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버리는 것 아깝지만, 더 아까운 것은 손이 많이 간 것들이다. 대표적으로 김치. 담근 사람을 알 때는 물론이거니와 어쩌다 한 다리 두 다리 건너온 김치라도 그렇다. 묵은지라는 이름의 배추김치는 시어 꼬부라져도 김치찌개로, 김치찜으로, 활용도가 높은데. 다른 김치들, 특히 무로 만든 김치들은 어쩔 수 없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시판 인스턴트 볶음밥(비비고 차돌 깍두기 볶음밥)을 보고 무김치도 볶음밥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라면을 부르는 김치"라는 이름으로 섞박지 한 통을 얻었다. 라면을 불러 충분히 즐겨보지도 못하고 시어버렸다. 라면은 틀렸고, 스팸을 부르고 그다음 밥을 불러들여 볶음밥이 되었다. 맛있다. 볶음밥 킬러 남편은 먹으면서 운다. "어떡하지? 반 밖에 안 남았어. 여보, 어떡하지? 밥이 자꾸 없어져..." 누가 어디서 담갔는지 모르는 시어버린 섞박지를 마지막 한 조각까지 알뜰하게 먹으려고 한다. 이 김치를 담근 손에 복을 내려주세요, 주님!
전화기 발신자 창에 최 선생님 성함이 떴다. 어쩐 일이시지? 먼저 연락하시는 일이 거의 없으신데. 그것도 문자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를? 하는 생각과 동시에 ‘엇, 오늘 뵙기로 한 날이었던가?’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정 선생, 오는 길이에요?” 벌써 도착할 시간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냐고 하시는 거다. 아, 이 집 나간 정신! 어쩌면 좋단 말인가, 죄송해서 전화기 붙들고 몇 번 절을 하고는 끊었다. 다음에 보자고 하셨으나, 그대로 차를 몰아 선생님 댁으로 갔다. 지난 만남에서 다음 약속을 잡으며 조정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날짜 몇 개를 오가다 잘못 메모해둔 것이다. 그 순간 번쩍 생각날 일이 어쩌자고 그전까지 까마귀 고기였던 것이냐.
헉헉, 선생님, 죄송해요. 선생님 전화를 받는 순간, 딱 생각이 났지 뭐예요. 다이어리에 맨 처음 약속한 날짜를 적어둔 거예요. 일정 조정은 오늘에 맞춰 다 해놓고... 메모는 그대로 두고 그것만 들여다보면서 다음 주라고... 헉헉... 아, 진짜... 죄송해요.
주차장에서 여기까지 뛰면 얼마나 더 빨리 온다고. 이러고 숨을 헐떡거리며... 아휴, 숨 좀 돌리고 얘기해요.
정말. 젊은 것이 이렇게 정신을... 선생님도 실수하지 않으시는데요. 선생님 앞에서 죄송한 말씀인데, 선생님 저 요즘 건망증이 장난 아녜요.
(정색) 아니 자기 건망증인데 왜 나한테 죄송해? 늦어서 죄송한 건 몰라도...
정색하고 말씀하시더니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무셨다. 가볍게 한 말인데, 어느 지점에서 불편하신 거지? 맞다. 따뜻하고 배려 깊으신 분이지만 당신의 감정을 속이지는 않으시는 일이 없다. 불편한 것을 애써 감추지 않는 분이라 차라리 더 편하고 좋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하신 듯하다. 약속을 잊거나 늦은 것으로 화내시는 분이 아니다. 그건 나도 안다.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던 마음이 섭섭함으로, 실망스러움으로. 짧은 시간 만감이 교차했다. 침묵을 깨고 말씀하셨다.
미안해요. 당황하게 해서. 내가 노인이면서 노인 취급 당하는 것은 싫은가 봐. 자존심인가. 선생님 건망증 얘기를 하면 되는 거지. 나를 빗대는 것이 그렇게 들려요. 노인에게 건망증은 당연한 건가? 노인은 무조건 기억도 흐릿하고, 둔하고 그런 존재인가? 말로 하자니 더 치졸하구먼. 노인은 당연히 어떠어떠하다는 선입견 깔린 말들이 싫어요. 흔한 일이니까 보통은 어쩌겠나 싶어서 참고 마는데, 정 선생이 편한가 보네. 버럭,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이고. 아이고, 참! 민망하다, 민망해.
그러고 보니 조금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보기 드문 존경스러운 노인이며 심지어 닮고 싶은 노인이시다. 그것은 무엇보다 당신의 노인 정체성을 편안히 수용하시는 모습 때문이다. 동시에 노인 우대는 거부하곤 하셨다. 말하자면 이런 경우이다. 댁에서 함께 뭘 먹다 주방에 필요한 것을 가지러 가야 할 때가 있다. 당연히 몸이 빠른 내가 벌떡 일어나 가려 하면 극구 말리시며 굳이 당신이 직접 다녀오신다. 사소한 일일 수 있지만, 그런 노인을 많이 접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런데 선생님 무릎이 좋지 않으신 걸 안다. 한 번 일어났다 앉았다 하시는 게 힘겹다는 것을 양가 어머니들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럴 때는 못 이기는 척 경로 우대 카드를 쓰셔도 되는데 말이다. 외부에서 여럿이 만나게 되어도 지하철로 어디든 오시겠다고 한다. 공평하게 중간 지점으로 정하는 것을 주장하곤 하셨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싶었는데 조금 이해가 된다.
마음이 상했나 보네. 노인네가 이래서 힘든 거야. 미안해요, 정 선생. 고깝게 듣지는 말아요.
아, 아니에요. 선생님. 마음 상한 것 없어요. 당황하긴 했는데요 이해가 됐어요. 잠깐 혼자 생각에 빠져 있었어요. 정말 괜찮아요. 헤헤.
괜찮은 거 맞죠? 당황해서 말을 잃었나, 마음이 상해서 할 말이 없는 건가 싶었어요. 괜찮다니 됐고, 시간이 얼마 없으니 교정 본 것 확인해봅시다.
네네, 아휴 다시 죄송해요. 저 정말 요즘 좀 심하다 싶어요. 며칠 전에는요. 택배가 와야 할 게 있는데 안 오는 거예요. 기다리다 기다리다 전화를 했죠. 분명히 한참 전에 보냈다는 거죠. 택배사에도 연락하고 옥신각신했는데... 이게 웬일이에요. 선생님, 글쎄 제가 그걸 고이 베란다에다 모셔둔 거예요. 그런데 어쩜 그렇게 까맣게 생각이 안 나요.
하하하, 꼬시다! 사람이 그런 맛이 있어야지.
아니 웃으실 일이 아니에요. 저 정말 선생님께 상담하고 싶어요. 심각하다니까요. 그리고요. 선생님, 단어가 생각이 안 나요.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요. 몇 년 전에 선배 언니 한 분이요. 말을 하다 말고 거시기, 그 뭐냐, 그거 있잖아... 이러는 걸 가지고 엄청 놀렸거든요. 영민한 언니였어요. 그래서 더 재미졌죠. 그런데 제가 요즘 그렇다니까요. 제가 외우는 데는 기계에 가까웠거든요. 사람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요. 거의 모든 찬송가의 가사를 1절부터 4절까지 다 외웠다고요. 하... 요즘 제가 하는 짓들이 이해가 안 돼요. 선생님, 저 무슨 문제가 있는 것 아닐까요?
문제는 무슨! 그럴 때가 됐지.
