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사람들과 같은 음식을 하고, 똑같은 갈등을 반복하는 명절 수십 년이다. 명절만 없었다면, 저 사람만 없었다면 하던 시간들이었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사라지고 명절도 힘을 잃었다. 어머니의 명절 이야기이다. 몸의 한 부분으로 기울어 수십 년 살아와 틀어져 고착된 관절 같은 명절이다. 같은 사람과 같은 음식을 하며 같을 갈등을 겪느라 마음 어디가 기울어 틀어져 버렸지만 명절이 사라졌다. 명절과 함께 사람들도...
명절 전날 여자들이 모이는 시간, 만드는 음식, 일이 끝나는 시간, 명절 당일 아침에 모이는 풍경, 어정쩡한 예배, 식사, 그리도 점심, 또 저녁 손님... 어쩌면 그렇게 어느 해 명절을 따로 특정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이 찾아왔었다. 명절 전후의 걱정 근심, 그리고 분노와 피해의식도. 매 명절마다 같았다. 그런데 이제 매 명절마다 "어떻게 모이지? 뭘 먹지?"를 아주 새롭게 고민하고 창의적으로 계획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채윤이 현승이가 각각 공부로 시간을 낼 수 없다는 특별한 상황을 백분 활용하여 또 다른 모양의 추석이다. 어머니 모시고 셋이 비싼 식사하고, 걷고, 차 마시는 추석 전야를 보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북적대는 식구가 싫었고,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어머니, 조용히 단출한 음식을 하고 싶었던 어머니에게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고 단출해도 너무 단출한 노년의 시간이 왔다. 혼자 지내시는 것이 외롭고도 외로우시다. 최선을 다해 도와도 어머니 일생의 서사가 담긴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해결할 수 없으니 근심이 쌓여가고. 그래도 힘을 내어 할 줄 모르는 너스레를 떨고, 농담을 하여 웃겨 드리고, 토닥여드리는 모습이 아름답다.
야야, 나는 먹기 싫으면 안 먹고, 그냥 바나나랑 견과류 넣어서 휘리릭 갈아서 먹으면 아침 땡이야. 혼자 밥 먹기가 너무 싫어. 어머니, 저는 아침 세 번을 차려요. 각각 시간대 별로 일어나서 먹는 것도 다 달라요. 현승이는 꼭 국에 밥 말아먹어야 하고요....(셋 다 각자 알아서 먹는 편이지만 과장해 봄) 그렇지, 세 식구 따로따로 먹으면 힘들지... 그렇지...
젊은 부부들이 육아전쟁으로 부부전쟁도 치르고 내면의 전쟁을 치르는 것을 들으면 "그래도 다시 안 올 아름다운 시간인데. 힘들어도 지금이 제일 예뻐..."라고 가닿지 않을 말을 하(거나 삼키)곤 한다. 돌아보면 육아로 힘들 때 "언제 우아하게 외식 한 번 해보지?" 막막했던 어떤 날이 있었는데. 그 힘겨웠던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그리운 시간이 될 줄이야. 우리 어머니는 수십 명 모여 북적이던 그 명절의 시간이 그리우실까? 여전히 지긋지긋하셔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실까? 그런 회한이 좀 있으시면 좋겠다. 약간의 회한 끝에 단출하여 외로운 오늘에서 조금이라도 좋은 것을 발견하셨으면... 이렇게 단 한 번의 새로운 추석이 가고 있다.
❝겸손은, 우리가 실제의 우리보다 더 나은 어떤 존재인 척하는(자만으로 인해 우리는 그렇게 상상한다) 대신에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안다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질서 안에서 적합한 위치를 조용히 차지할 것이다. 이렇게 초자연적 겸손은, 사회에 우리를 통합시키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과 올바를 관계를 맺게 한다. 이로써 우리의 인간적 존엄성은 그 가치를 더한다. 자만은 우리를 거짓 존재로 만들지만 겸손은 우리를 진실한 존재로 만든다.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적 겸손과 금욕 생활은, 언젠가는 소멸할 세상에서 매일의 노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가가르친다(살후 3장). 사도 바오로는 평범한 생활을 초자연적인 일과 활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거짓된 신비주의에 의한 들뜬 동요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보았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가치를 거부하며 현세적 안전과 행복을 탐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시간 속에서 삶을 지속하지 못한다거나 행복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보다 더 기뻐하며 더 안전하게, 소박하게 일하며 살아간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삶에서 어떤 특별한 성취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세속적 목적을 추구할 때 따라오는 무익한 동요를 피할 수 있다. 덧없고 헛된 가운데서 평화롭게 살지만 그것을 경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 뒤의 실체를 본다. 즉 피조물이 창조주에 대한 기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완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평범한 생활은 장엄한 금욕적 생애보다도 더 거룩하고 더 초자연적일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 바로 최상의 겸손이다. 그러한 겸손이야말로 평범할 수 있으며 영적 자만의 한계를 넘어선다. 자만은 항상 평범하지 않기를 갈망하지만 겸손은 그렇지 않다. 겸손은 평범한 것을 들어 높여 변모시키고, 하느님의 영광으로 채우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희망 속에서 모든 평화를 찾는다.❞
토머스 머튼의 사랑에 이르는 길, 중
어렸을 적부터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 들을 때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재산을 팔아 바쳤는데, 조금 챙겨 숨겼다고 죽이기까지? 초대교회 시작의 엄중한 시절이라 하나님께서 시범 케이스로 본때를 보여주셨다는 해석도 들은 것 같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라고? 팔 토시 끼고 다니며 시범 케이스로 아무 학생이나 패는 ‘학주’ 같은 그런 분이라고? 내적 여정의 어느 길목에서 알아들어졌다. "실재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이려는 척"이 무서운 죄로구나! 추석을 휴일로 지내는 아침 영적 독서 내용이 참 좋아서 옮겨 적어보았다. 겸손은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아니 진실로 자기 자신을 알 때 맺는 열매가 겸손이다. 자만은 항상 평범하지 않기를 바라고, 지금 여기의 평범을 회피한다. 그러다 빠지는 것이 거짓 신비주의이다. 누추하고 무력한 지금 여기의 시간을 초자연적인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겸손의 시작이다. 실재의 나보다 더 나은 나로 포장하지 않는 것이 가장 가까이 있는 겸손이다.
학교를 참 좋아하고, 선생님들을 좋아하며 존경하는 현승이가 '선물'을 요구한다. 지난 스승의 날부터 선생님 몇 분을 꼽으며 선물을 준비해 달란다. 현승이가 이러는 경우는 "찐"이라, 정성 담아 준비했었다. 추석 앞두고, 수시 원서 접수 앞두고 고3 현승이의 선생님을 뵈었다. 제 성향과 달라서, 제가 없는 것을 가지고 계셔서 더욱 선망하는 것 같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청소년에게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다는 건. 의미가 발견되어야 공부도, 뭣도 하는 아이인데 그 '의미'를 찾아가는 좋은 안내자가 되어 주시니 가끔 질투가 나도록 감사하다. (언젠가 학교 자랑 포스팅을 한 번 해야겠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서 이런 선생님이 한두 분이 아니니.) LA 갈비를 사서 양념을 했다. 요즘 우리 먹을 음식도 잘하지 안(못)하는데, 전날 학교 수업 마치고 11시에 집에 왔는데, 기쁘게 무리를 했다.
