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먹고 앉아 커피 마시며 노닥거리고 있는데 현승이가 가스레인지 불을 켜 프라이팬을 달구기 시작했다. 냉동 볶음밥을 만들어 점심 도시락을 챙겨 나가려는 것이다. 알아서 스스로 제 먹을 것 챙기는 뒷모습에 어찌 저릿하게 마음 어디가 아픈 것이냐. 수능 접수를 하고 나서 인지 긴장하고 위축된 등짝이 눈에 어른거려 온종일 둔탁한 통증이 가슴에서 가시질 않았다. 스터디 카페에서 돌아와 배고파 죽겠다는 현승에게 해줄 수 있는 게 기도 밖에 없어서 명란계란말이를 했다. 고기에 파김치만으로 좋아했겠으나, 냉장고 뒤져서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감동을 주고 싶었고, 그 감동 뒤에 "엄마는 정말 네 편이야!" 응원도 보내고 싶었고, 엄마가 바라는 건 너가 너 자신이 되어 행복한 것이라는 사랑을 전하고 싶었다. 그게 전해져 봐야 오늘 당장 지고 있는 삶의 무게와 부담을 더는데 무슨 도움이 되겠나 싶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해줄 수 있는 게 기도 밖에 없어서...

명란계란말이를 해준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작전명 초파리  (1) 2023.10.03
파콩불  (0) 2023.09.21
채워짐  (0) 2023.08.12
들기름과 카놀라유  (0) 2023.08.12
호사, 에어컨 틀고 군고구마  (0) 2023.08.10

 

2023년 뜨거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했던 교회 수련회 '이우 가족 힐링캠프'를 마쳤다. '힐링 캠프 in 힐링 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맡아서 그 준비로 조용히 바쁜 몇 주간을 지냈고. 비밀에 부친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역할을 맡은 분들과 열세 개의 단톡방을 운영하며 준비하면서 "나 이벤트 회사 실장님 같애" 농담도 했는데. 잘 마쳤다.
 
'상처 입은 치유자'가 수련회 보이지 않는 주제였다. 내가 맡은 '힐링캠프in힐링캠프'가 그랬고, 남편의 설교도 가만 톺아보면 내내 그 얘기였다. 내 상처가 완전히 다 낫고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상처 치유를 위해 내 마음을 잇대는 것이 오늘 우리를 초대하시는 자리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강의에 가끔 인용하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랍비 요쉬아 벤 레비는 랍비 시메론 벤 요하이의 동굴 입구에서 예언자 엘리야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물었습니다.  
“메시아가 언제 오실까요?”
“가서 그분에게 직접 물어보시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성문에 앉아 계십니다.”
“그분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그분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앉아 계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한꺼번에 다 풀었다 다시 싸매지만, 그분은 한 번에 한 군데씩 상처를 풀었다 다시 싸매십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아마 내가 필요하게 될 거야. 그때 잠시도 지체하지 않기 위해 나는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만 해’라고 혼잣말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 커다란 그림 <탕자의 귀향>은 어떻게 하다 저기 걸려 있게 되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 '탕자의 귀향'으로 연극을 한 조가 있었는데, 그 조에서 걸어 놓으신 건지...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저 그림 하나로 쓴 <탕자의 귀향>은 상처 입은 치유자를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서사인데 말이다. 
 
그 그림 아래에서 노는 아이들! 수련회의 꽃은 역시 아이들이었는데. 강당 한쪽에 돗자리가 깔려 있고, 아이들은 저기 앉아 놀다가, 뭐든 따라 하다가, 뒤에 넓은 공간에서 뛰다가... 조에서는 마스코트 역할을 하면서 생기를 불어넣기도 하고. 아이들 생각만 하면 사랑이 차올라 내 입술을 깨물게 된다. 하필 저 그림 밑에 아이들 자리가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의 그늘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는 아이들! 이런 사진을 건지다니. 정말 멋진 2박 3일의 시간이었다.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Panta Rhei, 모든 것은 흐른다  (0) 2024.02.10
7년  (1) 2023.11.22
둘 하루  (0) 2023.08.16
Sabbath Diary 45: 목사인 게 도움이 됨  (4) 2023.08.14
지옥 라떼  (0) 2023.07.23

 

광복절 휴일. 전날 월요일에 '놀월 안식일' 루틴으로 놀았는데 아이들이 각자 공부로 바쁘니 연이어 이틀을 둘이 놀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영화 저 영화를 마음으로 전전하다 그냥 집에서 각자도생 휴일을 보내기로 했다. 수련회를 앞둔 터라 부담 때문에 놀아도 노는 게 아닐 테니. 각자 안방에서 거실에서 할 일을 하다 끼니때가 되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어나 식탁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어제 남은 떡볶이와 순대로 순대볶음 만들어서 한 끼 먹고. 또 냉장고 털어서 카레로 한 끼 먹고.  따로 또 같이 제각각 모양의 유리잔에 아이스 핸드드립 커피도 한 잔. 혼자인 듯 둘이 같이, 둘인 듯 혼자서 휴일 하루 잘 보냈다.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7년  (1) 2023.11.22
상처 입은 치유자의 그늘  (0) 2023.08.23
Sabbath Diary 45: 목사인 게 도움이 됨  (4) 2023.08.14
지옥 라떼  (0) 2023.07.23
꽃보다 남자들  (1) 2023.06.06