그럴 때가 됐다고요? 갱년기 증상인가요? 선생님도 그러셨어요? 선생님은 지금도 기억력이 좋으신데요. 뭘 잊고 그러지 않으시잖아요. 늘 정확하시던데요.
내가 이 수첩을 괜히 손에 붙이고 사는 줄 알우?
아닌 게 아니라 선생님의 가방엔 늘 손바닥만 한 수첩이 들어있다. 전화 통화를 하신 후에, 나하고도 약속을 잡으신 후에는 영락없이 바로 다이어리를 꺼내어 적곤 하신다. 한 바닥의 한 달 일정표에는 상담 스케줄이 빼곡하다. 여백으로 남은 날을 볼펜으로 톡톡 치시며 “이날 어때요?” 하시는 모습은 참 정겹다. 아마 먼 훗날 최 선생님을 떠올린다면 이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이 사람 또 생각이 어디로 가 있어?
엇, 네? 뭐라고 하셨어요? 잠깐 딴생각... 아니 딴생각이 아니고요. 선생님 다이어리 말이에요. 다이어리에 메모하시는 모습이 참 정겹다는 생각했어요. 헤헤.
다이어리? 수첩이지, 수첩. 전화기에 있는 걸 쓰면 편하다고들 하는데 볼펜으로 꾹꾹 눌러 쓰면서 손으로 한 번 더 기억하는 게 좋지. 내가 쓴 글자를 보면서 확인하는 맛이 있지요. 아니 실은 신문물 어려워요. 쓰건 게 편하지.
선생님, 저도 다시 손으로 다이어리를 써야 할까 봐요. 아니면 기억 붙들어 매기 훈련 같은 걸 하든지요.
안심을 시킬 방법이 있는데 해줄까, 조금 더 놀릴까? 하하. 기억과 노화에 관한 논문들이 그러는데, 정 선생 안심하래요. 허허. 분명히 기억 용량이 줄고, 집중시간 짧아지고, 암기력은 떨어지지만, 전반적 인지기능은 오래 유지돼요. 적어도 내 나이에 이 정도 유지할 만큼을 될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선생님은 다르시죠. 저는 선생님처럼 되지 못할 것 같다니까요. 아, 저 오늘 왜 이리 징징거리죠? 하하하. 불안해서 그런 것 같아요.
왜 그러긴 왜 그래? 나도 정 선생 나이 때 그랬다는 얘길 듣고 싶어서 그러지. 하하, 나도 그랬소, 하면 안심이 되겠어요? 재미있는 비유를 읽은 적이 있어요. 노년의 기억력 감퇴와 인지능력의 발달에 대해서요. 그게 지금 딱 맞는 얘기가 되겠네. 그걸 대서양 횡단 비행에 비유하더라고. 비행기는 이륙 후 급하게 고도를 높여야 한대요. 그러고 나서는 한참 일정한 고도를 유지하죠. 착륙하기 전의 활강은 무척 길어요. 대서양 한가운데서 벌써 착륙이 시작되는 것이죠. 막 활강을 시작할 때, 기장이 브레이크를 밟는 것처럼 속도가 줄어드는 것이 느껴진다고 해요. 이때 불안해서 창밖의 대서양을 바라보면서 ‘너무 빨리 내려가는 거 아냐?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50이 그런 나이라고 해요. 활강을 막 시작해서 그렇게 느끼는 거지 실제로 고도는 거의 낮아지지도 않는대요.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낀다는 거예요. 딱 지금 정 선생이 느끼는 불안감 아니야? 하하.
맞아요. 선생님! 벌써? 벌써 이런 정신이면 5년 후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 10년 후에는? 싶은 거죠.
긴 활강의 시작이에요. 서서히 내려가야 하는 것은 맞고, 기억력이 낮아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지. 50부터는 어떤 의미로든 생의 오후, 내려가야 하는 시기니까요. 인지발달의 그래프도 아래로 가겠지. 날 봐요. 서서히 사라진 인지능력이지만 아직 멀쩡하잖우. 물론 생각 안 나도 나는 척, 기억하는 척 잘 감추고 있기는 해요.
꺅, 정말요? 선생님. 하하하.
에이, 괜히 말해줬네. 너무 좋아한다. 2, 30년 서서히 내려가요. 내 나이쯤 되면 이 활강 자체에 익숙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자꾸 얘기하다 보니 나도 선생님 나이 즈음에 비슷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한창 바쁘게 일하고 성취에 매여 있던 때라서 제대로 맞닥뜨리지 못했어요. 그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는나보다. 기억나는 척, 알고 있는 척하면서 정신없이 살았죠. 지금 정 선생처럼 천진하게 실수를 마주하지도 못했던 것 같네. 일에 취해 내 상태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으니, 이러나 저러나 정신줄 놓은 건 마찬가지구려.
그 말씀이 사실이라면 크게 위안이 돼요. 실은 건망증이 심각한 지금 현재보다는 다가올 미래가 두려워요. 이러다 금방 치매라도 오는 건 아니야, 싶거든요.
말해놓고 아차! 싶었다. ‘치매’는 나보다 선생님께 더 가까운 두려움이 아닐까. 금기어를 내뱉은 느낌이었는데, 조금 전 정색하며 하신 말씀을 이내 떠올려 어설픈 수습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도 활강을 시작한 거고. 선생님도 나도 내리막길에 서 있는 것은 마찬가지. 라고 생각하니 괜한 안절부절이 사라졌다. 아닌 게 아니라 선생님도 편안하게 말씀하셨다.
치매, 두렵지. 확률상 내가 더 가까이에 있죠. 하지만 이것도 너무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나이가 들면서 치매에 걸릴 확률이 증가하지만 65세 이상이던가? 하여튼, 5% 정도 된다고 해요. 다른 병에 걸릴 확률에 비해 특별히 높은 것 아니에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어쩌면 기억력 감소는 그 자체보다 그에 따른 불안, 이러다 치매가 걸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혹여 그래서 우울증에 빠진다면, 불행하게도 우울증은 기억력에 치명적이거든요.
그렇군요! 선생님 뵙고 얼마 안 되어 하신 말씀 기억나요. 주름진 얼굴, 노화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요. 기억력의 감퇴 역시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겠네요.
맞아요. 아까 말한 활강이 시작되는 시점, 갱년기라고들 하죠. 갑작스러운 변화로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심리를 이용한 상술이 얼마나 많게요. 한동안 내 친구들도 치매 예방 시술, 운동, 건강보조식품 정보들 공유하곤 했어요. 하긴 지금도 그러고 있긴 하지만. 아까 말한 기억력에 관한 연구들을 보면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기억력 저하에는 별다른 치료제가 없어요. 기억력 향상이나 치매 예방을 위한 탁월한 훈련도 없고요.
선생님, 어떤 논문이에요? 읽어보고 싶네요.
논문 말고 책을 한 권 읽어요. 네덜란드 심리학 교수던가? 아닌가? 하버드 교수인가? 여하튼 그래요. 제목 묻지 마요. 생각 안 나니까! 하하 참. 암튼 서재에 있어요. 이따 갈 때 가 읽어 봐요. 기억력은 자극받지 않으면 더욱 감퇴하게 되어 있어요. 제일 좋은 자극은 사회적 활동, 인간관계예요. 그러니 내가 정 선생에게 감사하지. 이렇게 나랑 같이 일도 하고, 놀아주고, 예상치 않게 약속을 까먹는 서프라이즈도 해주고... 아이고, 오늘 저녁 맛있는 거 사줘야겠네. 그런 면에서 나는 특별한 복을 누리는 거죠. 혼자 살지만 찾아주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선생님 저는 조금 다른 의미로도 느껴져요.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하고요. 저만 해도 솔직히 좋아서 오는 거고, 제가 얻을 게 있으니까 오는 거죠.
