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기가 막히다. 그렇다. 인생, 다가오는 것들을 맞으며 걷는 길이다. '나는 할 수 있다! 내 인생은 내가 만든다!' 주먹 흔들며 외치는 아자아자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 '성공하는 사람들의 습관' 자기계발서의 선동에 오히려 덤덤해지는 이유. 생의 굵직한 행불행은 다가오는 것들이 끌고 나온다. 바라지도, 택하지도 않은 것이 예상 밖의 시점에 치고 들어와 나를 행복 또는 불행으로 던져 넣는다. 체감하기로는 내가 다가서서 이룬 것보다 내게 다가온 것들의 힘이 늘 더 세다. 나를 세차게 흔들어 다른 자리에 서게 한 결정적 변화는 '다가오는 것들'이었다. 한 남자가 다가와 남편이 되었고, 영혼의 친구가 되었고, 몇 년에 한 번 씩 생의 분기점으로 나를 끌고 간다. 내가 낳았지만 어설피 그려보았던 그 아이들이 아닌 아주 생소한 두 우주가 다가와 내 일상의 감정을 쥐락펴락한다. 사춘기 한참 민감한 시기에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와 삶에 대한 내 태도를 바꿔 놓았다. 온 국민 보는 앞에서 가라앉은 세월호가 다가와 엄마 아빠들의 삶을 길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다가와 길바닥에 뿌린 세월호 엄마 아빠의 눈물이 헛되지 않았다 하며, 상상도 해보지 못한 200만 촛불이 다가왔다. 좋다/나쁘다, 하나의 이름을 붙일 수 없지만 흔히 '불행'이라 불리는 것들이야말로 다.가.오.는. 것들이다.
함께 철학교사를 하며 보기 좋은 가정을 일궈가던 멀쩡한 남편이 '딴 여자가 생겼어. 그 여자랑 살고 싶어' 이런다면. 젖은 신문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집착하던 나이든 엄마, 더는 돌볼 수 없어서 요양병원에 보낸 엄마가 갑작스레 죽는다면. '그래도 난 지적으로 풍성한 삶을 살고 있잖아' 자위하고 있는 터에 출판된 책의 재계약이 취소되며 학문적 자존심 뭉개지는 일이 속속 일어난다면. 그 와중에 아끼는 제자와의 교감이 한 줄기 희망으로 다가온다. (그녀가 아니라 관객인 내게) 젊은 한때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제자의 고뇌에 찬 열정이 갈수록 거리감으로 다가온다. (관객인 내가 아니라 그녀에게) 이 모든 다가오는 '상실'들을 나탈리는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장면 장면을 종종걸음으로(주로 높은 굽의 웨지힐을 신고) 느리지 않게 오간다. 강의실로, 엄마 집으로, 요양병원으로, 출판사로. 또 끙끙 여러 개의 짐보따리를 끌고 기차로, 버스로, 택시로 남편의 별장이나 제자의 전원공동체를 오간다. 가끔 침대에 누워 혼자 울지만 감정의 동요가 요란하지는 않(게 보인다)다. 다가오는 것들을 대하는 나탈리의 태도는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그녀의 생김새 같고, 옷차림 같다.
남편과 함께 씨네큐브에서 보고 집에 와 바로 거금 4000 원을 투자하여 구매하였다. 아주 조금 쓸쓸하고 많이 의연한, 그렇다고 그리 멋지지도 않은 나탈리를 연구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나도 좀 그러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장례식에서 나탈리가 읽은 <팡세>와 영화 마지막의 행복론 강의를 음미하고 싶은 마음, 영화 구석구석 숨겨진 철학 찾기 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사람에게는 깊이가 다른 영화일 듯. 일천한 나는 루소, 레비나스, 부버에 순간 귀가 번쩍 뜨였을 뿐. 남편은 프랑크푸르트학파니 뭐니 하는데 내가 아는 건 그게 먹는 건 아니라는 정도. 여하튼 어머니 장례식에서 들고 나가 읽은 팡세는 영화 속 나탈리를 나탈리이게 하는 힘의 이론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온통 암흑뿐이다.
자연은 내게 회의와 불안의 씨만 제공한다.
신을 나타내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부정으로 마음을 정할 것이다.
도처에 창조주의 표적을 볼 수 있다면
나는 믿음 속에서 안식할 것이다.
허나 부정하긴 너무 많이, 확신하긴 너무 적다 보니
나는 개탄할 상황에 있다.
만약 신이 있어 자연을 뒷받침 하고 있다면
자연이 신을 명확히 드러내 주거나
자연이 보여주는 표적이 거짓이라면
그것들을 깨끗이 지워버리기를
어느 편을 택할지 알 수 있도록
자연이 모든 걸 말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기를
내가 놓여있는 상태에서
내가 뭔지, 뭘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나는
나의 신분도 의무도 모른다.
