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외 마스크 해제 후 첫 산책. 날씨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연둣빛 나뭇잎들의 명도와 채도는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니 순간의 아름다움이다. 화무십일홍이라... 열흘 붉은 꽃이 없다 하니 인생의 허무를 노래하며 보낼 일이 아니라 열흘의 붉음을 누리자는 주의이다. 걷는 일이야 언제든 좋지만, 이런 봄날 같으랴. 야외 마스크 해제라니 마스크 벗고 오늘 분량의 붉음, 아니 연둣빛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꿈모임 벗님의 별칭 중 하나가 '꽃마리'이다. 아기 손톱보다 작은 꽃이라고, 아주 흔한데 가만히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설명하곤 한다. "오늘의 미션! 아기 손톱보다 작은 꽃마리를 만나는 것이다." 하며 집을 나섰다. 작은 들풀에 눈을 맞추자면 한 발 한 발 주저 않는 발걸음으로 걷는 즐거움은 포기해야 한다. 주저앉아 들여다보며 찾고 찾아야 한다. 과연 다음 꽃 검색도 인식을 못할 정도로 작은 꽃이었다. 사진을 찍어 단톡에 올리니 '꽃마리'님이 꽃마리가 맞다고 하셨다. 어쩌면 그렇게 조그만 녀석이, 어쩌면 그렇게도 의연하게 제 모양대로 피어있다. 누가 봐주든 말든 제 모양대로 제 자신을 뿜뿜 하고 있다. 애쓰지 않으며 제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다.
야외 마스크 해제라는데, 마스크 안 쓴 사람이 나밖에 없다.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싶을 정도다. 이러다 마스크 안 썼다고 테러 당하는 건 아니겠지, 잠시 걱정이 될 정도였다. 마스크 쓰는 게 편하단 얘길 많이 듣는다. 가리는 게 좋다고. 우리 아이들이 그렇다. 마스크 벗을 자신이 없다고. 딱히 자랑스럽지 않은 얼굴, 반쯤 가리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적당히 가리고 살며 느끼는 안전함이 있지. 그렇지.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동시에 착용하는 게 몹시 불편하다. 눈이 부셔도 그렇다. 마스크 벗는 대신 선글라스를 쓰고 셀카를 찍어봤더니 정말 그렇다. 내 얼굴도 그렇다. 하관을 가리고 눈을 드러내는 게 그나마 낫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 꽃마리는 아무 걱정 없이 창조주께서 만들고 꾸며주신 그대로 제 모습을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다. 딱 열흘을 피었다 지더라도 그러할 것이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마 6:30)" 하시는데, 우리는 가리고 숨길 것투성이다.
지난 주일 교회 아기들이 모두 과자 백팩을 메고 돌아다녔다. 어린이주일 선물로 선생님들이 준비하신 것인데,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백팩이라니! 아니다. 백팩 자체는 그냥 막 신박한데, 백팩 매시는 분들의 귀여움이다. 쟤가 보기보다 무거운 백팩이다. 사이드에 뽀로로 음료수가 한 병씩 달려 있으니, 저 쪼그만 등이 감당할 무게가 아니다. 사진의 저분도 수월 치는 않을 텐데 나름 그 무게를 이기고 의연함을 잃지 않으시지만(아오, 저 조그만 나이키 운동화는 또 어쩔!). 직립 보행한 지 얼만 안 된, 휘청휘청 걸음마하는 아기가 저도 가지겠다고 달려들었다. 백팩 메다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렇지, 쌀가마니 수준 아닌가! 쌀가마니 등에 지는 수준 아닌가 말이다.
최 선생님과 함께 여행, 그것도 제주여행이다. 일이 되려면 이렇게 또 쉽다. 하루게 다르게 쇠약해지시는 선생님 모시고 햇살 좋은 날 드라이브 한 번 해야지 벼르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걷기도 전처럼 누리질 못하시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함께 공부하던 선생님 한 분이 제주 한 달 살이 중이라며 보낸 풍광 사진에 감탄하다 된 일이다. K 선생님은 모임에서 마음이 통하던 큰 언니 같은 분이다. “와, 부럽네요!” “부러우면 와요.” 이런 말을 주고받다 전격 성사되었다. 썩 건강하지도 않은 노인을 모시고 하는 여행에 이렇게 설레다니. 나답지 않은 일. 못 말리는 나의 최 선생님 사랑이다. 비행기 좌석에 나란히 앉고 보니 감회가 새롭다.
하아, 이런 날도 있네요. 선생님과 비행기 여행이라니요. 언젠가 해주신 비행기 착륙 활강 얘기가 생각나요.
무슨 얘기지? 내가 비행기에 대해 뭘 안다고, 무슨 얘기를 떠들어댔을까?
아유, 선생님. 저 건망증 상담해주셨잖아요. 제가 왜 선생님 댁에 가기로 한 약속을 잊어버렸을 때요. 비행기가 이륙 때 고도를 높일 때와 달리 활강 시간은 길다고 하셨잖아요. 창밖은 아직 대서양 위인데 왜 이리 빨리 내려가는 거야 싶다면서요.
그런 얘길 했어? 내가?
네에. 제 나이가 그런 때라고 하셨잖아요. 막 활강을 시작하는 때요. 고도가 거의 낮아지지도 않았는데 불쾌감은 가장 크다고요. 건망증에 대해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죠. 중년을 거쳐 노년으로 가는 긴 활강이고 낯선 시작이어서 그렇다고요. 정말 위안이 됐는데요.
아아, 맞다. 맞다. 어느 책에서 읽은 얘기를 해줬지? 정신 좋네. 내가 한 말도 기억이 안 나. 긴 활강의 끝에 다 와서 그래. 나는 곧 착륙하는 비행기외다. 어…. 출발한다.
네, 선생님 지금 착륙 아니고 이륙 중이십니다. 하하.
그러네. 뭐. 이제 막 이륙하다 치자. 내 인생 지금 막 시작이다. 하하. 아이고, 정 선생과 제주도를 다 가네.
그러니까요, 선생님. 너무 좋아요. 아으, 신나! K 선생님 덕분이에요. 너무 부러워요. 한 달 제주 살이라니. 요즘 제 친구들 로망인데, K 샘은 그걸 하시네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용기가 참 대단하세요. 용기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한 일인데, 남편분도 대단하시고요. 에고, 부러워라.
정 선생, 어차피 알게 될 거고 K 선생도 허락한 것이니 말할게요. K 선생 일종의 별거예요. K 선생 쪽에서는 별거고, 남편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그런 상황이에요. 이혼 결심한 지 좀 됐는데, 남편은 완강하게 반대하고…. 좀 어려운 시간 보냈어요.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나 봐요.
네에? 상상도 못 했어요. 늘 밝고 평온해 보이셔서요. 그런 일이 있으실 줄이야. 남편분도 좋은 분 같았는데요. 성실하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시지 않나요? 자녀들도 다 잘 되고, 부족할 것 없어 보였는데. 정말 뵐 때마다 늘 행복해 보이셨는데. 우리 모임에서도 그야말로 피스 메이커셨잖아요.
그러게. 남편도 그래서 당황스럽대요. 그게 문제였는지 모르지. 속은 썩어가고 있는데 꾹 참고 내색하지 않은 것.
어, 선생님. 남편분도 만나보셨어요?
실은 남편이 상담받을 수 있냐고 연락이 왔었어요. K 선생과 내 관계가 있으니, 다른 데를 소개했고. 그래서 겸사겸사 제주에 가는 거예요.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냐만, K 선생 얘기를 좀 들어주기라도 하려고. 마침 정 선생도 결혼에 관한 책도 쓰고, 그 분야 전문가잖아. 놀러 가는 줄만 알았지? 이제 비행기 탔으니 빠꾸 시키지도 못할 테니 알려줘야지. 에헴.
네에? 그런 거였어요? 저만 혼자 엄청 들떴네요. 민망해라. 아, 그리고 저 전문가 아녜요, 선생님. 어쩌다 보니 책 쓰고, 책 쓰고 나니 한두 번 강의하고 그러는 거지. 제 코가 석 자예요. 아, 진짜…. 여러모로 부담되네. 비행기 돌릴 힘도 없고. 땅콩이라도 던져야 하나.
허허, 놀러 가는 마음으로 가면 돼. 나도 그런 가벼운 마음이에요. 이 좋은 봄날에 내 친구 정 선생과 제주 여행 가는 거지. 가면 재워줄 친구가 기다리고 있고. 공항으로 나와 있겠다고 했어요. 이런 상태로 혼자 지내는 게 좋기만 하겠소? 같이 좀 놀아주고 옵시다. 얘기도 들어주고.
네, 그나저나 그런 뜻이면 선생님만 가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제가 있어서 편하게 상담하실 수 있겠어요?
내가 미리 얘기해뒀어. 이제는 말하고 싶대요. 그리고 상담은 무슨! 걱정하지 말고 정 선생 평소대로 해요.
그렇다면 저도 가볍고 묵직하게, 편하게 마음먹겠습니다.
참, 말도 재밌게도 한다. 가볍고 묵직하게, 편하게…. 좋네. 사실 나는 K 선생 이런 행보가 그리 부정적으로 보이지 않아.
네? 이혼에 찬성하신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내가 뭐라고 남의 이혼에 찬성하고 말고 하겠소! K 선생 부부가 평생 부부싸움 한 번 해본 적이 없다면 믿겠어요? 부부싸움의 정의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겠지만. 큰 소리로 싸운 적이 한 번도 없대요. 평생 바쁘게 일하던 남편이 은퇴하고 집에 들어앉은 지가 1년쯤 됐나. 더 됐나? 같이 그렇게 오래 붙어 있어 본 적이 없는데 죽을 듯이 힘들었대요. 혼자 끙끙거리다 정신과에도 가고 약도 먹고 그랬나 봐.
아아…. 혼자서요? 그러면 남편분에게 암 말씀도 안 하시고요?
그렇지.
병원에 가실 정도면…. 말을 안 한다고 남편은 모르셨나요?
모르긴 해도 그 지점이 문제라면 문제겠지. 평생 싸우지 않았다는 말이, 평생 서로 좋기만 했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두 사람 다 그런 성격이 그런 데다, 신앙심도 작용했겠죠. 갈등은 무조건 죄다, 이렇게들 여기잖아요.
그건 그래요. 선생님. 드러내고 함께 해결하기보다 일단 은혜로 어떤 문제든 덮고 보려는 것이 참 안타까워요. 신앙의 이름으로 문제를 더 키우는 것 같기도 하고요.
