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했다. 또 이사를 했다. 제목에 '결혼 후 열네 번째 집'이라고 썼다가 사진을 고르며 바꿨다. 집을 고르는 기준, 내게 이 집이 좋은지 안 좋은지를 구분하는 기준은 '창'이다. 창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이다. 생각해 보니, 내 마음에 남은 열세 집은 모두 창이다. 창이 있으나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집. 바람이 불면 덜컹덜컹 유리가 깨져 날아갈 것 같았던 집, 가장 춥고 서러운 집이었는데 말도 안 되게 좁은 주방 한켠의 창과 거기서 보이는 나무 한 그루로 위로받았던 집.
"이제 이사의 달인이 되셨겠네요." 또 이사했다고 말하면 이런 말을 듣지만. 그렇지 않다. 이사는 달인이 될 수 없는 영역이다. 이사와 관련된 모든 겪어내야 할 것들은 웬만해서는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다. 집을 구하는 일, 집을 구하며 향후 몇 년 가족의 진로를 생각하는 일, 대출을 받는 일, 그리고 이사 당일의 추운 마음.(이사 시점이 늘 겨울이다.) 외적으로 가장 힘든 일은 남편이 다 감당하고 있어서 이런 말 하기도 그렇지만. 내게 가장 힘든 것은 이사 당일 하루를 견디는 것이다. "신발 신으세요!"로 시작하는 이삿짐 센터 직원들의 시간은 아무리 겪어도 어렵다. 스팀청소기로 걸레질하던 내 거실과 안방을 신발 신고 누비는 그 하루가 내겐 정말 어렵다. 숨겨두었던 짐들과 먼지가 내 눈앞에 펼쳐지는 것에는 수치심이, "책이 왜 이렇게 많아요. 짐이 참 많네요." 이 말에는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여타 많은 감정들이 밀려오고 밀려가지만 짐 싸는 진도 맞춰 묵묵히 서성거린다. 마음은 한없이 서성거린다.
앞 베란다에서는 해가 뜨고 주방 쪽으로는 노을이 물드는 집을 두고 오는 것이 참 아쉬웠다. 아침 기도를 드리고 있으면 오른편 하늘이 붉게 물들며 해가 뜨고, 저녁 준비를 하려고 서면 저 앞에서 다시 불게 물들며 노을이 진다. 새로 이사한 집에선 해가 지는 것을 거실 책상에 앉아 볼 수 있다. 창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모든 집에 창이 있어서, 그래도 이제는 뻥 뚫린 풍경을 볼 수 있는 창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사 시즌에는 늘 조금씩 우울하지만 창이 있으니 다시 생기가 돌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낡고 어둡고 추운 집도 그대로 두지 못하는 나이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따뜻한 곳으로 만들고 마는, 살만한 곳으로 만들고 마는, 에로스 에너지를 장착한 나이니까. 감사할 것을 무한으로 찾는 나이니까.
이사하고 난 다음날 아침, 말씀 묵상에서 조금 엉뚱한 포인트가 위로의 메시지로 왔다. 대림기간 묵상이었으나, "하나님과 집, 예수님과 집"이라는 키워드로 내게 위로의 말씀을 주셨다.
너는 내 종 다윗에게 가서 전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살 집을 네가 지으려고 하느냐? 그러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온 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집에서도 살지 않고, 오직 장막이나 성막에 있으면서, 옮겨 다니며 지냈다. (삼하 7:5-6)
우리 하나님께서는 집 없이 옮겨 다니시는 분이구나. 당신의 백성을 위해, 당신의 백성이 있는 곳에, 당신의 백성을 위하여 옮겨 다니시는 분이지! 몸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도 그러하셨지. 탄생부터 그러하시고, 평생 그러셨지. 대림의 은총은 '하늘 집'을 버리고 '땅의 집'을 선택하신 예수님이다. 얼마나 집이 없으셨는지... 태어날 출산 공간조차 찾을 수 없었고, 곡절 끝에 태어나 누이신 첫 집이 말의 밥통이었으니. 집이 없다고 꼭 이렇게 이사를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것이 내 고유한 부르심이구나! 깨닫는다. 좋은 집, 나쁜 집, 새 아파트, 낡은 빌라...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옮겨 다니는 동안 그분과 함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때론 현존으로, 더 많은 시간 부재로 우리 집 거실, 창문 앞에 함께 계셨다. 여기는 다시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열네 번째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 글을 보내고 책을 받고 하는 출판사 등에 주소가 또 바뀌었다고 알리기가 민망해서 쓰는 글입니다. 여하튼 또 바뀌었습니다!
금요기도회나 화요일 책모임을 마치고 들어오는 남편의 손에 곶감이 들려 있는 때가 있다. 많이도 아니고 네 개 정도. 집 처마에 곶감을 말리고 있는 집사님께서 아마도 익을 때마다 몇 개씩 챙겨 가져오시는 것이다. 앙증맞고 정겹다. 하나하나 익어가는 곶감을 하나하나 챙기는 손길, 아니 그전에 하나하나 일일이 따고 깎고 매다는 손길이 느껴진다. 제 속도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곶감이 되어가는 그 고유한 시간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간과 손길을 느껴지니 마음이 보인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것인데... 희한하게도 보이는 것이 마음이다. 따뜻한 마음, 차거운 마음은 스쳐 지나면서도 느껴진다. 하물며 곶감이라는 物이 눈앞에 있으니 보이지 않는 마음이 훤히 드러난다. 게다가 곶감을 좋아하는 내 마음이니 몇 배로 크게 다가온다. (호랑이를 물리친, 무섭도록 맛있는 곶감이 아니냐고!) 집사님은 한결같이 우리 네 식구에게 각각, 곶감을 아니 따뜻한 마음을 건네곤 하셨다.
토요일 여의도 국회 앞으로 가기 위해 원고에 매진 중이다. 매진한다고 진도가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 최대한 앉아 있는 중이다. 진득하니 앉아 있는 나를 대접해야겠어서 간식을 좀 정성그럽게 챙겨봤다. 곶감과 함께 커피를 내렸는데. 커피 담은 머그잔은 도자기 공예가인 내 동갑내기 집사님의 작품이다. 지금은 교회를 떠나셨고, 잠깐의 인연이었다. 같은 동네 사는 덕에 컵과 그릇 여럿을 선사받았다. 집사님의 작품에 커피를 내리고 음식을 담을 때마다 떠올린다. 어떤 때는 선명하게 어떤 때는 스치듯 흐릿하게. 이 역시 시간과 손길이 담긴 마음이다. 전문가의 손길이다. 돌아보면 추웠던 날의 작은 온기였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는 것이 되게 하는 말과 손길과 몸짓과 물건을 선물이라 부른다. gift, 또는 은혜.
아가서를 묵상하고 있다. 오리게네스와 여러 교부들, 신비가들이 왜들 모두 아가서 주석을 남겼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 아가서에 이렇게 풍성히 담겨 있구나! 남편과 함께 하는 묵상이라, 부부만이 아는 길고 깊은 비밀 같은 사랑의 언어가 더 와닿는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사랑을 어쩌면 이렇게도 육체적인 사랑의 묘사로 잘 그려냈을까! 보이지 않는 영혼,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것과 다름 아니다. 보이는 것에는 보이지 않는 마음과 영혼 깊이 스며있다. 마음과 몸은, 영혼과 몸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주일 저녁, 남편 혼자 있는 집에 채윤이와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빠 저녁 어떡하지? 하다, 우리가 뭘 주문해 줄까? 하다 배민으로 떡볶이를 시키고 돌아오니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먹고 있었다. 교회에서 성경공부 있는 날에는 김밥으로 식사를 하는데. 남은 김밥을 챙겨 올 때가 있다. 냉장고에 두었다 다음 날 아침에 계란물에 적셔 부쳐서 먹으면 좋은 한 끼가 된다. 미니 계란에 푹 담가 프라이팬에 부쳐서 내주었더니 "오, 좋아 좋아! 코리안 오믈렛인가?" 하고 작명을 해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아파트에 곱창볶음 트럭이 온다. 곱창볶음은 냄새가 조금 나고, 순대볶음은 먹을만하다. 나는 또 순대와 순대볶음을 좀 좋아해야 말이지. 순대볶음 사 오면 집에 있는 깻잎이나 양배추, 양파 같은 걸 더 넣어 한 번 더 볶는다. 마늘이나 파고 더 넣고. 마침 알배기 배추가 있어서 채 썰어서 함께 내놓으니 식감도 좋다. 입맛도 감정도 무딘 남편이 "오, 이렇게 같이 먹으니 씹는 맛이 있고 좋다!" 한다. 남편이 그랬다. "나는 분식을 참 좋아해." "당신 순대는 안 좋아하잖아. 순대는 나만 좋아하지!" "아니야, 순대만 좋아해. 내장이 싫은 거지." 찐은 내장인데... 바부... 아무튼.
