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휴가의 책은 래리 크랩의 『천국을 향한 기다림』과 전경린의 소설 『굿바이 R』이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래리 크랩 선생님께서 작년 2월에 돌아가셨는데, 마땅한 환송식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7개월 전에 쓰셨다는 책이 나온 걸 보고 환송식은 무슨 환송식이냐, 내 마음에 계속 살아 있는데 싶었다. 그렇게 따지면 마르바 던, 토마스 키팅, 유진 피터슨 같은 분도 마찬가지이다. 몇 년 사이 책으로 만난 선생님들이 많이들 돌아가셨다. 브레넌 매닝의 소천 소식은 마침 주일 아침이어서 그날 예배가 천국 환송예배되었던 기억이 있다. 같은 책도 몇 년이 지나면 달리 읽히곤 하니, 다시 읽으며 두고두고 환송하기로 하자.

하도 내가 래리 크랩, 래리 크랩 하니까 주변에 따라 읽는 이들이 많은데, 당장의 호평을 들어본 적이 없다. 책이 왜 이러냐, 어렵다, 말이 왜 이리 돌려서 하냐... 뭔가 얘기를 할 듯 말 듯, 다음 장에서 그 말을 하려나? 없고, 또 그 다음 장? 없고.. 그러다 책이 끝난다고. 인정이다! 이 분의 글쓰기 스타일을 잘 알겠고, 왜 그런 방식으로 쓸 수밖에 없는지 나름대로 추측하는 바도 있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도 너무나 잘 알겠다. 이번 책 『천국을 향한 기다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꺼내놓지 않거나 결국 하지 않고 책이 끝나는 듯 싶은 이유가 이것일지 모른다. 바로 그 얘기를 먼저 내놓았다면 당신은 거기서 책을 덮어 버릴 것이다. "다 아는 얘기네! 뻔한 얘기잖아! 이런 얘기 말고 더 신박한 거!"

하지만 분명히 해 두자. 복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복음을 거절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환히 드러내 주셔서 진리가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나 있으므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조가 나타난다고 말한다.(롬 1:18-20) 복음을 거절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애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당찮은 용서를 구하는 애원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래리 크랩은 평생 이 말을 했다. 훤히 드러나 있는 진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진리가 너무나 깊고 아프고 소중해서 함부로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텍스트로서의 진리를 냅다 정답으로 내놓기에 우리의 콘텍스트가 너무나 복잡하고, 부조리하고, 아프기 때문이다. 래리 크랩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임을 안다. 진리는 훤히 드러나 있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기에 눈앞의 고통이 너무 크거나, 그것이 전부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리 다 필요 없고, 내가 바라는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나 해결해 주셨으면 싶은 것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욕망을 포장하는 사람들을 "영적 가면"을 쓴 존재라고 쓴 책, 그것을 조장하는 교회를 향한 분노와 소망을 쓴 책... 평생 그 욕망과 싸운 분이고, 그의 모든 책은 이 한 가지 주제를 담았다고 나는 본다.

선명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은 그 모든 책에서 겨누고 있는 칼 끝이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쉽게 '진리로 선포' 하지 못하는 것이다. 훤히 드러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신을 알기에, "영적 가면"을 쓴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하기에 그렇게 돌려서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평생 그렇게 살았던 래리 크랩의 유언 같은 책이 내게로 왔다.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으로 알아들었던 착실한 독자인 나는 유언도 잘 알아들었다. 처음 래리 크랩을 만난 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훤히 드러난 진리를 조금 더 겸손하게 받들게 되어서일 수도 있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한 (이 훤하고 뻔한) 내용을 내게 주는 래리 크랩의 신박한 유언으로 알아듣고 받아 적는다.


1. 지금 있는 자리에 있어라!

어둠, 혼란, 씨름, 실패 가운데 살아라.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최고의 기회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척하거나, 있고 싶어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2.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
한 명이면 된다. 여러분이 정직한 투사라고 믿는 사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잘난 체하거나 비판하길 좋아할 가능성이 낮은 사람, 도와주거나 동정하거나 바로잡거나 꾸짖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 줄 사람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라.

3. 기도하며 하나님과 계속 대화하라.
악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는 추악한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라. 여러분보다 더 확실하게 실패한 사람을 생각하며 극악한 현실을 외면하지 마라. 대신, 죄의 구렁텅이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4. 귀를 기울여라.
귀 기울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여러분이 한 모든 말에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어질 때 그때가 바로 귀를 기울일 때다.

5. 절박하고 겸손한 영혼에 복음 진리가 활활 타오르게 하라.
여러분이 가장 못난 순간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장 선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죄를 완전히 끊지는 못할 것이다. 매일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 대신에 구원, 거듭남, 화해, 즉 경이로운 은혜가 죄인이자 성도인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전할 수 있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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