

나이 마흔 다섯에 나를 낳고 마흔 일곱에 내 동생을 낳고...내가 중학교 1학년 되는 해에 어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 때 우리 엄마 심정이 어땠을꼬? 그 때는 아버지 잃은 내 슬픔만 생각했었는데 남편을 잃은, 것두 아직 어린 두 남매를 키워낼 뾰족한 방법도 없이 남겨진 우리 엄마의 심정을 어땠을꼬?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엄마는 우리 남매를 참 잘 키웠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나 자신 엄마가 되고 우리 아이들을 보면서 '니들이 엄마 만큼만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음 좋겠다. 엄마 만큼만 좋은 사람들 만나고, 엄마 만큼만 소명을 발견하고, 엄마 만큼 좋은 배우자 만나서 기쁘게 살면 좋겠다' 싶으니 말이다.

우리 엄마가 우리를 양육하면서 가진 게 무엇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정말 그 아무것도 없다. 돈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를 잘 이해할 수 있는 젊은 감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엄마 자신이 많이 배워서 우리를 가르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 엄마는 죽으나 사나 예수님 한 분.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성전을 향해 기도하러 올라가는 그 발길. 그것 뿐이었다.

심지어 요즘도 '엄마 나 이번 토요일에 강의해' 하면 다시 전화가 온다. '몇 시에 강의 한다구?' 하고 물으시는데 그건 여지 없이 그 시간에 무릎 꿇고 기도하시겠다는 얘기다. 그렇다. 동생이 학생들 데리고 수련회 가면 그 기간 동안은 금식기도다.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앉아서 기도하시는 게 우리 엄마의 요즘 하시는 일이다.
어렸을 때는 그런 엄마의 신앙을 보면서 '기복적이라느니....'하면서 주제 넘은 판단도 하고 까불어댔지만 대체 내가 그런 우리 엄마의 믿음을10분의 1이라고 따라갈 수 있을까?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이들에게 어떤 환경을 어떻게 제공해 주어야 할까? 내가 주는 것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쓸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우리 엄마보다 내가 가진 것은 얼마나 많은가? 내 머리 속에 양육에 관한 얼마나 많은 데이터들이 입력되어 있는데....나는 우리 아이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코드를 맞추는 일에 얼마나 전문적인 사람인데....우리 엄마가 날 위해 했듯이 그렇게 기도할 수만 있다면 우리 아이들이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행복한 멋찐 사람으로 자랄텐데....

정말....나 정신차려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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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때부터 매 년 여름에는 수련회의 추억이 있습니다. 그 수련회의 기억은 나의 성장과 맞물려서 그 해마다 또렷한 빛깔로 분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죠. 어느 해랄 것이 없습니다. 중1때부터 결혼하여 청년부를 떠날 때가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 동안 유독 수련회를 가지 않은 해가 있었습니다. 1991년 이었던가? 그 전 해 대학청년부 수련회를 다녀와서는 '내년에는 결코 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었죠. 새로 바뀐 대학청년부 지도 목사님 때문이었고 그 목사님을 추종하는 청년부 임원들이 만드는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 목사님의 생각은 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사저널 같은 잡지를 보는 것은 영을 더럽히는 일이다' 그 때 나는 늘 시사저널을 끼고 다녔었는데 예배 설교 시간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암튼, 그 해 여름에 나는 수련회를 가지 않기로 결심했었습니다. 해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수련회 데려 갈려고 새벽기도를 하고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했던 정신실이 수련회를 가지 않는다고 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어른들이 '가당치도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설득하셨드랬습니다. 그렇게 말씀 하시는 분들은 평소 내가 존경해마지 않았고 나를 너무도 아끼는 분들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더욱 어려웠습니다.