아이고, 기분 좋다! 노인네에게 얻을 게 있다니. 오늘 저녁 진짜 소고기 사줘야겠네.
선생님은 은퇴한 상담심리 교수로서 여든을 넘긴 연세에 아직도 상담 일을 하고 계신다. 상담료가 무료인 경우는 없지만, 상담비를 내담자가 형편에 맞게 정하도록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다. 한 회기에 만 원을 받기도 하신다고. 그걸 알고 놀랐더니 현직에 계실 때 상담료 비싸게 많이 받았다고, 이젠 봉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었다. 사라져가는 기억력, 인지능력에 연연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시는 것이었구나. 그 연세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총기는 여기서 오는 것일까? 선생님도 나도 잠시 말을 잃고 생각에 빠졌다. 거실 창밖 멀리 비행기 한 대가 간다. 아, 공항이 멀지 않구나. 이륙인가, 착륙인가. 방향 감각이 없어서 통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라는 비행기는 착륙을 위한 긴 활강을 시작했다는 것. 오늘 알게 된 확실한 사실이다.
어허허, 저기 비행기 뜬다. 뜨는 거냐, 내려오는 거냐 난 잘 모르겠어. 정 선생 그런데 내가 오늘 잘난 척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내가 말은 이렇게 해도 실제로 그리 의연하지 않아요. 생각은 생각이고 감정은 감정이잖소. 두렵고, 아득한 마음이 늘 있어요. 치매, 두렵지. 여기저기 아플 때는 이러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 짐덩이 되는 것 아닌가, 걱정스럽고요. 언제나 생각보다 가까운 건 감정이니까요. 모를 거예요. 50대 정 선생 나름대로 염려가 있겠지만, 이 나이, 이 몸이 되어봐야 알 수 있는 것도 있죠. 왜 그렇게 봐요? 앞뒤가 다르지? 하하.
그러니까 서, 선생님도 그런 두려움이 있으신 거군요... 아아...
결국, 온다면 어쩌겠어요. 다행이라고 생각되는 건 치매가 치매인 나를 망각하게 하는 것일까?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잖아요. 다만 경험상, 치매의 증상은 억압된 나쁜 기억과 관련이 있다고 느껴져요. 누구는 예쁜 치매, 미운 치매라 부르기도 하더라고. 내 보기엔 나쁜 기억에 집착하고 괜한 불안에 매여 있는 것보다 주어진 오늘 잘 사는 방법밖에 없어요.
아, 선생님. 요양병원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가 그래요. 치매 노인들을 돌보면서 느끼는 것이요, 평생 집착하던 것이 남는구나! 싶대요. 돈, 먹을 것, 비난이나 욕설 같은 것들 말이에요.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휴우, 정 선생. 이 얘기 그만합시다. 뭐 좋은 얘기라고….
익숙하고도 낯선 예의 그 쓸쓸한 표정과 함께 입을 다무셨다. 그 표정을 지으실 때마다 박완서 선생의 노년을 주제로 한 소설 제목 ‘너무도 쓸쓸한 당신’이란 말이 떠오른다. 어떻게도 가닿을 수 없는 선생님만의 세계 같이 느껴진다. 언젠가 내 몫이 되겠지.
아, 참! 지난번에 양평 갔다 올 때 틀어준 노래 하숙생 말이어요. 덕분에 노래 찾는 법을 알게 되어 요즘 젊을 때 좋아했던 노래를 잘 찾아 듣고 있네.
히히, 다행이에요. 그런데요. 선생님, 저희 음악치료 하다 보면요, 음악 선호도 파악이 중요하거든요. 음악 선호도에서 나이가 들수록 가장 좋아하는 음악이 세대 음악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2, 30대 때 유행했던 노래를 가장 좋아한대요. 선생님도 그러신 건가요?
오, 그래? 음악도 그렇구나! 내가 아까 말했던 책에서 ‘망각의 역현상 효과’라는 말이 나와요. 나이가 들며 기억력이 현저하게 감소하는데, 오래된 기억들은 더 또렷해지는 현상. 그게 주로 20대 기억이라는 거죠. 가령 노년에 쓴 자서전들을 모아 비교해보니, 20대 어간의 분량이 제일 많다는 거지. 실은 이게 연구까지 갈 필요가 없는 게 내가 실감하는 거예요. 고독하고 쓸쓸하니까 인생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던 시절을 불러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기억이라는 게 의식의 작용 같지만 실은 무의식적 작용이 크거든요. 왜, 불쑥 떠오르는 기억이 있잖아요. 기억 저편에 있던 장면이 갑자기 생각난다던가.
선생님, 그러면 젊은 시절 행복했던 기억만 떠오르세요?
아니지. 건망증이 심해서 다 까먹어도 나쁜 기억, 아팠던 기억은 잘 잊히지 않잖아요. 잊고 싶은 건 오히려 더 생생하지. 억울한 것, 섭섭한 것도 생각하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지요. 그럴 때 내가 쓰는 방법은 ‘감사 요법’이에요. 아까 말했 듯 치매 걸리더라도 예쁜 치매로 가자는 노력이에요. 좋은 기억은 좋아서 감사하고, 억울하고 아팠던 일들이 떠오르면 그런 날을 지내고도 이만큼 사람 꼴로 사는 것에 대해 감사하고요. 독일의 신학자 본회퍼 알아요? 나치에 항거하다 젊은 날 순교했던... 순교 직전에 쓴 편지 내용이라던가? 언제 어느 책에서 읽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안 난다니까, 이렇게! 허허허. 짧은 이 말이 강렬하게 남아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감사한 마음으로 씩씩하게 걷는다.” 내가 믿음이 한참 부족한 사람이지만.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씩씩하게 살아야지 싶어요.오늘 괴팍한 노인네 성질 못 숨겨서 미안하기도 한데 덕분에 여러 생각 해보게 됐네요. 고마워요. 앞으로도 가끔 약속 까먹어줘. 허허.
빌려주신 책은 네덜란드 호로닝언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다우어 드라이스마(Douwe Draaisma)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공장>이다.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기억, 시간, 나이. 딱 오늘 선생님과 나눈 대화의 주제다. 짧고도 긴 대화 중 세 개의 그물에 결국 걸린 것은 ‘감사’다. 감사!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로 감사의 노래를 부르는 기나긴 활강의 시간을 위하여! 최 선생님의, 나의, 나의 벗들의!
책이 나왔다. 그리고 책이 왔다. 현승이가 현관 앞에서 발견하여 들고 들어와서는 "엄마, 책인가 봐!" 바로 커터칼을 들고 달려든다. "잠깐! 청소 다 하고 엄마가 개봉할게." 청소기 돌리며, 걸레질하며, 씻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가라앉히고 말고 할 것도 없는데,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했다. 열었다. 출간 과정 구비구비 눈물인데, 이번엔 그냥 예뻐서 눈물이 났다. 책이 예뻐서 눈물이 났다.
