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도 피정집이나 수도원은 밥이 참 좋습니다. 소박하며 동시에 풍성한 식탁이고 그것을 누리는 행복감이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러 간 건지 밥 먹으러 간 건지 헛갈리는 정도. 침묵의 생활이기에 이 좋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 참으로 미묘하게 좋은 곳입니다. 그저 천천히 맛과 식감을 느끼며 먹는 수 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밥은 먹는 자체가 기도입니다. 달그락달그락 그릇 소리만 나는데도 영혼이 기뻐 아우성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그런 맛있는 시간입니다.
 
여기 수도원 순례에 와서는 정작 그런 식사는 없습니다. 예상과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이조차 주어지는 대로 누리자니 벌써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순례기는 안 나올 것 같고 수도원 음식 사진 염장질로 대신합니다. 한국 시간 밤 10시 쯤, 야식 땡기는 시간에 올리려고 비장하게 품고 있었는데 시차 때문에 도저히 그걸 못 맞춰서 아쉬울 뿐....      

압테이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Abtei Schweiklberg) 아침 식사, 빵
압테이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Abtei Schweiklberg)의 아침 식사, 창을 바라보는 좋은 자리 앉았음.
압테이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Abtei Schweiklberg) 아침식사, 자세히 보면 이러함.
압테이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Abtei Schweiklberg) 아침식사, Tea들

 

압테이 슈바이클베르크 수도원(Abtei Schweiklberg) 아침식사, 디저트
플랑크슈텐 수도원(Kloster Plankstertten) 점심식사, 샐러드
플랑크슈텐 수도원(Kloster Plankstertten) 점심식사, 메인요리
플랑크슈텐 수도원(Kloster Plankstertten) 점심식사, 느끼한 중에 블랙 콜라 마시고 좋아하는 JP
플랑크슈텐 수도원(Kloster Plankstertten) 점심식사, 디저트, 과일은 자두
플랑크슈텐 수도원(Kloster Plankstertten) 점심식사, 순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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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요청을 뉴질랜드 여행 중에 받았다. 시간이 있을 때라도 쓸 수 없는 글, 쓰고 싶지 않은 글은 결국 수락하지 않게 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이 없을 때라도 길거나 짧거니 꼭 쓰고 싶은 글은 쓰고야 말더라는… 서문을 대충 훑어보니 거절할 수 없는 추천사 요청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연구소의 경험을 쓰려했는데. 거기 담고 싶은 내용들이 다 들어 있었다. 그래서 놀랍고 조금 맥이 풀렸지만, 고마운 책이다. PDF 파일로 받은 원고를 비행기 안에서 다 읽었다. 내게는 그렇게 흥미진진한 내용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흥미진진’이진 않겠으나) 강력하게 추천하는 책이다. 추천사에 쓴 것에서 (더하고 싶은 것은 많지만) 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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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헌신적인 치료사와 목회자의 건강이 걱정되는 때가 있다. 종종 이들의 진정성은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남에게 ‘헌신’으로 드러난다. 결국 몸과 마음이 상하고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분들이 오랜 시간 사람들 곁에서 치료하고 목회하기를 바란다. 단,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아운디 콜버도 그런 사람이다. 자신의 상처를 치유 인자로 바꾼 사람, 예수님 닮은 자비의 성품을 타고난 사람이다. 저자는 소진되고 무너졌던 경험을 통해서 한 가지 부족했던 것, 자기 자비(self-compassion)를 깨달았고 그것을 나눠준다. ‘자기’ 자비라는 말에 긴장할 필요는 없다. 자기 몰입과 자의식 과잉으로서의 자기 연민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우리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일깨우자는 초대이다. 그러니 영성에 관한 책이다. 초대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을 자비롭게 대하여 결국 흘러넘치는 자비를 만나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안내하는 영성 수련 실용서이기도 하다.

정신실(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

나를 위한 처방, 너그러움

자신의 과거를 이해함으로써 변화되어 풍성한 삶을 살고 싶은 이들을 위한 심리학적·성경적 처방을 담은 책이다. 쉬지 않고 노력하면, 끊임없이 자신을 떠밀면, 괜찮은 척하면, 행복과 성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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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워 팔기

누가 내 책도 이렇게 홍보해 주면 좋겠다. SNS에 공유도 해주고, 온라인 서점에 100자 평도 써주고… 누가 그래줬으면 조케따!

노을이 물드는 시간

「시니어 매일성경」에 3년간 연재하며 독자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이 生의 오후를 건너는 이들에게 건네는 따스한 위로의 책이다. 인생 중 가장 찬란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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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로마로 왔다.  로마에서 이틀을 보내고 한참 지나도록 순례기가 써지질 않는다. 할 말이 없거나 쓰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글이 써지지 않는 답답함은 내게 익숙한 고통인데, 대부분은 여러 말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오려 하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데다 잘 쓰고 싶어 힘이 들어가는 경우가 가장 어렵다. 글 변비에 걸린다. 마감일을 코 앞두고 밤낮으로 끙끙거리며 보내는 고통의 시간이라니. "내 다시는 새로운 원고 청탁 수락하지 않겠다." 결심하지만, 지켜질 리 없다. 나를 낚는 글은 늘 하고 싶은 말은 많고, 잘 쓰고 싶은 욕심은 가득한 주제들이니 말이다. 내 안에서 농익지 않은 주제들 일지 모른다. 말은 늘 무성하다. 무성한 말들이 정제되어야 눈으로 읽을 수 있는 글이 된다. 그러니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노트북을 덮고 나가서 걷든 기도를 하는 것이 좋다. 무성한 것들이 스스로 겨루어 꼭 필요한 것만 살아남도록 하는 시간 말이다.
 
로마는 혼란스럽고, 혼란을 유발하는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로마는 도시 전체가 관람객으로 가득차 있다. 나는 순례자인가 관광객인가. 트리비 분수 앞 인파 속에서 해맑게 동전을 던지며 사진도 찍어 보았다. 그런데 어쩐지 조금 부끄러운 것이, 정체성 혼란인 것 같다. "관광객으로 로마에 올 수도 있었으나 나는 지금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자이지 않은가."  그리 심각해질 필요가 있나,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라고 조언하지 마시라.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나름의 순발력과 임기응변으로 여기저기 빠르게 적응하고 잘 맞추는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체성, 즉 내적인 자기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이 내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순례자에서 관광객으로 모드를 전환할 수 있지만, 내가 나를 설득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많은 경우에 그렇다. 나만의 이유를 발견하면 모드 전환은 언제든 가능하고, 둘 사이를 오가는 것도 쉬운 일이다. 나는 지금 개신교인으로, 개신교 목회자의 아내로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 끼어 순례를 하고 있지 않은가. 내적 일관성에 비롯한 '나만의 이유'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관광객이 되어 지나쳐야 했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와 죽임 당할 그리스도인들이 입장했다는 문 앞에 머물렀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유창하게 끊임없이 설명하는 가이드의 말이 관광객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가는 중에 "아무 의미 없는 죽임이었죠!" 하는 말이 귀에 꽂혔다. 의미! 그렇다, 나는 의미를 묻고 싶다. 로마시민의 유흥이 되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고, 사람과 짐승이 죽을 때까지 싸우던 곳이 여기 콜로세움이다. 싸움을 '당했다'고 표현해야겠다. '유흥'이라는 의미를 위해서 죽는 죽음이라니, 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삶과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히브리서 말씀이 떠올랐다. 박해시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의 의미,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던 시대를 생각한다.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이 말씀이 갑작스레 혼란스럽게 다가왔다. 

고문을 당하면서도 더 나은 부활을 사모한 나머지 굴복하고 풀려 나가는 것을 거부한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학대와 채찍질을 기꺼이 받았고 쇠사슬에 묶여 지하굴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돌에 맞고 톱으로 켜져 두 동강이 나고 살해되어 싸늘한 시체가 된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짐승 가죽을 두르고 집도 친구도 권력도 없이 세상을 떠돈 이들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 혹독한 세상의 가장자리로 다니면서도 최선을 다해 자기 길을 갔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본보기가 되기는 했지만 그들 가운데 약속받은 것을 손에 잡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바로 그들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이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의 믿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메시지성경

 

 

콜로세움 관광 후엔 바로 개선문이다. 박해 뒤에 갑자기 그리스도교 공인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를 공인한 이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박해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이다. 어렸을 적에 세계사 시간이었을까?  AD 313 년을 처음으로 들은 그날부터 시험공부를 위해 따로 외울 필요도 없이 까먹지 않는다. 드디어 기독교가 인정된 해라고 하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안도감이 들었었는지. 철이 들어 교회사를 새롭게 배우고, 영성사를 배우고 보니 기독교 공인을 천진난만하게 반겼던 어린 시절의 내가 귀엽기도 하고, 싹수가 노란 어린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보여 씁쓸하기도 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52~1466년, 329x190㎝, 프레스코. 야전 막사에서 곤히 잠든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붉은 이불을 덮고 잠든 주인공이 콘스탄티누스다. 천사가 왼쪽 위에서부터 가파른 각도를 그리면서 날아든다. 손에는 황금 십자가를 들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 뒤에는 꿈 이야기가 있으니, 꿈 선생님으로서 이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다. 수도원 숙소의 아침이고, 아침 식사 시간 전에 글을 마쳐야 하니 인용문으로 대신한다. 

