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안식월을 보낸 남편의 복귀 첫 출근 날이다. 안식 후 첫날(부활하신 예수님...) 점심은 단호박열무국수를 해서 감동적으로 맛있게 먹었다. 안타깝게도 안식 후 첫날을 맞은 남편은 당연히 집에 없으니 채윤이와 둘이서 먹었다. 안식월 마지막 날인 어제 그는 혼자 홀연히 나갔다. 요셉수도원에 가서 낮기도에 참여하고는 수제 소시지를 사 왔다. 단호박열무국수에 소시지를 곁들였다. 그의 복귀 출근을 애도... 아니 응원하며 둘이 맛있게 먹었다.
월요일 점심은 벽산아파트에 서는 알뜰장 떡볶이 아주머니가 차려주신다. 운동 갔다 오다 들러 "오뎅 떡볶이 순대 일 인분 씩 주세요."라고 하면 "순대 내장은 섞어요?" 한다. "내장 많이 주세요." 하면 '이 사람 배운 사람이네! 순대 먹을 줄 아네!' 하는 표정으로 만족스러워하며 내장을 듬뿍 섞어 주신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진다.
한 번씩 MSG 듬뿍 넣은 떡볶이를 먹어줘야 한다. 맛있고 고맙다. 고맙고 좋은 마음에 오늘은 대놓고 사진을 좀 찍어봤다.
生의 오후를 건너고 계신 분들과 함께 중년 이후의 삶과 영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초여름 저녁, 노을빛 대화의 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일시: 2024년 6월 13일(목) 저녁 7시-9시
* 장소: 커피식구 성수 (성동구 아차산로13길 31 1층) - 성수역 2번 출구에서 600m - 주차 공간이 협소하니 대중교통 이용을 부탁드립니다.
* 안내: 참가비 무료 (선착순 30명, 다과 제공) - 저자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다면 신청서에 남겨 주세요. (선정된 분께 성서유니온 도서 선물) - 사전등록자 중에서도 추첨을 통해 성서유니온 도서를 선물로 드립니다. - 북토크 후 사인회가 있습니다. - 행사 당일 현장에서도 도서 구매가 가능합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나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두어 주 낯선 곳을 돌아다니다 오니 이 자리가 꽃자리임을 더 잘 알겠다. 집에는 엄마가 없어도 잘 해서 먹고, 제 할 일을 잘하고 지낸 남매가 있고. 소장이 없어도 강의와 나눔 준비를 잘 하여 모임을 동반하는 연구소 선생님들이 있고, 각자 자기 발로 든든히 서가는 동반자 과정 벗들이 있으니 고맙다. 기도로 기도 배우기를 멈추지 않는 말 잘 듣는 학생들이다. 여기에 지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있다. 에니어그램 3유형의 긴장과 거짓과 기만이 얼마나 아픈 것인지 새롭게 알게 되는 시간이었다.
사람의 마음에 대해 배우는 일은 끝이 없구나,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일은 하나님 사람을 배우는 일이니 끝이 없겠구나! 여기가 꽃자리이다.
갑자기 남편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리 와 봐, 해서 보면 남편은 벌써 저기 멀리 걷고 있다. 빨라진 남편의 발걸음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몸이 정직하다. 때로 몸이 가장 정직하다. 그의 영혼이 뛰고 있는 것이다. 말년의 사도바울이 갇혀 있었던 감옥터, 마메르틴(mamertium)이다. 이 앞에서 남편은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수도원 순례에 오른 후 처음으로 말이다.
2015년 남편이 성지 순례단을 이끈 적이 있었다. 남편과 참여자들의 후일담에 비추어 좋은 순례였던 것 같고,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성지순례 모델이기도 하다. 순례 전에 여러 번 만나 다양한 방식으로 공부하고, 여정 중에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개인의 이야기를 듣고, 가는 곳마다 드리는 예배와 기도에 그 이야기를 반영하고. 남편에게 터키 그리스 순례지의 각 스폿은 참여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신앙 이야기로 자리하고 있다. 모르긴 해도 작은 공동체 안에서 잘 묻고, 잘 듣고, 그것을 말씀과 기도에 반영하는 남편의 장점이 극대화되어 발휘되었을 것이다. 그 기억으로 남편은 성지순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만난 사도바울로 인해 언젠가 로마에 꼭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고 한다.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몸과 영혼이 기뻐 뛰놀지 않겠는가. 남편의 글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2015년도에 바울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터키-그리스를 다녀온 적이 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가 걸었던 길을 걷고, 그가 설교했던 아레오바고를 오르고, 그가 세례를 줬던 빌립보 강기테스 강가에 앉았을 때, 형용할 수 없는 은총이 쏟아져 내렸다. 순례의 참 의미를 알았다. 그때 비로소 로마가 가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은 것이 제일 큰 이유다. ❞ (남편 JP의 블로그에서 가져옴)
그런데 여기는 우리 순례 일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 앞에서 사진 정도 찍고 지나치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빠르게 들뜬 남편을 보고 따로 입장료 내고 들어가보자 했지만, 단체 여정 중이니 그리 할 수 없었다. 안타까웠다. 합리적인 남편은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더 안타깝고 많이 아쉬웠다. 그래도 내일 '사도바울 참수터'와 거기 세워진 '세 분수 수도원(TRE FONTANE)' 일정이 있으니까. 그리고 성 바울 성당이 있으니까. 아쉬움을 기대로 달랬다. 그러나 다음 날 예상치 못한 일로 그 앞까지 가서 버스를 돌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끝끝내 여기는 밟아보지 못하고 로마를 떠나왔다. 쉽게 흥분하지 않는 남편의 들뜬 모습을 보았는데, 여차저차 사도바울의 흔적과는 결국 교차하지 못한 순례가 되었다. 쉬 달래 지지 않는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차곡차곡 쌓인 로마의 시간이었다. 감정은 에너지와 같아서 열역학의 법칙을 따른다. 스스로 소멸하지 않는다. 꾹꾹 누른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인 감정들은 무질서하고 맥락 없는 것이 되어 엄한 곳에서 터지는 방식으로 흘러간다.
로마의 첫날인 어제, 카타콤베로 가는 일정을 앞두고 인솔자 신부님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신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신부님은 숙소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카타콤베 안에서 미사가 있을 예정이었는데, 당장 그것부터 문제가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카타콤베 안에서의 미사는 로마 일정 중 기대되는 시간이었다. 2000여 년 전 숨어서 기도하던 신앙의 선조들의 호흡이 배어 있을 것만 같은 그 공간에서의 전례라니. 그 자체로 신비 아니겠는가. 예배라면 더 좋겠지만, 미사 형식이어도 얼마든지 좋을 것이기에 기대가 컸다. 기대는 아쉬움으로 바뀌었지만, 우리 부부를 제외한 가톨릭 신자들의 그것과 비할 수 없을 것이니 내 아쉬움 따위는 넣어 두어야 한다. 일상에서도 그렇지만 순례 여정 중 특히 '매일 미사'가 중요한 분들에게는 아쉬움 너머 충격이었을 것이다. 한나절 푹 쉬시고 회복되기를 바라며, 신부님을 위한 이심전심 기도의 마음으로 순례단은 모두 입을 닫았다. 그렇게 로마의 첫날밤을 보내고 이튿날이 된 것이다.
