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올 때, 현관 키 누르면서 잠시 고민할 때가 있어. '누나랑 싸웠던가, 화해했던가?' 생각을 해야 해.. 누나한테 재밌는 얘기 할 게 있는데, 싸운 상탠지 친한 상탠지 헷갈려서 생각해보고 콘셉트 잡고 들어와야 하거든."
남매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고백으로 본다. 정말 잘 싸우고 정말 친한 남매다. 싸울 때 보면 어떻게 저렇게 서로에게 잔인하게굴 수 있을까, 싶은데. 친할 때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고 기타, 키보드를 붙들고 앉아 하염없는 음악활동도 한다.
불국사 다보탑 앞에서 찍은 세 장의 남매 사진이다. 남매 사이 친밀감 발달단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번 가족 여행에서 다시 들른 불국사. 일명 '세월 가족사진'을 위한 여행에 다름 아니다. 첨성대, 다보탑, 불국사 앞 정원 등 그때 그 장소를 찾아다니며 찍었다. 예전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똑같이 재현하기! 다보탑 남매 사진을 찍기 위해 넷이서 머리를 맞대고 보라돌이 남매 사진을 관찰하는 중이었다. "손을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현승이 손이 어떻게 된 거야?" 하다가 남매 둘이 "아아~~~~!" 하고 뒤로 물러났다. "손 잡고 있어. 어흐, 이건 못 해" 하면서 잡지도 않은 손을 털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얻은 세 번째 사진. 2022년, 성인이 된 남매이다.
가운데 사진은 채윤이 사춘기 때. 저 귀여운 거리... 채윤이는 세상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싶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짜증나고, 삐딱하게만 보였을 시절. 그 옆 현승이의 정신세계는 첫 번째 사진의 보라돌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 같고. 누나랑 손도 잡을 수 있는데... 잡을 손이 없다. 누나 손이 주머니 속으로 사라졌다. 에라, 나도 그냥 소매 안에 집어넣자, 하지만 뭔가 허전하고 슬프고 어정쩡하다, 이런 느낌.
채윤 현승 남매에게 동생과 나의 관계를 자주 비춰보게 된다. 마흔 다섯 늦은 나이에 나를 낳고, 2년 후에 동생을 낳아준 엄마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채윤 현승 남매 못지않게 싸우고 화해하며 쌓아온 관계이다. 좋은 말 나쁜 말 포함, 하고 싶은 말 다 할 수 있는 친구 같은 동생이다. 동생 덕에 평생 감정 훈련을 제대로 해왔다. 거침없이 좋아하고, 죄책감 없이 싫어하는 것을 해봤다. 그럴 수 있는 사이다.
채윤이 현승이도 그렇다. 기본적으로는 서로 얄미워서 죽을려고 한다. 성인이 되어서도 꽤나 싸우곤 하는데. 그 싸움이 싫지가 않다. 내 딸, 내 아들이라도 엄마 아빠로서는 침범할 수 없는 거리를 남매끼리는 수시로 넘나 든다. 저렇게 잔인하게 굴어도 될까, 싶은데 어느새 또 친해져서 하하 낄낄거린다. 치명적인 약점을 거침없이 찌르고, 자존심 상해서 다시는 말도 하지 않겠다 하고, 한 녀석이 먼저 사과하고, 머쓱한 시간 후에 어느새 다시 얄미워 죽고 재밌어 죽는 사이가 된다.
친밀감의 정석 인지도 모른다. 테제 공동체 창시자인 로제 슈츠 수사께서 "갈등에 뛰어드는 것"이 참다운 형제애로 가는 길이라고 하셨다. "화해한 마음으로 싸우기"라는 표현과 함께.
가까웠다 멀어지는 남매의 거리. 수시로 갈등에 뛰어드는 남매의 관계를 본다. 진정한 친밀감으로 가는 아름다운 거리로 보인다.
사랑하며 미워하고, 동의하며 반대하고, 너 때문에 기쁘면서 언짢고,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
종갓집 막내며느린데, 심정적으론 맏며느리로 살았다. 거듭되는 명절을 통해 단련된 23년 차. 막내며느리, 맏며느리 상관없이 대한민국 며느리이며 딸이며 여자는 엇비슷한 짐을 지고 산다. 곡절없이 지나는 명절이 없다. 명절이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문제다. 구조를 파계하여 며느리 명절을 잘 지내고 엄마에게 갔다.
엄마 산소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채윤이가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외할머니한테 가자." 명절 오후, 사랑의 의무 또는 의무의 사랑의 짐을 내려놓는 시간에는 엄마에게 갔었다. 그리 편하진 않았었다. 명절 음식을 차려놓고 맞아주는 친정엄마가 아니었다. 또 다른 어떤 며느리를 착취함으로 생존하는, 전적으로 의존된 엄마였다. 엄마를 중심으로 엄마 집에 모여든 친정 식구들은 엄마 며느리에겐 또 다른 부담이었다. 딸의 정체성으로 친정을 찾는 마음도 편하진 않았었다.
눈이 와서 얼마나 다행인가. 조금 다른 풍경이라서. 불과 2년의 시간이지만, 뻔한 감정이 되기에는 짧지도 않은 시간이다. 뻔한 감정으로 슬퍼하지 않고, 그저 엄마를 생각할 수 있었다. 그냥 엄마를 생각하니 그 어느 때보다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워 이제 막 엄마를 잃은 느낌이었다. 눈 덮인 세상이 평온하니 조용히 흐르는 눈물 몇 줄기를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강화도로 들어가 점심을 먹고 맛있는 디저트를 즐기기로 했다. 적당히 슬퍼하고, 주어진 순간을 즐겨야 한다는 마음으로달리는 길. 철새로 추정되는 어느 가족을 발견했다. 차를 세우고 혼자 내려 조심조심 다가갔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 가족, 퍼드득 자리를 뜨고야 만다. 덕분에 날아오르는 더 나은 순간을 포착했다.
늦은 점심으로 먹어 더 맛있는 칼국수, 핸드드립 커피와 장인이 구운 빵도 좋았다. 내 마음엔 또 다른 시간의 강이 흐른다.
