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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영원에 잇대기3284

겨울 실내악 겨울 실내악(室內樂) / 김현승잘 익은 스토브가에서몇 권의 낡은 책과 온종일이야기를 나눈다겨울이 다정해지는두꺼운 벽의 고마움이여과거의 집을 가진나의 고요한 기쁨이여깨끗한 불길이여죄를 다시는 저지를 수 없는나의 마른 손이여마음에 깊이 간직한아름다운 보석들을 온종일 태우며내 영혼이 호올로 남아 사는슬픔을 더 부르지 않을나의 집이여 하염없이 눈이 내리니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이 시간을 덮어버려 명절이 사라졌다. 갑자기 주어진 두둑해진 시간으로 뭘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원고와 여러 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근심과 기도를 하면 될 텐데... 갑자기 진공상태가 된 듯하다. 모니터 앞에 앉아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 키스 자렛의 피아노 소리로 충분한 것 같기도 하고. 뭐든 해야 할 것 같.. 2025. 1. 28.
초록 충전 마트에는 그렇게 많은 야채와 식재료들이 있는데, 장을 볼 때마다 눈에 걸리는 것들은 늘 그게 그거다. 손으로 집어 들기 전에 눈으로 들었다 놨다 하는 것 중 하나가 이 즈음엔 냉이이다. 벌써 맛있겠고, 벌써 향기롭지만... 다듬고 씻는 일이 얼마나 귀찮을까 눈길 몇 번 주다 돌아서곤 한다. 그래도 집어 들게 하는 건 "채윤이가 좋아하니까!"이다. 그런데 솔직히 채윤이만 좋아한다면 사지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 엄마라면 "신실이가 좋아함"이 어떤 귀찮음을 감수하고라도 음식을 만드는 충분조건이 되겠지만, 채윤이 엄마 신실은 신실이 엄마와 다르다. 채윤이가 좋아하지만 제가 좋아하니까 결국 집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냉이 두 팩을 사서, 초록초록하게 데쳐서 심심하고 상큼하게 무쳐서 잘 먹었다. 채윤이도 .. 2025. 1. 18.
모든 부치지 못한 감사 편지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란 신비하다. 침묵 속에서 만나는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서도 고유한 성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말이 아니라 침묵 속 만남이라 더 또렷해지는 존재의 향기일지 모르겠다.  봉쇄수도원의 침묵 속에서, 마음에 한 여인을 품고 왔다. 피정자 돕는 문지기 수녀님은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을 하고 "아, 알죠. 개신교인이신 것" 하고 맞아주셨다. 며칠 째였던가, 수도복 아닌 작업복에 장화를 신으시고 털모자를 쓰고 내 방 문을 두드렸다. 밝고 맑은 얼굴과 목소리로 "식사하세요!"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안아버릴 뻔했다. 식사를 해라 말아라, 기도를 해라 말아라 간섭이 있는 곳이 아니다. 새벽에 있었던 열쇠 해프닝(매뉴얼을 따르지 않는 피정자로 인해 다른 피정자에게 불.. 2025. 1. 15.
모든 특별한 기도 라는 책이 있는데. 내 인생에 꼭 필요한 찬양은 죄다 주일학교에서 배운 것 같다. 기도에 관한 많은 노래가 있지만, 자주 마음에서 울리는 찬양은 이것이다. . 때때마다 이 찬양의 어느 소절이 마음에 울리곤 한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니 수도원 기도 피정을 떠난다. 어젯밤부터 시작하여 밤새도록 마음의 저 깊은 바닥에서 울리는 노래이다. 기도를 위해 며칠 떠나는 것이, 봉쇄 수도원으로 떠나는 이 시간이 기다려지기는 하지만... 기분 좋기만 한 일이 아니다. 가고 싶고,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밀고 밀리면서 조금은 심난하게 된다. 기도의 속성이 그런 것 같다. 하고 싶고, 하고 싶지 않고. 하나님의 품을 향한 자아의 태도가 그렇다. 그 품에 안기고 싶고, 도망치고 싶고. 새해 첫 주는 교회의 특새.. 2025. 1. 6.
가톨릭 잡지 계간 <평신도> 가톨릭 매체에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싶은데. 지도교수님 추천으로 학생(졸업생) 신분으로 쓴 짧은 글입니다."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청년 때 이 찬양 참 좋아했는데... 담 앞에 서 본 사람은 압니다. 성벽이든, 허술한 벽돌 몇 개의 담이든, 담을 허무는 일이 얼마나 피눈물 나는 일인지 말이죠. 이 매체의 독자들에게는 한 특이한 개신교인의 고백이겠으나, 하찮은 이 글이 무엇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신교인은 죄다 통성기도만 한다든지 하는 선입견을 깨는 작은 구멍이라도요. 선입견의 담이 얼마나 견고한지 모르겠어요. 광화문에 모여 전광훈 목사에게 열광하며 통성기도 하는 분들이 개신교를 대표하지 않는 것처럼, 가톨릭 신자들도 마리아교를 섬기는 이단이 .. 2025. 1. 5.
