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가 있다. 나 포함 셋이 1년에 한두 번 만난다. 친구 J가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일을 하는 덕에 자주 보게 된다. 그렇다. 아프리카에 있어서 자주 본다. 미국이나 캐나다가 아니라 아프리카니까. 한 번 들어올 때면 꼭 봐야 할 것 같은 이심전심이다. 실은 아프리카가 아니어도 만남을 도모하는 친구는 꼭 J였다. 어릴 적 친구들 정보도 죄다 꿰고 있다. 여전히 연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조용하고 내향적인 친구인데 말이다. 잊지 않고 잇고 마는 역할은 늘 J의 몫이다. 사람을 향한 남다른 감각, 따스한 마음이 탁월한 친구이다. 고마운 친구다.
친구 W는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된 친구이다. 싸개에 싸여서 만났을 것이다. 엄마 등에 업혀서 같은 예배를 드렸을 테고. 아버지 목회하던 교회의 젊은 집사님의 아들이었다. 대여섯 살 즈음에는 장로님 딸 의정이까지 해서 어린 삼총사였다. W의 부모님이 의상실을 하셨는데 거기서 셋이 놀던 기억이 아련하다. 마네킹 보관해둔 곳에서 숨바꼭질하며 무서워하며 동시에 깔깔거렸던 기억들. W의 아버지는 빼어난 테너 목소리셨다. 성가대에서 노래를 잘하셨고, 이번에 만나고 문득 떠올랐는데 우리 아버지 장례 예배 때 특별 찬송을 부르셨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영원히 쉬일 곳 아주 없네.....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찬송을 부르고 예배당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으셨던 모습이 인생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셋이 친구가 된 건 고등학교 때이다. 서울의 교회에서 만났다. 한 교회를 다니게 된 건 엄마와 W 부모님의 친분이다. J는 고등학교 때 전도되어 온 친구이고. 대학에 가서 함께 중창단을 만들고 죽이 맞아 같이 돌아다녔다. J가 군대 가기 며칠 전, 모란시장의 겨울이 생각난다. J가 모란시장의 순대국밥이 먹고 싶다고 했던 것 같다. 난생처음 모란시장이란 곳에 갔고, 난생처음 순대국밥도 먹어봤다. 눈발도 날렸던 것 같다. 하나 씩 떠올려보니 강렬한 감정은 없지만 함께 한 소소한 것들이 잊히지 않는 이미지들로 남아 있다. 이 소소함이 어쩐지 새롭게 소중하게 느껴진다. 연인이 아니라 친구라서 참 좋구나!
만나도 별 것 없다. 르완다에서 가져온 커피를 건네고, 또 "이거 원두야? 어떻게 먹어?" 매번 물었던 걸 또 묻고. 그러면 나와 J가 동시에 "커터기에 갈아도 돼"라고 말하고. "아, 사무실에 기계 있어." 비슷한 얘기를 다시 하는 것 같다. 부모님 안부를 묻고, 그 사이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우리 엄마가 돌아가시고... 다음에도 곱창을 먹자, 다른 맛집을 찾자, 하고. 바람 좋은 야외 카페에 앉아 오가는 그 맹맹한 대화가 편하고 좋았다. 친구라서 참 좋구나!
지하철 역까지 가는 길에 내가 물었다. "너희는 나이 드는 게 어때?" 마주 앉아서 친구의 얼굴을 보며 나이를 많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 얼굴이 내 얼굴 아닌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나는 어떠냐고 내게 되물어 와서 "나는 나이 드는 게 참 좋아"라고 했다. "너는 니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어서 그럴 거야." 하더니 W는 젊을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고. 젊을 때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냐, 음악을 하고 싶냐 물었다. 아버지에게서 온 것일 텐데 W도 음악에 관한 탁월성을 타고난 친구이다. 대학가요제 나갈 준비를 했었는데, 하지 못했던 것 아쉽다고 했다. 대학 졸업하고 입사하여 한 직장에 다니는 친구이다. 약한 몸으로 태어난 아이를 묵묵히 키우고 돌보는 일을 한결같이 해 온 세월이기도 하다. 친구의 한결같은 인생이, 아니 어떻게 인생이 한결같겠나. 질곡 많은 인생을 한결같이 살아온 친구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60이면 은퇴니, 얼마 남지 않았고 그 이후의 삶이 걱정이라고 했다. 걱정하며 준비하고 있다고. 돌아오는 길 친구를 위해서 기도했다. 음악이든 무엇이든 젊은 시절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하고 남을 인생 후반을 살기를. 무엇이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 취향을 존중하는 시간을 살 수 있기를. 그런 기도들이 나왔다.
오래된 아파트라 베란다가 있고, 베란다 앞으로 화분 놓는 선반이 달려 있다. 마음 같아선 선반 가득 예쁜 꽃 화분으로 가득 채우고 싶지만, 거기까지 힘이 미치질 않는다. 작은 화분 몇 개를 내놨다 들여놨다 하고 있다. 교회 집사님께서 지방으로 이사하며 주신 화분 중 하나가 있는데(아! 이름 모름) 신통방통이다. 어느 날 보면 살짝 기운이 빠져 있다, 비가 오고 또 어느 날 보면 생기가 가득 차 있다. 그러다 어느 아침에 보면 저렇듯 작고 예쁜 꽃을 피운다. 물론 또 돌아서서 보면 시들어 없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피고 지고 피고 지고 하며 여름 가을을 나고 있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제 할 일을 한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월요일에 2차 백신을 맞았다. 그 밤, 당일 월요일 밤에 부담 많이 되는 강연이 있어 몸 상태 어쩌려나 걱정을 했다. 미리 타이레놀 먹고 강연 무사히 마쳤지만... 그 이후부터 무사하지 않았다. 월요일 밤 강연 걱정만 했는데, 당일만 무사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바쁜 사람'으로 칭해지지만, 실제 그리 바쁘지 않다. 늘 글을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 그렇지 일이 많은 것은 아니다. 문득 한 주간을 꼽아보니, 와! 나 바빠도 보통 바쁜 사람이 아니네. 이렇게 일주일 빼곡하게 일정이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정리하면서 나도 놀랐다. (이런 일정 거의 없고, 특별한 한 주였으니 걱정하시기 없기)
월요일 밤 : <기독인문학연구원> 독서 세미나 저자 강연
화요일 오후 : <기독교반성폭력센터> 목회자성폭력생존자 글쓰기 모임
화요일 밤 : <연구소> 꿈과 영성생활 집단 여정
수요일 하루 종일 : <연구소> 내적여정 대면 강의
목요일 오후 : <연구소> 지도자 과정 특강
목요일 오후부터 밤 : 대학원 수업
금요일 오전 : <IVF> 신입간사 훈련
토요일 오전 : <연구소> 내적여정 온라인 강의
토요일 오후 : <전주온누리교회> 청년부 리더 내적 여정
코 앞의 일정만 생각하고 밤마다 "백신 후유증 어떻게 될 지 모르고, 내일 일이 있으니까 일찍 자야지!" 했는데. 월, 화, 수 3일 연속 불면의 밤을 보냈다. 이렇게 잠이 오지 않을 수가 있나? 나로 말하자면 정말 잘 자는 사람이다. 정말 잘 자서 하루 자고 나면 그냥 거뜬해지는 몸이다. 3일 째 불면의 밤을 보내며 혹시나 하고 검색을 해봤다. "화이자 부작용 ㅂ" 까지 쳤는데 "화이자 부작용 불면증"이 뜨더라. 흔하지 않은 부작용에 불면증도 있다고... 이름 붙이고 나니 차라리 속이 편해졌다.