부부 사이든, 친구 관계든, 교회 교우들 간에든 갈등을 드러내고 마주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 그래서 일단은 피하고 싶은 거죠. 그럴 때 발동하는 게 심리학적으로 방어기제라는 거 아니겠어. 나는 상담하면서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신앙’을 방어기제로 쓰는 사람들이에요. 하나님, 은혜, 감사…. 이렇게 초월해 버리면 더는 뭐 말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내가 K 선생의 도발이 꼭 부정적이진 않다는 거예요.
아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선생님. 저번에 <디어 마이 프렌즈> 드라마 보실 때도 그런 얘기 하셨잖아요. 적당한 가면으로 포장하지 않고, 감정 다 드러내며 싸우고 화해하며 더 돈독해지는 것이 우정이라고요. 아, 그런데 그게 부부로 가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친구는 싸우고 절교했다가 다시 친해질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부부는 정말 이혼하면 남이잖아요. 그냥 남이라는 한 마디로 담을 수 없는 고통과 스트레스가 이혼의 과정이고요.
평생 상담하면서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려요. 가톨릭 사제이자 심리학자인 마르틴 파도나이(Martin H. Padovani)라는 분도 똑같은 얘길 해서 반가운 적이 있었는데. 폭력보다 침묵 때문에 파경에 이르는 결혼 생활이 더 많아요. 가정불화나 이혼의 원인이 갈등이라고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갈등 해결을 위한 갈등이 없거나, 그것을 피하려고 하다 결국 파국을 맞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정 선생 말마따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행복한 부부로 보이는 K 선생이라서 나도 많이 놀랐어요.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꼭 나쁜 일만은 아니다 싶은 거예요.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고통을 침묵으로 덮고 있다면 더더욱.
맞는 말씀인데, 나도 청년들에게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한 좋은 연애할 수 없다고 말하긴 하는데 어려운 일이다. 갈등을 드러내고 갈등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는 모른 척 덮어두고, 느끼지 않아야 살아지는 것이 결혼 아닌가. 졸혼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소설가 이외수 선생 부부의 졸혼 뉴스가 나왔을 때, 친구들 분위기가 그랬다. 나도 하고 싶다, 졸혼. 그동안 맞춰 사느라 충분히 애썼으니 이제 좀 편하게 살고 싶다, 그런 얘기들이 오가곤 했다. 신앙이 있는 친구나 비신자 친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때 입담 좋은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6)” 이 말이 무서워서 이혼은 생각지도 못하지만, 졸혼은 어쩐지 좀 나은 것 같다나. 치명적인 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말에 다들 웃고 동의했던 것 같다. 그때 결혼의 민낯을 새삼스레 확인했다. 이혼이 아니라 졸혼이라면, 그래서 종교적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책임을 피할 수 있다면? 마지못해 유지하는 결혼보다는 졸혼? 그거 괜찮네. 휘청,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아, 그게 아니고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가 흔들리는 거였다.
어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하게 해? 왜? 아무래도 잘못 따라나선 것 같애? 가볍게 묵직하게 편하게 놀고 오자니까.
그게 아니고요. 선생님 혹시 졸혼이란 말 들어보셨어요?
그럼, 이외수 씨가 공개적으로 졸혼을 했잖아요. 얼마 전에 그걸 다시 취소했다지 아마? 이외수 씨가 병으로 쓰러지면서 부인이 취소했다지요? 그게 왜? K 선생한테 이혼 말고 졸혼을 하라고 할까?
모든 갈등을 다 드러내고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 뉴스가 나왔을 때요, 친구 중 졸혼에 반대하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할 수만 있다면 다 하고 싶다는 거예요. 좋아서 유지하는 결혼이 없는 것 같았어요. 저는 나름대로 결혼에 만족하는 상위 5% 부부라는 자부심이 있거든요. 아니, 음…. 있었었었거든요. 그런데 저도 그때 졸혼이란 말에 끌린 거예요. 남편이 싫은 건 아니지만, 편하게 혼자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인지 어쩐지. 문득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요 제가, 저희 부부가 행복해서 행복한 것인가,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행복한 것인가 싶네요. 외적인 평화를 위해서 덮어두고 보지 않으려는 갈등이 있나 싶기도 하고요.
성찰 병!
네?
성찰 병이라고. 심리적 영적 결벽증! 하하. 사람 참! 결혼을 유지하는 것 어려운 일이죠. 맞아요. 혼자 사는 게 쉽지, 나와 다른 사람과 마음 맞춰 사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에요. 어렵고말고. 그래서 내적 외적 갈등이 있는 거고. 그걸 어떻게 다 일일이 표현하고 살겠어요? 매일 싸우다 볼 일 못 보겠네. 졸혼에 환호하는 친구들 마음, 충분히 이해되는데?
아…. 저도 뭔가 결단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어요. 사실 요즘 남편에게 쌓인 게 하나둘이 아니거든요. 갈등을 덮어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요. 집에 가면 싸워야겠다, 제주살이 선언이라도 해야지, 생각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어요.
엄한 부부 사이를 쑤셔놓는 게 됐구만. K 선생 얘기하는 거예요. 착하게 신앙생활에 충실한 사람이잖아요. 분노나 섭섭함 같은 것을 표현할 줄 몰랐던 거예요. 아니, 표현 이전에 인식을 못 한 거지. 감정이라는 게 에너지거든. 특히 분노 같은 감정 말이에요. 참는다고 없어지면 참 좋은데, 그 왜 열역학 제1 법칙이라는 게 있잖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라고. 에너지는 스스로 소멸하지 않아. 참고 인내하는 것은 미덕인데, 참아서 없어지면 참 좋겠는데,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거지. 억압해서 압력받은 것은 언제 어디선가는 터지고 만다는 거예요. K 선생의 갑작스러운 이혼 선언이 그런 것 아니겠어?
그렇다면 에너지가 너무나 오랜 시간 고여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K 선생님의 상황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픈데 어쩐지 절망적으로 다가와요. 선생님께선 부정적으로만 보이진 않는다고 하시는데…. 이제 와서 뭘 할 수 있을까요? 느낌적 느낌으로는 K 선생님은 어쨌든 더는 남편과 함께하기가 싫으신 거잖아요. 한 공간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으신 거잖아요.
그러게. 현재로선 그런 것 같아요.
비행고도 때문일까. 가슴이 답답해 온다. 최 선생님께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걸까? 이혼 선언이 부정적이지 않다면 K 선생님에겐 지금 이혼만이 답인가? 아니면 무슨 다른 대안이 있다는 걸까. 60을 코앞에 두고 수면 위로 떠오른 갈등이라니. 평생 묵은 갈등이라니. 너무 늦은 것 아닐까? K 선생님은 어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최 선생님의 달관한 듯한 말씀에 마음이 갑갑하다 못해 화가 나려는 것 같다.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인생에 대해 했다는 말이 있어. 인생이란, 처음 40년은 본문을 갖추고, 나머지 40년은 거기에 주석을 다는 거래요. 주석이 없다면, 본문에 담긴 의미를 올바르고 이해할 수 없다는 거야. 인생 후반에는 살아온 날에 대해 주석을 달아야 한대. K 선생을 비롯해서 대부분 부부 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싶어요. 분명 뭔가에 끌려 결혼했을 거예요. 살다 보면 사람의 이면이 보이고, 어떤 식으로든 충돌을 하죠. 처음엔 싸우기도 했겠지. 사람 안 바뀌니까, 포기하고 또 사는 거예요. 아이도 키워야 하고…. 그렇게 살다 중년을 맞고 은퇴의 시기가 돼요. 내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야.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생의 후반기에는 살아온 날을 반추하며 성장하는 거예요.
반추라면요? 잘못 살아온 것에 대한 회개랄지, 그런 걸까요?
글쎄, 잘 하고 잘못하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잘못 살아왔다고 해서 그것을 지워버릴 수는 없는 거니까. 정 선생 말처럼 K 선생이 너무 늦게 자기감정을 만났다고 칩시다. 이혼하든 계속 살든 삶의 의미와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무엇을 위해 그렇게 참고 살아왔을까? 그렇게 살아서 이룬 것은 무엇인가? 잃은 것은 또 무엇이고? 이런 질문을 해보는 거지. 중년 이후 노년으로 가는 삶의 과업이라고 생각해요. 이제껏 살아온 삶에 주석을 다는 거지.
아…. 이혼의 문제가 아니군요.
그래, 다행히 남편도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상담을 요청해오지 않았소.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두 사람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각각 돌아보는 거지. 정 선생, 사람 감정이 또 아주 재밌는 것이, 삼라만상이 그렇듯 고정된 게 아니라우. 우리가 같은 강물에 몸을 두 번 담글 수 없듯이 감정은 계속 변하고 흘러가거든. 정 선생, 제주도 여행 간다고 신나던 감정 어디 갔어요?
그러게요? 그 감정 다 지나갔죠. 지금은 답답하기만 하네요.
허허, 거 봐. 나는 이게 인간 소망이라고 봐. 우리가 힘주고 버티지만 않으면 변하고, 바뀌고, 흘러가거든. 그 사이에 하나님의 자비가 흘러드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고. 지금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요. K 선생 마음이, 그 부부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소. 그래서 우리 기도에 소망이 있는 것 아닐까?
아아…. 엇, 선생님 웃긴 생각이 났는데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제가 남편과 싸우잖아요. 싸움보다는 늘 저의 일방적 공격이긴 하지만요. 그런 날은 부러 말씀 묵상도 기도도 안 하는 거예요. 말씀 보고 기도하면 꼴 비기 싫은 마음이 사라질 걸 알거든요. 기도하나 봐라, 기도하나 봐라, 하면서 기도하는 자리 째려보면서 왔다 갔다 해요.
허허허, 그냥 다니지도 않고 째려보면서 다녀? 에고, 재밌다.
진짜 진리네요! 선생님. 감정은 끝없이 변하는군요.
그럼, 흘러가는 감정 붙들고 있는 게 몹쓸 고집이지. 내가 바뀌나 봐라! 너를 싫어하기로 한 내 생각도 바꾸지 않을 거야! 이렇게 힘주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어떻게 흘러 들어가겠어? K 선생은 지금 자기 결혼이 대단히 잘못됐고 이걸로 끝이라 여기는지 모르겠는데, 실망만큼 좋은 시작이 없어요.