로마 제국이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것은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정작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뜻하지 않은 계기가 그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그로부터 한 해 전, 그러니까 312년의 어느 날 밤이었다. 숙적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하루 앞두고 잠이 들었는데, 콘스탄티누스의 꿈속에서 천사가 나타났다. 천사는 황제를 깨우더니 『위를 보라』고 말한다.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니 밤하늘에 십자가가 밝은 빛을 뿜으면서 걸려있고, 그 위에 황금 글씨로 「이 표식 안에서 너는 승리를 거두리라」라고 씌어 있는 것이었다. 기운과 용기를 얻은 황제는 잠에서 깨어나 당장 군단 깃발의 휘장에 십자가를 그리게 한다. 이튿날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밀비우스 다리의 전투에서 적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버려 둔 채 등을 돌리고 달아나기 바빴고, 큰 승리를 거둔 콘스탄티누스는 이때부터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유일한 황제가 된다.
<가톨릭신문> "노성두의 미술 이야기" 2003-09-28 제 2366호 12면

 

 

카타콤베, 무덤이기도 은신처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묻을 곳이 없었다고 한다. 좁은 통로 옆의 벽이 죄다 무덤이다.  아이가 묻힌 작은 무덤, 어른의 무덤이 있다. 가이드 없이 들어가면 길을 잃어 나올 수 없는 곳, 깊은 곳으로는 아예 들어가지도 못한다고 한다. 추격해 오는 로마 병사들이 여기로 들어와서는 미로 같은 길에 갇혀 두려움에 떨었고 그것을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수동적이며 적극적이고 지능적인 방어로구나. 여기는 피난처인가. 피난처 밖은 위험하다. 위험 속에서 숨는 곳은 순간의 안전을 지켜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는 것은 밖은 위험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밖이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피한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더는 위험한 일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로 선포되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일이 위험한 일이 된 것인가. 초대교회 영성의 특징은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이라고 한다. 박해의 영성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박해와 고난을 자처하는 일이다.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 '곧 다시 오신다' 하셨기 때문이고. 이들이 무의미한 죽음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약속에 근거한다. 곧, 이들이 살아생전에 오실 것이라 믿었을까. 처음엔 그리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100년, 200년 다시 오시지 않는 시절을 보내며 참 '믿음'을 발견하고 살았을 것이다. 당대에, 그 약속한 것이 손에 쥐어지지 않았으나,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음에도 믿는 믿음이 생겼을 것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가 믿어도 된다고 하니, 맘껏 믿어도 된다고 하니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기독교가 공인되자 '맘껏 믿어도 되는 세상'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박해 없는 세상을 떠나 자발적 박해로 들어간 분들이다. 사막의 교부들이라 부른다. 수도원의 시작은 여기 사막, 사막의 수도 공동체였다. 베네딕도 역시 혼란의 로마를 뒤로 하고 은수의 삶으로 갔던 것이 우연은 아닐 듯하다. 혹독한 박해의 시절이 갑자기 평안의 때로 바뀌는 혼란, 하나님을 더 잘 사랑하기 위해 공부하러 왔으나 공부가 되지 않아 방황하다 떠나기를 선택하는 혼란, 순례자로 왔으나 관광객이 되어 떠밀려 다니는 혼란. 혼란이 있는 곳이 로마이다. 여행 가이드북의 로마 소개란에 "ROMA를 거꾸로 하면 AMOR!"라는 말이 있다. 로마는 혼란스러우며 동시에 어떤 사랑으로 이끄는 곳이 아닌가 싶다. 초세기 교부들에게, 성 베네딕도에게, 나에게. 그리고 이 무엇보다 순례단에. 사실 직면한 가장 큰 혼란은 로마의 순례단이 마주한 난관이다.
(혼란의 로마, To Be Continued!)

 

 

중세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다웠다는 파르파(Farfa) 수도원이다. 수도원이나 성당의 건물이 아름답다는 것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부유했다는 뜻이다. 수도원의 시작은 6세기 시리아에서 아리우스 파(언젠가 다시 설명을 늘어놓을 예정)의 박해를 피해 내려온 은수자 성 로렌조 시로(Lorenzo Siro)에 의해서이다. 이탈리아의 대부분 수도원들이 그러하듯 북쪽에서 내려온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한 때 무너졌고, 제2 창립자의 신심과 소명으로 재건되었다. 교회든 성당이든 수도원이든, 중세시대든 지금이든 건축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로마로 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머물렀던 프랑크 족의 카를로 황제가 수도원을 보호하고 지원하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이때부터 파르파 수도원은 황제의 권력 하에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전성기를 누리며 '황제의 대수도원'이라 불린다. 이후 파르파 수도원은 교황과 황제 사이 권력 다툼의 격랑 속에서 영욕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남아 있다. 

 
"한때 아름다웠던" 것들은 아름다운 전통이 되어 남아 거기 잇댄 오늘을 빛나게 한다. 또 "한때 아름다웠던" 영광에 비춘 오늘이 누추하기만 할 때도 있다. 한때 아름다웠던 기억과 상실감에 매여 그때의 영광을 회복하려 한다며 비참한 오늘을 살게 될 수밖에 없고. 순례자는 순례의 여정 중 짧게 어딘가를 방문하고 떠나게 된다. 한때 가장 아름다웠던, 1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파르파 수도원을 한나절 방문하며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시간이었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순례든 여행에서 계획이 틀어지고 일정이 꼬이는 일은 흔하다. 가이드는 우리 팀만 따로 조용히 순례하기 위해서 조금 기다리자고 했다.  동네를 돌며 기다리다 연기한 시간이 되어 들어갔는데, 우리가 기다리던 시간에 진행했어야 할 순례팀이 늦게 도착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래 기다린 덕에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과 도떼기 시장 순례를 해야 했다. 현지인들이기에 통역이 따로 필요치 않으니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안내에 통역이 잘 되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날려버렸다. 많이 속상했는데, 남편은 마침 그 순간 수신기의 배터리가 나가버려 마음 편히 포기하고 인파에 밀려다녔단다. 

 
도떼기 시장 속에서 들린 짧은 한 마디는 수도사들의 방에 1900년대 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커다란 수도원에 남아 있는 수도사들이 몇 명 되지 않는다는 것. 이 말은 어느 수도원에서나 듣는다. 왜관 베네딕도 수도원에 현재 39명의 수사들이 살고 있다는 말에 그렇게 많으냐고 놀란다. 수도원에 돈이 모이고 대리석으로 성당 바닥을 깔고, 천장과 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동안에도 수도사들의 일상을 지속되었을 것이다. 가난, 정결, 정주를 서약한 수도자 한 사람의 삶은 작은 독방에서 매일의 일상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아빠스의 명령 없이는 누구라도 감히 무엇을 주거나 받지 못한다. 또 어떤 것을 개인 소유륵 가져서도 안되니 도대체 어떤 물건이라도, 책이거나 서판이거나 펜이거나 아무것도 전혀 개인의 소유로 가지지 못함은, 자기 몸과 뜻도 개인의 마음대로 가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필요한 모든 것은 수도원의 아버지에게 바랄 것이며, 또 아빠스가 주지 않은 것이나 허락하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베네딕도 수도 규칙> 33장

 

(성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각자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줄 것이다." 이렇게 말함음-이런 일은 없어야 하겠는데-, 사람의 차별을 두라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연약한 사람들을 고려하라는 말이다. 적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애석하게 생각하지 말 것이며, 많이 필요한 사람은 연약함에 대해 겸손하고 자비를 받은 데 대해 교만하지 말아야 한다. <베네딕도 규칙> 34장

 

 

그 와중에 아름다운 시간이 있었다. 이탈리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그런 동네 골목을 걸어 보았다는 것, 친절하지도 불친절하지도 않은 잘생인 이탈리아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에스프레소 한 잔의 행복을 누려본 것이다. 순례 안내를 받기 위해 버린 시간이 아깝지 않다. 오히려 고맙다. 실은 수도원 안내에 대한 정보가 차고 넘쳐서 한 번쯤 놓쳐도 아쉬운 것은 없다. 계획은 틀어지고 일정은 꼬이게 마련이고, 꼬인 일정 가운데 아름다운 순간은 새롭게 빛을 발하게 된다. 어쩌면 그것이 순례의 묘미이고 인생 순례길이 고유한 아름다움 아니겠는가. 그리 생각해도 파르파 수도원을 떠올리면 불편한 감정이 떨쳐지지 않는다. 진선미, 진실은 선하고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진실일 수 없다. 진실한 것이 아름답다. 한 텀을 기다리면 우리끼리 순례할 수 있다고 한 것이 현지 안내인인지, 가이드의 계획이었는지 모르겠다. 한 텀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더 불편한 상황이 된 것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정중하게 사과했으면 좋았겠다. 우리를 배려하지 않고 통역할 시간을 주지 않는 현지 안내인의 태도, 이 모든 일을 있어서 이탈리아 사람들의 습성이라 말하며 심지어 이해하고 받아들여 넓은 마음을 가지라고 설교까지 하는 가이드가 아름답지 않다. 일어난 일을 일어난 일로 받아들이고, 책임자로서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면 되는데 말이다. 선하고 유창한 말이 아니라 선하고 진실한 말이 아름다움이다.