엄마가 내 마음에 살아있다. 이제야 슬픔이 무엇인지 알겠다. 엄마가 내 마음에 살아 있다는 것은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니까. 이것이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인데, 갈수록 누구와도 나눌 수는 없는 감정이다. 가족은 물론 같은 엄마를 잃은 동생과도 말이다. 동생이 평생 만난 엄마와 나의 엄마가 다르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으니. 엄마 돌아가시고 매일 새롭게 다른 엄마를 만나게 되는 것 같다. 어쩌면 나는 평생 엄마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 천국에 있는 엄마 영혼은 매일 매 순간 내가 모르는 새로운 시간을 사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사람 마음이 참. 엄마만 살아 있으면 지금을 살아내느라 힘든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것 깉은 환상이라니.
엄마, 거긴 어때? 거기 모든 것이 매 순간 새롭지? 여기랑는 딴판이지?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고 지옥 가는 모든 길이 지옥이라고 시에나의 카타리아 성인이 말씀하셨는데. 내가 지금 매 순간을 새롭게 살아야 엄마 있는 그곳에 닿을 텐데... 엄마, 새로운 시간을 살자고 마음을 새롭게 하니 새롭게 엄마가 보고싶어.
대추 말리던 바구니가 텅 빈 지 오래다. 한 바구니 가득했던 대추를 새 친구들이 죄 먹어 치웠다. 씨 하나 남기지 않았다. 빈 바구니는 어쩐지 치우고 싶지가 않아 그대로 두었다. 곡물을 좀 담아두면 다시 찾아올 것 같기도 하고. 비었더라도 혹시나 하고 찾아와 주지는 않을까, 하면서... 설날 아침 일어나 보니 텅 비었던 바구니에 예쁘게 소복하게 눈이 쌓여있다. 그때 그 새가 눈을 물어온 것도 아닐 텐데, 나는 그 친구들을 생각한다. 새 친구들이 보내준 설 선물이라고. 가슴이 저릿하고 따뜻하고 풍성하다.
와아, 대박! 어떻게 이런 메뉴를 생각해내고... 어떻게 이걸 뚝딱 만들어? 엄마 진짜 대박.
"어떻게 이런 메뉴를 생각해내고..."에서 진짜 기분 좋았지. 엄마가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은 안 했고, 빙그레 웃음으로 넘겼다. 생각해 보니, '뚝딱 만든 것'은 인정이다. 어떻게 이런 메뉴를 생각해냈나, 를 생각해보니.
얼마 전 요리 유튜브에서 비슷한 걸 봤다. 오, 콩나물과 잡채라! 한 번 해봐야겠네, 싶었다.
또 생각해보니,
청년 때 집에 자주 초대하시던 집사님 특허 메뉴였는데, 진짜 맛있게 먹었었었어. 늘 좀 그리웠던 시절의 그리웠던 요리이다. 집사님의 콩나물 잡채, 참 신박했지. 내게 주신 사랑도 각별했지.
또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갔던 식당에서 즉석으로 만들어 주던 잡채가 있었다. 콩나물은 아니었지만 양배추 등을 바로 볶아서 야채 반 당면 반, 아삭한 잡채였지. 따뜻하게 맛있게 먹었지.
생각해보니,
내 아이디어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아이디어가 내게로 흘러왔고, 뚝딱 만들어 우리 채윤이를 행복하게 한 '엄마표 콩나물 잡채'가 창조된 것이다. 요리만 그럴까. 내게 있는 어떤 선함이란, 누군가의 선함이 흘러들어와 나라는 존재와 일으킨 화학반응의 결과가 아닌가. 뚝딱 콩나물 잡채는 세상의 모든 요리, 모든 선함에 영광을 돌려야 함.
이른 아침 하늘이다. 가족 중 제일 먼저 어나 베란다에 서서 저 하늘을 마주하고 서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역시 씬 스틸러. 집 앞 교회의 커다란 십자가. 그리 많이 훔쳐내지는 못했다. 새벽 하늘의 고요한 장엄함에서 훔쳐낼 것이 거의 없었다. 그 하늘에 안긴 정도.
아무 때나 걸으러 나가는데. 가장 놓치기 싫은 시간은 해질녘이다. 해 지기 직전 집에서 내내 노을 지는 하늘을 왼쪽에 끼고 탄천 길을 걸을 수 있다. 어느 날은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그러면 노을 하늘이 오른 쪽에서 따라온다. 금세 건물에 가려 보라색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포기하고 동네 길로 들어섰다. 골목골목 걷다 성당에 다다랐다. 가파른 길을 올라 성당 마당에 서니 아기 예수님을 안은 성모상이 서 있다.
하루의 시작과 끝이 오묘하다. 아니 모든 시작과 끝은 오묘하게 잇닿는다. 히브리적 시간은 저녁부터 하루가 시작된다고 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라"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새벽이 시작인지, 저녁이 시작인지 모르겠다. 창조의 사랑과 십자가의 사랑이 오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내가 걷는 신앙의 길 역시 그러하다.
나가고 싶기도, 보던 책 붙들고 계속 앉아 있고 싶기도... 두 마음이 오락가락 할 때는 나가야 한다. 나가면 다시 못 볼 풍경을 만난다.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난다. 눈이 오지 않은 날에는 볼 수 없는, 더 많이 와도, 덜 와도 볼 수 없는 한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순간이다. 순간의 아름다움, 순간을 놓치면 다시 받을 수 없는 선물이 있다. 그래서 무조건 나가 걸어야 한다.
친구야, 네가 천국에 가면 아바께서 너에게 기도를 몇 번이나 했고 영혼을 몇 명이나 구원했는지를 묻지 않으시고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파히타를 맛있게 먹었느냐?’ 그분은 네가 열정을 품고 살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선물을 받아들이고 누리면서 순간의 아름다움 속에 살기를 원하신다. <아바를 사랑한 자녀> 마술사의 이야기
멈추고 머무르는 가족의 시간. 2022년 Big Family Day를 함께 했다. 해마다 1월 1일에 늦잠 자고 일어나 맛있는 것 먹고 맛있는 케이크를 먹으며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해를 그려보는 가족의 리츄얼이다. 교회 특새 한 주를 보내고 뒤늦게 게 시간을 가졌다. 특별 새벽기도, 시편 23편의 기도로 시작하는 2022년이다. 주제는 "부족함 없는 삶"
"부족함 없는 삶"
기도제목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것인데. 기도의 자리는 결핍의 존재만이 가 앉는 자리인데, 그 자리에 앉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선언하거나 받아들인다는 것은 다소 역설이다. 십수 년 전, 어느 날 시편 23편 1절을 충격적으로 만났던 기억이 있다. 에니어그램 7유형을 유형을 마주하며 죽음 같은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7 유형을 벗어날 수 없는 나, 7 유형이 저지르는 죄, 나의 죄 된 모습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그 어간의 어느 새벽기도에서였던 것 같다. 아니면 카타콤 같았던 하남의 그 아파트 거실에서 묵상하던 시간이었던가.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I shall not be in want.”