지난 몇 달 이사야서를 묵상하며 "철저하게 절망하라"는 메시지를 읽었다. 이사야의 예언은 "너희는 망했다! 이미 망했고, 계속 망할 것이다. 오늘 하루 마음의 안정을 위해 이집트를 의지하며 희망을 말하지 말아라. 너희는 망했다." 온전한 절망에 구원으로 가는 길이 있다. 그래서 저 그림을 (언젠가 남편이 설교 제목으로 붙인 이름)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이라 부르며 자주 떠올리곤 한다.
무력한 아기의 몸으로 평화를 가져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시기. 대림시기를 계엄 선포와 함께 맞았다. 이 무슨 믿기지 않는 아이러니란 말인가. 무력한 아기의 시간에 실탄 장착한 무력의 국민을 향한 난입이라니... 어제 하루는, 아니 이 며칠, 아니 몇 달 몇 년…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이란 이 말을 머금고 산다. 국가적 위기에 더하여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프다. 절망 속에 있다. 힘을 내라는 말이 무의미하고 무력한다.
대림기간, 이 기다림의 시간에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어젯밤 잠들기 전에 본 스웨덴 한림원에서의 한강 작가 인터뷰가 그분의 음성처럼 들렸다. 희망이 없을 때 희망하는 것이 신앙이다. “오호라,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외친 후에는 이집트가 아니라, 앗시리아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을 말하고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한강 작가가 느릿하고 착한 말로 내게 신앙을 일깨웠다.
" 때로는 희망이 있나? 이런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요즘은 얼마 전부터, 몇 달 전부터 아니면 그 전부터일지도 모르겠는데, 희망이 있을 거라고 희망하는 것도 '희망'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나 생각을 한다."
이 절망의 순간에 무슨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어제 종일 마음을 뜯던 남편을 위해 기도한다. 삶의 무게에 지친 내 동생, 깊은 절망 속에서 기도하는 내 친구의 막막한 시간을 위해서 기도한다. 이 나라 내 조국을 위해 기도한다. 이런 시절, 군대에 갇혀 있는 생명을 사랑하는 영혼, 자유로운 영혼 우리 현승이를 위해 기도한다. 절망이라는 이름의 희망이라는 기도를 드린다.
우리 채윤이가 스물네 살 청년이라니, 매일 마주하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 청년의 힘과 성장하는 에너지, 푸르른 생기와 함께 살면서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 채윤이 태명이 "푸름이"였다. 지난 토요일에 함께 영화 <위키드>를 보고 밥을 먹으면서 이 영화와, 전신인 뮤지컬, 또 그 전신인 <오즈의 마법사>까지 세계관과 음악 이야기를 끝없이 쏟아내는 채윤일 보고 내가 탄성을 질렀다. 오늘 아침에는 영화에서 들었던, 음악을 자기 빛깔로 연주하고 녹음해서 바로 들여주었다. "주님, 과연 이 아이를 제가 낳았단 말입니까!" 과장이 아니다. 내가 낳았지만, 이 아이 존재의 크기와 무게는 내가 감당할 수 없다. 한 마디로 너무나 마음에 드는 청년이다.
동생 군대 보내고 외동 체험 중인 덕에 한 달을 생일 축하로 지냈다. 유학을 위한 오디션 준비로 갈아 넣었던 시간을 끝내고 엄마 아빠와 제주도 여행을 가야겠다고 했다. (여행으로 생일 선물 퉁치겠다던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11월 초에 셋이 짧은 제주 여행을 했다. "내 생애 처음은 이런 가족이었잖아." 했는데 맞다. 이 아이가 우리에게 와서 살아보지 못한 삶을 열어주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아주 조그만 아이가 아장아장 걸었던 그런 날이 있었다. 둘이 호흡을 맞추고 "우웃~짜" 하고 번쩍 들어 올려주면 깔깔거리던 그 소리가 귀에 울리는 것 같다.
지난주 어느 날, 종일 있던 일정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왔다. 지하철로 마중 나온 남편이 채윤이가 저녁을 안 먹었다고, 호빵을 사다 달라했단다. 편의점 몇 군데 들렀는데 없더라며. 함께 마트에 가서 호빵을 샀다. 영어 시험을 앞두고 긴장했던 채윤이가 호빵을 보고, 아니 엄마를 보고 재잘거리다 얼굴과 마음이 확 풀린 게 느껴졌다. 주문했던 반건조오징어도 도착한 터라 호빵을 데우고, 오징어를 구워주니 애가 살아났다. 생기가 도는 채윤이를 보니 내 마음도 함께 살아나 긴 하루의 피로가 싹 달아났다. 오징어를 굽는데 속에서 노래 한 자락이 스물 거리다 입으로 튀어나왔다.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겐 얼마나 큰 기쁨인지..." 옆에서 따라 부르면서 채윤이가 그런다. "이거 무슨 노래야? 나 왜 이 노래 알아?" 내가 네게 불러준 노래가 얼마나 많은데... 니가 모르면서 아는 노래, 알면서 모르는 노래가 어마무시할걸!
맛있는 걸 먹고, 셋이 재미있다가도 현승이 생각이 불쑥불쑥 난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채윤이가 먼저 그런다. "아, 김현승 보고 싶다!" 채윤이 생일 축하를 하면서도 현승이 생각이 난다. 군인 월급 받아서 누나 생일 선물 사라고 돈을 보내줬다니... 짜식! 하면서 셋 모두 울컥해졌다. 현승이 없이 보낸 세 식구 3개월. 부재로 그리운 마음이 크면 클수록 오늘 함께 하는 시간에 감사하고 누려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언젠가 채윤이도 어딘가로 떠날 것이고, 그러면 현승이와 셋이 그리움을 섞어 맛있는 걸 먹고 놀고 할 것이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누리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온 노래일 것이다. 오늘처럼 우리 함께 있음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제주 여행 중 셋이서 많이 걸었다. 바닷길을 걷고 숲길을 걸었다. 걷다 돌고래를 보기도, 잔뜩 먹고 배 두드리면 밤길을 걷기도 하고, 걷다 비를 쫄딱 맞기도 했다. 20여 년 전과 그림이 많이 달라졌다. 우뚝 솟은 두 김씨 사이에 끼어 호빗족 내가 걷는다. 아빠 김씨가 놀린다. ”여보, 우웃~짜 해줄까? 채윤아, 니네 엄마 우웃짜 해주자.” 언제 이렇게 컸나. 아이가 크고 나는 작아진 오늘이 참 좋다. 채윤이 생일 파티를 하면서 어렸을 적 자장가로 틀어주었던 음악을 BGM으로 깔았다. 카세트 테이프로 사서 늘어지도록 틀어주었던 음반인데, 이사 다니면 잃어버렸고. 늘 그리웠는데 어느 날 유투브에서 채윤이가 찾아냈다. <Bless My Little Girl>. 아기 침대에 눕히고 조명을 어둡게 하고 끝없이 음악을 들려줬었다. 요즘은 내가 밤에 글을 쓰면서 틀어 놓게 된다. 어제는 혼자 이걸 들으며 "늙어서 침대에서 누워 지내야 할 시간에 이 음악 틀어 달래까?" 했다. 채윤이와 함께한 어제들이 내겐 선물이었고, 모든 내일들이 선물이겠으나, 가장 큰 선물은 오늘이다.
