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피자를 만들었다. 밀가루 도우 대신 감자를 얇게 저며 깔아서 감자 피자다. 계란도 넣게 때문에 피자보다는 오믈렛 같은 맛이 난다. 맛있다고, 어떻게 이런 음식을 생각해내고 뚝딱 만들었냔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정해주었다. 정신줄 놓고 들여다보며 내가 어떤 영상에 끌려다녔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요즘은 신서유기 스프링 캠핑 영상과 ‘5분 뚝딱 요리’ 같은 게 상위권이다.
꿈틀대는 파티 본능을 22주년 결혼기념일에 쏟아부었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대놓고 풍선 불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걸 그냥 못 본 척해주기로 하고. 모처럼 설교 없는 주일 전야라는 미명 하에 나는 맛있는 걸 좀 만들고, 그렇게 파티를 했다. 아, 발단은 결혼사진 액자였다. 이번에 이사하면서 꽁꽁 싸매 둔 액자가 나왔는데, 결혼기념일 당일 아침 <탕자의 귀향>이 있던 자리에 한 번 배치해봤다. 모처럼 다들 심심한 터라, 이때다! 싶어 시간과 에너지를 과소비 하게 된 것 같다. 22년 전 사진 앞에 서니 세월이 보인다. 신부와 나를 비교하면 그 세월이 더 잘 보이지만 남편을 희생시키기로. 데코레이션이며 사진이며, 김채윤 감독의 공이 크다. 월요일 아침 "오늘은 뭐하지?" 검색 놀이에 '키조개 삼합'이 걸렸다. 대천해수욕장에 넷이 함께 다녀왔다. 마침 봄방학인 현승이, 곡 작업으로 스트레스가 꽉 찬 채윤이, 월요일엔 일단 놀아야 하는 종필과 신실, 의기투합 했다. 22주년 결혼기념일로 며칠 불태웠다.
세상의 모든 작은 것과 나를 동일시했다. 큰 것 앞에서는 위축되고, 위축되는 것은 모양 빠지니 숙이고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그냥 숙이고 들어가는 것 또한 모양 빠지니 나름대로 필살기가 있다. 큰 것, 큰 사람, 권위자의 마음에 쏙 드는 말과 행동을 한다. 타고난 것 같다. 그냥 된다. 친구나 동료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디 가서 권위자에게 사랑받지 않은 기억이 없다. 나는 나를 아주 작은 존재로 생각한다.
고무신 신고 아장아장 느린 걸음 걸을지라도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나도 예수님 따라갈 테야
내 인생 첫 노래다. 말도 빠르고 노래는 더 빨리 했다니까 제대로 말이 터지기 전부터 저 노래를 불렀는지 모르겠다. 자라면서 교회 어른들이 나를 놀리며 부르는 노래가 저 노래였다. 생애 첫 노래이니 내 인생을 끌고 가는 중요한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늘 울리는 노래이다.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예수님 따라가고 싶은 그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예수님 그분을 따르고 싶다. 그분의 길을 살고 싶다.
국민학교 저학년 국어책에 '해바라기와 나팔꽃' 얘기가 나왔다. 비바람이 치는 어느 밤, 바람에 날려 죽을 것 같은 나팔꽃에게 해바라기가 "내 몸을 감고 붙들고 있어." 이렇게 말했나? 비바람의 무서운 밤이 지나고 둘 다 무사하게 해님을 마주했다는 얘기다.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생애 첫 노래만큼이나 마음 깊은 곳에 심긴 이야기이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해바라기 아닌 나팔꽃에 나를 포갰다. 해바라기 해 따라가듯 예수님 따라가고 싶은데, 해바라기는 내게 너무 큰 존재가 된 것이다.
고3 때 담임 선생님을 좋아했다. 영어 과목을 무지 좋아했는데 영어 선생님이었고, 기타 잘 치고 노래 잘하는 로맨티시스트였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기타 들고 들어와 조광조의 "사랑의 바람"을 불러주셨다. "바람이 불어 눈을 뜨면 텅 빈 내 가슴에 사랑이 솟네. 누구라도 곁에 있으면 사랑해 줄 텐데. 사랑이여" 이런 가사. (외워서 쓴 거임) 수험생 가슴에 불을 질러 공부에 집중을 못하게 하셨다. 일기장에 매일 선생님 얘기를 썼다. 어느 날 선생님이 자신의 이상형을 말했는데, "코스모스 같은 여인"이라고 했다. 중학교 단짝 친구에게 말했더니 "너는 포기해. 너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앉은뱅이꽃이야." 제비꽃 말이다. 네이밍에 대한 인권 감각이 없을 때라 그렇게 불렀다. 제비꽃을 앉은뱅이꽃이라 불렀다. 완전 동의! 나팔꽃보다 더 작은 제비꽃이 나였다.
평생 작은 꽃과 나를 동일시하며 살아왔다. 작은 화분을 키우는 것에 집착했던 이유도 그것이다. 작고 귀여우면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어린아이로 남아 있으면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수년 전 처음 꿈작업을 할 때 '큰 신발' 꿈을 많이 꾸었다. 작은 정수기의 물통이 가득 차서 넘치는 꿈도. 꿈 선생님께서 자신을 믿으라고 하셨다. 270, 280은 돼 보이는 운동화가 등장, 네 신발이니 신어 보라는 꿈을 자꾸 꾸었다. 나는 225 쪼리를 신고 집 근처나 어슬렁거리고 싶었다. 그 쪼리 한 짝을 하수구에 빠트리는 꿈도 있었다. 알아 들었다. 더는 작고 어린 자아로 남을 수 없다는 것을.