채윤이는 온라인 서점에 따로 한 권을 주문하겠다고 한다. 그러고 싶단다. 책이 온 다음 날 아침, 자고 일어난 채윤이 눈이 퉁퉁 부어있다. 간밤에 엄마 책을 다 읽고 잤다고. 앞으로 다시는 못 읽을 것 같다고. 그런데 나중에 엄마가 이 세상에 없을 때, 이 책이 위안이 될 것 같단다. "엄마, 이 책 아무도... 아니, 아무나 읽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나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 그게 내 마음이다. 맨 얼굴로 드러낸 내 부끄러움, 우리 엄마의 부끄러움을 아무나에게 읽히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나만의 부끄러움이면 괜찮겠는데, 허락받지 못하고 쓴 엄마 이야기라 자꾸 이렇게 안절부절인 것 같다. 그렇구나! 이전의 출간 때와 다른 이 좌불안석은 이거였구나. 마지막 교정 원고를 받았을 때, 추천사를 받았을 때, 책을 받았을 때 마음에 울리는 소리는 "엄마, 어떡해. 이제 진짜 나와. 돌이킬 수 없어."였다.
아무나 읽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많이 읽히고 알려졌으면 하는 마음 또한 간절하니 갈피를 잡지 못한다. 아무나 읽었으면 좋겠다. 아무나에게 많이 읽혔으면 좋겠다. 읽은 그 사람이 '아무나'가 아니라 연결되는 '누군가'가 될 수 있을 테니. 책 사진으로 카카오톡 프로필을 바꾸면 그대로 엄마의 품에 안기게 된다. "괜찮여, 엄마 얘기 혀두 괜찮여, 잘혔어." 하는 엄마 목소리로 듣는다.
정호승 시인이 <수선화에게> 하는 말처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릴 일이 아니다. 가끔 하느님도 이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며 수선화를 위로한다. 수선화에게랴. 사람에게, 우리에게, 사람인 시인 자신에게 하는 말이려니. “너만 그런 것 아니야, 모두 외로워." 위안 또는 약간 안도는 된다. 그렇다고 외로움의 크기가 줄어드는 건 아니다.
나는 외로워서 책을 읽었고, 어떤 좋은 책을 혼자 읽을 수밖에 없어서 외로웠다. 포스트잇을 더덕더덕 붙이고 책꽂이에 꽂힌 책들은 외로운 시간과 마음의 흔적이다. 읽은 덕에 쓸 수 있었고, 쓰는 사람인 내가 참 좋으니 외로움은 또 얼마나 고마운 감정이었나. 그럼에도 늘 꿈꾼다. 어떤 좋은 책을 놓고 하염없이 얘기 나눌 사람과 시간을. 꿈만 꿨지 언제 그런 날 오겠나 싶어 다시 외롭다. 그러면 또 깊은 밤, 이른 새벽 혼자 읽는다.
지도자 과정의 H선생님이 첫 시간에 그런 말을 했다.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은 책을 안 읽고, 책을 함께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교회를 안 다니고..." 그 아쉬움을 지도자 과정에서 채울 수 있다는 기대로 좋다는 말이었다. 그 말에 나는 또 얼마나 좋았는지!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IVP. 1000 페이지 넘는 저 책 열 권을 쌓아두고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4월, 지도자 과정 개강 이후 출간되었는데, 필독서와 과제를 바꿀까 싶도록 마음이 흔들렸다. '자아'로 씨름하고, 그리스도 안의 자아를 체험적으로 만남으로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과정이 아닌가. 42인의 자기를 찾는 여정 이야기라니. "하나님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살아낸 42 가지 이야기라니. 아브라함,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노르위치의 줄리언, 장 칼뱅, 아빌라의 테레사, 잔느 귀용 부인에 심지어 C. S., 플래너리 오코너를 포한한 42인이라니!
이미 정해놓은 커리큘럼을 바꾸지는 못하고, 책을 소개했다. 어쨌든 함께 사두기로 하고 단체로 구입하여 내년을 기약한다. 과정 마치고 후속 모임으로 함께 읽으면 좋겠다 싶다. 한 분 한 분의 내적 여정 선배님 42인을 만나는 지도자 과정 후속 모임, 생각만 해도 좋다.
두어 주 읽지도 쓰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시간을 보냈다. 드라마를 보고, 봤던 드라마를 또 보고, 우주를 나는 스마트폰 게임을 다운로드하여 '피융 피융' 하며 놀았다. 오늘에야 다시 정좌다. 마음이 자리를 찾아 앉으니 책이 손에 잡힌다. 마음 잡고 다시 손에 잡은 책이다. 함께 읽기를 꿈꾼다면 혼자 잘 읽어야 한다. 혼자 읽기로 행복해야 함께 읽기가 풍성해진다.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에는 외로움조차 얼씬거리지 않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외로운 덕에 사람 꼴 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마음 푹 놓고 외롭기로 한다. 외로운 독서를 누리기로 한다. 실은 외롭지 않다. 42인 선생님들께서 나 좀 만나 달라,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대관령 국민의 숲을 걸었다. 비 예보가 있다. 차에 우산이 없었고, 있다 해도 우산을 들고 들어가진 않았을 것.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땅바닥을 보면 알 수 있다. 해가 들었다 났다 하면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그림자 그림이 예술이었다. 가다 말고 가만히 카메라 드리우고 서있어 보았다. 작품이 나타났다. 1분 25초짜리 영상 안에 하늘, 해, 구름, 나무, 바람이 다 들어있다. 가만히 서 있었는데, 숨만 쉬며 서 있었는데 이렇게 멋진 선물을 받았다.
산악인 엄홍길 씨 인터뷰에서 들은 말이다. "산이 받아줘야 한다" 산을 정복하기 보다는 "받아달라, 받아달라"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등반을 한다는 얘기였던 것 같다. 산이 받아준다. 그 느낌을 알 것 같다. 산이 받아주고, 숲이 안아주는 느낌. 이래저래 마음을 못 잡고 드라마 정주행으로 다스리고 있는데, 남편이 '어디 하루 가자'는 말을 하루 전에 했다. 강의 중 쉬는 시간에 숙소 예약을 했다. '어디 하루'의 유일한 조건은 숲이었다. 산에 안겨 하룻밤 자고 오는 것.
의도한 바는 아닌데, 찍고 찍힌 사진을 보니 숲에 안긴 느낌이 여럿이다. 대관령 어느 목장의 숲길, 국민의 숲, 월정사 전나무 숲에 이렇게 저렇게 스며들었다. 안겼다 해도 좋고 스며들었다는 것도 맞다. 그분의 숨결을 느끼는 것이,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이렇듯 가까운 일이다. 자연 안에서 가만히 숨을 쉬고 있으면 그분에게 스며들거나 그분이 내게 스며드신다. 산에 안겨 하룻밤 보내고 싶었던 것은, 숲에 안기고 싶었던 것은 그분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흰꽃이 고개를 푹 숙이고 피어 있었다. 처음 보는 꽃이다. '함박꽃나무'란다. 이름을 듣고 보니 꽃 모양 생긴 것이 함박꽃 같다. 함박꽃나무, 함박꽃나무. 불러줄 이름 하나를 익혔다. 초록잎에 가려서 눈에 잘 띄지도 않는 함박꽃나무의 꽃이다. 저러고 조용히 피어 고요하게 제 시간을 살겠지. 그 숲에 누가 있으나 없으나, 누가 봐주거나 말거나 제 존재를 꽃피우겠지. 숲에 스며 피고 질 함박꽃나무의 꽃. '숲며들다' 숲 안내도에서 스쳐 지나듯 본 말이다. 숲며들다, 숲며들다, 참 좋다!