아오, 선생님 그런데요. 좋은 시작은 좀 그래요. 너무 낭만적? 음…. 이상적인 말씀 같아요.
아까부터 불편해 죽겠지? 현실 모르는 혼자 사는 노인네의 허황한 희망 같아? 하하. 좋은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카를 융(Carl Jung)이 말하는 남성 안의 여성, 여성 안의 남성 기억 안 나요?
알죠. 여성의 무의식에는 남성성이 숨어 있고, 남성의 무의식 안에는 여성성이 있다고요. 그것을 잘 통합해내야 온전한 인격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요. 지금 두 분은 여성성 남성성 문제는 아니잖아요.
글쎄, 아닐까? 갱년기에 어때요? 남자들이 전에 없이 막 감상적이 되어 눈물 흘리고, 여자들이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따지는 태도 같은 거. 이전과 다른 모습 보인단 얘기 안 들어봐요?
아, 선생님. 안 들어보긴요. 일상이죠. 남편이 예전에 안 그랬는데 사소한 일에 삐지고 그러는 데 정말 당황스럽고 죽겠어요. 제 친구 남편은요, 마초 같은 남자거든요. 요즘 트로트 들으며 가사에 감동해 눈물을 그렇게 흘린대요. 친구가 눈 뜨고 봐줄 수가 없다고요. 너무 꼴 보기 싫다는 거예요.
하하하. 그래, 남성 호르몬이 줄면서 여성 호르몬이 더 발현하는 거지. 남자로 살아오느라 회피하거나 묻어두었던 여성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신호라고 해요. 여자도 마찬가지고. 카를 융이 말하는 중년 이후 통합과 성장이 또한 그런 의미야.
아, 갱년기에 그런 큰 의미가!
융은 그래서 이때의 위기를 영적인 삶으로의 초대라고도 해요. 이제 비로소 나로 온전히 살아가는 시작이 되는 거지. 이혼하고 안 하고보다 중요한 건, 평생 남편에게 기대하던 것을 거둬들이고 내 안에 있는 남성성을 어떻게 건강하게 살려낼 수 있는가 하는 거야. 내 인생 본문의 주석을 다시 쓰는 일이라 할 수도 있고. 장담컨대, 생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거에요. 이래도 좋은 기회가 아닌감? 야아아, 벌써 제주도다! 긴 활강 시작합니다.
강의 준비(대학 강의 아님), 논문 준비(박사 논문 아님)로 책 산성을 쌓아두고 있는데. 산성을 쌓은 벽돌 같은 책 틈에 저 두 권이 끼어 있었고 동시에 읽기를 마쳤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은 대학 들어가던 그 3월, 의식화 세미나 첫 책으로 읽은 것이다. 가끔 젊어서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면 "뭘 알고 이걸 읽었을까? 이해나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문득 이 책 생각이 났다. 대선 지나고 며칠 안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욕먹고 또 먹고, 또 다시 먹어도 싼 우리 세대는 어디서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그 시절 민주주의는... 그런 생각을 하다 주문했던 것 같다. "뭘 알고 읽었을까?"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시 읽어보니 대학 1학년 그 시절, 정말 숄 남매의 열정과 용기에 온전히 감정이입하며 읽었던 것 같다. 그때와 같은 피 끓는 심정은 찾으래야 찾을 수 없었지만, 왜 다시 읽고 싶었을까, 하는 마음이 알아지긴 했다. <컬러 퍼플>은 또 왜 갑자기 읽게 되었을까? 아, 벨 훅스의 부고 뉴스를 듣고 그의 책들을 다시 들춰보다 앨리스 워커에 이르렀고, 영화 <컬러 피플>을 보았었지.
왜, 지금 이 책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읽으면, 읽다 보면 찾아진다. 읽다 보면 깨닫게 된다. "아, 이 문장을 만나려고!" 하게 된다. 바로 지금 만나야 할 문장들이 있는 것이다. 가령, 이런 문장들.
이 모든 일에도 한스에게는 쉽게 꺼지지 않는 삶에 대한 애착이 있었습니다. 그를 둘러싼 세계가 점점 더 어두워질수록 삶에 대한 애착은 점점 더 강력하게 그의 안에서 바깥으로 뻗어나갔습니다.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삶은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광휘를 부둥켜안았습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p. 52
저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 이 모든 것은 저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까요. <아.미.죽> p.149
네 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말해줘, 셀리. 좋아, 내가 말했어. 그는 덩치가 크고, 나이가 많고, 키도 크고, 턱수염이 희끗희끗한 백인이야. 하얀 옷을 입고 맨발로 다녀. (중략) 백인들의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이 그런 모습이잖아. 슈그! 내가 말했어. 성경은 하느님이 쓴 거고, 백인하고는 아무 상관 없어. 그런데 왜 하느님이 그 사람들처럼 생긴 거지? 그녀가 말했어. 덩치만 더 클 뿐이잖아? 털이 좀 더 많고. 왜 성경도 백인들이 만드는 다른 것들하고 똑같은 거지? 어째서 자기들은 온갖 짓을 다 하는데 흑인이 하는 일은 저주만 받는 거야? (중략) 우리는 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난 아직도 모르겠어. 어쨌건 나는 머릿속에서 나이 든 백인 남자를 몰아내려고 노력중이야. 그 남자를 신경쓰느라 신이 만드는 세상을 제대로 본 적이 없거든. <컬러 퍼플> p. 257, 260
혼자 먹는 점심으로 미역국 라면을 선택했다. 현승이 생일 미역국이 한 그릇 남아 있어서 라면 하나를 넣어서 끓였다. 미역국 좋아하고, 라면도 어쩌다 한 번은 꼭 복용해줘야 하는 것이니 딱 좋은 조합이다. 이 메뉴는 내게 약간 로맨틱한 맛인데, 드라마 <멜로가 체질> 때문이다. 이게 현승이 인생 드라마라서 내가 이렇게 가볍게 왈가왈부하는 걸 알면 싫어할 테지만. 내겐 인생 드라마까진 아니지만 심심할 때 짤이라도 찾아서 자꾸 보게 되는 드라마다. 무엇보다 대사가 찰져서 아주 귀를 쫑긋 하게 되었었는데. 손 감독 역의 안재홍과 진주 작가 역의 천우희 티키타카는 물론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모두 받아 적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다. (추천하는 건 아니다. 완전 내 취향일 뿐이다.) 손 감독 캐릭터 너무 좋은데, 평양냉면, 미역국 라면, 파 떡볶이를 만들거나 먹는 것, 정말 최애! 그래서 만들어봤다. 미역국 라면. 만들어 먹으면서 오랜만에 넋을 놓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다시 보기'를 달렸다.
벚꽃이 예쁘다는 은이 성지를 찾았다. 말로도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는 빛깔의 봄 산, 그 배경의 흰 건물인 성당이다.
벚꽃 엔딩 즈음이라 바람 한 번 불 때마다 우수수 떨어지는 흩날리는 벚꽃 잎. 그 배경의 십자가 길이다.
십자가 길을 천천히 한 바퀴 걷고 근처 카페에 갔다. 벚꽃 아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독서의 시간.
마음에 드는 근사한 사진을 여러 장 건졌다.
'마기꾼'이라는 말이 있단다. 마스크 사기꾼이라고. 마스크 벗은 얼굴에 실망하여 붙인 이름인 것 같은데. 마스크 낀 얼굴로 사귀기 시작했다면 나중에 실망하지 않을 방법이 없지 싶다. 보이는 눈을 근거로 보이지 않는 코와 입과 턱을 가장 조화롭게 상상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운동하는 곳에서 물 먹느라 잠깐 마스크 벗은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내린 결론이다. 보이는 것을 근거로 주변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채워 넣어 완전체로 상상할 때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마기꾼이라는 말이 딱 맞고. 멋진 사진 한 장도 그와 다르지 않다. 앵글 밖은 상상과 다르다. 일단 저 카페, 커피 맛이 너무나 좋지 않아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책 보는 게 설정은 아니지만, 셔터 누르는 소리에 살짝 얼음 상태를 유지했던 것 사실이고. 주변의 지저분한 곳은 이렇게 자르고 저렇게 잘라서 멋진 부분만 남긴다는 건 선수끼리 다 아는 거고. 앵글 밖은 다르다. 앵글 밖은 심지어 위험하다. 사순 기간이라 십자가 길을 걸으며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은 참 좋았다. 한껏 고양되고 경건해진 마음으로 동산을 내려오다, 아아아아아악!!!!! 나는 소리 질렀고, 남편은 그 소리에 더 놀라 펄쩍 뛰며 나를 마크하려 들었다. 유유자적 꼬불거리며 가는 뱀 한 마리 발견! 십자가 밑에 뱀 한 마리.
애써 짠 계획이 아니라 흐르는 대로 따르다 좋은 하루를 보냈다. 조금 차분히 말하고 싶어서 '좋은 하루'라고 했다. 쉽게 들뜨고 과장하기 좋아하는 평소의 나대로 말한다면, 대박 신기한 사랑의 하루였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점심 약속이 있었다. 초5, 초4의 어린이 성가대로 만난 제자 둘이다. 그때 내 나이는 27세. 그러니까 얘네들은 몇 살이냐. 자축인묘진사... 모르겠다. '울고 웃고'가 가장 적절한 제목이다. 단톡이든, (언제 적) 마이피플이든, 라인이든. 개그 코드가 맞고, 선생님이고 뭐고 격의 없이 서로 놀리는 게 쉬워서 "웃고"이다. 웃다 말고 급하게 진실이 튀어나와 울기도 해서 "울고"다. 갑자기 들어온 전화 한 통으로 대단한 계획 없이 성사된 모임이다.
십수 년 전, 얘네들과 헨리 나우웬의 <영성 수업>을 함께 읽고 기도도 가르치고, 메시지 성경읽기도 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이다. 이제 와 돌아보니 기가 막힌 일이다. 당시 나는 신앙 사춘기 절정이었다. 최근 어느 인터뷰에서 그 캄캄한 시절에도 할 것은 다 했다고 했는데. 할 것을 다 한 게 아니라 살자고 하는 짓은 했었구나. 마음 잘 맞는 제자들 데리고 <영성 수업>을 했었구나! 집에서 떡볶이 해서 먹이고 커피 내려서 마시고 하면서. 그 시간이 얘네들에게 어떤 씨앗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나를 살게 하는 시간이었던 건 분명하다. 정말 나 포기를 모르는 여자였구나. 그 메마른 시간에도 살아 있는 시간을 찾아냈었다.
