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영화에 끌린 건 홍보문구 안의 저 두 문장이다.
정말 소중한 것들은 있을 때는 잃고 나서 비로소 그 큰 존재감을 느끼는 것들이다.
현승이 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문장에 '매일 매일 똑같은 하루다' 담긴 지루함이 묻어나는 자조적인 느낌 말이다. 잃어봐야 알게 된다. 그 똑같은 하루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혹하게도 사소한 삶을 들여다보는 눈은 대체로 '그날' 이후이다.
벼락처럼 들이닥치는 '그날'에 일상을 빼앗긴다.
일상을 빼앗긴 후 부적응의 나날,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난 후에
'뭔가 잘못되었었구나!' 깨닫는 사람들은 고치기 위한 작업을 하게 된다.
밖이 아니라 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타인이 아니라 나에게로
시선을 옮기게 된다.
이제껏 살아왔던 방식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게 될 것이며,
뼈아픈 후회, 회한, 성찰, 정신분석....
무엇이라 불리든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을 분석하게 된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두 문장에 낚이면서 머릿속에 써 놓은 시나리오가 있었다.
'분해'라는 말은 일종의 정신분석이겠구나, 상상했다.
잔잔한 내면작업을 상상했다. 아니었다.
데몰리션(demolition)은 말 그대로 파괴이지 분해가 아니었다.
냉장고 좀 고쳐줘, 냉장고에 물이 샌다고..... 어어, 쾅! 교통사고, 그리고 아내가 죽었다.
일상에서 늘 하던 말, '냉장고 좀 고쳐줘'가 유언이 되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김종필 여보, 프린터기 좀 고쳐줘!ㅠㅠㅠㅠㅠㅠㅠㅠ)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
평소 존경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어쩌면 혐오하는 장인의 말이 생각난다.
역시나, 분해했지만 고칠 수는 없다. 문제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 수 없고.
분해된 잔해뿐이다. 그러면 그렇지.
영화에서 우리 편 말을 들어야지, 악역의 말을 들어서 해결점이 찾아지겠는가 말이다.
냉장고를 분해해서 고치지는 못했으나 남자는 분해하고 부수는 맛을 알아버린 것이다.
말썽을 일으키는 사무실 컴퓨터를 분해하고,
분해하고, 분해하다......
때려 부수는 맛에 빠져든다.
결국 딱 봐도 간지나는 멋진 집을 때려 부수기에 이른다.
꿈을 분석할 때 꿈에 나온 집은 흔히 '집'은 가족과 관련된 '자아'를 상징한다고 한다.
집을 때려 부수기까지는 금융회사 사장의 사위로 사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아를 비롯한
모든 자아도 함께 망가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세대로 따지자면 '사춘기'는 파괴의 세대이다.
무엇이든 삐딱하게 보고, 무엇이든 일단 부정하고, 때려 부수고 보는 세대이다.
어쩌다 사춘기 아이를 만나 쿵짝이 맞고, 파괴의 일탈 놀이의 친구가 되니 가관이다.
그리고 그렇게 부수고 부서진 후에,
영화의 후반부에서 처음으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지을 법한 표정이 등장한다.
분노에 차서 할 말 있음 서서 얘기하고 가라던 장인을 주저앉힌 표정.
뭉클했다.
영화 초반 교통사고로 아내가 죽는 장면부터 시작하여 남자의 얼굴엔 감정선이 없다.
슬픔도 분노도 그리움도 그 무엇도.
부수고 나서, 다 때려 부수고 나서 비로소 감정이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감정을 싸고 또 싸고 있던 딱딱한 껍데기가 깨어지니 비로소 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제 오늘 일은 아니고,
영화 탓은 아닌데,.
온갖 번듯하고 미끈하고 번지르르한 것들이 거북하다. 유난히 거북하다.
연애 강의를 하면서 연애의 기술은 '싸움의 기술'이라 말하곤 한다.
'싸움의 기술'이 아니라 '대화의 기술'이면 좋겠는데 갈등상황에서 대화는 거의 싸움이 되기 마련이니까 애초에 싸움이라 해두는 것.
긍정에 긍정을 쌓고 잘되는 나에 잘되는 나를 또 쌓는 긍정의 힘?
그런 힘 따위는 없다.
보기 좋게 번듯하게 쌓아 올리는 것은 남 보기에만 좋은 것.
삶 전제를 때려 부수어야 하는 날이 오기 전에
부서지고 깨어지며 뒤로 물러섰다 다시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일이다.
분노를 모르는 자 사랑할 줄 모르는 자이다.
싸움을 모르는 자 성장을 모르는 자이다.
파괴를 모르는 자 참된 세움을 모르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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