함께 하고 있는 연구소는 직장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직장이라고 치면 악덕 업체다. 열정 페이, 헌신 페이로 제대로 받는 것 없이 쏟아붓는 시간과 재능은 어마어마 하니까. 상담, 강의, 여러 세미나 진행은 거의 재능 기부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함께 연구하고 성장하고 노는 게 좋고, 연결되는 이들을 돕는 게 기쁨이니 공동체이다. 그래도, 그래서... 두 번 명절에는 심사숙고하여 선물 하나를 잘하려고 한다. 실용적이고 정성 담긴 선물을 하려고 매 명절마다 행복한 고민을 한다. 제한된 재정으로 좋은 선물 고르기 위해 엄청난 창의성을 발휘해야 하는데, 그것이 기쁨이다. 이번 추석에는 LA 갈비를 전했다. 맛있게 딱 한 끼 먹을 분량이다. 일단 우리 가족이 한 번에 딱 맛있게 먹어 치웠다. 만족이다.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
참 잘 만든 광고 카피들이 있다. 투게더 아이스크림 같은 추석 선물로 마음이 풍성하다.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이 양방향으로 채워져서.
* 그리고... 물가가 비싸도 너무나 비싼 이 시절에 목사라고 작가님, 선생님이라고 추석 선물 주시는 분들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먹고 누릴 때마다 얼굴을 떠올리는 기도로 대신한다.
영화 보러 서울 갈 계획은 오지도 않은 태풍과 굵은 빗방울로 접어 버렸다. 서울 가는 길은 멀다. 분당으로 처음 왔을 때 교회 집사님들이 "서울 갔다 왔어요. 서울 갔다 와서 피곤해요?" 하시면, 여기서 서울은 서울에서 서울보다 가까울 수도 있는데 저러시나 싶었었다. 살다 보니 알겠네. 서울 가는 먼 길을... 합정동 살 때 참 좋았는데. 씨네큐브, 아트하우스 모모, 상상마당, 필름포럼이 죄다 버스 한 번에 30분 거리였었다니! 여하튼 이러다 포기하는 영화가 대부분이다. 나중에 네이버에서 봐야지, 잠깐의 위안을 위한 결심을 해보지만 노트북 작은 화면으로 보게 되질 않는다.
밥 먹고 카페 가서 공부나 하자! 그래서 간 집 근처 유명 카페다. 유명 카페라서 낮에 가면 도떼기시장이라 테이크 아웃 한 잔으로 만족하고 빠져나오기 바빴었다. 소문만 무성한 태풍과 굵을 빗방울로 어째 여기가 다 한산하네. 논 한가운데 있는 카페라 창밖 뷰가 저렇다. 비 오는 날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비멍' 하며 하염없이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데, 뷰가 저러니 정말 감동이다. 막 모내기 마친 논, 초록 벼로 빽빽한 논, 황금물결 넘실거리는 논, 텅 빈 겨울 논... 다 좋아한다. 어릴 적 익숙한 풍경이라서인가. 이거 정말 경치가 유혹이네!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것.
남편도 영화 좋아하지만, 합정동이 아니어서 크게 아쉬울 것이 없다. 서현, 오리, 동백... 근처에 멀티 영화관이 쎄고 쎘으니까. 취향 존중의 미덕을 발휘하여 내 영화를 함께 봐주곤 한다. 취향과 취향이 충돌할 때 그는 이기는 법이 없다. 영화도, 점심 메뉴도, 카페도 그의 선택은 하나다. "존중입니다, 취향 해주세요!" (온전히 나, 오직 내) 취향 저격 카페에 앉아 각자 읽을 책을 펼쳤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펼치고 마주 앉았다. 이번 주 수업 주제이기도 하고, 책을 읽다 궁금하기도 하여 조직신학, 교의신학, 윤리신학과 영성신학의 관계에 대해 무언가 질문을 던졌다. 남편 입의 봉인이 풀렸다. 술술술술, 네버앤딩, 네버앤딩, 술술술술.... 우이씨, 아는 것도 많아! (나는 토론을 하자는 게 아니라 책에서 본 한 마디를 한 거였다고오....) 그냥 인신공격 전술로 판을 엎어 버릴까?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이 싸움 붙으면 이기고 지는 편이 뻔하다고오! 영화 <헌트>와 <베르히만 아일랜드>가 흥행으로 싸움이 되냐고. (라고 비유하면 블친 둥절인가요?) 보편적 개념들로 견고한 틀을 갖춘 '조직' 신학과 개인의 '체험'에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는 '신비(영성)' 신학이 싸움으로 붙으면 되겠느냐고!
남편이 연구소의 가을 프로그램 하나를 맡아 주었다.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 읽기 모임이다. 달라스 윌라드 덕후로서 전작을 읽었을 뿐 아니라 <마음의 혁신>은 여러 차례 읽었고, 책모임도 한 번 했었다. 저작을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구글 맵으로 달라스 윌라드가 나고 자란 곳, 살았던 곳 골목까지 따라다닌 '광' 덕후이다. 내가 <내적 여정 세미나>를 이끄는 방식은 다소 직관적이고 영성적이다. 그래서 어려워하는 분들이 있다. 조직신학에 익숙한 목회자들에게는 '내적 여정'을 위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목사님, 전도사님, 선교사님이 많았던 작년 지도자 과정에선 여름방학 모임으로 <마음의 혁신>을 읽었었다. 달라스 윌라드는 철학자이며 신학자로 개신교 안에서 '영성 형성'을 꾸준히 연구하고 틀을 세운 분이다. 그러니까 영성을 풀어내는 그의 언어가 철학적이고 신학적이다. 김종필과 찰떡이다.
조직신학과 영성신학을 마주 펼쳐놓고 약간의 논쟁을 하다 김종필의 이 말에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았다. (실은 꺼내지도 못했다.)심지어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마음의 혁신>의 결론은 결국 사랑이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에 대한 해설이야.
많은 싸움이 취향과 취향의 대결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누가 이길까? 취향을 존중하는 자? 존중받는 자? 나는 '조폭신실'이고 항상 승자이다. 현상적으론... 그런데 늘 어딘가 모르게 진 느낌이 있다는 건 그냥 없는 느낌으로 하자.
신비 현상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마음으로 주는 것. 은총. 선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강요할 수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것. 노력과 애씀으로 신비 현상을 얻어내려는 것 자체가 문제. 신비현상 자체가 문제가 아님. 신비 현상에 집착한 나머지 왜곡된 영성 생활을 하다 잘못된 사람들은 시대마다 있어 왔다. 현재에도 있다.
버섯전골 사진 걸어놓고 붙이는 인용문으로 뜬금없긴 한데... 이번 학기 듣는 [영성 신학의 주제별 심화] 수업 첫 시간에 필기해놓은 대목이다. 신비현상에 대한 분별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분별 "어렵찌 않아요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학기 교과서였던 [신비 신학]의 저자 윌리엄 존스톤은 신비 신학은 "사랑학"이라고 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에 못 이겨 사랑으로 주는 것이 (모든 신비체험 포함) 은사이다. 뭘 해서 보상으로 얻는 것도 아니고, 갚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물이다. 내내 마음에서 은총, 선물이란 단어가 떠나질 않는다.