"우리 어제 만난 것 같지 않아요?" 라는 말에 격한 공감. 본 지가 몇 년인데 어제 명일동 LG 아파트나 그 동네 어느 카페에서 만난 느낌이다. 길지도 않은 시간, 별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느낌이 가득하다.
돌아오는 길, 죽전에서 '고봉삼계탕' 간판을 보았다. 바로 핸들을 꺾어 들어가서 삼계탕 포장 주문을 했다. 주일 예배에서 만났는데 안색이 썩 좋지 않은 Y 생각이 났다. 코로나를 앓고 몸이 썩 괜찮아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집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지만 일단 포장하고 집 앞으로 갔다. 잠깐 내려오라 했더니 괜찮으시면 잠깐 올라오셔도 된다 해서 계획 없는 침입을 했다. 남의 집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이 무례한 행각, 내가 해본 적이 있던가? 내 사랑 일곱 살, 다섯 살 두 남매가 토끼처럼 뛰면서 반기고. "사모님, 이리 와봐요." "사모님, 이거 봐바요." "사모님, 내가 사진기 만들어 줄까요?" "사모님, 국기 퀴즈 내봐요." "사모님 이제부터 나랑 책 파는 집을 만들어요." "사모님, 이제부터 우리 자요. 눈을 뜨면 지는 거예요." 그러다 헷갈려서, 목사님... 목사님... 전도사님... ㅎㅎㅎ 꿈같은 시간을 보냈다.
사모 정체성이란 거의 없는데, 사모님, 사모님, 이 말이 왜 이렇게 행복하냐고. 남매의 엄마인 Y는 내가 코로나를 앓을 때 집 앞 현관에 간식을 두고 갔었다. 워킹맘으로 시간을 어떻게 쪼개 쓰고 있는지 잘 아는데, 바쁜 퇴근길에 들렀을 생각하니 뭉클했다. 그런 배려를 받았는데, 한참 언니인 나는 이후 Y 가족이 모두 확진받았단 소식을 듣고도 챙기고 돌아보질 못했다. 참 고마운 가족이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뒷부분 가사 "나 피곤치 아니하며"로 한 발도 나가지 못하고 "메마른 땅, 메마른 땅"을 헤매던 시절, 이 가족이 없었으면 더욱 메마른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먼지 나는 시간을 걸을 때 "어쩌면 내가, 우리가 좋은 사람인지도 몰라."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줬었다.
우리 깨어진 본성이란, 사랑을 향해 가지 않는다. 사랑 받을 곳을 향하기보다는 "누가 날 싫어하나, 누가 날 비난하나" 그 소리를 향해서 귀가 커진다. SNS 어디서 누가 내 욕을 하는가, 거기에 골몰한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 백 번 들어도, 그 반대의 메시지 한 번이면 그거 하나만 붙들고 며칠이고 잠을 못 이루는 우리이다. 사랑받을 곳으로 가야 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기도 어떤 때는 한없이 부족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사랑이 필요하다. 자아 팽창을 유발하는, 고래나 춤추게 하는 허튼 칭찬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좋음'을 확인해주는 곳을 부러 찾을 필요가 있다. 오늘은 애써 찾고자 하지 않았는데, 흐르는 대로 따르다 선물 폭탄을 받은 날이다. 깊이 감사한다. 오늘 이 온기를 오래 간직하려고 한다.
야간자율학습 하는 고3이라 마주앉아 긴 수다 떨 시간이 없네. 짧게라도 농담 따먹기 하는 게 참 재밌는 아들인데... 테이블 맞은 편 저 자리에 와 서성거리면 놀자는 얘긴데, 그럴 시간이 없다. 주말이 좋다. 오랜만에 돌아온 내 농담 따먹기 친구!
엄마, 나 음식 쓰레기 버리고 한 바퀴 돌고 올게. 돌고 올게. 알았지? 그래, 갔다 와. 엄마, 돌고 들어오면 엄마가 이렇게 말해주면 좋겠어. 어떻게? 뭐? (상상이 안 되네) 돌았냐? 돌았어? 이렇게 한 마디 해 줘. 알았지? 깔깔깔깔.... 이런 개그 너무 좋아. 내 소중한 농담 친구!!!
아, 며칠 전 아침. 준비를 너무 빨리 했다면서 현관에 서서 밍기적거렸다. 그 짧은 시간, 취향저격 몇 말씀 남기고 등교하셨다. 애는 나갔는데 현관 근처에서 말의 여운이 종알종알 남았다. 혼자 키득거리며 기분 좋은 아침을 보냈었다. 옛날 에피소드도 떠오르고.
엄마, 내가 확실히 이제 다 큰 거 같애. 어른이 된 거 같애. 학교에서 똥 싸는 게 그렇게 어렵지가 않아. 아침에 배아프면 학교 가서 똥 마려울까봐 불안하고 그렇거든. 이젠 좀 그런 게 편해졌어. 그냥 학교에서도 편하게 화장실 가. 아, 물론 놀이터를 봐도 아무렇지 않은 건 오래 됐지. (* 아래 글 참고) 그런데 맥도날드 보면 설레지? 당연하지! 그렇지? 아직 어른 아닌 거야. 빨리 학교나 가.
벚꽃 머리에 이고 걸을 수 있는 나날이다. 월요일로 치면 두 번 정도 될까. 여기저기 벚꽃 길 검색을 하다 동네 보정동으로 정했다. 산책하며 지나는 길이지만, 벚꽃 명소로 치고 가 보기로. 여러 아파트를 통과하고 작은 언덕 같은 산을 넘어 3,40 분 걸으면 보정동 카페 거리다. 인도 카레 좋아하고, 따뜻한 난을 특히 좋아하는데, 활짝 열어젖힌 창문을 좋아하고, 노천카페도 좋아하는데, 좋아하는 것을 다 갖춘 식당에서 기분 좋게 식사했다. 날이 뜨거워서 해가 나는 쪽으론 걸을 수가 없다. 커피 한 잔 테이크 아웃해서 정자 벤치에 앉았다.
월요일 밤에 나는 거실에서 대학원 수업하고, 남편은 안방에서 <마음의 혁신> 책모임을 한다. <마음의 혁신>은 내 인생의 카타콤 안에서 만난 인생 책 중 한 권이다. 신앙 사춘기의 숲이 아직 캄캄할 때, 카를 융과 안셀름 그륀, 아빌라의 데레사를 시각 장애인 수준으로 더듬던 때였다. 우레와 같은 깨달음을 주지만 너무나 낯선 저자들이라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었다. 그 시절 유일하게 익숙한 세계 안의 저자가 달라스 윌라드였다. 이제 읽어보면 그렇듯 철학적이고 신학적이고 딱딱한 책인데, 그 책을 읽고 그렇게 마음이 뜨거워졌으니, 참 신비한 일이었다. 작년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 여름 방학 중에 <마음의 혁신>을 함께 읽었다. 감개무량했지. 나는 <마음의 혁신> 한 권이지만, 달라스 윌라드의 전작을 읽고 제대로 빠져 있는 남편이 최근 목사님 집사님 세 분과 월요일 저녁 책모임을 하고 있다. 달라스 윌라드의 인생은 물론 살았던 동네나 집(구글 지도로 다 찾아감)까지 꿰고 있는 김종필이다. 달라스& 종필, 어쩐지 성향과 기질이 비슷한 구석이 있다.
나란히 앉아 벚꽃 흩날리는 장면을 바라보며 이 얘기 저 얘기 경유하다 '달라스 윌라드' 역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이 "머리를 감다가! 내 영혼을 느꼈어. 달라스 윌라드가 말하는 그 영혼, 내 영혼의 상태 같은 걸 느꼈어."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물론 알아들어진다. 관상기도나 침묵의 시간이 아니라 머리를 감다가인 것은 조금 의외이지만, 충분히 끄덕끄덕. 또 <무지의 구름>이나 <영혼의 성>이 아니라 그 철학적이고 딱딱한 <마음의 혁신>을 읽다가 자기 영혼을 '느꼈다'니! 그건 좀 갸우뚱... 이지만 김종필이니까! 아, 나도 오래 전에 그랬었었었었지!!!
같은 걸 같이 읽고, 같은 생각을 하고, 모든 생각을 나누되 깊이 나누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불행을 달리던 때가 있었다. (있었다, 아니고... 지금 이 순간만 빼고 늘 그렇다.) 말하자면 영적 여정에서 내가 큰 덕을 보고 있는 신비신학이나 기도를 남편도 똑같이 알아야 한다는 조바심 같은 것이다. 내게 좋은 것은 좋고 옳은 것이니, 남편도 나와 같아져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페미니즘이고, 어떤 때는 심지어 수영이나 PT 같은 운동일 때도 있다.) 그의 길이 있는 걸. 그와 나의 다름을 평생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살면서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집착이다. 너의 길과 나의 길이 다름을 새털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본다. 모처럼, 아니 난생처음인가? 네 길을 버리고 나의 길로 오르라고 얼마나 강요하고 압박을 주었던가. 동네 정자 벤치에 앉아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다. 내일이면 다시 설교 논평을 하고, 말투를 트집 잡으며 나의 길을 강요하고 말 것을 알지만, 피고 금세 지는 벚꽃의 아름다움에 취해 잠깐 착한 마음을 가져보는 것으로! 잠깐 왔다 가는 마음이지만, 내게 있는 마음인 걸로.
'상처 입은 치유자 : 에니어그램 지도자 과정'이 시작되었다. 세 번째다. 각자 꾸민 저 양초의 개성을, 양초가 놓인 일상의 자리를 보면 감동을 너머 신성한 느낌까지 든다. 상징의 힘이다. 살아온 날의 서사가, 적지 않은 비용과 시간을 들여 이 과정을 선택한 이유가, 되고 싶은 나와 지금의 나 사이 거리로 인한 막막함이, 성장과 사랑에 대한 기대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찾는 갈망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만든 양초가 각각의 일상의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도 그렇다. 마음과 영혼에 대한 높은 배움과 깨달음이 있다 해도 결국 그것을 살아내야 할 곳은 일상이니까. 일상은 많은 경우 견뎌야 하는 곳이니까. 내적 여정 공부들이 이분들 일상에서 촛불 하나로 빛을 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일상의 작은 것을 변화시키는, 친밀한 관계 사이 작은 돌 하나라도 치우는 그런 여정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바람을 적다 보면 "너는 그러고 있니?"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무겁다. 행복하게 무겁고, 감미롭게 고통스럽다. 무겁든 가볍든 연결은 생명이고 나를 살아있게 하는 것이기에 좋은 일인 것은 확실하다. 연구소 카페 지도자 방에 올리며 마음에 심은 씨앗을 여기에도 심는다.