키우던 작은 화초가 죄 죽고, 엄마도 돌아가시고, 내 이름의 연구소를 차려 책임을 맡고 지내는 시간이다. 그때 그 꿈이 따스하게 해 주던 말을 살 수밖에 없다. 큰 신발을 신어야 한다. 꿈에 나온 신발은 정체성이다. 더는 누구에게 의존할 수 없다. 다시는 화초를 키우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큰 나무를 키우는 것에 끌렸다. 어제 '마담 정의 안 비밀 정원'이란 제목의 포스팅을 하고 잤는데, 또 의미심장한 꿈을 꾸었다. '큰 대전역'에 내리는 꿈. 대전. 어린 시절의 여러 기억이 응축된 곳이다. 멀고도 가까운 곳. 그냥 대전역이 아니라 '큰 대전역'에 대책 없이 내리는 꿈을 꾸었다.
더는 작은 화초로 살 수 없다. 식탁 옆에 <큰 나무 아래 장미나무>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다. '장미나무'이고 싶지만 '큰 나무'여야 함을 알고 있다. 큰 나무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구입한 그림이지만,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큰 나무로 살아야 하는 때가 왔다는 것을. 어른이 된다는 것은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견디는 것이라고 한다. 동의한다. 모호함, 알 수 없음을 단지 견디는 수동적인 어른에 머무르지 않으려고 한다. 능동적인 어른이 되려고 한다. 능동적 어른은 '기꺼이 져주는 힘'을 가진다. 지는 것이 아니라 져주는 것이다. 져주면서 겪어야 하는 외로움도 기꺼이 견뎌야 한다. 까닭 모를 고통의 실존의 한 가운데서 내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알 수 없음의 안갯속에서 책임 전가와 냉소주의로 도망치지 않음이기도 하다.
큰 나무 아래 장미 나무이고 싶지만 이제 그 반대로 살아야 할 때임을 받아들이려고. 대책은 없지만.
어느새 온통 한 덩어리의 푸르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무의 빛깔이 제각각이었다. 연두, 연두 같은 연보라, 조금 짙은 연두, 일찍 철든 아이처럼 벌써 진해진 초록도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제각각 짙어지더니 신록의 정점에 이른 것 같다. 정점에 이르니 이 나무 저 나무 구분이 안 된다. 양평 가는 강변길을 달린다. 왼편에는 한 덩어리의 신록이 넘실대고, 오른편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강물이 고요하다. 최 선생님을 모시고 가는 드라이브라 설렘 그 이상의 긴장이다. 이 순간 이 풍경이 선생님 마음에 꼭 들면 좋겠다는 간절함에 마른 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평소 같았으면 “와아, 너무 좋다!” 연발하며 설레발쳤을 텐데, 오늘 이 나들이를 도모한 호스트로서 손님의 평가를 기다려야 했다. 말없이 차 창밖을 하염없이 내다보시는 나의 VIP 최 선생님은 말씀이 없으시다. 자동차는 빠르게 달리는데 선생님 앉으신 강 쪽 풍경은 그림처럼 멈춰 있는 듯하다.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기까지 하니 점점 마음이 불편해진다. 내가 무리한 제안을 한 것은 아닐까.
전부터 약속된 날이었는데 어제 갑자기 전화를 해오셨었다. 집에 손녀딸이 와서 지내고 있으니 다음에 보자고 하셨다. 그러겠노라 전화를 끊고는 퍼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모시고 드라이브를 한 번 가면 어떨까. 자연을 그렇게나 사랑하시는 선생님께 내가 좋아하는 두물머리의 한적한 강변 풍경을 보여드리고 싶어졌다. 다시 전화를 드려 댁에서 손녀와 함께 계셔야 할 것이 아니라면 밖에서 뵙는 것은 어떠신가 여쭈었다. “나야 감지덕지 좋지요. 정 선생이 수고스러워서 그렇지. 내가 지하철로 정 선생 근처로 갈 테니 여기까지 올 필요 없어요. 아니야, 여기까지 오면 나는 소풍 같이 안 가요.” 하며 좋아하셨다. 흔히 말하는 ‘벙개’다. 갑작스레 신나는 일을 도모하고 성사된 기쁨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도통 요즘 이런 일이 있어야 말이지.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일이고 만나야 하니 만나는 사람들이니! 그야말로 소풍 가는 날 아이 마음으로 신선한 원두로 내린 커피를 텀블러 두 개에 나눠 담아 준비하고, 차에서 틀 음악까지 선곡해두고 있었다.
두물머리 나들이
잠실역에서 만날 때만 해도 내 마음이 선생님 마음이려니 했다. 이 청명한 날씨에 나들이가 설레시겠지. 운전을 놓으신 지 한참 되셨고, 맘 편한 드라이브는 오랜만이실 거야. “어이구, 늙으니 호강하네! 하나 힘든 거 없어요. 지하철이 다 데려다주는 거 뭐가 힘들어요. 얼마 만에 양평 나들이인가.” 소풍 날 들떠서 나눈 인사 끝에 잠시 조용해진 틈에 조용필의 ‘허공’을 딱 틀었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십팔 번이라며 언급하신 노래다. “어허, 이 사람 센스 하고는!” 하셨다. 음악이 끝나고 뭐라도 말씀하시길 기다리며 달리다 어느새 팔당대교를 넘고 양수리 근처 강변까지 다다른 것이었다. 처음엔 노래로 회한에 잠기신 것인가 싶었는데 그것만은 아닌 듯 점점 더 말씀이 없어지시고, 어쩐지 알 수 없는 무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들떠 있던 마음이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다음에 보자고 하셨는데 굳이 이렇게 나오시게 한 것이 결례가 된 것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분위기를 바꿔볼 요량으로 말문을 열었다.
선생님, 오래도록 제가 서울 동편에 살아서요. 마음만 먹으면 휘리릭 나와서 달리고 걸을 수 있는 곳이거든요. 이렇게 좋은 경치를 2, 30분 만에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 같아요. 언젠가 꼭 선생님 모시고 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아이구야, 내가 정신이 딴 데 가 있었구나! 고마워요, 나도 아주 좋아하는 곳이에요. 친구들과 한 번씩 바람 쐬러 와보기도 했고요. 아, 수종사라고 알아요? 그 앞마당에 서면 남한강 북한강 두 물이 만나는 게 그대로 보인답니다. 거기 참 좋은데, 경사진 길을 올라가야 해서 웬만한 운전 실력자가 아니면 엄두를 못 내죠.