선물로 온 버섯과 색깔 고운 국수다. 선물이다. 주일 오후 남편이 다른 교회 설교에 초대받아 갔다. 오후 네 시나 되어 집에 왔는데 점심도 못 먹은 상태. 저녁 메뉴로 '버섯 국수 전골' 하기로 하고 아이들도 기대하고 있는데, 설교를 세 번 한 배고픈 목사를 위해 빨리 끓여 보았다. "엄마 아빠 먼저 먹어도 돼?" 단톡에 양해를 구하고. (그리고 애들은 집에 와서 자장면 시켜먹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
남편은 배고팠다 치고. 와~아씨, 나는 내가 한 음식이 왜 이리 맛있어? 4인분 생각하고 끓인 걸 둘이 싹 비워 버렸다. 배 부르고 몸이 뜨끈하고 영혼까지 채워진 느낌. 맛있게 뚝딱 먹어 치운 남편이 기분이 좋은지 고백을 해왔다. "여보, 사실 나... 나 버섯전골 좋아해. 나는 전골류를 좋아하는 것 같애." 아니 좋으면 전골한테 직접 고백할 일이지 그 사이에 왜 나를 끼워? 둘이 예쁜 사랑해!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건 참 좋은 일이지." 있으면 먹고, 없으면 안 먹고. 있으면 있는 것 아무거나 대충 먹는 당신이 안타까웠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아는 건 정말 좋은 일 같아,라고 말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오란다. 나와서 놀잔다. 바람이 말했다.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그 바람이 말했다. 오늘의 고생은 오늘로 족하니 함께 걸으며 무엇이든 흘려보내자고. 낮의 일로 마음의 온도가 아직 뜨겁냐 묻는다. 그런 것 같다 하니 시원하게 선선하게 불어준다. 명절이 다가오고, 어머니의 명절 증후군 증상이 부드럽고 소소한 화살이 되어 날아와 꽂힌 것을 바람도 알고 있었다. 이제 맞고만 있지 않는, 정확하게 말하고 상처드리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며느리가 되었다는 것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주어 금세 열이 떨어진다. 분노의 열기가 떨어지니 냉랭한 마음이다. 그래도 나오길 잘했다. 밤하늘 달이 좋고 바람이 이렇게 좋으니. 되돌려드린 말의 화살이 생각난다. 취약하신 어머니가 그 화살 붙들고 외로우실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온다. 바람이 말했다. 언제 어디서나 두려움 대신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고. 어머니께 전화했다. 그, 그래... 에미야. 낮의 그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시지만 느슨하고 힘 없이 당겨진 활시위라 화살이 멀리 날아오질 못한다. 전화선 어디서 툭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나는 활을 들지 않았다. 사실을 따지는 마음 없이, 모든 말을 믿어 드(리겠다 결심)렸다. 그러니까 어머니 금요일에 시간 비우시고 바람 쐬고 맛있는 것 먹고 그러기로 해요. 기억하세요. 금요일이요. 그래, 그래. 9일, 9일 금요일, 알았어. 마음에 찬 바람이 분다. 슬픈 바람이다. 어머니의 외로운 노년이, 연결되어 도울 수도 없는 노년이 슬프다. 내 마음 아는 바람이 함께 걸어주었다. 좋은 분에게, 선함을 불러 일으키는 분에게 카톡을 하라고 바람이 알려주었다. 몇 줄 메시지와 돌아온 짧은 답신으로 마음에 기쁨이 가득찬다. 집 앞에 다다랐을 때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이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고개를 드니 먼저 물든 나뭇잎이다. 손이 없는 바람이 단풍 든 나뭇잎을 흔들어 따뜻한 안녕 인사를 건네준다. 들어가 편히 쉬라고, 오늘 고생은 오늘로 족하다고. 잘 자라고.
“섭섭해, 정 선생. Out of sight out of mind 맞지?” 돌려 말하는 법이 없으시니 말씀하시면 그게 전부인데. 정말 섭섭하시구나! 얼굴 뵌 지 한참이지만 메시지로 안부를 여쭙고 있고, 가끔 꽃 사진도 찍어 보내주시곤 하여 여전히 가까운 마음인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으셨나 보다. 일이 좀 많아지기도 했지만, 내가 관계 맺는데 취약한 지점이기도 하다. 꼭 자주 만나야 하나, 각자 잘 살면 되지, 하는 생각인데 친구들에게 섭섭하단 소릴 듣곤 한다. 최 선생님께도 듣고 마네. 마침 선생님 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강의가 있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않고 서프라이즈로 찾아뵈었다. 상담이 있으실지 모르지만 일단 쳐들어가자. 잠깐 뵙고 오더라도 섭섭함은 좀 풀어드려야지.
어이구, 이 사람이! 누군가 했네. 연락도 없이 이게 무슨 일이야. 들어와, 들어와. 상담 없어. 있어도 취소할게.
서프라이즈예요. 선생님! 보고 싶으셨죠? 헤헤.
유붕이 자원방래 하니 불역열호아 외다! 서프라이즈 방문한다고 이렇게 차려입기까지 했어? 이쁘네. 화장하고 차려 입이니 딴 사람 같어. 나 보여주려고 차려입은 것 아닐테고.
네, 근처에 강의가 있었어요. 상담 있으시거나 댁에 안 계셔도 할 수 없다 하고 왔죠. 과문불입, 과문불입요. 문자 쓰셨으 니까 문자로 답해야지. 히히.
혼인 전 순결+혼인 내 순결
아이구, 또 받아치기 시작이다. 이렇게 반가울 데가. 삐친 척을 좀 했더니... 섭섭하단 말에 그냥 달려왔구나. 이랬거나 저랬거나 좋네. 그런데 무슨 강의를 했어?
네, 청년들에게 스킨십, 성에 대한 강의했어요.
그런 강의도 해?
아유, 뭐. 청년들 연애 얘기하다 보면 결국 그런 질문이 나오거든요.
뭐, 성에 대한 강의를 하면 무슨 얘길 하는 거야? 혼전순결 뭐 이런 얘긴가?
하하, 선생님 저 청년에게 먹어주는 강사예요. 아, 그러니까 말이 먹히는 강사라고요. 혼전 순결보다 더 책임 있게 지켜야 하는 건 혼인 내의 순결 아닌가요? 이렇게 얘기하면 청년들이 좋아해요. 하하. 더 여백을 두고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편이에요.
여백이라?
성과 사랑, 성과 영성에 대해 폭넓게 얘기하고요. 각자에게 자신의 성 생활에 대한 판단을 맡기는 게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요. 혼전순결 지켜라, 말아라 하는 게 의미 없는 시대가 되었어요. 그리고 솔직히 혼인 전 순결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 잘 지켜야 하는 것이 혼인 내 순결 아닌가요?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게 헌신하는 혼인 안에서의 순결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다! 이 가르침만 반복하는 것은 안 그래도 어려운 청년들의 등에 짐을 지운다는 느낌이거든요. 기독 청년이 아니면 하지 않을 고민과 고뇌 속에서 어디다 말도 못하고요. 사귀는데 왜 안 자? 그럴 수가 있어? 이게 요즘 연애와 성문화잖아요.
아하! 그렇게 강의하면 청년들이 위로를 받겠는데. 그래, 그러면 청년들이 어떻게 반응해? 그 말을 잘 들어?
아니, 그런데 선생님 왜 이렇게 뜨거운 반응이시죠? 하하.
왜? 노인네는 성에 관심이 없을까 봐? 나도 솔깃하다고! 허허허. 엊그제 손녀딸을 만났잖우. 그 애가 애인이 있잖아. 어렸을 적부터 나한테 와서 속 얘기를 많이 하거든.
아, 그 아드님이 반대하시는... 둘째 손녀딸 말씀하시는 거죠? 요즘 어때요?