나에게 있어 에니어그램은 사랑 안의 성장에 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영성이란 언제나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이 말, 에니어그램은 사랑이라는 말 어떻게 들리시나요. 그 무게감이 어떻게 다가오나요? 사랑의 대상으로 누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해야 하는데, 나는 사랑이 부족해, 이기적이야." 이렇게 읽히시진 않나요. 저는 그렇게 읽혀요. 사랑이 부족한 내가 이런 말을 가지고 강의할 자격이 되나, 누군가 내게 이 글을 들이밀며 검증하려 하면 어떡하지? 우선은 그렇게 읽혀요.
사랑의 내용과 순서에 대해 오래도록 깨지지 않는 선입관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엄마의 목소리죠. "너는 왜 그리 교만하니? 쌀쌀맞고 사랑이 없니? 사랑은 둥근 거다. 좋은 사람, 싫은 사람 다 품어주는 거여." 제 인생에 가장 큰 사랑을 준 사람이 엄만데, 사랑에 대한 잘못된 명령어를 뿌리 깊게 입력한 사람도 엄마예요.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에니어그램을 사랑 안에서 성장이라고 말할 때, 에니어그램의 죄로 인해 울어야 제대로 자기 유형을 찾았다고 할 때, 먼저는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번호로 흥하는 것에 만족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작은 자기로 사는 일인지, 그런 삶이 계속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웃으로부터 멀어지는 고립, 치명적인 악에 빠진다는 거요. 번호에 매몰되어 살고, 번호의 방어기제를 그럴듯하게 자기 이미지 유지하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거죠.
잘못 입력된 명령어를 예수님께서 수정해주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가 본 만큼 안내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나를 만나본 만큼 다른 이와 진실하게 만날 수 있다는 뜻이고, 나를 용납해 본 만큼 타인을 용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내 존재가 사랑의 존재로 성장하는 것이 관건이라고요.
친밀하게 다가갈수록, 더 사랑하고자 애쓸수록 나의 집착과 회피가 명명백백하게 드러납니다. 여러분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 제 페르소나, 역할입니다. 역할에 동일화되지 않아야 할 텐데요. 여러분의 성장을 돕는다는 미명 하에, 닦달하고 겁주고 조종하려는 저를 봅니다. 역할에 도취하여 쉽게 자만심에 빠지고, 부족함을 마주할 때는 자기 비난에 휩싸이는 악습이 제게 있습니다. 올 일 년 여러분께 비춘 제 마음의 어두운 그림자를 피하지 않고, 매일 십자가 앞으로 저의 죄를 가져가고, 거기서 받아들여진 저를 확인하며 저를 용납하고 사랑 안에서 성장하겠습니다. 성장하는 사랑의 씨앗을 심습니다.
산책길에 쑥 무더기를 지나칠 때마다 "아깝다, 아깝다"하며 다녔다. 어릴 적 기억 때문인지 쑥을 그냥 지나치기가 너무나 아쉽다. 바구니 한가득 뜯어 담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쑥 뜯기와 진달래 꺾기는 봄놀이의 진수다. 바구니 한가득 쑥 뜯고 놀기. (사실 친구들보다 늘 부진했다. 한가득 채워본 적이 없다. 열심히 뜯어도 한 줌이라 집에 와 제대로 뭘 해 먹어 본 적도 없다.) 어떤 날은 산에 가서 진달래를 한 아름 꺾으며 놀기. 쑥과 진달래를 보면 두고 오기가 아쉽다. 몸이 기억하는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나가 걸을 수 있는데 집에서 책을 붙들고 앉아 있으면 귀에서 노래 소리가 들린다.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하려나" 맑으면 맑은 대로, 흐리면 흐린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나가 걸으면 하나님 마음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렇지.
연구소 워크숍을 갔는데, 또 여기저기 쑥이 지천. "우리 자유시간 한 시간만 가집시다. 나 쑥 뜯을래..." 말만 계속 하다 결국 집에 올 시간이 되고 말았다. 오는 길 점심식사로 토종닭으로 만든 닭볶음탕을 주문했더니 한참 기다리란다. 이때다 싶어 쑥을 뜯었다. 연구소 선생님들이 손을 보태니 락앤락 통 하나가 금세 찼다. 한 끼 분량의 국거리가 되었다. "쑥 비싸요. 마트에서 한 주먹 담으면 몇천 원이에요."라고 말하고 보니 이게 땅이 공짜로 주는 거였다. "돈 없이 값 없이 식재료를 주는구나!" 이게 하나님 나라구나 싶다. 쑥을 뜯는데 그 노래가 다시 들린다. "주님의 은혜를 왜 아니 받고 못 들은 체 하려나" 공짜로 주시는 은혜가 널리고 널렸다. 못 들은 체해서 그렇지.
3기 지도자과정 개강 주간이다. 꽃봉우리들이 막 터지기 일보 직전, 생명들이 고유의 무언가를 터뜨리기 위해 일발 장전한 봄날이었다. 2기 지도자과정 마친 목사님, 올해 내적 여정의 새로운 벗으로 오신 그분의 아내를 만나러 갔다. 창덕궁 근처 전시회이다. "Ego"라는 이름을 단 전시회. 여러 의미로 새로운 날을 향해 가는 벗님의 그림을, 그림에 담긴 묵상을, 젊은 부부의 소망을 관람했다. 관람에 그치고 싶지 않아서 몇 정거장을 걸었다. 걷다, ㄱㄷ, 기도, ㄱ ㄷ. ‘걷다’는 가끔 ‘기도’로 읽어도 좋다.
벌써 준비해두셨다는 지도자과정 2기 선생님들이 준비한 선물을 받았다. 마이크다. 작년 한 해, 현장 모임과 줌 모임 병행하며 아슬아슬하게 진행된 2기이다. 올해 3기 하반기에는 온라인으로 해외까지 연결될 예정인데, 이렇게 꼭 필요한 선물이라니. 롤링페이퍼도 함께였는데, 첫 줄에 이렇게 쓰여 있다.
“에니어그램을 배우러 갔는데 1년 동안 사랑을 배웠어요.”
어떻게 알았지? 에니어그램 표방하고 사랑을 하려는 것인데. 알아준 마음의 고마움과 함께 경고로도 들린다. “에니어그램만 가르치지 말고 사랑을 하세요. 영성은 사랑입니다.” 라고 읽는다. 에니어그램 배우러 왔다가 사랑을 배운 분이 있는가 하면, 사랑받으러 왔다가 에니어그램만 하는 것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간 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아니라면 연구소를 할 이유가 없지만, 지금 여기서 살아내지 못하는 나의 누추한 처지도 본다.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 사이, 둘 중 하나만 나라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려 하고, 둘 다 나이며 둘 다 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 월간 <복음과 상황> 4월호에 실린 인터뷰이다. 글도 말도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다른 느낌의 드러냄과 마주함이 된다. 긴 숙고로 정리되어 나오는 것이 글이라면, 일단 내보낸 후에 곱씹게 되는 것은 말이다. 인터뷰이로서 질문을 받고 답을 하는 것은 늘 좋은 경험이 된다. 내 입에서 나온 답을 복기하면서 몰랐던 내 마음을 알게 되기도, 따로 굴러다니던 생각의 구슬을 꿰어 (나만의) 보배로 간직하게 되기도 한다. 좋은 질문과 함께 잘 정리된 인터뷰 기사로 흩어진 구슬을 꿰어주신 <복음과 상황> 정민호 기자에게 감사하며 공유한다.
‘신앙 사춘기’를 지나며 마주한 하나님, 교회 그리고 목사들 :《신앙 사춘기》 개정판 펴낸 정신실 작가
신앙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때가 있다. 교회와 목사, 여태까지 해온 신앙생활들이 다르게 보이는 시기다. 신앙 전반에 냉소와 반항을 품은 채 교회 생활을 견디거나 교회를 떠나는 이 시기는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정신실 작가(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 소장)는 이 시기를 ‘신앙 사춘기’라 이름 붙였다. 2019년 그가 펴낸 《신앙 사춘기 – 신앙의 숲에서 길 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뉴스앤조이)는 목회자 아내가 된 후 ‘신앙 사춘기’로 보내며 겪은 일들과 진솔한 마음을 정리한 결과물이었다. 그의 글에는 목사를 향한 복잡한 마음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앙 사춘기에 들어선 후 “무엇보다 누구보다 위선적인 목사가 싫었다”라는 그의 고백은 교회에서 목회자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신앙 사춘기》 개정판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정신실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신앙 사춘기 이후 이야기가 궁금했고, 인생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 셋(아버지, 동생, 남편)을 모두 목사로 둔 그에게 ‘목사의 역할’ ‘목사의 쓰임’은 긍정이기만 할 수도 없고, 부정이기만 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정 작가는 또다시 신앙의 새로운 국면을 시작하고 있었다. 3월 3일 인터뷰 당일은 그가 입학한 가톨릭대학교 대학원 학기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인터뷰는 캠퍼스 근처 스터디룸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신앙 사춘기》 개정판이 출간되고, 지난주엔 출간 기념 저자 특강도 하셨습니다. 사실 말이 개정판이지, 누락된 글 하나(동생이 목사를 그만두면서 쓴 글)가 들어간 거예요. 내용이 많이 달라졌는지 따지면 큰 의미가 없고, 책 출간 이후로 여러 독자분과 만나면서 정리된 제 생각들을 다시 독자들 앞에서 나누는 것이 바람이었죠. 신앙 사춘기 이후의 이야기를 이어서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고요. 강연을 이어가면서 책에 쓴 고민과 생각이 더 명료해졌어요. 이것을 시작으로 다시 신앙 사춘기 이후를 글로 쓰는 작업도 차차 해보려고요.