 

이렇게 투덜대지만, 순례 여행 중 심장 터지도록 아름다운 순간이 있었다. 수도원 근처 공원에 혼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나타나 스윽 다가오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 얘는 꼭 <마녀 배달부 키키>의 고양이 지지 같이 생겼다. 지지의 동생이거나 언니일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시간 내내 온갖 재롱을 부리더니 내 흰 운동화에 제 검은 발을 스윽 갖다 대는 것이다.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내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 것이었을까. 잠시 후 불편해질 내 마음을 미리 다독여주려는 것이었을까. 달라스 윌라드의 마지막 강연록에 있는 말이 떠오른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인가?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방식이 작동하는 곳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이 가장 잘 작동하는 곳은 "자연"이다. 수도원이 하나님 나라인가? 수도원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이 하나님 나라이다.  그리고 내게 하나님 나라는 "일상"이다. 뜻대로 되는 것 없고, 애써 잘하고 싶은수록 더 안 되고, 그러다 갑자기 어느 순간 잘 되어 버리는 일상. 이 일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유일한 것은 아침 기도 시간이다. 이른 시간 혼자 일어나 연구소 벗들에게 영적 독서를 나누고, 남편과 함께 렉시오 디비나를 나누고, 향심기도를 하는 시간. 우리 집 거실, 내 자리가 그립다. 돌아가면 그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지켜야겠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수도자의 독방 같은 시간 말이다. 

영성사(史)를 공부하며 수도원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보니 <베네딕토 수도 규칙>은 뼈대 같은 것이었다. 각각 다른 수도원들의 영성을 하나로 묶는 것이기도 하고, 이 수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느냐에 수도회의 고유함이 결정되기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중요한 문서이지만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인용된 것으로 충분했다.  '규칙' 같은 말에 대한 거부반응이 본능적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르겠다. 잘하던 일도 '너 이거 꼭 해야 해!' 강압으로 주어지면 안 하고 싶어 하는 못된 아이 같은 마음 말이다. 알고 보면 누구보다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하면서, 강압하고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빠르고 지나치게 과민반응 해버리는 면이 있다. 규칙, 규칙서. 이런 것을 찾아 읽고 싶은 마음은 없다.
 

수도원 순례를 결정하고 꼭 읽어야겠다 싶은 것이 <베네딕토 수도 규칙>이었다. 뒤늦게 순례 참여를 결정한 남편은 수도원 관련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아니, 결정하기 위해서 이미 쌓아 두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이 규칙서만 잘 읽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큰 기대 없이 읽기 시작한 <베네딕토 수도 규칙> 머리말부터 빠져들었다. 2장의 "아빠스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 부분에는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규칙서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빠스에 관한 권고들이다. 아빠스는 대수도원장( Abbas)을 일컫는 말로 아람어로 아버지를 뜻하는 "아빠(Abba)"에서 왔다고 한다.
 

수도원을 돌보기에 적합한 아빠스는 항상 그의 호칭을 기억하여 행동으로써 으뜸이란 명칭을 채워야 한다.(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믿어지며, 그분께 (바치는) 호칭으로 불리어진다.

 
2장 "아빠스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시작하는 첫 문장이다. 호칭을 기억하라! 아빠스라 불리는 호칭을 기억하고, 행동으로 명칭을 채워야 한다니. 이보다 분명하고 준엄한 지침이 있을까 싶다. "나는 아빠다!" "나는 엄마다!" 이 말이 담은 책임감의 무게, 그 무게를 견디는 기쁨... 나는 이것을 안다. 그리고 이 문장을 좋아한다. '자녀를 위한 어머니 기도회'가 내 아이만 잘 되라는 이기적 욕망을 부추긴다 여겨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썩 내키지 않았던 어머니 기도회 강의에 가서 본 문구가 마음을 건드렸었다. "주님, 제가 엄마입니다!" 엄마이고 아빠인 정체성을 생각하는 것, 그에 합당한 행동으로 엄마와 아빠로 불리는 그 호칭을 채우는 것의 감미로운 고통이란. 
 
누가 내게 <베네딕토 수도 규칙>을 한 두 문장으로 요약하라 한다면, 이 규칙서는 수도승들을 위한 것이기보다 아빠스를 위한 것이라 말하겠다. 그리고 한 문장을 뽑아 내라 한다면 물론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이겠지만, 내 맘대로 2장의 저 첫 문장을 꼽겠다. 베네딕토는 한 번도 일반 수도승인 적이 없고(은수동굴 3년은 수도승이었겠다) 시작부터 아빠스였다. 사람들을 모은 적이 없으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배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 수도원을 세우기 시작했으니 시작부터 아빠스였다. 그래서 아빠스에 관한 규정들이 유독 더욱 준엄했는지 모르겠다. 성 베네딕토든 아빠스의 정체성, 즉 아버지의 마음을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베네딕토가 로마로부터 물러나 수비아꼬로 가기 전에 유모와 함께 기거했던 '아필레(Affille) 마을에 들렀다. 아필레는 성 베네딕토의 첫 기적 장소라고 한다. 유모가 이웃집의 채를 빌려다 썼는데 잘못해서 그것을 깨트렸다고 한다. 그것을 붙들고 통곡하고 있는 유모를 보고 베네디토 성인이 기도를 하자 그 채가 다시 붙어 원래대로 되었단다. 이 기적이 소문이 나자 베네딕토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 떠남이 은수처인 수비아꼬에 닿았다. 성인전에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 기적이 사실인지 아닌지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한다. 의미 없는 기적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쪼개진 채가 붙고, 물이 포도주가 되고, 죽은 사람이 살아났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의미는 제거하고 기적만 바라는 마음이 참된 신앙이 될 리 없다. 아빠스 베네딕토를 향한 씨앗은 이미 이 첫 기적에 담겨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유모는 누구인가. 유모는 엄마 대신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다. 베네딕토의 가정이 부유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마로 유학을 떠나는 베네딕토를 돌보기 위해 유모가 따라갔다. 로마를 떠나 머무를 곳에서도 유모가 함께 한다. 이 기적을 행하고 길을 떠나면서 베네딕토는 유모와 결별한다. 돌봄이 필요한 아이에서 스스로 돌보는 어른으로의 떠남이기도 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돌보던 베네딕토를 혼자 보내야 하는 유모의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일 것이다. "얘는 나 없이 아무 것도 못해요." 엄마가 이렇게 말하며 운다면, 나는 같이 울고 말 것이다. 이웃집에 채를 돌려줄 수 없으면 상황이 많이 어려워지나 보다. 그러니 통곡을 했겠지. 절박한 유모 한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첫 기적이었다. "어머니, 저는 이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강한 성인이 되었습니다. 안심하세요." 하는 메시지를 남기며 속세를 떠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빠스가 되기 위해서, 돌봄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돌보는 존재, 그것도 하나님을 찾는 많은 이들을 돌보는 아빠스가 되기 위해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떠나야 한다. 떠나되 이제는 나보다 약해진 부모를 안심시키고, 그를 축복하고 떠나야 한다. 규칙서에서 아빠스에 관한 부분을 읽으며 엄마인 나를 비추고, 내적 여정을 동반하는 나를 비추고, 연구소를 이끄는 나를 비춘다. 나도 모르게 한 구절 한 구절 자꾸 읽게 된다. 내가 아빠스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을 맡은 자이기에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게 두 아이를 맡겨 주셨고, 그 아이들 앞에서 어른으로 살라고 하셨다. 연구소로 모여든 사람들의 영적인 여정을 동반하는 자로 책임을 맡겨 주시고, 소장의 정체성을 잊지 말라고 하신다. 아빠스를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하셨으나, 예수님께 부름 받은 우리 모두는 그분의 대리자이다. 그렇게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 아닌가.
 

아빠스는 집주인이 양들 가운데서 별로 이익되는 점이 없음을 발견하거든 그것이 목자의 탓인 줄로 알아야 한다. 

 

아빠스는, 자기가 제자들에게 부당하다고 가르친 바든 무엇이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자기의 행동으로 가르칠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버림받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며...

 

아빠스는 수도원 안에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이가 선행과 순명에 있어 뛰어나지 않은 한 어떤 한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지 말 것이다.

 

아빠스는 자기의 지위를 늘 기억하고 명칭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며, 많이 맡겨진 이에게는 많이 요구됨을 알아야 한다.

 

그는 영혼들을 다스리고 많은 사람들의 기질을 맞추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유순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책벌해야 한다. 또 각자의 성질과 지능에 따라 모든 이에게 순응하고 알맞게 해줌으로써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손해가 없도록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착한 양들의 수효가 늘어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빠스는 맡겨진 양떼에 대해 장차 받게 될 목자로서의 심문을 항상 두려워하고, 다른 이들에 대해 바칠 헴을 조심하는 동시에 자신의 헴에 대해서도 염려할 것이며, 자신의 훈계로 다른 이들의 잘못을 고치게 할 때에 자기의 결점도 고칠 것이다.