매주 목요일 연구소 지도자 과정이 있다. 내 기도와 공부와 열정의 에너지는 이 시간을 중심으로 돈다. 일주일은 목요일을 중심으로 돌고, 2021년은 '상처 입은 치유자 2기'로 기억될 것이다. 연구소는 늘 공간 문제가 숙제이다. 미사 나음터가 베이스캠프인데, 많은 사람 모을 수가 없다. 사람이 와도 대기시켜야 하고, 돌려보내야 하는 형국이지만. 큰 문제라고 보진 않는다. 꼭 필요한 사람은 결국 어떻게든 찾아오고, 연결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도자 과정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고민이 깊어졌다. 고민 끝에 우리 교회 예배당에서 모이는 것으로 극적 해결점이 찾아졌다. 마침 우리 교회는 장소를 옮겼는데 공간 구획이며, 창밖의 뷰며, 무엇보다 교회당 구석구석에 닿은 교우들의 손길로 아름다운 공간이 되었다. 잠시라도 비워두기 아까운 곳인데, 모임 장소로 확정되었다. 수도권 전역에서 오는 길들이 멀어서 그렇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곳이다.
지난 모임이었다. 제일 먼저 도착하여 모임방 문을 열었는데, 이 무슨 손길! 테이블마다 꽃이 놓여 있는 것이다. 청년부 시절 설교에서 예화로 들은 것이 잊히지 않는다. 어느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누군가 청소하고 정리한 흔적이 느껴졌고, 긴 설명 필요 없이 공간이 그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 이런 얘기였다. 그리고 아마 아래 토마스 아 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에 나오는 말이 인용되었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이 문구를 가슴에 새겼다. 집 책상에 앞에, 직장 책상 유리에 끼워두고 늘 읽었다. 인정과 칭찬에의 집착이 강하고, 보이는 모습에 연연하는 나를 한 번씩 멈춰 세우는 말씀이었다. 테이블에 꽂힌 꽃을 보고 그 시절 설교와 저 문구가 생각났다. 도대체 누가?라는 질문과 함께 한 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지도 못하는 이들을 위해, 누가 알아주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고, 조용히 이래 놓으실 분. 별 거 아니에요. 마침 꽃이 있고, 시간도 있어서 그랬어요. 하실 분.
정말 마음이 환해졌나보다. 사진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카메라를 보며 지은 설정 웃음이긴 하지만, 설정된 웃음도 마음이 좋을 때와 아닐 때가 다르다. 사진을 본 남편, 채윤이가 좋아했다. 심지어 연구소의 그림 집단 여정인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에 참가한 벗이며 친척인 혜경이 그림을 그려 보내왔다. 사진에서 기쁨이 보였다고. 꽃을 가져다 놓은 집사님은 "별일 아닌데" 하실 것이다. 별일 아닌 것이 사랑으로 흘러가는 일이 흔하다. 하고, 그냥 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작은 일들, 미처 '나(ego)'가 담길 새 없이 흩어지는 일들이 좋고 소중하다. 사랑은 준 사람이 아니라 받은 사람의 것이다. "내가 해준 게 얼만데!" '줌'에 방점이 찍힌 것들은 사랑에서 가장 먼 것, 심지어 폭력이 되기 십상이다.
사랑이 없다면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아무 값어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그것이 사랑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해도 풍성한 열매를 맺게 마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이루어놓은 성과보다 그 사람이 얼마만 한 사랑으로 그 일을 했는가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책 제목 ‘슬픔을 쓰는 일’이 요 며칠 자꾸 '슬픔을 내놓는 일'로 읽힌다. 내놓는 일은 언제나 두렵다. 익숙해질 만도 한데, 여전히 그렇다. 출간은, 특히 내게 있어 책을 내는 일은 '사연 팔이'이다. 이것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며, 모든 글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쓴 사람의 사연이 스며들기 마련이니까. 이렇게 잘 알면서도 내놓는 일은 늘 새롭게 감수해야 하는 부끄러움이다.
내적 여정 세미나든 글쓰기나 꿈 작업에서든, 많이 내놓는 사람이 많이 성장한다. 그런 모임에서 내놓아야 할 것은 포장지로 싸고 싸고 또 싸매 뒀던 이야기들이다. 자랑스러운 것을 꽁꽁 싸매 둘 리 없다. 부끄러운 것들이다. 그런 것들은 내놓는 순간 취약해진다. 갑옷 안에 감춘 연한 살이라고 할까, 아니 상처 난 피부 같은 것이다. 말 한마디, 눈길 하나로 더 아파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용기 내어 감수하는 사람들이 치유와 성장을 경험한다. 무수히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다. 먼저 내놓고 많이 망가지는 사람이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된다. 이것을 안다. 잘 안다. 안다고 쉬워지진 않는다. 알기에 다시 내놓지만, 빛나는 보상이 거저 주어지진 않는다. 부끄러움과 아픔을 다시 마주해야 하고, 모르는 발길에 차여야 할 것도 각오해야 한다.
안다고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알기에 가지 않을 수 없다. 내놓고 얻는 소중한 것을 알면서 내놓지 않을 방법이 없다.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내놓지 않을 방법이 없으면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피할 길도 없으니, 이렇듯 징징거리기라도 하려고. 오늘 종일 마지막 교정을 보려고 한다. 일단 펼치면 금방 할 텐데, 첫 페이지 펼치기가 이렇게 어렵다. 조금만 징징거리다가 여자답게, 힘차게, 냉정하게 펼쳐야지.
일단 서문 전체를 내놓는다. (페이스북에는 엊그제 서문 일부를 찔끔 내놓았다.)
<슬픔을 쓰는 일> 서문
쓰인 글 이 책은 쓴 것이 아니라 쓰인 글이다. ‘미친년 글쓰기’라는 원색적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이제 와 이름을 붙이자니 ‘애도 일기’이지, 당시에는 슬퍼하거나 애도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글을 한 편 썼는데, 그러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이다. 쓰고 나면 읽을 힘이 생겼다. 애도에 관한 세상 모든 책을 읽을 기세로 읽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읽기 위해, 하루를 살기 위해 썼다. 이런 날들을 지내며 ‘미친 정신’이 제정신으로, 쓰이던 글이 쓰는 글이 된 것 같다. 그러니까 첫 글이 ‘쓰인’ 글이라면, 장례 후 육 개월 즈음에 쓴 마지막 글은 ‘쓴 글’이다. 탈상이다! 힘을 다해 마지막 문장을 쓰고 강한 의지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니 첫 글과 마지막 글 사이는 쓰인 글과 쓴 글의 그러데이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쓰인 글에서 쓴 글로 바뀌게 된 힘은 사람, 독자에게서 왔다. 나는 어떤 글이든 의식적으로 독자를 세우려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나마 읽을 만한 글이 된다. ‘쓰인’ 글에서는 독자를 상정할 수 없다. 그저 나 자신 쓰는 사람이며 동시에 읽는 사람이었다. 실은 그런 의식조차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랜 습관대로 독자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아니라 아홉 살에 엄마를 잃은 친구, 그리고 중학교 때 엄마를 떠나보낸 제자, 두 여성이 명확하게 내 안에 떠올랐다. 글을 써서 그나마 숨도 쉬고, 밥맛을 느끼게 되니 엄마 잃은 다른 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싶었다. 이 나이에, 글로 애도할 힘이 있는 나도 이렇게 막막한데 친구는, 제자는 어떻게 견뎠을까.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쓴 글 심리치료를 공부하고 아픈 사람들을 만나면서 알게 되었다. 오늘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애도하지 못한 언젠가’에서 기인한 것임을. 그때 충분히 울었어야 했는데 울음을 삼키고 슬픔을 막아버린 탓에 몸과 마음의 숨 쉴 구멍들이 하나둘 막혀버린 것이 오늘의 고통이라는 것을. 과연 재난 같은 슬픔 앞에서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나조차도 글을 쓰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방법으로 애도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을까. 어쩌다 내가 글로 숨을 쉬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은총을 혼자 누릴 수는 없으니 엄마 잃은 누군가를 위해 어떻게든 끝까지 써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쓰인’ 글이 ‘쓰는 글’로 온전히 탈바꿈하는 시점이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의 마음, 엄마 잃은 딸의 마음을 내보여 같은 상실을 경험한 이들과 연결되고 싶어 졌다. 이제라도 내 글을 읽으며 뒤늦은 슬픔을 느끼고, 애도의 공간으로 들어갈 누군가를 상정하니 힘이 났다.