 
퇴촌에 드라이브 갔다가 K 목사님 밥 사주고 올까? 오케이!
오늘 안 된다네. 남한산성 시장에 김치 사러 갈까? 오케이!
그냥 카페 갈까? 오케이!
와아, 이건 사진 찍으라는 프레이팅이네.... 찰칵찰칵... 찰칵... 아, 잠깐 또 찰칵... 잠시만! 찰칵...
(촬영 끝나도록 하염없이 기다려 줌)
수련회에서 내가 맡은 프로그램 의논 좀 할까? 들어볼래? 오케이!
안 되겠다, 그냥 책 보자. 오케이!
에어컨 춥다. 갈까? 오케이!
돌고래 상가 가서 반찬 살까? 오케이!
기름 넣고 세차할까? 오케이!
저녁은 벽산아파트 장에서 떡볶이 사서 먹을까? 오케이!
나 떡볶이 사는 동안 세탁소에서 수선한 바지 찾아줄래? 오케이!
애들 삼겹살 숙주볶음 해주려고. 숙주 반 봉지만 씻어 줄래? 오케이!
 
기본적으로 안 되는 것이 없음.
 

당신 참 온유하고 수용적인 사람이야. 뭘 말하면 안 된다는 게 없어. (욕구가 뚜렷하고 안 되는 게 많은 나로서는 존경스럽지,라는 말은 하지 않음) 기본적으로 성찰적이고. 그래서 보통 사람, 보통 남자와는 차원이 다른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데 중년 고개를 넘어가면서 보니까, 위험한 지점이 있더라. (가끔 벽처럼 느껴진다는 말은 하지 않음. 아슬아슬했는데 '위험한 지점' 정도의 표현을 찾아냄) 중년의 고개를 넘으면 누구든 내 성격의 빛이 아닌 그림자를 마주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거 진짜 어렵지. 보통 남자들이 그 과업을 제대로 하는 걸 잘 못 봤어. 생애 전반에 착하게 살아온 사람일수록 더 어려운 것 같다. 당신도 그런 면에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해. (딸이 그 지점에서 답답해 죽는다는 얘기는 안 했음) 다행인 건 당신이 설교하는 사람이라는 거야. 아니, 단지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설교한 대로 살기 위해서 애쓰는 목사라는 거지. 설교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뼈아픈 한 발을 내디디는 걸 알아. 당신이 목사인 것이 당신 자신에게, 내게, 아이들에게 진심 도움이 되는 것 같아. 소명 때문에 당신을 바꾸려 애쓰는 고군분투를 아이들도 알아. 당신 좋은 목사야. (좋은 남편이라고는 하지 않았음. 정확히 말하면 목사 점수보다 남편 점수가 조금 높다고 하는 게 좋겠는데... 남편 점수는 유동적이라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데… 요즘 좀 하락세라 각성이 필요하다는 것도 여기서만 밝혀둠)

'JP&SS 영혼의 친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처 입은 치유자의 그늘  (0) 2023.08.23
둘 하루  (0) 2023.08.16
지옥 라떼  (0) 2023.07.23
꽃보다 남자들  (1) 2023.06.06
감동란  (0) 2023.04.05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오랜 시간 혐오한 죄를 회개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십자가 상'에 대한 혐오이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회개한다. 그 불경한 마음을, 그 교만한 냉소를 회개한다. 친히 십자가 지신 나의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마음 다 안다. 그 혐오와 냉소가 나를 찾는 진정한 마음이었던 것을 잘 안다." 하시는 줄 알지만. 그럼에도 머리를 조아려 그 높아졌던 마음을 회개한다.
 
집 베란다 앞에 거대한 십자가 상이 있다. 어쩌면 저렇게 주변과의 조화를 철저하게 배제한 크기이며 배치일까,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저 십자가 상만 없으면...' 딱 마음에 드는 뷰라고 생각했었다. 이게 날이 갈수록 저 십자가가 좋아지니 무슨 조화냐? 새벽 어스름한 하늘을 배경으로 말없이 섰는 그리 예술적이지 않은 십자가가 자꾸 좋아진다. 십자가는 그대로이건만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배경이 바뀌어서일 것이다. 폰 카메라 앨범에는 온갖 배경의 저 십자가 사진이 많아서 따로 폴더를 만들어야 할 지경이다.
 
