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참 정직하다. 마음의 진도에 맞춰 사느라 못 돌봐줬다 싶으면 어김없이 신호를 보내온다. 지난 주에 명절을 앞두고 일주일에 네 번 손님을 치뤘더니(한 번은 밖에서 식사를 하긴 했지만) 입안에 염증이 심해서 잠을 설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이 지점에서 지나친 찬사와 긍휼히 여겨주심은 모두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ㅎㅎㅎ)


암튼, 어젯밤 한낱 입안의 염증 따위가 치통과 머리 전체를 욱신욱신하게 하는 두통까지 유발하는 바람에 잠을 설치고 아침부터 병원을 찾았다. 두 아이가 성경학교 가 있는터라 혼자 여유있는 시간? 콜! 하고 책도 챙겼다.


병원에서 의사의 표현대로 염증 부위를 지지고 나서 정말 눈물나게 아파서 도대체 어디가 아픈 지도 가늠이 안 되는 상태로 카페를 찾았다.





집 근처에 교회에서 운영하는 카펜데 몇 번 갔다가 일찍 문을 닫거나, 휴업인 날이라서 헛걸음을 했던 곳이다.  본격적으로 집에서 커피를 한 이후로 진짜 밖에서 사 마시는 커피가 어찌나 아까운지...  그래도 여긴 교회에서 하는 커피가 싼 곳이니깐 괜찮아 하는 맘으로 갔다.


오픈 시간은 10시로 되어있고 내가 간 시간은 11시가 훨 넘었는데 막 청소기를 돌리고 있네. 그럴 수 있지.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주문을 받으신 집.사.님! 바로 집사님이셨다. 전혀 카페와는 상관없게 생기신 여전도회 집사님. 주문을 받으신 집사님의 표정에 당황한 빛이 살짝 감돌더니 메뉴판 같이 생긴 것을 들여다보시곤 어설픈 손놀림으로 커피를 갈아 내리고, 에스프레소 기계에 떡 허니 머그잔을 갖다 대고 내리신다. 아~ 웬지 불안 불안.... 다행히 자동머신이라 적당한 시간 후에 기계는 멈췄다. 그리곤 이 집싸님! 바로 머그컵을 들여다 보시곤 다시 아까 그 메뉴판 같은 걸 번갈아 보시곤...
'다 된건가?' 하면서 날 보시네.
'그런 거 같은데요' 했더니 바로 머그잔 째로 나한테 내미는 거.ㅠㅠㅠㅠ
'저....... 자.....잔이........ 에스프레소  잔이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아! 쪼그만 잔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러면서 싱크대를 막 뒤지시더니
결국 못 찾으시고 '제가 오늘 처음이라서요'







결국 쟁반도 없이 커다란 머그잔에 바닥에 깔린 에스프레소 커피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으니 갑자기 열이 막 올라오면서 입 안에 통증이 최고조에 이른다. 아까 돌리던 청소기는 계속 돌아가고.... 그 사이 이 교회 사모님이시면서 바리스타이신 분으로 추정되는 분이 등장하셨다(이 교회 담임목사님 사모님이 커피와 지역사회 영혼들을 사랑하시와 카페를 직접 관리하신단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사모님과 집사님 두 분이 에스프레소 잔에 관한 얘기를 하시는 걸 들었고, '따로 있지' 하는 얘기도 들었지만 머그잔에 에스프레소 홀짝거리는 내게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셨다. 여전히 청소기는 계속 돌아갔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단 치료받은 입 안이 너무 아팠고, 돈 천원에 커피 한 잔 주고는 손님 대접도 안해주는 게 서러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물론  청소기 소리는 너무 시끄러웠고 .... 아마 몸이 힘들어서 좀 감정이 복받쳤을 것이다. 암튼 책이 한 줄도 읽혀지지 않았다. 다 마시지도 못한 에스프레소 담긴 머.그.잔.을 집사님과 사모님 두 분 앞에 조용히 갖다 놨다. 사모님은 집사님께 카페모카 만드는 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그 위에다 계피 가루를......'  너무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시는 관계로 입안의 통증으로 눈물나게 아픈 어떤 여자가, 기분좋게 싸고 맛있는 커피 한 잔을 하면서 독서를 하고 가려던 여자가 아픔에 서러움까지 안고 카페 밖으로 나가는 것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주 의례적으로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이런 말 한 마디라도 뒤통수에서 들려왔으면 싶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그대로 집으로 돌아올 순 없었다. 물론 집에는 최고의 커피가 있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다. 소비자가 되기로 결심한 날이 아니던가? 던킨으로 갔다. 들어서자마자 '어서 오세요. 던킨 도넛입니다' 아, 이 존중받는 느낌!!!!!!!!
주문을 하려는데 앞에 주문하시는 분이 패밀리 팩인지 뭔지 하이튼 20개 정도의 도넛을 고르고 있었다. 어렵고도 어려운 도넛 이름을 긴장된 상태로 읽어 주문하느라 시간이 보통 걸리는 게 아니었다. 정서상태가 불안한지라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내 차례가 됐을 때는 폭발 직전이었는데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는 젊은 알바의 한 마디에 맘이 확 녹아 내린다.








커피와 도넛 하나 가격으로 4100원을 치뤘다. 아~ 4100원 너무 싸다. 내가 지금 산 친절과 여유와 신선한 커피의 가치는 41000원 이어도 족하다. 책도 줄줄줄 읽힌다. <로맨틱 러브에 대한 융 심리학적 이해>가 어찌나 감미롭게 읽히는지 말이다.
내가 던킨의 친절함이 내 주머니의 돈을 겨냥한 것임을 모를 리 있는가? 친절한 알바씨 주문의 끝에 마지막으로 묻는 감미로운 이 한 마디 '더 필요한 건 없으시구요?' 이 말에 담긴 의미를 내가 모르겠는가?



말하자면 차라리 육적인 인간을 육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첫 번째 갔던 카페를 어디선가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쉼과 휴식의 문화공간..... 지역사회에 봉사.....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런 얘기들이 나왔을 거다. 이 카페는 어찌나 지역사회를 섬기고 돈에는 관심이 없는지 투명한 자선함이 있을 뿐이었다. 잔돈 거슬러주는 것도 없고 그저 그 통에 1000원을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내 식대로 오버를 하자면 그러니깐 이거다.
'카페를 하는 우리는 당신의 돈 따위는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싼 가격에 이만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이윤도 남기지 않고 봉사를 하겠습니까. 바로 여러분들의 영혼을 사랑하고 영혼을 겨냥하기 때문입니다. 돈이요? 그런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에 우린 관심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손해를 보고 운영을 하더라도 당신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래서 당신의 영혼이 구원 받는다면 더 큰 기쁨이 없겠습니다.



그런데 어쩐다.
커피는 영적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라 육적으로 마시는 것이니......






지역사회에 봉사하는 영적인 커피, 그 커피에 위로 받지 못한 몸과 마음과 영혼이 자본주의의 최전선에 있는 육적커피 던킨에 위로를 받은 날이다. 진통제의 효과가 나타날 시점이었는지 던킨 커피 한 잔을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입 안의 통증이 잊혀질 정도로 미미해져 있었다.


지역사회에 공헌하는 자뻑 9단의 영적 바리스타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이
지역사회에서 돈을 버는 육적 알바님의 눈에는 사람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사람은 육적이기도 하고 영적이기도 한 존재이지만 오늘 난 육적인 존재로서 커피를 마시고 싶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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