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아주 모처럼 네 식구 여유롭게 식사하는 주일 저녁이었다. 한동안 밖으로 나돌던 채윤이, 뭘 해줄까? 벌써부터 나는 (행복한) 고민이었는데. "나는 주일 저녁에 피자 먹을 거야. 도미노 피자... 너무 먹고 싶었어!" 라니. 이게 무슨 고마운 메뉴 선정인가! 나는 정말 행복하였다. 피자 치킨 후에는 꼭 라면을 끓이는 사람들이라... 피자로 노고를 덜었으니 정성스럽게 라면을 끓여보았다. 냉동실에 고이 모셔둔 전복과 어제 장 보면서 싸길래 사둔 꼴뚜기 한 팩을 넣어서 끓였다. 궁물이... 궁물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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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어 철이라는데. 한 번 먹고 싶었는데. 먹고 싶은데에, 먹고 싶은데에… 하며 제철을 보내고 있는 중. 토요일 점심에 JP가 교회 집사님 댁에 가서 대방어를 영접하고 왔다. 3년 된 묵은지에 직접 만드신 쌈장이 일색이라니 말이다. 침 질질 부럽다고 하니 안 그래도 사모님도 같이 오시지 그랬냐고들 하시더라고. 부럽다, 부러워…

이게 무슨 일! 저녁에 대방어 배달이 왔다. 말로 듣던 3년 된 묵은지와 쌈장, 문어까지 곁들여 직접 집으로 가져오신 것이다. 교회 모임 마치고 10 시 넘어 들어와 야식을 했다. 어제 공연 마친 채윤이, 청년부 mt 다녀온 현승이, 낮에 이미 잔뜩 먹었다는 JP까지 온 식구 달려들어 맛있게 처묵처묵 했다.

얼마 만의 야식, 얼마만의 방어냐…
사모님 되길 잘했…. 응?

돌아가시기 몇 년 전쯤부터 엄마 입에 붙어 있는 말이 있었다. "고맙다, 복 받어라!" 자녀들은 물론 조카들에게, 아마도 가만히 침대에 누워 통화하던 이모, 삼촌, 예전 교우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그 마음을 안다. 고마운데, 갚을 수 없는데, 갈수록 더욱 갚을 수 없는 몸이 될 뿐 아니라, 곧 이 땅에서 사라질 존재가 될 엄마의 마음. 무력한 존재의 지극한 감사의 마음이다. 방어 먹고 바로 침대에 누워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집사님. 복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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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에 해마다 학교 대표로 독창대회에 나갔었다. 지정곡과 자유곡, 두 곡을 부르는데 3학년 때 지정곡이 이런 노래이다. "할머니 머리에 눈이 왔어요. 벌써 벌써 하얗게 눈이 왔어요. 그래도 나는 나는 제일 좋아요. 우리 우리 할머니가 제일 좋아요." 대회가 아니어도 나는 늘 혼자 노래를 부르며 노는 아이였고, 그 자체가 연습이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집에서 잘 부르지 못했다. 특히 아버지가 있을 때는 부르지 못했다. "우리 우리 할머니"라는 말 때문이었다. 할머니라 함은 아버지의 엄마인데, 실향민인 아버지의 부모님은 북한에 계셨다. 한 번도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내가 이 노래를 해서 "할머니" 소릴 듣고 아버지가 할머니 생각이 나서 슬프면 어떡하지? 내가 "우리 우리 할머니"라고 노래할 때 딸에게 할머니를 주지 못해서 미안하면 어떡하지? 그 어린 나이에 순간적으로 전자동으로 거기까지 갔다는 것이, MBTI로 F가 높다는 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지나친 감정이입이다. 그렇다.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에 지나치게 이입이 된다.  
 
감정에 편들어주는 일이 내게는 쉽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감정에 무조건 편들어주는 일이 쉬운 일이다. 이런 성향이 글 쓰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고,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감정이입 되는 대상을 떠올리며 글을 쓸 때는 사투를 벌이게 된다. 수십 번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는 짓을 해야 감정이 거둬내지고 그나마 읽을만 한 글이 나온다. 그렇게 어제 마감인 글을 거의 마무리해 가는데, 이입된 마음을 뒤흔드는 일들에 글이 콱 막혀버렸다. (이것도 지나친 감정의 오지랖, 감정이입의 문제이다.) 글만 막힌 것이 아니라 마음도 막혀서 오후를 다 보내고 일몰 시간에 밖으로 나갔다. 다 예수님 때문이다. 글이 빨리 써지지 않았던 그 감정이입은 예수님과 관련된 것인데, 속을 헤집어 마음을 콱 막히게 한 일도 알고 보면 예수님의 일이다. 다 된 글에 예수님 빠트려 엉망이 되고 말았다. 아, 어쩌라고요! 하면서 걷는데 정말 짜증 나게 눈앞에 떡 하니 또 저 전광판!  ”(데헷....)JESUS LOVES YOU" 란다. 참말로 속도 좋은 양반... 그래도 사랑한다니까 기분은 좋네.
 