그 때, 유일하게 제 손을 들어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전까지 대학청년부 지도를 하셨던 전도사님. 아마도 지금 돌이켜보면 청년부에게 너무 많은 것을 가르친다는 괘씸죄에 걸려서 고등부로 좌천되어 가셨던 것 같습니다. 유일하게 내가 왜 그리도 수련회에 가기 싫은 지 그 이유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어주는 분이었습니다. 그 수련회에 가지 않았고 수련회 기간 동안에 집에서 수련회 하는 마음으로 두꺼운 책 한 권을 독파했습니다(물론 전도사님의 추천으로 말이죠)

이 일을 경험하고부터 나는 전도사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유는 한 가지. 아무도 내 고통스런 외침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을 때 그 소리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귀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분을 언제나 스.승.님. 이라고 소개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은 나이에 대학원 공부를 하게 된 것도 어쩌면 전도사님의 세뇌 때문이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보고 싶은 책도 다 보지 못하시는 넉넉치 않은 살림에 항상 읽어야 할 책들을 선물해 주시고 '공부' 에 대한 끈을 놓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매주 주보에 쓰는 글을 보시면 '글이 살아있다. 물고기가 파다파닥 뛰어 노는 듯 하다' 라고 격려를 하시면 한 주 한 주 글 쓰는 일이 수월해지고 재미가 있어졌습니다. '어쩌면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셨죠.

내가 인생의 시간을 돌려서 다시 한 번 과거로 날아갈 수 있다면 전도사님이 지휘하시는 성가대에서 다시 한 번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불러보는 것입니다. 나는 전도사님께 찬양도 배웠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이 어때야 한다는 것과, 찬양의 대상이 누군인 것도 분명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지휘도 배웠습니다. 찬양대 지휘자가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배웠을 뿐 아니라 찬양 대원으로 하여금 음악 이상의 것을 드리도록 연습시키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습니다.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낯선 단어를 전도사님이 소개하시는 책에서 처음 배우고 그 이후로 나는 그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부부에게 모토가 되고 있는 '오늘 여기서 그 분을 위해'는 바로 그 때 배운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도사님과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보내 마지막 해에는(전도사님과 몇몇 친구들은 그 정들었던, 사랑하던 교회에서 우리 발로 걸어 나왔지만 사실은 쫓겨난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빡신 제자훈련을 받았습니다. 금요일 밤에 철야를 하면서 리더훈련을 받은 것입니다. 밤을 거의 새면서 죤스토트를 비롯해서 많은 책들을 읽고 발제하고 나누고....또 큐티훈련을 받고, 한 사람을 어떻게 끝까지 붙들고 제자 삼는 지에 대해서 공부하고 배웠습니다. 결국 그 리더훈련은 끝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디가 써 먹지도 못하고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다니고 있는 한영교회에 왔습니다.
요즘 목자부부가 되어 사람들을 섬기면서 새삼 그 때 받은 리더훈련은 오늘을 위한 준비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한 분께 배웠습니다. 지유철 전도사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오늘의 정신실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나이가 서른 여섯인데(허걱!)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친구랑 여전히 친구다.
여자친구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만 남자친구다.
고3때 독서실에서 만나서 같은 교회를 다니고 청년부를 함께 했었다.
청년부를 하면서 중창단을 만들어서 '사랑의 종소리'를 열심히 불러대기도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친구에게는 남다른 영력이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군 입대 할 때 일이다. 나랑 또 다른 친구 하나 이렇게 셋이서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군입대 하기 전에 모란시장 가서 순대국밥도 먹고 그렇게 놀러 다녔던 것 같다.
모든 남자들 그렇겠지만 이 친구도 군대 가는 거 엄청 부담스러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싫어라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갈 길은 가야하니까 교회에서는 송별예배 드리고 머리 깍고 결국 들어갔다.
그런데 웬 걸....
다음 주일 날 교회에 또 나타난 것이다. 잉?
내용인 즉슨, 입대하던 날 아침에 친구들이 배웅 가려고 모였었다. 그 친구 방에서들 빙 둘러 앉아 있는데 나갈 채비에 부산하던 이 친구가 비좁은 방 안에서 이동하기 위해 펄쩍 뛰었는데 발이 포크에 찔렸었다. 그것 때문에 결국 입대가 연기 됐단다. @@