시편 23편 1절의 영어 성경 버전이 마음으로 들어왔다. "내 삶은 결핍 그 자체인데, 나는 이렇게 금이 갔고, 부서진 존재인데 이런 나를 어떻게 데리고 살아야 하냐고요. 저의 이 욕구들, 끝없는 욕구들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밑빠진 독인데요!" 눈물 콧물 흘리던 중... I shall not be in want. 이 문장이 빨간 색의 볼드체로 훅 들어왔다. 결핍의 존재 그대로 그분의 바다에 풍덩 빠지는 체험이었다.
그때 분명히 알아들었다. 밑 빠진 독을 가득 채우는 방법은 무얼 자꾸 들이붓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풍덩 빠지는 것임을. 잘 알아들었다. 자기혐오의 눈물이 많이 사라졌다. 알아들어서 끝이 아니고 알아들은 것을 살아내는 것이 진정 알아들음이기에 알아들음은 늘 새로운 현재 진행형이어야 한다. 문제는 너무도 자주 그것에 실패한다는 것이고. “이래도 니가 부족함이 없어? 이래도? 금 가고, 부서지고, 결핍된 주제에!”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가 BGM처럼 깔려 있다. 가끔은 볼륨을 한껏 키우고 영혼을 뒤흔들기도 한다. 여지없이 두려움과 불안이 몰려온다.
"The LORD is my shepherd, I shall not be in want. I shall not be in want.” 2022년 신새벽. 이 말씀을 다시 알아듣는다. 십수 년 전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르게. 내게 부족함 없다, 고백하며 돌아섰을 때 그분이 이끄신 푸른 풀밭과 잔잔한 물가를 기대하건만, 오히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한다. I shall not be in want. I shall not be in want. I shall not be in want. 두 번말하고, 세 번 반복하면서 그 자리에 머무른다. 다른 모든 말을 멈추고, 죽음의 골짜기를 빠져나갈 궁리도 멈추고 I shall not be in want. 밤이 가장 어두운 때 별이 가장 밝게 빛나는 것처럼, 내가 감각하는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나 어쩌면 거기가 푸른 풀밭 잔잔한 물가인지도 모른다. 내 몸과 정서적 감각이 영혼의 그것과 다른 길을 갈 때가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가만히 누추함과 고통에 머무르는 것 밖에는 없다.
맛있는 식사와 예쁜 케이크도 준비하지 못했고, 모두 조금 기운이 없고, 피곤한 채로 2022년 'Big Family Day'를 보냈다. 해마다 우리에겐 들뜨고 설레는 시간이었는데 전에 없이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진지했다. 현승이가 스무 살이 되었으니 모두 성인이다. 맛있는 케이크 때문에 기다려지는 'Big Family Day'의 시간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가족의 멈추는 시간을 누리는 것. 지난 일 년의 나,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자리가 되었다. 가족들이 기도 제목이라고 내놓은 것들이 어쩐지 다 조금씩 아파서 기도를 하자니 눈물이 나는데, 그래서... 부족함이 없었다. 한 해의 일상, 또 많은 좌절과 부서짐으로 결핍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겠지만 우리의 영혼은 부족함 없는 현존을 살기를.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가 거하는 영혼의 감각 잃지 않기를.
하나님을 깊이 알지 않고는 자신을 깊이 알 수 없고, 자신을 깊이 알지 않고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없다. 『기독교 강요』, 장 칼뱅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라면, 하나님 지식은 반드시 자기 지식과 닿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궁극적으로 ‘치유’입니다. 그런데 ‘나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막막한 일인가요? 내적 여정 세미나는 기독교 영성으로 접근하는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기 지식과 하나님 지식을 머리만이 아닌 ‘체험’으로 배우는 과정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로 에니어그램 1단계를 시작하여 ‘내게 하나님은 누구인가’하는 질문을 만나는 영성과정까지. 한 달에 하루씩 닷새의 시간 동안 전에 해보지 않은 질문, 전에 해보지 않은 기도의 여정을 걷습니다.
✔ 일정 : 평일(금요일), 주말(토요일) 과정이 있습니다. (평일 심화 과정 이상은 신청 상황에 따라 개설) ✔ 장소 : 온라인 줌(zoom), 단계별 2회기, 6시간 ✔ 인원 : 12명 ✔ 비용 : 12만 원(재수강 6만 원) / 단계별 ✔ 문의 : 010-4235-8020
이렇게 저렇게 피부도 몸도 안 좋다며 밀가루 음식을 끊어야겠다고 했다. 채윤 따님께서. 둘이 점심 먹어야 하는데 냉장고에 당장 먹을 것은 고사하고 식재료조차 변변치 않았다. 배달 음식으로 합의를 보고 서칭을 시작했다. 무슨 영화 볼까, 뭐 볼까, 찾다가 영화 한 편 볼 시간이 지나간다는 넷플릭스 증후군의 '음식' 버전 같다. 뭐 먹을까,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는데... 하면서 밥 해서 먹고 설거지까지 해치울 시간 보내는...
"하아, 수제비 먹고 싶다!"
글루텐을 끊겠다는 채윤이의 뱃속 깊은 곳에서 나온 탄성이었다. 어느 분식점 메뉴를 보다 내지른 탄성. 이것 저것 다 패스하고 더는 먹을 것이 없다는 시점이었고. "김치 콩나물국 남은 거에 수제비 반죽 넣으면 바로 얼큰수제빈데...."라고 '삶은 요리'인 나의 또 다른 자아가 말했다. 채윤인 그걸 낚아챘고. "대박! 얼큰 수제비! 그거 먹을래."