메마르고 튀들린 마음 다잡아 글 마무리 할 수 있기를... 이 글 보는 아무나 기도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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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렉시오 디비나를 배우며 읽은 책이 엔조 비앙키의 <말씀에서 샘솟는 기도>이다. 렉시오 디비나를 유난히 사랑하시는 신부님께 수업을 들었는데, '렉시오 디비나'가 얼마나 단순한 '말씀 기도'인지. 개신교 안에서 조용히 붐을 일으키는 렉시오 디비나는 얼마나 복잡하고, 군더더기가 많은지 생각했다. 가톨릭 학교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며 결국 " Sola Scriptura, 오직 말씀으로"  회귀하게 되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다. 더 신기한 것은 내 책상에 놓인 이 책을 보고 JP가 "어, 당신이 이 책을 왜 봐?" 하더니 자신의 말씀 묵상에 가장 좋은 텍스트가 되고 있다니 말이다. 이 일이 먼저였는지, 교회 말씀 묵상 밴드 참여가 먼저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연구소 카페에서 하는 영적 독서와 교회 말씀 묵상 밴드에서 나누는 말씀 묵상이 그야말로 '일용한 양식'이 되고 있다. 작년 한 해를 돌아보는 Big Family Day에서 JP의 감사제목 중 하나가 "정신실이 교회의 딸로 돌아온 것"이라고 했는데. 일면 동의가 된다. 언젠가는 긴 고백의 글을 쓰게 될 것 같은데... 매일 아침 성실하게 말씀 묵상하시는 교우들이 내게 큰 은인이다. 카를 융의 말처럼 나 자신이 되는 것이 인류를 위한 가장 큰 사랑이라는 말을 다시 실감한다. 나도 내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일을 꾸준히 성실하게 하는 것으로 인류를 사랑해야지, 생각하게 된다. 오늘 마태복음 9:9-17 본문에 이런 묵상 댓글을 달았다. 용기가 필요한 고백이라 올리고 나서 한참 손이 떨렸지만, 말씀에서 솟아난 이 기도로 감사한 하루이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남편이 전임 목회를 시작한 15년 전쯤, 신앙의 메마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메마르고 메마르더니 캄캄해졌습니다. 끝이 없는 어둠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고 어쩌면 저의 신앙 여정에서는 꼭 통과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덕분에 영적 전통 안에 있는 기도를 배웠고 고독 속에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 시간을 지나와 "신앙 사춘기"라는 이름을 붙이고 책도 썼습니다. 그렇게 신앙 사춘기를 서서히 빠져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 이전과 같은 신앙으로 돌아가기는 힘들었습니다.

신앙 사춘기 때부터 아침 일찍 식구들이 일어나기 전 혼자 일어나 말씀을 묵상하고, 영적 독서를 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저만의 방식으로 주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이곳 말씀 밴드에서 묵상 나눔을 하는 것을 알고 있고, 남편이 여기에 정성을 쏟는 것도 알았지만 들어올 생각이 없었습니다. 나대로, 내게 맞는 방식대로 하고 있으니까... (부끄럽게도 제 방식의 말씀 묵상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하루도 빠짐없이 밴드에 묵상을 나누는 분들을 보면서 마음에 흔들림이 생겼습니다. 매일 묵상하시며 달라지는 관점, 겸손한 기도...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굳게 마음 먹은 것은 아닌데 스르르 말씀 묵상에 참여하게 되었고, 어릴 적부터 해왔던, 청년 때는 정말 열심히 했던 QT 훈련의 감각이 깨어나면서 몸에 잘 맞는 옷을 다시 찾아 입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다시는 신앙 사춘기 이전의 마음을 되찾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여기서 뭔가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묵묵히 아침마다 말씀 묵상 나눠주시는 집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신앙 사춘기를 겪으면서 "바리새인 같은 신앙인"들에게 진절머리가 났고,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고 쪼개는 글을 써댔는데. 어느새 저는 영적인 우월감에 빠져 더 교묘하게 포장하고 치장한 바리새인이 되어 있습니다. 뼛속까지 새겨진 바리새인 DNA, 아침에 눈만 뜨면 함께 깨어나는 바리새인의 습성입니다. 하루 자고 나면 그만큼 낡아지는 가죽부대 같은 제 영혼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새로운 포도주를 부어 주시는데.... 문제는 제 부대가 낡아 찢어지고 터져서 그 포도주를 간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침 이 시간 그나마 낡아지는 제 영혼의 가죽부대를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말씀 묵상의 동지 집사님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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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2호가 요즘 자꾸 거슬린다. 미세하게 거슬리는 것들이 쌓였나 보다. 남자 2호님도 이젠 성인이니까... 여자 1호인 나는 급성 노화 현상으로 일상의 부적절 포인트 쌓고 있는 중이니까… 짜증 나겠지! 이해하자, 이해해... 거슬린다고 일일이 잔소리 할 수도 없고, 한다고 들을 것도 아니고... 하지만 미세하든 어떻든 억압한 것이 삐져나오지 않을 수 없다니까.

꽤나 빡이 치고, 킹 받고 있었다는 것을 오늘 아침에 알았다. 별 일 아닌 것으로 남자 1호를 향해 시위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여자 2호가 급하게 나서서 팽팽해진 시위를 잡았다. "워워, 엄마! 엄마 지금 킹 받은 거... 이쪽 아니고 저쪽에서야. 저쪽 꺼를 이쪽에 하면 안 되지...."

여자 2호가 남자 1호를, 아니 남자 2호와 함께 (누구보다) 여자 1호까지 다 살렸다. "아, 맞다! 그치? 야, 남자 2호 진짜 열받지? 엄마가 화날 만하지?" "음, 화날 만 한데... 정신 차려 그쪽 아니니까..." 방어 태세 갖추고 있던 화살받이 남자 1호가 "우리 구주, 우리 딸!" 하는 눈빛으로 긴장을 풀었다. 
 
멋진 여자 2호는 나가시고. 휴가 마지막 날을 보내는 남자 1호와, 매일이 휴가이며 부쩍 거슬리는 남자 2호에게 점심으로 "시금치 파스타"를 해주었다. 아주 그냥 모든 불화와 긴장이 싹 사라졌다. 맛있다... 음… 간이 딱 맛네... 파스타 면 돌돌 말고 있는, 한 없이 겸손한 두 남자 영혼…
 
너네들 나한테 까불지 마라! 밥이 권력이다. 게다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잠 25:11)"인 것처럼, 경우에 합당한 음식은 금이다! 모든 것을 이긴다. 내가 진짜 이 타고난 능력을 권력 삼아 남용하지 않으려고, 날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입는구만. 어! 
 
다 까불지 마! 취향 저격, 상황 저격, 맛있는 음식! 이거 안 해준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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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아침 제보 사진 두 장을 받았다. ♡♡♡♡

카톡창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

 

"목사님 깨끗한 곳에서 말씀 전하시라고 아이들이 열심히 청소했지요~~^^"

 

토요일에 교회에 난입한 천국의 청소 봉사자들.....

강대상 상판 아래를 누가 알아보고 닦겠냐고!

누가 저렇게 신나서 춤추듯 청소를 하겠냐고!

저 키, 저 눈, 저 마음이 아니면...