채윤이는 사랑니 발치 후 제 손으로 죽을 사들고 들어오기로 했다. 저녁은 패스하겠다며 빈손으로 들어오더니 "아, 약! 약 먹으려면 뭘 먹어야 하는데..." 한다. 돌발상황이 나를 일으켜 세운다. 누룽지만 끓여주는 건 그렇고... 누룽지에 계란을 풀어볼까? 이상한가? 생각하다... 채윤이 '최애 죽'이 생각났다. 그러니까 샤브샤브나 전골을 먹고 남은 국물에 끓이는 죽을 우리 채윤이가 엄청나게 좋아하지! 그것 뭐 맛만 비슷하면 되는 거지. 꼭 전골을 먹어야 하나?! 쯔유와 새우분말, 표고버섯 분말 같을 것을 때려 넣고 육수를 만들어서 누룽지 부숴서 끓였다. 그리고 계란을 풀었다. 성공적이다! 싱크로율 100%에 가깝다! 아깝다! 마취가 덜 풀려서 맛을 못 느끼는 김채윤이라니... 내 기분만 좋았다. 게다가 사진을 찍고 말고 할 비주얼도 아니어서 어떻게 뭐, 달리 자랑 뿜뿜 할 수가 없네.
오이을 봤는데, 며칠 전 어느 릴스에서 본 '지중해식 샐러드' 생각이 나서 두 개를 사왔다. 채윤이가 꾸부정하게 식탁 앞에 앉아 '성공한 실패 죽'을 처묵처묵 하는 사이 막막 만들어 보았다. 그까이 꺼 막 올리브유 대충 넣고 식초 넣고... 오, 맛있다! 숙성시키면 더 맛있다니 내일 아침에 먹어야지, 하고 냉장고에 넣었는데. 성경공부 마치고 늦게 돌아온 JP의 야식으로 다 털었다.
어제 종일 원고 붙들고 있었는데... 딱 두 문장을 썼다. 자괴감이 든다. 창의성이 글로 가야 하는데... 요리로 다 바꿔 먹어 버리니... (요리 책을 내겠다고 작심을 하면, 요리 아닌 다른 창의력이 폭발할 거야.)
토요일에 그는 있으나 없는 존재이다. 아빠, 남편, 사람 JP는 껍데기만 남기고 내일로 이미 떠나고 없다. 설교 준비로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의 동굴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집에서 준비하다 점심 먹고 교회에 가겠다고 하면 신경(질)이 많이 쓰인다. 요즘 주방은 시도 때도 없이 휴업 상태인데, 토요일에 이러면 뭔가 좀 해줘야 할 것만 같다. 실은 나도 주일에 강의가 있어서 그리 여유 있는 편이 아닌데. 그와 내가 다른 점은 "해야 할 일"을 앞두고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느냐, 마느냐에 있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은 하는 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면 유난히 "하고 싶은 일"이 많이 떠오르고. 결국 그것을 해버리고 만다. 텅 빈 냉장고이지만, 샐러드용 야채 한 팩이 있었다. 거기에 파스타면 대충 비벼서 샐러드 파스타를 하려고 했다. 오전 운동 다녀오는 길에 방울토마토 사고, 냉동실의 새우 한 줌을 꺼내서 준비했더니, "대충 파스타"가 아니게 되었다. 갑자기 신이 나서 발사믹 드레싱 제조하고. 맛을 보니 간이 또 딱 맞아 맛있고 난리인 것이다. 그러자... 신이 났다. 영감이 차올랐다. 곧 대림절인데, 에라! 크리스마스 리스 파스타다!
지난 주말 2박 3일 동안 “예수마음기도 침묵 피정”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허다하지만, 기도의 체험이야말로 언어로 다 담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 깊은 만남이기에 말입니다. 기도 피정의 은혜를 다 나눌 수 없어 사진 몇 장으로 대신합니다.
내적여정 1단계에서 의식성찰 기도로 시작하여 영성과정에서 향심기도를 안내해 드리고, 동반자과정에서는 꾸준히 하시도록 북돋워 드리고 있습니다. 이 낯선 기도들을 되든 안 되든 배운 대로 해오신 벗님들의 갈망이 아름답습니다.
갈망, 목마름. 우리를 향한 그분의 갈망이 먼저였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에게 마실 물을 좀 주세요.”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말 걸어주시는 예수님, 당신의 목마름을 먼저 내보이셔서 우리 안의 깊은 갈망을 일깨우셨습니다.
라고 연구소 SNS에 썼다.
피정 가는 차 안에서 헤아려 보니 예수마음배움터 저 경당에 앉아 처음 기도드렸던 때가 30대였다. 서른여덟. 뒤늦게 이름 붙여 정리한 "신앙 사춘기", 혼란과 메마름의 극한의 시간이었다. 기도의 언어를 잃어 그분께 닿는 길조차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두려움은 카오스였다. 분명 그분은 언어 너머에 계신 분인데, 언어 너머에 계시는 그분과 연결되는 방법, 침묵의 기도를 나는 알지 못했다. 《신앙 사춘기》의 부제가 "신앙의 숲에서 길 잃은 그리스도인에게"이다. 딱 그 상태였다. 익숙하던 그 숲, 신앙의 숲이 갑자기 낯설어진 때였다. 앞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뒤로 되돌아갈 수도 없는 곳에 서 있었다. 그때 그분께서 나를 '에니어그램'으로 낚으셨다. 에니어그램으로 낚아 데려다 앉힌 곳이 저 경당이다. 수년을 몰래 혼자 저 경당 한 구석에 앉아 기도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세월이여. 얼마나 확신이 없었고, 얼마나 두려웠고, 얼마나 외로웠는지 모른다. 확신 없는 채로, 두려운 채로, 외로움 가득 안고 저 자리에 앉아 기도하며 치유가 일어났다. 사춘기 너머에 더 멋진 어른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어에 담을 수 없는 하나님을 언어 너머의 방식으로 만나가고 있다. 그랬던 내 비밀 공간을 꽉 채운 이들이 내 벗들이다. 나와 같은 신앙의 숲길을 걸어온, 어쩌면 영혼의 모양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비슷한 것을 좋아한다. 연구소를 찾아와 에니어그램을 배우고, 내적 여정의 길을 걸으며 자신 안의 기도의 갈망을 발견하고 여기까지 온 이들이다.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었다. 30대 후반, 40대 내내, 그리고 이제 50대 중반.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향하는 기도의 길이 감사할 뿐이다.
정성스레 기도로 준비된 공간에서 귀 기울여 들으시는 하나님 상과 그리로 향하는 작은 발걸음을 만났다. 소박하게 꾸며진 환대 공간은 여기 배움터 수녀님들의 영적 감각이다.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향해 놓여진 작은 신발로 기억 저편의 노래가 하나 떠올랐다. 내 생애 최초의 노래였을 것이다. 말을 하기 시작하며 부른 노래일지 모른다. "얘는 나이 세 살에 조선말을 다했다" 이모나 삼촌께 들었던 말 같고. 엄마는 "얘가 주댕이가 빨리 터지더니 배추김치 주댕이를 좋아한다."고도했다. 두세 살,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노래를 불렀다.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심지어 서울 오가는 장항선 기차 안에서도 불렀다. 어린 아기가 또박또박 노래를 하니 신기해서들 시키고, 칭찬하고, 연양갱을 사주고 했던 것 같다. (채윤이 16개월에 어머니 교회에서 가족찬양을 하면서 "가서 제자 삼으라"를 불렀는데. 무대 아빠 품에 안겨서 또박또박, 정확한 음정으로 불러서 모두 놀랐던 걸 보면 상상이 되기도 한다.) 내 생애 처음 노래가 내 영혼에 늘 울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첫 노래, 첫 소망, 처음 갈망이 이것이었구나. 그래서 나는 기도에의 목마름을 놓지 못하고 여기까지 왔구나.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하나이고 싶은 마음이었구나. 연구소 6년, 배움터 다니기 시작한 지 17년, 이 노래 부른 때로부터 50여 년. 기도의 6년, 기도의 17년, 기도의 50년이었음을 이제야 알겠다.