백신 후유증으로 계속 누워 있기로 했던 나는 어느 새 일어나 수제비 반죽을 하고 있었고, 밀가루 끊기로 하고 까다롭게 배달 음식 메뉴 고르던 채윤이는 해맑게 설레는 상황. 그나마 나는 나이도 먹고 상황 파악이 되어 "이래도 되나... 밀가루 음식 끊겠다는 애한테 수제비를 먹여도 되나..." 정도는 생각했다. 뭔가 이건 아니지만, 그래도 뭐 할 수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냉동실에 딱 한 마리 남은 전복을 함께 끓여 채윤이 그릇이 담아 주었다.
“어서 와, 잠깐만! 이거 한 10분 보면 끝나요.” 현관문 열어주시고 바로 다시 소파에 가 앉으시더니 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신다. 뭔가 낯선 장면이다. 선생님과 드라마라... 드라마에 빠진 나의 ‘노(老) 현자(賢者)’ 최 선생님이라니! 한 손에 리모컨을 들고 넋을 놓고 계신 모습이 낯설고도 친근하여 웃음이 나왔다. “쯧쯧쯧,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어리석은 거지. 끝났네. 아아, 예고편 나오는구나. 잠깐만, 정 선생.” 그렇게 독백에 예고편까지 보시고 나의 최 선생님으로 돌아오셨다. 물론 표정은 아직 저 세상. 푹 빠지신 드라마는 몇 년 전에 방영한 <디어 마이 프렌즈>였다. 나는 드라마는 못 봤지만, 작가인 노희경을 좋아한다. 포스터 이미지가 또렷하게 남아 있는데, 김혜자, 나문희, 윤여정, 신구... 내로라 하는 노배우들이 대거 출연해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심심해. 너무 시간이 안 가!
참! 당해야 알지, 암만, 암만(아직 드라마 속에 계심). 아이고, 정 선생. 내가 사람 앉혀놓고... 코로나로 어디 잘 나가질 못해서 심심하다니까 아들이 넷플릭슨지 뭔지를 연결해 줬어요. 그걸로 저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는데 말야. 노인네들 얘기라 보기 싫은데 또 궁금해서 보다 보니 끊을 수가 없네. 우습지?”
보기 싫은데 다음 편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되는 게 드라마의 묘미예요. 하하, 선생님 <디어 마이 프렌즈> 보시는 거죠? 재미있으세요?
재미 없수다! 노인네 치매 걸리고 암 걸리는 얘기가 뭐 재밌어? 어, 이 드라마를 아네. 정 선생도 봤어요? 유명했었나 봐? 나야 노인네들 얘기니까 심심풀이로 보는 건데, 젊은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보겠나?
재미없어도 보는 젊은이가 있을 걸요. 헤헤. 선생님도 재미없는데 보시잖아요. 완전 재미없게 보시던데요. 화면으로 들어가셔서 대화도 하시던데, 재미없어서 그러셨죠? 저는 안 봤어요. 재미없어서. 헤헤.
화면으로 들어가긴! 고현정인가, 하는 배우가 제 엄마랑 그렇게 싸우더니 암 걸린 엄마 보면서 제 뺨을 때리는 장면이 가슴 아파서 그랬지. 마침 그 장면에서 정 선생이 들어와서, 조금 더 본 거야.
맞아요, 선생님. 재미없으신데 그냥 약간 가슴 아프고, 막막 공감되고 그래서 화면으로 들어갔다 나오신 거예요. 히히.
어허, 지금 나 놀리는 거구나. 으이그, 그래. 노인네가 드라마에 빠져서 침 좀 흘렸다. 됐냐? 됐어?
(함께 와하하하 웃는다.)
그런데 선생님, 낯설긴 한데 참 좋아요. 드라마에 빠져 있으신 모습요. 인간적이시랄까요? 어쩐지 드라마와 선생님은 잘 어울리질 않잖아요. 헤헤.
왜 아니야. 내가 평생 드라마는 담쌓고 살았지. 볼 시간이 있었어야지! 이제 좀 봐보려 해도 습관이 안 된 탓인지 안돼요. 집중도 안 되고. 그런데 코로나로 이 일 저 일 다 취소되고, 집으로 오던 상담도 줄고 하니 심심한 거야. 아들이 와서 넷플릭스에서 이거 봐바라, 저거 봐바라 하기에 보기 시작했더니 시간은 잘 가더라고. 심심해. 너무 시간이 안 가. 일없이 하루 보내려니 얼마나 지루한지 모르겠어요.
아아... 선생님...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 나는 복 받았지. 그동안은 뭐 심심하다, 어쩌다, 혼자 밥 먹는 게 쓸쓸하다 했지만, 늘 일이 있었잖우. 노인네들이 이러고 살아. 아하, 그래서 저 드라마가 재밌나보다. 노인네들이 친구가 있잖아. 심심할 겨를이 없는 노인네들이네.
오호! 인정하셨어요. 재밌으시다고! 하하하.
으이그, 증말. 그래, 재밌다, 재밌어. 좋아하는 얼굴 좀 보소. 장난꾸러기야. 드라마 잘 만들었어. 치매, 암, 황혼 이혼... 다 있을 법하게 얘기를 꾸며놨더만. 그나저나 정 선생도 봤어?
아뇨, 저는 그 드라마 작가에 관심이 많아서요. 알고는 있었어요. 어쩐지 포스터가 인상 깊게 남아 있기도 하고요. 그런데 어떠세요? 선생님. 궁금해요. 현실적으로 그려진 노년의 이야기를 보시는 게요.
내가 최 선생님이 많이 편해졌나보다. 얼마 전까지도 이런 질문이 쉽게 입에서 나오지 않았었다. 치매, 요양병원, 독거노인의 쓸쓸함 같은 것은 민망하여 입에 올릴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어쩐지 이제 편하게 말이 나온다. 그리고 정말 궁금하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노인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담겼다는데 말이다.
나이 들수록 친구가 보험이래요
에잇, 현실적이긴 뭐가 현실적이야. 판타지야!
그래요? 리얼하게 그렸다는 평을 본 것 같은데요. 치매 와서 요양병원 가는 김혜자 씨 보고 펑펑 울었다는 글 읽은 것 같아서요. 아하, 장르가 판타지였어요? 몰랐네요.