 

나도 저 마음으로 예배하러 간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너희 곁에 있다. 그런데도 나를 아직 보지 못했느냐?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이런 비난이 실려 있다- 어린이의 순진무구한 눈으로 예수를 보지 않는 한 그분을 "보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본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그분을 바라볼 때에 위대함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명예욕에 찬 온갖 상상들을 동원하는 일을 포기함을 뜻한다. 그런데 이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어린이처럼 되지 않는다면 전혀 불가능하다. 어린이의 눈길은 다름이 아니라 근본적인 한 삶의 자세의 표현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렇다. 오직 "어린이"만이 하느님의 아들을 볼 수 있다.  Heinrich Spaemann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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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보고 교회 다니는 거 아니라는데, 나는 백퍼 사람 보고 교회 다니는 편이더라. 그런 줄 몰랐는데... 정말 그렇더라.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왜 이리 예배당이 갑갑한가, 환기가 안 되나,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숨이 좀 막히기도 하고 그랬는데. 아, 애기들, 아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아이들 보러 교회 다니는구나! 깨달았다. 아이들은 생명이다. 아무것 하지 않아도, 존재 자체로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그 앞에 선 사람의 선함을 끌어낸다. "절대 부드러워지지 않을 거야! 어디 나를 감동시켜 보시지!" 힘을 꽉 주고 있던 사람도 방긋 웃는 아기 앞에서 "하이고~오....!" 숨겨둔 선함을 내뱉고 만다. 예수님께서 아기 예수님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다.
 
작년에 교회에서 "인생의 빛 학교"라는 이름으로 생애 주기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번외 편으로 "육아(育我)하는 조부모" 라는 이름의 세미나를 했다. 젊은 부부 육아 세미나를 지켜보시던 장로님 한 분이 할머니 할아버지를 위한 육아 세미나도 필요하다는 피력을 하셨다. 현직 손주를 돌보는 할아버지신데, 나... 여기까지만 쓰고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내가 "1초에 표정이 다섯 번 바뀌는 아기"라고 부르고 있는 아기는 에너지가 콸콸콸이다. 그 손주를 돌보시는 장로님은 내향적인 편에 약간은 샤이하신 느낌인데. 그 활달한 손주를 보시면 당황스러우실 할아버지를 상상하면 벌써 재밌다. 이건 채윤이가 먼저 캐치한 즐거운 상상이다.
 
강의 한 번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겠냐 싶으면서도 기쁘게 자리를 마련했다. 강의만으로는 얻어지는 것도, 큰 의미도 없을 것 같아서 그다음 순서를 마련했다. 강의 후에 지금 아이를 키우고 있는 젊은 부부 커플들을 패널로 내세워 질의 응답 형식의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나름의 목표는 이랬다.
 
- 에릭 에릭슨으로 보는 아이의 발달단계 이해
- 발달의 연속선상 안에서 아이들과 나(할머니 할아버지인 '나')를 성찰하기
- 조부모와 부모 세대 간 "육아의 기쁨과 어려움" 나누기
 
수강자보다는 강의하는 나를 위해 강의 목표를 분명하게 하려는 편이다. 꼭 도달하려는 목표는 아니다. 이런 시간에 함께 했다는 것이 내게는 가장 큰 의미이다. 실제로 오간 이야기는 대단한 내용도 없었다. 하지만 부모 세대 조부모 세대가 아이를 놓고 무슨 얘기는 주고받는 것이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아이는 생명이니까. 생명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좋은 일 아닌가. 생명을 키우는 일의 기쁨과 부담과 괴로움을 내어놓는다는 것. 
 
무엇보다 "세대 간"에! 요즘 교회를 다시 생각한다. 다른 세대가, 다른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심지어 신앙의 컬러도 다른 이들이 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기적이 아닐까.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아름다움 아닌가. 달라서 배제하고, 달라서 편을 가르는 세상 속에서 다른데....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 공간 안에서 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차라리 신비라고 말하고 싶다. 성향에 딱 맞는 사람들과 정치적인 입장, 신앙적 좌표, 영성의 색깔을 마음껏 드러내고 공감을 주고받으며 교회 생활하면 어떨까? 행복할까?
 
여러 교회를 두루 다니며 강의하고 가끔 설교도 해보는 영광을 누리면서 해보는 생각이다. 젊은 날 언젠가 대표기도로 정치 선동 하시는 장로님으로 인해 예배 중 뛰쳐나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교회 깃발을 만들어 들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걸 두고 부러웠던 적도 있었고. 젊은(아, 나는 이제 젊지 않다) 사람들이 많아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의 교회를 그려보기도 하고... 요즘 교회를 다시 생각한다. 균질 집단이 아니어도, 아니어서 좋은 곳이 교회구나! 복음이 원래 그런 것이었지. 여성과 남성, 이방인과 유대인, 종과 주인이 함께 할 수 있는 기적의 공간이 교회였지. 
 
교회 안 "세대 간"의 연결에 의미와 가치를 듬뿍 부여하고 싶다. 성탄절 전날이었던 24일 주일에는 유아 세례식이 있었다. 세례받는 아기를 너무나 예뻐하고 사랑하시는 집사님 부부가 아이 부모 뒤에 기도 후원자로 나란히 서셨다. "기도 할머니, 기도 할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아름답고 아름답다. 혈육이 아니라 기도와 사랑으로 맺어진 조부모와 손주라니! 이 얼마나 복음적인 호칭인가. 
 
교회를 생각한다.
제도의 교회가 아니라 체험의 교회를.
생각 속 교회가 아니라 몸으로 살아내는 교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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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특출한 은사를 열망해 보십시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전 12:31) 그리고 당신 자신이 자신의 덕을 쌓기 위한 하나의 독방이 되십시오. 당신의 두 독방 중 하나는 외적 독방이 되고, 다른 하나는 내적 독방이 되도록 해 보십시오. 외적 독방은 당신의 영혼이 육신과 함께 거처하는 집이고, 내적 독방은 당신의 양심이 있는 곳인데, 그곳은 당신의 가장 깊은 내면보다 더 깊은 내적 독방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혼과 함께 사시는 장소입니다.