수종사 알지요. 저도요 참 좋아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남편이 운전해서 움직일 때나 가볼 수 있어요. 아, 열심히 연마해서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어 언젠가 선생님 모시고 고고씽 하겠습니다!
하하, 내가 그때까지 살아 있으면. 하이튼 이 사람 참! 사람 기분 좋게 하는 데 뭐 있다니까. 나를 태우고 수종사에 함께 가곤 했던 친구가 있어요. 쾌활하고 밝은 것이 정 선생과 비슷하네. 벌써 5년 됐네요. 그 친구 천국에 간 지가. 아니요, 괜찮아요. 가끔 그립긴 하지만 그리운 것이 어디 하나둘이어야지. 정 선생하고 이쪽에 나오니 그 친구와 다시 만난 기분이네. 늙은이랑 놀아줘서 고마워요. 이렇게 마음 써서 준비했는데, 노인네가 만나자마자 침울해서 마음 쓰였죠? 주책바가지.
아뇨, 선생님. 혹시 손녀 따님과 함께 계셨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들이댔나 싶어요. 무리해서 나오신 건 아닌지...
물론 괜찮아요. 집에서 나오는 데 며느리가 갑자기 왔어요. 집에 와 있는 손녀딸의 에미. 내가 같이 있으면서 중재를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냥 두고 나왔어요. 아직 마음이 몸을 못 따라왔나 봐. 마음이 잠깐 집에 가 있었어요. 이제 마음까지 여기 왔습니다. 내 걱정은 말고 좋은 날씨, 풍경을 맘껏 즐깁시다. 야, 좋다! 하늘이 그림 같네요.
손녀딸 이야기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고, 사람들 없는 한적한 강변에 주차했다. 선생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바라보는 강물은 흐르기보다는 멈춰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번 만나면 서너 시간 대화는 기본이지만 개인 신상에 관해서는 내가 먼저 꺼내지 않는 한 잘 묻지 않으신다. 당신 이야기도 웬만해서는 잘 내놓지 않으신다. 어쩐 일인지 오늘 아침 상황을 설명하시며 손녀딸 이야기를 하셨다. 일종의 가출이라고.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과의 갈등 끝에 집을 나와 선생님 댁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다. 가정적이고 성실한 아드님은 두 딸을 남다르게 공들여 키웠다고 한다. 딸들의 아빠에 대한 마음도 깊어서 보기 드문 부녀지간이라고. 사춘기 어려운 시절에도 엄마와는 부대끼고 갈등이 있었을망정 아빠와는 사이가 좋았다고 하셨다. 결혼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였다. 딸들의 일이라면 ‘No’가 없는 아빠가 결혼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단다. 음악을 전공해 명문대에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유학을 계획하고 있던 딸이다. 유학을 포기하고 돌연 결혼하겠다고 선언을 했고, 이 일로 부녀 사이는 전에 없던 갈등 관계가 되었다. 큰 소리 날 일 없었던 가정이었는데 가족 전체가 폭풍에 휘말린 것이다. 흔히 그렇듯 부모의 반대가 강할수록 남자 친구에 대한 열정은 더 커지고, 그럴수록 부모는 배신감으로 깊이 좌절하게 되고... 딸들에게 관대하기만 했던 아버지는 태도가 바뀌어 박사과정 밟으며 자기 길을 잘 가고 있는 큰딸에게도 결혼을 강요하더니 아예 부모 쪽 인맥으로 두 딸의 결혼 대상자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에 없이 대화가 어긋나고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있단다. 와중에 둘째는 최후통첩 후 집을 나와 할머니 집으로 온 것이다. 어떤 일에도 초연하실 듯한 선생님이다. 하나뿐인 아드님이지만 독립적으로 살고 계신 듯하여 보기가 좋았다. 나도 노인이 되면 자식들과 저렇게 지내야지 싶었다. 따뜻하고 세심하지만 연연하지 않는 태도는 좋은 노인의 표상처럼 느껴지는 최 선생님만의 매력이다. 그런데 평소 선생님답지 않게 쉬 떨쳐내지 못하시는 듯 말씀 끝에는 여운이, 표정에는 무거움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도 선생님께서 할머니시고 어머니시니 다행이고 부럽네요. 손녀 따님이 와서 기댈 할머님이 계시니... 멀리 갈 것 없이 상담가 할머님, 어머님께서 곁에 계시니 얼마나 좋을까요.
평생 상담하고 상담 가르치며 살았지만 내 가족 문제에는 속수무책이에요. 다 큰 자식 앞길에 부모가 이래라저래라 할 일이 아니죠. 성경 말씀대로 결혼은 ‘부모를 떠나’는 것이니 떠나 보내는 것은 부모의 몫이고요. 헌데 이게 말이 쉽지요. 우리 아들 말마따나 고생길이 훤한 결혼은 막아야 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라는데, 떠나보내라는 말이 들리지 않을 거예요. 제 살 도려내는 고통이라는 것을 내가 알지요. 하지만 다 큰 아이는 부모 말을 듣겠어요? 반대할수록 더 뜨거워지는 것이 남녀 간 정인데. 설령 고생길이 훤해도 부모가 개입하여 고생길을 꽃길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부모가 할 수 있는 것은 져주는 것이지요.