그는 ‘김서방’이 되기까지 갑오징어의 존재를 몰랐다. 김서방이 되어 장모님 밥상에서 처음 갑오징어를 먹었고, 그날부터 그는 갑오징어를 좋아하는 김서방이 되었다. 장모님은 늘 갑오징어를 준비했다.
"엄마여~"
장모님은 김서방에게 전화를 하면 늘 ‘엄마여~’라고 말했다. 늦둥이 딸의 엄마인 장모님은 김서방에겐 할머니 뻘이었다. 김서방의 외할머니와 장모님이 동갑이셨으니, 그냥 할머니이다. 그리고 김서방은 ‘엄마’라는 호칭을 쓰지 않는다. 일찍 철이 들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엄마를 어머니라 불렀다. 그런 김서방에게 할머니 뻘 장모님은 "엄마여~"하고 전화를 했다.
김서방이 되어 갑자기 갑오징어 좋아하게 된 그에게 갑오징어 숙회를 해주었다. “사람이 참 찬찬혀. 착허고 점잖여." 하며 김서방을 예뻐하던 우리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
짧은 기도 피정에 들어간다. 기도 피정 떠나는 마음은 늘 무겁게 가볍다. 설레면서도 벌써 지루하다. 외롭고, 무엇인가 그리워서 조금 슬프다.
오늘은 좀 다르다. 오랜 시간 홀로 가 앉아 기도하던 곳에 벗들을 인솔해서 간다. 덜 외롭고, 덜 무겁고, 덜 슬프다.
며칠 머물 짐을 싸는 일보다 남겨두고 가는 일상을 미리 챙기는 일이 더 분주하다. 이제는 각자 알아서 잘 챙겨 먹는 식구들이지만, 두고 떠나는 내 마음은 또 다르다. 소고기 뭇국을 마음 담아 끓였다. 펄펄 끓는 국은 벌써 드리는 기도이다. 기도하는 엄마, 기도하는 아내의 공석을 기쁘게 감당해주는 가족들에게 남기는 감사의 편지이다.
아빠, 저 꽃(소국 화분) 왜 사 왔어? 응, 살려고... 어이구... 아빠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실을 섬기고 있다고오! 하아...
아침 식사 자리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통찰을 나누고 일어나 제 방으로 가던 채윤이가 발견했다. 어? 누가 이렇게 해놨어? 엄마 사진에 다스 베이더, 이거 아빠지? 아니거든! 김채윤 너 또 거짓말한다! 니가 그랬잖아! 부녀가 서로 자기는 아니라는 주장을, 여러 증거와 함께 내놓으며 영양가 없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을 하고 있다. 둘 중 누가 했대도 타당한 일이니... 이 집안의 공식 빌런, 다스 베이더이며 우상인 신실은 운다.
두돌 사진이다. 4등신. 머리통이 몸통만 한 아이를 꼭 20대 아이처럼 앉혀서 사진을 찍어놨네.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 중 심화과정에는 성격이 형성된 어린 시절을 다룬다. 단톡방에 어린 시절 사진을 나누고 있다. 58세 아버지, 45세 엄마가 낳은 딸, 참한 저 두돌 아이는 50년 후에 다스 베이더가 된다.
2024년 10월 31일 오전 11시. 정신이 번쩍 드는, 아름다운 설교 한 편을 들었다. 아름다운 가르침이 지천에 널렸다. 입을 닫고 눈과 귀만 열고 있다면.(존 스토트 신부님에게 자연 관찰하는 법을 가르치신 그분 아버님 말씀이라고 한다.)
보시다시피 예수님은 새를 우리의 선생님으로 삼으신다. 복음서에 나오듯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참새 한 마리가 제일 똑똑하다는 인간에게 신학자요 설교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수치다. 공중에 있는 작은 새의 수만큼 우리에겐 많은 교사와 설교자가 있다. 그들의 생생한 본은 우리를 당황케 한다... 그러므로 나이팅게일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마다 당신은 훌륭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다... 나이팅게일은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주님의 주방에 있는 것 같아요. 주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또 요리사요 주인이시지요. 그분은 당신의 손으로 만든 수없이 많은 작은 새를 매일 먹여 주시고 살찌워 주신답니다." (마틴 루터의 산상수훈 강해 중)
2024년 9월호 <복음과 상황>의 커버스토리가 ‘중년의 영성’이었다. 여기에 나란히 실린 내 글과 남편의 글이다. ‘JP&SS의 사랑과 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함께 기고했던 일이 벌써 20여 년 전이다. 신혼일기를 썼던 지면에 중년일기를 썼다.
JP&SS의 사랑과 책과 중년 이야기
정신실
“누나도 같이 가시는 거잖아요. 제가 마음에 담아서 갈 거니까, 지리산에 같이 있는 거예요.” 이런 말에 마음이 녹아내렸다. 교회 청년들과 지리산 종주를 떠나던 후배 JP가 잘 다녀오라는 내 말을 이렇게 받아쳤다. 말이 없는 친구인데, 했다 하면 이렇구나! 평생 이렇듯 달달한 세레나데를 듣고 살겠구나, 하며 결혼했다. 환상이 깨지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기나긴 인생 여정 중 에로스 에너지가 폭발하는 짧은 순간이 있다. 생전 불러보지 않은 세레나데를 부르고 행복을 장담하며 결혼한다. 환상이었기에 다행이지, 음식이고 사람이고 단맛을 안 좋아하는 내가 평생 달달함 속에 살아야 했다면 고통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올해 결혼 25주년을 맞았다. 마리 루티(Mari Ruti)가 말한 바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25년 치열한 사랑의 시간을 보냈고, 덕분에 꽤 괜찮은 중년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사실 우리는 운이 좋았다. 결혼 3, 4년쯤 되었을 때 이 지면, <복음과 상황>에 ‘JP&SS의 사랑과 책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연재하는 기회가 있었다. 둘이 함께 쓰는 신혼일기였다. 후에 《와우결혼》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했는데, ‘와우결혼’은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의 줄임말이다. ‘와서 보라!’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싸움’을 보라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성격 차이, 재정, 출산과 육아, 가사노동, 일과 소명, 부모님과의 관계 등, 부부가 마주하는 주제를 놓고 주고받는 글을 썼는데, 한 번도 화기애애한 탈고가 없었다. 어떻게든 글이 되고 만다는 ‘마감일 마법’ 덕에 매달 결국 쓰긴 했지만, 그만두자, 도저히 같이 못 쓰겠다는 말이 수시로 나왔었다. ‘그만두자’는 것이 결혼이 아니라 기고여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감일 압박과 함께 보이지 않는 독자를 세우고 싸우는 싸움이라 나름 페어 플레이였다. 덕분에 각자 본격 싸움의 기술을 연마했고, 잘 싸우고 난 후에 더 가까워지는 맛도 보았다. ‘화해한 상태로 싸우기’라는 좋은 관계의 원리도 터득했다. 연재를 마친 후의 이야기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싸우고 살았답니다”이다. <복음과 상황> 덕에 사랑을 ‘성장의 문제’로 산 세월을 돌아보며 신혼일기 아닌 중년일기를 쓰는 감회가 깊다. 감사한 마음이다.
신앙 사춘기, 무의미의 숲, 중년의 현상 나이 몇 살부터 중년일까. 호르몬의 변화와 함께 완경을 하고, 이후에 오는 몸과 감정의 변화들, 흔히 갱년기 증상을 통해 여성의 중년기를 가늠한다. 중년을 연구하는 한 신부님이 ‘거꾸로 계산법’을 제안했다. 물리적 나이, 즉 살아온 시간보다는 삶을 마치는 시기로부터 헤아리라는 것이다. 태어남이 아니라 죽음의 방향에서 중년을 바라보자는 뜻이다. 일에서 물러나 은퇴하는 시기일 수도 있고, ‘퇴행성’이란 말이 붙는 건강 문제가 생기거나, 삶을 지탱하던 의미나 가치들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 때일 수도 있다.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순간에 상실감의 바람과 함께 찾아드는 것이 중년의 위기이고, 그 바람에는 죽음의 냄새가 묻어 있다. 중년 연구가들이 38세에서 60세까지 폭넓게 그 시기를 잡는 것이 이해할 만하다. 몇 살쯤, 어떤 영역의 무너짐과 상실감으로 중년을 맞이했는가는 한 사람 인생 여정의 고유함이 담긴 서사일 것이다. 내게 중년은 꽤 이른 나이에, 몸이나 정서보다 신앙의 위기와 상실감으로 먼저 왔다.
