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전작 주의자로서 마음에 든 작가의 책은 절판도서를 웃돈 주고 사서라도 읽는다. 스캇 펙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저자이다. 전작이 다 뭔가, 전작을 기본 두세 번씩 어떤 책은 옆에 끼고 있다시피 한다. 그러나 실은 '전작'이라 할 수 없는 것이, 스캇 펙이 쓴 소설 두 권은 10년이 되었어도 읽지를 못했다. 받아들이기 싫었다. 나의 펙 박사님이라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나 《거짓의 사람들》의 스캇 펙이다. 스스로 '과학자'라 말하는 심리학자이다. '과학'의 배를 타고 합리적 추론의 노를 저어 영성의 섬에 닿는 기가 막힌 저서이다. 그러면 됐지. 과학자가 무슨 소설이란 말인가. 과학자를 표방하여 쓴 저서에서 그렇듯 투명하게 자신의 드러냈으면 됐지, 뭐가 부족하여 소설이란 말인가. 

 

 

소울 

 

영화 <소울>을 보았다. 어쩐 일인지 영화 중간에 졸고 말았다. 졸고 났더니 맥락을 다 놓쳐서 관람했다 할 수 없는 상태이다. 미리 접하고 간 영화에 대한 극찬이 무성했는데, 무색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함께 본 남편이 참 좋았다는데 뭐가 기억에 남았어야 말이지. 안 되겠다, 식구 중 유일한 미 관람자인 현승이와 함께 재관람하기로 했다. 식사 중에 픽사 애니메이션 얘기로 수다가 길어졌다. "엄마, 코코를 안 봤다고? 도대체 어떻게 그 영화를 안 봤을 수가 있지?" 하며 저녁 식사와 대화가 끝났다. 아이들 설거지하는 사이 바로 <코코>를 사러 네이버에 영화로 달려갔다. 영화가 끝나니 식구들은 모두 방으로 흩어지고 어두운 거실에 혼자다. 'Remember Me'를 들으며, 마마 코코가 "파파?" 하고 따라 부르는 'Remember Me'를 들으며 눈물 콧물을 쏟았다.다. 소울. 영혼. '영혼'에 대한 심상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아버지, 그리고 지금은 엄마다. 세상을 떠난 영혼에 대한 관심은 그래서 바로 그리움으로 달려간다. 영화 <소울>을 보며 졸기 시작한 지점이 딱 생각난다. 몸을 입기 전 영혼은 내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직 내가 아는 영혼들, 나와 연결되었던, 연결된 영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코코>의 해골바가지 영혼들이 참으로 정겨웠다.

 

 

소설

 

1월 말에 스캇 펙의 소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창가의 침대》를 연이어 읽었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벌써 여러 번 읽은 남편이 새해 다시 또 꺼내 읽고 책꽂이에 꽂으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이걸 한 번씩 읽을 거야." 괜히 질투가 나서 무작정 펼쳐 들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심리적 영적 우울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남편이 이 책을 읽고 조금 달라졌었다. 하도 신기하여 나도 좀 읽어볼까 펼쳤었는데 영 마음이 펼쳐지질 않았었다. 결국 읽지 못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르고 단지 질투심에 펼쳐 든 책에 쏙 빠져버렸다.  《창가의 침대》 역시 출간 되자마다 보관함에 담아 두었었는데 영 마음이 향하질 않았다. 때가 되었는지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단숨에 읽고 바《창가의 침대》를 집어서 달렸다. 

 

 

소울

 

글을 얼마나 썼다고, 상상력도 빈약한 주제에 요즘 언감생심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하려면 허구의 장치가 필요하겠구나 싶다. 자칭 과학자인 스캇 펙이 소설을 쓰고만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스캇 펙은 '영혼'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에서는 몸을 떠난 사후 세계의 영혼을, 《창가의 침대》에서는 이 땅을 사는 영혼을 그린다. 과학자로서 치료자로서, 아니면 인간의 내면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그의 역작은 《거짓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성장과 변화에 천착한 스캇 펙은 결국 '어떻게 해도 변하지 않는 사람'을 '악'에 가까운 존재로 지목한다. 두 소설은 그 이야기의 변주이고. 에고로 가득 찬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병적인 자아의 정체를 (변화시키길 거부하고) 방어하고 보전하기 위해 (오히려)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파괴하는 데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악이라고 정의한다. 치료 장면에서 그런 존재들을 만났고, 결국 '악' 또는 '거짓의 사람'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이다. 왜 어떤 사람은 아프게 자기의 진실을 마주하며 성장하고, 어떤 사람은 끝내 변화하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희생양을 찾는가.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 지점에서 스캇 펙은 '영혼'을 떠올린 것 아닐까.

