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가 떨어져 한 이틀 굶다 일보고 들어오는 길 단골집에 들렀습니다. 감정을 과잉시켜서 단골집입니다. 쌍방이 인정해야 단골집일터, 우리 부부편에서는 단골집인데 주인 아저씨는 한 번도 갈 때마다 살가운 인사가 없으니까요. 병약 김종필님께서는 이 점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기시던데요.사실 저는 내형성이 강한 사람들의 피치 못할 불친절함을 이해하고, 심지어 좋아하는 편입니다. 변태스럽죠.
이런 변태성 너그러움에도 오늘 만큼은 똘레랑스가 발휘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쓰는 일긴데요. 원두를 사러 갔는데 여자 분이 카페를 지키고 있더라죠. 콜롬비아 100g, 케냐 100g 주세요. 주문을 했지요. 담아 놓은 100g을 가져올 때는 무심할 수 있는데 눈앞에서 담아 줄 때는 한 스푼 한 스푼 퍼담는 손놀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많이 주세요' 하는 소리가 성대 근처에서 어슬럴거리다 끝내 나오진 못했죠.그러고 보고 있는데요. 마지막 몇 그램을 채우고 있었나 봅니다. 반 스푼인가 퍼담고 저울질을 하는 제스춰. 넘쳤나 봅니다. 102g 정도 됐나봐요. 봉투에서 다시 덜어내는데 원두 열 알 정도 덜어냅니다. 우와, 빡치대요. 너무 빡쳐서 안녕히 가시라는데 '절대 안녕히 가지 않으리라' 주먹을 불끈 쥐고 나왔습니다.
원두 열 알. 원두 2g. (김원효가 부릅니다. '뭐가 좋은데? 뭐~어가 좋은데에? 원두 열 알 빼서 남기면 뭐~어가 좋은데?') 그 순간 왜 울컥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각박하다. 각박하다. 각박하다. 저렇게 각박한 마음이 모이고 모이니 세상이 이렇지. 원두 열 알도 더 넣을 수 없는 손, 돈과 숫자에만 맞춘 계산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지. 이러니 생떼 같은 자식 바다에 묻고 피울음 우는 부모들이 보상금 때문에 거리에 섰다는 소설을 써도 믿는 망할 세상이지. 괜한 울분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더군요.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과한 감정은 내 안에 있는 야박한 계산법, 슬픈 헤아림이 또 다른 나에게 들켜버린 탓일지도요.
다행히 이틀 전에는 이와 전혀 다른 경험을 했습니다. 월요일에 남편과 함께 충정로의 가베나루에 갔었습니다. 광화문 갔다가 '가? 말어? 가? 말어?' 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아이스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아, 이게 커피맛이었죠. 커피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언젠가 장황하게 포스팅한 적이 있지만 커피 맛있죠, 호갱님 대신 사람대접 하죠. 커피 인심 넉넉하죠. 그런 곳입니다. 정말 맛있게 마시고 일어서는데 한 잔을 더 내려주시겠다며 붙드셨는데요. 핸드드립으로 내린 에스프레소라고 설명하면 될까요? 혀에 남는 텁텁함 뺀 에스프레소의 맛, 그 매끄러운 맛을 설명할 수가 없네요. 참 맛있었습니다. 카페를 나오면서 병약 김종필 선생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넉넉하게 주니 얼마나 좋아. 물장산데 퍼줘야지.'
고갱님의 행복은 둘째 치고 퍼주는 주인의 마음이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카페 열 군데를 돌아다녀도 이런 카페 하나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참 희한한 건 단 하나의 존재감이 아홉 개 카페의 지리멸렬한 커피맛과 인간다움의 맛을 상쇄하고 남는다는 것이고, 그게 작은 희망 같이 마음으로 다가옵니다. 글을 시작하는 마음은 1년 된 원두로 만든, 담배 헹군 물같은 아메리카노 맛이었는데요. 충정로 가베나루의 진한 핸드드립 커피의 뒷맛으로 끝을 맺네요. 다행입니다. 그런 커피, 그런 커피인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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