더 확장된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는 뜻인가요? 네.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지만요. 어쨌든 ‘신앙 사춘기’라는 이름은 대상이 명료하잖아요. 사춘기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죠. 저는 사실 목사님들조차도 ‘신앙 사춘기’를 겪으신다고 생각해요. 신앙 여정, 신앙 발달 과정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죠. 그래서 그 이후에도 여전히 신앙생활이 있고, 일상이 계속되니까 여러 질문에 대해 포괄적으로 써보고 싶었어요. 사춘기가 지나면 어른이 되잖아요. 어른이 된다고 행복해지지는 않지만 어른 나름의 삶과 의미가 있는 것처럼 신앙 사춘기 이후도 분명 의미 있는 삶과 신앙이 있어요. 그 이후 제가 어떤 신앙생활을 하고, 무엇을 견뎌가는지와 같은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신앙 사춘기 너머’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혹시 지금 대학원 공부를 또 시작하신 것이 연관이 있을까요. 아주 큰 연관이 있죠. 스캇 펙의 영적 발달 4단계를 보면, 1단계는 혼란스럽고 반사회적인 단계, 2단계는 형식적이고 제도적인 단계, 3단계는 회의적이고 개인적인 단계, 마지막 4단계는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인 단계라고 하거든요. 신앙 사춘기 이후 어떤 여정을 가야 하냐 묻는다면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인 것이라고 안내하는 거죠. 신비적인 건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없는 부분을 모르는 대로 두고 여정을 걷는 것이겠지요. 신앙 사춘기 때는 몰라서 너무 속상하고 고립되어있는 것 같았지만, 원래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 신비인 분이라는 걸 인정하고 사는 것이겠죠. 안셀름 그륀은 《아래로부터의 영성》(분도출판사)에서 ‘위로부터의 영성’과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소개해요. 신앙에는 저 높은 곳에 초월해서 계신 하나님을 향한 이상을 가지고 신학과 교리를 배우고 더 높이 상승하고자 하는 방향의 영성도 있고요. 내가 있는 아래, 지금, 여기, 하찮고 보잘것없고 누추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영성이 있죠. 두 가지 축이 말이에요. 이걸 신앙 사춘기 이후에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고, 체험적으로도 깨달았죠. 그러면서 결국 중세 신비주의 영성을 공부하고 싶어졌어요. 많은 중세 영성가들의 가르침에서 소중한 답을 많이 찾았기 때문인데요. 위-디오니시우스(Pseudo-Dionysius)라는 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그 방법으로 두 개의 신지식(神知識)이 있다고 해요. 긍정신학과 부정신학. ‘부정신학’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모든 표현이 인간의 감각적 표현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정의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내가 이때까지 가졌던 하나님 이미지, 즉 ‘하나님은 어떠어떠한 분이다’ 같은 정의를 하나씩 제거해가며 하나님을 만나가는 것이 부정신학이에요. 물론 이전에 긍정신학이 먼저 있어야죠. ‘하나님 안 계셔. 내가 여태까지 알던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라고 생각하던 시기가 신앙 사춘기였고, 제가 겪은 영혼의 어두운 밤이었어요. 그 이후 제가 하나님이라고 알던 것들이 무너뜨리면서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여정이 신앙 사춘기 너머 같아요. 그러니 신앙 사춘기는 더 깊은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이었던 거죠. 중세 신비주의 영성은 신앙 사춘기 이후 제 눈을 뜨게 해주었어요. 개신교 신학교에선 이런 영성을 공부하기가 쉽지 않겠다 싶었어요. 중세 영성을 잘 배워보려고 가톨릭 신학교로 갔는데 마음은 자유롭고 편안한 것 같아요. 경계를 확 넘어왔음에도 이 하나님이 저 하나님이고, 저 하나님이 이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들고요.(웃음)
‘신앙 사춘기’ 이전 작가님의 신앙 여정은 어떻게 구분이 될까요? 남편이 신학교를 가기 전까지를 첫 번째 단계라고 한다면, 남편이 신학교를 가고 파트타임 사역할 때가 두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겠네요. 지금 남편이 담임 목회를 하는데요, 우리 교회는 ‘담임목사’ 대신 ‘섬김목사’로 불러요. 담임 목회라는 말이 엄밀히 따지면 정확한 표현은 아닌데, 지금이 세 번째 단계라고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남편이 신학교 가기 전까지는 정말 ‘교회의 딸’로 살았어요. 어릴 때 주일학교 초등부를 졸업하고 중등부 무렵부터 교사를 맡았거든요. 아버지가 목회하시던 교회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유아실 개념이 없던 시절 아이들을 맡아서 아이를 봐주는 일이었어요. 즐거웠죠. 청년 시절에는 주일학교 교사, 성가대, 주보 편집장도 하면서 열심을 냈죠. 주일성수는 정말 목숨처럼 지켰으니까요. 회사가 주일날 출근하라고 해서 사표도 내고 그랬어요.(웃음) 결혼하고도 남편과 가정교회 리더를 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였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식사하면서 가정교회 셀모임을 한 거죠. 정말 자발적으로 즐겁게 했던 것 같아요. 그땐 성가대 지휘도 했고요.
그러다 자발적으로 신앙생활할 수 없게 된 시기가 왔군요. 남편이 신학을 하면서 제 위치가 바뀌어 버렸어요. 자발적으로 하던 사람이었는데, 당위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아지니까 제가 달라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저는 정말 기도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체크당한다든지…. 저는 가만두면 알아서 교회 일꾼으로 살 텐데, 목회자 사모라는 이유로 자율성이 박탈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요. 이때가 ‘신앙 사춘기’의 시작 같아요. 이명박 정권 때였는데, 교회와 사회의 거리를 느끼며 분열적 마음들이 갑자기 올라오기도 했고요. 중년을 맞아, 제 안에는 영성적 허무감 같은 것들이 작용했어요. 한 길게는 10년 정도 마음이 방황하는 시기를 겪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방황하고 있을 때도 제 교회 생활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목회자 아내로서 역할은 했고요. 그러다 보니 몸이 많이 망가졌죠. 그런 시간을 길게 통과했어요. 제가 《신앙 사춘기》를 쓸 만큼 생각이 정리되고 힘이 생겼을 때 남편은 교회 분쟁으로 두 차례나 진통을 겪은 분들이 세운 현재 교회로 청빙을 받았어요.
구분하셨던 단계 중 ‘세 번째 단계’죠? 맞아요. 저로서는 《신앙 사춘기》를 쓰면서 의지적으로 마침표를 찍고, 다른 신앙의 단계로 가겠다고 생각한 시기였어요. 교회 문제로 아픔을 겪은 이들이 다 같이 모여 교회 생활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요. 스스로 인식하든 하지 않든 상처로 인한 날카로움 같은 것들이 있죠. 《신앙 사춘기》 저자의 남편으로서 남편은 그런 분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긴 하죠. 하지만 목회자에게 상처받은 분들 앞에서 설교하고 목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쩔 수 없는 불신을 인내해야 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어쩌면 이 시대의 ‘어떤’ 목사들에게 주어진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기꺼이 욕먹어주는 목사가 필요한 시대 같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제 신앙 여정은 목사님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그들을 추앙하던 시기, 반대로 목사님들을 향해 분노하며 저 자신의 신앙을 혐오하던 시기, 그 너머 또 다른 목사님들이 있다는 걸 생각하면서 기꺼이 견디고 감당하는 시기로 나뉜 것 같네요.
교회에 대한 신뢰를 잃은 이들 중에는 목회자에게 실망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걸 보면 교회와 신앙생활의 중심에 목회자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현실에서 목회자의 필요와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교회에 목회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교회와 목사에 대해 냉소만 남은 시절이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존경할 영적 지도자가 필요해요. 그런데 신을 매개하는 역할이라서 어려운 것 같아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투사하는 자리가 목회자니까요. ‘신앙 사춘기’를 겪는 분들이 어떤 목회자를 기대할까요? 저마다 다를 겁니다. 교회 분쟁이 생겨도 싸우는 이유가 저마다 다른 것처럼요. 그래서 어려운 게 교회 문제 같아요.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여러 욕망을 투사하지만, 사실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마음은 목사 스스로 자기 자신이 되어 살고 신앙하기를 바란다고 생각해요. 진실한 목회자요. 진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되어 사는 사람이잖아요. 목사님이 따뜻했으면 좋겠어요, 소통을 잘했으면 좋겠어요, 설교를 잘해야죠 등 여러 바람이 있겠죠. 하지만 궁극적으로 영적 지도자에게 바라는 건 ‘영혼의 투명함’이지 않을까요. 말처럼 쉬운 덕이 아니죠.
목회자가 교인들의 다양한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기보다 진실한 모습을 비추는 게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를 들면 1년, 52주 설교가 모두 성공하면 그건 위험한 거죠. 매주 하는 설교마다 교인들이 은혜받았다고 열광한다면 말이에요. 자기 판단 없이 목사에게 본인을 투사하거나, 목사가 교인들 기대에 맞는 설교만 준비한 거겠죠. 아니면 교인들이 자기 존재로 설교를 듣는 게 아니라 ‘좋은 교인’ 페르소나로 교회 생활을 하고 있을 수도 있고요. 사람이라면 52주 설교 중 절반은 별로인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도 교인도 자기 자신이 되어 설교하고 듣는다면, 어떤 때는 은혜가 되고 어떤 때는 피차 상태에 따라 무덤덤할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그래야 사람이죠.(웃음)
혹시 목회자의 설교가 성공할 때가 따로 있나요? 제가 목사인 남편을 질투할 때가 있는데, 바로 장례식이에요. 질투라 했지만, 장례식 때 저는 목회자 권위가 어떻게 아름답게 쓰이는지를 봐요.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분들과 정말 마음으로 함께하고 싶고, 그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를 전하고 싶지만 어떤 말이 위로가 되겠어요. 그런데 목사인 남편이 장례 예배에서 진심을 담아 전하는 설교는 유족들에게 위로도 되고 희망도 되더라고요. 인간의 실존적 슬픔 앞에서 목회자가 권위를 사용할 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지를 느꼈어요. 결혼식도 마찬가지예요. 결혼식은 두 사람, 두 영혼이 맺는 깊은 약속인데, 잘 준비된 결혼식에서 목사가 진심을 담아 설교하고 약속의 증인이 되어줄 때 성혼 선언이 절대 가볍지 않은 것임을 경험하죠. 사람들이 실존의 문제나 사건 앞에서 홀로 감당할 수 없을 때, 목사 이름, 사제 이름으로 손잡아주는 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코로나 이후, 제가 아는 많은 목사님이 교회를 개척했어요. 팬데믹이 상실의 시대를 사는 것이잖아요. 상실이 만들어내는 ‘허무의 강’ 같은 게 있어요. 이럴 때 가벼운 것들이 물 위로 떠올라요. 쓸데없는 것들, 내 안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먼저 걸러지는 거죠. 어렵게 꾹꾹 참아가며 기성교회에서 목회하던 분들이 허무의 강을 통과하며 어떤 결단들을 하시게 되었나 봐요. 이 시기에 교회를 개척하신 분들은 어려움이 많을 거예요. 교회가 잘될 때 해도 될까 말까인데, 개척하고 온라인 예배밖에 드릴 수 없다니요. 자신이 가진 결핍, 어려움을 마주하고 살아가는 시간을 통과하여 자기 자신으로 목회하게 되시길 기도하는 마음이에요. 저는 그런 목사님들에게서 희망을 봐요.