 

 

장소는 바꿀 수 있을지 모르나 영혼은 바꿀 수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자기 자신은 변함없이 끌고 다니며, 옮겨 다니는 자체가 더 악화시킵니다. 마치 병자를 이리저리 끌고 다녀서 흔들어 놓으면 병세가 더 악화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내적 독방을 사랑하십시오. 물론 외적 독방도 사랑하고, 그에 합당한 보살핌을 해 주어야겠지요. 외적 독방은 당신을 숨겨 주지는 않더라도 보호해 줍니다. 당신이 남몰래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좀 더 안전한 생활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경험이 없는 독방의 주인이여,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이 독방을 얼마나 고맙게 여겨야 하는지!

 

 

먼저 자신의 몸을 확고하게 한곳에 정주시키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의 대상에게 집중시키는 게 불가능합니다. 누가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면서 영혼의 병을 피하려 한다면, 그런 사람은 자기 몸의 그림자를 피하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오히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기보다 오히려 여러분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마음을 쓰고,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모방하려고 거룩한 결심을 하고 후대에 오게 될 사람들까지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 인용문은 모두 생 티에르 윌리엄의  <황금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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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를 돌아보고 새해 기대와 소망을 나누는 Big Family Day, 2024년 가족의 날이다. 그 어느 때보다 감사제목이 많아서 놀랐다. 개인적으로도, 가족들에게도. 메말랐던 한 해라고 생각했는데, 논문이나 하나 썼지 대단한 무엇을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20여 년 가까운 세월이 담긴  Big Family Day  봉투는 기도의 타임캡슐이다. 이 시간마다 소환되는 현승이의 기도제목 "로봇이 되게 해 주세요"를 생각해 보면... 동화 속 주인공 같던 아이들이 사람이 되고, 성인이 되고, 엄마 아빠를 돕고 이끌어주니 놀라운 시간이다. 
 
저녁식사 식당도, 이후의 Family Day 나눔과 진행도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주도하고 있으니 또 놀라운 시간의 변화이다. 2023년 가족 마인드 맵을 그리고. 작년에 썼던 기도제목을 꺼내서 읽고. 한 해 감사한 것들을 적어보고. 오는 한 해의 소망을 기도제목으로 적어서 나누는데. "와아...." 하는 탄성이 많이 나왔다. 정말 기도가 응답됐네!!
 
호모 아도란스(homo adorans),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이다. 초월적 대상을 향하고 자신보다 더 큰 존재를 갈망하는 존재이다. 고통이나 인간적 한계 앞에서 종교적 신념과 상관없이 더 큰 존재를 향해 손을 모으는, 기도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올  Family Day는 호모 아도란스 넷의 만남이었다. 아이들이 기도한다. 기도를 종교적 규율로 가르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는데, 보람이 차오른다. 아이들이 자신의 한계 앞에서 하나님을 찾고 기다릴 줄 안다. 
 
신년 특새에 찬양 인도를 했다. 정말 하고 싶은 찬양이 있었는데 공동체 분위기와 맞을까 고민하다 결국 선곡하지 못했다. 새벽기도 오가는 길에 혼자 속으로 많이 불렀다. 삶과 영혼은 늘 어둠과 빛의 결투장이다. 많은 날, 많은 시간 승자는 어둠이다. 이 생이 다하도록 어둠이 온전히 가시는 날이 없다는 것을 안다. 알면서도… 어둠이 없는 그 어느 곳이 있을 것 같아 늘 도망갈 기회를 엿본다. 이 지루한 싸움 포기할 이유를 대라면 백 가지 천 가지. 끌어내리는 힘이 작용할 때 반대의 힘도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희미하지만 때로 감지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선택할 수 있다. 반대하는 힘에 반대하는 대신 선한 힘을 선택할 수 있다. 끌어 내리는 힘보다 한 방울만 더 크면 된다. 선한 힘, 선한 능력을 딱 한 방울만 더 키우는 기도로 버티기로 했다.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이 시를 쓴 본 회퍼 목사님이 그랬을 것이다. 대단한 믿음, 어마어마한 영적 능력이 아니라… 히틀러의 악보다, 끌어내리는 악보다 약간 더 큰 선한 힘에서 나온 노래가 아니었을까. 선한 힘을 믿고 선택하는 것이다. 호모 아도란스, JP와 채윤 현승, 영적 여정의 벗들, 나의 호모 아도란스들과 함께 "선한 능력으로!" 한 해를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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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닮게 창조된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 영혼의 재료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의 기본설정이고 하나님 닮음의 증거입니다. 12세기 영성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에 단계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 “나를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두 번째,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세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
네 번째, “하나님을 위하여 나 자신을 사랑한다.”
 
사랑의 시작, 유아적인 사랑의 단계에서는 오직 나를 위한 사랑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은 나를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될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돕고 나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면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누구시고 내가 누구인지 체험이 깊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 때문이 아니라 그분 그 자체로 사랑합니다. 그리고는... 죄인 된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봅니다. 내 안의 빛과 그림자를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기에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합니다.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 자기 함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 사랑에 닿아 자기 개방과 자기 증여로 이어지는 여정이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입니다. 2024년도 상반기 내적 여정에 초대합니다.
 

[대면 과정 일정과 신청]

 
✔ 일정 : 대면, 단계별 1회 6시간
✔ 장소 : 미사 나음터(하남시 아리수로 570 101동 824호)
✔ 인원 : 6명
✔ 비용 : 13만 원(점심과 커피 제공) / 단계별
✔ 문의 : 010-7242-8624
 
기본 1 : 2월 16일(금) 10:00-17:00
신청 http://bit.ly/47hVPoY
기본 2 : 3월 8일(금) 10:00-17:00
신청 http://bit.ly/48Dhmte
심화1 : 4월 12일(금) 10:00-17:00
신청 http://bit.ly/3NMqsfl
심화2 : 5월 10일(금) 10:00-17:00
신청 http://bit.ly/48pQWvl
영성 : 6월 7일(금) 10:00-17:00
신청 https://bit.ly/3rm7qib
 

[온라인 과정 일정과 신청]

 
✔ 일정 : 비대면, 단계별 2회 총 6시간
✔ 장소 : 온라인 Zoom
✔ 인원 : 12명
✔ 비용 : 12만 원 / 단계별
✔ 문의 : 010-2771-4445
 
