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 씨는 시를 쓴다.

시를 쓰니 시인이겠지만 시만 쓰는 것은 아니니 시인인 것만은 아니다.

패터슨 씨는 패터슨 시를 운행하는 버스 운전기사이다.

패터슨 씨는 월화수목금, 아침마다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난다.

포즈는 조금씩 다르지만 자그마한 아내를 품은 채로 아침을 맞는다.

잠든 아내에게 사랑스런 입맞춤을 하고,

아내의 단잠이 깰세라 각 잡아 개켜진 옷을 살짝 들고 침실을 나온다.

우유에 만 씨리얼을 덜렁 앞에 놓고 우그적우그적 씹으며 식탁에 놓이 상냥갑을 관찰한다.

도시락 통을 들고 출근을 하고, 

버스 운행이 시작되기 전, 운전석에 앉아 아침의 영감을 바탕으로 시를 쓴다.

시인 패터슨을 버스 드라이버의 운전석으로 불러내는 것은 동료의 노크이다.

그리고 아침 인사.

안녕, 어때? 어, 사실은 별로야. 

염려와 짜증을 일발장전 하여 살짝 건드려도 다다다다 불평 투하이다.

동료의 염려와 짜증을 뒤로 하고 버스는 출발한다.

코너를 돌고, 작은 폭포 옆을 달리는 패터슨 시의 버스는 뭔가 몽롱하다. 


패터슨 씨의 일상은 라임이 딱딱 맞는다.

아주 작은 변주가 있고, 아침 점심 저녁 일상의 흐름은 월화수목금 운율이 잘 맞는다.

시의 운율은 잘 모르겠다.


시를 위한 시인가, 사랑을 위한 시인가.

시인들을 보면서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내게 사랑이란 로맨스가 아니다. 

일상이다. 일상의 사람, 가장 빈번하게 얼굴을 마주하고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사람,

에 대한 마음이다.


패터슨의 시는 식탁에 놓인 성냥갑으로 시작하여 아내에 대한 절절한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패터슨은 정말 아내를 사랑하는 것 같다.

뭔가 철없어 보이는, 아슬아슬한 아내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지지한다.

물론 시가 끝나지는 않는다.

다만 시를 적은 비밀노트가 갈기갈기 찢기는 것으로 일단의 시가 끝나게 된다.

아내가 아들처럼 키우는 개에 의해서 패터슨의 비밀노트는 찢어발겨지고 만다. 상실감.

주말에 일어난 일이다.

그 주말은 어떤 주말인가 하면, 패터슨 시의 진가를 알아주는 아내가 복사본을 만들겠다던 주말이다.

혼자 보지 말고, 복사본을 만들어 남기자! 알리자! 이번 주말이다!

아내의 설득에 내키지 않는 오케이를 했던 바로 그 주말이다.


일상과 예술 사이의 성찰 또는 헛갈리을 위해 감독이 놓은 여러 개의 덫에 걸려 들었다.

주말에 열리는 마켓에서 머핀을 팔아 대박 내겠다는 철부지 아내의 바램은 실패가 될 줄 알았다.

패터슨의 시는 주말을 기점으로 어떤 전기를 맞이할 줄 알았다.

시는 잃고, 머핀은 대박이 난다.

어쩌면 패터슨에게 시는 잃어도 좋은 것이다. 

다만 관객에겐 조금 불편한, 손해 보는 듯한 패터슨의 월화수목금 사랑과 일상이 잘 흘러가고 있으니

그게 어디냐.

뜬금없이 나타난 일본 사람이 주고 간 새 노트에 시는 다시 씌여질 것이다.


패터슨을 닮은 한 남자를 알고 있다.

시를 쓰던 남자였다. 

이제는 시를 쓰지 못한다.

시 대신 말을 빚어 공기 중에 흩어 놓는 것이 그의 일이 되었다.

주말 밤 거실 바닥에 찢겨 흩어진 패터슨의 비밀노트가 차라리 명예로우리.


패터슨의 시가 사라져도 버스 운전사 패터슨의 

아무렇지 않은 일상은 아름다운 영화가 되듯

패터슨 닮은 남자의 떠벌이지 않는 사랑 역시 마지막까지 남을 아름다움이다.


그 남자의 비밀노트, 어렵게 고르는 말의 명예를 지켜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다면.

그럴 수 없지만.

글과 말이 사라져도 고이 남겨지고 지속되는 일상이 있으니........






