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을 두어 주 앞두고 있다. 애들 말대로 '어디 간다고 태워주고, 늦었다고 태우러 나가고...' 그런 삶을 살지 않는 부모라 큰 기대도 없다는데. 이제 와 좀 미안하기도 하고, 수능이 얼마 남지도 않아 마음의 위안이라도 줄까 싶어 때를 얻는 대로 운전기사를 자처하고 있다. 조금 더 자겠다고 학교 셔틀 보내고, 버스 타고 가겠다고 하는 걸 운전해서 등교시키고 왔다. 2,30분 차 안에서 나누는 짧은 대화가 꿀 같다.

현승 : 엄마, 내가 윤리와 사상에서 계속 철학자들을 공부하잖아. 그게 갑자기 순간적으로 떠오를 때가 있어.
엄마 : (잘 외우고 있다는 뜻인가? 뭐라고 반응해야 하지?) 오... 그래?
현승 : (뚱한 얼굴로) 엄마가 굳이 티맵을 또 보잖아. 가는 길이 늘 똑같다고 하는데도 굳이 티맵을 보잖아. 그럴 때 답답한데... 그건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하지 말란다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내 마음을 고치는 수밖에 없어.
엄마 : (부끄러움인지 분노인지 미열이 나지만) 스토아학파 말하는 거야? 불편심?
현승 : 아니. 부동심. 아파테이아(apatheia). 정념에 휘둘리지 않는 것. 지금 같은 상황에서 아파테이아가 딱 떠올라. 엄마가 티맵을 다시 보든 안 보든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 난 거기에 휘둘리지 않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면 조금 괜찮아져.
엄마 : (뭔가 자존심 상하고, 대견하고) 오... 생활 속 철학인데!
현승 : 철학자들의 말이 진짜 다 우리가 조금씩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더 알고 싶은 게 많아.
엄마 : 맞아, 철학은 제대로 살고 싶은 모든 사람이 다 각자 가진 생각이기도 해.
현승 : 그래서 철학사를 배우는 게 참 좋아. 크게 이해하게 되거든.
엄마 : 오, 엄마도 그런 생각 하는데... 조각조각 영성 공부를 했잖아. 영성사를 배우는 게 중요하더라고. 한 줄로 꿴다는 게... 엄마도 요즘 영성사 공부가 너무 재밌는데...
현승 : (뚱하게)그래. (철학, 아파테이아 얘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출발할 때 굳이 티맵 한 번 더 보느라고 시간 보내지 말자고, 진짜 짜증 난다고 하고 싶은 거였는데... 그 말은 귓등으로 듣고 철학 얘기만 하는 게 더 짜증 난 모양. 도통 얼굴이 펴지지 않고, 아파테이아가 이루어지지 않는 모양)
엄마 : 현승아, 너 정말 멋있어. 이게 공부의 여러 차원이 있거든. 스토아니 에피쿠로스니 이런 걸 달달 외우는 머리가 있고, 그 의미를 알아 들으면서 외우는 게 있고, 그 의미를 알아들으면서 나에게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지식 너머 지혜야. 상황을 읽는 지성과 자기 성찰 능력이 있어야 지혜가 되는데... 우리 현승이는 그걸 다 갖춘 것 같애. 아흐, 우리 현승이 정말 멋있어! 나는 청년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 있는 청년은 거의 못 만나봤어.
현승 : 그건... 아, 아니야.
엄마 : 왜? 그건 니가 엄마 아들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거라고?
현승 : (계속 뭔가 못마땅)응.

이후 스토아, 에피쿠로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흄... 짧은 철학 토크를 했으나 '굳이 티맵을 보는' 엄마에 대한 짜증은 해결하지 못하고 하차하신 듯하다. 아파테이아에 이르지 못했다. 철학, 아무리 배우고 깨달아도 삶으로 도달하는 건 녹록치 않은 것 같기도 하고, 수능 철학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고. 여하튼 꼬마 철학자는 이렇게 무르익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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