암튼, 나이 사십을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꿈의 냄새가 나고 전혀 아저씨스럽지가 않은 친구다.
아무리 젊어 꿈과 낭만을 말한다해도 현실을 살면서 그 순수함을 지켜내기가 어디 그리 만만하더란 말이냐? 그러나 이 친구는 여전히 꿈을 말하는데도 부적절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무엇보다 나이가 들수록 그 꿈이 '예수 안에서 꾸는 꿈'이 되는 것이 느껴지니 참 부러울 따름이다.

이쯤 되면....
그의 아내는 이런 그를 두고 뭐라고 말할까?^^ 나는 내 남자 친구들 중에 이 친구가 결혼을 젤 잘했다고 늘 말하고 생각하곤 한다. 어디서 이렇게 좋은 사람을 찾아 냈을꼬?
최근에 이 친구 부부에게 MBTI를 해 줄 기회가 있었는데 이걸 마치고 그 생각은 다시 한 번 확신이 되었다. 나는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성격유형은 전혀 다르다 한다. 그래서 힘든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 대해서 질문하는데 당장은 대답할 말이 없어서 얼버무렸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성격이 다르지만 인격이 비슷하다. 두 사람 다 인격이 보기 드물게 훌륭하다. 바로 그거였다. 내가 두 사람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말하자면 사람들이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내가 너무 띄우나?^^) 비록 성격이 다른 점 때문에 서로 '아'하면 딱딱 알아듣는 의사소통이 되는 것 아니지만 둘이 옳다고 생각하는 지향점이 같다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탁 까놓고 얘기지 그렇게 꿈을 먹는 남편 옆에 아내 조차도 함께 꿈만 먹고 있으면 어찌됐겠는가? 그 친구가 순수함과 꿈에 대한 열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음은 분명 아내의 덕이리라.

서른이 넘고 마흔을 바라보면서도 고3 때와 다름없는 좋은 친구로 지낼 수 있는 것. 피차에 인격이 훌륭한 배우자 만난 덕이 아니겠는가?

자양동의 모닝베이커리에서는 빵과 함께 꿈을 굽는 아저씨가 아기 셋 키우며 마음 넓은 여인네와 함께 살고 있다. ^^
전주로 시집 가서 두 아들을 낳아 키우며 살고 있는 친구 화순이.

믿음 좋고, 잘 생기고, 능력 있고, 무엇보다 화순이라면 세상에서 제일의 여자로 아는 남편을 만나서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다. 사실 이 글을 쓸 때(이 글 역시 3청에 있을 때 주보에 쓴 글이다) '서른, 잔치는 시작됐다' 에 내포된 뜻은 하나님께서 화순이의 30대에 결혼을 통해서 남다른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고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당시 3청에는 30 고개를 넘어가는 세 처녀가 있었는데 교회 안 팎에서 오는 결혼에 대한 압력은 우리를 적잖이 힘들게 했다. 그러다 '믿는 남자가 드물어' 라는 유행어가 생겨났다. 여름 수련회에서 이 제목으로 촌극을 하고 그걸 각색해서 성탄절 교회 행사 때 다시 공연하기도 했었는데.
'믿는 남자가 드물어' 라는 말은 당시 우리의 형편과 처지(?) 그리고 우리 신념을 너무 잘 표현했던 것 같다. 단지 믿는 남자가 아니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갈 최소한의 준비가 안 된 남자에게 단지 결혼을 위한 결혼으로 시집가지는 않겠다는 의지도 있었던 것 같다. 때문에 쉽게 사람을 사귀지도 않았고 그래서 더 외롭고 어려운 미혼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특히 화순이처럼 순결하게(?) 마음을 지키며 20대를 보낸 딸에게 하나님이 제대로 된 신랑감을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역시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고 '어디서 저런 남자가 있었는가?' 싶은 남자가 전주에 있었고 '절대 서울을 안 떠나겠다'고 했던 화순이는 지금 6년 째 전주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니까 96년에 쓴 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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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저녁 8시 10분쯤 본당. 수요찬양을 준비하느라 키보드를 설치한다, 가사를 쓴다, 간식을 먹는다..... 한참 분주한 시간. 찬양팀들이 한 사람 한 사람 속속 도착을 하고 준비를 하는데 이 친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시작할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마지막 기도를 하는데도 나타나지 않은 사람이 이 친구라면 찬양 인도자인 나로서는 별로 걱정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늦어도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에... 그녀를 10년 동안 옆에서 관찰해 온 나의 확신이기 때문에.