어라, 잘 속네. 이번엔 내가 이겼다! 허허. 장르가 판타지가 아니라 드라마니까 드라마 같은 구석이 있다는 얘기지. 다 있을 법한 얘기고, 연기들도 잘하니까 리얼해요. 나한테 닥칠 일이기도 하겠고. 그런데 좀 심사가 뒤틀리더라고. 다 좋은데, 저런 친구들이 어딨어! 싶어요. 뭐, 저런 친구들이 있으면 아무 걱정 없겠네 싶고. 아, 말하다 보니 진짜 그러네. 심술이 자꾸 나는 게 부러워서 그런가보다.
그래서 선생님, 드라마 제목이 <디어 마이 프렌즈>인가 보죠?
맞아, 맞아. 어려서부터 함께 희노애락 나눈 좋은 친구들 얘기예요. 치매, 암, 앞뒤 꽉 막힌 꼰대 얘기가 아니라 노년의 우정이 주제예요. 드라마가 그렇지. 상대적 박탈감 같은 걸 유발해. 저런 좋은 친구들 나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나 봐.
선생님, 그러니까 드라마죠오~ 드라마를 너무 안 보셔서 그래요. 이제 입문하셨으니 드라마 많이 보세요. 논문지도 하시듯 분석하며 보지 마시구요. 히히.
그렇지. 코로나 아니어도, 다들 이제 몸이 안 따라줘서 해외여행 못 간 지는 꽤 됐고. 봄가을 날씨 좋을 때는 하룻밤 자고 오는 여행은 좀 했는데, 그것도 못하네요. 이러다 코로나 끝나도 여행은커녕 전처럼 만날 수나 있을까 싶어요. 몸들이 하루가 다르게 안 좋아지니까. 집에 있으니 맨, 유튜브나 붙들고 있고, 카카오톡에 황당한 영상이나 올리고, 아주들 힘들어요. 어떨 땐 영상 올리는 걸로 싸움도 한다니까.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아하, 선생님 진짜! 저 말이죠... 그런 게 힘들어서 친구들 단톡방에서 나온 적 있어요. 참다 참다 한마디 하고 나와버렸다니까요. 한창 바쁜데 카톡, 카톡 울려서 보면 영양가 없는 얘기, 근거도 없는 뉴스가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거예요. 안 볼 수도 없고요. 다들 좋다 어떻다 하는데 가만히 있기도 뭐하고요. 생각이 달라서 자꾸 갈등이 생기니까 단톡방 규칙도 정해보고 그랬거든요. 아, 그래도 쉽지 않더라고요. 어느 날 욱해서 나와버렸어요.
오호, 정 선생이 성질부릴 줄도 알아?
그럼요, 선생님 저 성질 더러... 아니, 저 까칠해요. 자꾸 선생님 앞에서 막말을... 히히. 저 이러다가 친구 다 떨어져 나갈 것 같아요. 나이 들수록 친구가 보험이라는데요.
보험?
네, 보험요. 친구들 모임에 목숨 거는 친구가 있어요. 결국 남는 건 친구다, 애들 키워봐야 결국 다 떠나고, 남편은 짐밖에 되지 않는다, 노년에 친구들과 같이 놀고 재밌게 지내야 한다. 그러면서 늘 보험이라고 하죠. 모임이 깨질까 전전긍긍이에요. 제가 단톡방 나왔을 때, 기겁하고 절 찾아왔다니까요. 나중에 후회한다면서요. 그때 친구가 그랬어요. 보험이라고.
재밌네, 보험! 보험 사기당할라 조심하라고 해요. 공들여 부은 우정 보험에 사기당할 수 있다. 본전도 못 찾을 수 있다고. 허허.
보험 사기? 그럴 듯 하네요. 아하, 보험이라는 말이 일리가 있네 싶다가도 뭔가 좀 찜찜했거든요. 쟤가 저렇게 애쓰는데 바라는 것처럼 될까, 싶은 거예요. 친구 모임 지키느라 제일 애쓰고 걱정이 많은데요. 그래서 정작 친구들 때문에 행복해 보이진 않거든요.
하긴 노인만 심심하고 노인만 두렵겠어요? 다들 심심하고 각자 다 외롭고 그래. 지금 외로우니 나중 외로움은 더 큰 걱정이 되고... 내가 그 드라마가 그래서 좋다니까. 우리 모두 그리는 따뜻한 우정 같은 게 있잖아요. 알았어, 알았어. 또 놀리려고 저 눈동자 굴리는 거 봐라!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드라마에 푹 빠져서!
히히, 인정하셨으니까 봐 드릴게요. (선생님께 다 들리는 혼잣말) 히히 선생님 놀리는 게 드라마보다 더 재밌다.
그래, 늙은이 놀려먹어 좋겠다. (멀리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시며) 드라마에서 김혜자 씨와 나문희 씨 보면서 죽은 친구 생각이 났어요. 벌써 5년이 됐어. 나랑 참 다른데 잘 맞는 친구였거든. 그 친구가 꼭 정 선생처럼 우스개소리 잘하고 그랬어요.
전에 말씀하셨던 친구분이요? 양평 나들이 함께 다니셨다는.
그래, 맞아! 여기저기 나를 많이 데리고 다녔지. 나는 평생 연구하고 가르치고, 학교밖에 모르고 살았어요. 그 친구는 일찍 결혼하여 아이들 키우고 성당 열심히 다니며 봉사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나는 바쁘기도 했고, 먼저 연락하고 그러는 성격이 못 되거든. 늘 그 친구가 먼저 연락하고, 어딜 가자, 뭘 같이 하자면서 끌고 다니곤 했어요. 남편과 부모님 보내드리고 힘들 때 곁을 지켰던 친구고요.
아, 각별하셨군요!
각별... 그렇지. 각별한 친구지. 맞아요. (한참 말을 잇지 못하신다) 선물 같은 친구예요. 정 선생 친구 말마따나 나이 들수록 친구가 꼭 필요한 것 맞아요. 그런데 좋은 친구는 보험료 내듯 해서 얻는 게 아니야. 그 좋은 친구를 얻자고 내가 지불한 게 없거든.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그냥 주어지는 선물이에요.
서로 선물 같은 친구
이걸 겸손이라고 해야 할까? 선물로 얻은 친구라니. 늘 쉽고 편하게 말씀하셔도 가볍게 하시는 말씀은 없다. 깊은 신앙심이 느껴지지만, 신앙의 용어로 표현하시는 일도 별로 없다. 지나치리만큼 이성적인 선생님이 맥락 없이 ‘선물’이라고 하시니 낯설다. 뭐라도 여쭤보고 싶은데 어쩐지 침범하기 어려운 침묵에 나도 입을 닫았다. 좋은 친구는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과연 그런가? 내 좋은 친구들과 나는 어떤 시간을 보내왔지? 친구 얼굴 몇이 떠오른다.