그, 그렇군요. 선생님. 저로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 잘 가늠이 되지 않아요. 할 수 있는 일이 져주는 것이라... 아무튼 집안에 선생님 같은 어머니, 할머니, 어른이 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엉뚱하게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다소 냉소적이랄까 자조적인 선생님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아들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되겠죠? 정답이잖아요. 내 아들과 손녀 사이에선 이걸 갖고 들이댈 수가 없어요. 우리 아들의 그런 모습을 처음 봐요. 순한 사람이거든요. 딸들 앞에서 큰 소리 한 번 내는 것을 못 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완고해요. 철벽같아요. 처음엔 나도 반대하는 아들 마음에 수긍이 됐는데, 아니 할 말로 우리 손녀가 아깝단 생각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아들이 자기 논리에 빠져 상황을 최악으로 상상하며 더욱 고집불통이 되네요. 이러다 보니 손녀는 물론이고 식구들 모두 당황하게 되고, 갈수록 실망하게 되는 거지요. 아들이 안쓰럽기도 하고, 밥도 잘 못 먹고 어깨가 축 늘어진 손녀딸을 보면 그 녀석 또한 곁에 두고 보기가 아주 가엾죠. (깊은 한숨)하아... 내가 묻지도 않는 가족사를 떠들어대고 있네요. 정 선생이 청년들 많이 만나지 않아요? 아, 연애 강의도 한다고 했죠? 전문가가 여기 계시네.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예요?
아휴, 선생님 잘 아시면서요. 저라고 무슨 수가 있으려고요. 그런데 아드님이나 손녀를 따로 만나보진 않으셨어요? 선생님 의견을 말씀하시진 않으시나 봐요.
내 의견이 뭐 중요하겠소. 각각 자기 소견이 분명한데. 아들 내외는 그들대로 손녀는 손녀대로 내게 서운한 것 같기도 해요. 특히 아들은 별말은 안 하지만 나마저도 제 편을 들지 않는 것이 내심 야속할 거예요. 그러고 보면.... 내가... 아, 아닙니다. 정 선생 배고프지 않아요? 맛있는 쌈밥집 간다고 했죠? 갑시다. 고마운 우리 정 기사님 점심 잘 대접해드리리다.
섭섭함과 쓸쓸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
식사 전엔 늘 여러 알의 약을 드시곤 하시는데. 오늘따라 약의 양이 많아 보였다. 늘 드시던 약이건만 오늘따라 마음이 쓰였다. 신선한 야채를 좋아하셔서 야심차게 고른 식당인데 내가 그렇게 보아서인지 생야채와 고기가 버거우신 듯 잘 드시지 못하셨다. 나도 덩달아 입이 써서 쌈 야채가 거칠게만 느껴졌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우리 큰애도, 아니 작은 녀석도 언젠가 결혼하겠다며 낯선 어느 녀석을 데려올 날이 있을 텐데. 어릴 적부터 자주 생각했었다. 주변 또래 아이들을 떠올려 상상으로 짝을 본 적이 있다. “그 녀석은 그래서 안 돼... 아, 누구는 제 엄마가 좀 문제야...” 어떤 청년이면 내가 만족할까.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나 성품을 가진 사람이면 어떡하지? 진로와 전공을 선택할 때마다 그러했듯 오직 아이 자신의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자신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보면 더욱 그렇다. 식사를 마치고 강 전망의 카페에 가 앉았다.
정 선생, 노인네 눈치가 많이 뵈지요?
네? 아니에요. 선생님. 눈치는요... 식사도 많이 못하시고 안색이 안 좋으시니 조금 걱정이 될 뿐이에요.
내가 왜 이럴까? 늙어서 좋은 것 중 하나가 웬만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거든요. 좋아서 뛰는 일도 없지만 그만큼 마음이 상하고 두려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요 며칠은 전에 없이 마음이 무겁네요. 그걸 숨길 수 없으니 정 선생이 내 눈치를 살피게 되는 것일 거예요.
눈치라기보다는요... 아, 저... 선생님, 저희 친정엄마나 시어머님 생각해보면 아직도 저희 사는 일에 좋게 말하면 걱정, 사실대로 말하면 잔소리와 간섭이 많으시거든요. 아까 떠나 보내야 한다는 표현하셨는데,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결코 저희를 놔주시지 않는다 싶어요. 물론 연세 드시며 전보다 약해지긴 하셨지만요. 선생님은 그 면에서 경계를 분명히 세우고 계시는 것 같은데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며느님 얘기 가끔 하실 때 우리 어머님 같으시면 벌써 여러 번 섭섭해서 전화하셨겠다 싶은데. 선생님은 예삿일로 여기시더라고요. 그런 선생님을 잘 배우고 싶어요.
정 선생 나한테 점수를 높이 주는 경향이 있어요. 나라고 왜 섭섭한 것이 없겠어요. 없기는! 섭섭한 것뿐이지. 허허. 노인의 길이지요. 어쩌면 소명일지도 몰라요. 섭섭함, 쓸쓸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이요. 아하, 그런 내가 손녀딸 결혼 문제에 대해 개입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여요?
아니요. 오히려 그러시고 싶지 않으셔서 더 힘드신 것 아니에요?