 
 
 

 

아주 작은 기념 성당이 있고, 성당 주변으로는 무덤이 있었다. 키가 큰 사이프러스가 인상적이다. 무덤가에는 이 나무가 주로 심겨 있다. 하늘을 향해 올곧게 치솟은 나무의 형태가 하늘을 향한 인간 영혼의 본성을 담는다 여기는 것일까. 아필레는 아주 시골 동네이다. 우리나라 시골처럼 빈집도 많다고 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가족이 산책을 하는 작은 동네 아필레의 골목을 걷는 시간이 참 좋았다. 유모의 깨어진 채처럼, 작은 것으로 울고 웃는 우리의 일상이 기적이고 신비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동네였다. 이런 골목을 걷이 참 좋은 것은, 돌아갈 내 일상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아빠스, 연구소의 아빠스로 사는 일이 무겁고 좋다는 생각에 이르니 말이다.       

 

현승이가 고등학교 진학과 일 년 안식년 갖는 것을 두고 했던 고민이 생각난다. 성적으로 줄 세우고, 모두 한 곳을 목적하고 달리게 하는 학교의 시계를 잠깐 멈추자는 뜻이었다. 취지도 좋고, 누나의 경험을 봐도 좋은 것 같고, 무엇보다 일 년짜리 방학을 얻는다니, 이보다 좋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승이의 고민은 '회피'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공부도 싫고 경쟁도 싫고, 무엇보다 경쟁에서 이길 자신도 없으니 물러나는 것은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사람들, 은수자들, 로마를 떠나 수비아꼬 동굴로 들어간 베네딕토 성인이 어린 현승이 말에 빗대어졌다. 열여섯 현승이의 제 수준에서 고민은 그렇지만, 가던 길을 돌이켜 돌아가거나 남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이들의 고뇌가 있을 것이다. 드디어 박해시대가 끝나고 자유롭게 예수님 따르는 삶을 살 수 있게 된 때 자발적으로 사막을 향해 들어간 교부 교모들, 수도원으로 들어가거나 더 깊은 은수처로 들어가는 이들은 어떤 고뇌의 시간을 통과했을까. 순례단의 연세 높으신 어르신 한 분이 계신다. 따님이 수녀님이 되셨다고 한다. 대학, 대학원 다 마치고 어느 날 갑자기 "엄마 할 말이 있어"하고 방으로 부르더니 다짜고짜 수녀원에 가겠다 하셨다고. 순간 벽에 기대었던 몸이 스르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고.
 
수비아꼬 수도원은 로마를 떠난 베네딕토 성인이 3년간 은수생활을 했던 동굴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진 수도원이다. 지금은 "거룩한 동굴"이라는 뜻의 사끄로 스베꼬(Sacro Speco)로 불리는데, 가파른 절벽 가운데 있어서 사람이 접근하기 힘든 동굴이었다.  동굴이 딸린 절벽에 세워진 수도원인데, 어떻게 이런 건축이 가능했을까 싶다. 동굴생활을 시작하기 전 로마누스(Romanus)라는 수도자를 만났는데, 3년간 유일하게 접촉한 사람이다. 그 접촉이라 바구니에 줄을 달아 빵을 내려주는 정도였다. 그런 고독 속에서 기도로 지낸 3년이라니. 

 

깊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는 사람에게 유혹과 시련이 없을 수 없다. 로마가 아니라 은수처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은 가시밭길이다. 기도를 방해하기 위해서 악마의 방해공작이 있었다고 하는데, 빵이 왔음을 알리는 방울을 깨트리거나, '여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여 육적인 정욕'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주어를 악마로 표현하면 그렇지만, 홀로 물러나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욕구로 인한 어려움은 너무나 당연한 시련 아닌가. 은수처로 들어갔다고 했서 당장 식욕이, 성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나님 체험이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욕구를 붙들고 씨름하는 3년의 시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도원 안쪽 정원에 장미가 심겨 있다. 성인이 성적인 욕구를 물리치기 위해 가시밭에 몸을 뒹굴었다고 한다. 그 일화를 담은 상징으로 가시 달리 장미가 거기 있었다. 

 
은수생활은 결코 고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시밭에 뒹구는 몸과 영혼으로 치열한 시간 속에서 만난 하나님이었을 것이다. '자발적 물러남'은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을 향해 걸어들어가는 걸음이다. 연구소에서 함께 향심기도를 하고 있다. 20분 멈추고 기도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하면서 안다. 해보면 안다. 자발적으로 물러나 만나는 것은 '욕구 그 자체인 나'이고 거룩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은 나와의 대면이다. 그런 나를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야 하니 어떻게 사투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비아꼬 수도원에서는 두 번 머무르는 기회가 있었다. 첫날은 (이날따라 유난히 많았다는) 순례객에 떠밀려 그저 공간에 몸을 담갔다 나왔다. 심지어 동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수도원 호텔에서 일박을 하고 이른 아침 산책 나갔던 남편이 수도원에 올라갔다가 아무도 없이 홀로인 수도원을 누리고 왔다고 했다. 아, 아깝다! 글을 포기할걸! 한 번의 기회가 더 왔다. 가톨릭 신자들은 매일 미사를 드린다. 순례 중에도 매일 미사가 있다. 아침 9시, 수비아꼬 수도원 한 공간에서 미사가 있는데 어쩐지 들어가고 싶지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밖에서 기도하기로 했는데, 덕분에 나도 아무도 없는 동굴을, 수도원 이곳저곳을 누리며 기도할 수 있었다. 성인의 '자발적 물러남'에 대해 마음으로 물어보았다. 어떻게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기도할 수 있었는지, 물러나는 마음은 무엇이었는지. '자발적'인 힘은 분명 영혼으로부터 오는 것일 텐데 그의 영혼은 어떤 영혼일까. 내 영혼은 지금 어디를 어떻게 헤매고 있는 것일까.
 



자연의 동굴 그대로 두었더라면 내게는 더 좋았을 텐데, 그럴 리가 없다. 대리석 상이며 이것 저것으로 꾸며진 동굴이 나는 왠지 조금 슬프더라. 은수자로 물러나 사신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떠들고 있으니 뭔가 제대로 존중해 드리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발에 씌워진 강철 보호대는...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돌이 닳았기에 보호대를 씌운 것이다. 실제 성인의 몸이 아니지만, 보고 만지며 기도하려는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순례 신심을 이해한다. 붙들고 사진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붙들고 기도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저 까만 보호대가 성인의 뜻과는 다를 텐데, 싶으니 서글퍼지는 것이다. 
 
나도 무슨 짓을 했다. 수도원을 배경으로 <수도 규칙> 책 사진을 찍으려 들고 올라갔는데, 동굴 안의 성인 상 무릎에 두어 보았다. 감사의 표현이었다. 기도하고,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기도하며 쓰는 사람으로 평생 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신 자신이 되어 하나님 사랑을 꽃피우고 떠나 주셔서. 

 

혼자 나와 남편을 기다리는 중, 수사님 한 분이 걸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왔다갔다 기도하는 그분을 위해 나도 기도했다. 자발적인 물러남을 사는 이 시대 수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자발적으로 물러나 평생 기도하는 삶을 사는 그분들이 있어서 그나마 우리가 이 정도의 평화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SNS 보거나 폰에 빠진 것 같이 보이지만, 수도원 안내인의 설명을 열심히 필기하는 중이다.

 

스콜라티카 수도원, 수도원 순례기 다섯 번째만에 여성의 이름이 등장했다. 스콜라티카는 최초의 베네딕토 수녀원장이다. 스콜라티카 성녀의 이름이 붙여졌고, 성녀에게 봉헌되었을 뿐이지 그녀가 세웠거나 살았던 수도원은 아니다. 이 수도원은  베네딕토에 의해 세워진 12개의 수도원 중 첫 번째 수도원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수도원들이 그러하듯 전쟁으로 인해 파괴되고 복원되곤 하는데, 여기도 그 마지막 상흔은 세계대전이다.
 
이탈리아 최초의 인쇄소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독일 마인츠에서 구텐베르크와 일하던 두 명의 독일 수도사가 이곳에 와서 3년간(1465-1467) 머물면서 처음으로 네 권의 책을 인쇄했다고 한다. 안내하는 분은 아주 빠르게 지나치듯 언급했지만, 최초의 인쇄, 수도원에서의 인쇄는 특별한 의미였을 것이다. 중세 수도원과 수도사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가 '필사'였기 때문이다. 필사 자체가 영적 수련이며, 필사된 서적을 보관한 수도원 도서관은  중세 시대 지성과 영성을 담고 보존하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수도원 이름으로 등장한 성녀 스콜라티카의 개인 신상을 공개할 차례이다. 스콜라티카는 성 베네딕토의 쌍둥이 여동생이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을 뿐 아니라 많은 동생들이 그러하듯 오빠가 하는 것은 다 좋아 보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오빠가 로마 유학 중 겪은 실망과 환멸로 거기를 떠나 수비아코의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할 때도 스콜라티카 역시 근처 수도원에서 생활하였다고 한다. 오빠를 좋아하는 동생, 오빠와 사이좋은 동생이니 그리했을 것 같지 않은가.

육안으로 볼 때 참 아름다운 회랑인데, 사진을 찍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빛과 그림자에 주목하여 그림자가 충분히 담길 때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내 교회의 그림자, 그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끌어는 것이 내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일이다.