신부님이 몸은 조금 나아지셨지만 순례여정을 동반할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이 순례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막막한 마음이 되어 인솔자 없이 가이드만 의지한 채로 바울 참수터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니 키 큰 나무들이 도열을 하고 맞이하였다. 순간 마음이 넓어지고 커지며 부풀어 올랐다. 나는 누구보다 먼저 뛰어 앞으로 나갔고, 그 순간 뒤에서 남편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사도바울 참수터'와 '세 분수 수도원' 순례의 전부가 되고 말 줄이야. 모두 내려 그 길을 걷는데 심각해진 가이드가 다시 버스에 타라고 했다. 숙소에 있던 신부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소식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모르는 채, 타라면 타고 내리라면 내리고 기다리라면 기다리면서 로마 이튿날 오전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한나절의 순례 일정, 그것도 남편에겐 간절한 것이 이렇게 날아가는 것인가. 마음엔 폭풍이 몰아치려 하는데, "느끼면 안 돼, 느끼지 마!" 꾹꾹 누르게 되었다. 신부님의 건강을 걱정하고 기도하는 것과, 일정이 틀어진 것에의 실망감은 별개의 문제인데. 당장은 두 개의 감정을 함께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텅 빈 오전을 보내고 점심을 먹으러 가기 위해 다시 버스에 올랐다. 나긋나긋하고 매끄러운 가이드의 말이 마이크를 타고 쾅쾅 울렸다. 자신이 어떻게 조치를 잘 취했는지 자분자분 보고했다. 아울러 무척 당황스럽지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그러니 여러분도 그리하고, 신부님을 위해 기도하라며 특유의 설교조로 마무리했다. 뱃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다.
썩 내켜하지 않는 남편을 설득하여 데려온 순례이다. 사도바울의 흔적 앞에서 생기가 도는 남편을 보고 덩달아 기뻤던 것은 찰나로 지나가고 말았다. 버스 맨 뒷좌석에 앉아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한 마디를 할까말까 엉덩이 들썩이고 있는데 앞에 앉은 남편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이드에게 갔다. 웬만하면 나서지 않는 남편인데, 가이드에게 가서 식사를 못해도 좋으니 오전에 가지 못했던 곳을 가자고 말했다고 한다. 다행히 받아들여졌다. 오후 순례 일정 서두르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별다른 설명 없이) 오전 일정 중 성바울 성당만 채택되었고, 결국 참수터와 세 분수 성당은 가지 못했다. 이쯤 되면 그분의 메시지로 알아들어야 할 듯하다. 좋은 뜻을 가지고 바라는 것이라도 연거푸 좌절된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맞다. "충분하다. 연연하지 말아라" 하시는 그분의 말씀으로 들어야겠다. 남편도 같은 마음이다. "네, 주님! 알겠습니다. 여기까지로 만족하겠습니다." 가슴이 뛰었다는 그것 자체로 이미 충분하다고 나를 설득한다.
저녁식사 시간, 옆에 앉은 젊은 순례자 하나가 "저, 신부님 일로 멘붕이에요."라고 했다. "저도요!" 그리고는 꾹꾹 눌러 담았던 몇 마디를 꺼내 놓았다. 충분치는 않았지만 꺼내 놓은 몇 마디의 여백으로 종일 부글거렸던 마음과 꽉 조였던 가슴에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멘붕이라고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아쉽고, 불편한 감정들을 느끼지 말자, 느끼자 말자, 하며 억압하니 어떤 울분이 되었다. 가톨릭 신자들은 '순명'이라는 말과 덕에 익숙한 듯하다. "이 또한 주님께서 허락하셨다"는 표현을 순례 중에 많이 들었다. 순명의 미덕이 부럽기도 하지만, 그 미덕의 빛 앞에서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조차 숨겨야 할 것 같았다. 순례단을 이끄는 영적 지도자(베네딕도 수도원이라면 '아빠스' 아닌가)가 갑자기 증발한 상황에서 그분의 상태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무엇하나 명확하게 알려지는 것이 없어도, 예정된 일정이 없어지고, 심지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미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는데도 모두 순순하다.
신부님의 건강 상태가 베일에 싸이고, 대번에 남편과 나는 혹시 우리 존재가 불편하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을 했다. 가만 보니 우리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이드도 같은 생각을 했단다. 흔히 부부간의 갈등과 불화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그것을 제 탓으로 가져간다. 학대 가정의 아이들이 학대의 원인을 자기에게로 돌리는 것과 비슷하다. 맞을 이유가 있었다거나, 부모님이 나 잘 되라고 때렸다는 식으로 학대 가해자의 죄를 피해자가 뒤집어쓰게 된다. 힘의 차이가 있을 때, 약자가 자기를 설득하는 방식이다. 부모가 아이들 앞에서 선을 가장하여 죄를 숨길 때, 아이들은 부모의 죄를 자기 잘못으로 가져가서 수치심의 존재가 된다. 엄마 아빠의 문제야,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명확한 표현과 설명이 필요하다.
저녁 식사 후 방으로 돌아와 남편과 나는 말다툼을 했다. 늘 그렇듯 시작은 사소한 한두 마디였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갈수록 창대해져서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쌓이고 쌓인 울분이 터져버린 것이다. 서로를 향한 울분인가, 아니다. 참수터를 보지 못한 아쉬움인가, 아니다. 잘못 선택한 순례라는 자괴감인가, 그것도 아니다. 한국에서는 어머니 소식이 전해져 온다. 병원에 계신 어머니 상태가 갈수록 악화일로다. 어머니 거취의 중요한 결정을 남편이 해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남편은 막내인데 말이다. 여기도 저기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 명확하게 길을 제시할 어른이 없다. 결국 부부 다툼으로 끝난 하루는 아빠스 없이 헤쳐나가야 할 수도원 순례, 아니 일상 순례에의 울분인지 모르겠다. 우리에겐 아빠스가 필요하다.
<베네딕도 수도규칙>의 중요한 특징은 '탁월한 분별력'과 '명쾌한 문체'라고 한다. 과연 읽어보면 그렇다. 그렇다. 탁월한 분별력으로 분별해주는, 그리고 그것을 명쾌하게 제시해 줄 아빠스가 필요하다. 영적 어른이 필요하다. 누가 나의 아빠스가 되어줄 것인가. "주님, 저의 아빠스는 누구니이까?" 맥락 없는 질문이 떠올랐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했던 어떤 율법사의 말에 빗대어졌다.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께서 되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리고 내 질문에도 되물으시는 것 같다. "네 생각에는 누가 아빠스가 되어야 할 것 같으냐, 가서 네가 그와 같이 되어라." 아빠스를 찾지 말고 네가 아빠스가 되어라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제 그만 울분을 거두고 네 발로 서서, 어른이 되어 너의 순례 여정을 가라고 하신다. 분별력과 명쾌한 말을 '어느 아빠스'에게 구하지 말고 네 안에서 찾아라고 말이다.