기억하네. 막을 장사가 있겠소. 그렇다고 깔끔하게 허락한 것도 아니지만. 아들이 전처럼 완강하지는 않아요. 자식 이기는 장사 없어. 그런데 엊그제 손녀딸하고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그러는 거야. “할머니, 나 애기를 만들까? 그러면 아빠가 바로 결혼 허락해주지 않을까?” 내가 기겁을 했어. 결혼허락을 위한 수단으로 아기를 갖는다니 말이나 되냐? 임신은 안 된다, 했더니 농담을 다큐로 받는대나 뭐래나 하면서 깔깔거리더라고. 나는 옛날 사람이라... 게다가 우리 손녀딸은 신앙도 없으니까. 마음이 복잡한 중에 마침 정 선생이 성에 대한 강의를 했다니까 귀가 번쩍 뜨이네. 뭐라고 해줘야 해? 내가.
선생님 잘 아시면서요. (최 선생님 말투 흉내 내면서) 다 큰 애가 뭐라고 말한다고 듣겠수?
어허... 이 사람이 참! 하이고, 흉내도 잘 내. 허허허허. 그러면 정 선생은 어떻게 여백을 두고 무슨 얘기를 해요? 청년들에게.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 또는 한 사람과 오랜
어려워요. 선생님. 그런 어려움이죠. 성에 대한 관심도 많고, 크리스천 청년으로서 고민도 많은데, 일단 교회 안에서 성에 관한 발화 자체가 금기 아닌 금기잖아요. 일부러 저는 일단 섹스, 자위, 오르가즘... 이런 표현을 써봐요. 자연스러운 일을 자연스럽게 말하자는 뜻에서요. 은밀한 곳으로 숨어들 때, 무엇이든 그 파괴력이 커지잖아요. 입에 올리지 못하고 쉬쉬하지만, 에로스 에너지가 치솟는 시절이고요. 그런데 강의는 고사하고 이런 말만 꺼내놓아도 분위가 얼어붙는 느낌이죠. 문제는 교회 밖의 문화는 교회와는 딴 세상이라는 거고요. 그러니 성에 관한 한 혼자 끙끙거리다 되는대로 대처하게 되니, 신앙과 성은 완전히 다른 문제가 되고 말아요. 하긴 뭐 청년들만의 문제인가요.
그러네. 나만 해도 성과 정신 건강까지는 어떻게 연결시켜 이해하겠는데 신앙과 접점은 못 찾겠어요. 섹스리스를 비롯한 성적인 문제로 부부 상담을 오는 경우가 꽤 있거든. 생각해보니 신앙인은 거의 없어요. 아니다. 부부 갈등 안에는 분명 성적인 단절이 포함되어 있을 텐데, 교인들은 그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 같아. 성은 거룩하지 못하다 여겨서 그건가? 그렇구만. 실은 성과 영성은 아주 밀접한 것인데 말이야.
그러니까요, 선생님. 참 중요한데, 잘 설명하기가 어려워요. 청년들은 성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지만, 실제로 성 경험을 자유롭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강의를 들어도 이론에 그치고 마는 것이죠.
허허허허. 그러네. 이론이네. 지식만 쌓는 게 되는구나. 실전편은 나중 일이고. 그러면 그 강의는 실전이 가능한 결혼한 부부가 들어야겠구만.
그런데 실전이 가능한 오래된 부부는 또 말이죠. 제 주변 친구들 말이에요. 섹스리스 부부가 흔하고요. 그걸 대단한 문제로 여기지도 않아요. 단지 성적인 단절이 아니라 관계 전반의 단절이 고착되어 있으니까요. 그 상태에서 이론을 배운다고 몸이 쉽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요.
아하! 그렇긴 하지. 알랭 드 보통이 섹스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라고 했다고.
딱이네요. 성을 대단한 것으로 여겨서 어려운 청년 시기, 애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하여 문제해결이 안 되는 중년의 부부. 그렇군요.
그러니까 정 선생은 청년들에게 뭐라고 강의를 한다는 거요? 나한테도 좀 강의해줘 봐.
에잇, 선생님. 다 아시는 얘기예요. 상담하고 강의하시면서 다 다루시잖아요.
나야 뭐 심리학이지. 성 심리 정도 아는 거지. 그것도 강의실 용이라우. 무림에선 어떻게 가르칩니까? 무림의 고수한테 한 수 배웁시다.
고수는요? 일단 솔직하게 제 얘기해요. 제가 청년 시절에 오한숙희 씨의 칼럼을 읽고 슬픈 충격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아마 이혼 직전의 상황이었던 것 같아요. 남편의 일기장에서 “아내는 더 이상 섹시하지 않다.”라는 문장을 본 거예요. 네네, 오한숙희씨가요. 앞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네요. 아무튼 그걸 보고, 생각했어요. 결혼했는데 배우자가 더 이상 섹시하지 않은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 그런데 웬걸요! 결혼하고 몇 년 지났는데, 제 일이 된 거예요. 와, 데이트 할 때는 어떻게 뽀뽀 한 번 더 해볼까, 영화관에서 팝콘 먹다 손만 스쳐도 찌릿찌릿하고 그랬는데요. 어느 날 보니 덤덤해도 그렇게 덤덤할 수가 없는 거죠. 알랭 드 보통의 말대로라면 대단했던 성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죠.
페니레틸라민 호르몬! 사랑 호르몬이라도 하지. 17개월이면 자연 감소!
역시! 그러니까요. 선생님. 그게 끝이 아닌 거잖아요. 그 짜릿함, 에로스의 폭발은 수많은 사람 중에 내 짝을 고를 때 유효한 사인이었고요. 어쩌면 그때부터가 진짜 성의 가치와 의미를 아는 때라고 말해요. 청년들이 알아들을까 싶지만요. 지금 못 알아들어도, 나중에 결혼해서 기억이 나면 좋겠다는 말까지 덧붙여요. 한 사람과 오래도록, 질리도록 섹스해봐야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고요.
와하하하하, 재밌네. 실전 경험에서 터득한 거야? 질리도록이라...
흐헤헤헤, 그렇죠. 오래도록 질리도록... 그렇게 터득한 거죠. 글로 배운 성, 글로 배운 성과 영성이 결혼생활 15년? 나이 사십 훌쩍 넘으니 알아들어지더라고요. 니체가 그런 말을 했다죠. 지상과 천상을 통틀어 절대적인 사실은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 있어야만 하며, 그때에만 인생의 살 만한 가치가 발견될 거라고요. 그러니까 한 사람과의 오랜 성관계를 포기하지 않고 지속할 때 성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고 강의해요. 아우, 그거 지난한 헌신이며 자기희생이며 영성수련이에요.
오호라, 한 방향으로의 오랜 순종이라. 니체의 말을 거기다 갖다 붙인다? 일리가 있네. 문제는 결혼 관계 안에서 섹스를 지속하는 부부가 많지 않다는 거지. 몇 년 전인가 통계였는데. 50대 이상 부부 중 반은 섹스리스라고 했던 것 같아. 사실 섹스리스는 친밀감 리스의 문제야.
선생님 늘 말씀하시잖아요. 신심일여(身心一如)라고요. 성관계가 몸의 대화라면, 마음의 대화 없이 지속하기 어려운 거죠. 성이 아니라 ‘관계’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 50% 안에는 크리스천 부부가 있을 거고요. 어쩌면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는, 어쩌면 심지어 좋은 부부의 모델로 살아갈지도 모르겠어요. 아, K 선생님 부부 생각이 나네요. 요즘 어떠신가요?