정확히 서른여덟이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그 나이 되도록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신앙에의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시작은 미약하였다. 교회 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지고, 예배에 앉아 있는 것, 특히 설교 듣는 일이 거북해졌다. 화선지에 튄 먹물 한 방울 같았는데 그 거북함이 신앙생활 전반, 아니 삶 전체로 퍼져나갔다. 퍼져나가고 퍼져나가면서 내 마음의 화선지는 무기력과 무력감으로 물들었다. 열정 넘치는 신앙인이었는데, 그 뜨거움은 죄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삶에 생기를 주었던 이전의 것들이 부질없이 느껴졌다. 힘을 내보려 해도, 아무리 힘을 내보려 해도 힘이 나지 않는 상태, 우울증 증상과 비슷했다. 무엇보다 전에 하던 기도로는 신앙을 이어갈 수 없었다. 교회는 가기 싫고, 설교는 더욱 듣기 싫으니 예전 방식으로는 기도도 하길 싫으니 하나님께 가는 길을 잃은 것이었다. 이러다 하나님께 버림받겠다는, 이미 받았다는 생각으로 좌절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예전 방식의 신앙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했던 기도나 신앙적 열정이 차라리 부끄러웠고, 때로 혐오스러웠다. 적극적으로 뛰쳐나온 것은 아니지만, 어딘가로부터 떠나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떠나온 그곳으로 통하는 문이 등 뒤에서 스르르 닫히고 있었다. 앞은 칠흑 같은 곳이라 발을 뗄 수 없었다. 한 발 앞이 낭떠러지인지, 뱀이 득실대는 늪인지, 혹여 빛으로 가는 신작로일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한 발 내디딜 빛은 책에서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둔 밤’이라는 말에서 ‘빛’이 보였다. 16세기 스페인의 영성 신학자 십자가의 성 요한의 책 제목이다. 이 책 《어둔 밤》을 현대적 의미로 해제한 책에서 제랄드 메이(Gerald G. May)가 말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의 신호들이 놀랍도록 나의 칠흑 같은 시간을 비추어주었다. 여기저기서 이름만 보았던 십자가의 성 요한, 아빌라의 데레사의 원저를 읽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낯선 이 책들이 마음에 어떤 길을 내주었다. 등 뒤에서 닫힌 문을 다시 열게 될 일이 없으리라는, 다시는 이전의 신앙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이 온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신앙의 어두운 숲에서 길잃은 내게 선생님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16세기 두 저자는 또 다른 중세 영성가들을 끌고 왔다. 또, 시대를 거슬러 사막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나를 끌고 갔다. 낯선 이 글들을 이해하기 위해 자료를 찾다 보니, 동시대 가톨릭 영성 작가들에 닿았다. 40여 년 신앙생활 동안 듣도 보도 못했던 보석 같은 책과 스승들이었다. 애써 찾아 만난 것이 아니다. 기도의 길을 찾던 내게 세기를 거슬러 기도의 스승들이 나타나고 찾아오시니 배우고 따를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몇 년을 그렇게 보내고, 그 어두운 나날들에 내 나름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아이의 신앙에서 어른의 신앙으로 가기 위한 변태의 시간, 신앙 사춘기였다. 신앙도 삶도 그 무엇도 의미 없는 무의미의 숲이었고, 중년의 현상이기도 했다.
위기가 기회가 되는 역설 30대 초중반에 쓴 JP&SS의 사랑과 책 이야기는 진로와 소명에 대한 고민으로 끝이 난다. 당시 나는 신생학과인 음악심리치료학을 새로 공부하고 기적처럼 풀타임 직장을 얻어 일하고 있었다. 자타공인 천직이었다. 평생 직업으로 기쁘게 일하며 살 일만 남은 것 같았다. 반면 남편은 시민운동을 거쳐, 다시 대학원 공부를 하고, 말씀 묵상지 편집 일을 하면서도 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느낌으로 지냈다. 결국 운명처럼 신대원에 입학했고 목회의 길로 들어섰다. 실은 내 중년의 위기 또는 신앙 사춘기는 이와 맞물려 있다. 열심 있는 젊은 부부에서 목회자 부부로 갑자기 정체성이 바뀌었다. 교회는 같은 교회였다. 평신도에서 목회자로, 남편의 위치가 바뀌자 덩달아 나의 모든 것이 바뀐 것이다. ‘고갱님’에서 갑자기 가판대 안쪽 판매원 자리에 서게 된 형국이랄까. 정확하게 말하면 판매원의 가족이 된 것인데, 가판대 안쪽의 세계가 무시무시하게 불합리했다. 기도와 예배의 메마름은 그 위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남편은 이제 교회를 지키고, 교회의 제도를 지켜야 하는 전도사-목사의 길 위에 올라선 것이다. 얄궂게도 내게는 이때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담을 넘는 시절이 되었다. 횡적인 담을 넘어 가톨릭으로, 종적인 담을 넘어 중세와 초 세기 기독교로 넘나들며 배우고 기도했고, 급기야 천직이라 여겼던 음악치료보다 영성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신혼일기를 표방한 연재 제목이 JP&SS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책’ 이야기인 이유가 있다. 남편과 나를 중매한 것도 책이고, 연애하다 헤어지게 된 사연에도 ‘책’이 있다. 청년부 시절, 후배 JP와 좋아하는 저자가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봉호 교수님과 이현주 목사님이다. 두 분을 같이 좋아하기는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다. 고신 교단의 장로이기도 한, 시대의 도덕 선생님으로 보수성향을 띤 손봉호 교수와 진보 신앙인의 아이콘, 면직된 목사 이현주 목사였으니까. 이런 걸 두고 운명이라지! 운명적으로 사귀게 되었다. 초록에 줄이 그어진 무늬만 보고 같은 수박인 줄 알았다. 쪼개보니 빨강 노랑 수박이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달랐다. 남편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이현주적이었다. 그 진보성이 내게 불안을 유발했다. 반대로 나는 더 손봉호적이었기에 남편에겐 갑갑했던 것이고. 머리형에 활자 중독 커플로서 헤어짐의 위기를 책으로 타계하려 했다. 존 스토트의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함께 읽으면서 타협 지점을 찾아보려 했는데, ‘다름’의 내용만 더 또렷해졌다. 헤어짐이 답이었다. 그 시절 내 마음에 오르락내리락 울리던 노래 가사가 있었다.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김창기의 노래이다. 남편의 개방적 진보적 신학이 버거웠고 두려웠다. 저러다 종교다원주의로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보수적인 신앙 안에서 자란 내가 저렇듯 자유의 욕구가 높은 사람을 감당하긴 어려운 일이라 여겼던지, 헤어지는 어간 자꾸 저 가사를 되뇌었다.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
그랬던 남편은 고신 신대원을 나와서 제도교회의 목사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을 사이에 두고 설전을 벌이던 남자친구,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와 존 도미니크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을 좋아하던 그 청년을 떠올려보면 상상할 수 없는 오늘이다. 반대로 ‘구원의 확신’ 같은 것을 따져 물으며 교리의 틀에 남자친구를 집어넣고 싶어 안달하던, 제도권 밖 신앙이 두려워 사랑하는 남자를 온전히 사랑하지도 못했던 나는 신앙 사춘기를 지나며 담을 넘은 여자가 되었다. 기도를 배우기 위해 가톨릭의 여러 기관을 전전하다 결국 가톨릭대학원에 들어가 아빌라의 데레사로 논문도 썼다. 가톨릭 수녀님을 인생의 스승이며 친구로 얻고, 신부님을 영성 지도자로 만나는 오늘을 살고 있다. 남편이 뒤늦게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신앙의 위기로 닥친 중년을 지나며 어쩌면 나는 개신교회를 떠났을지도 모르겠다. 한때 그의 원심력이 버거워 ‘너의 자유로움으로 가’라며 떠나보내야 했었는데. 그가 목사의 이름으로 내 신앙의 구심력이 되어주었다. 모교회 전도사와 부목사, 대형교회 부목사를 경유하여 안착한 남편의 사역지는 이른바 ‘교회 사태’를 겪은 교인들이 세운 교회이다. 냉소와 불신, 특히 목회자에 대한 불신의 터 위에 선 시대적 교회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목사 노릇을 하는 남편의 ‘무너짐’이 내 늦바람을 잠재웠다. 그의 자유와 나의 자유가 화평하게 만나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중년의 온갖 증상을 ‘영성의 바람’으로 알아들을 때, 위기는 기회가 된다.
