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과 써야 할 원고, 연구소 지도자 과정을 위해 "읽어야만 하는 책"이 늘 쌓여 있지만, "읽고 싶은 책" 없이 지내기는 어렵다. "읽어야만 하는 책" 역시 알고 보면 다 좋아서 읽는 것이긴 한데, 성격 상 '의무'의 흔적만 있어도 못 견디는 그런 취약함이 있다. 신형철의 시화詩話집 『인생의 역사』는 얼마나 꿀 같은지. 숨 쉴 틈으로 한 편씩 읽기 딱 좋은 시와 짧은 글로 적잖이 위로를 얻고 있다.

여기에 더해 2년 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눈풀꽃>이란 시로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던 루이즈 글릭의 시집이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 세 권을 한꺼번에 사기는 그렇고 『야생 붓꽃』을 먼저 주문했다. 주문하려고 보니 추천사를 신형철 선생이 썼네. 올 가을은 신형철인가 보다! 길고 길었던 화요일 늦은 밤, 아프고 텅 빈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그래도 『야생 붓꽃』이 도착해 있을 테니까. 한가닥 위안의 빛이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뭐가 묻었나? 설마... 한 귀퉁이가 훼손된 책이 왔다. 혹 종이 조각이 붙은 것일지도 몰라, 괜한 희망을 걸고 비닐포장을 뜯었으나 역시였다. 하루 종일 참은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말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 고통을 본다. 고통을 유발한 악도 본다. 그 부조리함이 형언되지 않아서 말도 못 하고 울지도 못했다. 가해자는 오늘도 강단에 서서 마이크를 흔들며 권력의 춤을 추고 있다. 교회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 모임을 마치고 학교에 간다. 

어쩌자고 저녁 학교 가는 길이, 학교 식당의 저녁 식사가, 스치는 사람들이, 자아도취에 빠진 작은 권력들이... 자꾸 나를 절망으로 밀어 넣는다. 꾹 참고 집에 왔건만, 마지막 소소한 절망 하나가 남아 있었다. 냉정하고 무심하게 쪼인트를 날려 애써 버티던 다리를 꺾어버렸다. 파본 『야생 붓꽃』. 파손된 모양 자체가, 오늘 밤 펼쳐 읽을 수 없다는 이 소소한 절망 하나가 견딜 수 없게 서러웠다. 얼마 전, 가슴뼈가 빠개질 것 같은 꿈을 꾼 날이 있었다. 잠을 깨고 나서도 가슴 언저리가 아팠었다. 하고픈 말을 할 수 없는 서러움에 벽을 붙들고, 그러다 가슴을 쥐어짜며 울던(아니 울지도 못했던) 꿈이었다. 치유 글쓰기를 시작한 어간이었다. 그때 그 꿈속의 통증 비슷한 통증, 또는 서러움을 안고 잠에 들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는데 "하나님, 난 공평하신 하나님이 싫어요. 실수 없으신 하나님도요. 그냥 제 편 돼 주세요. 저를 좋아한다면 제 편이 되셔야죠. 편 들어준다고 저 버릇 나빠지고 그러지 않아요. 그냥 다짜고짜 편들어 주세요. 가진 것 없고 억울한 자매들 편 들어주세요. 불공평하고 치우친 하나님 말이에요..."라는 말이(어쩌면 기도가) 툭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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