이탈리아 여정을 떠올리며 점심으로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만들었다. 근래 보기 드문 '폭망 요리'였다. 제대로 삶아지지 않은 파스타에 간도 맞지 않고, 총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실패였다. 무거운 몸으로 요리하느라 진을 뺐는데, 맛없는 걸 먹으면서 진이 더 빠졌다. "와하!" "오오!' 첫 입에 나오는 이 감탄사, 맛있게 먹는 즐거움이 요리하는 노고를 한 번에 씻어내는 법인데. 셋이 머리를 박고 맛없는 걸 꾸역꾸역 먹자니 피로와 졸음이 막 밀려왔다. 숟가락 놓고 바로 잠에 들어버렸다.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 김치찌개 끓여 놓고 기다려주는 우리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늘 하지만. 엄마가 한 요리 먹어본 때는 10년도 더 전의 일이고, 심지어 집에는 김치 한 톨이 없다. 독일 출국 전날 자다 일어나서 묵은지 포함 김치 3종을 주문했다. 점심의 실패를 극복하자는 의미로 저녁에 김치찜을 했다. 와, 실패할 수 없는 요리가 김치찜인데 이걸 실패했다. 착한 현승이가 김치 때문이라고 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았다. 맛있게 만들어진 요리는 기쁨이고 활력인데. 시차로 인한 피로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꾸역꾸역 먹었더니 하릴없이 배만 부르고. 해가 넘어가고 곧 어두워질 텐데 다짜고짜 집을 나섰다. 걸어야겠다. 탄천의 들꽃 친구들에게 아직 귀국 인사를 못했지. 탄천은 온통 금계국 세상이 되었다. 작은 봄의 들꽃들이 사라지고 뜨거운 여름을 견뎌줄 금계국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옆은 모내기를 끝낸 논이다. 걷다 보니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산뜻해진다.
아카시아 향이 가고 밤꽃 향기가 왔다. 이렇듯 성실하게 계절이 제 일을 하고 있다. 두어 주 사이 달라진 탄천 풍경을 느끼자니 무거웠던 몸이 발걸음과 함께 더욱 가벼워진다.
"JESUS LOVES YOU" 저 간판도 성실하다. 제 할 일을 하고 있다. 요즘 대세 금계국 개망초와 함께 여전하게 서 있다. 헤롱헤롱 메롱메롱 시차 적응을 응원한다며 나 하나를 두고 피켓팅 중이시다.
집에 돌아왔다. 공항버스가 익숙한 우리 동네로 들어설 때, 둘이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복잡한 모든 것을 담아 내가 말했다. "긴 꿈을 꾼 것 같다." 상투적이지만 이보다 좋은 표현이 없다. 일상의 풍경에 몸이 담기고 보니 질곡의 12박 13일은 꿈이었나 싶다. 꿈인가 싶지만 꿈이 아니다. 휴대폰 카메라에 수백 장의 사진이 남아 있고, 몸이 감각하고 체험한 것들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어 있다. 다만 사유와 성찰이 그 체험의 속도를 따르지 못할 뿐이다. 그 속도의 차이 또는 간극으로 인한 고통으로 글이 나오질 않았다. 시차로 인해 일찍 깨어난 새벽마다 글을 쓰곤 했다. 남편과 내가 각자의 노트북을 마주하고 앉아 쓰는 기도를 드린 것이다. 로마 이후로 나는 더 나가지 못했다. 고마운 것은 남편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순례일기 쓰기를 완주했다는 것이다. 힘도 들이지 않았다. 그냥 투닥투닥 쓰더니 '일일일포(하루에 하나의 포스팅)'가 되었다. 나는 변비이지만 아침마다 황금색 변을 보는 건강한 아이처럼 글을 낳는 남편 덕에 숨을 쉴 수 있었다. 글은 숨이고 쉼이다. 이제 집에 돌아와 내 자리에 앉았으니 피할 수 없는 내 차례이다.
수도원 순례, 안식월을 보내는 남편과 함께 하는 수도원 순례, 내 생애 가장 큰 '지름'이었다. 한 권의 책을 목표로 하고 글을 시작했다. 수도원 영성이 일상 영성과 다르지 않음을 나는 벌써 느끼고 있었고 그 느낌이 이끄는 더 깊은 갈망으로 오른(또는 지른) 순례였다. "일하고 기도하라"는 모토가 구체적 규범으로 구현된 <베네딕도 수도 규칙>을 "오늘 여기"의 눈으로 읽어내는 순례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순례 시작부터 기대와 달랐지만 이끄신 그분의 뜻이라 믿으며 이탈리아 순례를 마치고 로마을 경유하다 글이 멈추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네 식구 모여 앉아 남편의 생일축하 촛불을 켜고 끄며 시끌벅적 회포를 풀었다. 그리고 이제 혼자의 시간이다. 수도원 성물방에서 산 검정색 초에 불을 붙였다. 촛불멍, 검은 초를 가만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다. 읽고 쓰고 기도하는 내 자리에 앉으니 좋다. 살아야 할 내 자리, 계속 써야 할 내 자리이다. 쓰지 않으면 발굴할 수 없는 보석이 일상에 가득하다. 그렇다, 가득하다. 하물며 낯선 나라의 낯선 수도원을 돌며 보낸 짧았던 순례 일상은 오죽하랴. 쓰고 싶고 써야 할 이야기가 부지기수이다. 검은 초를 밝히고 기도한다.
주님, 살 자리와 쓸 자리가 분리되지 않게 해주세요. 쓰는 일은 단지 쓰고 마는 일이 아니라 써서 새롭게 간직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거기 계시죠? 저 여기 있습니다. 제 일상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순례 여정 무수한 이야기들을 오늘 여기 제 책상에서 글로 다시 만나게 해 주세요. 몸이 끝낸 순례를 몇 걸음 뒤에서 허둥지둥 따라가는 생각의 길이지만, 포기하지는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살 자리에서 살고 쓸 자리에서 쓰겠습니다. 살 자리와 쓸 자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 꽃자리입니다. 지금 여기를 살고 쓰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일하고 기도하는(ora et labora) 삶입니다. 물심양면의 도움을 구합니다, 주님.