목요일 일정 마치고 9시가 다 되어 밤 산책을 나갔다. 나간 김에 마트에 들렀는데, 갑자기 육전이 먹고 싶어져 충동구매를 하고, 집에 와 충동 요리를 했다. 야식 없는 집, 야식 모르는 식구들 불러 모아 그 밤에 육전을 먹었다. 명절에 못 먹은 전 결핍 채우는 것이라 해도 좋고. 빡빡한 일정 백신 투혼으로 달리는 나를 위한 몸보신이라 해도 좋겠다. 육전의 힘인지, 그밤 잘 자고 수면 컨디션은 제대로 돌아왔다. 벌겋게 부어서 열감이 있던 팔도 푹 자고 난 금요일부터 괜찮아졌고.
아, 이 모든 일정은 100% 집에서 소화한 것이다. 아니다. 수요일만 빼고. 아니면 애초 불가능한 일정이다. 팬데믹이 가져온 새로운 강의 환경인데, 내게는 새롭게 기쁘게 일할 수 있는 장이다. 대면 강의로 몸으로 이동하는 거리로 치면 어마어마 했겠다. 전주도 갔다 왔어야 하고, 온라인 강의에는 미국에 계신 분도 있는데 이동 거리가 얼마냐?!
달리 뭐라 부를 수 없는 국수이다. 추석이 남긴 국수로 하자. 연휴 3일 동안 각각 다른 가족과 식사를 했다. 집에서 했다. 첫날은 참 좋은 집사님 부부와, 둘째 날은 동생네 가족과, 추석 당일 셋째 날은 어머님과. 동생네가 식사하고 간 둘째 날 밤에 남편이 조금 늦게 방에 들어와 보니 내가 시체처럼 자고 있었다고 하지만 그리 힘들지 않았다. 장보기와 준비하기에 들어가는 에너지를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두 번은 라끌렛, 한 번은 샤브샤브라서 재료도 많이 겹치고.
명절증후군으로 인생 80% 정도 설명이 가능하신 어머니, 젊은 세대지만 우리 어머니 못지 않게 명절마다 몸 고생 마음고생했던 올케. 두 여인을 위해 상을 차리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지나고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어느 추석보다 선물 들어온 디저트가 풍성해서 올케가 아주 맛있게 먹고 블로그 포스팅할 거 생겼다며 좋아라 사진 찍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엄마 모시고 사느라 이래 저래 고생 많았지만, 인사 오는 손님 많은 명절엔 더욱 그랬다. 어머닌 어머니대로 혼자 사시는 게 외롭다 외롭다 하시면서도 예전 명절 떠올리시곤 "아이고, 끔찍했다!" 하신다.
명절 상처 많은 두 여인과 명절스럽지 않은 메뉴로 식사하고 났더니 야채와 고기와 국수가 각각 애매하게 남았다. 국수는 특히 더 애매함. 라끌렛 먹고 입가심으로 먹은 얼큰 해물 국수 용 생소면 한 주먹, 샤브샤브 마지막에 먹은 생칼국수 한 주먹 진짜 애매한 양이다. 멸치육수 진하게 내서 모든 걸 다 털어 넣었다. 국수는 면발 굵기에 따라 시간차 어택으로 투입. 양이 부족하여 얇디얇은 극소면도 좀 넣었다. 두께가 다른 면이 세 종류. 와, 뭐라 이름할 수 없는, 다시 없을 국수가 되었다. 2021년 추석 국수라고 하자.
세 번을 물었다. 한 번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자작나무들이 섰는 길을 지나며 한 번, 좁은 오솔길에서 다시 한 번, 산을 내려와서 한 번, 그렇게 세 번을 물었다. "이 정도면 까다로운 정신실이 만족했겠지" 세 번 다 남편 딴에는 흡족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답이 있을 수 없다. '원하던 길'이 애초 있었던가.
오늘은 뭐 하고 싶어?
음, 숲을 조금 걷다가 카페 가서 원고를 쓸까?
이게 전부였다. 숲과 카페를 함께 엮었으니까, 식물원 같은 곳을 상상했던 것 같다. 걷고도 싶고, 원고도 써야 하니까. 조금 걷고 원고는 많이 쓰는 그림을 그리면서. 조금 걸었는데 몸은 많이 가벼워지고, 잠깐 앉아서 썼는데 원고는 완성을 해버리는 그런 상상을 했던 것 같기도. 폭풍 검색을 하더니 집 근처 걷기 좋은 숲을 찾아냈고, 언제나처럼 지도를 보며 요기조기 이끌었다. 남편은 늘 선택해 놓고 욕먹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안에서 언제든 눌리길 기다리는 불평불만 버튼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길이 아니었다, 내가 걷는다고 했지 등산한다 했냐, 그늘이라고 하지 않았냐, 한 시간만 걸을 거였는데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된 거냐... 충만히 장착되어 있다.
원하던 길이야?
물을 때는 아마 '이 정도면 괜찮다' 싶을 때일 것이다. 자신도 만족스럽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원했던 그 길이라는 뜻이다. 걸으면서 나도 가만히 내게 물었다. 원했던 길인가? 원했던 길은 늘 막연하다. 대충 좋을 것이라는 불성실한 상상, 좋아야 한다는 환상을 섞어 그리게 된다. 그리고 기분에 따라 원했던 길이다, 아니다,를 정해버린다. 물론 여기서 끝나지 않고 기분이 좋지 않다면 '남(편) 탓' 하기까지 가야 풀코스다. 산에서 내려와서 주차한 곳까지 땡볕을 걷는 게 고역이었는데, 그 길 중간에 해바라기가 저렇게 그림처럼 피어 있었다. 두어 시간 걸었던 산길의 기억이 싹 지워졌다. 환하게 피어난 해바라기 한 송이로 남은 길이 되었다.