공교롭게도 작가님 주변의 가장 가까운 남성들이 ‘목사’였습니다. 아버지, 남편, 남동생이 목사였기에 적어도 3명의 목사를 가까이서 보셨는데요. 바깥에 보이는 모습 외에도 ‘이면’을 많이 목격했을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다양한 목사의 다양한 얼굴을 보며 성장하고, 겪고, 신앙생활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신앙 사춘기》에서는 정말 존경하는 목사에게 크게 실망한 채로 작심하고 글을 썼지만, 어느 목사님에게나 여러 면이 있다고 봐요. 어릴 때 목사인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는 것들이 있어요. 말하자면, 전도사님을 부당하게 해고하셨던 장면이에요. 전도사 사모님이 죄송하다고 하면서 울고 가셨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어요. 당시 교회에서나 어린 제 안에 부당해고 같은 개념이 있지도 않았는데, 막연하게 아버지가 부당한 힘을 행사한다는 느낌을 받았죠. 아버지는 이북이 고향이라 이북 사투리를 쓰셨는데요. 엄마와 아버지가 힘들어하셨던 건, 부흥회 끝나고 교인들이 한 얘기들이었어요. “며칠 쌀밥을 먹었는데, 이제 어떻게 보리밥을 또 먹냐”라고 하면서 ‘정거장’을 ‘덩거당’이라고 발음하던 아버지의 이북 사투리를 흉내 내던 일도 기억에 남네요. 아버지를 참 좋아하고 존경했는데요, 목사였던 아버지를 떠올리면 뭔가 석연치 않고 슬픈 감정들이 떠올라요. 《신앙 사춘기》 개정판에 들어가는 건 동생 글인데, 동생은 목사를 그만두었어요. 이유는 그런 거였죠. 교인들에게 보이는 모습 때문에 기도하는 척, 소망이 있는 척, 하는 것을 더는 할 수 없겠다고 했어요. 저는 그것 역시 목사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역할을 하는 게 나쁜 것도 아니고, 역할과 자기 자신을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마다 가진 민감성과 한계가 다르기에 동생의 선택을 충분히 공감해요. 목사의 위선에 상처받았던 저로서는 그런 용기가 고맙기도 하고요. 남편은 뒤늦게 목사가 되었어요. 결혼하고 한참 뒤에 많은 고민을 거쳐 목사가 되었죠. 누구나 그렇듯 목회 시작할 때 품은 비전과는 전혀 다른 길 위에 있는 것 같아요. 아까 말했듯 현재의 부르심에 충실하기 위해 애쓰며 지금 앉은 자리를 꽃자리로 여기고 있어요. 제가 모든 목사님의 내면을 볼 수 있지는 않지만, 때로 가까운 곳에서, 때로 거리를 두고 여러 모습을 보며 신앙생활했네요. 목사님들의 여러 얼굴을 담은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소설로만 말할 수 있는 진실이 있잖아요. 그걸 써볼 수 있을까 모르겠네요.(웃음)
목회자 아내로서도 고충이 많았을 듯합니다. 아까도 혼자서도 신앙생활 잘할 사람인데, 사모 되고 나서 힘드셨다고 하셨는데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구조적으로 목회자 아내는 가장 소외된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어요.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이 층위별로 전부 존재하는 것 같아요. 목회자 남편의 권력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흔히 명예 남성 정체성으로 교회 내 가부장적 구조를 더 강화하고 다른 여성들을 더 억압하는 분들도 있고요. 어떤 분들은 사모로 부르신 소명이 있다 여기며 교회와 교인들이 요구에 충실하죠. 드물게, 자기 자신으로 살면서 신앙생활하고자 목소리를 내는 분도 있고요. 입장은 다르겠지만, 근본적·구조적으로는 근거 없는 통념의 피해자인 것은 같다고 봐요. 제 교회 같은 경우, 공식적으로 ‘사모’ 호칭을 쓰지 않아요. 그렇다고 제가 보통의 비목회자 가족의 한 사람처럼 신앙생활하냐고 물으면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유능한 간호사로 소명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일하던 아끼는 후배가 있어요. 남편이 부임한 교회에 “사모들은 일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죠. 굳이 하겠다면 남편 사례비에서 일정 정도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잖아요. 교회가 목회자 아내를 목사와 함께 묶어서 동일한 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거예요. 목회자 아내라 불리는 한 사람, 한 존재를 지우고 희생시키는 구조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굴러가는 셈입니다. 목회자 아내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개인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든 구조 자체가 폭력적이죠. 어쨌든 자기로 살지 못하게 하는 구조에서 목회자 아내는 피눈물 흘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 너무 가슴 아파요.
목회자 아내가 이런 구조를 인식하는지가 ‘다른 문제’가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많은 경우, 선택권이 목회자 아내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죠. 원론적으로 목회자로 부름 받은 사람은 남편이잖아요. 남편이 목회자로 부름 받았고, 나는 주체적으로 신앙생활할 권리가 있다면 직장생활하는 것이, 심지어 어느 예배에 나가고 안 나가고 하는 것이 나 개인의 선택이죠. 이 당연한 말을 하는 거예요. 세상 어느 여성이 남편 직업에 따라 자기 일과 삶을 이 정도로 지배받을까요? 저는 주일에 타 교회 강의가 있으면 다른 곳에 가서 예배드리게 되기도 하고, 수요예배 등은 안 나가기도 하거든요. 제가 이런 식의 교회 생활을 계속하려면, 아마 저희 남편은 한국의 많은 교회에서 요구하는 목회를 포기해야 할 거예요.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한데요. 큰 교회를 목회하기는 틀렸다고 농담하곤 하죠.(웃음) 목회자 아내의 기본적인 인권을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목회자 아내가 이런 구조에서 오롯이 본인답게 신앙생활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역할도 필요하다는 말씀이네요. 현실적으로 ‘결단’이라고 할 만한 수준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내를 위한 교회의 부당한 요구를 일차적으로 막아줘야 하니까요. 당연히 핍박받을 수도 있고요. 제 경험에서도 사모가 왜 새벽기도 안 나오냐, 이런 얘길 먼저 목회자인 남편이 들어야 했고요. 남편이 당하는 일을 아니까 새벽에 일어나 억지로 교회에 가려 하면 남편이 그렇게 말해줬어요. “당신이 기도하고 싶으면 가, 그 이유가 아니라면 가지 마”라고요. 정말 고마웠죠. 그런데 이건 궁극적으로 목회자인 남편 자신을 위한 결단이기도 하단 생각이 들어요. 자신이 자기답게 목회하기 위해 누구도 수단 삼지 않겠다, 가장 가까운 아내와 가족부터 목회의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그게 자기 발로 서는 목회일 텐데 쉽지 않죠. 제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어요.
목회자 아내가 된 후 신앙 사춘기를 겪고, 그 와중에도 교회에서 할 일은 다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웃음)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교회를 떠나지 않도록 붙잡아준 건 무엇일까요. 저는 교회를 떠날 수 없어요. 저는 교회를 사랑해요. 신앙 사춘기로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시절이라고 느꼈던 때, 아빌라의 테레사라는 중세 여성 신비가를 만났어요. 자서전을 보니 저랑 비슷한 면이 많으셨어요. 에니어그램 유형도 같은 것 같고요.(웃음) 《영혼의 성》(바오로딸)이라는 그분의 유명한 저서를 통해 깊은 영성 안내를 받기도 했지만요. 성녀가 사시던 시대 상황과 선택을 보며 감동받은 바가 있어요. 종교개혁 즈음에 태어나셨어요. 타락할 대로 타락한 가톨릭교회와 수도원 안에서 자라신 거죠.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면, 테레사 성녀는 루터와 다르지 않은 문제의식을 갖고 부패한 수도원을 개혁했어요. 기존에 있던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여 ‘맨발의 가르멜 수녀회’를 창설했어요. 개혁의 유일한 길을 예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여겼기에, 가난과 청빈의 삶을 위해 실제로 맨발로 평생 살아가기로 했죠. 종교개혁 당시 제가 가톨릭교회 안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어요. 본질과 멀어져 부패한 교회를 끌어안고 내부 개혁자로 사신 테레사 수녀의 마음이 가까이 느껴져요. 저는 지금도 교회를 사랑하고, 무너진 교회라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걸 알아요.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기 내면과 영성을 돌아보는 강좌도 진행하셨습니다.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에서 에니어그램으로 영적 여정의 문을 연다고 할 수 있어요. 영성이 다름 아닌 ‘하나님 성품을 살아내는 것’ ‘하나님 형상을 담은 고유한 나를 꽃피우고 사는 것’이라고 할 때, 자기 인식이 선행되어야 해요. 에니어그램이 그 시작을 도와주고요. 연구소에서 ‘영성’을 대놓고 표방하지는 않아요. 영성을 살고자 하는 비목회자 여성 다섯이 일군 공동체예요. 상담 공부한 사람들이 모여 아래로부터의 영성을 발견하고, 서로 공부하고 자라가면서 상담과 강의를 통해 오시는 분들을 도우려고 해요. 신앙 사춘기를 겪고 자기 발로 서는 신앙을 더듬는 분들이 찾아와 연결되기도 하고요. 13세기 베긴(Beguine)이라는 여성 공동체가 있었어요. 특이한 점이 있어요. 창시자도, 예규도 없는 느슨한 공동체였어요. 당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수도원으로 가서 수녀가 되거나 결혼하는 일이었는데, 수도원에 가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어요. 그런 시절에 수녀가 되지 않았더라도 정말 예수님께 자기 삶을 봉헌하고 싶은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구성한 거죠. 결혼해도 되고 안 해도 되고, 출가해도 되고 자기 집에 살아도 됐어요. 오직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분처럼 살고 싶어서 사회 가장 낮은 곳으로 모여들었던 거죠. 한센병 환자를 예수님처럼 돌보며 삶과 영성을 살아냈어요. 남성들이 이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여성들이 모였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고, 지금 여기에서도 그런 여성 공동체를 작게 만들면서 살고 싶어요.