그래서 내가 오래 전부터 이 친구에게 마음으로 붙여준 별명이 '한다걸'-한다면 하는 girl(?)-이다. 찬양이라면 죽고 못사는 데에 마음이 딱딱 맞아 친구가 된 지 벌써 10년이다. 때문에 새벽 1시에도 교회 피아노 앞에 나란히 앉아 시간 가는줄 모르고 찬양을 하곤했던 우리는 같이 한 찬양시간 만큼 싸운 시간도 많다. 싸움의 내용은 언제나 비숫한 것이었다. 예를들어 청년회에서 새로 뭔가 할 일이 생겼는데 내 생각에는 같이 할 친구가 이 친구밖에 없는데 절대 안 하겠다는 것이다. 같이 하자. 아니다. 나는 이 일에는 아니다. 아니다. 너다......

그렇게 무슨 일이든 새로운 일에 대해서 선뜻 해보겠다고 나서거나 하는 일이 좀체로 없는 친구다. 대충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나중에 눈치껏 발뺌을 하는 방법도 있으련만 그 대답 한 번 듣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러면 정말 하는 것이다. 성실하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섣불리 입에 발린 말로 대답하는 법을 모른다. 그래서 '한다걸'이다.

수요찬양건이 최근의 일이다. 집은 상도동, 직장은 신림동, 교회는 명일동. 그러니까 수요일날 퇴근을 하고 1시간 반을 버스 2번 지하철 한 번을 타고 왔다가 다시 그 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 그런 어려운 조건임을 알면서도 같이 참여할 것을 요청했고 그러기로 하고 1년이 지났다. 때로 어떤 사람에게 뭐 가까운 교회 나가지 뭐 이렇게 먼데까지 오느냐는 충고 아니 충고를 들으면서 꼬박꼬박 수요일 약속을 지켜준다. 한 번 하겠다고 한 이상 자신이 맡은 일이 크든지 작든지 이 친구에게 있어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사실 빠지면 찬양이 절대 안 되는 반주자도 아니다. 찬양 리더 옆에 서서 그저 같이 노래하는 싱어일 뿐(?)이다. 핑계를 대자면 이런 핑계를 대서 얼마든지 적당히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나는 그 성실함이 눈물겹다.눈물겹게 고맙고 눈물겹게 존경스럽다.

그렇다. 내가 10년을 보아온 이 친구는 그런 걸음걸이로 가는 친구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 하나님 앞과 사람과의 약속에 대해서 그렇게 하겠다면 하는 친구다. 매사에 그랬었다. 자신이 한 대답에 대해서, 말에 대해서 그렇게 책임지는 친구였다.
이 친구가 나이 서른이 되기까지 걸어 온 걸음걸이가 그러하다. 그래서 이 친구에게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상(?)이 무었일까? 지난 12월 2청의 3분 스피치 시간에 한 친구의 고백이다. '지난 한 해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늦어짐의 감옥-데이빗 씨맨즈의 <좌절된 꿈의 치유>에서 요셉이 갇혔던 감옥을 가리켜 한 말-으로 답해주심으로 더 깊은 기도와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시고 그로 인해 이전에 누리지 못한 기쁨을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평소 자기 표현이 많지 않고 입에 발린 말 잘 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기에 그걸 듣는 우리가 함께 감동 하는 시간이었음을 기억한다.