그러게 요즘 통 소식이 없네. 맞아. 그 부부가 평생 아무 문제 없는 듯 살아왔지만, 결국 K 선생 몸에 이상이 생기면서 표면화됐지 않우? 몸과 마음은 하나야. 그런 의미에서 부부의 성은 관계를 드러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이고. 마음 가는 곳에 몸이 간다니까.
그런 연구 결과 흔하잖아요. 예전에 공부할 때 그런 연구 본 적이 있어요. 감기에 대한 면역력이 강한 집단에 대한 연구였는데요. 다양한 연령, 직업 포함해서 조사했는데 감기 면역력이 가장 강한 사람들은 신혼부부였어요. 안고, 입 맞추고, 즐겁게 섹스하며 몸으로 나누는 친밀감의 결과라는 거죠. 그때 본 표현이 아직도 생각나네요. 입맞춤하면서 균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균을 죽이게 된다고요.
정설이지. 프레데릭 살드만이라는 프랑스 심장 전문의가 있어요. 건강에 관한 대중적인 책을 많이 썼지. 섹스가 건강에 직결된다고 했어. 정확한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한 달 몇 번 이상의 섹스면 심혈관 질환이 반으로 준다고. 그것뿐이요? 정 선생이 말한 면역력이며 노화 방지나 남성들 비뇨기과 질환까지... 이런 좋은 효과를 몰라서가 아니야. 면역력 강화를 위해서 비타민을 많이 먹는 게 쉽지 말이야. 이미 멀어진 부부관계를 회복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그러니 성관계에서 성이 아니라 관계에 방점 찍어야 한다는 정 선생 말이 맞아요. 건강에 주는 효과도 단지 섹스이겠어요? 충족되는 친밀감의 욕구겠지.
그러니까요, 선생님. 섹스는 인간이 몸으로 나누는 최고의 친밀감의 표현이잖아요. 문제는 인간은 몸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정신적인, 무엇보다 영적인 존재라는 거고요. 정서적인 친밀감, 특히 영적인 친밀감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갈등이 생겼을 때 대화해야 한다, 제가 연애 강의할 때 엄청나게 강조하는데요. 청년들이 그래요. “대화고 뭐고, 오빠는 니가 뽀뽀만 해주면 다 해결 돼.” 이런 식이라고요. 사실 이때야 에로스 에너지가 충만하기 때문에 스키십 한 번으로 웬만한 갈등은 덮어지기도 하죠. 중년 부부 섹스리스는 이미 여기서 예견되는지도 모르겠어요. 결혼한 후에는 그 반대가 되잖아요. 스킨십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 해결되고 그 끝에야 섹스가 자연스럽잖아요.
그렇구먼. 정 선생 청년들한테만 성 강의할 것이 아니라 그 부모들도 앉혀놓고 이런 얘기 해줘야겠다.
아휴, 선생님. 교회에서 성담론을 꺼내는 것 자체가 어려워요. 제가 청년들 대상으로 성 강의를 하다가도 교회 어른들 뒤에서 왔다갔다 하시면 얼마나 심장이 쫄리는데요. 단어 하나만 듣고도 딱 경직되시잖아요.
그래요. 성이 이렇게 중요한데, 우리 사회에서는 물론 교회에서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고 있어. 성은 더럽고 죄악시해야 할 것이라는 인식 때문이야. 유교 문화에 이원론적 신앙관까지 더해져서 교인들에겐 더 한 것 같아. 그 아까 왜 섹스리스 부부 통계에서 말이에요. 우리나라 50대 부부 섹스리스 비율이 50% 정도라고 했잖아. 세계 평균은 20%대래. 우리나라가 일본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부부관계가 적은 나라라는 거 아니야. 중요한 건 그걸 문제 삼지 않는다는 거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러려니 산다는 거지.
그래요, 선생님. 친구들 모임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난 아직도 남편의 몸이 좋다는 말 했다가 욕먹고 맞을 뻔했어요. 하하. 아이들 독립해서 나가며 빈방이 생기고, 그때부터 각방 쓰는 친구가 많아요. 부부관계가 있다 해도 거의 의무방어전이죠. 그걸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살아오며 자연스럽게 된 일이니까 사실, 문제라 할 수도 없고요. 그런데 이게 조금 슬픈 악순환 같이 느껴져요. 전에 제가 트로트 보고 우는 마초 남편 꼴보기 싫다는 친구 말씀드린 적 있죠. 그 남편도 제가 알거든요. 남편은 외로워서 그런다는 거예요. 죽어라 돈 벌고 살아왔는데, 돌아보니 남은 게 없는 거죠. 제 친구가 아이들한테는 정말 좋은 엄마거든요. 엄마와 아이들 사이는 끈끈해요. 마초 남자인 그 아빠는 가족들에게 성질대로 해온 게 있거든요. 엄마따라 아이들도 아빠를 싫어해요. 그 사이에 끼지를 못하는 거예요. 트로트 가사에 눈물 나는 외로움인 거죠. 제 친구는 그 모습이 싫어서 정이 떨어지고, 매력이라곤 안 느껴지는 거죠. 그럴수록 남편은 더 외로워지고, 또 트로트 들으며 울고... 더 싫고.
그런데 정 선생은 어쩌다 친구들 사이 공공의 적이 됐어?
네? 무슨 말씀인지... 공공의 적이라뇨?
아니, 어떻게 남편과 금슬이 좋으냐고? 친구들한테 욕먹었다며? 부부사이 좋다고 자랑해서.
푸하하, 금슬이라고 하시니 손발이 오글...
왜애? 금슬(琴瑟)이 어때서? 거문고와 비파 소리가 조화롭게 울리면 얼마나 아름다운 거요? 그러니까 비결이 뭐야? 부부상담 오는 내담자들에게 알려줘야겠다. 오늘은 강사님한테 배울 게 많네.
헌신하겠다는 약속, 나를 넘어서겠다는 약속
저는, 저의 부부는 운이 좀 좋았던 것 같아요. 운이라기보다는 시작이 좋았달까. 일단 실전 이전에 이론 공부를 많이 했죠. 하하. 결혼 전에 아까 말씀드린 오한숙희 선생 글 같은 류의 책을 많이 읽었어요. 남편 역시 결혼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더라고요. 결혼 안에서 사랑을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정도는 알았던 것 같아요. 사랑 호르몬이 언젠가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것도요. 결혼은 ‘사랑 깊은 약속’이라는 것을 함께 묵상했어요. 헌신하겠다는 약속이다, 나를 넘어서겠다는 약속이다, 이렇게요. 진정한 뜻은 모르고 했던 말인 것 같아요. 신혼 초에 월간지에 신혼일기를 연재할 기회가 있었어요. 일상의 크고 작은 갈등을 글감 삼으며 대화하고 글을 썼는데, 관계의 기초를 잘 놓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 어쩐지. 부부사이가 남다르게 교과서적이더라.
교과서적이라뇨? 선생님, 저 범생이 아니에요. 선생님.
으이그, 칭찬이야. 보기 드문 건강한 부부라고 칭찬하는 거야.
헤헤. 그렇게 알아들었어요. 저나 남편이나 원가정에서 특별히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인식한 결핍감들이 있죠. 사랑 깊은 약속이란 그런 것이었어요. 우리가 다른 모든 것에 실패해도 부부관계, 건강한 가정을 세우는 일에는 실패하지 말자.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어도 서로를 끝까지 사랑하는 것은 해보자. 젊은 날 뭘 모르고 한 말인데, 지켜내려고 애를 썼던 것 같아요.