생 목이버섯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설마, 처음 알았을까. 처음 보았다. 아니, 정말 처음 안 것 같다. 직접 체험해야 진짜 아는 것이라면, 처음 안 것이 맞다. 점심으로 간단 파스타 만들고 있는데, 택배가 하나 와서 열었는데... 오오, 버섯의 향연 실하고 싱싱한 버섯의 외모에 그냥 반해버렸다. 그중 채윤이가 특히 반긴 건, "목이버섯이야? 나 목이버섯 좋아하는데!" (우리 채윤이가 안 좋아하는 식재료가 있긴 하고?) 그냥 먹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의 탱글탱글한 목이버섯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검색해보니 숙회로도 먹는다고. 숙, 익힐 숙인데... 어쩐지 그냥 먹어도 될 것 같아서 깨끗이 씻어서 입어 넣어 보았다. 와아, 신세계구나! 현대도, AK도, 롯데도 아니고 신세계야! 몇 쪽을 꺼내서 완성되어가는 파스타에 넣어 맛있게 먹었다.
저녁엔 '대패삼겹살 명란마요 덮밥'을 했는데, 덮는 재료로 함께 써보고. 양념구이 대패삼겹살과 모양이 비슷하다. 상 차리고 사진 찍으려는데 주방 창 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이 직진으로 꽂혀 조명을 쏘아주었다. 생 목이버섯의 위엄이구나. 넘어가던 해도 인사를 하고 가는구나!
뜨거운 여름이었다. 여름 수련회 강사로 전국 각지의 수련회장을 누비고 다닐 수 없었지만, 수련회 철 강의 따라 이동하는 거리를 모두 합해도 한 번 다녀오는 것에 미치지 못할 먼 곳을 오가는 여름이었다. 네팔의 윤선이와 아홉 번을 만났고, "이게 실화냐! 윤선이와 수다라니!" 만날 때마다 믿기지 않았으나 결국 네팔을 아홉 번 다녀온 느낌이다. 책을 읽는다지만 그렇지 않다. 진정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내가 아니라 책이 읽는다는 것을 안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는다. 책일 나를 읽게 한 후에 마주 앉아 책이 읽어낸 '나'의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의 기쁨은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아홉 번의 만남은 이래저래 민낯이었다. 일어나서 겨우 정신 정도 차리고 부숭부숭한 얼굴로 카메라를 켰다. 나는 아홉 시, 윤선이는 새벽 다섯 시 몇 분. 마음에도 무얼 찍어 바르고 그럴 일 없이, 책이 읽어낸 나의 수치심을 그냥 서로 말했다. 민낯으로 만나는 만남이 좋은 걸 어떻게 말로 치장하여 설명할 수가 없네.
벌써 십수 년 전, 남편이 신학교도 가기 전이었다. '가정교회'라는 셀모임을 하면서 윤선이 부부를 만났다. 결혼하고 바로 선교사로 나갈 젊은이들이었고, 함께 한 시간이 길지도 않다. 그런데 두 사람 보내면서 아까웠다. 너무나도 아까웠다. 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공동체면 얼마나 좋을까? 나이가 나보다 한참 어린데 속이 깊이 무르익은 사람들이었다. 질문할 줄 알고 깊이 들을 줄 알고. 내게 좋은 사람은 진심으로 궁금하여 질문할 줄 알고, 마음의 귀로 듣는 사람이다. 나이와 상관 없는 능력이다. 함께 있으면 참 힘이 될 것 같아서, 이기심에 아까웠다. 막 좋은 계획을 세우며 사람을 사랑하는 버릇이 있어서 혼자 계획도 많이 세웠다. 윤선이가 아이를 낳으면 나는 모든 일을 전폐하고 한두 달 네팔로 가서 산후조리를 해줘야지! 같은 생각들. 돌아보면 마음은 진심이었는데, 비행기 값이 없어서 이루지 못한 꿈이다. 사실 함께한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다. 잠시 가정교회에서 함께 하고 네팔로 갔고, 몇 년에 한 번 나오면 짧게 얼굴 보고... 내가 윤선일 생각하는 것보다 윤선이가 나를 훨씬 더 많이 생각했다는 걸 뒤늦게 안다. 이번 여름 이 뜨거운 만남은 팬데믹 덕분, Zoom 덕분이 아니라, 언니를 기억해준 윤선이 덕분이다.
평생 정말 많은 책모임을 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같이 읽자" 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사랑한다"는 고백과 같다. 남편 김종필과도 그렇게 만나고, 함께 읽다 헤어지고, 각자 읽으며 다시 만나지 않았던가! 사랑한다 고백하고, 더 많이 사랑한 죄로 상처 받는 것처럼 이 사람 저 사람 같이 읽자고 부추기다 마음도 많이 다쳤다. 그렇게 긴긴 세월 같이 읽자, 같이 쓰자, 하면서 살아왔더니 이렇게 좋은 선물도 받는다. 책 읽는 모임이 아니라, 각자 책이 나를 읽게 한 후에 '읽혀버린 나'로 만나고, 헤어져 각자 또 쓰고, 또 읽고, 읽히고 카메라 앞에서 만나고. 잊지 못할 2021년 여름이다. 여름 수련회 대목 강의는 온데간데 없어졌지만, 네팔에 아홉 번 다녀올 비행기 값을 벌었으니 대박이 난 거다.
생각해 보니 이게 끝이 아니네. 연구소 지도자 과정에서 여름방학 동안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을 함께 읽었다. 여럿이 함께 하니 얻어가는 것이야 제각각이겠으나, 내게는 완주 자체가 큰 의미이다. 십수 년 전, 카타콤 같은 하남의 아파트 거실에서 혼자 읽으며 울다 기도하다 했던 책이다. 함께 읽을 이들이 이렇게 많아졌으니, 이 또한 큰 선물이다. 외롭게 혼자 읽고 써온 세월이 준 선물. 올여름 정말 뜨거웠구나!
메뉴를 정하고 장을 보러 가는 방법이 있고, 장을 안 보는 것으로 정하고 메뉴를 정하는 수가 있다. 생각 없이 하는 걸로는 전자의 방법이지만, 후자를 선택하면 돈도 굳고, 장 보러 가는 귀찮음 해결, 냉장고 비우기 등 여러 좋은 점이 있다. 물론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생각을 하기도 전에 생각이 났다? 땡큐지!!!