중년의 영성: 내적 자아와의 만남 여성들의 영성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영성이라고 거창한 것은 아니다. 테이야르드 샤르뎅(Pierre Teilhard de Chardin)의 말처럼 우리는 ‘영적 경험을 가진 인간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적 경험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에, 모든 이야기와 기도는 지금 여기의 자잘한 일상에서부터 시작한다. 희한한 것이, 결혼한 중년 여성들의 일상성찰과 기도는 거의 남편으로 귀결한다. 남편을 위한 기도라는 뜻이 아니다. 하루를 지나며 내 마음에 일어난 온갖 감정의 뿌리를 찾아 들어가면 결국 남편이 있다는 것이다. 남편이 모 셀럽 목사님이 SNS에 올린 일상 에피소드를 킥킥대며 들려주었다. “여보, K 목사님 얘긴데. 물을 마시다 남아서 나중에 먹으려고 두었대. 사모님이 그걸 그냥 버리지 그러느냐 꾸중(?)을 하시더래.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먹다 남은 물을 바로 버렸대. 그랬더니 아깝게 그걸 왜 버리냐고 또 역정을 내시더래. 어쩌라는 거냐고 하시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그건, 그냥 남편이 뭘 해도 꼴 보기 싫다는 거야.”라고 툭 진심을 말해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드러기로 병원에 갔더니 갱년기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런 갱년기 증상도 있냐 했더니, 아무 증상에나 갖다 붙여도 갱년기로 설명이 된다고 했다. 남편과의 관계로 가면, ‘이 남자의 모든 행동이 그냥 분노 버튼인 것’에도 갱년기를 갖다 붙이면 설명이 된다. 갱년기의 아내는 화내며 꾸중하시고, 남편은 쫄려서 눈치 보다 삐지고 만다.
중년의 영성을 논하며 카를 융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 안에 남성 있고, 남성 안에 여성 있다는 조금 난해한 이론이다. 《무의식의 유혹: 우울한 남자의 아니마, 화내는 여자의 아니무스(원제:The Invisible Partners, How The Male And Female In Each Of Us Affects Our Relationships)》. 이 책의 제목이면 거의 설명이 다 되는 셈인데, 어려우시려나? 무수한 임상 경험을 담아 후려쳐 본다면‘화난 여자, 삐진 남자’이다. 여성에게는 여성 호르몬이, 남성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줄면서 상대적으로 여성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남성에게는 여성 호르몬의 작용이 더욱 발현하는 것으로 보이는 때가 갱년기이다. 전에 없던 분노와 힘을 표출하는 아내, 말로 하면 될 것을 삐져서 입 다물고 있거나 우울한 모습을 띠는 남편에 대한 증언이 허다하다. 카를 융에 의하면 중년기 이후의 중요한 과제는 내적인 자아와의 화해이다. 타고난 성별로 사느라 애썼던 여자와 남자는 억눌리고 숨겨졌던 여성 안의 남성(아니무스 Animus)을, 남성 안의 여성(아니마 Anima)을 발현하고 꽃피울 때 온전하고 성숙한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그것이 중년 이후의 과제이다. 한 여자, 한 남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충족한 존재가 되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각각 자기 안의 이성을 잘 마주하고 살려내면 독립적이고 통합적이며 성숙한 자아가 된다는 뜻인데, 도대체 그 이성은 누구냐고?
“누나도 같이 가시는 거잖아요. 제가 마음에 담아서 갈 거니까” 지리산 종주를 떠나며 내게 남겨준 이 말, 나는 이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고백이며 프러포즈였다. 중년의 끝자락에서 다시 새롭게 이 말을 듣는다. 남성의 내면에 있는 여성, 여성의 내면에 있는 남성은 ‘투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외적 세계의 스크린에 구체적인 사람으로 비춰진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사랑에 빠진 이성이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진 이성에게서 나는 내 안에 숨겨진 온전성을 향한 에너지를 마주한다. 남편과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때, 그의 무엇이 나를 사로잡았던가 생각해 본다. 대체로 내게 없는 것들이었다. 멋져 보이던 그것이 어느 날 버거움과 두려움이 되었다. 멋지며 동시에 버거운 것을 끌어안고 일상을 살자니 미세한 결핍감과 분노가 조용히 쌓여간다. 중년에 들어서서 허무의 파도가 들이치자 애써 붙들었던 포장지들이 벗겨져 나가고 보니, 남은 것은 ‘꼴비기 싫음’이다. 처음부터 우리가 마음에 담았던 것은 당신의 멋짐이 아니라 내 안의 아름다움이었다.
신혼일기를 연재하던 시절에 농담처럼 지은 일종의 필명이 있었는데, 진지남과 익살녀였다. 매달 글을 쓰며 싸우던 사소한 이유 중 하나는 재미와 의미였다. 의미에 치중하여 진지해지는 것이 나는 싫었고, 재미에 집착하여 가벼운 글이 되는 것을 남편은 못 견뎌했다. 식탁에 나란히 앉은 엄마 아빠의 티키타카를 관람하며 요즘 우리 아이들이 놀리며 하는 말이다. 아저씨 개그 던지고 좋아하는 아빠, 제발 그만 좀 하라고 화내는 엄마에게 “익살녀 어디 갔어? 진지남 어디 갔어? 그 사람들 어디 가고... 아오, 진짜 안 어울리게 진지녀 익살남이 앉아 있어. 싸우려면 우리 없을 때 싸워.” 신혼일기 후에 ‘그 후로도 오랫동안 잘 싸우고’ 살았던 20여 년 만에 다다른 JP&SS의 책과 사랑과 중년 이야기이다.
정신실: 음악심리치료와 문화영성을 공부했다. 인간의 고통은 수선이 필요한 '손상된 자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 진정한 자기와의 연결이 끊어진 '소회된 자아'에서 기인한다는 믿음으로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라는 치유와 상담 공동체를 일구고 있다.
중년의 끝자락에서
김종필
중년(中年)이라는 시기를 지나고 있다. 거의 끝자락에 다다른 듯하다. 사춘기(思春期)도 시작과 끝이 있으니, 중년기도 그러하지 않을까. 얼른 끝내고 축하파티라도 하고 싶지만, 다 때가 있는 줄 안다. 일상의 매 순간들을 소중하게 마주하며 작은 평화와 작은 기쁨을 건져 올리게 되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중년기가 끝나 있을 것이다. 그럼 조금 더 성숙해질까? 조금 더 여유로워질까?