기본 1 : 2월 3일, 17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36BEoTi
기본 2 : 3월 2일, 9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3amjgSC
심화 1 : 4월 6일, 13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2YAzYbe
심화 2 : 5월 4일, 11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2NMwOz2
영성 : 6월 1일, 8일(토) 10:00-13:00
신청 https://bit.ly/3q8Go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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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 Lectio Divina와 함께 한 꿈여정 5주를 마쳤습니다.
제국의 포로였으나, 그 정체성에 자신을 가두지 않고 존귀한 백성이라는 영적 신분을 잊지 않았던,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노라 뜻을 정했던 다니엘. 그 다니엘에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뛰어난 지혜에 더하여 꿈을 해석하는 지혜까지 선물로 주셨습니다.
한 벗님의 말씀처럼 다니엘은 바벨론의 “책상은 받지만, 밥상은 거부하는” 선택으로 경계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에고의 포로로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우리도 꿈여정에 초대받았습니다. 꿈을 통해 모르는 내 마음을 알고, 내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려는 우리도 다니엘과 한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이 주는 밥상과 책상,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하지 않고 다 가지겠노라 애쓰며 꽉 쥔 손의 힘을 빼는 시간이었습니다.
다니엘서 묵상과 함께 벗들의 꿈을 나누는 특별한 5주간의 여정을 시도해 보았습니다. 마치면서 우리는... 임금의 법과 하나님의 법 사이에 끼어서, 조서에 임금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늘 하던 대로! 기도의 다락방으로 가는 다니엘처럼 내면의 방으로 들어가 기도함으로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겠다’ 가만히 다짐했습니다. 잘 사는 것은 나답게 꽃피우고, 하나님 형상의 거룩함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적여정은 기도의 여정입니다.
영성이란 언제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사랑 안에서의 성장입니다.

 
 
라고 연구소 SNS에 후기를 올렸다. 꿈작업, 그 어떤 집단상담보다 좋고! 마음으로 읽고 새기는 하나님 말씀 Lectio Divina, 그 어느 때보다 달고 오묘한데! 꿈작업과 말씀 묵상을 함께 하니 말로 할 수 없이 좋았다. 심층심리학과 영성이 내 안에서 깊이 연결되고 하나 되는 느낌이다.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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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잊지 말고 살자는 것이 나름 정한 실천적 신앙 덕목이다. 주께로부터 온 모든 것은 사람을 경유한다는 것을 안다. 고마운 사람에게 고마워하는 것이 악을 이기는 능력임을 살수록 깨닫는다. 선한 힘이 이긴다.

 

논문 쓰느라 힘들었지만,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다. '감사의 글'을 쓰면서 깨달았다. 이 논문은 기도에의 갈망에서 온 것이고, 기도는 엄마가 물려준 유산이다.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은 감사의 마음이다. 어디 이 분들 뿐이랴... 어디 논문에 관한 일 뿐이랴... 지금 누리는 이 평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곁에 두신 사람들, 그 모든 이들을 인해 감사하는 새해 아침이다.  

 

감사의 글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어머니의 찬송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기도의 유산을 남겨주신 나의 어머니 이옥금 권사님의 영전에 이 논문을 바칩니다.

 

오래전, 향심기도와 함께 『영혼의 성』을 소개해주신 이대근 신부님 감사합니다. 그때 심긴 씨앗이 열매가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연구하는 여성의 본을 보여주시는 신소희 수녀님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정태영 신부님께서 지도 교수님이 아니셨다면 쓰지 못했을 논문입니다. 겸손하게 지적하시고, 고요하게 재촉해주셔서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며 쓸 수 있도록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나의 영적인 벗들, 최은경 선생님, 김하정 선생님, 민다슬 선생님. 학업과 연구가 벽에 부딪힐 때마다 한마음으로 기도해주고 때로 읽어주고 들어 주셔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담을 넘어 가톨릭학교에서 영성을 공부하겠노라는 뜻을 기꺼이 수용하고 응원해준 남편 김종필, 좋은 남편이며 착한 목사인 당신 덕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우리 채윤이 현승이, 공부하는 엄마를 좋아해 주고 배려해줘서 고마워. 너희가 너희답게 살아가는 게 엄마에게 가장 큰 힘이야.

 

사랑하는 나의 주님, 이 모든 이들로 당신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데레사 수녀님처럼 ‘오직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Sólo Dios Basta)’ 인생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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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교회 청년부를 섬기던 목사님의 '고별설교'가 있었다. 예배 마치고 인사를 나누며 툭 나온 말이 "목사님, 부러워요."였다. 말을 내놓고도 조금 당황했는데. 설교 시간에 잠시 남편의 '고별설교'를 상상했던 것 같다. 늘 생각하기에, 아무 때나 상상이 된다. 고별설교를 하고 교회를 떠나는 목사님은 그나마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목회자들이 고별설교는커녕, 더는 없을 빌런이 되어 강단을 떠난다. 빌런 프레임이 씌워진 것인지, 자기 권력과 욕망을 위해 빌런 되기를 자처한 것인지, 그럭저럭 겉모양은 유지하며 빌런인듯 빌런 아닌 빌런 같은 애매한 빌런이 된 것인지. 목회자와 교인들 사이의 슬픈 이별이 남기는 상처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보이지 않게 깊다. 부교역자라 불리는 분들은 애초 없는 존재였기에 사라져도 관심 밖인 경우가 허다하고. 담임목사에게 조금이라도 불손했거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았다면 변호할 기회 한 번 없이 최악의 목사로 낙인찍혀 쫓겨 나오기도 하고. 목사와 교회의 이별이 아름답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정황을 담고자 했는지, 월간 <기독교세계> 12월호가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주제의특집이라고. 여기 실린 글이다. 내가 요청받은 주제는 교회 관련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이별은 이별에 닥친 사람으로서는 해낼 수 없는 과제 같은 것이다. 이별 직전까지의 관계가 이별의 순간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아름답지 않은 관계가 끊어지는데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모든 이별의 순간은 이전 함께 했던 순간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절망적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절망만은 아닌 것이 이별을 애초 과정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비록 아름답지 않은 이별을 만들어낸 동거였다 할찌라도, 헤어진 후의 과정이 이전의 관계와 이별의 순간을 다시 새롭게 한다. 이별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뿐이다. 돌아보고 배우는 것. 다른 말로는 애도와 함께 잘 떠나보내는 것. 이별을 통해 사랑을 배우는 것이 인간의 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음유시인 김창완의 노래가 젊을 적부터 참 좋았다. <그대 떠나는 날에 비가 오는가> 가사 묵상의 글이 되고 말았다.
 