"라이스페이퍼에 스팸이란 치즈 이런 걸 싸서 떡볶이 하는 방법도 있어요."
얼마 전 저녁 초대를 받아 간 집의 딸내미가 월남쌈 먹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떡볶이 떡은 없었는데, 먹다 남은 라이스페이퍼는 늘 있고... 그래서 만들었다. 라이스페이퍼 떡볶이. 한 줌 남아 땡땡 언 우삼겹까지 숙주랑 볶아 해결했다. (숙주는 오리 떡볶이 하려고 사둔 건데...)
늘 그렇듯 사람들은 희소한 것에 꽂힌다. 일 인분 정도 되는 우삼겹 숙주볶음을 금방 싹 비우고 떡볶이는 반을 남기더라.
<와우결혼 : 와서 보라 우리의 결혼을> 이런 책을 공저로 낸 부부이다. 서로 사랑하는데, 각각 괜찮은 사람인데, 이 지점만 가면 같은 패턴으로 맞서다 어설픈 화해, 돌아서서 깊은 좌절로 끝나곤 했었다.
남편은 판단하지 않는 사람, 있는 그대로 수용해주는 사람, 상대를 바꾸려 하기보다 자신이 변화되고자 돌아보고 돌아보는 사람...이지만 마음으로 늘 계획표가 있고, 시간이 참으로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을 위해 시간을 낼 수 있지만 끝날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대화가 힘든 사람이다. 그런 남편을 나는 '인색'이라고 부르며 자주 좌절했다.
나는 나름대로 눈치가 있고 웬만큼 낄끼빠빠도 잘 하지만, 뭐 하나에 꽂히면, 특히 부정적 감정에 꽂히면 쉽게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 잘 들어주는 사람이 앞에 앉아 있으면 끝도 없이 말을 하는 지나친 '열정'의 소유자다.
'열정'이라 불리는 끝이 없는 말과 '절제와 인색'이라 불리는 끝을 정한 시간 사이에 교차점을 찾을 수 없었고, 가장 큰 갈등은 늘 여기서 시작했다. 시작은 같지만, 불똥은 어디로든 튈 수 있었다. 육아, 가사 분담, 진로, 시어머니를 비롯한 복잡한 인간관계... 어떤 주제로든 튀어 옮겨 붙어 가끔은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불길이 되기도 했다. 사소한 줄 알면서 쉽게 넘어서 지지 않고 극복되지 않아서 더 깊이 좌절했는지 모른다. 어떤 관계에서든 '선의의 해석'을 하고 보는 남편에겐 사소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남편이 늘 먼저 사과했다. 사소한 생각 하나로 가지를 쳐 최악까지 가곤 하는 나는 그렇지 않았다. 끝까지 들어주지 않고,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는 남편을 몰아세웠다. '끝'이 어디인지, 영혼을 담아 듣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오면 "그래서 당신이 안 되는 거야!"라고 했다. 다 큰 애들의 관전평은 '엄마의 가스 라이팅'이었지만, 내 열정은 포기를 몰랐다.
얼마 전 남편과 저런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변했다. 진심 어린 문자이다. 남편은 끝까지 충분히 들어주었고, 심지어 따뜻하게 공감해 주었다. 어느 커플에게는 가장 쉬운 일일 텐데 말이다. 우리는 22년이 걸렸다.
22년 포기하지 않고 남편을 압박한 나의 끈질김을 스스로 칭찬한다. 순한데다 성찰적이기까지 한 남편에게 감사한다. 대충 만족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서로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성장을 포기하지 않았던 우리의 아팠던 시간들을 소중히 새긴다. "오늘은 기도하지 않을 거야!" 내게 아픔을 준 남편을 용서하게 될까 두려워 기도하지 않겠다 결심한 '유치한 기도'들이 떠오른다. 유치하여 정직한 기도였다. 실망하지 않기 위해, 좌절하지 않기 위해, 선의의 해석을 위해 혼자 성찰 일기를 쓰고 고통스러워했을 남편만의 정직한 기도 또한 알겠다. 22년 기도의 열매다. 저 문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는 아무도 그분께서 원하시는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가 될 수 없듯이 우리 삶 전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줄조차 모른다고 말한다(롬 8:26). 그렇다면 우리는 기도하지 말아야 할까? 절대 아니다.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26절) 하시기 때문이다. 그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대인관계 속으로 들어오신다. 우리가 그분을 모셔들이고 바라보며 계속 최선을 다한다면 말이다. 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 중
풍성한 식사였다. 주꾸미 볶음이 주메뉴인 줄 알았는데 세트로 묶여서 나온 메밀묵 국수에 메밀전병까지. 풍성하고 조화로웠다. 함께 마음공부로 만나 학구열을 불태웠던 선생님들과의 식사라 더 좋았다. 아, 물론 모든 영광은 우리의 물주이자 미리 답사까지 하며 식당을 선정하신 신 최 선생께 돌려야 한다.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인연이 된 몇 사람과 정례 모임을 하고 있다. “오는 게 어렵지 않으면 우리 집에서 모여요.” 최 선생님 한 마디에 장소는 붙박이가 되었다. 각자 자기 영역에서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공부 모임이라 배울 것이 많다. 장소 제공뿐 아니라 근처 맛집을 알아보시고, 미리 답사까지 하며 식사 자리를 준비하시는 최 선생님 덕에 먹는 즐거움까지 더해진다. 자리를 옮겨 선생님 댁 거실에 모여 앉았다.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식후에 마실 커피를 준비해갔다. 직접 로스팅한 커피와 드립세트까지 챙겼다. 내내 하늘이 묵직하더니 후두둑 장대비가 쏟아졌다. 흐린 날, 비 오는 날엔 밑으로 깔리는 커피향이 유난히 감미롭다. 아, 이거 날씨까지 받쳐주는군!