쓰게 한 글 내 슬픔을 누군가의 슬픔에 잇댈 수 있다는 것은, 이미 내 안에 숨 쉴 공간이 생겨났다는 증거다. 연결은 치유의 증거다. 나에게 글쓰기는 치유이자 연결이다. 일찍 아버지 없는 아이가 된 나를, 엄마마저 잃을까 봐 두려움에 볼모 잡힌 나를, 엄마를 잃고 따라 죽고 싶은 나를 오늘의 나, 생명을 사는 나와 이어주는 것이 글이다. 외로움과 자기연민으로 고립된 나와 아픈 이웃을 이어주는 길이다. 글이 내는 길, 글을 쓰다 열린 길이다. 출간이 결정되지 않았다면 하염없이 써야 했을 것이다. 탈고를 핑계 삼아 마지막 글 ‘탈상’을 썼다. 그리고 작정한 바는 없었는데 숙원인 글쓰기 모임을 열었다. 치유 공동체로 일구고 있는 연구소 프로그램으로 여성들의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다. 뚜껑을 열고 보니 나를 위한 애도 작업의 연장이었다. 짧은 강의를 내어주고 투명한 글을 선물로 받았다. 각자의 ‘그때’ 충분히 울고, 충분히 분노하지 못한 기억을 글로 써서 낭독하며 숨 쉴 공간을 만드는 시간이었다. 물론 내게도. 특히 나에게 그러했다. 쓰인 글이 쓴 글이 되고, 이제는 ‘쓰게 한 글’이 길이 되고 있다. 글이 낸 길은 이렇듯 사람들로 가 닿는다. 글이 아니라 글을 읽어주는, 들어주는 사람이 치유인지 모른다.
날아든 글 원고를 다시 읽는 일이 고통스러웠다. 출간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피하고 싶었다. 쓰던 그 순간과 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끝까지 피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더는 미룰 수 없었고, 어느 밤을 디데이로 잡았다. 그날 오후 우편물이 하나 도착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 내가 산다는 것은>이란 제목의 번역물이었다. 작업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친필 엽서와 함께였다. IVP 신현기 (당시) 대표님이 직접 번역하신 것이었다. 앞장에는 이런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이 번역본은 정신실 작가의 저술 참고용에 한하여 사용하도록 초역하여 제공한 것으로, 누구든 어떤 형태로든 전부 혹은 극히 일부라도 복사는 물론 열람할 수 없습니다’. 번역물을 펼치기 전 그 문구에 머물러 한참을 울었다. 공식 문안일 텐데, 공식적 문장에 이렇듯 위로받을 수 있다니. 그리고 그 밤, 그 글을 읽으며 제대로 치르지 못한 엄마의 장례식을 마저 치른 것 같다. 차마 읽지 못했던 내 글을 다시 읽고 탈상, 아니 탈고를 할 수 있었다. 쓰인 글도, 쓴 글도, 쓰게 한 글도 아닌 ‘어떤 글’로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신현기 대표님께 그때 감정에 복받쳐 차마 전하지 못한 감사의 말씀을 뒤늦게 전한다. 편집자 심혜인 간사님 아니었으면 블로그 한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못할 글이었다. 따뜻한 독자로, 날카로운 편집자로 들어주고 다듬어주고 함께 해주셔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출간 과정 자체가 애도 작업의 연장이었는데, 두 분과 IVP 출판사에 깊이 감사드린다.
슬픔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내 곁에서 ‘오늘이 선물’이라고 한결같이 노래해 준 남편 김종필과 채윤 현승에게 사랑과 고마움을 전한다. 아기가 된 엄마를 마지막까지 돌보고 보살폈던 올케 이선영에게 특별한 감사와 미안함을, 매일 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웃게 했던 조카들 수현, 우현, 세현이에게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내 동생 정운형. 나와 똑같은 아버지 상실, 엄마 상실을 겪었지만 나보다 강한 사람으로 서서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 동생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인생의 동지이며 믿음직한 글벗이기도 한 운형아, 고맙다. 마흔다섯 늦은 나이에 나를 낳고, 그리고 또 동생을 낳아준 엄마가 가장 고마운 것 같기도 하고.
김영봉 목사님의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프다>을 비롯한 여러 저서, 박정은 수녀님의 <슬픔을 위한 시간>, 박미라 선생님의 <치유하는 글쓰기>. 일찍이 책으로 만난 좋은 선생님 덕에 애도와 글쓰기에 대해 예습을 할 수 있었다. 세 분 추천사에 미치지 못하는 글의 무게가 부끄럽지만, 그래서 더욱 큰 위로가 된다. 세 분 선생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세 분의 글이 나를 준비시켰듯, 나의 글이 어느 독자에게 닿아 온전히 슬퍼하고 다시 살아 살아낼 힘을 드릴 수 있으면 좋겠다. 부모를 잃은 사람, 언젠가 부모를 잃은 사람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
부장님 같은 표현이지만 "백만 년 만에" 결혼식에 다녀왔다. 조카 결혼식이다. 막내 외삼촌을 뵈었다. 보기 드문 좋은 노인이시고, 좋은 노인이 되시기 전부터 그냥 좋은 외삼촌이었다. 우리 엄마와 제일 마음이 잘 통하던 분이기도 하다. 엄마 노년에 침대에 누워서도 전화로 연결되어 있던 막내 동생이고. 좋은 부모가 계시면 늘 그렇듯, 삼촌의 자녀들끼리도 화목하다. 사촌 언니 오빠들과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신 외삼촌을 발견하고 달려가 인사를 드렸다. 마스크로 가린 얼굴에 눈만 보였다. "삼촌!"하고 달려갔다 얼음이 되고 말았다. 엄마다! 엄마의 눈이다. 어쩌면 그렇게 엄마의 눈이다. "삼촌, 건강하시죠?"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식이 진행되고 식사하는 중에도 힐끗힐끗 삼촌 계신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자꾸 마음이 꿀렁거렸다. 식사 마치고 다시 삼촌께 갔다. 진정이 많이 된 상태다. 삼촌이 그러신다. "신실아, 너는 엄마랑 똑같구나!" 도대체 이 결혼식에 우리 엄마가 몇인 거야?
어느 날이었던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길이었다. 초저녁, 버스에서 내려 터덜터덜 걷는 길. 걷는 건 참 좋은 일이라, 아파트 큰 나무 사이를 걸으니 절로 마음의 생기가 차올랐다. 놀이터 옆을 지나는데, 지나는데... 아하, 말랑말랑한 생명체들 귀여운 만행의 현장 발견. 슬슬 차오르던 생기의 포텐이 터짐! 오동통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자르고 만지고 주무르고 했을, 재잘거렸을 것들이 보이고 들리는 것 같은 잔여물이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게 아름다운 작품인가. 발을 뗄 수 없었다.
