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 즈음, 엄마를 떠나보내고 현실감각이 없는 상태에서 한 내담자를 만났다. 내담자. 내담자였다. 연구소에서 개인 상담받으실 분인데, 시작 전에 나를 한 번 만나면 좋겠다고 하셨다고. 나는 개인 상담은 하지 않고 있고, 당시는 제정신도 아니었는데 왜 수락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내가 만나야죠!"하고 나갔다. 암흑의 봄, 유일한 공적 외출이었던 것 같다. 한 번 만나고 보니 '내담자'가 아니라 H라는 이름으로 마음에 새겨졌다. H님이 마주한 일상은 막막했다. 나도 그때는 막막했으니 유유상종의 미덕이 오갔으려나. 그날(아니 그즈음 모든 것)의 기억이 희미하다. "(막막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커요. 하지만 H님이 달라질 수는 있고,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에요." 이런 말씀을 드렸던 것도 같고. 

 

그때로부터 H님은 조용히 개인 상담, 내적 여정, 치유 글쓰기에 참여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꿈과 영성생활' 집단 여정에 함께 하신다. 한 주에 한 번씩 돌아가며 꿈을 나누는데, 이번 주 H님의 순서였다. 아름다운 꿈이었다. 꿈은 진실이다. 논리도 없고, 이치에 닿지 않아 개꿈이라 치부할지라도, 아무리 시덥지 않아도,  꿈은 내 안에서 나온 진실이다. 게다가 분명 내 안에서 나오지만 꿈을 통제할 방법은 없다. 꿈의 자율성이라고 한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간절히 그리는 그 사람이 내 맘대로 꿈에 나타나진 않는다. 꿈에서조차 떠올리고 싶은 치를 떨리는 일이 밤마다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히는 것도 막을 길이 없다. 즉, 아름다운 꿈을 꾸고 싶다고 꾸어지는 것이 아니다. 꿈 작업을 하고 이 여정에 들어선 지 13년 정도 된 것 같다. 그간 수많은 꿈을 만났지만, 이렇듯 고요하여 침잠하게 하는, 요란스럽지 않게 아름다운 꿈은 처음인 것 같다. 이번 주 H님의 꿈을 떠올리기만 해도 다시 설렌다.

 

사람 참 변하지 않는데 말이다. 드물게 몇 개월이나 일이 년 사이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변하고 성장하는 이들이 있다. 정말 궁금하다. 치유와 성장을 돕는 일에 올인하여 살지만, 진정한 관심은 나 자신에 있다. 정말 궁금한 이유는 그들을 본받아 나도 성장하고 싶어서이다. 그래서 관찰하게 된다. 면밀히 관찰하게 된다. 그런 이들이 쓰는 글, 하는 말, 꾸었던 꿈을 마음에 새기고 글로 남겨 다시 들여다 보곤 한다.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벼랑 끝에 선" 그들이다. 역시 인간의 마음을 꿰뚫는 예수님의 눈이다. 팔복의 첫 번째,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이 말씀을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번역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작년 이 즈음 H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텅 비어 있었고 마음은 한없이 가난했다. 그 무엇도 내세우지 못했다. 언뜻 봐도 착하고 성실하고 올바르게 살아왔건만, 그것을 내세우질 못했다. 그에게 들이닥친 상황이 그러했다. 벼랑 끝에서, 가난해져 텅 빈 마음으로, 스스로 지켜낼 아무것이 없는 그 자리게 복된 자리였다니.

 

복된 그 자리 반대편에서 울리는 소리도 안다. 꽤 옳고, 상당히 괜찮고, 나름 착하며, 많이 희생했고 이타적으로 살았다는 소리들. "이만하면 됐지! 나만큼만 하라고 해!" 상황이 막막해질수록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빽빽해 숨 쉴 공간 없어지는 것이다. 죄가 없(다 여겨서)어서 은혜가 들어설 자리 없는 자아의 풍경을 안다. 오래 봐서 익숙하고, 많이 해봐서 잘 안다. 넌덜머리 날 정도로 익숙하다. 익숙한 자리에서 변화란 없고, 성장이나 치유가 들어설 틈이 없다는 것도. 그 완고한 자아의 장벽 앞에서 무력감을 느낀다.  

 

꿈을 나눈 H님이 했던 마지막 말을 내 방식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년 전, 이 즈음 두려움과 불안의 극한이었다. 가장 두려웠던 것은 (한 순간의 내 행동으로 인해) 남편에게 일어난 안 좋은 일, 그것이 최악의 결과가 될 것이 두려웠다. 아니,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생각한다. 바로 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에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다. 심지어 버림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변함없지만, 나는 어쩌면 견딜 힘이 생겼다." 그의 꿈이 아름다운 건, 그의 의식상태가 이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의식이 이렇듯 넓고 깊어진 것은 꿈이 준 힘일 것이다. 둘 다이다. 벌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다면 책임지겠다는 태도. 옥색 빛의 영롱하고 맑은 물이 반짝이며 흐르는 고요한 강물 같은 마음이다. H님의 꿈에 나온 그대로. 

 

누가 성장하는가?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놀랍게도, 산상수훈의 이어지는 말씀들이 더욱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실존의 민낯을 그대로 마주하는 이들, 상처 입고 쓰라린 감정 사이를 묵묵히 걷는 이들이 결국에 누리는 복, 그것을 본다. H님의 꿈과 글에서처럼. 그것이 이 막막한 세상을 견디는 힘이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이란 이름으로 살며 누리는 복이다. 그저 지켜 보고 감동으로 그칠 일인가. 내가 살고 거머쥐어야 할 복이 아닌가.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만족하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돈으로 살 수 없는 모든 것의 당당한 주인이 된다.

하나님께 입맛 당기는 너희는 복이 이다.
그분은 너희 평생에 맛볼 최고의 음식이요 음료이다.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돌보는 순간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내면 세계, 곧 마음과 생각이 올바를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바깥세상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

하나님께 헌신했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박해로 인해 너희는 하나님 나라에 깊이 들어가게 된다.

그뿐 아니다. 사람들이 내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너희를 깔보거나 내쫓거나 너희에 대해 거짓을 말할 때마다, 너희는 복을 받은 줄로 알아라.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진리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들이 불편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너희는 기뻐해도 좋다. 아예 만세를 불러도 좋다! 그들은 싫어하겠지만, 나는 좋아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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