아하, 그렇구나! 사랑은 자기증여야. 자기희생이라고. 성이 더럽고 죄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줌으로 하나 되는 것의 표상이 아니겠어? 성경의 아가서나 영성가들의 기도체험에서 온전한 하나님 닮음, 하나님 체험을 영적 결혼으로 상징하는 이유가 있을 거야. 그저 욕구나 채우는 감각적인 즐거움 그 너머라는 것이지.
맞아요, 선생님. 성관계에서 절정에 느끼는 그 망아의 순간, 나를 잃어버리는 순간이 아마 타자와 온전히 하나 되는 감각적 경험일 거예요. 단지 몸을 합하는 것이 아니라, 몸에 담긴 삶을 풍성하게 하고 자아를 넘어서게 하는 경험이 될 때, 영적인 일이 되는 것 같아요.
축하해! 축하합니다!
예? 축하요? 어어, 또 놀리시는 거예요?
아니야. 충분히 누리라고. 축복받은 사람이잖아. 얘길 듣다 보니 성이 거룩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야. 사랑 깊은 약속 맞네. 사랑 깊은 약속으로서의 결혼생활과 성 맞아. 나는 혼자 지낸 지가 거의 30년 아니요? 결혼생활을 잘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 성은 더더욱 잘 모르고. 잘 누려요. 결혼생활이 둘이 사는 나날로 끝일 것 같지만, 결혼은 언젠가 혼자 지내는 시간까지 포함해. 그 세월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중 누군가, 언젠가는 혼자 남을 것 아니유? 그때는 의무방어전이고 뭐고, 성관계 없는 새로운 생활이라고.
아, 그렇군요. 누군가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꼭 있겠군요.
그럼, 그때는 친밀감과 성은 또 다른 지점으로 가. 내가 얼마 전에 영화를 하나 봤잖우. 제인 폰다를 좋아하거든. 상대역은 로버트 레트포드야. 둘 다 많이 늙었대. 참 멋지고 예뻤는데.
무슨 영환데요?
제목이 뭐였더라? 혼자 사는 늙은 노인네들 얘기야. 노인네들의 밤. 아, 제목이 <밤에 우리 영혼은>이다. 공감이 많이 되더라고. 5, 60대 때는 할 일이 있어서 그랬는지, 혼자 살아도 외로운 밤 그런 걸 많이 못 느꼈거든. 이제는 또 달라. 그 영화를 보니, 내 마음이 저렇구나 싶더라고. 암튼, 둘이 함께 있는 오늘을 잘 누리라고.
아, 그 영화 궁금하네요. 선생님 저 그 영화 보고 올 테니 다음에 뵐 때 영화 토크 해요.
그럽시다! 만나서 얼굴 보자고. 카카오톡 백 번보다 몸으로 만나는 게 진짜야! 유붕이 자원방래 하니 좋구나, 좋아!
개강이다. 대학원 개강이다. 교수 아니고 학생이다. 박사 아닌 석사과정이고. 석사 학위 스티커 모으는 중… 자꾸 모아서 척척석사님 되고자 한다. 장신도 총신도 아니고 가톨릭대이다. 이단 아니고 마리아 숭배자 아니다. (걱정하는 블친 없게 해 주세요, 주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마리아의 기도를 인간이 드린 가장 아름다운 기도로 생각하긴 함.) 집단에서 소수자로 있어보는 슬픔과 기쁨, 종교적 소수자 체험을 한다. 나는 낯선 자로 움츠리고 있는데 그 시간 동안 내 안의 하나님은 더 커지신다.
위 사진은 지난 학기 교재와 과제를 위해 읽은 책모음이다. 즐겁게 공부한다. [신비 신학]을 축으로 [음악과 영성] [심리치유의 영성적 차원]을 진하게 배웠다. 아래 사진은 6월 말 종강 피정에서 학우들과 나눔하는 모습이다. 문화는 다르나 한 분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같은 분들이다. 12세기 신비가 생티어리 기욤의 "묵상과 기도 안에서"라는 저작을 강의로 듣고 묵상하는 피정이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종강 피정에서 받은 은혜로 여름을 난 것이 아닌가 싶기도. 다시 개강이다! 신난다!
어서 이 더위가 지나길, 이 여름의 시련이 끝나길 기다렸지만 이렇듯 허무하게 갈 줄 몰랐다. 가을을 기다렸지만 이렇게 빠르게 갑자기 들이닥칠 줄이야. 가을이 아니라 '이상한 여름'일 수도 있겠으나. 이번 주로 학교도 개강하니 가을로 받기로 한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애써 혼자만의 마침표를 찍어보려 한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도전과 시련의 시간이었다. 잠 못 이룬 밤이 여러 날이었다. 그렇게까지 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할 일이 아니었다 싶지만. 그 모든 시간을 통해 받은 선물 같은 글귀로 행복하게 마침표 찍는다. 과분한 평인 것은 알지만,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다. 부끄러움과 두려움 속에 내놓았던 글과 말, 드러냄으로 감수해야 했던 수치심의 시간에 대한 격려와 위로 또는 보상으로 받는다. 아니 선물!
어느 밤,
내놓은 말과 글을 회수하고 싶은 충동에 몸부림 치는 어느 밤이 또 온다면 이 글을 찾아 읽을 생각이다.
남편에게 텀블러를 선물했다. 카페에 갔는데 “텀블러 예쁘다.” 하며 만지작거리는 걸 봤다. 그런가 보다 하고 나왔는데, 아까 그 텀블러가 예쁘지 않았냐 묻는다. 어머, 이건 사줘야 해! 다음 날 그 카페에 가서 바로 그 텀블러를 샀다. 물욕이라곤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겠냐만)이라 자신을 위해 뭘 살 줄을 모른다. 소유하려 하질 않아서 그렇지 미적 감각은 있다. 예뻐라, 하는 걸 가지도록 하고 싶었다.
이 얘기를 들은 채윤이는 "촴나, 뭐 운전해 줘서 대가로 주는 거야? 자기 휴가에 무슨 운전을 해주고 그래." 했다. 남해 여행 후 이틀이 남았었고, 그 이틀 저녁 모두 나는 강의 약속이 있었다. 금요일 밤에 비가 오고 운전할 길은 멀어서 부담이 컸는데 남편이 운전해서 같이 가주겠단다. 몸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었다. 다음 날 저녁에도 "또 같이 가면 안 돼?" 했더니 선뜻 그러겠단다. 휴가엔 늘 하루 이틀을 남겨 자기만의 시간을 갖곤 하는 JP이다. 은사님을 찾아뵙든지, 다니던 신학교 도서관에 가 앉아 있다 오든지, 혼자 드라이브를 가든지. 하반기 목회를 위해 나름의 골방 시간을 갖는 것이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생긴 피부 발진으로 여의치가 않았다. 약기운 때문인지 밥 먹고 책 좀 보다 자고... 이렇게 보내다 저녁 시간은 김기사를 자처한 것이다. 고마웠다. 큰 힘이 되었다. 정말 고마웠는데, 단지 그 때문에 텀블러 선물을 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강의하는 동안 근처 카페에서 책을 보며 기다리곤 하는데, 둘째 날 강의 마치고 만났는데 양손에 검은 봉지가 한 가득이다. 뭣인가 했더니... 작은 시장이 있어서 장을 봤단다. 와, 김종필이 스스로 장을 봤다고? "당신한테 혼날 수도 있어. 수박이고 뭐고 다 너무 싸서 안 좋은 것일 수도 있어." 안 좋아도 좋아할 거다!!! 내가 좋아하는 수박, 체질 식단 하느라 본인이 먹을 단호박... 등을 알.아.서. 사다니. 어떤 남편들에겐 흔한 일일 수 있으나, 김종필에겐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다. 몇 년 전 집안을 휩쓸었던 페미니즘 논쟁, 집안일 논쟁 때가 생각난다. 아침 식사, 장 봐서 식재료 준비하는 일 같은 걸로 시작하여 속초 1박 여행을 갔다 싸우고 돌아온 일이 있었다. 여성과 남성의 일이 구별 없다는 원칙에 100% 동의하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지만(나도 그건 100% 인정), 몸에 밴 것은 원칙과 상충하니 본인도 답답하고 나는 화가 났었다. 이제야 이렇게 몇 문장으로 할 수 있지만 보통 복잡한 감정이 아니었었다. 눈앞의 시장을 놓치지 않고, 싼 가격에 장 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정신! 이것은 정말 엄청난 변화이며 성장이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일이다.