알맘마 계란볶음밥, 이라고 했으면 큰 호응을 못 얻었을 것이다. 계란볶음밥이라고 했으면 그리 따뜻한 음식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알맘마 해줄까? 하는 순간 "알맘마" 해주겠다는 사람이나, 먹을 사람이나, 저녁을 안 먹겠다고 했던 사람까지 음식 너머의 따스함에 감싸였다. 장을 보러 나갈 수도 없고, 무엇이 꽉 들어찬 냉장고에 실속이 없는 저녁이었다. 실속이란, 오직 계란... 계란을 풀어 익히고 밥을 비벼 양념하는 이 단순한 밥을 아버님께서 "알맘마"라 부르며 해주셨었다. 채윤이 현승이에게 해주셨지만, 알맘마라는 말에 반색하는 것을 보면 JP의 기억에도 "있는" 음식이다. 파를 듬뿍 넣어 파기름을 내고 알맘마를 만드는 동안 우리 아버님의 착한 따스함이 생각났다. 당신의 아들, 손주들, 그리고 둘째 딸이라 하시던 .. 2025. 1. 3.
감사한 연결, 기다리는 연결 후원금이 절실한데, 절실한 일을 위해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 해 건너뛰고 드리는 편지입니다. 진심의 감사, 절실한 필요와 요청을 편지 한 장에 담기가 어려워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며 시간을 보낸 탓이고. 안팎의 어려움으로 더 힘을 내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감사와 함께 죄송한 마음도 담아서 보내드립니다. 연구소의 소중한 벗인 “숙희의 실 이야기” 숙희 님께서 치유의 기도를 담아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엮으신 마음을 작은 선물로 동봉했습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에 매월 일정 정도의 금액을 기도처럼 흘려 보내고 싶으시다면 연결되어 주세요. 상담이나 내적 여정, 기도를 배우는 일, 영적인 길의 동반자로 연결될 필요가 있는 분들의 손을 잡는 일에 값있게 쓰겠습니다.  ♥ 후원 신청_https://forms.. 2025. 1. 3.
나의 길 새로운 길 이사 오기 전, 동네를 걸으면서 하루하루 아쉽고 슬펐다. 나만 아는 비밀 같은 길과 장소가 있었는데, 거기 핀 달맞이꽃과 꽃마리와의 비밀 이야기가 있었는데. 두고 떠나와야 하는 것이 아쉬워 한 번 한 번의 산책이 소중했다. 물론 새로운 길을 걷게 될 것이지만, "현재 지금 여기"의 길이 늘 가장 소중하니까. 이사한 새 집에는 새로운 풍경이 보이는 창이 있고, 걸어야 할 새길이 있다. 경안천, 겨울의 메마른 경안천 길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지! 매끈하게 조성되지 않은 넓은 천에 겨울 새들이 머무르고 그 위로 해가 진다. 해 질 녘 경안천 따라는 걷는 기쁨을 놓치지 않으리!      이삿짐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지만, 참을 수 없어서 나가 걸었다. 이런 선물이 숨겨져 있었다고? 와, 주님 감사합니다! .. 2025. 1. 2.
민주주의의 딸 2024년 12월 14일 오후 4시, 간절한 마음 보태려고 먼 길을 갔다. 탄핵 표결이 진행되는 역사적 장소에 가장 가까이 있었는데, 인터넷 불통으로 정작 감감무소식의 시간이 되었다. 소원을 말해 봐, 다시 만난 세상… 노래 맞춰 구호를 외치며 기다렸다. 침묵, 그리고 이백 네 표! 기쁨의 함성! 이 순간을 예견하고 카메라를 높이 들고 있던 아빠가 찍은 영상에 불쑥 올라와 담긴 2000년 생 20대 채윤이의 주먹이다. 2002년 경선과 대선 승리, 2003년 탄핵 반대 시위, 2014년 이후 세월호 집회, 2016년 촛불… 등 엄마 아빠 따라다니며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배운 아이이다. 저 주먹, 볼수록 감동이다. 말로만 듣던 계엄이 내 현실로 일어났고, 이 와중에 아들은 군대에 가 있다. 불의, 이 명백.. 2024. 12. 29.
선물 성탄절을 앞두고 내 무의식을 아는 유튜브 알고리즘 귀신이 영상을 하나 띄웠다. 성탄 파티에서 선물 뽑기 하는 것이었는데, 이거다! 올해 성탄절엔 이거야! 교회의 아기들에게 성탄절에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릉드릉하고 있었다. 젊은 부부 모임에서는 해마다 마니또를 하고, 알뜰 바자회로 파티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좋아 보이고 예뻐 보일 수가 없다. 헤아려보니 이들 중에 여럿은 결혼도 하지 않았던 때, "결혼 학교"라는 이름으로 만났었다. 그 사이 결혼들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고. 매 주일 교회 가는 기쁨은 이 아이들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탄절 앞두고 이사도 있고, 써야 할 글에 치어 있는 상황이라 무의식에서만 드릉거리고 있었는데, 이 영상을 보는 순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24.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