한국에서도 피정집이나 수도원은 밥이 참 좋습니다. 소박하며 동시에 풍성한 식탁이고 그것을 누리는 행복감이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러 간 건지 밥 먹으러 간 건지 헛갈리는 정도. 침묵의 생활이기에 이 좋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 참으로 미묘하게 좋은 곳입니다. 그저 천천히 맛과 식감을 느끼며 먹는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밥은 먹는 자체가 기도입니다. 달그락달그락 그릇 소리만 나는데도 영혼이 기뻐 아우성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그런 맛있는 시간입니다.
여기 수도원 순례에 와서는 정작 그런 식사는 없습니다. 예상과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이조차 주어지는 대로 누리자니 벌써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순례기는 안 나올 것 같고 수도원 음식 사진 염장질로 대신합니다. 한국 시간 밤 10시 쯤, 야식 땡기는 시간에 올리려고 비장하게 품고 있었는데 시차 때문에 도저히 그걸 못 맞춰서 아쉬울 뿐....
추천사 요청을 뉴질랜드 여행 중에 받았다. 시간이 있을 때라도 쓸 수 없는 글, 쓰고 싶지 않은 글은 결국 수락하지 않게 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이 없을 때라도 길거나 짧거니 꼭 쓰고 싶은 글은 쓰고야 말더라는… 서문을 대충 훑어보니 거절할 수 없는 추천사 요청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연구소의 경험을 쓰려했는데. 거기 담고 싶은 내용들이 다 들어 있었다. 그래서 놀랍고 조금 맥이 풀렸지만, 고마운 책이다. PDF 파일로 받은 원고를 비행기 안에서 다 읽었다. 내게는 그렇게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흥미진진’이진 않겠으나)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이다. 추천사에 쓴 것에서 (더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뺄 것이 없다.
————
추천사
헌신적인 치료사와 목회자의 건강이 걱정되는 때가 있다. 종종 이들의 진정성은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남에게 ‘헌신’으로 드러난다. 결국 몸과 마음이 상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분들이 오랜 시간 사람들 곁에서 치료하고 목회하기를 바란다. 단,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아운디 콜버도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 인자로 바꾼 사람, 예수님 닮은 자비의 성품을 타고난 사람이다. 저자는 소진되고 무너졌던 경험을 통해서 한 가지 부족했던 것, 자기 자비(self-compassion)를 깨달았고 그것을 나눠준다. ‘자기’ 자비라는 말에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자기 몰입과 자의식 과잉으로서의 자기 연민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일깨우자는 초대이다. 그러니 영성에 관한 책이다. 초대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여 결국 흘러넘치는 자비를 만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안내하는 영성 수련 실용서이기도 하다.
정신실(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
————— 끼워 팔기
누가 내 책도 이렇게 홍보해 주면 좋겠다. SNS에 공유도 해주고, 온라인 서점에 100자 평도 써주고… 누가 그래줬으면 조케따!
다시 로마로 왔다. 로마에서 이틀을 보내고 한참 지나도록 순례기가 써지질 않는다. 할 말이 없거나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글이 써지지 않는 답답함은 내게 익숙한 고통인데, 대부분은 여러 말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려 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데다 잘 쓰고 싶어 힘이 들어가는 경우가 가장 어렵다. 글 변비에 걸린다. 마감일을 코 앞두고 밤낮으로 끙끙거리며 보내는 고통의 시간이라니. "내 다시는 새로운 원고 청탁 수락하지 않겠다." 결심하지만, 지켜질 리 없다. 나를 낚는 글은 늘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잘 쓰고 싶은 욕심은 가득한 주제들이니 말이다. 내 안에서 농익지 않은 주제들 일지 모른다. 말은 늘 무성하다. 무성한 말들이 정제되어야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글이 된다. 그러니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노트북을 덮고 나가서 걷든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무성한 것들이 스스로 겨루어 꼭 필요한 것만 살아남도록 하는 시간 말이다.
로마는 혼란스럽고, 혼란을 유발하는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로마는 도시 전체가 관람객으로 가득차 있다. 나는 순례자인가 관광객인가. 트리비 분수 앞 인파 속에서 해맑게 동전을 던지며 사진도 찍어 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것이, 정체성 혼란인 것 같다. "관광객으로 로마에 올 수도 있었으나 나는 지금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자이지 않은가." 그리 심각해질 필요가 있나,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라고 조언하지 마시라.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나름의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여기저기 빠르게 적응하고 잘 맞추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체성, 즉 내적인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내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순례자에서 관광객으로 모드를 전환할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많은 경우에 그렇다. 나만의 이유를 발견하면 모드 전환은 언제든 가능하고, 둘 사이를 오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나는 지금 개신교인으로, 개신교 목회자의 아내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끼어 순례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내적 일관성에 비롯한 '나만의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되어 지나쳐야 했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와 죽임 당할 그리스도인들이 입장했다는 문 앞에 머물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끊임없이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이 관광객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중에 "아무 의미 없는 죽임이었죠!" 하는 말이 귀에 꽂혔다. 의미! 그렇다, 나는 의미를 묻고 싶다. 로마시민의 유흥이 되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고, 사람과 짐승이 죽을 때까지 싸우던 곳이 여기 콜로세움이다. 싸움을 '당했다'고 표현해야겠다. '유흥'이라는 의미를 위해서 죽는 죽음이라니, 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삶과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히브리서 말씀이 떠올랐다. 박해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던 시대를 생각한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이 말씀이 갑작스레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나은 부활을 사모한 나머지 굴복하고 풀려 나가는 것을 거부한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학대와 채찍질을 기꺼이 받았고 쇠사슬에 묶여 지하굴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고 톱으로 켜져 두 동강이 나고 살해되어 싸늘한 시체가 된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짐승 가죽을 두르고 집도 친구도 권력도 없이 세상을 떠돈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혹독한 세상의 가장자리로 다니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들 가운데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의 믿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메시지성경