그렇게 20대를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요령 피울줄 모르고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온 친구에게 하나님꼐서 잔치를 주시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기쁨이라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보상으로. 그리고 이것은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렇듯 묵묵히 성실히 하나님과 사람 앞의 약속에 충실한 사람들에게 끝내 하나님께서 최고의 잔치를 베푸시리라 믿는다. 누가 이런 사람을 보면 감히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함께 몇 년을 같은 직장에서 일해도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송미경과장님과는 9개월 동안 같은 곳에서 일했죠.
객관적인 이력을 소개하자면 너무 많은데......현재는 김포에 있는 모 정신병원에서 임상심리 전문가로 일하고 계시고 여기 저기 많은 학교들에 강의를 하고 계시고...박사논문을 낳기 위한(?) 산고 중에 계십니다.

어렸을 때 이랬었답니다. 하나님이 잠자리에 들기 전 자신이 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주무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너무 늦게 잠자는 기도를 드리면 송구했다고 합니다. 그거 기다리다 못 주무시나 해서요...^^
그렇게 어려서부터 경.우.가 바른 어린이셨나봐요.

한 마디로 경.우.를 아는 분이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죠. 그 '경우'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겠죠. 윗사람 아랫사람한테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것. 그 지켜야 할 것을 지키다 보니 경우에 없는 사람들은 자연히 이 분을 거북해 하게 되겠죠. 거북해 하다못해 별별 험한 소리를 다 들어도 정도를 포기하지않는 분이지요. 그러면서 직장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크셨죠.

무엇보다 제게 '헐랭이' 라는 이름을 붙여준 분이기도 합니다. 제가 입사하고 저를 딱 3일 정도 보시고는 '아냐 아냐! 헐랭이야~' 이러셨다죠.
함께 신우회를 만들기 위해서 은밀히 기도 모임을 하고 그렇게 준비하여 갈등과 반목이 심한 직장에서 신우회를 만들고 그렇게 9개월을 보내곤 직장을 옮겨 가셨습니다.

직장 옮기는 것을 결정하던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 보았습니다. 늘 계획적이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후라야 행동에 옮기고 기꺼이 변화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 직장을 옮기는 과정에서는 불투명한 것들이 너무 많았고 순간순간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들이 많았습니다. 어려운 상황이었죠. 10년 넘게 다닌 직장이었으며 이 직장에서는 존경 받는 상사였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냥 그대로 직장에 남아 있어도 손해될 것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편할 수도 있었겠죠.
여기 저기 오라는 곳이 생기고 조건을 맞춰보고 면접을 보고 하시면서 '과연 내가 잘 하고 있는가? 이것이 하나님 뜻인가?'를 계속 물으면서 힘들어 하셨습니다. 과장님한테는 모든 변화는 충분한 검토와 계획 속에서 나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함부로 결정내리지 않으셨던 것이죠. 최종적인 결정을 해야 했던 날이 기억납니다. 매우 힘들어 하시면서 '나 이런 식의 결정은 태어나고 처음 해봐요. 불확실함 속에서 결정해 보기는 처음이야' 하면서 기도해 달라고 간절히 부탁하셨었죠.