어쩌다 한 동네 태어났고, 한 학교에 다녔거나 어떤 환경에서 마주친 존재 아니겠소? 같은 공간에 있다고 다 친구가 되진 않았을 텐데, 성격이든 뭐든 통하는 것이 있으니 친구가 되었겠지. 친구가 되었어도 이사를 하거나 환경이 달라지면 멀어지기도 하잖아요. 내 보기에 친구는 환경과 성격의 산물이에요.
오호, 산물에 점 하나만 바꾸면 선물이네요.
그러네. 산물이 선물이 되는 게 친구네. 내가 이 드라마에 왜 이렇게 빠져드나 싶었더니 그 친구 그리는 마음이었 봐. 내게도 저런 친구가 있었지. 그립고 보고 싶고 그러네요.
선생님, 그런데 그저 선물이라고 하시는 건 좀 그래요. 지나치게 겸손하신 건 아닌가요? 그 친구분께도 분명 선생님이좋은 친구셨을 텐데요.
당연하지. 나도 그 친구에게 선물이 되었을 거라 믿어요. 뭐, 일방적인 사랑이었다고 들려? C. S. 루이스 알죠? <네 가지 사랑>이라는 책이 있어요. 오래전 읽었지만 인상 깊게 남은 것들이 있어요. 루이스는 개인의식이 최고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 맺는 관계가 우정이라고 해요. 에로스나 부모의 자녀 사랑 같은 애정보다 더 숭고한 사랑으로 보는 것 같아요. 나도 거기 동의해요. 연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자기들의 사랑에 매몰되죠. 하지만 친구들은 나란히 앉아 공통된 관심사에 함께 빠진다는 거예요. 친구가 둘일 필요도 없어. 셋도 넷도, 더 많은 사람과의 우정이 동시에 가능한 거죠. 젊은 한때 에로스 사랑이 강한 때가 있고, 아이를 키우거나 뭐든 돌보는 일을 할 때 부성애나 모성애가 필요한 시절도 있겠고.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거나 멀어지는 때가 와요. 그때 필요한 것이 우정이 아닌가 싶어. 그래서 늙을수록 친구가 필요하다는 말에 동의가 되고요. 그런데 우정이 그렇게 값싼 것이 아니야. 보험료 내듯 관리해서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아, 선생님은 정말 찐 친구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그럼. 찐 친구를 말하지 가짜 친구 얘기를 하는 거겠어?
가짜 친구가 많죠. SNS에 친구라 불리는 가짜 친구가 많아요. 선생님. 페친이라고, 페이스북의 친구가 있잖아요. ‘친구’라는 이름의 인맥 구축 장인 것 같아요. 프로필 밑에 친구의 숫자가 뜨는데 저는 그걸 볼 때마다 야릇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친구’라는 말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나 싶기도 하지만요. SNS에서 친구 숫자가 많은 것은 그저 얼마나 유명한지 보여주는 지표예요. 유명한 누구누구와 친구를 맺고, 같이 밥을 먹었다, 만났다 하는 걸 족족 사진 찍고 글을 써서 올리는 경우도 많은데요. 저는 그런 글들이 오히려 ‘외롭다, 친구가 필요하다’로 읽혀요.
그렇기도 하네. 나야 그쪽 세계는 모르니까. 어쨌든 좋은 친구는 하루아침에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지요. 대가를 많이 치러야지.
엇, 선생님. 선물이라고 하셨으면서요! 대가는 또 무신 말씀요?
대가가 있지. 인생 최고의 것을 얻는 건데. 그러면 선물로 온 친구와 더 좋은 친구 되기 위한 대가라고 합시다. 아니면 그냥 보험이라고 하든지, 적금이라고 하든지. (또 한참 말씀이 없으시다) 내 친구 말이에요. 일생에 그런 친구 하나 있어서 참 좋았구나 싶네. 돌이켜 생각해보니 대학 때 단짝 친구로 만나 인생 굽이굽이 여러 산을 넘었어요. 내가 공부하러 나갔을 때는 거의 연락 끊고 산 적도 있고, 대놓고 싸운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오해도 있었고, 뭔가 서운해서 멀어진 적도 있어요. 진짜 친구가 된 건 오십 줄에 들어서였던 것 같아요. 오래도록 서로 풀리지 않던 마음이 있었는데, 속 다 내놓고 얘기하다 보니 유치하게도 서로에게 질투 같은 것이 있었더라고. 내가 없는 거 친구만 누리는 것 같아 부러웠던 거지. 서로 할 말, 못할 말 다 하면서 늙어가던 시절이 참 좋았어요. 내 인생의 선물 같아요. 남편이나 아들과 다른 것 같아요. 함께한 오랜 시간, 그 시간 동안 보일 꼴 못 보일 꼴 다 보인 것이 대가라면 대가예요. 관리하지 않았어. 좋은 모습만 보이려 하지 않았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 되면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봐요.
어, 선생님. 그건 저도 동의해요. 제가 청년들 상담하면서 그런 얘기 자주 하거든요. 헤어짐을 두려워하는 한, 그저 연애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한 건강한 연애는 불가능하다고요. 그렇군요! 좋은 친구 사이도 마찬가지군요.
그러네. 그건 그렇고, 그래서 정 선생은 친구들 단톡방에서 탈출해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긴요! 다시 불려 들어갔죠. 창피했죠. 나름 친구들 사이에서 고민 들어주는 상담가 역할 하면서 성숙한 인격자 연기 제대로 했었는데 다 망가졌어요. 아, 그런데 희한한 건요. 그때부터 애들이 서로 조심하고 다른 친구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결론적으로 이전보다 나아졌어요.
누구와도, 어디서도 친구가 될 수 있어
대가를 잘 치렀네! 진실해지려면 갈등을 피할 수 없어. 하지만 그걸 감수하기만 하면 다른 관계가 된다고. 그럴 수 있는 친구는 인생에 몇 없으니, 그렇게 조금씩 망가지면서 함께 나이 들어가 봐요. <디어 마이 프렌즈> 드라마가 친구에 대한 그런 원형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적당히 가면 쓰고 포장하지 않고, 감정 다 드러내며 싸우고 화해하며 더 돈독해지는 우정 말이에요. 하긴 뭐, 실제로 그게 쉽겠냐만 그래도 보기 좋아요. 실제로 눈앞에 없다고 꼭 없는 건 아니니까.