 

인상 깊은 일화가 하나 있다. 남매는 각각 수도원장과 수녀원장으로 지내면서 일 년에 한 번 어느 농가에서 만나곤 했다고 한다. 동생 스콜라티카 성녀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알고 오빠에게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자고 청했단다. 그러나 수도원 밖에서 잠을 자는 것이 규칙 상 허락되지 않는다며 오빠는 단호하게 떠나려 했다. (자신이 만든 규칙이었기에, 누구보다 엄격하게 지키려 했을 테니까) 오빠와 더 대화하고 싶었던 동생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게 된다. 그러자 날씨가 험악해져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오빠 일행은 수도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동생의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와 며칠 되지 않아 베네딕토는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동생의 죽음을 느낀다. 곧바로 동생의 시신을 모셔와 자신의 무덤으로 준비했던 몬테카시노 수도원 무덤에 안장하였다. 남매는 죽어서 나란히 한 곳에 묻혀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남매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남매가 서로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런 나란한 수도자의 삶과 여정 이야기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 봉헌된 오빠를 좋아하고 따르는 동생, 동생을 지극히 사랑하지만 하나님께 부름 받은 소명 안에서의 한계를 살려는 오빠.

 

순례의 시간과 여정이 길어지고 깊어지면서 짧게나마 함께 한 분들의 개인적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전부 가톨릭 신자이고, 난생처음 목사 부부와 가까이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열심 있는 개신교 신자들의 지나친 열정, 특권 의식으로 상처받는 가족들은 흔하다. 우리로 치면 말없이 착한, 조용히 하나님 사랑하는 권사님 같은 한 분이 계시다. 교회 일이 있다고 가족 모임은 등한시하고 얼굴도 비치지 않는 가족 개신교인 가족 이야기를 하신다. 눈물을 찍어내며 드문드문 이어가는 말씀을 듣자니, 단지 가족 모임에 오지 않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그냥 존중해 주면 좋겠어요." 누나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어떤 폭력적인 말들을 할지, 내 주변 어떤 교인들의 말을 떠올리면 금방 상상할 수 있다. 개신교인 가족, 개신교인 친구에게 받은 상처를 들으며 나라도 엎드려 사과하고 싶은 마음이다. 결국 기습 생일 축하 노래로 축하받은 남편이 "제가 사과하겠습니다."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목사라는 가족의 대소사를 다른 형제자매에게 떠넘기고도 당당한 이들로 상처받은 사람 또한 흔하다. 물론 목사라는 '직업'은 결혼식이 있고, 가족 모임이 흔한 주말이 제일 바쁘고, 장례가 나면 휴가 중에도 복귀해야 하는 그런 '직업'이다. 직업으로선 그렇다. 남편은 어릴 적 친구 모임의 걸림돌이 되곤 한다. 모두 일하는 월요일에 쉬니 말이다. 우리 가족 때문에 시가의 가족 모임 시간 잡는 것이 늘 조금씩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직업, 서있는 위치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은 목사 아니라 누구도 가진 한계이다.
 
봉헌된 삶, 하나님께 드려진 삶은 결국 사람에게 드려진 삶이다. 하나님 일이라 퉁쳐서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성직은 없다. 동생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에 단호할 수밖에 없었던 베네딕토 오빠였을 것이다. 동생을 위한 선택이기도 하다. 오빠로서 오빠의 자리에 진정성 있게 충실한 것은, 오빠의 뒤를 따르는 동생을 위한 최선의 사랑일 수 있다. 문제는 사랑이다. 오빠를 조르는 동생 역시도 사랑이었으니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알아주셨을 것이고. 봉헌된 삶은 특혜를 누리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 봉헌된 사람은 사랑에 봉헌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차별하고 혐오한다면 그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고, 사랑을 모르는 사람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성 베네딕토와 성 스콜라티카 남매의 사랑 이야기에 마음을 적신다. 편 가르고, 특권의식에 휩싸여 배제하고 혐오하는 부끄러운 내 마음 정화되기를.
 
 

수비야꼬 수도원의 아침, 선물같은 고요한 시간을 얻었다. 순례객 하나 없는 공간에서 가만히 머무르는 기도를, 베네딕토 성인의 은수동굴에서 남편과 둘이 오늘의 말씀 읽기, 그리고 진짜 선물이 왔다.

새가 한 마리 날기에 “쟤 지금 나한테 오는 거다!” 했더니 진짜 얘가 내 앞에서 왔다 갔다, 갔다가 다시 오고, 왔다가 다시 가고. 오늘도 새는 내게 그분의 메신저. “나 여기 있다.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너 있는 곳엔 어디나 내가 있다!” 말씀하신다.

오후 순례는 파르파 수도원이었다. 순례 시간 변경으로 갑자기 자유시간이 생겼는데, 이 얼마나 꿀같은 시간인가. 수도원 앞 벤치에 앉아 지금 여기의 바람과 햇살에 무장해제 상태인데, 갑자기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튀어나온 고양이 ‘지지’ 같은 애가 쓰윽 다가와 친한 척을 하는 것. 내내 곁에 앉았다 내가 일어나니 저도 일어나 또 다른 애인을 찾아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났다.

지금 여기 선물의 완성은 “아이”이지! 엄마 아빠와 함께 온 아이가 아침에 본 새처럼 제 엄마에게 뛰어 갔다 도망갔다 하는 것이 새보다 사랑스럽고, 고양이와 비할 수 없이 예쁘다.

얘, 키키의 고양이 지지같이 생김 이렇게 막 스킨십도 시도하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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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창너머 산 위에 보이는, 호텔 수영장에 비쳐서 보이는 몬테카시노 수도원 찾기!

 
베네딕토 성인이 정착하여 살다가 묻힌 곳, 베네딕토회의 모체이며 서방 수도회의 모델이 되는 수도원인 몬테카시노 수도원이다. 글로만 보던 베네딕토 성인의 삶과 영성을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처음 순례지 카사마리 수도원에서의 감흥이 가시지 않은 채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향했다. 지도책에서 본 것을 눈앞에서 바로바로 찾아내는 JP가 산꼭대기를 가리켰다. 거기 산꼭대기에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보였다. 와아, 저기로 올라가는 거야! 저기야, 저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식상한 말은 꼭 이렇게 튀어나오곤 한다니까. 글로 보면서 한참 가까워진 베네딕토 성인이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에는 없었다.

 

로마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읽은 책은 <베메딕토 수도 규칙>이었다. 비행기 독서는 집중력과 이해력이 덜 필요한 소설 정도가 적당한데 무려 ‘교부 분헌 총서’로 발간된 책을 읽은 것이다. 읽힌다는 뜻이다. 술술 읽힌다는 뜻이다. 6세기에 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분명 성인이 이루고자 하는 수도 공동체의 이상은 높은데, 실천할 것들은 구체적이고 섬세하다. 숲과 함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보여주는 느낌이다. 이런 식이다.

식탐이 있거나 식사량이 많지도 않는 남편인데 나이가 들면서 전 같지 않다. 가만 두면 계속 먹는 아저씨가 되어간다. 남기기 아까우니 먹어 치우겠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뜻인기 싶고. 아무튼 비행기 안에서 나오는 식사, 간식을 남기지 않아도 탈탈 털어먹는 것이다. 거기 엮여 이건 남겨라, 저것만 먹어라, 잔소리하는 나도 싫고. 그런데 마침 읽고 있던 <수도 규칙>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옆구리 쿡쿡 찔리서 보여주었다. 큭큭거리며 알겠단다. 말이 필요 없는 가르침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과식을 피해 수도승이 결코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과식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다. ‘여러분의 마음이 과식으로 무뎌지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수도 규칙> 39장 '음식의 분량'

성화에서 베네딕토 성인을 찾는 방법은 손에 든 규칙서이다.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써서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3년의 은수생활, 수도원 창설, 기도 생활… 그 모든 것보다, 아니  모든 것을 담은 규칙서를 만들고 문서로 남겼기에 베네딕토 성인이 베네딕토 성인 된 것 아닌가. 왜 굳이 그는 수도승들을 위한 규칙서를 만들었을까?

베네딕도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갔을 때 비꼬바꼬( Vicovaro) 수도원으로부터 수도원장으로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처음엔 사양했지만 거듭되는 요청에 못 이겨 수락하게 되었다. 수도생활을 바로잡고자 하는 원장 베네딕토의 엄격함이 지나치다는 불만이 생기기 시작하고, 불만은 불만에 그치지 않았다. 베네딕토를 독살하려는 음모가 꾸며진 것이다. 성인전에는 기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는데, 암살을 위해 독이 든 포도주가 만들어졌고, 베네딕토 성인이 포도주에 강복하자 그 잔이 깨졌다는 것이다. <수도 규칙>을 번역 주해한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비꼬바로에서의 이 사건은 앞으로 자신의 공동체를 지도하게 될 베네딕도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었을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수도 이상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회심의 노력이 없는 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그는 후에 그의 규칙서 여러 여러 곳에서 개인적인 수덕 노력과 형제들의 상호 교정을 강조하면서 악습을 고치는 일과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말이 그렇지 얼마나 큰 충격이겠는가. 청운의 꿈을 안고 로마로 갔던 일, 거기서 느낀 환멸과 그로 인해 선택한 은수생활, 그로 인한 하나님 체험을 가르치고 나눌 공동체라 여겼을 텐데. 여러 이유로 거절했지만 결국 가야 했던 그 자리에서 이루고 싶은, 이룰 수 있다 여긴 수도 공동체였을 것이다. 배우고 따르기는커녕 뒤에서 독살 계획을 도모했다는 사실을 알고 받았을 충격 말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서방 수도원 영성의 아버지'가 된 베네딕토는 깨달은 것이다. " 아무리 훌륭한 수도 이상을 제시한다 하더라도 그 구성원들의 근본적인 회심의 노력이 없는 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덕에 지금 우리 손에 <수도 규칙>이 들려져 있는 것 아닌가. 그로 인해 '서방 수도원 영성'의 아버지로 우뚝 서 있는 것 아닌가. 뼈아픈 체험 속에서 숲과 함께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까지 보여주는 <수도 규칙>이 나왔구나 싶다.  