콜로세움 관광 후엔 바로 개선문이다. 박해 뒤에 갑자기 그리스도교 공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를 공인한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박해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이다. 어렸을 적에 세계사 시간이었을까? AD 313 년을 처음으로 들은 그날부터 시험공부를 위해 따로 외울 필요도 없이 까먹지 않는다. 드디어 기독교가 인정된 해라고 하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안도감이 들었었는지. 철이 들어 교회사를 새롭게 배우고, 영성사를 배우고 보니 기독교 공인을 천진난만하게 반겼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귀엽기도 하고, 싹수가 노란 어린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보여 씁쓸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뒤에는 꿈 이야기가 있으니, 꿈 선생님으로서 이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원 숙소의 아침이고, 아침 식사 시간 전에 글을 마쳐야 하니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로마 제국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뜻하지 않은 계기가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로부터 한 해 전, 그러니까 312년의 어느 날 밤이었다. 숙적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하루 앞두고 잠이 들었는데,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황제를 깨우더니 『위를 보라』고 말한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밤하늘에 십자가가 밝은 빛을 뿜으면서 걸려있고, 그 위에 황금 글씨로 「이 표식 안에서 너는 승리를 거두리라」라고 씌어 있는 것이었다. 기운과 용기를 얻은 황제는 잠에서 깨어나 당장 군단 깃발의 휘장에 십자가를 그리게 한다. 이튿날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버려 둔 채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바빴고, 큰 승리를 거둔 콘스탄티누스는 이때부터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유일한 황제가 된다. <가톨릭신문> "노성두의 미술 이야기" 2003-09-28 제 2366호 12면
카타콤베, 무덤이기도 은신처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묻을 곳이 없었다고 한다. 좁은 통로 옆의 벽이 죄다 무덤이다. 아이가 묻힌 작은 무덤, 어른의 무덤이 있다. 가이드 없이 들어가면 길을 잃어 나올 수 없는 곳, 깊은 곳으로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한다. 추격해 오는 로마 병사들이 여기로 들어와서는 미로 같은 길에 갇혀 두려움에 떨었고 그것을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수동적이며 적극적이고 지능적인 방어로구나. 여기는 피난처인가. 피난처 밖은 위험하다. 위험 속에서 숨는 곳은 순간의 안전을 지켜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은 밖은 위험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밖이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피한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더는 위험한 일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일이 위험한 일이 된 것인가. 초대교회 영성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이라고 한다. 박해의 영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박해와 고난을 자처하는 일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곧 다시 오신다' 하셨기 때문이고. 이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근거한다. 곧, 이들이 살아생전에 오실 것이라 믿었을까. 처음엔 그리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00년, 200년 다시 오시지 않는 시절을 보내며 참 '믿음'을 발견하고 살았을 것이다. 당대에, 그 약속한 것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으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음에도 믿는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가 믿어도 된다고 하니, 맘껏 믿어도 된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기독교가 공인되자 '맘껏 믿어도 되는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박해 없는 세상을 떠나 자발적 박해로 들어간 분들이다. 사막의 교부들이라 부른다. 수도원의 시작은 여기 사막, 사막의 수도 공동체였다. 베네딕도 역시 혼란의 로마를 뒤로 하고 은수의 삶으로 갔던 것이 우연은 아닐 듯하다. 혹독한 박해의 시절이 갑자기 평안의 때로 바뀌는 혼란, 하나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공부하러 왔으나 공부가 되지 않아 방황하다 떠나기를 선택하는 혼란, 순례자로 왔으나 관광객이 되어 떠밀려 다니는 혼란. 혼란이 있는 곳이 로마이다. 여행 가이드북의 로마 소개란에 "ROMA를 거꾸로 하면 AMOR!"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혼란스러우며 동시에 어떤 사랑으로 이끄는 곳이 아닌가 싶다. 초세기 교부들에게, 성 베네딕도에게, 나에게. 그리고 이 무엇보다 순례단에. 사실 직면한 가장 큰 혼란은 로마의 순례단이 마주한 난관이다. (혼란의 로마, To Be Continued!)
중세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웠다는 파르파(Farfa) 수도원이다. 수도원이나 성당의 건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부유했다는 뜻이다. 수도원의 시작은 6세기 시리아에서 아리우스 파(언젠가 다시 설명을 늘어놓을 예정)의 박해를 피해 내려온 은수자 성 로렌조 시로(Lorenzo Siro)에 의해서이다. 이탈리아의 대부분 수도원들이 그러하듯 북쪽에서 내려온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한 때 무너졌고, 제2 창립자의 신심과 소명으로 재건되었다. 교회든 성당이든 수도원이든, 중세시대든 지금이든 건축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로마로 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프랑크 족의 카를로 황제가 수도원을 보호하고 지원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파르파 수도원은 황제의 권력 하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누리며 '황제의 대수도원'이라 불린다. 이후 파르파 수도원은 교황과 황제 사이 권력 다툼의 격랑 속에서 영욕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다.
"한때 아름다웠던" 것들은 아름다운 전통이 되어 남아 거기 잇댄 오늘을 빛나게 한다. 또 "한때 아름다웠던" 영광에 비춘 오늘이 누추하기만 할 때도 있다. 한때 아름다웠던 기억과 상실감에 매여 그때의 영광을 회복하려 한다며 비참한 오늘을 살게 될 수밖에 없고. 순례자는 순례의 여정 중 짧게 어딘가를 방문하고 떠나게 된다.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파르파 수도원을 한나절 방문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순례든 여행에서 계획이 틀어지고 일정이 꼬이는 일은 흔하다. 가이드는 우리 팀만 따로 조용히 순례하기 위해서 조금 기다리자고 했다. 동네를 돌며 기다리다 연기한 시간이 되어 들어갔는데, 우리가 기다리던 시간에 진행했어야 할 순례팀이 늦게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래 기다린 덕에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과 도떼기 시장 순례를 해야 했다. 현지인들이기에 통역이 따로 필요치 않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안내에 통역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날려버렸다. 많이 속상했는데, 남편은 마침 그 순간 수신기의 배터리가 나가버려 마음 편히 포기하고 인파에 밀려다녔단다.
