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영원에 잇대기3285 그날의 나리, 오늘의 나리 어렸을 적에 별 온갖 상상놀이를 다 했다. '본부'라는 이름으로 동네 여기저기에 비밀의 공간을 만들었던 놀이가 문득 생각났다. 나무와 나무 사이, 친구 집 뒷마당에는 땅을 파기도 하고... 친구 두세 명과만 공유하는 비밀 공간을 만들었다. 늘 새로운 곳에 새로운 방식이었다. 거기에 놀잇감도 가져다 놓고, 간식을 땅에 묻기도 했다. 고등학교 나무 울타리 사이에 만든 본부에서는 밤에 촛불을 가져가 켜고 들어앉아 있다가 숙직 선생님께 발각되어 엄청 혼이 난 적도 있다. 내게는 너무나 소중한 '본부'를 어떤 또 다른 친구에게 떠벌이고, 낄낄거리며 망가트린 친구도 있었다. 정말 속상하고 슬펐다. 어른이 되어 기도의 길을 찾다 발견한 기도의 공간들은 그 시절 '본부' 같은 곳인가 보다. 연구소 선생님들을 수도원에.. 2025. 7. 13. 오늘이 선물이다 나가서 밥 먹을까? (싫다는 대답을 할 기력도 없음)지금은 안 되겠다. 다들 좀 쉬었다가 나가자. 당신은 가서 한잠 자. (가서 잠)나가자, 뭐 먹을까? (몸보신을 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음)그래, 누룽지백숙 먹자.(잠결에 내가 제안한 것 같기도 하고)와, 배부르다. 카페 갈까?아니야, 아빠. 배 불러서 카페 못 가. 드라이브나 하자. (조수석에 실려 가는 드라이브도 할 기력이 없다고 말할 기력도 없어서 드라이브를 당함) 그리고 익숙한 퇴촌, 양평 길을 다니는 중이었다. 어머, 우리 차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야? 차창 밖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들꽃 천지, 개망초가 흐드러진 이런 환상적인 곳이라니! 습도와 온도가 함께 높아 차 밖으로 나가 걸을 날씨가 아니었고, 나는 목발도 챙기지 않아 불안.. 2025. 7. 12. 제철 샐러드 음식은 제철이고 사람의 사랑은 한철이다. 제철 밥상처럼, 제철 밥상을 부르는 제철 식재료처럼, 사랑도 한철이니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해야 한다. 어렸을 적에 엄마랑 어른들은 감자를 “하지감자”라고 불렀다. 아, 하지의 계절에 나는 감자구아! 이제야 이름의 뜻을 안다. 하지의 계절, 감자의 계절이라 이즈음엔 늘 감자샐러드를 만들게 된다. 신기한 것이 "감자가 지천이네!" 하는 순간, 감자를 보지도 않은 아이들 입에서 "감자샐러드 먹고 싶다"는 말이 나온다. 상병 김현승이도 감자샐러드 참 좋아하는데... 감자가 있고, 옆에 현승이가 있는 여름이 또 오겠지. 오늘은 감자가 풍성하고 채윤이가 곁에 있다. 애 먹는 것만 봐도 좋아서 자꾸 도촬 하게 됨. 만드는 김에 산더미 만큼 만든다. 어차피 감자 삶아 으.. 2025. 7. 5. 젊음도 사랑도 소중했구나 병원에 갔다가 돌아왔는데. 정문 근처의 연보라색 수국이 자꾸 윙크를 해서 오전 산책을 하게 되었다. 수국 옆에 엉겅퀴 같이 생긴 애가 있어서 "이름이 모니?" 했더니 "리아트리스"란다. 이러고 놀고 있는데. 저쪽에서 주황색 원피스를 입은 엄마가 아기를 앞으로 안고 살살 걷고 있는 것이다. 너무 예뻐서 슬쩍 사진에 담았다. 목발에 의지해 천천히 걷는 내 속도와 그의 걷는 속도가 비슷하다. 가만 보니 꽃이 보이면 그 앞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이다. 너무나 예쁘고 마음이 뭉클했다. 모두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 지금 상가 빠바와 메가커피에는 어린이집 보낸 엄마들로 바글바글이다. 저 엄마는 아직 24시간 독박 육아 중이구나. 그 와중에 아기를 안고 산책을 나왔네. 아기에게 꽃을 보여주며 뭐라 말하고 있을까?.. 2025. 7. 1. 제철 밥상 나는 농부도 아닌데, 감자 철에 감자가 풍년이다. 감자 샐러드 만들 때가 됐다는 것인데, 오래 서 있을 엄두가 안 나서 못하고 있다. 그래도 감자로 뭔가 맛있는 것을 해야 하겠기에 제철 감자, 제철 호박, 제철 양파, 제철 두부, 제철 스팸을 때려 넣고 제철 찌개를 끓었다. 상추를 비롯한 야채 선물이 풍성하게 오고 가는 시절이다. 선물 경제가 따로 있나! 초록이들이 판을 치는 초여름의 초록색 선물 경제이다. 된장으로 무친 쑥갓 나물을 좋아하는데... 알고 보니 우리 채윤이도 쑥갓을 좋아한다고! 그 식성을 며칠 전 샤브샤브 뷔페에 가서 알았다. 파 마늘에 된장만 넣고 싱싱하게 무쳐서 잘 먹었다. 제철 밥상! 2025. 6. 30. 놀이터에 설레는 마음 엄마, 누나 사춘기 아니야. 완전히는 아니야. 애들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거든. "놀이터다!" 그럴 때 "어디, 어디?" 하면 아직 애들인 거야. 누나는 안 그런 척 하지만 아직 놀이터에 설레. 