내 마음은 진정한 선을
그것을 따르기를 온전히 바란다.
원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도 비싸지 않다.
철학교사 나탈리는 이렇듯 '철학 함'으로 다가오는 상실을 맞서고 있다. 차라리 얼마나 정직한 믿음이며 희망인가. 장례식 설교에서 신부가 말한다. "나탈리, 당신이 어머니께 표현한 최선의 감사는 철학교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의혹과 질문은 신앙과 굳게 엮여있음을요. 당신의 삶은 그리 이루어졌습니다" 버스 창 밖을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파스칼의 저 글을 되뇌는 나탈리. 그렇게 철학함으로 자기를 위로하고 있는 나탈리의 눈에 들어온 창 밖의 장면. 애인과 함께 꿀 떨어지는 웃음을 웃으며 걷는 남편 하인츠. 엉엉 울던 울음이 헛헛헛헛 웃음으로 바뀐다. 어떤 현학적인 말을 가져다 자기연민을 포장해도 현실은 이것. 평생 나를 사랑할 줄 알았던 남편의 배신이다. 이것이 현실. 아무렇지 않게 종종거리며 스크린을 오가는 그녀였지만 관객들 모르게 이불 뒤집어 쓰고 울어야 할 울음이 많이 남아있음이다.
영화 보고 나서 남편이 "그 집 거실 부럽지? 자그맣고, 책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신실이 그런 거실에 있으며 좋겠다" 아닌 게 아니라 참으로 마음에 드는 거실 겸 서재이다. 천국 가기 전에 '하나안~님! 황금집 필요 없구요. 나탈리 집 아시죠? 그런 집, 그런 거실, 그런 서재로 할게요' 미리 주문을 넣어둬야 할까보다. 영화 좋았다며 늘 그렇듯 별 말 없던 남편이 거실에 대한 얘길 하나 더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래 오래 그 거실을 보여주잖아. 일상, 그 여자의 철학 함은 일상이야." 그렇다. 모든 다가오는 것들은 일상의 기쁨과 슬픔으로 녹아든다. 어설픈 리뷰에 담고 싶은 주제가 한 둘이 아니다. 이혼한 여선생님과 젊은 제자는 연인이 될 수 없는가? 이런 얘기는 흥미진진. 엄마의 딸이며 딸의 엄마, 딸이 낳은 아이의 할머니가 되어 가는 여자 이야기도 몇 바닥 쓸 수 있을 것 같고. 그러나 <나의 성소 싱크대 앞> 저자답게 '기승전-일상'으로 끝맺도록 하겠다.
포스터에 나란히 선 제자 파비앙이 영화 초반부에 말했다. "고3때 선생님의 수업과 책이 저를 붙들어줬어요. 철학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영화 중 상실의 정점은 머리가 큰 제자 파비앙의 비판이다. "생각과 행동의 일치는 중요해요. 선생님 교육엔 없던 거죠" (아, 현기증) "왜 그런 말을 해? 나는 생각과 행동을 완벽하게 조화시키고자 했어"라는 선생님의 반격에 "그건 맞아요. 사적 영역에 한해서요. 평소에는 원칙을 지키 테지만 삶의 근간을 흔들지 모르는 사상은 외면하시잖아요. 시위나 서명 정도로 스스로를 참여 지식인으로 여기죠. 떳떳한 양심과 변함없는 생활....." 제자는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왠지 진 느낌의 선생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말한다. "난 혁명을 바라지 않아. 훨씬 수수해.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는 것. 최소한 네게 그것을 전달했다고 믿었다." 내게 가장 아프게 다가온 장면이다. 파비앙 친구들의 논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냔 말에 "급진성에 대해 말하기엔 난 늙어서요. 예전에 다 해봤거든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젊을 때 나탈리는 공산주의의 급진적 사상에 빠져 러시아까지 다녀왔다.) 주인공의 표정이 가장 쓸쓸해 보인 장면들이다. 한때 급진적이었으나 어느 새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중년의 여자가 되었을 것이다. 사적인 영역을 살아내기에 급급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개인적 행복에 만족하며 살았을지 모르겠다. 파비앙과의 설전에서 밀려난 느낌으로 홀로 낭떠러지 느낌의 언덕에 선 나탈리의 뒷모습이 사진 한 장처럼 마음에 남는다. 그 곁에 나를 세우고 싶은 마음. 그래도 그녀가 잘 살아왔다는 걸 그녀의 거실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거실은 말하자면 일상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어디 입이 떨어지겠는가. 차라리 <팡세>를 다시 읽어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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