 

끝나지 않은 이별

 
단아하고 우아한 개량 한복을 입은 엄마가 좌식 책상 앞에 앉으셨다. 늙지도 젊지도 않은 얼굴에 꼿꼿하게 세운 상체는 거의 움직임이 없다. 손가락만 움직여 타닥타닥 뭔가를 짓고 계시는데. 세상에나, 노트북을 펼쳐놓고 글을 쓰고 있다. 노트북이 아니라 재봉틀이 놓였다면 딱 좋을 자리이다. 아니, 엄마의 태도와 표정이라면 성경책이 놓여 있어도 괜찮겠다. 엄마에 대한 존경과 칭찬이 동네에 자자하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엄마를 신뢰하고 따른다는 말이, 나는 잘 믿기지 않는다. 내가 안 믿어진다고 진실이 아닌 건 아니니까. 엄마라면 그럴 수 있지, 싶다. 하지만 우리 엄마가 저런 사람은 아니었지 않나?
 
엄마 없는 날의 시작


“엄마라면 그럴 만하지! 하지만 우리 엄마는 아닌데….”하며 꿈에서 깼다. 돌아가시고 말 그대로 상(喪) 중일 때, 슬픔의 한복판에서 꾼 꿈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막 시작된 그 봄에 엄마가 돌아가셨다. 코로나도, 엄마의 낙상도, 면회가 안 되는 입원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예고 없이 닥친 일이었다. 무엇보다 엄마와의 이별은 갑작스레 덮친 재난 같았다. 90을 훌쩍 넘기셨으니 언제 돌아가셔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으나 내겐 그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나는 무의식적으로라도 엄마의 죽음을 상상하지 않은 날이 없고, 그만큼 대비도 했으니 재난이란 표현은 과장이 아닌가. 바로 자기검열을 하게 되지만 이별의 고통이 그렇게 혹독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장례식을 제대로 치르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삼일장을 치르며 조문객과 함께 엄마에 관한 얘기를 하고 또 하고 했다면 조금 나았을까. 거리두기 지침과 함께 하던 일을 멈추고 집에 콕 박혀 지내야 했기 때문일까도 생각했다. 일로 도피할 수 있었다면 그렇게 적나라한 감정으로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던 건 아닐까. 초유의 팬데믹 세상과 엄마 없는 세상이 함께 왔다. 엄마 없이 지내는 첫날, 둘째 날, 일주일… 한 달을 맨몸으로 마주하며 지냈다. 어머니와의 이별은 평범했던 일상과의 이별이 되었고, 일상 회복은 불가능할 것만 같았다. 엄마 없이 보내는 첫 번째 부활주일, 첫 번째 어버이날, 첫 번째 엄마 생신은 얼굴을 바꿔가며 새로운 상실감으로 다가왔다.
 
이별은 오늘 이야기 아니오”


대비할 수 있는 죽음은 없다. ‘미리 대비하고 있으면 걱정이 없다’는 유비무환의 이별은 없다. 존재가 사라져 비어버린 공간을 마주하고 몸으로 겪어내는 것이 이별이기 때문이다. 그전까지의 대비는 머리가 하는 일이고, 이별을 겪어내는 것은 몸과 마음의 일이다. “이별은 오늘 이야기 아니요 두고두고 긴 눈물이 내리리니” 산울림의 이 노래 가사가 프로이트의 상실과 애도, 멜랑콜리 이론보다 더 큰 울림을 준다. 그리움의 눈물, 죄책감의 눈물, 분노의 눈물, 흐르지 않으며 흐르는 눈물… 두고두고 새롭게 긴 눈물이 흐른다. 상실의 슬픔과 단둘이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격리상태로 보냈던 몇 개월, 슬픔의 눈물을 글로 흘려보냈다. 글을 모아보니 ‘애도 일기’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책으로 묶어냈다. 책을 읽은 친구들이 허튼 결심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곁에 계신 어머니에게 잘해야겠다, 외롭지 않게 더 자주 찾아뵈어야겠다.”.” 질투 비슷한 느낌이 스쳤다. 나는 내 엄마께 그리하지 못하여 죄책감과 회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저 친구는 후회할 바 없이 잘해드리면 어떡하지? 괜히 글을 써서 내놓았나 싶기도 하고. 하지만 불가능한 마음의 쇄신인 것을 안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하는 트로트가 괜히 인기가 있겠는가. 이별은 대비할 수 없다.
 
부재로 존재하는 것들


사라진 자리에서 그 존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신비이다. 사라져야 비로소 그 존재의 가치와 무게가 드러난다. 극한의 치통으로 밤을 보냈던 밤, 온몸이 어금니였다. 음식을 먹고 씹고 삼키지 않았던 날이 없는데, 어금니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생각한 날도 없었다. 본연의 기능을 ‘잃은’ 그 밤, 어금니는 내 몸 자체였다. 심장도 어금니에 붙어 있는 듯, 욱신욱신 쿵쾅쿵쾅 거기서 뛰었다.
두어 달에 한 번이나 엄마를 찾아뵈었을까.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했다. 당신 방 침대와 볕 잘 드는 거실 소파 사이를 오가며 늘 거기 계실 엄마였다. 그리고 어금니의 존재를 인식하지 않고도 삼시 세끼 꼭꼭 씹어 밥을 먹듯 내 일상은 잘 돌아갔다. 엄마가 돌아가시자 나의 24시간은 엄마의 것이 되었다. 나를 ‘엄마’라 부르는 딸이 제 블로그에 글을 썼다. “엄마 잃은 엄마를 위로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엄마’하고 불러야 할 텐데, 그 ‘엄마’라는 말이 지금 엄마에게 너무 아픈 말이라 ‘엄마’하고 부를 수가 없다”라고. 이렇듯 가족들도 알아챘다. 내게는 ‘엄마’ 밖에 없다는 것을. 엄마의 몸이 한 줌의 재로 사라지자 세상이 온통 엄마가 되었다. 엄마로 뒤덮인 세상은 끝날 것 같지 않았고, 무너진 내 일상도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잃어버리고 찾는 것들