원두를 미리 분쇄하지 않고 굳이 핸드밀까지 챙겨갔다. 야심차게 커피를 갈았다. 핸드드립 커피가 가장 매혹적일 때는 분쇄될 때 퍼지는 향이다. 막상 드립하는 순간이나, 특히 마실 때는 향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나저러나 거실은 커피 향으로 가득 찼고, 여느 카페 못지않다며 좋아들 했다. 좋은 것을 좋은 사람들과 함께 먹는 기쁨이 있다. 무엇보다 최 선생님께 꼭 한 번 핸드드립 커피를 대접하고 싶었다. 선생님은 댁에서 흔히 말하는 봉지 커피, 인스턴트 커피를 드신다. 나의 민감함, 지나친 걱정이긴 한데. 고혈압에 당뇨도 있으신데 그걸 계속 드시는 게 늘 마음이 쓰였다. 신선한 원두커피를 드시면 좋을 텐데, 싶어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소개해드려야지 하고 있었다. “어머나, 입이 개운해지네. 그냥 쓴 아메리카노 커피하고 다르구먼. 입안에 향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신기하다, 깔끔하네. 그거.” 일단은 성공!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차 막히기 전에 출발하자던 소리를 몇 번이나 하다 일어서려는데 저녁 먹고 가라고 붙드신다. “이왕 늦은 거 저녁까지 먹고 가지. 맛있는 코다리 냉면집 있어.” 여러 번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어려운 선생님 말씀이니 조금씩 난감해하면서도 재빠르게 찻잔을 정리하고 일어났다. 나라도 좀 더 있다 나올까 싶었지만, 대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 밖에 홀로 서 계신 선생님 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엘리베이터가 꽉 차도록 서 있는 우리, 넓은 공용 현관에 홀로 서 계신 선생님.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까지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던가. “선생님, 다 좋은데 저러셔서 힘들어. 갈수록 더하시는 것 같애.” 닫히는 시간보다 18층을 내려가는 시간이 더 짧은 것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 말했다. 한두 사람이 이심전심 맞장구치는 눈치였다. 무슨 말이지? 싶었는데 지하철까지 가는 차 안에서 오가는 말로 알아들었다. 선생님 오랜 알고 지낸 사람들 사이에서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편한 제자들을 만나시면 시간이 무한정이라는 것이다. 점심 약속이어도 저녁까지 먹을 생각을 하고 하루를 다 비워두어야 한다고,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이 말했다. 짧은 수다의 여운을 남기고 그들은 지하철역에서 우르르 내렸다.
최 선생님의 오랜 제자도 한 사람이 있고, 나보다 오래 선생님과 알고 지낸 사람도 있다. 표현은 조심스러웠지만, 뒷담화였다. 오래 만나온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선생님의 모습을 알 수도 있겠고, 내 생각과 다를 수 있겠지. 혼자 남은 차 안의 공기가 조금씩 무거워진다. 최 선생님에 대한 내 선망이 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선생님 자신도 늘 말씀하시고 있고. 그분이라고 흠이 없을 수 없는데, 마음이 상한다. 넓은 집에 홀로 남아계실 선생님을 생각하니 내가 다 서글퍼진다. 길은 또 왜 이렇게 막히는 거야. 실시간 빠른 길을 검색하려고 스마트폰을 더듬어 찾았다. 가방 안에서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주머니에도 없고. 신호에 멈춰서 바닥 여기저기를 봐도 찾아지지 않는다. 선생님 댁에 두고 왔나? 전화를 드려봐야... 아니, 전화기가 없지. 차를 돌려야 하나, 싶은데 이미 순환고속도로에 올랐고 이제야 길이 뚫리기 시작이네. 할 수 없다. 일단 집으로! 뭔가 하루를 제대로 망친 느낌이다.
종종 전화기 두고 가구려
다음 날 아침 다시 선생님 댁으로 갔다. 다른 날보다 더 반갑게, 심지어 살짝 들떠서 맞아주시는 선생님 뵙는 게 어쩐지 민망하다. “종종 전화기 두고 가구려. 바쁜 사람 얼굴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 좋네. 하하.” 밝은 표정을 뵈니 내 마음도 가벼워졌다. “선생님 혹시 전화기 숨겨두셨던 거 아녜요? 한 번 더 오게 하시려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모닝커피를 했다. 긴 여름이 드디어 끝난 건지, 아침 바람이 선선하다. 선생님은 예의 그 달달한 삼박자 커피를, 나는 아메리카노를 한 봉지씩 뜯어서 탔다.
우리 집에 들어왔을 때 무슨 향기 안 나? 좋은 냄새 안 나요?
어, 글쎄요.
모르네. 자기가 남겨둔 향을 모르는구먼. 아니, 어제 커피 내리고 갔잖아요. 아까워서 커피 가루를 버리질 못하고 식탁에 두고 잤는데, 아침에 자고 일어나 나왔더니 향이 나더라고. 정 선생이 왜 이 커피 노래를 불렀는지 알겠다니까. 그것참 깔끔해지는 게 커피 향이 입 계속 남아 있더니만. 커피가 커피지, 그럴 줄 몰랐네.
제가 노래를 불렀나요? 하하. 작전 성공이에요. 선생님, 커피를 조금 바꿔보세요. 제가 핸드드립 하는 거 가르쳐 드릴게요.
하이고, 살림도 안 하는데 커피 살림을 차리라고? 됐어요. 한 번 맛본 것으로 족해요.
아니에요. 선생님. 살림까지 안 차리셔도 되고요. 장비도 몇 개 안 되고, 재미도 있으실걸요. 무엇보다 건강에도 좋으시고요. 커피는 제가 로스팅해서 드릴게요. 지금 이 커피는 몸에는 안 좋은 거 아시죠? 선생님 설탕 좀 조심하셔야 하는 거…….
여기 시어머니 하나 또 있네. 잔소리꾼은 우리 아들 하나로 족한데. 프림 커피 마시지 마라, 밀가루 먹지 마라, 운동을 어떻게 해라, 아주 성화예요. 내가 이 나이에 아들 몰래 뭘 숨겨두고 먹게 된다니까. 고맙지 뭐. 내 걱정해서 하는 거니까. 정 선생도요.
그러고 보면 선생님께선 음식에 관한 한 가리는 게 없으신 것 같다. 그 연세에 떡볶이나 피자 같은 것도 좋아하시고. 아, 단지 커피만이 아니라 건강 때문에 분명 금하셔야 할 음식이 있는데도 신경을 안 쓰시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걱정을 더 하게 되는 건가? 물론 나로선 좋다. 함께 식사할 때마다 댁 근처 식당 중 새로운 집을 찾아 데려가 주시곤 한다. 가리는 게 없으시니 다양한 걸 맛보고 좋지만, 식사 전후에 한 줌씩 드시는 약을 보면 또 이래도 되나 싶은 것이다. 수퍼푸드다, 건강보조 식품이다, 먹을거리에 생명줄이 달린 것처럼 사는 노인도 많이 본다. 아침에 토마토 한 개를 반드시 먹어야 하고, 비트 주스를 마셔야 하고, 탄수화물은 끊어야 하며, 오메가3니 글루코사민이니 꼭 챙겨야 할 건강보조식품도 있단다. 주워들은 정보만 가지고도 한참 더 떠들 수 있다. 선생님도 조금 더 신경 쓰셔야 하는 것 아닐까, 아드님의 잔소리에 힘을 보태고 뵐 때마다 식생활 지킴이 역할을 좀 해드릴까.