얼마 전에는 그런 일도 있었다. 묵은지를 주문했는데, 내가 1박으로 어디 다녀오는 날에 택배 도착 문자를 받았다. 스티로폼 박스에 담겨 왔을 텐데, 내가 집에 가야 냉장고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조금 조바심이 났다. 집에 돌아와 자기 전에 생각해 보니 김치 택배가 안 온 것이다. 뭐야? "낮에 택배 온 것 없어? 스티로폼 박스!" "김치 택배 와서 내가 통에 담아 김치 냉장고에 넣었는데..." 와, 거기서도 한 번 감동! 어려운 철학 책 읽는 지적 감각은 뛰어나지만 그에 미치지 못하는 생활의 감각으로 내 얼마나 속을 끓였던가. 끓이다 끓이다 남편를 볶아대고… 아, 끓이고 볶던 시간들이여. 이 역시 사소하지만 사소한 일이 아니다.
함께 쓴 책 『와우결혼: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을 함께 했었다. 결혼 5, 6년 차 때였던 것 같다. 다시 생각해보면,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사랑이다. 사랑의 시작이다. 변하지 않으면 사랑이 사람 죽이는 사달이 난다. "내가 줄 수 있고, 주고 싶은 것"에서 "네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으로 관점이 변하지 않으면. 결국 성장의 문제이다. 사랑은 행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문제이다. 사랑 안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 안에서 감지되고 측정되는 양과 질이 있는 것이다. 남편의 성장에 감사한다. 쓰다 보니 텀블러 하나에 이런 마음,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여자에게 괴롭힘 당한 한 남자의 성장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무려 23년 동안.
바닷가 동네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휴가를 보냈다. 동네 안에, 동네와 어우러져 지어진 집이었다. 아침마다 일어나 동네 산책을 했다. 로망 중의 로망이다. 아침에 일어나 시골길을 걷는 것. 그래서 놓치지 않는다. 이번에도 3일 내내, 비가 오는 날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른 아침 산책을 했다.
게스트하우스 바로 옆이 교회이다. 어릴 적 우리 교회 같았다. 첫날 산책에 나서서 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발이 끄는 곳이 교회였다. 교회 마당에 하얀 백합이 야생적으로 피어 있었다. 꽃집에서 보는 백합, 꽃다발 안에 든 백합이 아니라 얼마나 반가운지. 제 가고 싶은 대로 가는 발이 이번에는 예배당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갔는데 문은 활짝 열려 있고, 사람은 없다. 바로 조금 전까지 새벽기도 마치고 가장 늦도록 기도하신 어느 권사님(또는 권사님 나가시는 걸 기다리며 자리를 지키던 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남아 있는 듯했다. 익숙한 냄새, 눅눅한 나무 냄새가 난다. 이 교회에서야 장의자 냄새일 테고. 익숙해도 너무 익숙하다 싶은 건 어릴 적 교회의 마루에서 나던 그 냄새 아닐까. 감각적 냄새가 아닐지도 모른다. 여하튼 존재에 새겨진 어떤 냄새이다. 기도하는 엄마 옆에서 방석 깔고 자던 그때부터 몸에 배였을 것이다. 애기 때부터. 엄마는 산후조리 마치고부터 온갖 예배들에 갔을 테고. 수요일이나 금요일 또는 새벽 예배 때 엄마 옆 방석 위에 누워 잠들었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 시절 나무 냄새와 함께 새겨진 것이 노래들, 찬송들, 어린이 찬송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잠시 교회에 앉아 기도하고 나와 걷는데 흘러나온다. 냄새와 함께 저장된 어릴 적 그 노래들이.
연못가에 자라는 한 송이 백합 천사같은 흰 옷을 입고 싶어서 맑은 샘물 거울에 몸을 비추며 푸른 하늘 우러러 기도합니다
담 밑의 봉숭아 어여쁜 봉숭아 그 누가 날마다 키우시나 하늘에 계시는 우리 주 예수님 날마다 쉬잖고 키우신다
나는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니 은혜 비를 머금고 고이 자라납니다 주의 은혜 감사해 나는 무엇 드리리 사랑하는 예수님 나의 향기 받으소서
어릴 적 불렀던 많은 찬송들이 내 세포 구석구석에 저장되어 있다. 음악치료사나 어린이 성가대 지휘자, 찬양 인도 선생님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으로 키워졌는지 모르겠다. 그 많은 찬송 중에서도 '꽃'으로 비유된 어린이에 동일화되었다. 목사관 마당의 풍성한 꽃밭, 그 꽃밭에 정성 들이던 엄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인 것도 같고. 무엇보다 채송화, 봉선화, 사루비아, 분꽃, 나리, 백합, 찔레, 작약.... 같은 꽃들이 사시사철 눈앞에 피어 있었으니 노래 가사로 만나면 익숙할 밖에. 그 모든 기억이 나다. 그 기억들이 나를 형성했다.
신앙 사춘기를 겪어 내며 "주의 화원에 어린 백합꽃"이었던 내가 얼마나 혐오스러웠던가. 엄마의 화원, 아버지의 화원에서 고이 길러진 내가 견딜 수 없었다. '화원'이 아니라 '비닐하우스' 같았다. 온실 속의 화초. 부모의 온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실, 교회의 온실에서 사랑받는 어린 백합꽃에서 야생의 나리꽃이 되기 위해 했던 몸부림이라니. 엄마를 아버지를, 교회를 혐오하며 뿌리 뽑혀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시절이었다. 하나님께는 벌써 버림받았고. 은혜 비를 거부하는 어린 백합꽃을 하나님이 돌아보실 리가 있겠나 싶었었다. 그랬으니 그렇게 찾아도 불러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겠지.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치유와 회복의 끈 소속감』이란 책을 방학 동안 함께 읽었다. 마치는 날이다. 마지막 챕터에 "봉인된 명령"이라는 말이 나온다. 내 존재 숨겨진 어떤 씨앗을 일컫는 말이다. 되어야 할 내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났는데, 그 '나'가 되기 위해서는 봉인을 풀어야 한다. 그 봉인은 고유한 상처이기도, 고유한 육아 환경이기도, 고유한 성격이기도 하다. 나의 총체, 내 기억의 총체이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필요하다면 치유하면서 되어야 할 내가 되어간다. 내 존재의 봉인된 명령에 이름을 붙여보자 싶은데, 책의 공동 저자인 데니스 린이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식으로 "봉인된 명령"에 이름 붙인 것을 코스프레해보자면 "아이의 노래" 정도 될까 싶다. 내 존재의 소중한 부분, 나를 형성한 어떤 좋은 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아이'와 '노래'를 빼놓을 수 없으니. 아이가 부르는 노래 같은 존재로 세상의 선에 기여하고 싶다.