그 날 이후로 과장님의 수첩에 <모험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에 나오는 한 구절이 늘 적혀 있게 되었는데...내용은 하나님께 백지 수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인하시고 하나님이 다~ 책임지시라는 뜻이었죠. 아마도...
능력도 있고 재능도 있는 분이기에 어떤 일을 해도 실패함이 없어서 당당할 수 밖에 없었지만 백지수표를 말하는 순간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주권을 하나님께 이양하겠다는 뜻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이후로 드물게 과장님을 만날 때마다 예전보다 더 많이 포기하고 더 많이 하나님께 삶의 주권을 이양한 사람의 평안을 엿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일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대한 결정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사람들에게 이거냐, 저거냐의 선택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완전히 믿고 선택하는 그 선택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아닐까? 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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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날은 2001년 1월2일.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에 첫출근 한 날이다.
아직 사무실도 책상도 정해지지 않아 선임자 책상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보내야 했던 하루.
그 사무실에 약간 깍쟁이 같은 아가씨가 하나 앉아 있었다. 깔끔하고 세련되게 생겼는데 그리 따뜻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전화 통화를 간간이 들어보니 '전도사님...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이 아마도 교회는 다니나보다. 에? 책상에 시심(시냇가에 심은 나무 -큐티교재)이 있네. 나두 가방에 시심있는데...

조금씩 알게 되면서 인기가 좋다는 걸 알았다. 관계들 간에 갈등의 골이 깊은 직장이었는데 이 사람을 좋아라 하지 않는 사람 찾기가 어려웠다. 상담을 전공했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람들 말에 잘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공감을 잘해주기도 하였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그 이상의 매력이 있는데 뭘까?

성격유형은 ISTP. 에너지 절약가다. 웬만한 일에는 필요 이상으로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그 점이 나로서는 부럽기도 한 면이다. 내가 기미나를 알고 맨 처음 배운 건 적당한 선에서 에너지 조절하기! 이것이다. (물론 기미나로서는 나한테 이걸 가르쳐준 적이 없다. 그냥 지 하고 싶은대로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나 혼자 열심히 배웠다.
그리고 SP 기질이 나랑 딱 맞아 떨어진다. 놀면 힘이 난다. 일만 하면 죽는다. 가끔 그것도 갑자기 충동적으로 한 번 놀아줘야 한다. 그러면 또 그 힘으로 얼마간 버틴다. (우리는 피차 애교있는 아내 되기는 어렵다. 엽기적인 아내가 되어 남편을 즐겁게 해 줄 수는 있다^^). 이런 맘을 서로 알아줄 수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그런 ISTP 기질에 충실하지만 열심히 개발한 F 성향들. F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열 받아서 막말 할 때는 디게 무섭지만 그렇게 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지 못한 것들을 열심히 찾아내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이 아마도 그녀의 매력인 것 같다. 사람들이 그걸 좋아라 하는 것 같다.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는 거 보면. '네~ 그러세요. 여보! 강의는 잘 끝났어요? 피곤하지 않아요?...' 어찌나 나긋나긋한지. 그러나 이것 역시 기미나의 본질적인 행동은 아니다. 그걸 원하는 남편에게 맞추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다.
영빈이를 대할 때도 차분히 자분자분 설명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영빈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위해서 미래에 대한 염려 떨쳐 버리고 집으로 간 그녀다. 미래에 대해서는 주님께 맡기겠다는 믿음 하나로 사표를 던지고 영빈이 곁으로 갔다. 그리고 에너자이저 백영빈ㅡ이 뒤를 따라 다니면서 1년이 넘는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때론, 무슨 IVF출신이 이렇게 뜨거워? 싶게 기도, 말씀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이건 아마도 남편과 함께 주고 받는 영향인 것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 기도의 필요성을 잘 아는 사람. 기도하지 않고 말씀 보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입버릇 처럼 말하는 사람.

그런데 특이하게 그녀는 애를 어깨로 낳는다. ㅋㅋㅋ 남들은 애를 낳고 나면 배가 나온다는데 그녀는 어깨가 넓어진다. 오늘도 그녀는 둘째 낳은 이후로 '이 어깨가 어찌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으리라.

내게는 그녀를 만난 게 은혜라고 여겨질 뿐이다. 위로부터 온 선물.
무엇보다 나의 wonderful counsell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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