독심술이 있네. 이 사람! 개입하고 싶지 않다기보다는 해도 소용없으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고요. 지켜보는 마음이 아파요. 실은 내가 아들에게 지은 죄가 있어요. 아들이 난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것, 평소답지 않게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내게서 비롯된 거예요. 결국 이 부끄러운 얘기를 하고 마네. 정 선생은 지금의 나를 보면서 선망하지만 젊을 때 나는 참 미숙한 사람이었어요. 자기중심적이었고 세속적이었죠. 그걸 직업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능력까지 있었으니... 아들이 결혼하고자 했던 아가씨가 있었는데 내가 반대했어요. 남편은 허락하는 걸, 내가 끝까지 반대했어요. 아들이 워낙 순종적이기도 하고, 제 엄마 고집을 아니까 결국 포기하고 말았지요. 내가 이리저리 조건 따져서 선을 보게 해 며느리를 봤어요. 글쎄요, 아들이 지금 의식적으로 저러지는 않을 거예요. 그러나 나는 알지요. 뒤늦은, 한참 늦은 나에 대한 반항의 뜻도 있다는 것을요. 아들 생각엔 이럴 때 내가 제 편을 들어야 맞는 거예요. 반대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네가 아직 젊고 세상을 몰라서 그렇지. 결혼하면 반드시 후회한다.’ 이거예요. 가슴이 미어져요. 살면서 잘못한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아들에게 참 미안한 거예요. 돌아보면 정 선생 말마따나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한 인생을 내 맘대로 휘두른 것이죠. 후회하고 말고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고 내가 다르게 하겠어요? 그때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성공을 이루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요. 일, 가정, 아이 교육, 모든 것에서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자신도 있었고요. 예수님을 모르는 인생이니, 눈에 보이는 게 전부였죠. 아들은 착하고 성실해요. 하지만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잘 되는 삶에 대한 집착이 그때의 나와 다르지 않아요. 내가 하는 걸 본대로 제 딸에게 하는 거예요. 제 아빠에게 실망하여 분노하고 눈물짓는 손녀딸을 보면 한없이 미안할 뿐이에요. 정 선생, 나이 먹는 건 이렇게 돌이킬 수 없는 부끄러움을 쌓아 가는 거예요. 나 이런 사람이라고. 그러니 나를 벤치마킹 하겠다느니 배우겠다느니 하는 말은 하덜 말어요.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는 삶
말씀 중간중간 강변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셨다. 말씀을 마치시며 고해성사하는 것 같다며 웃으셨다. 선생님은 당신을 존경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내 마음을 더 잡아당기신다. 당신의 실패담으로 가르치고 일깨우신다. 선생님 말씀대로라면 나이와 함께 쌓아온 ‘부끄러움’을 내어놓으심으로 깨우침을 주시는 것이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나는 반면교사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이 좋아 敎師지. 누군가를 반면교사 삼겠다는 것은 그의 행태로 고통받았다는 뜻이고 상처 입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선생님의 실패담은 반면교사 삼을 것이 아니다. 무얼까, 한 노인의 실패담이 감동으로 오는 이유는. 나도 선생님 따라 말을 멈추고 흐르기보단 그대로 멈춰 반짝거리고 있는 듯 보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 돌려 선생님을 쳐다봤다. 눈물로 촉촉해진 눈가가 강물을 따라 반짝 빛이 났다. ‘눈물도 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책 제목 하나가 툭 마음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연달아 ‘성찰’이란 단어가 따라 나왔다. 삶의 성장이 긍정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경험에 대한 성찰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최 선생님께서 하신 적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가장 성숙한 사람에게 관찰되는 것은 성찰의 능력이더라고 하셨다. 실패담을 말씀하시는데 오히려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오히려 나로 더욱 배우는 태도가 되게 하시는 것은 성찰의 힘이신가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쌓는 것이지만, 잘 늙는다는 것은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카페를 나설 때 나는 한결 가벼워졌다. 내내 뭔가 선생님께 죄송하고 불편했던 마음 사라졌다. 뭔가 깊어지고 충만해졌다고나 할까. 선생님께서도 후련하고 가벼워졌다고 하셨다. 야심 찬 나들이 계획은 거의 수포로 돌아간 느낌이지만 마지막 카드가 하나 남아 있었다. 스마트폰 음악 앱에 저장해둔 노래를 틀고 카 오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어머나! 선생님이 깜짝 놀라셨다. CCM 가수 한웅재 목사님이 부른 ‘하숙생’이다. 이 곡도 언젠가 선생님께서 강의 중에 언급하셨었다. 그때 듣고 검색해서 알게 된 리메이크 연주이다. 느끼함 없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차분한 피아노 반주에 맞춘 노래가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왔다. 선생님과 나란히 앉아서 들으니 가사 하나하나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순례길인 인생,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향방 없는 여행은 아니다. 돌아갈 집이 있는 이 여행이 길지 않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사춘기 아이와 갈등하고 있는 나는 금세 아이 결혼으로 골머리를 싸매는 날이 오겠지. 선생님의 오늘 모습처럼 탓하기보다 성찰하고, 통제하기보다 조용히 기도하는 중년을 살아야겠다.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 없이 흘러서 간다’ 노래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정 선생, 고마워요. 오늘 참 좋았어요. 덕분에 나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아들에게나 누구에게든 잘못한 것들 이제 와 어쩌겠어요. 치러야 할 값이 있다면 이제라도 감당해야겠죠. 아들과 손녀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뿐이지만 회개하는 마음으로 더욱 기도해야겠어요.” 마침 한웅재 목사님의 ‘임계점’이란 찬양이 차 안에 신나게 울려 퍼진다. ‘어제는 지나갔고 내일은 내일의 몫 오늘의 내 삶을 힘껏 디뎌 일어서...’ 더욱 기도하시겠다는 말씀이 힘껏 디뎌 일어서신다는 뜻으로 들렸다. 한 덩어리가 된 신록의 숲과 한결 부드러워진 오후의 빛을 받아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이 여전하다. 성찰의 힘으로 누구보다 강인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쓸쓸한 노인을 따스하게 안아주시는 그분의 품이려니.