오래된 교회 옆에는 오래된 종탑이 있었다. 내 아득한 기억 속에도 종탑이 있다. 예배 시간이 가까워오면 엄마가 종탑에 달린 줄에 매달려 종을 쳤다. 아주아주 어릴 적에 보았기 때문에 흐릿 하달 수도 없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남편에게 종탑을 보여주며 "우리 엄마가 어렸을 적에 종을 쳤어. 첫종, 재종 알아? 예배 시간 전에 두 번의 종을 쳐. 첫종을 치고, 예배 시간이 임박하면 재종이라고 한 번 더 쳐." 말하고 나니 귓가에 종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실은 철이 들었을 때는 차임벨로 바뀌었고, 스피커를 타고 댕댕 찬송 멜로디가 울리는 종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일찍 저녁을 먹고 게스트하우스 거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댕댕 종소리가 울렸다. 진짜로 들렸다. 뭐지? 싶었는데 수요일 밤이었고 수요예배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였다. 종탑의 종을 실제로 친 것인지, 스피커로 들리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존 던의 시가 생각나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구라파는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울린다.
누구든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이 아니다. 나를 형성한 모든 것들을 생각한다. 나를 최초로 형성한 엄마와 아버지를 생각한다. 엄마와 아버지의 꽃밭을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한다. 종소리와 꽃을 생각한다. 엄마와 아버지의 딸이라서 받아 안은 무수한 상처를 생각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잃었던 세상을 생각한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엄마와 남겨져 살아야 했던 날들의 좌절들을 생각한다. 아이같이 순수하여 상처였던 엄마의 신앙과 성격을 생각한다. 늙은 나이에 낳은 딸을 애지중지, 걱정에 걱정으로 키웠던 엄마의 사랑을 생각한다. 엄마가 쳤던 종소리를 들어본다. 기억 가장 깊은 곳에 귀 기울이며. 엄마의 죽음이 감소시킨 나를 생각한다. 엄마의 죽음으로 감소된 나로 인해 씻겨 내려간 내 자아를 생각한다. 엄마의 종은 나를 위해 울린다. 나의 봉인된 명령의 이름은 "아이의 노래" 또는 "엄마의 종소리"이다.
2022년 휴가의 책은 래리 크랩의 『천국을 향한 기다림』과 전경린의 소설 『굿바이 R』이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래리 크랩 선생님께서 작년 2월에 돌아가셨는데, 마땅한 환송식을 하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7개월 전에 쓰셨다는 책이 나온 걸 보고 환송식은 무슨 환송식이냐, 내 마음에 계속 살아 있는데 싶었다. 그렇게 따지면 마르바 던, 토마스 키팅, 유진 피터슨 같은 분도 마찬가지이다. 몇 년 사이 책으로 만난 선생님들이 많이들 돌아가셨다. 브레넌 매닝의 소천 소식은 마침 주일 아침이어서 그날 예배가 천국 환송예배되었던 기억이 있다. 같은 책도 몇 년이 지나면 달리 읽히곤 하니, 다시 읽으며 두고두고 환송하기로 하자.
하도 내가 래리 크랩, 래리 크랩 하니까 주변에 따라 읽는 이들이 많은데, 당장의 호평을 들어본 적이 없다. 책이 왜 이러냐, 어렵다, 말이 왜 이리 돌려서 하냐... 뭔가 얘기를 할 듯 말 듯, 다음 장에서 그 말을 하려나? 없고, 또 그 다음 장? 없고.. 그러다 책이 끝난다고. 인정이다! 이 분의 글쓰기 스타일을 잘 알겠고, 왜 그런 방식으로 쓸 수밖에 없는지 나름대로 추측하는 바도 있다. 그렇게 쓸 수밖에 없는 이유도 너무나 잘 알겠다. 이번 책 『천국을 향한 기다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꼭 하고 싶은 말을 함부로 꺼내놓지 않거나 결국 하지 않고 책이 끝나는 듯 싶은 이유가 이것일지 모른다. 바로 그 얘기를 먼저 내놓았다면 당신은 거기서 책을 덮어 버릴 것이다. "다 아는 얘기네! 뻔한 얘기잖아! 이런 얘기 말고 더 신박한 거!"
하지만 분명히 해 두자. 복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해서 복음을 거절했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바울은 하나님께서 진리를 환히 드러내 주셔서 진리가 사람들에게 환히 드러나 있으므로,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조가 나타난다고 말한다.(롬 1:18-20) 복음을 거절한 죄를 용서해 달라는 애원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당찮은 용서를 구하는 애원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래리 크랩은 평생 이 말을 했다. 훤히 드러나 있는 진리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진리가 너무나 깊고 아프고 소중해서 함부로 내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텍스트로서의 진리를 냅다 정답으로 내놓기에 우리의 콘텍스트가 너무나 복잡하고, 부조리하고, 아프기 때문이다. 래리 크랩은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의 문제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것임을 안다. 진리는 훤히 드러나 있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기에 눈앞의 고통이 너무 크거나, 그것이 전부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리 다 필요 없고, 내가 바라는 하나님은 고통의 문제나 해결해 주셨으면 싶은 것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그런 욕망을 포장하는 사람들을 "영적 가면"을 쓴 존재라고 쓴 책, 그것을 조장하는 교회를 향한 분노와 소망을 쓴 책... 평생 그 욕망과 싸운 분이고, 그의 모든 책은 이 한 가지 주제를 담았다고 나는 본다.
선명하지 않은 글쓰기 방식은 그 모든 책에서 겨누고 있는 칼 끝이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쉽게 '진리로 선포' 하지 못하는 것이다. 훤히 드러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자신을 알기에, "영적 가면"을 쓴 사람이 자신임을 인정하기에 그렇게 돌려서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평생 그렇게 살았던 래리 크랩의 유언 같은 책이 내게로 왔다.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으로 알아들었던 착실한 독자인 나는 유언도 잘 알아들었다. 처음 래리 크랩을 만난 때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훤히 드러난 진리를 조금 더 겸손하게 받들게 되어서일 수도 있고. 단도직입적으로 선언한 (이 훤하고 뻔한) 내용을 내게 주는 래리 크랩의 신박한 유언으로 알아듣고 받아 적는다.
1. 지금 있는 자리에 있어라!
어둠, 혼란, 씨름, 실패 가운데 살아라.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최고의 기회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척하거나, 있고 싶어하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2. 다른 사람에게 말하라. 한 명이면 된다. 여러분이 정직한 투사라고 믿는 사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잘난 체하거나 비판하길 좋아할 가능성이 낮은 사람, 도와주거나 동정하거나 바로잡거나 꾸짖지 않고, 그저 옆에 있어 줄 사람을 붙여 달라고 기도하라.
3. 기도하며 하나님과 계속 대화하라. 악을 즐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는 추악한 진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라. 여러분보다 더 확실하게 실패한 사람을 생각하며 극악한 현실을 외면하지 마라. 대신, 죄의 구렁텅이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라.
4. 귀를 기울여라. 귀 기울일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여러분이 한 모든 말에 하나님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어질 때 그때가 바로 귀를 기울일 때다.
5. 절박하고 겸손한 영혼에 복음 진리가 활활 타오르게 하라. 여러분이 가장 못난 순간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가장 선명하게 보게 될 것이다. 물론 죄를 완전히 끊지는 못할 것이다. 매일 회개하며 살아야 한다. 대신에 구원, 거듭남, 화해, 즉 경이로운 은혜가 죄인이자 성도인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전할 수 있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