내 중년은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됐다. 내 나이 서른아홉이었다. 그때 나는 16년을 다녔던 교회를 떠났다. 내 청년기의 가장 중요한 것들을 만난 교회였다. 교회를 통해 첫 직장인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간사가 됐고, 교회를 통해 신학교에 입학해서 그 교회에서 첫 목회를 했다. 그리고 교회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두 자녀를 낳았고, 교회에서 살아있는 공동체를 체험했다. 뜨거웠던 시기였다. 그러다 갑자기 죽음이라는 난관과 마주했다. 아버지는 말기암 판정을 받은 후 40여 일 만에 떠나셨다. 그때 나는 교회와 목회자에게 섭섭함이 점점 쌓이던 차인지라, 내 젊은 날의 전부였던 교회를 사임했다. 그리고 병이 들었다. 열 가지 재앙이 순차적으로 내 몸을 쓰러뜨렸고, 나는 방구석과 병원을 오가는 신세가 됐다. 마지막 재앙이 끝남과 동시에 내 열정의 시기도 끝이 났다. 그리고 나이 마흔을 맞아 100주년기념교회라는 대형교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하지만 내 삶과 사역을 활활 태웠던 그 청춘의 열정은 다시 오지 않았다. 처음엔 기도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없는 교회당에서 홀로 앉아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30대의 열정은 두 번 다시 점화되지 않았다. 물론 겉으로 돌아가는 목회 일과는 정신없었고, 그 어느 때보다 바쁜 일상이었다. 그러나 내 영혼의 조종실엔 뭔가 알 수 없는 무력감이 들어와 있었고,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무기력의 늪에서 헤어 나올 기회들을 호시탐탐 노렸다.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받으면 마음이 잠시 뜨거워지곤 했기 때문이다.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하고 나면 누군지도 모르는 성도들로부터 문자가 왔다. 은혜를 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성도들의 반응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고, 그러다 반응이 없으면 무가치함이라는 쓸쓸한 정서와 실패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많이 받는 기술을 하마터면(?) 터득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을 좇으면 어떤 결과가 올지를 막연히 알았기 때문인지, 그 선택 앞에서 나는 매번 서성거렸다. 대한민국 40대 남성의 성공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높고 넓은 길로 갈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끝없이 성찰하며 십자가의 낮은 길로 갈지 갈팡질팡했고, 상승의 유혹과 하강의 은혜가 내 조종실을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그즈음 안젤름 그륀의 <내 나이 마흔>이란 책을 읽었다. 아내가 먼저 읽고 내게도 권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사십 줄에 들어서 생긴 이 무기력이 중년기의 과정이란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중년의 위기는 단지 신체적인 변화가 아니라, 신앙의 여정 중에 결정적인 시점이 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자기실현을 위해 하나님을 계속 이용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것인지를 결정하는 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청년의 열정이 식은 것은 후퇴가 아니었다. 무기력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들어선 것이다. 성숙한 어른이 되기 위한 피할 수 없는 골짜기였던 것이다. 중년앓이는 좋은 현상이다.
내 지하실의 그림자 중년을 앓는 동안, 나의 성격과 성향을 깊이 성찰하는 일이 잦아졌다. MBTI와 에니어그램 강사인 아내 덕에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자신을 객관화하여 성찰하고 인정하는 작업은 실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기 내면의 어두운 지하실을 들여다보는 것은 제정신으로 하기 어렵다. 자칫 자기정죄와 자기혐오에 빠져 염세적이 될 수도 있다. 언젠가 아내가 청년들과 함께 1박2일동안 에니어그램 세미나를 진행했을 때 일이다. 나는 사람을 번호로 규정하여 분류하고 설명하는 에니어그램 방식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러나 겉으로는 다양한 것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너그럽게 세미나를 열어주고 옆에서 슬쩍 지켜보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런 감정은 처음 경험한 것이었다. 아내가 에니어그램 5번을 설명할 때였다. 곁에서 한쪽 귀만 열고 엿듣던 내게 갑자기 수치심이 올라왔다. 평상시엔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숨겨둔 나 자신이 모두에게 까발려진 것만 같았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았다. 그 누구도 나를 정죄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은 수치심에 얼굴이 뜨거워진 것이다. 나는 내가 매우 합리적인 데다가 공정하고 온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논리적인 사고를 하고 편견 없이 객관적 판단을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주관적인 편견에 빠진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자부했었다. 내 판단은 늘 괜찮았고, 내 주장은 나름 수준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절대 치우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내 자의식 밑에 숨어 있었던 짙고 음흉한 내 그림자가 드디어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순식간에 늪에 빠져버렸다. 앉아 있어야 할지 나가야 할지 알지 못하고 허우적댔다. 내 지하실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다 드러난 내 자아를 외면할 것인지, 아니면 그 실체를 나의 정체로 인정할 것인지 씨름하는 시간이 시작됐다.
아내가 추임새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지금 여기 현존해!” 듣기 싫은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내겐 심각한 나쁜 버릇이 있었다. 오롯이 여기 머물지 못했다. 자동적으로 내 사유는 미래를 배회했고, 내 앞에 있는 이들과의 마음의 교류는 잘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와 대화할 때도 대화 그 자체에 머물지 못하고 내 존재의 중심은 항상 미래일로 근심했다. 그때 시계를 보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평생 어떤 미래의 순간을 막연하게 동경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내겐 현재가 없었다. 오늘이라는 순간이 얼마나 멋진지 제대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늘 결코 현실이 된 적이 없는 미래로 도피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그건 다른 말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이었고, 나 자신에 대한 못마땅한 자기부정이었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갈구하는 내 영혼이 반응하고 선택하던 못된 병폐였다. 교회에서 자주 쓰던 비전이라는 말은 내 성취 욕망을 거룩하게 포장한 말과 다름없었다.
그런 복잡다단한 시기로 전환되던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죽음이라는 실체가 무서운 냄새를 풍기며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죽음은 무덤덤한 관념 용어가 아니었다. 내 실존에 딱 붙어 있는 실체였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 존재였기에, 나는 죽음을 묵상하기 시작했다. 이제 죽음은 미래의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일이다. 죽음이 무엇이며,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질문은 동시에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이 되었다. 그러자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죽는다는 것은 삶의 일상적인 서술어가 됐고, 죽음 그 이후에 대한 호기심과 소망도 커졌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읽은 스캇 펙의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이 던진 흥미진진한 질문 덕이다.
중년의 위기로 쾌속 진입하던 어느 날, 한 문장이 내 가슴으로 날아와 콱 박혔다.
“오늘이 선물이다” (Present is present)
그 문장은 ‘지금 이 순간’의 찬란함을 숙고하고 했고, 나는 거기에 머무는 법을 비로소 배우기 시작했다. 죽음 앞에서 그 일이 시작됐고, 에니어그램에 비춘 성찰에서 그 일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바쁘게 일하는 것이 얼마나 해악인지도 알게 됐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먹으며, 느리게 말하고자 했다. 길가에 핀 들꽃을 들여다보며 쭈그리고 앉는 일도 잦았다. 홀로 벤치에 앉고, 홀로 산행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매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런 노력은 시작에 불과했다. 중년의 진짜 훈련은 아직 더 남아 있었다.
코로나가 터졌을 때, 네 식구가 함께 식사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때 아내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극도로 슬프고 고통스러운 재난이었다. 아들은 사춘기를 지나고 있었고, 딸은 성년기로 진입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나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이기를 바랐고, 기도했고, 그렇게 살아왔다. 허용적이었고, 정죄하지 않으려 했고, 지지하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그런데 내 노력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언제부턴가 식사 자리에 앉으면 나는 계속 가족들에게 상처 주는 일원이 됐다. 나는 보통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대화를 했을 뿐인데, 내 말들은 가족들의 마음을 때리는 방망이가 됐다. 내 성향에 충실한 원인-결과식 대화는 심문과 정죄의 구도를 만들어냈다. 허용적이고 독립적인 내 성향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귀결됐다. 말을 해도 상처를 줬고, 말을 안해도 상처를 남겼다. 내 존재 자체가 모두에게 상처를 주는 것 같았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족들과 불화하는 일이 이어지는 듯했다. 하루는 아내와, 하루는 딸과, 하루는 아들과 불화했다. 억울하고 슬프고 화가 났다.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꿈이었는데, 그게 깨지니 삶이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배우 (고)이선균이 드라마에서 한 말이었던가, “이번 생은 망했어.”