몬테카시노 수도원은 이후 역사 속에서 네 번의 큰 시련을 겪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577년 롱고바르도족의 침입으로, 두 번째는 883년 사라센의 침입으로, 세 번째는 1349년 대지진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2월 18일 연합군의 리더인 미군이 당시 이곳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하는 독일군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1250톤의 폭탄을 투하하여 수도원의 거의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예전의 모습으로 복원된 상태이다. 

 

사람의 손으로 지어놓은 수도원 건물의 스러짐을 막을 방법이 있겠는가. 세월의 흐름으로 부식되고, 전쟁으로 파괴된다. 마음에 지어진 성전만이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는다. 몬테카시노에서 <수도 규칙>을 쓰던 성 베네딕토를 만나지는 못했지만, 기대했는데 없었기에 내 마음에 더욱 농익혀 그분의 마음을 느껴볼 수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공동체에 대한 열정을, 좌절을, 물러남을, 나아가고 실패하는 여정을. 그 모든 것이 담겨 지금 내 손에 주어진 <수도 규칙> 한 권이다. 6세기, 여기 몬테카시노에서 규칙서를 만들고, 고치고, 썼을 성 베네딕토를 생각한다.  

 

* 순례 일정 중 순례기 쓰는 일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는 수도원 호텔이라 와이파이도 안 됨) 그럼에도 결국 써서 남겨주신 6세기 성인의 열정을 이어받아 어떻게든 이어가 보기로 한다. (이 연재 재밌는 분? 응원 필요함!)

 


 
 

 수도원의 밤이 깊어간다. 옆 침대에는 아주 특별한 생일축하를 받은 목사가 쌕쌕 깊이 잠들어 있다. 남편 생일인데, 서프라이즈로 케이크라도 준비하고 싶었지만, 산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에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어쩌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생일인 것이 알려졌다. "그리고 오늘 순례에 함께 하신 김종필 목사님의 귀 빠진 날이랍니다."는 말이 마치자마자 생일축하 노래가 떼창으로 발사되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목. 사. 님. 생일 축하합니다. 
 
교회 교우에들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떼창 생일축하 노래를 가톨릭 신자들의 목소리로 들었다. "사랑하는 신부님"이 아니라 사랑하는 "목사님"이라고 노래하는 가톨릭 형제자매들이라니! 사랑하는 목사님...이라니! 

 
한 마디 하라는 말에 남편이 일어나 멋진 생일축하 답사를 했다. "여기 와서 여러분들과 얘기 나누다보니 개신교인들에게 상처받으신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대표로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희 교회에 가서 잘 가르치고 더 잘하겠습니다." 했다.

담을 넘어온 순례 여행은
아프더라도 꼭 들어야 할 말을 듣는 기회,
특별한 생일축하를 받는 기회,
한 분 하나님을 믿는 하나의 교회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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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1217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하는 이탈리아 라치오주 프로시노네 지방에 있는 카사마리 시토회 수도원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인데, 첫 순례지는 시토회 수도원인 카사마리(Abbazia di Casamari)이다. 시토회라니. 내게 수도원은 시토회(트라피스트) 수도원이다. 어째서 그러한지, 내 비밀 같은 이야기를 차차 풀어놓으려고 한다. (오늘 이야기가 다가 아니라는 뜻이다.)

들꽃은 어디나 있다. 개망초를 닮은 이 꽃의 이름은 '봄망초'이다.

 
나를 알고 남편을 아는 지인들은 '수도원 순례 여행' 간다는 말에 끄덕끄덕 하며 부럽다고 한다. 순례단에서는 신기한 일로 여긴다. 개신교인이, 그것도 목사 부부가 어떻게 여기를 함께 하느냐고.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 안면을 트고 대화가 길어지면서 듣고 또 듣는 질문이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수도원 영성이 내 마음에 훅 들어온 것은 대학원에서 '영성신학' 과목을 듣던 그때였다. 생 티어리의 기욤<Guillaume de Saint-Thierry 1085-1149) 저작 『황금서간』을 한 학기 묵상 과제로 받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과제 앞에 '묵상'은 내가 붙인 것이다. 주욱 읽고 리포트 쓸 책이 아니었다. 한 학기 내내 영적 독서로 정하고 아침마다 한 절씩 읽으며 묵상하게 되었고, 그 책이 내 마음을 적셨다. 
 
이 책으로 쓰신 교수 신부님의 논문은 오늘날의 신학에 대한 성찰로 시작한다. "모든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과 어떻게 함께 하시는지 말해야 하고, 또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지 길을 제시해야 하는데 오늘의 신학은 자신이 ‘학문’인 점을 강조하고 있을 뿐, 하느님과 사람 사이 가교임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삶과 분리되어 사변적 학문에 머무르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시대는 바야흐로 영적인 시대가 되었고,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영적 갈망은 커지는데, 삶과 분리된 신학은 신자들의 영적 갈망을 채워주기는커녕 진정한 내적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양식을 전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사변적인 신학들이 진정한 내적 인간 양식을 전해주기는커녕, 내적 인간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아닐까 생각한다. 
 
논문을 읽고 공부하면서 영성과 신학 사이에서 내가 느끼는 어려움이 오늘의 일이 아닌 것을 알고 놀랐다. 12세기 스콜라신학이 등장하면서 수도신학과의 논쟁과 시대적 정황 속에서 어떻게 사변신학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는지 공부하며 수도원 영성에 깊이 매료되기 시작한 것이다. 생 티어리의 기욤은 스콜라 신학의 시작점에 있었던 아벨라르두스와의 논쟁했던 (당시)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논증''을 통해 삼위일체를 증명하고자 했던 아벨라르두스와의 눈쟁에서 결국 이기게 된다. 논쟁에서 이겼고, 결국 아벨라르두스는 패자가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12세기 이후 스콜라신학이 신학의 주류가 되었고,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스콜라신학, 즉 학교신학을 배우기 위해 사람들이 성당이나 수도원으로 모여들고 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수도자들의 일이 되었다. 수도자들은 학교를 운영해야 했고, 병자를 돌본다거나 다양한 일을 집행해야 했다. 이렇듯 일이 많아지자 수도자들은 독방에 머무르면서 고요히 기도하는 것에 방해를 받게 되었다. 이때, 스콜라신학과 강의로 인기를 얻는 세속 성직자의 도전으로 인해 수도자들은 그동한 해오던 교육 사업으로부터 물러날 뿐 아니라, 교육에 대해 등을 돌리기까지 하는 수도원들이 생겼다. 특히 12세기 수도원 개혁에 앞장섰던 시토회에서는 세상에서 더욱 물러나 광야에 자리를 잡고, 다른 일보다 손으로 하는 노동과 함께 기도하며 살게 된다. 외적인 학교를 배제하고 내적인 학교를 사는 것으로 전향한 것이다. 
 
생티어리의 기욤은 시토회 개혁을 주도하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친구였다. 윌리엄은 1119년 생티에리 대수도원의 수도원장에 선출되자 행정보다는 명상과 저술에 몰두하고자 했지만, 친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의 권고를 받고서 그 직위를 지켰다. 결국 이후에 베네딕토회를 나와 시토회로 입회하였다. 『황금서간』은 카르투지오 수도회 소속의 수도원을 방문한 뒤 거기 수도사들에게 쓴 편지이다. <몽디외 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데, 관상생활에 말 그대로 황금 같이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기에 '황금의 편지'로 불렸다. 12세기 쓰인 이 책을 한 학기 동안 읽고 기도하면서 '영적 독서'가 어떻게 기도인지 체험했다. 내적 인간을 위한 거룩한 수업을 받게 된 것이다.


『황금서간』은 아침마다 내게 마음의 '독방'으로 들어가라 가르쳤다. 수도원의 독방은 내적인 독방이라고. 거기는 하나님과의 비밀 같은 사랑을 간직한 곳이다. 내게 그런 독방이 있다. 카사마리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앉아 드리는 짧은 기도가 우리 집 거실에 앉아 드리는 기도와 다르지 않으니 내가 가는 곳이 그 방이다. 