 

 

소설 

 

소설 같은 이야기를 살았다. 재작년에 내적 여정에 오신 S 선생님은 조용히 여정의 전 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연말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좋아하는 일이었고, 좋은 직장이었는데 내적 어려움을 유발하는 곳이기도 한 것 같다. 작년 1년을 쉬면서 치유 글쓰기에 참여했는데, 어찌나 지난하게 글로 자신을 만나가는지! 같은 주제로 한 번 더 글을 쓰시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안했는데 기꺼이 재수강을 하셨다. 어떤 주제의 글을 써도 S샘의 글엔 '아버지'가 어른거렸고, 재수강에선 더욱 아버지가 새롭게, 또렷이 드러났다. S샘은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로 쓰는 일을 거침없이 해나갔다. 몇 바닥 씩 글을 쓰고 또 썼다. 올해 복직을 앞두고는 꿈 모임에 신청하여 참여했다. 몇 주 전 순서가 되어 자신의 꿈을 나눴는데, 또 아버지이다. 투명한 사람에겐 꿈도 투명하게 말을 걸어오는 듯. 투명한 말은 듣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다. 꿈 모임 마치고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고 했다. (이 땅에서의 온전한 화해가 가능할까, 특히 부모와.) 나 또한 S샘 생각으로 먹먹해져 지내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선물로 보냈다. 그 책을 읽고 꿈의 메시지를 복기하면서 마음이 잘 정리되었다고 한다. 꿈 나눔 후 일주일을 그렇게 보내고 월요일 밤, 글을 한 편 쓰고는 "내일은 병원에 계신 아빠 면회를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겠다" 하고 잠이 들었단다. 다음 날 화요일 새벽에 아버님 임종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아버님을 저 하늘로 보내드렸다. 조문을 가서 만난 S샘의 얼굴이 평안해 보였다. 장례식 마치고 꿈 모임 방에 올린 글로 보는 S샘의 마음의 여정은 그야말로 소설이다. 이 아름다운 마음의 여정으로 소설 한 편을 쓰고 싶을 정도이다.

 

소설, 소울

 

스캇 펙 같은 통찰력이 있는 것도, 인간에 대한 사랑이 깊은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마주하는 일을 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높은 도덕적 행동과 착한 모습 너머의 추하고 완고한 모습을 볼 때 혐오스럽고 동시에 몹시 두렵다. 내 안에 없는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인다'는 것은 내 것이라는 뜻이고 혐오스러움이 동시에 두려움이 된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또는 스스로 의식하는 자아는 부족하고 선하지 않다며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들 안에 빛나는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럴 땐 경외감이 든다. 어떤 아름다움 같은 걸 본다. 《창가의 침대》에서 평생 침대에 누워 살아야 했던 중증 장애인 스티븐의 빛나는 영혼, 그 빛을 알아본 상처 투성이 간호사 헤더의 빛은 나도 얼핏 접해본 것들이다.'그 20여 년 치료 장면에서 만난 아이들, 엄마들, 그리고 내적 여정이나 강의에서 만난 무수한 사람들, 아니 일상을 둘러 싼 사람들. 몸이 아니라 영혼으로 만나고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설명이 불가한 지점이다. 스캇 펙이 그려낸 인물 중 '스티븐'을 태어나서 한 번도 침대를 떠나본 적 없는 중증 장애의 몸을 가진 존재로, '그로초브스키 부인'을 마비된 몸을 가진 존재로 그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를 돌볼 힘은 1도 없고, 온전히 남에게 의존해야 하는 몸과 대비된 그들의 영혼이 어떻게 얼마나 아름답고 자유로운지 상상함으로 보게 한다. 매캐덤스라는 흐트러짐 없는 외향(태도, 능력)을 갖춘 이가 논리를 통해 앞으로 살아갈 길을 고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전신 마비의 스티브, 삶은 무질서하고 상처투성이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인 간호사 헤더, 매력 없는 외모와 일 못하는 원장 시터먼 같은 사람과 대비되는 매캐덤스의 멀끔한 외향은 그 자신의 영혼과는 또 어떻게 대비되는지. 

 

남편은 앞으로 새해가 시작 될 때마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을 다시 읽겠다고 한다. 그가 그 책을 뽑아 들 때마다 나도 덩달아 그 옆에 있는 《창가의 침대》를 뽑아들까 한다. 융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이유가 '성장하여 온전함'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했다. 만약 이 땅에서 온전히 성장하지 못하며 죽어서도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 스캇 펙은 그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이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 그렇다면 오늘 이 순간의 성장을 회피할 이유가 무엇인가, 소용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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