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한 요리 먹어본 지 오래됐다."
연이은 강의에, 학교 발표에, 급히 마감해야 하는 원고에... "나도 내가 한 음식 먹어본 지 오래됐다." 수능을 한 달 앞둔 현승에게 통 크게 백지 메뉴판을 주었다. "먹고 싶은 거 뭐야? 다 해줄게." "김치찜? 삼겹살이 통으로 들어가 있는 김치찜!" 주문 그대로 제작해서 내놨다. 그나저나 나는 내가 한 음식이 왜 이리 맛있어? 사장님 기분 좋아서 계란찜 서비스도 내보냈다.

몰려 있던 일이 지나가고, 즉 정크푸드의 시간이 지나가고 밥을 좀 해먹을 수 있는 때가 왔다. 늦은 아침을 먹고 나가면 저녁까지 밥 먹을 틈 없는 채윤이를 위해서 아침부터 닭볶음탕을 해야지 싶었다. 마침 또 레슨 시간에 맞추려면 바로 나가야 한다네. 그러면 또 살짝 땡큐지! 나도 여유 있게 준비하고 나갈 수 있으니. "그러면 주말에 해야겠다." 했더니 "레슨 마치고 집에 와서 먹고 갈 수 있어." "끝났어. 안 하는 걸로 마음먹었어. 뭐 사 먹어." 하고 보냈는데...

사장님 마음이 또 좀 그러네. 정말 가스레인지 불 말고, 번갯불에 닭볶음탕을 했다. 11시나 되어 집에 돌아왔다. 늦은 밤에 만난 채윤이가 "엄마, 레슨 마치고 오면서 집앞에서 버스를 내리는데. 닭볶음탕 때문에 너무 마음이 설레는 거야. 버스 정류장 살짝 내리막길이잖아? 나도 모르게 거기서 폴짝폴짝 뛰면서 내려오는 거야. 쪽팔렸어." 했다. 내 마음이 갑자기 폴짝폴짝 뛰었다.

엄마 돌아가시고 한동안 매일 그런 결심을 했다. '아이들과 행복한 추억은 만들지 말자. 나만이 할 수 있는 맛있는 음식도 해주지 말자. 내가 떠나고 없는 자리에서 그 모든 기억이 슬픔이 되고 고통이 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자....' 이런 비합리적 생각을 현명함이라며 붙들고 있었다. 엄마 떠난 자리에서 그리움이 사랑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하는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움은 또 다른 사랑이다. 부재하는 대상은 그리움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

너에게 오늘 메뉴판을 준다. 백지 메뉴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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