십자가 상이 싫었지 예수님이 싫었던 적은 없었다. 십자가 상이 견딜 수 없었던 시절, 예수님을 향한 갈망은 더 절절했다고 이제는 더 확신있게 말할 수 있다. 지난주 어느 날,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있던 저녁이었다.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농담 따먹기 하고 있는데 베란다 밖으로 무지개가 떴다. 천공의 성 라퓨타 구름에서 뻗어 내리는 사다리처럼 기묘하게 떨어지는 무지개라니! 게다가 그 배경으로 구름을 향해 치솟은 십자가라니! 아, 이런 이미지를 나의 하나님 말고 누가 만들어 보일 수 있겠냐고!
 
남편에게 보냈더니 남편 있는 교회 쪽 하늘도 예사롭지 않은지, 남편은 그 시각 하늘 사진 사진 몇 장을 전교인 단톡방에 올렸다. 저 십자가. 교회 강대상에 놓인 사이즈도 모양도 참으로 적절하고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어떤 저녁 하늘을 배경 삼아 팔을 벌리고 서 있다.  이 역시 창조주 아닌 그 누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이미지가 아니다. 애초 화해한 상태로 가까워지고 멀어지고 하는 나의 예수님과 더 가까워진 저녁이었고, 십자가 상과 다시 화해하는 순간이었다.
 
베란다 앞 십자가 트라우마(?)는 10 년도 거슬러 올라가는 시절 명성교회 앞에 살던 시절의 것이다.  (2011.11.17 명성의 복이여, 영원하라) 매일, 매주일 마주하는 소음과 주차난의 불쾌감이었고, 한창 조용히 치열하던 신앙 사춘기 앓이의 통증이기도 했다. 교회 가야 하는 시간이 되면 배가 꼬여 거실 바닥에 뒹구는 일도 있었고, 어떻게도 해소되지 않는 차가운 분노가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실제로 온몸이 아프기도 했었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다녔던 교회에는 십자가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건물 안팎으로 십자가가 하나도 없었다! 아, 그랬구나!  그 정신이 좋고 자랑스러웠던 젊은 시절에의 부끄러움과 억울함의 몸부림이었는지 모르겠다.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로 가득 찬, 무덤 같은 도시의 밤 사진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남아 있다.  그 붉은 무덤 십자가로부터 선을 긋고 "다른 크리스천"임을 피력하고파 '지성의 제자도'에 탐닉하던 시절도 있었네.

십자가 없이 내 인생을 설명할 수가 없구나. 십자가는 늘 그대로였는데, 계절 따라 날씨 따라 배경이 바뀌면서 내 마음의 풍경이 달라졌다. 날씨만큼이나 쉽게 바뀌는 내 마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대로이건만, 질곡의 시간을 견딘 십자가가 되었다. 주일 예배 찬양 중에 '어저께나 오늘이나'를 부르다 이 가사에 울컥했다. 
 

세상 지나고 변할찌라도
영원하신 주 예수 찬양합시다

 

 
 

명성의 복이여, 영원하라

지난 2년간 내 집 베란다에 앉아 명성이 자자한 이 교회의 대성전 건축을 목도하게 하셨으니 주의 은혜가 크시도다. 땅을 다질 때부터 온갖 공사 소음으로 환란을 주시어 내 인내를 연단하셨고,

larinari.tistory.com

 

'마음의 여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0) 2023.11.24
쵝오! 어쨌든 쵝오!  (0) 2023.09.29
하늘을 품은 땅  (3) 2023.07.19
종강의 밤  (2) 2023.07.02
취향저…격려  (2) 2023.06.01


속이 꽉 찬 수제 샌드위치.
꽉 채워지는 어떤 마음.

염미정은 단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다가
어렵게 어렵게 구씨를 추앙하고 추앙받으며
드라마 마지막 회에 겨우 채워졌는데…
며칠 텅 비었던 나는
샌드위치 하나로 꽉 채워졌다.
 
감사합니다!
기꺼이 맡고, 기꺼이 나누는 이가 주는 풍성함.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콩불  (0) 2023.09.21
격려를 주고 싶었어  (2) 2023.08.31
들기름과 카놀라유  (0) 2023.08.12
호사, 에어컨 틀고 군고구마  (0) 2023.08.10
설레는 말  (0) 2023.08.10

태풍 카눈으로 종일 비가 오는 날에

김치참치 부침개를 했다.

사진으로 보이진 않지만 참치도 있다.

아무 생각 없이 기름병을 꺼내 부쳤다.

카놀라유이다.

맛있게 먹었다.

두 번째 판 주문이 들어와서 다시 구우려는데,

아, 들기름! 

들기름은 냉장고에 있어서 바로 생각을 못했다.

두 번째는 들기름에 들들 구웠다.

사진으론 구별되지 않지만 

위는 카놀라유, 아래는 들기름이다.

고소함의 차원이 다르다.

 

사진은 많은 '찐'을 담지 못한다.

 

'음식, 마음의 환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격려를 주고 싶었어  (2) 2023.08.31
채워짐  (0) 2023.08.12
호사, 에어컨 틀고 군고구마  (0) 2023.08.10
설레는 말  (0) 2023.08.10
굽은 자로 직선을 긋는  (4) 2023.07.27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