어느 큰 교회 강의에 갔다. 소개하신 목사님의 사모님과 아이들이 본당 저 끝에 앉았다. 엄마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더니 강의 마치고 나오는데 이 그림카드를 건네주었다. 사모님 "한테" 쓴 것이고. 의상이 포인트다. 내 여름 강의복이라 할 수 있는 검정 원피스에 흰 재킷을 그대로 살렸고. 내 트레이드마크인 '열정'을 그대로 담아냈다. 어찌나 열정이 넘치는지, 강의하는데 겨드랑이에서 하트가 뿜어져 나온다. '사모' '느낌표' '감사'는 쫌 중요하니 별표. "드림"의 디귿을 뒤집어써주는 미적 감각! 발을 뗄 수 없었다. 다시 돌이켜 이 아름다운 존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오후에 있었던 지도자 과정에서 들은 아픈 이야기로 마음에 고인 슬픔이, 밤에 유튜브 강의라 1500명 본당에 청중 몇 명 앉아 계신 어려운 환경에서 강의하느라 경직된 몸과 마음이, 늦은 밤 빗길 운전하느라 쌓인 피로가 한 방에 풀렸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게 귀엽고 아름다운 작품인가.
참 아름다우신 분들, 참 고마우신 분들. 아이들 여러분들. 아이들이 있는 세상, 아이들이 있어서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총 30시간이 드는 [에니어그램 내적 여정] 여섯 번의 만남으로 총 15시간이 드는 [글쓰기 여정] 역시 6회기, 총 15시간으로 진행되는 [꿈 여정] 피정과 방학 책 나눔까지 두 학기, 총 100시간 넘게 함께 하는 [지도자 과정] 그리고 [그림 집단 여정]과 [커플 세미나], 그리고 [개인 상담]
나음터라 불리는 연구소의 프로그램들이다. 이 모든 과정이 단 한 사람을 위해 시작되었다고 하면 믿어지려나. 한 사람을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고, 지금도 한 사람을 위해 진행한다. "그러면 저는 이제 어떡해야 해요?" 이런 질문. 에니어그램 1단계를 듣고 다음 걸음을 묻는 분을 위해 2단계 강의를, 또 심화 강의를, 영성 강의를 하나 씩 열게 된 것이다. 아끼는 제자가 결혼하는데, 정말 잘 살았으면 좋겠는데 해줄 게 없어서 커플 세미나를 열었고, 배웠으니 어디 가서 가르쳐야 할 분들이 생겨나니 지도자 과정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의 모든 것에는 한 사람의 얼굴이 있다. 연구소의 모든 프로그램과 과정은 내게 모두 한 사람의 얼굴이다.
강의에 불려 다니는 것이 편하지, 깃발을 꽂고 사람을 불러 모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람 모으는 일이 제일 어려워요." 이름 걸고 뭔가 하려는 분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사람 모으는 일은 북 치고 장구 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너무 뻔한 말 같지만, 연애하고 싶다고 애인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제 글쓰기 강의 모집 포스팅을 하고 한 시간이 안 되어 마감되었다. 대단한 강좌여서는 아니다. 모집 인원이 6명밖에 안 되는 데다, 전부터 기다리며 대기하는 분들이 계시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아쉬움 가득한 대기 문자가 바로 온다. 대기하신 분 중에는 내가 다 아쉬운 분도 있다. 아, 이분 지금 글쓰기 하시면 딱 좋겠는데! 아쉬워도 마음은 편하다. 이거 안 한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이번이 끝도 아니니까. 같은 패턴으로 같을 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내 눈에 보기에 어떻든 지금 주어진 만남이 최선이다. 지금 이것, 오늘 이것이 최선의 선물이다. 나에게든 당신에게든 그분에게든!
모든 과정이 한 사람의 얼굴이라는 것은 한 프로그램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절실함과 절실함이 만나면 치유와 성장의 포텐이 터지는데,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참 많이 경험했다. (이건 조금 뼈가 아프게 경험했지) 내가 잘해서 잘 되는 것이고, 나만 잘하면 그냥 잘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라 내가 아무리 잘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내가 열심히 잘하는 것이 누군가에겐 아픔과 부담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실패의 기억을 늘 마음에 새기고 있다.
오늘 이 글은 블로그로 연구소 프로그램 정보를 얻으시는, 밴쿠버에 계시는 silver님을 위한 포스팅이다. 글쓰기와 꿈여정 개설할 때마다 시차 계산하며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드리려고. 오래 기다리다 막상 과정을 경험하시면 기대에 미치지 못할 확률이 크지만. 모집하는 여섯 자리 중 한 자리는 일단 silver님을 앉히고 있다는 말씀드리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보고 계시죠? ^^
[나를 지키는 글쓰기]
zoom을 통해 글쓰기 집단 여정을 하다 보면 ‘비대면’이란 표현이 무색해집니다. 진하디 진한 존재의 대면이 됩니다. 랜선을 따라 흐르는 글이 창조성과 치유력의 강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고 나누는 6주의 시간이 이렇게 좋지만, 더 좋은 것은 그 이후입니다. 참가하신 분들이 각자 ‘쓰게 된다는 것’, 무엇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축축하게 늘어진 몸을 일으켜서 겨우겨우 기지개를 펴고, 00이를 먹이고 옷도 잘 입혀서 어린이집도 보내고, 다시 앉아서 이렇게 글을 써.❞
연구소 카페에 올라온 글 한 편에 힘입어 6기 모집 안내에 박차를 가합니다. 새로운 이름 <나를 지키는 글쓰기>로 만나겠습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6월 15일(화) ~ 7월 20일 (화) + 시간 : 오후 8시~10시 30분(6주간) + 인원 : 6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 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4235-8020 + 신청 링크 : https://bit.ly/2SM3dbn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나는 쓰고 말하는 나다 : 치유하는 글쓰기의 힘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에 이름 붙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말하는 몸, 쓰는 몸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여자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생선요리에 대한 거부감이 좀 있다. "나는 생선 비린내에 취약해. 나는 비린내 나는 생선은 잘 못 먹어."라는 생각과 닿는다. 일찌감치 깨달았다. 이것은 주입된 취향이다. 아버지는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싫어했고, 엄마는 아버지의 취향을 성경 말씀처럼 떠받들고 살았다. 어릴 적에 집에서 먹은 유일한 생선은 박대였다. 것도 기름에 굽는 일은 없었다. 석쇠에 끼워 연탄에 굽든지, 조림을 하든지. 아버지가 드시는 유일한 생선이었다. 평안도 출신 아버지가 충청도(전라도에 가까운) 출신 엄마 덕에 그나마 친해진 생선 아닐까. 이유는 단 하나, 비린내가 나지 않아서.
아버지 계실 때도 먹었던가? 자라면서 엄마가 손수 손질한 조기는 참 많이 먹었다. 엄마만의 조기 손질 노하우도 있었고. 무엇보다 채윤 현승이 어릴 적에 엄마 집에 가면 손수 손질한 걸 손수 발라서 아이들 밥 위에 하나 씩 얹어주셨다. 아이들은 조기구이를 좋아한다. 조기구이에 맛을 들인 건 외할머니통해서다. 조기 굽는 냄새와 함께 살을 발라주던 늙은 손, "이쁜내미~ 복덩어리~" 하고 부르는 목소리. 채윤 현승이가 기억했으면 하는 우리 엄마 모습이다. 채윤 현승이가 돌아가시기 몇 년 전이 아니라 조기 구워 밥상 차려주던 그 시절 외할머니를 기억해주면 좋겠다. 환기가 잘 되지 않았던 주택에서, 늙은 엄마가 앞치마를 두르고 조기를 구웠다. 우리 네 식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기구이 냄새와 함께 엄마가 튀어나왔다. "아이고, 울 애기 왔네, 울 애기들 왔어! 채윤아아, 현성아아~ 아고 이쁜내미, 복덩어리!"