작년 12월 이사하며 데려온 제대로 된 화분은 둘이다. 선인장 하나, 작년 생일 선물로 아이들이 사준 콤팩타 하나. 거기에 작은 다육이 두어 개 정도. 남은 것이 삐죽한 선인장이다 보니 화초는 없는 집이 되었다. 이례적인 일이다. 화초, 초록이 없는 우리 집은 떡볶이 없는 우리 집과 견줄만한 일이다. 거실 창 앞에는 늘 작은 초록이들이 줄을 서 있었다. 언제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는 나보다 화분을 더 좋아해." 채윤이 현승이가 질투할 정도로 작은 초록이들에 정성을 들였다. 작년이던가, 그 전이던가. 어느 때부터 한 놈, 두 놈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돌보는 정성이 전보다 못한 것도 아닌데... 싶으면서도 나를 탓했다. 내가 잘 돌보지 못해서 그런 거야. 전염병이라는 것을 많이 늦게 알았다. 가장 아끼던, 아니 가장 크고 든든하던 해피트리 잎이 누렇게 되며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마침 그때 엄마가 낙상하여 병원에 갇혀 있던 때였다. 격리였다. 그나마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오래된 화분 하나를 안방 베란다에 옮겨 '격리' 시키고, 화원에서 사 온 약을 뿌리며 돌보았다. 몇 달 후면 코로나는 끝나고, 이 화분은 회생하여 쌩쌩해질 거야. 그리고 엄마는 회복되어 집에 돌아올 거고.
가장 마음이 쓰인 것은 잎이 거의 남지 않은 해피트리였다. 살 수 있겠나, 싶은 환경에서 쑥쑥 자라면서 사춘기 돌입한 현승이와 키를 견주곤 했었다. 해도 잘 들지 않는 집에서 쑥쑥 자라주어 메마른 내 마음에 큰 위로가 된 녀석이다. 어릴 적에 엄마가 키우던 벤자민 화분이 있었다. 병들어 시들해지면 물을 주고 잎을 닦아주며 기도하던 엄마가 조금 우스웠다. 기도 덕인지 또 쌩쌩하게 살아나 천장에 닿도록 자랐다. 그때 그 벤자민과 비슷한 종류의 해피트리가 어쩐지 엄마 같았다. 거실 오른쪽 구석에 든든하게 서 있었고, 그 옆으로 작은 아이들이 줄을 지어 있으면 꼭 엄마 나무 같기도 했다. 엄마보다 해피트리를 먼저 포기했다. 해피트리는 살릴 수 없지만 안방 베란다에 격리시킨 스파트필름은 꼭 살려내야지. 그 녀석 격리 해제될 때 엄마도 퇴원할 거야. 그때 쯤 진짜 멋진 커다란 해피트리를 하나 살 거야. 멋진 엄마 나무를 다시 들여서 더 튼튼하게 키워야지!
엄마가 떠나고, 그보다 먼저 해피트리의 마지막 잎이 떨어졌다. 몇 개 남지도 않은 화초들은 병이 아니라 이제는 돌봄이 없어서 시들해졌다. 격리되었던 녀석도 어떻게 어떻게 살아나긴 했지만 생기라곤 없고 못생겨 보이기만 했다. 화초가 싫어졌다. 생기없는 애들은 없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에 부러 더 돌보지 않았다. 두고 보기 싫었던 어느 날 작정하고 남편에게 부탁했다. 내 손으로는 못하겠어, 쟤네들 좀 정리해서 버려줘. 안락사시켜버렸다. 그렇게 집안에서 화초가 사라졌고, 작년 12월 이사할 즈음에는 어떤 메마름에도 굴하지 않는 녀석 둘만 남게 되었다. 이제 다시는 화초 키우지 않아야지, 다짐했다. 그러면서 괜히 또 울었다. 결코 시들어 죽지 않을 '나무 그림'을 한 점 샀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큰 나무 아래의 장미나무>. 마음에 쏙 든다. 엄마는 떠났고, 해피트리도 죽었지만 내 마음속 큰 나무는 여전히 든든하다고 믿고 싶었다. 물론 나는 그림 속 장미나무. 큰 나무 그늘에서 자라고 싶은 장미나무.
다시는 화초 기르지 않으리, 했던 다짐을 쓸쩍 바꿨다. 다시는 '작은 화초' 키우지 않으리! 가끔 꽃 살 일이 있어 화원에 가면 잘 생긴 해피트리 없나, 살펴보게 되는 것 어쩔 수 없었다. 그림으로 채워지지 않는 살아있는 큰 나무에 대한 결핍감이 갈수록 커졌다. 지난 3월, 어머니 생신축하 꽃을 사러 갔는데... 이선희가 갑자기 내 귀에 대고 노래를 불렀다.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훤칠한 해피트리를 만났고, 그 인연을 거부하지 않았다. 노트북 끼고 하루 종일 앉아 있는 테이블 바로 옆이 베란다인데, 유리창 하나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이 녀석이 든든하다. 그리고 지난달 어느 날, 남편이 갑자기 카랑코에 몇 개와 노란 카라를 화분 째로 사 왔다. 카라 화분이 쏘아 올린 작은 공! 예쁜데 혼자 두면 너무 외롭잖아. 에라 모르겠다, 비어 굴러다니는 화분을 뱅갈 고무나무와 스파트필름으로 채웠다. 노란 카라도 고이 분갈이해주었다. 베란다에 생기가 그득해졌다. 글을 쓰다, 책을 보다 고개 살짝 돌리면 눈이 행복하고 마음에 생기가 돈다. 채윤이가 "오, 여기는 마담 정의 비밀 정원인가?" 한다. 비밀 아니거든. 안 비밀 정원이야. 아, 안 비밀 정원에 사는 토토로는 비밀이고.
남편 또는 아빠가 1박 2일 콜로키움 참석 차 오랜만에 집을 비운다. 채윤, 현승 두 아이와 각각 나눈 눈빛, 그리고 대화가 어쩌면 그렇게 똑같다. 하아, 이런 본능, 이런 파티 본능. 어릴 적에 엄마가 일주일 씩 기도원 가곤 했는데. 그 주간은 동생이랑 번갈아 가며 격일로 친구 부르고, 합동으로 교회 친구들 불러서 놀고 그랬었지. 김종필 아빠는 가부장적인 아빠도 아니고, 권력 서열로 치면 우리 집에서 그리 높은 편도 아닌데, 아빠가 없는 밤에 왜 셋이 파티를 하고 싶지? 파티를 한다면 더 좋아할 사람이 아빤데... 뭔가 나는 이긴 기분이 들고, "역시! 아이들이 엄마를 친구로 생각해주는 거야!" 좋아서 코 평수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했다. 그런 나를 또 알아챈 현승이가 콧구멍에 찬물을 끼얹어 주었다.