사순(四旬)시기 딱 중간의 날에 엄마가 떠나셨다. 다음 해 사순시기, 그 봄은 참으로 신비로웠다. 거의 매일 한 시간 훌쩍 넘기는 긴 산책을 했다.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막 움트는 새순들이 그렇게 제각각 다른 채도를 띄고 고유하게 고왔던가. 봄의 색이 이렇듯 다채로웠던가. 난생처음 컬러로 보는 봄 같았다. 그 하루, 그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칠 수가 없었다. 문득 1년 전의 어느 봄밤이 떠올랐다. 가로등 옆으로 흰 목련이 피어 있었다. 분노와 서러움이 밀려왔다. “꽃이 피다니요! 엄마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렇지 않게 목련이 피다니요!” 생각해 보면 엄마를 잃었던 그 봄은 봄이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계절도 잃었다. 애도의 시간에 색은 없었다. 온통 흑백 세상이었다. 그러니 난생처음 봄을 빛깔로 마주하는 느낌도 틀리지는 않았다. 잃어버린 한 계절로 얻은 찬란함이었다.
 
나는 이별이 무엇인지 안다. 상실감을 안다. 일찍이 아버지와 사별했고, 그 이별의 후폭풍은 정든 집, 교회, 학교, 친구들과의 물리적 이별이었다. 생이별이었다. 연애하다 헤어져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었고, 지도자의 영적 인격적 몰락을 보며 존경심을 상실한 자리에서 배신감으로 뒹굴어도 보았다. 단언컨대, 그 모든 이별이 나를 단단하게 했다. 아버지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 없는 아이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기에 이만큼의 예의 갖춘 인간이 되었는지 모른다. 갑자기 잃은 교회에 대한 그리움으로 교회를 포기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가 되었다. 아무도 날 알아봐 주지 않는 학교로 전학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옛 선생님, 옛 친구들에게 받았던 사랑과 신뢰를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좋은 성적이라는 생각에 열심히 공부했다. 이만하면 꽤 괜찮은 부부로 잘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편과 종종 그런 얘기를 한다. 연애하다 헤어졌던 그 아픈 시간이 있었기에 보다 건강한 연애와 결혼일 수 있었다고. 시아버님이나 함께 했던 벗들을 죽음으로 잃은 자리에서 내 인생 그 어느 때보다 부활 신앙이 뜨거웠었다. 상실의 시간을 잘 겪어내기만 하면 좋은 삶과 신앙이 된다는 것을 나는 안다.
 
끝나지 않은 이별
이별과 상실로 점철된 인생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 그런데 엄마가 떠나신 자리에서 배우고 성장한다는 건 사치였다. 산다는 것은 그저 무의미한 고통이었고, 삶과 죽음은 새삼 부조리하게만 느껴졌었다. 그즈음 꾼 꿈이다. 가당치 않은 이미지이다. 이 땅에서의 엄마와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스마트폰 시대를 길게 살았지만, 엄마의 소통수단은 유선 전화였다. 그런 엄마에게 노트북이라니. 무학에 가까운 엄마가 노트북으로 글을 쓰다니. 페미니스트 같은 젊은 여성들에게 신뢰를 얻고 여성들이 사는 동네의 존경받는 원로라니... 꿈이라서 가능한 설정과 이미지인데 희한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곁에 있는 남편에게 꿈 얘기를 하자 “어머님 천국에서 글 쓰고 계시나 보네. 어머니 살아오신 얘기 쓰시는 거 아냐?” 하며 웃었는데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싶었고, 스르르 마음에서 무엇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천국이니까, 이 세상과는 다른 곳이니까 엄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지 않을까. 평생 품었던 못 배운 한 따위는 풀 필요도 없는 천국이겠으나, 딸에게는 그렇게 소식 전하고 싶었을까? 그 꿈 이후로 부활한 엄마의 몸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육신의 장막을 벗은 엄마의 영혼은 얼마나 빛나고 아름다울까. 엄마 몸이 사라진 자리에서 엄마의 존재가 그렇게나 크더니만, 지금 여기의 일상을 무너뜨릴 만큼 큰 그것은 엄마의 영혼이었다. 영혼의 크기이고 무게였다. 엄마 몸과 이별한 자리에서 진짜 엄마와의 만남, 영적인 연결이 시작되었다.


3년 하고도 수개월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지는 노을이 아름다워 바라보고 있노라면 “엄마…” 하는 소리가 깊은 어디서 울린다. 새롭게 그리움의 눈물이 솟구친다. 3년이면 탈상이라지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별의 슬픔이다. 아니 이별에는 끝이 없다. “애도는 끝이 없다, 성공한 애도는 실패한 애도다.”라는 자크 데리다의 말처럼 좋은 이별은 끝나지 않는 이별이다. ‘몸’이라는 육신의 장막에 살던 진짜 엄마, 빛나는 영혼으로 존재할 엄마와의 새로운 사랑 고백과 화해는 내가 살아 있는 날까지 이어질 터이다. 이별은 끝나지 않는 만남의 새로운 시작이니, 어쩌면 산울림의 저 노래처럼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긴 이별”이었는지 모른다.
 

월간 <기독교세계> 2023년 12월호

 

 

크리스마스는 선물이지! 크리스마스는 선물의 시간이다. 크리스마스에는 "선물 교환"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올해에는 연구소 5주년 특강에 마치고 [상처 입은 치유자 과정] 1, 2, 3기 선생님들 송년 모임에서 선물교환을 도모했다. 연결이 끈끈해진 선생님 몇 분에게 진행을 일임을 했더니 사랑과 센스가 반짝반짝 빛나는 선물교환을 기획해 주었다. 모든 선물은 "연결"이었다. 올 한해, 홀로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연결이었다. 선물은 가지각색이지만 뜻은 오직 연결! 별 걸 다 '연결'로 연결하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쏟아내는 이 사랑스러운 "상처 입은 치유자"들을 어쩔 것인가!
 