선생님은 먹을 것을 좋아하세요? 그래 보이시진 않는데….
왜애? 혹시 식탐을 묻는 거유? 돌려 말하는 건가? 허허허, 먹을 것 조심하라고?
(화들짝) 아니요. 히히. 건강 때문에 음식조절들 많이 하잖아요. 선생님은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건강에 관한 관심? 염려? 이런 것 없으세요? 설탕 많이 든 커피 막막 계속 드시고요?
그 말 하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내가 언젠가 말했잖아요. 노인들한텐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묻지 말고 안 아픈 데를 물어보라고. 내 몸 여기저기서 아이고, 아이고, 신음을 해요. 걱정 많이 되지요. 이러다 갑자기 쓰러지면 어쩌나, 걷지도 못하게 되는 것 아닌가. 걱정이 왜 없겠어요? 그런데 먹을 거 조심해봐야 무병장수와 크게 상관도 없다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 상관없기는요!
그래? 그러면 상관있다는 증거를 대 봐. 내가 다방 커피 끊고 정 선생 알려주는 커피 마시면 몇 년 더 살아? 당황하기는! 하하. 재밌는 얘기 하나 해줄까. 로제토 마을이라는 장수마을이 있었어요. 아, 지어낸 얘기 아니고 리얼리티. 1960년대 미국 펜실베니아에 있는 로제토라는 마을이에요. 이 지역에서 오래도록 일했던 의사 한 사람이 있었어요. 이름이 기억이 안 나네. 강의 때 여러 번 했던 얘긴데도. 아무튼, 65세 미만의 지역 주민 중에 심장병 앓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발견해요. 이유를 찾다가 연구를 시작했는데, 환경이 비슷한 주변 지역 사회와 비교해보니 이 지역 주민의 사망률이 35퍼센트나 낮았던 거예요. 그 원인이 유전자 때문은 당연히 아니고, 식단은 더더욱 아니었대요. 왜냐하면, 로제토 주민들은 설탕이 든 간식거리, 고기 기름에 요리한 소시지 같은 것을 유난히 즐기는 데다 직접 포도주를 담가 독한 술도 마시고, 흡연도 하고, 비만도 흔했대요. 여러 해 연구한 결과 건강과 장수의 비밀이 풀렸는데, 허망하게도 ‘남다른 사회성’이라는 거예요.
역사적인 맥락이 있었어요. 이곳은 19세기 말에 이탈리아 로제토 발포르토레 출신 이민자들이 정착한 곳이었어요. 이 사람들이 낯선 곳에 정착해서 건강에 좋다는 지중해식 식단은 잊어버렸는지 몰라도, 특유의 쾌활함과 사회성을 발휘하면 산 거죠. 힘겨운 이민 생활을 하며 이탈리아 전통에 따라 여러 세대가 함께 살고, 주민들끼리도 끈끈했던 거예요. 틈날 때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가족 경조사를 기념한다든가, 크고 작은 자율적 시민 단체를 만들어 소속되어 활동하고, 이웃 간에 사이좋게 지내며 공동체적인 삶을 살았다고 해요. 이게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었던 거지.
아아, 이탈리아 사람들 특유의 유쾌함, 대가족 중심으로 모여 먹고 하는 분위기 뭔지 알 것 같아요. 영화에서 많이 봤어요. 그렇군요…. 아까 1960년이라고 하셨어요? 지금도 그 마을이 여전한가요?
‘로제토 효과’라고 하는데, 이걸 연구하던 다른 의사가 예측했어요. 로제토 주민들이 특유의 공동체적 생활 양식이나 사회성을 잃게 되면 건강상태가 곤두박질쳐 사망률이 다른 미국 마을들과 비슷해질 거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현대화가 진행되면서 다른 지역 사람이 유입되고, 그 정신은 흐려진 거죠. 젊은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 즉 큰 집 멋진 자동차 등 호화로운 생활을 꿈꾸며 마을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오밀조밀한 작은 집에서 살며, 부를 과시하는 법이 없었대요. 그런데 이제 보통의 미국 마을이 된 거예요. 1971년 이 마을에서 55세 미만인 사람이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일이 처음 발생하고, 70년대 말에는 사망률도 다른 지역과 비슷해졌다고 해요. 그러니까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기 위해 한 가지만 하라고 한다면 나는 건강식 대신에 정 선생과 기분 좋은 밥 먹는 걸 선택하겠다 이 말이요! 하하. 그러니까 우리 집에 자주 오라고. 수퍼푸드를 먹고 매일 유산소 운동을 하면 좋겠지. 하지만 뉴스란에서 보는 수퍼푸드 효능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건강에 좋은 것은 사회적 관계예요. 많은 연구 결과들이 그렇게 말해요.
아하, 그러니까 앞으로 쭉 설탕 듬뿍 프리마 듬뿍 든 커피를 계속 드시겠다, 상관하지 마라. 이런 말씀이신 거죠?
하하하, 그렇게 되나? 그러네. 놔두구려. 달달하고 구수한 맛에 커피 마시는 거야. 정 선생 손으로 내리는 스페셜 커피는 인정해 드리리다.
네, 감사드리고. 저도 선생님 건강 비결이 제자들의 존경, 좋은 사회적 관계에 있으시다는 걸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이런! 내가 졌다. 내 무덤을 팠구먼.
진심인데요. 선생님.
이건 데이터일 뿐이고. 건강과 장수를 보장하는 기적의 음식이 따로 없는 것처럼, 사회성 또한 유일한 지표는 아니지요. 그리고 먹는 습관, 관계 맺는 습관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 나이의 몸 상태는 어쩌면 살아온 방식의 결과죠. 그래서 결과로 만족하고 건강을 위한 노력을 안 하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언젠가 내가 했던 말 기억나요? 좋은 노년은 없어요. 좋은 중년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에요. 나이 들수록 한계가 있죠. 한계가 있어요.
한계…. 한계요?
그래요. 나는 사실 복 받은 노인이에요. 아직 찾아주는 제자가 있고, 마음이 딱 맞는 건 아니지만 한 번씩 만나 밥 먹고 수다 떠는 친구들도 있고, 저도 힘든데 반찬 만들어 가져오는 여동생도 있어요. 영양제에 건강보조식품 사다 쌓아 놓는 아들도 있고. 그래도 보통은 늘 혼자 먹는 밥이에요.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먹느냐, 어떻게 먹느냐가 건강과 장수의 비결인 것은 확실히 알고 있는데. 현실은 그저 혼자 먹어야 하는 밥. 이게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요.
아아….