수도원 수사님께 직접 안내를 받는 행운을 누렸다. 중세 수도원에 관해 책으로 배운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귀로 듣는 흥미진진한 시간이었다. 내게는 흥미진진이었는데, 일행들은 슬슬 자리 이탈을 하기도 했다. 식사하며 들으니 지루한 내용 듣는 것이 힘들었고, 빨리 끝내길 바라면서 "이제 그만!"을 여러 번 외쳤다고 한다. 그러며 열심히 듣고 메모하는 개신교 신자를 보고 반성했다고도. 아, 내가 불안하면 남도 불안한 줄 아는 것처럼 내가 재밌으면 다른 사람도 재밌는 줄 아는 게 '내 중심' 사고라니까! 자신이 살고 있는 집, 그 집의 역사를 들려주는 재미에 아이처럼 신이 난  수사님이 귀여웠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100여 명이 살았는데, 지금은 15명의 수사님들이 살고 있다고. 이 넓은 집에서 15명이 사니, 그 집을 찾은 이들에게 영광스러운 역사를 들려주는데 신이 나지 않겠나. 그리고 내가 가장 가깝게 느끼는 시토회의 저 수도복... 용기 내어 사진 한 장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수사님들이 모여서 <베네딕토 수도규칙>을 읽었다는 방의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왼쪽은 베데딕토 성인, 오른쪽은 딱 봐도 시토회의 사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나는 이 두 분을 알고, 내가 이분들을 알기에 이분들도 나를 알 것이다. 내가 수도원에 닿은 이야기, 지금 여기 이탈리아에 있는 이야기는 1500년, 900여 년 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던 이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바로 그 이야기이다. 

 

로마에 온 걸 환영한다니! 내가 로마에 왔구나! 순례 일정 중 분명 로마가 끼어 있는데 얼마나 안중에 없었는지,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도착하여 "Welcom to Rome"이란 전광판 글씨를 보고 "아, 나 로마에 온 거지... 로마행 비행기였어..." 싶었다. 이탈리아 독일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이다. '수도원'과 '베네딕토'에만 온통 집중하고 있어서 로마 일정은 보고도 본 게 아니었다. 
 
남편의 안식월과 결혼 25주년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는 긴 여행을 잡기 딱 좋은 시기였다.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남편에게 온전히 3개월 '홀로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어떤 여행이든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있겠는가 싶(은 쿨한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 25년 만에)었다. 실은 그 와중에 내겐  '수도원 순례 여행' 씨앗이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에서 주관하는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였으니.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 '수도원 순례 여행'에 함께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닌 '렉시오 디비나'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수도원 전통에 따른 렉시오 디비나'이다. 단순히 영성사가 아니라 말씀 묵상의 역사를 따라 올라가도 결국 이 수도원 전통과 닿아 있다는 것. 아마도 그것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그렇게 결혼 25주년 기념 여행은 '베네딕토 수도원 순례 여행'으로 정해졌고, 나는 지금 로마에 와 있다.
 
누르시아의 베네딕토는 "서방 수도생활의 아버지"라 불린다. 물론 베네딕토 수도회의 창설자이다. 무엇보다 오늘 날 많은 수도회들이 따르고 있는 <베네딕토의 규칙서>를 지어 문서로 남긴 것이 수도 생활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이 규칙서를 읽으며 깜짝 놀랐다. 6세기에 쓰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공동체로 사는 삶과 관계에 대해 주는 지침이 놀랍도록 섬세하다. 긴 여행에는 여러 권의 책을 심혈을 기울여 선택해서 가져오곤 하는데, 이번엔 거의 <베네딕토 규칙서> 한 권, 원 픽이다.
 
3년의 은수생활로 성 베네딕토는 오히려 유명해졌는데(은수, 숨어서 혼자 지내는 데 유명해지다니 말이다.) 은수생활 이전의 로마 유학 생활이 있었다는 것이 내게는 인상적이다. 학업을 위해 로마로 갔던 베네딕토 성인은 타락한 정치와 교회, 환락과 퇴폐로 물든 로마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그곳을 떠나 수비아코(Subiaco) 계곡의 동굴에서 은수생활을 하고, 거기서 하나님 체험을 하게 된다.
 
베네딕토의 여정에 몰입한 탓일까. 로마에 끌리지 않았다. 어서 몬테카시노(Montecassino) 수도원으로 날아가 그 회랑과 정원을 걸으며, 성당에 오래 앉아 기도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로마가 환영한단다. 은수처의 기도 이전에 학업의 꿈을 품고 갔던 로마가 있었고, 화려하고 풍요롭고 타락한 로마를 살았기에 환멸을 느끼기도 하였고, 떠나기도 하여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오늘 내 손에 남겨주신 베네딕토 성인이 되었다.
 
Welcome to Rome!
로마가 환영한단다. 나도 로마를 환영하기로 한다. 7시 30분 로마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에 내려 어두워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어느 호텔에서 순례 여행 첫밤을 맞는다. 하루가 공중에 붕 떠서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르겠는 몸으로 로마의 밤을 맞았다. 물론 잠은 오지 않고. 덕분에 1일 차 순례기를 썼고, 두어 시간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겠는데.   

 

 

"당신도 이렇게 멀리 어디를 갈 때 그런 생각 들어?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아니, 전혀! 가는 곳을 생각하느라 그럴 겨를 없는데." 의외였다. 남편이 금요기도회를 인도하고 집에 오는 길, 급성 게실염으로 응급실로 가서 바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입원실 침대 밑에 놓인 구두를 보고 "어느 날은 신발을 신고 집에서 나와 다시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지지 못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다며 성찰한 내용을 설교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까지는 아니어도, 엇비슷한 느낌은 있을 줄 알았다. 전혀!란다. 순간 이 며칠, 아니 어디 떠날 때마다 무거워지는 내 마음이 새롭게 알아차려졌다.
 
어제 채윤이와 작은 다툼이 있었다.  "당신도 이렇게 멀리 어디를 갈 때 그런 생각들어?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런 생각..." "아니, 전혀! 가는 곳을 생각하느라 그럴 겨를 없는데." 의외였다. 남편이 금요기도회를 인도하고 집에 오는 길, 급성 게실염으로 응급실로 가서 바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입원실 침대 밑에 놓인 구두를 보고 "어느 날은 신발을 신고 집에서 나와 다시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지지 못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다며 성찰한 내용을 설교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내가 느끼는 두려움까지는 아니어도, 엇비슷한 느낌은 있을 줄 알았다. 전혀!란다. 이 며칠, 아니 어디 떠날 때마다 무거워지는 내 마음이 새롭게 보인다. 내가 그러면 남도 다 그런 줄 아는 게 인간이구나.
 
좋은 여행을 앞두고 설레는 적이 거의 없다. 꿈에 그리던 수도원 성지 순례이고, 그저 짐만 싸면 되는, 난생처음 해보는 패키지여행이다.. 가서 해야 할 강의도 없고, 마지막까지 붙들고 끙끙거릴 원고도 없었다. 마침 집단여정 네 그룹도 모두 종강을 하고 여행 전 한 주는 헐렁한 날들이었다. 그럼에도 떠날 날이 다가오면 마음에 먹구름 한 장이 드리워 일상이 묵직해진다. 오래도록 내 몸에 딱 붙어 있던 느낌이라 새롭지도 않다. 그런데 내 것이었구나. 나만의 것이었구나. 여행 출발은 고사하고 달력의 빨간 날만 봐도 설렌다는 연구소 은경샘의 말이 동화 속 대사처럼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어제 채윤이와 작은 다툼이 있었다. 다툼이랄 것도 없다. 내가 괜히 아이 마음을 상하게 했다. 아빠 생일 선물로 아이들이 바지를 하나 사주기로 했는데, 미리 봐둔 바지를 사러 아빠와 딸이 나갔다. 채윤이가 거기 어울리는 남방을 골라 사주고는 둘이 기분 좋게 들어왔다. 내 눈엔 사이즈가 커 보이는데 오버사이즈로 입는 거란다. 내가 볼 때는 아빠 스타일이 아니라는 둥, 불필요한 말을 해댔다. 아이 표정이 안 좋아지는 걸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채윤이 엄마는 늘 이런 식이지!) “엄마 눈이 문제야. 미안해.” 뒤늦은 사과와 수습을 했고, 잠들기 전 채윤이도 “엄마 내가 아까 과했어.”라고도 했지만, 오늘 아침 집을 나설 때까지, 아니 지금까지 마음이 썩 개운하지 않았다.
 
공항에서 모든 수속을 마치고 아침 식사를 하러 앉았는데, 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채윤이와의 마지막 시간은 이 감정일 텐데, 하는 생각에 미쳐 남편에게 물은 것이다. 지나친 상상이며 비합리적 걱정인 것을 알기에 질문이 나왔겠지.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흐릿하게 남아 있다. 흐릿하지만 또렷하다고나 할까. 흐릿한데 마음에서 지워진 적은 없는 느낌이다. 서울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새벽밥을 드시고 나갔던 그 겨울의 밤 같은 새벽. 밖이 아직 캄캄했었다. 나갔던 아버지가 다시 돌아와 모자를 달라고 했다. 현관으로 다시 들어선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의 신발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먼 여행을 떠나는 사람, 멀리 떠나는 아버지나 엄마는,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는 이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란 상상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버릇이 있(었구나를 이제 다시 알겠)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처럼 흐릿하지만 지워진 적은 없는 상상이다.
 