엄마, 그런데... 넷 중에 누구 하나만 없어도 그런 생각이 들어.
엄마가 어디 가도 우리 셋이 그래.
그 말에 기분이 잡치기도 했고, 불금에 채윤이는 작업할 게 많아 늦게 들어온다고 하지, 현승이는 혼자 영화 볼 계획이라고 하지. 떡볶이에 돈까스 올려 셋이 점심으로 먹고 깔끔하게 파티 본능 넣어두기로 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루틴이 있는데, 아침 6시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뭘 하는 줄 알아? 커피 물을 끓인대" 정확히 남편이 이 말을 하고 난 후였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커피를 어떻게 내려 드실까?' 생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커피 물 끓이려고 물을 받아놓은 주전자에 원두 두 스푼을 갖다 넣었다. "어흑, 나 무슨 짓을 한 거야? 정신 나갔어 정말?!" 이름에 부합하는 짓을 심심치 않게 하고 있다. 내 이름 정신失.
다시 생각해 보니 나름 정신에도 길이 있었다.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커피를 어떻게 내려 드실까?' 생각하는 순간 '모카포트'가 떠올랐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라면 모카포트가 아닐까? 바로 이때 모카포트에 커피 분말을 채우는 이미지가 떠올랐고, 나는 눈 앞에 있는 전기 주전자에, 커피 분말 대신 홀빈 원두를 그냥 투입한 것이다. 머릿속 이미지에 충실하게.
그랬구나! 정신줄 놓고 사고 치는 일에도 다 사연이 있구나. 어쩌면 그 바로 전의 열띤 토론에서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예전 젊을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 친구 부모님의 대화(말싸움?)를 생생하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귀가 이따 만 하게 커져서 안방에서 들리는 소리에 끝까지 집중했던 기억. 말복이라 날씨가 덥네, 이렇게 시작하신 것 같다. 말복이 뭐가 덥냐 중복이 더 덥지, 이렇게 받아치셨나? 와아, 말복 중복으로 끝도 없이 논쟁을 하시고 나중에 친구 아버지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시는 거였다. 이렇게 사소한 일로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싸우시다니!!! 두분 서로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친구랑 그렇게 결론냈다.
요즘 나와 남편이 그러고 있다. 일상이다. 교회에 캡슐 커피 기계가 들어온다는 얘기였다. 좋겠다고 하자, 남편이 "나는 그래도 가끔 핸드드립 할 것 같아."라고 말했고 나는 "캡슐 커피도 맛있더라. 나는 돈 생기면 캡슐로 갈아 탈려고." 했다. 남편이 "캡슐 커피도 괜찮긴 한데, 중요한 건 향이 없어." 라길래, "핸드드립 커피도 내릴 때 향이지, 막상 마실 때는 맛이야." "그러니까 그 향 말이야, 핸드드립엔 그 향이 있다고." "아이, 증말! 마실 때는 다 똑같다고오." 막 이렇게 계속 끝도 없이 같은 얘기를 다르게 말하면서 최선을 다해 대화 또는 말싸움을 하고.
마주 앉았던 채윤이가 "엄마는 핸드드립 커피로 에니어그램 책도 썼잖아." 쿨럭, 그러네. 핸드드립 커피는 향이 있지. 이렇게 아침부터 정신 에너지를 다 소비하고 난 사달이다. 그러한 논쟁 후에 커피를 내리려고 물을 끓이다가 에라, 원두를 그냥 주전자에 부어 버린 것. 이렇다. 요즘 모닝 커피가 이렇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제일 먼저 커피 물을 끓이고 말씀 묵상을 하고... 그런 고요하고 멋진 루틴을 사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과 사모님은 사소한 일을 말싸움으로 키우고 최선을 다해서 싸우는 이런 엽기적 애정 행각의 맛을 아실까 싶네.
지도자 과정 2기 개강 날에 찍은(찍힌) 사진을 보고 남편도 채윤이도 좋아했다. 나도 좋다. 거울 앞에 한 분 한 분 이름을 새겨 달아 놓은 가랜드가 예뻐서 '거울 셀카' 찍는 중이다. 두 글자 이름 여섯이 말로 할 수 없이 소중하다. 벌써부터 마음에 담고 있었다. 작년 커리큘럼에 덧붙여 새로운 강의안을 만들고 있다. 신나게 만들고 있다. 이 신나는 기분은 감각적 즐거움보다는 차라리 기도에 가깝다.
아래 붙인 개강 날 후기를 연구소 SNS에 써서 걸었다. 다시 만감이 교차한다. 내 나이 서른여덟, 서른아홉. 신앙 사춘기의 정점에서 만난 에니어그램이다. 십 년을 훌쩍 넘기고 여기까지 왔다. 애써 불러 모으지도 않아도, 어디에선가 신앙하고 고민하던 사람들이 모여든다. 애써 모으지 않을수록 꼭 모여야 할 사람이 모이는 신비라니. '상처, 상처 입은 치유자' 같은 취약한 말로 그물을 쳤는데 걸려든 이들이니 흔하게 만나지는 사람들은 아니다. 첫날 강의에서 했던 말 중 '상처는 존재의 무늬'라는 말을 유난히 마음에 새기는 것 또한 내게 큰 힘이 된다. 힘이 되는 만큼 거룩한 책임감을 느낀다. 책임감이 무겁지만, 그 무게를 힘겹게 견뎌야겠지만, 이 역시 감각적인 고통이 아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표현을 감히 빌자면 '감미로운 괴로움'이다. 깊은 기도로 이끌기 때문이다.