어제만 해도 그래요. 사람들 저녁 먹고 가라는 말을 매정하게 거절하고들 갔잖우. 나는 정 선생은 더 남아서 같이 저녁 먹어줄 줄 알았지. (윙크, 찡긋)
아, 네... 저, 지.... 집에 애들 먹을 걸 안 챙기고 나와서요.
혼밥도 소명이구나
선생님이 진심 섭섭해하시는구나, 당황이 되었다. 함께 하는 사람에게 부담 주지 않고 편하게 해주시는 감각이 탁월하신 분이다.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연세 노인들에게 흔히 볼 수 없는 태도이며 감각이고, 내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제 차 안에서 들은 뒷담화가 다시 떠올랐다. 한쪽에선 부담을 느끼고, 한쪽은 섭섭해하고. 무리한 요구를 받아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과, 밥 한 끼 더 먹고 가라는데 그걸 안 들어준다고 섭섭해하시는 선생님. 평소 같으면 상대 입장을 먼저 헤아리실 분인데, 이해는커녕 섭섭해하시는 모습이 낯설었다. 그리고 알 것도 같다. 혼밥, 정말 싫으시구나. 혼밥이 싫어 한 번이라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상대 배려하는 감각을 이긴 것이다. 시어머니께 자주 듣는 말씀이 있다. “뭘 먹어도 맛이 없다. 음식 해서는 다 버리게 된다. 뭐가 좀 맛있어 보여 사와도 반도 못 먹고 버린다. 혼자 먹는 밥이 맛이 있어야지.” 그 말씀을 나는 “더 자주 와라, 심지어 너희와 같이 살고 싶다.”라고 해석해서 듣고 마음의 짐을 스스로 지곤 한다. 아, 정말 혼밥이 싫고 힘드시구나! 어머님도, 최 선생님도.
아이고, 뭘 그렇게 당황하고 말을 잃어요? 농담인데. 그렇단 얘기요.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먹느냐가 건강을 좌우한다면, 어제 점심 같은 식사로 내 건강 유지하는 거예요. 그러네. 말해놓고 보니, 그럴싸하네. 하하. 맛있는 음식을 ‘맛있지? 맛있네’ 하면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먹는 건 건강도 건강이지만 영혼까지 밝게 하는 것 같아요. 밥 잘 사주는 예쁜 할머니 해주고 얻는 복이에요. 그게 제대로 먹는 거지. 하지만 내 나이, 형편에서 어찌 늘 그걸 식탁을 바랄 수 있겠소.
아아, 그렇군요.
그렇다고 너무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지 말아요. 이러면서도 또 잘 살아. 잘 먹고. 다 사는 방법이 있어. 어쩌면…. 혼자 먹는 밥, 혼자 있는 많은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이 노인의 소명인지도 몰라요.
둘째 아이가 어렸을 적에 고관절 골절로 입원해 계신 제 외할머니를 보며 수수께끼를 만든 적이 있다. “부탁하고, 하고, 해주고, 부탁하는 게 뭐게?” 스핑크스 퀴즈의 아류였다. 정답은 사람. 아기 적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모든 걸 부탁해야 했고, 누나처럼 청소년이 되면 혼자 지하철도 탈고, 모든 걸 하고. 엄마가 되면 아이를 돌보고, 늙은 할머니도 돌보는 ‘해주는’ 존재가 되고, 외할머니처럼 노인이 되면 다시 아기처럼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부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러 버전으로 그 퀴즈를 바꾸기도 했었다. ‘받아먹고, 떠먹고, 떠주고, 다시 받아먹기’는 과정도 인생이다. 언젠가 나도 혼밥하는 생활을 할 수도, 그러다 받아먹는 시간을 살아야 할 수도 있겠구나. 인간의 길이구나! 혼밥의 외로운 시간, 그러다 침대에 누워 받아먹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을 과연 ‘소명’이라 이름하다니! 그렇구나, 노년의 시간에도 소명이 있구나.
휴대폰만 찾아서 바로 나올 계획이었는데, 이른 점심을 함께하고 돌아왔다. 새로 찾아낸 맛집이라며 코다리 냉면집으로 안내하시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 느리고 무겁게 느껴졌다. 2층에 있는 식당이라 나 혼자 같으면 단숨에 걸어서 오를 텐데 엘리베이터를 타야 했다. 선생님은 불쌍하게 보지 말라고 하시지만, 느껴지는 대로 느낄 수밖에 없다. 늘 배우기만 하고, 얻어먹기만 하는 것이 죄송했는데 오늘만큼은 더 당당하고 기쁘게 먹었다. 선생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위해서 기쁘고 맛있게 먹어야 할 단 한 번의 밥상이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 먹느냐가 건강의 관건이라니, 나 역시 주어지는 한 끼 한 끼를 그렇게 먹어야 하지 않겠나. 혼밥을 소명으로 먹어야 하는 날이 오기 전, 오늘 중년의 밥상이 행복해야 하지 않겠나. 매콤하고 새콤한 코다리 냉면의 맛을 충분히 느끼며 맛있게 먹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선생님께 메시지가 하나 와 있다. “집에 왔는데 어제 커피 향이 아직도 힐끗 나네. 정 선생이 남긴 향기 같아요. 고마워요.” 아, 혼자 계신 넓은 거실에 남은 타인의 흔적, 친밀한 타인의 흔적을 느끼시는구나. 원두 찌꺼기의 향이 얼마나 오래 가랴. 그 거실과 식탁이 너무 외롭지 않길…. 생의 노을이 물드는 시간, 쓸쓸하지만 찬란한 한 노인의 소명의 시간에 원두 향보다 깊고 따뜻한 그분의 위로가 함께 하시길.
✿ "엄마, 왜 그래? 안 좋은 일 있어?" 씻고 자러 들어가는 찰나, 쓱 보고도 마음을 읽어내는 현승이가 말했다. "아니이, 일은 무슨 일이 있어? 강의 준비하는 거야." "왜애? 강의 준비가 잘 안 돼?" "아니, 준비 다 했는데... 내일은 강의가 아니라 설교야. 아, 설교가 아니라 늘 하던 강의이긴 한데, 주일 설교 시간에 하려니 좀 다르네. 부담이 많이 돼. (가끔 주일 설교 시간에 초대받아 갈 때가 있는데, 매주 설교 준비로 예민해지는 남편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이다.) 현승아, 자기 전에 기도해줄래? 기도 안 하던 사람이 하면 잘 들어주시는데.... 하하. 기도해 줘." 다음 날 강의 또는 설교를 하며 정말 현승이가 기도했구나, 싶었다. 알 수 없는 위로와 힘이 느껴졌다. 활활 불태우고 돌아온 나를 맞으며 현승이가 말했다. "잘했어? 엄마? 나 진짜로 기도했는데." 네가 진짜로 기도한 걸 엄마는 벌써 안단다!