도떼기 시장 속에서 들린 짧은 한 마디는 수도사들의 방에 1900년대 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커다란 수도원에 남아 있는 수도사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은 어느 수도원에서나 듣는다.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 현재 39명의 수사들이 살고 있다는 말에 그렇게 많으냐고 놀란다. 수도원에 돈이 모이고 대리석으로 성당 바닥을 깔고, 천장과 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동안에도 수도사들의 일상을 지속되었을 것이다. 가난, 정결, 정주를 서약한 수도자 한 사람의 삶은 작은 독방에서 매일의 일상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아빠스의 명령 없이는 누구라도 감히 무엇을 주거나 받지 못한다. 또 어떤 것을 개인 소유륵 가져서도 안되니 도대체 어떤 물건이라도, 책이거나 서판이거나 펜이거나 아무것도 전혀 개인의 소유로 가지지 못함은, 자기 몸과 뜻도 개인의 마음대로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필요한 모든 것은 수도원의 아버지에게 바랄 것이며, 또 아빠스가 주지 않은 것이나 허락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 33장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각자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줄 것이다." 이렇게 말함음-이런 일은 없어야 하겠는데-, 사람의 차별을 두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을 고려하라는 말이다. 적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말 것이며, 많이 필요한 사람은 연약함에 대해 겸손하고 자비를 받은 데 대해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베네딕도 규칙> 34장
그 와중에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다. 이탈리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런 동네 골목을 걸어 보았다는 것,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잘생인 이탈리아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에스프레소 한 잔의 행복을 누려본 것이다. 순례 안내를 받기 위해 버린 시간이 아깝지 않다. 오히려 고맙다. 실은 수도원 안내에 대한 정보가 차고 넘쳐서 한 번쯤 놓쳐도 아쉬운 것은 없다. 계획은 틀어지고 일정은 꼬이게 마련이고, 꼬인 일정 가운데 아름다운 순간은 새롭게 빛을 발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순례의 묘미이고 인생 순례길이 고유한 아름다움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해도 파르파 수도원을 떠올리면 불편한 감정이 떨쳐지지 않는다. 진선미, 진실은 선하고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진실일 수 없다. 진실한 것이 아름답다. 한 텀을 기다리면 우리끼리 순례할 수 있다고 한 것이 현지 안내인인지, 가이드의 계획이었는지 모르겠다. 한 텀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더 불편한 상황이 된 것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정중하게 사과했으면 좋았겠다. 우리를 배려하지 않고 통역할 시간을 주지 않는 현지 안내인의 태도, 이 모든 일을 있어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습성이라 말하며 심지어 이해하고 받아들여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설교까지 하는 가이드가 아름답지 않다. 일어난 일을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고, 책임자로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되는데 말이다. 선하고 유창한 말이 아니라 선하고 진실한 말이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투덜대지만, 순례 여행 중 심장 터지도록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 수도원 근처 공원에 혼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나 스윽 다가오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얘는 꼭 <마녀 배달부 키키>의 고양이 지지 같이 생겼다. 지지의 동생이거나 언니일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시간 내내 온갖 재롱을 부리더니 내 흰 운동화에 제 검은 발을 스윽 갖다 대는 것이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내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이었을까. 잠시 후 불편해질 내 마음을 미리 다독여주려는 것이었을까. 달라스 윌라드의 마지막 강연록에 있는 말이 떠오른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작동하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이 가장 잘 작동하는 곳은 "자연"이다. 수도원이 하나님 나라인가? 수도원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 나라는 "일상"이다. 뜻대로 되는 것 없고, 애써 잘하고 싶은수록 더 안 되고, 그러다 갑자기 어느 순간 잘 되어 버리는 일상. 이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아침 기도 시간이다. 이른 시간 혼자 일어나 연구소 벗들에게 영적 독서를 나누고, 남편과 함께 렉시오 디비나를 나누고, 향심기도를 하는 시간. 우리 집 거실, 내 자리가 그립다. 돌아가면 그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지켜야겠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수도자의 독방 같은 시간 말이다.
영성사(史)를 공부하며 수도원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니 <베네딕토 수도 규칙>은 뼈대 같은 것이었다. 각각 다른 수도원들의 영성을 하나로 묶는 것이기도 하고, 이 수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에 수도회의 고유함이 결정되기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한 문서이지만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인용된 것으로 충분했다. '규칙' 같은 말에 대한 거부반응이 본능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잘하던 일도 '너 이거 꼭 해야 해!' 강압으로 주어지면 안 하고 싶어 하는 못된 아이 같은 마음 말이다. 알고 보면 누구보다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하면서, 강압하고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빠르고 지나치게 과민반응 해버리는 면이 있다. 규칙, 규칙서. 이런 것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수도원 순례를 결정하고 꼭 읽어야겠다 싶은 것이 <베네딕토 수도 규칙>이었다. 뒤늦게 순례 참여를 결정한 남편은 수도원 관련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아니, 결정하기 위해서 이미 쌓아 두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규칙서만 잘 읽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베네딕토 수도 규칙> 머리말부터 빠져들었다. 2장의 "아빠스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부분에는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규칙서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빠스에 관한 권고들이다. 아빠스는 대수도원장( Abbas)을 일컫는 말로 아람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아빠(Abba)"에서 왔다고 한다.
수도원을 돌보기에 적합한 아빠스는 항상 그의 호칭을 기억하여 행동으로써 으뜸이란 명칭을 채워야 한다.(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어지며, 그분께 (바치는) 호칭으로 불리어진다.
2장 "아빠스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호칭을 기억하라! 아빠스라 불리는 호칭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명칭을 채워야 한다니. 이보다 분명하고 준엄한 지침이 있을까 싶다. "나는 아빠다!" "나는 엄마다!" 이 말이 담은 책임감의 무게, 그 무게를 견디는 기쁨... 나는 이것을 안다. 그리고 이 문장을 좋아한다. '자녀를 위한 어머니 기도회'가 내 아이만 잘 되라는 이기적 욕망을 부추긴다 여겨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썩 내키지 않았던 어머니 기도회 강의에 가서 본 문구가 마음을 건드렸었다. "주님, 제가 엄마입니다!" 엄마이고 아빠인 정체성을 생각하는 것, 그에 합당한 행동으로 엄마와 아빠로 불리는 그 호칭을 채우는 것의 감미로운 고통이란.
누가 내게 <베네딕토 수도 규칙>을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하라 한다면, 이 규칙서는 수도승들을 위한 것이기보다 아빠스를 위한 것이라 말하겠다. 그리고 한 문장을 뽑아 내라 한다면 물론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이겠지만, 내 맘대로 2장의 저 첫 문장을 꼽겠다. 베네딕토는 한 번도 일반 수도승인 적이 없고(은수동굴 3년은 수도승이었겠다) 시작부터 아빠스였다. 사람들을 모은 적이 없으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배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 수도원을 세우기 시작했으니 시작부터 아빠스였다. 그래서 아빠스에 관한 규정들이 유독 더욱 준엄했는지 모르겠다. 성 베네딕토든 아빠스의 정체성, 즉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베네딕토가 로마로부터 물러나 수비아꼬로 가기 전에 유모와 함께 기거했던 '아필레(Affille) 마을에 들렀다. 아필레는 성 베네딕토의 첫 기적 장소라고 한다. 유모가 이웃집의 채를 빌려다 썼는데 잘못해서 그것을 깨트렸다고 한다. 그것을 붙들고 통곡하고 있는 유모를 보고 베네디토 성인이 기도를 하자 그 채가 다시 붙어 원래대로 되었단다. 이 기적이 소문이 나자 베네딕토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 떠남이 은수처인 수비아꼬에 닿았다. 성인전에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기적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의미 없는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쪼개진 채가 붙고, 물이 포도주가 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의미는 제거하고 기적만 바라는 마음이 참된 신앙이 될 리 없다. 아빠스 베네딕토를 향한 씨앗은 이미 이 첫 기적에 담겨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유모는 누구인가. 유모는 엄마 대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다. 베네딕토의 가정이 부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마로 유학을 떠나는 베네딕토를 돌보기 위해 유모가 따라갔다. 로마를 떠나 머무를 곳에서도 유모가 함께 한다. 이 기적을 행하고 길을 떠나면서 베네딕토는 유모와 결별한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에서 스스로 돌보는 어른으로의 떠남이기도 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돌보던 베네딕토를 혼자 보내야 하는 유모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얘는 나 없이 아무 것도 못해요." 엄마가 이렇게 말하며 운다면, 나는 같이 울고 말 것이다. 이웃집에 채를 돌려줄 수 없으면 상황이 많이 어려워지나 보다. 그러니 통곡을 했겠지. 절박한 유모 한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첫 기적이었다. "어머니, 저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강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안심하세요." 하는 메시지를 남기며 속세를 떠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빠스가 되기 위해서, 돌봄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돌보는 존재, 그것도 하나님을 찾는 많은 이들을 돌보는 아빠스가 되기 위해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떠나야 한다. 떠나되 이제는 나보다 약해진 부모를 안심시키고, 그를 축복하고 떠나야 한다. 규칙서에서 아빠스에 관한 부분을 읽으며 엄마인 나를 비추고, 내적 여정을 동반하는 나를 비추고, 연구소를 이끄는 나를 비춘다. 나도 모르게 한 구절 한 구절 자꾸 읽게 된다. 내가 아빠스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을 맡은 자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게 두 아이를 맡겨 주셨고, 그 아이들 앞에서 어른으로 살라고 하셨다. 연구소로 모여든 사람들의 영적인 여정을 동반하는 자로 책임을 맡겨 주시고, 소장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하신다. 아빠스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셨으나, 예수님께 부름 받은 우리 모두는 그분의 대리자이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 아닌가.