올 한 해, 이 여섯 분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목요일, 매주 목요일에 나눌 강의가 마음과 일상의 축이 될 것이다. 이것을 중심으로 독서하고, 또 책을 사고, 시도 때도 없이 메모하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일용할 양식이 될 것이다. 내게 그러하듯 이 분들에게도 하루 분량의 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
돌아보면 서른여덟, 그때로부터 오늘까지 기적이라곤 없었다. 하루 분량의 공부와, 하루 분량의 아픔으로 여기까지 왔다. 꽤 멀리 온 것도 사실이다. "상처는 존재의 무늬예요. 나의 이야기, 나의 지질한 이야기로부터 그분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영적 존재인 나를 만나는 것은 나의 인간적 경험에서 시작합니다. 이 취약한 과정을 그대로 이웃에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상처 입은 치유자입니다." 라고 한 마디 한 마디에 체험을 실어 말할 수 있으니. 서른여덟, 서른아홉 그때를 생각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네. 어찌 되었든 문제는 일용할 양식이다. 하루 분량의 빵은 읽고 쓰기였다. 아무도 답해주지 못하는 것을 먼저 고민한 저자를 만나 읽고, 읽고 깨달아지는대로 아니 읽을수록 더 알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썼다. 저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새로운 줄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쪽 저쪽의 줄기를 따라 올라갔는데 결국 만나는 곳은 고전이라는 것이 신기할 뿐.
읽고, 쓰고, 기도하는 것을 일용할 양식 삼는 사람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연구소 모든 과정에 담긴 사심인데 말이다.
어디를 보나 연둣빛, 말랑말랑한 생명의 향연입니다. 지도자과정, 말랑한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전날 밤, 한 선생님이 격리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작년 한 해 지내며 돌발 상황이 기회가 되는 것을 경험한 우리. 당황하지 않고, 줌을 통한 대면 비대면 강의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성공적!
미사 나음터까지 먼 거리지만 살짝 기대도 되었다는 선생님은 음악을 크게 틀고 강변북로를 달리며 일주일간의 스트레스를 날려보리라는 상상을 하셨답니다. 그러나 막상 꽉 막힌 길, 하염없는 시간을 보내셨고, “아, 스트레스는 이렇게 날리는 게 아니구나.” 하셨답니다.
계획은 늘 있지만, 계획처럼 되는 일이 없습니다. 계획처럼 되지 않아 새로운 길에 접어들고, 마음같이 되지 않는 인생길 살다 여기까지 왔으니... 교육과정이며 매일 과제, 빡빡하게 채운 계획표로 시작하지만 여섯 분 고유의 여정이 되겠지요. 말하고, 듣고, 쓰고, 읽고, 상징을 담아 만들고, 기도하는 것으로 첫 모임 시작했습니다. 내내 이렇게 말하고 듣고 쓰고 읽고 기도하고 상징을 담아 나만의 의례를 만들어 가는 일 년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모임 후기 일부와 사진 나눠봅니다.
❝교회에서 떠난 것, 그것은 배반이었고, 저는 잔뜩 움츠러들었습니다. 이제야 슬픔의 중심에 가봅니다. 슬픔이 무엇인지 처음으로배웁니다. 외로웠는데, 이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는 이들을 만났네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외면한 채 살아갔던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새로운 여정 가운데 버릴 것은 버리고 담을 것은 담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무기, 능력은 수많은 상처들 뿐입니다. 정신과 치료, 심리상담을 수년간 다니며 지우고만 싶었던 그 상처들이 나를 이곳까지 안내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처는 존재의 무늬다’라는 어제 말씀이 가슴 깊이 위로와 큰 힘이 되었습니다.❞
❝춤에 꽂혔습니다. 손끝과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기쁨. 생각만해도 참 행복했습니다. 모든 벽을 허물고, 가면을 벗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며 함께 춤출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나 다워지자! 있어야 할 자리로 원위치!!'를 마음속에서 외치곤 하는데 이 과정에서 성숙한 나다움을 지닌 나를 만나게 되길 소원해봅니다. '나'스러워지는 시작의 하나로 어제 모임 후 그동안 방치해둔 머리 스타일을 오랜만 단발로 컷트해 보았습니다.❞
❝나는 작년 6월, '상처가 문제'라고 말하는 목사를 떠났다. 그리고 올해 4월, '상처가 무늬'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다. 작가였다가, 이제는 소장님, 신실쌤이 된 사람.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더 많은 사람들. 내가 그 연결망 속으로 들어간 날이었다. 집에 도착하자,남편과 아들이 마중을 나왔다. 남편이 "살아서 돌아왔네."라며 웃었다.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살아서 돌아왔지.' 이제 정말 사는 것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으하, 맛있다. 짜지 않아서 좋네. 어어어... 그런데 맛이... 전에 안 먹어본 맛인데... 새로운 맛이야. 뭔가 바다의 맛과 땅의 맛이 함께 있어. 바다 맛은 멸치고... 뭐지? 이 맛은? 식당에서 강된장 먹으면 일단 짜고... 짜고, 그냥 다 같은 맛인데... 색다르고 맛있어. 아, 뭐지 뭐지?... 이 땅 맛...
이럴 땐 정말 "귀신같은...." (년!까지 붙이면 딱인데! 참자.) 밖에 다른 말이 안 떠오른다. 우렁이 강된장을 했는데, 멸치를 손질하여 잘게 찢어 듬뿍 넣었다. 재료가 부실하다 싶어 냉장고를 뒤지다 저 안쪽에서 표고버섯 분말을 찾았다. 어, 좋은데! 흥분해서 넣다가 어어어... 과다 투입. 그렇다. 땅의 맛, 대지의 맛! "귀신같은...."(년)이 감지한 것은 바로 그 표고버섯의 향이었다. 들짐승 같은 본능적 감각을 장착한 딸, 내겐 과분하도록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이 딸. 주님, 과연 내가 낳았단 말입니까. 이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