어느 저녁 한참 조기를 구워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채윤이인지, 현승이인지가 그랬다. "이 냄새를 맡으면 흑석동이 생각나." 흑석동은 엄마 집인데, 아마 외할머니보다는 외숙모 밥으로 떠올릴 것이다.
화요일에는 오후로, 밤으로 줌 모임이 있는데 강의 틈새 저녁 시간에 바쁘게 반찬을 만드는 나를 본다. 여유 있는 다른 날도 있는데, 굳이 화요일 저녁에 그러고 있다. 화요일 줌 강의는 꿈모임인데, 꿈은 늘 마음 깊은 곳을 건드린다. 어떤 기억이 떠오르고, 그리움이 밀려오고, 모니터 화면의 얼굴 하나하나가 아프게 가슴으로 파고든다. 연결되어 있구나,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구나! 그런 마음으로 끝이 난다. 이렇듯 깊은 곳이 건드려지고 끝나면 다른 무엇이 아니라 고요한 마음으로 저녁 준비를 하게 되는 게 희한하다.
조기를 굽고, 비엔나 소시지 김치 볶음을 하고, 어묵 볶음도 했다. 학교 마치고 운동을 하고 들어온 현승이가 "와, 이건 무슨 냄새? 이 맛있는 냄새... 와아, 와아... 엄마 냄새가 엘리베이터까지 나." 한다. 집안 가득한 비린내, 김치 냄새, 졸은 간장 냄새. 냄새가 난다. 냄새는 난다. <냄새는 난다>는 드라마 <멜로가 체질>을 보고 꽂혀 잠시 덕질을 했던 이병헌 감독의 영화 제목이다. <멜로가 체질>에서도 같은 제목의 노래가 한 곡 나온다. 여기서 냄새는 방귀 냄새다. 생선 굽는 냄새, 방귀 냄새. 생활의 냄새다. 그러고 보면 어느 때부턴가 생선 굽는 비린내를 즐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싶다. 집안 가득한 비린내, 비린내와 함께 미세먼지도 엉켜 떠다니겠지. 이게 삶이지. 살아있는 한 냄새는 난다. 냄새는 나지.
주방을 등지고 앉은 내게 채윤이가 말했다. "엄마, 해가 나오고 있는 거 알아?" 채윤이는 주방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환해진다. 해가 질 시간인데 환해진다. "밥 먹고 한 바퀴 돌고 올까?" "그래" 잠깐 얼굴을 보여준 해가 이내 지고 어두워졌다. 늦은 밤 산책을 나갔다.
일명 '남의 아파트 돌아다니기'로 밤 산책 콘셉트를 정했다. 이 동네, 오래된 여러 단지가 모여 있어서 좋은 점이 있다. 키가 큰 나무들이 많고, 나무 사이사이 새가 많고, 그 나무 아래를 걷는 즐거움이다. 온종일 내린 비에 젖은 큰 나무 사이를 걷는다. 개코 채윤이가 그런다. "아, 이 냄새! 수련회에서 집회 마치고 나왔을 때 나는 냄새. 이 냄새 맡으며 숙소로 가서 치킨 먹을 시간이야! " 나도 아는 그 냄새를 채윤이가 느낀다니! "글치, 글치. 수련회 중에 하루는 꼭 비가 오지. 비가 그친 다음에 나는 숲의 냄새!" 남의 아파트 캄캄한 둘레길을 스마트폰 조명을 의지해서 걷는데 "어, 이건 천로역정 마지막 코스 느낌인데!" 한다.
수련회의 추억을 걷다 넓은 길로 나왔는데, "엄마, 나 쫑알쫑알거려도 돼?" 하더니 대답 필요없는 말을 쏟아낸다. 친구 이야기, 좋은 친구로 지내는 것이 이렇게 어렵고 저렇게 어렵다는 이야기. 문득 내 친구가 떠오른다. 요즘 자꾸 꿈에 등장하는 친구다. 중 3때 만나서 결혼 전까지 심하게 붙어 다녔던 친구. 친구는 엄마가 없고 나는 아버지가 없었다. 나는 그것 하나로 이 친구가 좋았는데, 돌아보면 정말 좋은 친구를 얻은 것이었다. 요즘 꿈에 자꾸 나와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그 친구가 아니었으면 지금의 내가 아니겠구나, 싶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가만히 들어주었고, 머리가 무척 좋았고(천재일지도 모른다. 한때 서로를 천재라고 생각했고,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KFC에서 치킨을 먹다 운 적도 있었네.), 시, 음악, 소설... 나보다 아는 것이 많았고, 무엇보다 나와 치명적으로 다른 것이 자기 과시를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 십 대 중반부터 20대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눈 사람이다. 수련회 가서 뜨거워져 돌아와서도 이 친구와 후기를 나눴다. 교회 안에서 어려운 얘기도 죄다 이 친구에게 쏟아냈다. 교회 안의 언어로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그래서 얻은 유익이 컸겠다. 말이 많지 않은 친구지만, 말의 영향력이 컸다. 둘만의 표현법이 있었고, 둘만의 언어 세계가 있었다. 친구와 끝없는 대화, 주고받는 편지가 준 가장 큰 선물은 교회 죽순이였던 나를 기독교 게토 언어에서 구원한 것 아닐까 싶네. 시험이 끝나는 날이면 광화문 교보문고, 종로서적, 청계천 헌 책방에 가고. 고등학교 때 학교가 갈라졌는데 야자 끝나고 10시 반에 되어 잠깐이라도 얼굴 보고, 호떡 먹고 헤어졌다. 친구가 재수하던 시절에도 재수학원 앞 분식점에서, 음악다방에서 꼬박꼬박 만나 놀았다.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가 달랐는데 시간표를 같이 짰다. 교양과목 시간표를 서로 잘 짜서 걔네 학교 우리 학교 오가며 같이 강의를 들었다. 직장 다닐 때도 일주일에 몇 번씩 만났다. 내가 기타 치고 노래하면 그걸 가만히 앉아서 들어주었다. 같이 옷을 사서 바꿔 입기도 했다. 같이 하지 않은 게 없었던 것 같다. 싸울 법도 한데, 크고 작은 갈등의 기억이 있을 법도 한데. 그런 기억이 없는 것은 정말 특별한 그 친구의 성품 탓이다.
친구네 집에 자주 가서 자곤 했는데. 세 들어 살던 아주머니가 계셨다. 친구가 알려주길 그 아주머니는 친구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고. 나이가 한참 많았는데... 40 정도 되었나? 멋지다! 우리도 그렇게 하자! 40에 편지를 주고받자! 그런 말 했었는데... 40이면 많은 게 아니라는 걸 알았고, 그 40보다 한참 지난 나이가 되었다. 친구가 왜 자꾸 꿈에 나오는지 알 듯하다.
산책 길 끝에 종일 내린 비에 흠뻑 젖은 넝쿨 장미를 만났다. 쫑알쫑알 떠드는 채윤이의 친구들 같다고 느껴졌다. 찬란하다. 제 딴에는 구질구질하다고 느끼겠지만 20대 찬란한 날들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친구들 이야기. 나의 20대도 찬란했었지. 그 친구가 있어서 특별히 찬란했다는 것이 문득 깨달아진다.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