내 맘에 한 노래 있어 14

 


말보다 표정과 눈동자가 더 크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수심 가득한 눈동자에 펴지지 않는 표정이 이미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아냐, 별일 없어, 잘 지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오히려 별일 없다는 말이 더 큰 어려움 속에 있다는 뜻일 터이다. 답도 없는 내 얘기 해봐야 상대에게 걱정만 끼칠 뿐이거나, 온전히 이해받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별일 아니다, 별일 아니다. 괜히 나 혼자 힘들어 하는 것이다자기최면의 말일지도.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었네

 

우리 어머니의 찬송이기도 하다. 엄마가 낮고 작은 소리를 읊조리듯 저 찬송을 부르고 있다면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딴 근심이 무지 많을 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져야할 때 기도하듯 노래하셨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는 눈으로 전하는 메시지와 말이 다른 경우와 같다. 내 마음에도 이 찬송이 크게 울릴 때가 있다. 삶의 무게에 무릎이 꺾이며 휘청거리는 순간이다. 사람들 앞에서는 미소 짓고 괜찮아요, 잘 지내요, 견딜 만 해요하고 돌아서서 눈물지으며 부르는 노래이다.

 

단 한 사람, 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단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그 한 사람만 있다면 결국 삶을 등지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는 않는다고들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마주 앉아 실은 조금 힘들어라고 말하는 순간 대개 근심의 보따리가 봉인해제 된다. 풀어 놓다보면 조금 힘든 게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 이 찬송이 그러하다. 딴 근심 없다며 시작한 찬송의 나머지 가사들은 오히려 딴 근심들의 나열이다. 흥얼흥얼 따라 불러 그 짐 보따리에서 풀려 나온 것들은 우리 모두의 핵심적 고통이다.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한숨(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늦어지는 결혼, 쉽게 찾아지지 않는 진로로 오지 않은 내일은 희망보다 두려움이다. 누구를 사랑한다 해도 나 같은 사람 누가 좋아해주겠나싶어 스스로 거절당해버리고 고백조차 하지 못하는 두려움이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끼리는 좋은 관계로 잘 지내는 것 같아 스스로 외톨이 됨이다. 이 모든 압박과 두려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생각하니 나오는 것은 한숨 뿐. 친구들은 흔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내게는 도달하지 못할 삶이다. 그 이유가 단지 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더욱 작아지고 누추해질 뿐이다. 돈이 있다면 이 불안과 가족의 불화까지도 싹 해결될 것 같다. 돈만 많이 준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는 유혹에 빠져들기도 한다. 두려움과 한숨과 궁핍함을 담아 꽁꽁 싸맨 우리의 짐보따리여.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찬송을 입에 붙이고 사시던 우리 어머니는 기도응답 체험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산 증인이다. 소중한 재봉틀을 도둑맞았는데 기도로 찾았다든가, 오직 기도로 분열되어 무너져가는 교회가 봉합되었다든가, 남편을 일찍 여의고 맨주먹으로 아이들을 키웠지만 훌륭하게 잘 키워냈다는 식의 이야기가 끝도 없다. 그렇게 따지면 딴 근심 없다며 슬쩍 꺼낸 얘기는 알고 보면 여러 근심 얘기이고, 결국의 근심은 기도제목이 되었고 그 기도제목은 모두 응답되었다는 그 흔한 은혜의 깔때기이다.

 

과연 그 내용이 팩트일까 아닐까를 가지고 괜한 트집을 잡아 엄마에게 싸움을 걸어본 적도 있다. 하나님께 마음이 삐뚤어지면 괜히 엄마의 찬송을 신파조라 홀대하며 귀를 막기도 했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찬송보다 기도의 본질을 더 잘 담을 수 있을까 싶다. 표정에, 눈빛에 가득한 근심을 알아봐주는 이에게 속 시원히 털어 놓고 싶은 마음의 고통. 그것을 쏟아놓는 장소와 대상이 십자가 그늘 밑이 되는 것이다. 산 같이 버티고 있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믿쓉니다, 포인트쌓는 것만이 기도가 아닐 것이다. 두려움과 가난함, 무기력의 한숨. 보따리 안에 꾸겨 넣은 것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진실한 기도의 시작이다. 진솔한 고백을 어떻게 시작하지, 무슨 말로 시작하지 하다 적당히 예의를 차리며 에둘러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주님, 제가 당신 안에 있는데 뭐 딴 근심이 있겠습니까그 말 너머에 담긴 두려움과 무수한 딴 근심을 이미 보아주시는 분이 금방 나를 무장해제 시키실 것이다. “실은 두렵고 한숨만 나는 저의 궁핍함이 부끄럽고 화가 나요.” 그러면 그분과의 진짜 만남이 시작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간증이 하나둘 쌓여갈 것이다. 내 어머니의 믿기지 않는 기도의 여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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