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가 끝나고 저녁 바람이 선선해질 즈음엔 나뭇잎들에 '노랑 끼'가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초록에 노랑을 섞으면 연두가 되지만, 초봄 새 잎이 나올 때의 그 연둣빛이 아니다. 여름 끝, 가을 초입은 '노랑 끼' 있는 잎을 좋아한다. 스러짐의 계절을 받아들일 준비라 여겨져서일까? 잠시 어정쩡한 빛을 띠다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제각각 숨겨둔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붉은색, 노란색 단풍이 들면 나무 인생 가장 화려한 시절을 살게 된다. 그러나 그 영광이 짧다는 것도 나는 안다. 화려한 영광 뒤에서 이들은 힘을 빼고 있다. 꽉 쥔 손을 펴며 힘을 빼고 있다. 바람 한 번 휘리릭 불면 우수수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떨어져 뒹굴며 버석버석 말라 이리 뒹굴고 저리 차이고 하다 쓰레기가 되어 자루에 담겨 어디론가 사라진다. 그리고 텅 빈 나뭇가지... 그 텅 빈 나목 사이로는 파란 하늘이 훤히 보인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가르침이며 기도인가.
 
이게 순리인데 말이다. 송충이 놈들이 기승을 부려 탄천의 나무들이 때 이른 이상한 나목이 되어 버렸다. 나무 인생 얼마 되지도 않을 색의 향연, 그 절정은 누려보지도 못하고 갉아 먹힌 잎들이다. 하늘을 배경으로 깔끔한 선으로 남은 겨울 나무가 아니다. 가지 끝 잎맥이 그대로 남은, 한 많은 여인의 머리카락 같은 모양새로 슬픈 하늘을 드러낸다. 송충이에게 화가 났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바닥에 기어 다니는 송충이를 발견하면 콱 밟아 버릴까 싶었다. 그렇다고 콱 밟을 수도 없고... 한두 마리가 아니라 지뢰를 피하듯 걸어야 하는 구간도 있었다. 바닥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송충이를 피하며 걷는 길. 갑자기 꿈틀꿈틀 기어 다니는 송충이들이 귀여워 보였다. 픽 웃음이 나왔다. 송충이가 뭔 죄야? 송충이는 송충이 본분에 충실할 뿐인데...
 
언젠가 불곡산을 걷다 마주친 실뱀과의 만남도 떠오른다. 작은 오솔길을 가로지르는 실뱀을 발견하고는 소리도 못 지르고 그 자리에 얼어 붙어 있었다. 잠시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얼어붙었었는데, 정신 차리고 다시 걸으며 생각하니 뱀은 뱀의 길을 갔을 뿐이었고. 길 건너는 뱀을 보고 혼자 기절할 정도로 놀라 나자빠진 건 내 안에서 일어난 일이지 뭔가. 송충이는 송충이의 일을 하고, 나무는 나무로 서서 제 주변의 생명체들과 어우러지고 있다. 단풍 화려한 나무, 우수수 떨어지는 예쁜 장면을 보겠다는 건 내 바람이지 나무의 뜻인지 아닌지는 어찌 알겠는가. 송충이에 갉아 먹혀 저 모양이 되어도, 나무가 괜찮다는데 내가 왜 슬퍼하고 화를 내고 한다는 말인가.
 
송충이는 송충이의 일을 하고,
갉아 먹힌 잎으로 나무는 제 운명의 남다른 가을을 살고,
나는 나의 2023년 가을 길을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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