네? 없으면 없는 거죠. 드라마 속 친구가 내 친구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난 있어. 눈에 안 보여도. 내 친구 천국 가고 여기선 볼 수 없지만, 내겐 있어요. 그 친구와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에 있어요. 믿어지지 않죠? 그립고 보고 싶은 마음 사무치는데 슬프지만은 않아요. 나한테 그렇게 좋은 친구가 있었단 사실이 변하지 않거든. 그 친구 생각하면, 그 친구가 나를 좋아해 주던 생각하면 어쩐지 내 인생 잘 산 것 같고, 내가 좋은 사람인 것 같고 그래요. 살아 있는 거지. 안 그래? 친구가 내 앞에 있다니까.
어, 네.... 선생님 저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경지 같아요.
하하하, 친구가 내 앞에 있어. 요기, 요기! 젊은 친구! 정 선생이 내 친구야. 늘그막에 만난 좋은 친구. 너무 늦게 든 보험인가? 나는 우정을 알아요. 그 친구가 알려주고 떠났거든. 누구와도, 어디서도 친구가 될 수 있어. 물론 아무나와 그리 될 수는 없지만.
네에... 치, 친구요? 스승님이신데... 하아...
스승님을 그렇게 종일 놀려먹냐? 하하.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이라는 여성 철학자를 좋아하는데요. 키케로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우정, 노년에 관해 쓴 책이 있어요. 그 책을 논평하면서 우정의 즐거움을 농담과 뒷담화라고 했어요. 맞는 말 같애. 마음 편히 누군가 뒷담화 할 수 있고, 농담할 수 있는 사이. 철학자에 따르면 나는 정 선생과 찐 친구야.
진심으로 나를 친구로 여기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황이 되었고, 그리고 마음 깊이 감동이 되었다. 이후 대화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 내 좋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속이 상해 누군가 뒷담화를 하고 나서 ‘나를 어떻게 볼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언제든 놀려먹고 장난 걸 수 있는 친구이다. 웬일로 전화냐고 묻는데 “보고 싶어서”라고 했더니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내 진심 또한 알아차렸을 것이다. 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우정, 실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부터 더 잘 알아가려 한다. 우정이라는 선물을 누리는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결심 아닌 결심이 서는 것 같기도 하고.
2021년 마지막 날을 아무 걱정 없이,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몸을 파묻고 보냈다. 어제 오후 백신 부스터 샷 접종을 하고, 밤에 연구소 송년 글쓰기를 했다. 강의할 때만 해도 주사 맞은 부위가 조금 뻐근하다 싶었는데, 2차 때 왔던 불면증 후유증이 와서 말똥말똥한 밤을 보냈다. 잠깐 잤지만 새벽부터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밤에 손해 본 잠이 억울해서, 어쩌면 몸이 무거워서 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몇 줄 읽다가 졸고, 다시 일어나 조금 읽다가 자고.... 그렇게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 읽고 나니 거짓말처럼 일어날 힘이 생겼다.
그렇다, 카이사르는 분명히 필멸의 인간이니 그가 죽는 것은 당연한다. 그렇지만 나, 바냐, 수많은 감정과 생각을 가진 이반 일리치에게 그건 전혀 다른 문제다.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너무 끔찍한 일이다.
올해의 키워드는 '죽음'과 '비극'이다. 죽음에 대해 말할 자리, 강의할 자리가 여러 번 있었고, 그때마다 내 마음 속 죽음은 업데이트를 거듭했다. 여전히 견딜 수 없이 그리운 엄마이지만, 내 마음속 죽음은 작년 3월 엄마의 죽음이 아니다. 40년 전 아버지의 죽음도 아니다. 그냥 죽음이다. 세상의 모든 죽음이다. 인생의 끝에서 만날, 궁극의 비극인 죽음이다. 죽음이 끝이 아닌 것에의 믿음으로 오늘의 시간에 죽음을 받아들이면 열리는 새로운 오늘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을 받아들이지 못함이 인간의 비극이다. 올해의 키워드는 죽음과 비극과 더불어 '성장'이다. 송년 글쓰기를 거듭하면서 돌아보니 그렇다. 나와 다른 사람의 성장이 가장 기쁜 일이었고, 그 반대가 가장 아픈 일이었다. 몸은 노화하여 필멸할 것이나, 정신적 성장은 끝이 없다. 늘 자라야 하고, 성장의 궁극은 죽음 앞에서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머리 식힐 겸 소설을 하나 읽자, 는 마음으로 아침에 침대에 파고들며 붙들었는데 2021년 마지막 날 읽기 딱 좋은 내용이었다. "도대체 왜, 내가 잘못 살아온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라며 죽음에 저항하는 이반 일리치는 잘못 살아왔다. 다른 잘못은 모르겠고, '죽지 않을 존재'처럼 살아온 것이다. 이미 그의 생은 메마르고 비극적이었는데, 비극성을 마주하지 않았던 것. 이미 아픈 몸인데,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살다 병을 키운 것과 같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죽음'을 선물로 받기 위해서는 죽기 전에 죽어야 한다고 했다. 과연 이반 일리치는 죽기 한 시간 전에 그 강한 에고의 힘을 빼고 기꺼이 죽는다. 죽기 한 시간 전이지만, 한 시간 전에라도 죽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 내가 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어.> 그는 생각했다. <다들 불쌍해. 하지만 내가 죽으면 좀 편해질 테지.> 그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말을 할 힘이 없었다. <아니야, 뭣 하러 말을 해. 그냥 보여 주면 돼.> 그는 생각했다. 그는 아내에게 눈짓으로 아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데리고 가…… 안쓰러워...... 그리고 당신도......」 그는 <용서해 줘>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가게 해줘>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러나 고쳐 말할 힘조차 없어서 손을 내저었다. 알아들을 사람은 알아듣겠지. 그러자 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이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마음속에 갇혀 있던 것들이 일순간 두 방향, 열 방향, 모든 방향에서 쏟아져 나왔다. 저들이 불쌍해. 저들이 더 고통받지 않게 해주어야 해. 저들을 해방시켜 주고 나도 이 고통에서 해방되어야 해. <얼마나 좋아. 얼마나 단순해.>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통증은?> 하고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통증은 어디로 갔지? 이봐, 너, 어디로 간 거야?> 그는 귀를 기울였다. <아, 여기에 있었군. 그래, 뭐, 거기 있으라고 해.>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로 갔지?> 그는 그동한 익숙해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했다. 죽음은 어디 있지? 무슨 죽음? 두려움은 이제 없었다. 죽음이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던 자리에 빛이 있었다. (중략) 이 말을 들은 이반 일리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죽음은 없어.>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다가 도중에 멈추더니 온몸을 쭉 뻗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죽음, 죽음을 연상시키는 모든 것. 그러니까 실패, 실망, 구겨짐, 쓰라림...... 이런 것들과 친해지고 받아들이는 연습이야 말로 죽기 전에 죽어 지금 여기서 자유를 사는 것이 된다. 죽기 전에 죽으면, 이반 일리치의 말처럼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이란 것이 없어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진다. 오늘, 계획 세운 바 없이 2021년 마지막 날로서 적절한 하루를 보냈다. 마치 올해의 배움을 총정리하듯 이반 일리치의 죽음의 시간과 함께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줌으로 드리는 교회 송구영신 예배에서 짧은 묵상을 인도할 준비를 한다. 죽기 전에 죽어서 얻는 선물을 "지금 여기"에 살아 있음이다. 일상의 작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이다. 2021년 내면의 스승이신 그분께서는 나를 이렇게 가르치셨다.