남편이 말했던 '내 구두를 신고 집에 돌아가지 못할 날이 있겠구나!' 하고 깨달은 것은 어른의 기억이며 의식적 성찰이고, 멀리 갔다 집에 돌아오지 못한 아버지는 존재의 흠처럼 남은 정서적 기억이다. 거기로부터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야말로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다.. 무의식적 신념은 힘이 세다. 이름을 붙이지 못할 때는 더욱 그렇다. 좋은 여행을 앞두고 좋아하고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 준비할 것이 많네, 가기 전에 처리할 일이 수두룩 하네, 징징거리며 투덜대며 두려움의 버튼만 눌러대는 것이다.
 
공항이다. 먹구름에 이름을 붙이고 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익숙한 슬픔이 다시 밀려온다. 이것 그대로 가지고 떠난다. 이탈리아나 독일 수도원 어느 곳에 두고 집으로 올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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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 그린 새와 새, 올 봄 내게 어린 시절 여행과 함께 새로운 체험을 선사한 군산 이미지의 카드이다.

 
스승의 날을 기억하고 챙기는 간절한 감사의 마음을 안다. 선물이든 메시지든 말 한 마디든, 표현하지 못한 마음 가득 안고 지내는 시간이든… 일 년이 금방 다시 돌아와 “올해는 무슨 선물을 하지?” 하는 고민조차도 스승님에 대한 곡진한 감사이다. 챙기는 마음은 편하고 행복한데, 챙김 받는 일은 조금 무겁다. 예수님께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하셨으니 더욱 그렇다.

그것은 안다. 누군가를 존경하거나 선망하는 그 마음은 이미 자기 것이라는 걸. 그분들 안에 있는 것을 비추어 드리는 것이라면 기꺼이 감당할 만한 일이다. 다만 그것이 투사라 하여 진실이 아닌 것도 아니고, 가벼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받는 만큼의 무거움을 잊지 않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감사한 선생님들을 떠올리고, 감사의 마음을 받으며 존 헨리 뉴먼의 기도를 떠올리고 간절하게 드린다.
 
“진리의 빛을 구하는 기도”

 
사랑하는 주님,
제가 가는 곳마다 당신 향기를 퍼뜨리도록 도와주소서.
제 영혼에 당신 영과 생명이 흘러넘치게 하소서.
저의 삶 전부가 오직 당신의 찬란한 빛이 되도록 저의 온 존재에 속속들이 스며드소서.
저를 통해 빛을 비추시고 저를 만나는 이들은 누구나 제 영혼 안에서 당신 현존을 느끼도록 제 안에 머무소서.
오, 주님, 그들이 눈을 들어 볼 때 더 이상 제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만을 보게 하소서.
저와 함께 머무시면 저는 당신처럼 환해지리다.
주님, 그 빛은 오로지 당신한테서 나오며
제 빛은 조금도 없나이다.
저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빛을 주시는 분은 당신입니다.
당신께서 저를 둘러싼 이들에게 빛을 비추심으로써
가장 큰 사랑을 주시는 것처럼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설교하지 않고 당신을 전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모범으로,
전염시키는 힘으로,
제가 하는 일에 공감하는 영향력으로,
당신을 향한 제 사랑의 명백한 충만함으로
당신을 보여주게 하소서. 아멘.

카내이션이 두 송이라 잘못 넣었나 싶었는데, 하나는 소장님, 또 하나는 온라인 예배 드리며 감사했던 목사님 것이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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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반구의 하늘나라  (2) 2024.03.21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하여 잠시 성북천을 걸었다. 길 오른쪽에는 심긴 꽃들이, 왼쪽에는 자라난 꽃들이 피어있다. 산책길을 화려하게 하며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개종된 품종의 작은 장미이지만 나는 왼쪽이다. 오늘은 이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할 수 있었다. 콩다닥냉이. 어쩌면 이렇게 이름도 귀여운 것이냐. 길에서 꽃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모든 들꽃과 눈을 맞출 수 있다. 꽃마리는 들꽃 중에 아주 작은 들꽃이기 때문이다.

내게 꽃마리를 발견하는 눈을 뜨게 해 준 사람은 '꽃마리'이다. 꽃마리라는 별칭을 쓰는 나음터 벗 순연 샘이다. 어느 날 홀연히 내적 여정에 나타나 꾸미지 않고 자기를 보여주더니, 글쓰기 여정을 두 번 반복해서 듣더니, 꿈여정까지 깊이 들어왔다. 평생 "그러니까 너도 써라, 그러니까 당신도 써라"를 주문처럼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은 쓴다. 어떤 사람만 쓴다. 꽃마리는 쓰는 사람 중에 하나였다.  멈추지 않고 손에 모터를 단 듯 써 내려가는 글은 길이 되었다. 꿈을 꾸고, 꿈을 적고, 꿈을 나누고, 다시 글을 쓰고... 기도하고, 향심기도 하고... 기도로 깨달은 바를 실행하고... 그렇게 글이 낸 길을 따라가다 아버지를 만나 화해하고, 화해한 상태로 천국에 보내드린 꽃마리의 시간이 내겐 잊을 수 없는 카이로스이다. 
 

옛날 집 개조한 카페 작은 마루에 앉아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와 함께 나온 게 쿠키도 아니고 떡도 아니고 딸기였다! 이런 조합이라니! 커피와 딸기, 뭔가 순연샘스러운 느낌 같기도 하고.

 

이번 텀 꿈여정 끝나면 데이트 신청을 하려 했다는 말에 반가웠다. 글이 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행동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옳고 그른 행동은 없다. 직장을 적극적으로 구하는 행동일 수도, 그만두는 행동일 수도 있다. 꽃마리가 여차저차 교회를 옮겼다는데, 가만 들어보니 내가 아는 교회이다. "커피, 에니어그램, 향심기도, 이 모든 것을 일상 안에서!" 내가 교회를 한다면 이런 게 어우러질 텐데, 바로 그런 교회였다. 물론 나는 교회를 할 수도 없고, 이런 교회를 꿈꾸지도 않는다. 다만, 있다면 반갑고, 이런 교회 하나 쯤은 있어야지 생각한다. 남편 안식월 찬스를 쓰는 중이니, 어느 교회나 갈 수 있다. 주일에 꽃마리와 만나 데이트를 하고 데이트의 끝은 예배로 하기로 정했다. 
 
교회 옮긴 이야기를 들려주며 "나리(순연 샘이 꽃마리일 때 나는 나리이다.) 를 통해 여성적 리더십을 경험한 이후에 설교나 교회의 어떤 것들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어요."라고 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말이다. <신앙 사춘기> 출간이 남긴 책무감 비슷한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단지 교회를 비판하고, 목사를 혐오하고, 하나님께 대들자는 선동이 아니었는데. 글이 그렇게 소비되는 면이 있었다. 사춘기는 필요하다, 사춘기를 통과하며 어른이 된다, 신앙 여정에서 열정이 식을 때도 있고 삐뚤어지는 마음이 될 때도 있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때 삐딱함은 믿음 없음도 아니고... 무엇보다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려던 것이었다. 교회를 비판하고 목회자를 혐오하며 평생 신앙 사춘기로 살기로 작정한 이들에게 괜한 무기를 공급한 것은 아닌지 싶을 때가 있다. 
 
꽃마리와 함께 예배 드리며 "여기는 꽃마리를 위한 교회구나!" 싶었다. 안심이 되었다. 단지 교회가 꽃마리에게 무엇을 해줄 것 같아서가 아니다. 꽃마리의 마음에 이미 어떤 교회가 잘 세워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 교회가 추구하는 영성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고 알아듣는 사람이 꽃마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만 알까? 꽃마리 자신이 알아야 하는데... 자신이 걸어온 길, 여태껏 해왔던 선택들이 선하고 아름다웠다는 것을, 아름답다는 것을 믿어줘야 하는데... 또 한 번의 자기 다운 삶을 위해 떠나고 안착할 8월의 꽃마리를 응원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예배 중 여러 번 떼제 찬양을 불렀다. 떼제 찬양 좋아하는데, 마지막에 부른 찬송가 221장에 받은 은혜가 크다. 구절구절이 마음에 박혀 눈물이 났다.
 

주 믿는 형제들 사랑의 사귐은
천국의 교제 같으니 참 좋은 친교라

하나님 보좌 앞 다 기도 드리니
우리의 믿음 소망이 주 안에 하나라

피차에 슬픔과 수고를 나누고
늘 동고동락 하면서 참 사랑 나누네

또 이별할 때에 맘 비록 슬퍼도
주 안에 교제하면서 또다시 만나리

 

꽃마리와 함께 보낸 주일 한 나절의 식사와 커피, 예배가 천국의 교제 같은 참 좋은 친교였다. 믿음과 소망, 교회와 공동체가 일치하는 '하나'인 시간이었다. 체험의 교회였다. 반짝 빛나는 체험의 교회가 우리 사이에 세워졌었다. 마지막 절을 부르는데 더욱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이별은 참 슬프지. 오늘 우리가 체험한 이 교회는 다시 카피할 수는 없지. 각자의 교회를 잘 살기를. 교회가 내게 주는 것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분께서 주시는 힘으로 때로 교회보다 큰 존재로 살아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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