자발적 추락과 은혜로운 상승 툭하면 벽쪽으로 몸을 돌려 일찍 잠들던 내게, 어느날 아내가 책을 추천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쓴 <위쪽으로 떨어지다>였다. 형용모순의 책 제목이 예사롭지 않았다. 예상대로 매우 어려웠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세 번을 읽었다. 왜냐하면 이 책이 중년기의 구렁텅이에 빠진 나를 구출하는 밧줄이 될 수 있겠다 느꼈기 때문이다. 중년기에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방어적인 태도’를 인식하고 버리는 것이었다. 이 말이 무기력한 내 영혼에 새로운 활력과 소망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나름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나는, 습관적인 방어적 태도로 일관해 왔었다. 아내가 서운해하면 내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라고 방어한다. 딸이 화를 내면 내겐 그런 의도가 없었다고 방어한다. 아들이 속상해하면 다른 아빠에 비해 내가 얼마나 나은 아빠인지 설명하며 나를 방어한다. 집에서 그러니 밖에서는 오죽하랴.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도 그러니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교우들에게 오죽하랴. 방어적인 태도와 말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더 이상 해명하지 않기로 백번 천번 다짐했다. 속으로는 억울해서 욱할 때도 있지만, 나를 보호하기 위한 해명과 방어의 언어를 멈추고 최선을 다해 수용의 언어인 ‘알겠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억지로 했다. 아니 지금도 의지를 다해 그렇게 말한다. 해명하는 것은 나를 방어하는 것이고 타인을 아프게 하는 것이며 공감이 없는 자의 변명이 되기 때문이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내 성격의 그림자와 지하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식하게 된다. 내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부족한 존재였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사고뭉치나 꼰대가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은혜를 갈망하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팽팽한 긴장이 풀리고 관계가 이어진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너그러워지고 용서하게 된다. 해명하기를 그치면 말도 줄어들고, 귀가 활성화된다. 리처드 로어는 “인생 전반부의 임무는 자기 인생을 위하여 적절한 컨테이너를 만드는 것이고 인생 후반부의 임무는 그 컨테이너에 담아서 운반하기로 되어 있는 내용물을 찾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내용물은 추락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내게 다가온다. “먼저 추락이 있다. 그 다음에 추락으로부터의 회복이 있다. 둘 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은총이다.” 로어 신부의 말이 무슨 말인지 존재로 알아들어졌다. 추락이야말로 위쪽으로 오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말에 납득이 됐다. 정말 그랬다. 내가 해명하기를 그치면 나는 한없이 추락하는 것 같은 실패감을 느낀다. 내가 지금껏 자부해왔던 나라는 존재의 장점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온다. 내 평생 빚어왔던 내 자화상이 허물어진 느낌이다. 그러나 기이한 일이 일어난다. 그 자발적 추락이 은혜로운 상승으로 연결된다. 형용모순 안에 진실이 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추락하는 것을 허용했다. 적극적으로 추락하려고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추락이 두려워서 말과 논리와 언어와 자아를 붙들고 다시 해명하고 방어하는 순간, 나는 겉으로는 상승하고 승리한 것 같으나, 진짜 대책 없는 추락이라는 심판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이다.
오십견이 왔다. 축도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최근 3개월간의 안식월을 맞아 제주도에서 홀로 한달살이 하는 동안 오십견이 고쳐졌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후비루 증상은 실은 심리적인 이유였다. 아주대 이비인후과에서 받은 진단이다. 그것도 나아졌다. 설교와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인도한 후에 집에 오면 수치심이 몰려왔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니 그늘도 큰 탓이다. 그러나 이젠 사람들의 시선을 덜 의식할 것이다. 너무 잘하려고 스스로 몰아치면서까지 스트레스를 받진 않을 것이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나답지 않은 나로 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인 나답게 살 것이다. 그러니 잘 못해도 괜찮다. 반응이 썩 안좋아도 괜찮다.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아도 괜찮다. 타인에게는 너그럽게 대하며 그를 축복하는 습관을 기르면 된다. 누군가에게 상처주는 말을 해도 괜찮다. 솔직하게 즉각 용서를 구하고 성장하기로 마음 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성도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죄책감이 밀려오면, 그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지나가게 둘 것이다. 존재에 대한 수치심이 차오르면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임을 기억하며 버틸 것이다. 모든 도전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것이다. 받아들이면 괜찮아지기 때문이다. 가능하다면 말을 줄일 것이다. 적게 말하고, 천천히 말하고, 부드럽게 말할 것이다. 정말 어려운 일인 줄 안다. 그러나 노인네가 아니라 어른이 되려면 혀를 다스려야 한다. 물론 나는 매일 실패할 것이다. 그래도 계속 전진할 것이다.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마음 깊이 감사를 말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감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식하게 하는 현미경과도 같기 때문이다.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알고, 마음 중심이 안정적인 평화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중년기의 끝자락에 다다른 것 같다. 그다음은 뭘까. 또다른 새로운 열정일까. 새로운 열정 다음엔 또 다른 위기가 올까. 노년의 위기일까. 큰 질병의 위기일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오늘이 선물’이라는 사실이다.
김종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한국교육개발원, Young2080<큐티진> 등에서 일했다.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 말씀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 말씀으로 살게 하는 사람이고 싶은 목사이다. 경기도 분당에서 이우교회를 섬기고 있다. 배우자 정신실과 함께 JPSS라는 이니셜론 2000년대 중반 복상에서 장기 연재를 한 바 있다.
아침 기도를 마치고 휴대폰의 비행기 모드를 해제한 순간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친구 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직 8시가 되지 않은 시간. 우리 엄마... 아니고, 선의 아버지? 시부모님? 아닌데... 다 돌아가셨는데... 그 짧은 순간에 이미 치른 여러 번의 장례식을 다시 치렀다.
이 시간에 전화할 친구가 아닌데, 보통일이 아니다 싶었다. 아닌 게 아니라 보통 일이 아닌 일이 일어났다. 새내기 직장인 딸내미를 태우고 올라와 내려가는 길인데 신갈 IC 근처에서 차가 꽉 막혀 있다는 것이다. 차 돌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아! 빨리 차 돌려! 브런치 먹으러 가자!
보정동 카페 거리에 브런치 맛집들이 많은데... 이른 시간이라 스타벅스 밖에 없다. 아, 우리 동네 스벅 두뜨에서 선과 만나 브런치에 모닝커피를 마셨다. 이게 무슨 선물 같은 일이냐!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우리 지금 만날까?" 이런 벙개가 가장 어려울 캐릭터다. MBTI로는 왕 J에다 바쁜 친구에게 폐 될까, 전화도 톡도 조심하는 선이다. 와, 내가 선과 벙개로 브런치를 먹고 수다를 떨다니, 이거 실화냐!
신의 직장에 취직한 딸을 태우고 올라와 이런 아침을 맞게 해준 친구의 인생과 신앙 여정 자체가 내게 선물이 되었다. 험난한 세월 지나며... 선, 너 여기까지 참 잘 왔다! 우리 여기까지 참 잘 왔어!
(블로그 폐쇄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자주 보지 못하는 우리 사이에 이 블로그가 연결점이 되고 있었음이 깨달아졌다. 이런 얘길 친구한테 한 적은 없지만, 내가 올리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읽어주는 최초의 독자로 늘 선을 떠올렸고. 내 유머를 좋아해서 빵 터져주는 그 모습도 자주 상상했다. 오랜 시간 블로그를 유지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날의 벙개 브런치 덕에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다시 믿을 힘이 생겼다.)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더 크게 말하는 두 권의 책을 따끈하게 받아 안았다. 언어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할 수 있다면 상징이 필요 없다. 이미지는 상징의 아름다운 구현이다. 선사받은 두 권의 책 모두 작가로서 소장으로의 고민을 안고 지내온 한두 달의 여정과 닿아 있다.
남편이 활짝 핀 소국 화분 두 개를 검은 비닐에 사 들고 들어왔다.
"내가 말 안 해도 소국만 보면 나를 생각하라! 알아서 사 들고 들어와라! 아직도 내가 말해야 그때 살 생각을 하느냐?" 매년 가을을 원망과 타박을 들으며 시작하는 불쌍한 남편이 올해는 재난을 면했다. 이런 내 집착을 온전히 이해해서 하는 행동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미안함과 고마움... 그리고 더 많은 그의 마음에 있는 어떤 것들이 담겼음을 안다.
언어에 담거나 언어로 전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이 담긴 상징, 이미지, 그리고 또 어떤 것들. 그 어떤 것들로 전하고 받는 것이 영혼의 대화인지 모르겠다. 그분은 늘 말 너머 영혼으로 말을 걸어오시고, 문득 그 말 없는 말이 알아들어질 때가 있다. 그분이 말 걸어오심에 더욱 민감해지는 가을을 살고 싶다. 그러라고 말 걸어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