아빠스는 집주인이 양들 가운데서 별로 이익되는 점이 없음을 발견하거든 그것이 목자의 탓인 줄로 알아야 한다.
아빠스는, 자기가 제자들에게 부당하다고 가르친 바든 무엇이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 가르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버림받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며...
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선행과 순명에 있어 뛰어나지 않은 한 어떤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지 말 것이다.
아빠스는 자기의 지위를 늘 기억하고 명칭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많이 맡겨진 이에게는 많이 요구됨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영혼들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질을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유순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벌해야 한다. 또 각자의 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순응하고 알맞게 해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착한 양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빠스는 맡겨진 양떼에 대해 장차 받게 될 목자로서의 심문을 항상 두려워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 바칠 헴을 조심하는 동시에 자신의 헴에 대해서도 염려할 것이며, 자신의 훈계로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고치게 할 때에 자기의 결점도 고칠 것이다.
아주 작은 기념 성당이 있고, 성당 주변으로는 무덤이 있었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가 인상적이다. 무덤가에는 이 나무가 주로 심겨 있다. 하늘을 향해 올곧게 치솟은 나무의 형태가 하늘을 향한 인간 영혼의 본성을 담는다 여기는 것일까. 아필레는 아주 시골 동네이다. 우리나라 시골처럼 빈집도 많다고 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족이 산책을 하는 작은 동네 아필레의 골목을 걷는 시간이 참 좋았다. 유모의 깨어진 채처럼, 작은 것으로 울고 웃는 우리의 일상이 기적이고 신비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동네였다. 이런 골목을 걷이 참 좋은 것은, 돌아갈 내 일상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아빠스, 연구소의 아빠스로 사는 일이 무겁고 좋다는 생각에 이르니 말이다.
현승이가 고등학교 진학과 일 년 안식년 갖는 것을 두고 했던 고민이 생각난다. 성적으로 줄 세우고, 모두 한 곳을 목적하고 달리게 하는 학교의 시계를 잠깐 멈추자는 뜻이었다. 취지도 좋고, 누나의 경험을 봐도 좋은 것 같고, 무엇보다 일 년짜리 방학을 얻는다니,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승이의 고민은 '회피'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공부도 싫고 경쟁도 싫고, 무엇보다 경쟁에서 이길 자신도 없으니 물러나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사람들, 은수자들, 로마를 떠나 수비아꼬 동굴로 들어간 베네딕토 성인이 어린 현승이 말에 빗대어졌다. 열여섯 현승이의 제 수준에서 고민은 그렇지만, 가던 길을 돌이켜 돌아가거나 남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이들의 고뇌가 있을 것이다. 드디어 박해시대가 끝나고 자유롭게 예수님 따르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때 자발적으로 사막을 향해 들어간 교부 교모들,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더 깊은 은수처로 들어가는 이들은 어떤 고뇌의 시간을 통과했을까. 순례단의 연세 높으신 어르신 한 분이 계신다. 따님이 수녀님이 되셨다고 한다. 대학, 대학원 다 마치고 어느 날 갑자기 "엄마 할 말이 있어"하고 방으로 부르더니 다짜고짜 수녀원에 가겠다 하셨다고. 순간 벽에 기대었던 몸이 스르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고.
수비아꼬 수도원은 로마를 떠난 베네딕토 성인이 3년간 은수생활을 했던 동굴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수도원이다. 지금은 "거룩한 동굴"이라는 뜻의 사끄로 스베꼬(Sacro Speco)로 불리는데, 가파른 절벽 가운데 있어서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동굴이었다. 동굴이 딸린 절벽에 세워진 수도원인데, 어떻게 이런 건축이 가능했을까 싶다. 동굴생활을 시작하기 전 로마누스(Romanus)라는 수도자를 만났는데, 3년간 유일하게 접촉한 사람이다. 그 접촉이라 바구니에 줄을 달아 빵을 내려주는 정도였다. 그런 고독 속에서 기도로 지낸 3년이라니.
깊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는 사람에게 유혹과 시련이 없을 수 없다. 로마가 아니라 은수처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다.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악마의 방해공작이 있었다고 하는데, 빵이 왔음을 알리는 방울을 깨트리거나, '여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여 육적인 정욕'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주어를 악마로 표현하면 그렇지만, 홀로 물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욕구로 인한 어려움은 너무나 당연한 시련 아닌가. 은수처로 들어갔다고 했서 당장 식욕이, 성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나님 체험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욕구를 붙들고 씨름하는 3년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도원 안쪽 정원에 장미가 심겨 있다. 성인이 성적인 욕구를 물리치기 위해 가시밭에 몸을 뒹굴었다고 한다. 그 일화를 담은 상징으로 가시 달리 장미가 거기 있었다.
은수생활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시밭에 뒹구는 몸과 영혼으로 치열한 시간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자발적 물러남'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을 향해 걸어들어가는 걸음이다. 연구소에서 함께 향심기도를 하고 있다. 20분 멈추고 기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하면서 안다. 해보면 안다. 자발적으로 물러나 만나는 것은 '욕구 그 자체인 나'이고 거룩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나와의 대면이다. 그런 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니 어떻게 사투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비아꼬 수도원에서는 두 번 머무르는 기회가 있었다. 첫날은 (이날따라 유난히 많았다는) 순례객에 떠밀려 그저 공간에 몸을 담갔다 나왔다. 심지어 동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수도원 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이른 아침 산책 나갔던 남편이 수도원에 올라갔다가 아무도 없이 홀로인 수도원을 누리고 왔다고 했다. 아, 아깝다! 글을 포기할걸! 한 번의 기회가 더 왔다. 가톨릭 신자들은 매일 미사를 드린다. 순례 중에도 매일 미사가 있다. 아침 9시, 수비아꼬 수도원 한 공간에서 미사가 있는데 어쩐지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밖에서 기도하기로 했는데, 덕분에 나도 아무도 없는 동굴을, 수도원 이곳저곳을 누리며 기도할 수 있었다. 성인의 '자발적 물러남'에 대해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기도할 수 있었는지, 물러나는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자발적'인 힘은 분명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일 텐데 그의 영혼은 어떤 영혼일까. 내 영혼은 지금 어디를 어떻게 헤매고 있는 것일까.