머리 싸매고 과제하기 동지. 종강 동지. 김채윤 동지가 내 산책에 따라붙어 산책 동지가 되었다. 어떻게든 따돌려 보려고 했는데, 결국 따라붙었다. 의기투합하여 걷는 길은 고속도로와 탄천 사이 농로, 에서 외롭게 매달린 '토마토마트'를 발견했다. 토마토마트는 어릴 적에 채윤이가 방울토마토를 부르던 이름이다. "와, 꼴찌로 태어난 토마토다!"라고 내가 말했다. 채윤이 어릴 적에 읽어주던 그림책 제목이다. "어, 나 그 책 생각나는데..." 채윤이도 말했다.
어릴 적에 읽어주던 그림책, 함께 불렀던 노래를 또렷이 기억하는 건 엄마 아빠이다. 아이들의 기억은 제목 어렴풋, 반복되던 문구나 운율 어렴풋이다. "달님 안녕" 하고 그때 그 그림책 얘기가 나오면 줄줄 외우며 신나는 건 엄마 아빠다. 꼴찌로 태어난 토마토, 안녕 또 만나, 뭐 하니, 색깔 나라 여행... 문자로 나열하면 도통 그 맛을 살릴 수 없는 운율과 딕션으로 남은 우리들의 그림책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종필과 신실... 그렇게 읽은 것 또 읽고, 또 읽고... 결국 읽는 사람 외울 지경이 되도록 강요했던 아이들은 모르는 일, 모르는 그림책이다.
그러니까 아이들과 함께 했던, 아이들이 이 땅을 살던 초기 기억이 부모와 아이에게 다르게 저장된다. 엄마 아빠에게는 의식으로 또렷하게, 아이들 자신에게는 무의식으로. 미지의 에너지로!
'미지'의 에너지. 미지.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은 어린 시절은 알 수 없는 에너지로 오늘과 함께 한다. 스무 살도, 서른 살도, 쉰이나 일흔 된 사람도, 죽음에 임박한 사람조차도. 이것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운 일인가. 내가 내 엄마를 넘어서기 위해 씨름했던 나날을 비추어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는 것은... 내가 '준 것'이 아니라 주느라고 애쓰며 드리운 그림자가 아이들의 오늘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내적 여정 안내자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부모가 지운 무의식적인 삶을 지고 끙끙거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늘 새롭게 정신 차리고, 또 정신을 일깨울 수밖에 없다. 내담자들, 수강자들이 오늘의 고통을 마주하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뒷덜미를 잡고 있는 것이 부모의 무의식적인 삶인 것을 확인할 때는. 아, 나는 평생 아버지 부재와 맞서 글을 썼고, 마음에서 엄마를 죽였다 살렸다 하면서 신앙 사춘기를 보냈고, 결국 기나긴 세월 지내면 부모와 화해하고 고요해진 나날을 살고 있다, 지만...... 부모가 내게 지운 짐을 마주하는 것은 그나마 길이 보이는데, 내가 나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지운 짐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이가 견뎌내야 할 가장 큰 짐은 바로 부모의 무의식적인 삶이다. _카를 융
그래서 그냥 늘 새롭게 만나려고 한다. 아침에 제 방에서 나오는 아이들과 인사하며 어제의 나로 얘네들을 마주하지 않으려고. 어제의 낡은 방식으로 아이들과 만나지 않으려고. 하룻밤 자고, 하룻밤만큼 더 무르익은 존재로 얘네들을 바라보고 겸손하게 대하려고. 물론 결심으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 결핍이나 욕망에 얽혀서 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하지는 않았으면 싶다. 내 한 가지 소원이다.
혼자 걷고 싶은 시간이었지만, 따라붙는 채윤이와 함께 걸으며 마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오고 가는 길을 선택하는 것도 채윤이에게 맡기고, 되는대로 즐겨본다. 돌아오는 길, 빠르게 해가 넘어간다. "엄마, 저기 좀 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풍경이다. 텅 빈 나뭇가지 사이로 배경이 보이는 거... 아, 엄마는 저런 나무 싫어하지? 겨울나무 슬프지?" "아니, 엄마 이제 저런 풍경을 좋아하면서 볼 수 있어. 희한하게 이제 많이 괜찮아졌어. 엄마도 너처럼 겨울 나무가 있는 그대로 보여. 아름다워, 저런 풍경..." 나목도, 나목 가지 사이로 멀리 보이는 석양도, 경부고속도로 위 집으로 돌아가는 차들도 아름답다. 꼴찌로 태어난 토마토를 뒤로 하고 우리도 집으로 돌아온다. '꼴찌로 태어난 토마토'는 딸과 엄마의 동상이몽일 터. 동상이몽이어서 자유다! 너는 네 꿈을 꾸고 나는 내 꿈을 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