✿ "그 강의 언제라고 하셨죠? 몇 시예요?" 마음으로 '루디아'라 부르는 분이 있다. 내적 여정 벗님인데, 다른 얘기하다 흘러 나온 내 일정들을 기억하고 가끔 다시 묻곤 하신다. 기도하기 위해서. 새벽기도, 일정한 시간의 향심기도, 화살기도를 일상으로 사는 분이다. "기도하겠습니다!" 닳고 닳은 영적인 인사치레다. 그래서 기도하겠다는 마음이 들어도, 기도하고 있어도 "기도하겠습니다"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진부한 표현에도 진정성이 담긴다는 것을 그 루디아의 말로 안다. 연구소 하며, 내적 여정 안내하며 비틀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내가 나를 믿는 힘이 없어서 그렇다. "오늘 그 강의하시는 날이죠? 새벽에 나리(연구소에서 쓰는 내 별칭)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말씀은 나를 믿는다는 격려로 들린다. 나도 못 믿어주는 나를 믿어준다는 뜻으로 들린다. 루디아의 기도는 믿어준다는 말로 들리는데, 가끔은 주님의 말씀으로도 들린다. 다리에 힘 풀려서 스텝 꼬이는 날에 힘이 되는 기도이다.
✿ 갑작스런 진단과 수술, 그리고 조바심 속에 검사 결과 기다리기. 주중에 교회 집사님 가정에 있었던 일이다. 딸에게 닥친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위기 앞에 어쩔 줄 모르는 부모님과 동일시된 남편이 한 주 내내 초조해 보였다. 목사가 교우를 생각하며 보내는 초조한 시간은 그대로 기도니까. "하나님, 이러시면 안 돼요. 하나님, 정말 이러시면 안 돼요." 내내 그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나도 기도했는데, 나도 집사님 부부와 딸을 위해 기도했는데 남편이 했다는 기도에 눈물이 났다. 남편은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도 강하게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안 된다고 하는 걸 두 번 요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이 좀처럼 하지 않는 표현이라 낯설고, 낯설어서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주일 대표기도 하시는 집사님은 같은 상황을 놓고 "하나님, 제 베프 000 집사의 고통을 보며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기도밖에 할 게 없습니다."라고 하셨다. 한 교회, 같은 공동체라고 하지만 하나라고 느껴지는 일이 많지 않다. 고통 앞에서는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 그저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고통 앞이 아니라, 고통을 마주하고 서서 서로 기도할 때만 그렇다.
✿ 연구소의 여러 프로그램을 줌으로 진행한다. 내적 여정 세미나를 제외하곤 내가 말하는 시간보다 듣는 시간이 더 많다. 글쓰기도 꿈작업도. 가만히 듣고 있는데 울렁거리고, 아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상황이 흔하다. 그럴수록 더 몸과 마음 흐트러지지 않도록 다잡는다. 어디서도 내놓지 못했던 이야기를 글로 써서 낭독하고, 갑자기 떠오른 아픈 경험을 내놓는 분들 앞에서 뭔가 반응해야 할 것 같은 유혹이 늘 있다. 그 유혹은 '내가 당신의 아픔에 공감합니다'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그 끝은 결국 나는 당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좋은 사람입니다, 인 경우가 많다. "똑똑한 사람은 알맞게 옳은 말을 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때맞춰 침묵할 줄 안다." 박노해 시인의 걷는 독서에 나오는 말인데.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단지 똑똑한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그저 텅 빈 시간을 갖는다. 굳이 피드백하지 않으려고. 그러다 보면 말 없음의 여백이 많이 생긴다. 그 아슬아슬한 시간, 언젠가부터 내게는 기도 시간이다. 방금 글을 낭독한 분을 위해, 말씀하신 분을 위해 가만히 기도하게 된다. 하루 그 어떤 기도 시간보다 뱃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간절함으로 기도한다.
✿ C. S. 루이스의 말처럼 최하층 없이 최상층이 설 수 없다. 향심기도를 하고, 관상의 상태를 꿈꾸지만 삶의 구체적 경험 없이 영성의 고매한 경지란 없다. 필요를 구하는 기도, 기도 밖에 할 수 없는 사람들의 기도가 진실하여 아름답다. 새삼 그 아픈 아름다움을 만나고 있다. 기복적 기도, 기복신앙을 혐오하고 미워하며 마음이 냉랭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돌아보면 그때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어떤 의미의 복이든 복을 구하고 있었다. 기복, 祈福, 복을 기원하는 것 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난 주말 어느 교회 청년 리더들에게 '삶과 신앙의 무기력, 기쁨' 같은 것들에 대한 강의를 했다. 강의 마치고 담당 전도사님이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강의에 힘입어 중요한 결정을 했노라고. 기쁘고 충족한 상태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는 상황이 많지 않다. 아프게 통화를 마치고 메시지를 보냈다. 기도하겠다고. 기도하겠다, 는 문자를 치고 있는 순간 이미 기도는 시작되었다. 기도해주세요, 기도할게요,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기도에 돌입한다.
✿ 사진은 우리집 베란다 앞 풍경이다. 집 앞에 저렇듯 교회가 있고, 커어다란 십자가가 치솟아 있다. 앞이 뻥 뚫리고 멀리 산이 보이는 시원한 뷰를 망치는 '옥에 티'라고 생각했다. 전에 명일동 살면서 명성교회 십자가를 얼마나 분열적인 마음으로 바라보았던가. 그때 기억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저렇듯 미학은 고려하지 않은 채 크기와 높이로만 승부하는 십자가일까, 개신교의 민낯 그대로 같다는 생각도 하고. 어느 날 남편이 "늘 옥에 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침대에 누워 저 십자가를 마주했는데 바로 기도하게 되었다"라고 했다. 그 말 듣고 며칠 후, 새벽 일찍 일어나 베란다 앞에 섰는데 동트는 하늘 배경의 십자가가 조금 달리 보였다. 뻥뚫려 거칠 것 없는 뷰의 걸림돌인 것은 맞지만, 눈에 띌 때마다 나도 기도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 이 글을 써서 올리고 카카오톡 열었더니, 세상에 이런 음향 편지가 와 있었다. 이건 그냥 아가 목소리를 입고 온 성령님의 피드백이다. 이 글에 달리는 성령님의 댓글이다. 소리만 올릴 수 없어서, 목소리 주인공 모자 사진에 대고 다시 녹화하여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