아버지를 잃은 한 아이가 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는 목사였다. 장례식에서 울고 있는 아이에게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이 다가와 말했다. “울지 마라, 너의 아버지 천국에 가셨는데 왜 우냐? 좋은 곳에 가셨다. 울지마라.” 아이는 그 말에 눈물을 그쳤다. “아버지 좋은 곳에 가셨지.” 울지 않기로 작정했다. 천국에 가신 아버지를 두고 슬퍼하는 것이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죄를 지으면 천국에 갈 수 없고, 천국에 가지 못하면 아버지를 만날 길이 없으니 슬퍼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이는 하늘 아버지를 믿기로 했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그리워 슬퍼지면, 그리운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참아야 했다. 울지 않을 수는 있었지만, 생각과 상상력까지 어쩔 수는 없었다. ‘하나님이 내게도 좋은 분일 텐데, 우리 아버지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시려고 나는 이렇듯 아비 없는 아이로 만드신 것은 정당한 것인가?’ 물을 곳 없는 아이는 밤마다 일기를 썼다. 쓰기를 잘한 것이,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계속 물을 힘을 길렀다.
이는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들려주는 나의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작가의 꿈을 꾸어본 적이 없다. 글을 쓰게 된 것은 순전히 일찍 마주한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냐는 어린 학생들의 질문을 받을 적이 있다. 경험의 한계 안에 갇힌 나는, 나처럼 치명적인 상처를 입으면 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으니 글쓰기를 타고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마땅한 답이 없어서 둘러댄 말인데, 나와 비슷한 글쓰기 운명론자가 또 있었다. 다섯 살 때부터 글을 썼다는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조앤 디디온(Joan Didion)이다. 그녀는《베들레헴을 향해 웅크리다》에서 글 쓰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조앤 디디온 자신)에 대해 말한다. 다섯 살 적에 왜 혼자만의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까,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설명이 불가함을 말한다.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을 가진 사람이 그런 충동을 가지지 않을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롭게 만사에 저항하며 재배치하는 사람, 불안한 투덜이, 분명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아이들’이 있는데, 그런 아이들이 글을 쓰게 된다고. 물론 그녀 자신이다. 그렇게 쓰도록 타고난 것이다.
사춘기에 갑자기 아버지를 잃고, 삐뚤어진 마음이 된 아이 앞에는 여러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왜 하필 글을 썼을까. ‘불안한 투덜이,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써야 할 운명’을 타고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 중에 일기를 써서 《난중일기》를 남겼고, 유대인 소녀 안네(Anne Frank)가 2차 대전 중 은신처에 숨어서 쓴 《안네의 일기》가 세상에 알려져 반전 문학의 백미로 꼽히며 읽히고 있다. 박완서 선생님은 아들을 잃은 참척의 고통을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으로 썼고, 신학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역시 아들을 잃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를 썼다. 후대를 위해 기록으로 남기겠노라 주먹 불끈 쥐고 쓴 글이 아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체포의 위협을 느끼며, 상실의 고통 속에서 ‘외롭게 저항한’ 흔적일 것이다. 마주한 현실에 비하면 미력한 몸부림 일지라도, 이들은 썼다. 인생의 고통을 글로 방어하는 사람들, 이분들도 쓸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다. 또 없을까? 같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
‘치유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여러 모임을 이끌고 있다. 첫 모임에서 인사를 나누다 보면 누가 묻지도 않는 글쓰기 실력을 고백해오곤 한다. “글은 잘 못 써요.” 처음 보는 이에게 낯을 가리듯, 글쓰기 자체에도 낯을 가리며 부끄러운 태도이다. 처음엔 곧이곧대로 믿었다.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는 분들이구나, 치유에 꽂혀서 여기까지 오셨구나.’ 모임이 거듭되면 이 운명론자들의 실체가 드러난다. 진솔하게 써내는 이야기의 다채로움과 체험의 깊이가 늘 상상 그 이상이다. 그 어떤 베스트셀러 문학보다 미학적이며 감동적인 글을 만나곤 하다. 알고 보면, 대부분 이미 혼자서 쓰던 분들이다. ‘치유의 글쓰기’로 손색없는 글을 이미 일기장에, 비밀 블로그에,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는 사람들이었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들을 위한 치유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자매들도 다르지 않다. 모임에 오기 전부터, 사건을 공론화하기 전부터 그들은 쓰고 있었다. 누가 쓰라고 한 것이 아니다. 법정 다툼을 염두에 두고 한 기록도 아니다. 왜 쓰는지, 이유도 목적도 모른 채 그저 썼다는 것이다. 나의 운명적 친구들, 태어날 때부터 어떤 상실의 예감에 감염된 글쓰기를 타고난 친구들이다.
글쓰기, 의미를 찾는 일
이쯤 되면 글 쓰는 특정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을 찾아 모을 것이 아니라 왜 사람들이 고통 앞에서 글을 쓰는가, 물어야 할 것 같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로부터》를 쓴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 역시 쓰는 사람이었다. 수용소 안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무엇보다 거기서 건져 올린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을 잊지 않기 위해서 처절하게 썼다. 정신의학자인 그는 죽음이 일상인 그 수용소에서 오래 살아남는 사람을 관찰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의미, 삶의 의미, 살아남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이 생존한다! 프랭클 자신, 다른 수용소로 간 사랑하는 아내를 다시 만나겠다는 간절함으로 죽음의 수용소를 버텨냈다. 어떤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은 의미를 발견하는 존재이며, 의미가 생존을 지탱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달은 그는 ‘의미치료(Logotherapy)’를 창시한다. 생의 크고 작은 고통 앞에서 저항도 무엇도 아닌 일기를 쓰는 사람은 의미를 찾는 사람이다.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다. 글 쓰는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의미를 찾고자 하는 갈망인지 모르겠다.
인간에게 글 쓰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아버지를 잃고 부조리한 세상에 내던져진 아이에게, 전쟁의 포화 속 외로운 장군 이순신에게,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박완서 선생에게, 은신처에 숨은 꿈많은 소녀 안네에게, 믿었던 목회자에게 성폭력 당한 청년에게, 오랜 기다림에 지친 취업준비생에게, 신앙 사춘기를 겪으며 기쁨과 열정을 잃은 그리스도인에게, 펜데믹 세상 속 고립되고 격리된 인생에게 글 쓰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자꾸 곱씹고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말하는 이들이 있다. 모든 치유는 기억의 치유이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이다. 이미 일어난 일(경험)은 바꿀 수 없지만, 해석이 달라지면 삶에 대한 태도가 새로워진다. 일본의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의 말처럼 기억은 다른 장소에서 새롭게 발화될 때마다 개정판으로 다시 쓰인다. 나와 기억이 한 덩어리가 되어 뒹굴 때는 의미도 맥락도 발견되지 않는다. 글쓰기는 내 앞에 나를 세우고 관조하는 행위이다. “죽고 싶다.” 일기장 첫 줄을 쓰는 순간, 죽고 싶은 나를 바라보는 다른 내가 생긴다. 쓰는 내가 있고, 관찰당하고 쓰이는 내가 있다. 그 두 나 사이의 거리가 새로운 관점을 만든다. 기억에 대한,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등장한다. 쓰는 일은 의미를 찾는 일이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조리를 찾는 일이고, 부서진 고통의 조각을 이어붙여 맥락을 더듬는 일이다. 그렇다. ‘맥락화’ 될 때 의미가 드러난다. 실패, 좌절, 상실이 마지막 귀결이 아님을 믿고 내 인생이라는 긴 이야기의 기승전결을 찾아 쓰는 일이 글쓰기, 치유하는 글쓰기이다.
그렇다면 모든 글쓰기는 치유의 글쓰기이다. 치유의 어원을 따져보면 더욱 그러하다. 치유(healing), 건강(health)은 같은 어원인 ‘hal, hale’에서 왔고 이것은 whole 즉, 전체, 온전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Hello! 역시 같은 어원인데, 그 흔한 인사에 담긴 뜻은 “온전하길 바래, 전체가 되길 바래(T0 be wholeness)”라고. 고통의 증상이 사라지는 정도가 아니라 한 존재가 온전케 되는 것이 치유이다. 존재의 온전함을 향한 갈망으로 현재의 결핍과 고통을 쓰는 일은 그대로 치유의 작업이다. 소설가들의 소설가라 불리는 이승우 작가는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며, 소설조차도 소설가 자신을 위한 치유작업’이라고 했다. “소설은 그것을 쓴 작가 자신에게 이해받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이 견딜 수 없는 세상을 견디는 방편이며 나름의 치유책이다. 소설은 가장 먼저 그 글을 쓴 작가 자신에게 결정적으로 유익하다.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 세상을 견딜힘을 얻는다. 세상의 불합리와 파렴치와 몰인정을 이길 힘을 얻는다.”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승우
돌아보면 아버지 돌아가신 후 시작한 일기 쓰기는 ‘아버지 상실’로 들이닥친 생의 부조리에서 조리를 찾는 일이었다. 세계가 쩍 하고 갈라졌다. 갈라진 세계에서 고아의 세상으로 넘어가 살게 되었다. 아버지 없는 아이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밝고 당당한 ‘척’을 하며 살았다. ‘척’을 하느라 애쓰다 진짜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으로 밤을 맞으면 텅 빈 자아의 공간을 채우기 위해 다시 썼고. 뒤늦게 여기에 ‘치유의 글쓰기’라 이름 붙일 수 있었다. 치유의 글쓰기는 부서진 세계를 이어붙이려는 노력이었다. 낮의 나와 밤의 나를, 사랑받는 딸과 고아를, 나의 하나님과 아버지의 하나님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이었다. 쓰기를 잘했다. 쓴 덕분에 내 인생 이야기의 맥락을 찾아가고 있다. 쓴 덕분에 나처럼 부서진 인생들과 연결되어 더 큰 세계로 이어붙이게 되었다. 상실의 경험은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나를 가두고 절망 가운데 둘 수 있었지만, 쓸 운명으로 부르신 부르심에 순종하여 인생에 감추신 신비를 만져가고 있다. 쓰기를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