 

선물의 맛은 서프라이즈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것이 갑자기 들이닥칠 때,  선물의 선물다움은 빛을 발한다. 작년 12월 마지막 날에 보이스톡으로 전화가 한 통 왔고. 그 전화는 작년 2022년 통틀어 가장 반가운 선물이었다. 잘 지내고 있다는... 일도 하고 있다는 그 말 밖에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고맙다는, 정말 과분한 말도 들었다. 전화를 끊고 그 편안한 목소리에 한참 눈물이 났다. 나라면 잘 지낼 수 있을까? 어쩌면 잘 지낼 수밖에 없는 사람일지 모른다. 무한 '피해자'가 아니라 '살아 남은 자, 생존자'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러 왔고, 그보다 솔직하고 굳건할 수 없는 글을 써냈으니 결국 잘 지낼 사람이었을 것이다. 처음 만남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별칭을 '반짝이'라고 지었었다.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1기였는데. 모임을 동반하는 나도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었다. 그 긴장된 첫 모임에서 반짝이가 우리를 웃겼다 울렸다 그랬었다. 맞다. 결국 잘 지낼 사람이었다. 벌써부터 반짝이고 있었다. 잠시 어둠이 그를 둘러쌌으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었다. 반짝이가 카카오톡으로 김을 보내왔다. 맨 김 참 좋아하는데.... 굽고 자르다 보면 가스레인지 주변이 난리가 나니까 아예 먹을 생각을 안 하는데. 구워서 딱 잘라진 김을 보내와서 간편하게 먹고 있다. "작가님 식사준비 편하게 하셨으면..."이라고. 작년 편안해진 목소리처럼 다시 눈물 나는 고마움이다. 누군가의 식사준비, 누군가의 일상을 챙기는 여유는 자기를 돌보고 지키는 내면에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이 소중한 사람, 소중한 선물, 반짝이를 어쩔 것인가!
 
만남도 그렇다. 좋은 만남은 선물처럼 오고, 선물의 맛처럼 서프라이즈로 온다. 대학원 종강피정이 있었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이긴 했는데, 논문발표 명목으로 참석했다. 타과로 진학하여 박사논문 쓴 선배 한 분이 먼저 발표를 했다. 논문 주제나 내용과 상관없이 "저 사람 좋은 사람이네" 감이 왔다. 논문이 아니라 논문 쓴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달까. (아니! 논문에서 마음이 느껴져서야 되겠는가?) 내게 좋은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으니, 이유 불문 내가 느끼는 '좋은 감각'을 거침없이 지지하는 편이다. 이런 감각이 소중하고 신비인 것이,  내 논문발표 이후 이분은 또 "눈물이 났다"는 평을 내놓는 것 아닌가? (이게 논문을 사이에 두고 오고 갈 말이고 감정인가?) 선물 같은 만남이 되었고, 모든 순서 마치고 새벽 2시에 숙소로 함께 걷는 길에 믿을 수 없는 하늘을 보았다.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별이... 그 짧은 순간 "실은 오늘 저희 아버지 42주기 추도식이에요." 누군가 들어줄 사람이 있다면 꼭 하고 싶었던 그 말을 하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그 산속에 아침부터 문을 연 베이커리 카페가 동화처럼 서 있어서 깜짝 모닝커피도 했다. 괜한 끌림이 아니라, 기도하며 쓴 논문인 것을 서로 알아본 것이다. 집에 돌아와 책 선물을 주고받았는데 보내주신 책 안쪽에 "반짝반짝"이라는 단어가 쓰여있다. 이 신비로운, 반짝이는 만남을 어쩔 것인가!
  

 

자신이 얼마나 반짝이는지 모르는 이들이 반짝반짝 누군가의 삶에 침투한다. 침투하여 생명을 불러일으킨다. 자기를 인식하지 못한 어둠이 자기와 자기 사람들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처럼... 2023년 성탄절, 예기치 못한 반짝임이 선물로 왔다. 크리스마스는 선물이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어 선물로 왔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이다. 전무후무한 선물이다. 
 
손수 만든 피조물인 사람을 얻고 싶어서,
사람이 되어버린!
신의 영광을 버리고 신의 광휘를 버리고...
신적인 반짝임을 모르기로 작정하고!!

오늘 말씀 묵상 본문이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 1:3-5) 반짝이는 존재들이 자기 반짝임을 모르는 것처럼, 어둠은 제 어둠을 모른다. 자기를 모르는 어둠들은 필연 확신을 장착하고 빛을 거부한다. 밤하늘은 그래서 더욱 어두워진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 하늘이 까맣고 어두울수록 별빛은 더욱 빛나 동방의 세 사람을 베들레헴으로 인도하니...
 
이 성탄의 신비를, 이 선물을 어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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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얼마든지 걸을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빛이 부드러워지는 시간부터 노을이 물드는 시간을 걷다

달빛이 비칠 때쯤 집으로 돌아오는 그런 산책을.

 

 

봄가을로 좋은 날이 아니어도 괜찮다.

타고난 '좋음'으로 놓치기 아까운 날씨의 날들이 있지만,

요 며칠의 칼바람 날씨도 산책하며 생각하고 기도하기에 손색이 없다.

꽁꽁 입고 싸매고,

비무장지대 얼굴만 잘 버텨내면 된다.

이런 날도 '좋은' 날이다.

 

걸었다. 

두어 시간을 천천히 걸었다.

12월엔 가끔씩 주체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으로 마음을 잃곤 하는데

걷다 보니 잃어버린 마음을 찾게 된다.

사람 하나 없는 산책 길을 혼자 걷는 시간,

슬픔과 그리움의 빛깔이 바뀌고 

벌써 마음이 따뜻한 집의 공기로 바뀌어 있었다.

 

 

다리는 아프고 꽁꽁 언 얼굴엔 감각이 사라졌는데

아파트 입구에서 나를 기다리는 박새 한 마리.

대단한 일을 치르고 온 것도 아닌데, 

짹짹짹 귀여운 팡파르를 울려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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