자연의 동굴 그대로 두었더라면 내게는 더 좋았을 텐데, 그럴 리가 없다. 대리석 상이며 이것 저것으로 꾸며진 동굴이 나는 왠지 조금 슬프더라. 은수자로 물러나 사신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떠들고 있으니 뭔가 제대로 존중해 드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발에 씌워진 강철 보호대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돌이 닳았기에 보호대를 씌운 것이다. 실제 성인의 몸이 아니지만, 보고 만지며 기도하려는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순례 신심을 이해한다. 붙들고 사진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붙들고 기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저 까만 보호대가 성인의 뜻과는 다를 텐데, 싶으니 서글퍼지는 것이다.
나도 무슨 짓을 했다. 수도원을 배경으로 <수도 규칙> 책 사진을 찍으려 들고 올라갔는데, 동굴 안의 성인 상 무릎에 두어 보았다. 감사의 표현이었다. 기도하고,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기도하며 쓰는 사람으로 평생 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 자신이 되어 하나님 사랑을 꽃피우고 떠나 주셔서.
혼자 나와 남편을 기다리는 중, 수사님 한 분이 걸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왔다갔다 기도하는 그분을 위해 나도 기도했다. 자발적인 물러남을 사는 이 시대 수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자발적으로 물러나 평생 기도하는 삶을 사는 그분들이 있어서 그나마 우리가 이 정도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스콜라티카 수도원, 수도원 순례기 다섯 번째만에 여성의 이름이 등장했다. 스콜라티카는 최초의 베네딕토 수녀원장이다. 스콜라티카 성녀의 이름이 붙여졌고, 성녀에게 봉헌되었을 뿐이지 그녀가 세웠거나 살았던 수도원은 아니다. 이 수도원은 베네딕토에 의해 세워진 12개의 수도원 중 첫 번째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수도원들이 그러하듯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복원되곤 하는데, 여기도 그 마지막 상흔은 세계대전이다.
이탈리아 최초의 인쇄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독일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와 일하던 두 명의 독일 수도사가 이곳에 와서 3년간(1465-1467) 머물면서 처음으로 네 권의 책을 인쇄했다고 한다. 안내하는 분은 아주 빠르게 지나치듯 언급했지만, 최초의 인쇄, 수도원에서의 인쇄는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중세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필사'였기 때문이다. 필사 자체가 영적 수련이며, 필사된 서적을 보관한 수도원 도서관은 중세 시대 지성과 영성을 담고 보존하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수도원 이름으로 등장한 성녀 스콜라티카의 개인 신상을 공개할 차례이다. 스콜라티카는 성 베네딕토의 쌍둥이 여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을 뿐 아니라 많은 동생들이 그러하듯 오빠가 하는 것은 다 좋아 보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빠가 로마 유학 중 겪은 실망과 환멸로 거기를 떠나 수비아코의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할 때도 스콜라티카 역시 근처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오빠를 좋아하는 동생, 오빠와 사이좋은 동생이니 그리했을 것 같지 않은가.
인상 깊은 일화가 하나 있다. 남매는 각각 수도원장과 수녀원장으로 지내면서 일 년에 한 번 어느 농가에서 만나곤 했다고 한다. 동생 스콜라티카 성녀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오빠에게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자고 청했단다. 그러나 수도원 밖에서 잠을 자는 것이 규칙 상 허락되지 않는다며 오빠는 단호하게 떠나려 했다. (자신이 만든 규칙이었기에, 누구보다 엄격하게 지키려 했을 테니까) 오빠와 더 대화하고 싶었던 동생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러자 날씨가 험악해져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오빠 일행은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동생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 며칠 되지 않아 베네딕토는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동생의 죽음을 느낀다. 곧바로 동생의 시신을 모셔와 자신의 무덤으로 준비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 무덤에 안장하였다. 남매는 죽어서 나란히 한 곳에 묻혀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남매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남매가 서로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나란한 수도자의 삶과 여정 이야기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봉헌된 오빠를 좋아하고 따르는 동생,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하나님께 부름 받은 소명 안에서의 한계를 살려는 오빠.
순례의 시간과 여정이 길어지고 깊어지면서 짧게나마 함께 한 분들의 개인적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전부 가톨릭 신자이고, 난생처음 목사 부부와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열심 있는 개신교 신자들의 지나친 열정, 특권 의식으로 상처받는 가족들은 흔하다. 우리로 치면 말없이 착한, 조용히 하나님 사랑하는 권사님 같은 한 분이 계시다. 교회 일이 있다고 가족 모임은 등한시하고 얼굴도 비치지 않는 가족 개신교인 가족 이야기를 하신다. 눈물을 찍어내며 드문드문 이어가는 말씀을 듣자니, 단지 가족 모임에 오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냥 존중해 주면 좋겠어요." 누나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폭력적인 말들을 할지, 내 주변 어떤 교인들의 말을 떠올리면 금방 상상할 수 있다. 개신교인 가족, 개신교인 친구에게 받은 상처를 들으며 나라도 엎드려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다. 결국 기습 생일 축하 노래로 축하받은 남편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목사라는 가족의 대소사를 다른 형제자매에게 떠넘기고도 당당한 이들로 상처받은 사람 또한 흔하다. 물론 목사라는 '직업'은 결혼식이 있고, 가족 모임이 흔한 주말이 제일 바쁘고, 장례가 나면 휴가 중에도 복귀해야 하는 그런 '직업'이다. 직업으로선 그렇다. 남편은 어릴 적 친구 모임의 걸림돌이 되곤 한다. 모두 일하는 월요일에 쉬니 말이다. 우리 가족 때문에 시가의 가족 모임 시간 잡는 것이 늘 조금씩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직업, 서있는 위치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목사 아니라 누구도 가진 한계이다.
봉헌된 삶, 하나님께 드려진 삶은 결국 사람에게 드려진 삶이다. 하나님 일이라 퉁쳐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성직은 없다.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에 단호할 수밖에 없었던 베네딕토 오빠였을 것이다. 동생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오빠로서 오빠의 자리에 진정성 있게 충실한 것은, 오빠의 뒤를 따르는 동생을 위한 최선의 사랑일 수 있다. 문제는 사랑이다. 오빠를 조르는 동생 역시도 사랑이었으니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알아주셨을 것이고. 봉헌된 삶은 특혜를 누리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은 사랑에 봉헌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혐오한다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 베네딕토와 성 스콜라티카 남매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을 적신다. 편 가르고, 특권의식에 휩싸여 배제하고 혐오하는 부끄러운 내 마음 정화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