그러니까 사춘기는 아니야. 오래전에 현승이가 어린이 감별법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서 경험에 의거해 청소년 감별법도 내놓았지. "맥날(맥도날드)" 간판에 설렌다면 아직 청소년...) 그렇다면 나는 어린애가 된 것 같다. 깁스하고 나서 놀이터에 그렇게 설렌다. 정확히는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 이 아파트는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데... 젊은 부부와 함께 아이들이 천지삐까리이다! 이 동네 아이들은 왜 이리 인사도 잘하는지 "안녕하세요?" 청명하고 말랑한 목소리를 상시로 듣는다. 이런 아파.. 2025. 6. 30. 만들지 아니한 국수 6주 만에 깁스를 풀었다, 고 해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4주는 더 목발과 함께 걸으란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발을 땅에 디디는 것이 어디냐며 힘을 낸다. 두발을 땅에 디디고 혼자 식사준비를 했다. 열무국수와 한입 떡갈비 구이! 채윤이가 "와아, 이거 엄마가 만들었어? 너무 맛있다!"라고 한 것은 한 입 떡갈비였다. 설마... 채윤아. 비비고가 만들고 엄마가 손수 구웠어. 채윤이와 그 애의 아빠가 이구동성으로 열무국수도 넘넘 맛있단다. 이건 엄마가 했다...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열무김치는 내가 한 게 아니니 말이다. 생각해 보라고. 떡갈비를 만들고 열무김치를 담그는 일은 얼마나 많은 자잘한 노농과 정성이 소요되는 것이냐고. 나는 15분 만에 점심 준비를 했는데. 완제품 떡갈비와 열무김.. 2025. 6. 27. 꽃밭에서 죽으란 법이 없더라고. 깁스하고 가장 큰 박탈감은 '나가서 걷지 못함'이었는데. 나가서 들꽃에 눈 맞추고 귀를 간지르는 새소리에 노래하고, 바람에 마음을 맡기는 그런 '걷기'를 할 수 없다는 게 절망적이었는데. 되더라고. 아파트 정원 정도는 얼마든지 누리겠더라고. 쭈그리고 앉아 들여다보지는 못해도 답답한 발 내밀고 인증샷은 가능하더라고. 6주 지내는 동안 봄꽃 가고 여름 꽃들이 피는 걸 다 보게 되더라고. 내일 모레 깁스 풀기 전 마지막 산책이려니 하고 아침부터 나갔어. 오후부터 내일까지 비가 온다기에... 수국이 한창이야. 두 발로 걸으며 수국을 즐기게 될 거야. 오늘은 목발 짚고 한 번에 2천 보를 찍었어. 계단도 잘 오르내리고 네 발걸음이 완전 빨라졌거든. 고맙더라고. 네 발로라도 이렇듯 좋아하.. 2025. 6. 24. 위험한 여자, 쓰는 여자 출옥이다. 격주로 글을 쓰던 연재 감옥, 글 감옥에서 출옥이다. 《슬픔을 쓰는 일》이 '쓰인 글'로서 그냥 흘러나온 글이라면, 이번 '신앙 사춘기 너머'는 짜내고 짜내어 '써낸 글'이다. 게다가 청탁이 아닌 '자발'로 시작한 글이다. 글을 시작하며 했던 인터뷰에서는 독자의 요청이라고 했지만, 내 안의 어떤 사람의 요청이었다. 이걸 써야 자유를 얻을 것 같았다. 찌르고 싸매는 글을 쓰고자 했는데 찌르기만 하고 충분히 싸매지 못한 채 마치고 만 것 같아서이다. 2019년 이후로, 누구도 지우지 않은 부담감과 책무감에 어깨가 무거웠다. 나 자신에 대한 책무감이다. 그래서 징징거릴 수도 없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쓰는 글이니까. 글이야 쓸 때는 괴롭지만, 그에 못지않은 생산의 기쁨이 있다. 산고 끝의 출산처.. 2025. 6. 22. 아웃플루언서 인터뷰 필름포럼의 성현 목사님이 진행하시는 유투브 인터뷰 영상이다. SNS에 소개글로 붙여주신 말이 좋아서 그대로 가져왔다. 거기 붙인 내 댓글도 그대로. 분열되지 않은 삶누구나 머리로는 알지만, 일상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러 일들을 감당하면서 허덕이고, 누굴 위해, 무얼 바라며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가? 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정신실 소장님께 사모, 작가, 연구소장, 강연 등등 멀티플레이어로서의 삶이 힘들지 않으신지 물었을 때, 환하게 웃으시며 ‘괞찮아요’ 라고 답하시면서 ‘그게 다 저니까요. 제 안에 일관성이 제일 중요한 거 같아요’ 하시던 순간, 제 안에 묵직한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나를 괜찮지 않게 만드는, 그러나 나를 좀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일과 만남에 허비한 시간들이 얼마나.. 2025. 6. 20. 이전 1 2 3 4 ··· 329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