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중(中)’은 가운데입니다. 인생 등반 한가운데 서 있으며 내려가는 삶이 시작입니다. 생의 오후로 가는 길목에는 생각지 못한 변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음 같지 않은 몸, 알 수 없이 밀려오는 공허감, 100세 인생이라는 노령화 사회에서 아직도 살아가야 할 기나긴 날들에 대한 불안 같은 것들입니다.
중년의 ‘중(重)’은 무거움이기도 합니다. 중년의 위기는 도전이며 기회입니다. Carl Jung은 자신이 상담에서 만난 중년 이후 내담자의 문제는 모두 ‘영적’인 문제였다고 합니다. 중년의 숲을 지나는 여성들이 함께 모여 쓰고, 읽고, 나눕니다. 글은 잘 못 쓰셔도 됩니다. 나다운 나로 생의 오후를 살고 싶은 ‘중년’을 느끼는 여성(나이 크게 괘념치 않으나 38세 이후 여성 권장) 누구라도 환영합니다.
중년 글쓰기 후에 나눠주신 후기 중 일부입니다.
❝평생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글로 쓰고 풀어놓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수용하고 용납해야 하는 입장에서 늘 살았다. 내게도 수용 받고 싶고, 용납받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끝이라는 게 아쉽다. 길을 걷는데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씀으로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신실샘이 늘 말했던 글쓰기가 가장 주체적 행동이라는 것이 비로소 알아들어졌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1월 14일(목)~2월 25일(목) 오전 9시30분~12시(6주간, 2/11 설날 휴강) + 인원 : 6명(선착순) + 수강료 : 15만원 + 동반자 : 정신실 소장 + 문의 : 010-4235-8020 + 신청 링크 : https://bit.ly/3pH9S1X
✔ 강의와 나눔 내용 :
1강. 생의 오후 시간 : 글로 길어 올리는 영성의 샘물 2강. 나는 나의 기억이다 : 기억으로 쓰기 3강. 나는 나의 감정이다 : 얼어붙은 감정 글로 흘려보내기 4강. 나는 나의 감정이 아니다 : 수치심 떠나 보내기 5강. 나는 나의 몸이다 : 여자의 몸, 글로 드러내기 6강.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다 : 어머니 하나님을 찾아
✔ 매주 글쓰기 과제가 있습니다. 모임 시간마다 바로 쓰고 나누는 글 있습니다. Zoom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모임입니다.
✔ 참고도서 : <내 나이 마흔>, 안셀름 그륀, 성서와 함께 <위쪽으로 떨어지다>, 리처드 로어, 국민북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클라리사 에스테스, 이루
12월 30일, 산타 할아버지 루돌프 할머니가 되어 교회 아기들을 찾았다. 깜짝 방문이었다. 성탄절 이브 계획이었는데 이사로 정신이 없는 데다 '5인 이하 모임 금지' 지침에 주춤했다. 교회 성탄예배를 영상으로 드리는데 아가들이 등장했다. 영상으로 짧게 만나니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고, 뒤늦은 성탄 선물을 전하기로 했다. 실은 무엇보다 질투심의 발로! 영상 예배 드리면서 갑자기 남편이 아기들에게 스타가 되었다. 이제 말을 하기 시작한 녀석이 "목사님 보고싶다"라고 하질 않나, 자기 아빠가 양복을 입고 나서면 "아빠 멋있다, 목사님 같아."라고 한다니 질투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이러다 사모님은 잊히고 말겠네, 위기감이 드는 것. 아가들 꼭 닮은 케이크를 찾아 주문하고, 한 명 한 명에게 카드를 썼다. 한 카드에 남편과 번갈아 한 줄씩 써서 완성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면 이렇게 신이 날까.
예고 없이 들이닥쳐 깜짝 놀라게 하는 맛은 또 얼마나 짜릿한가. 주소만 들고 찾아간 집이라, 제대로 찾은 건가, 현관 앞에서 초인종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긴장하며 눌렀는데 안에서 들리는 소리 "누구세요?.... 어머, 목사님이야!" 우당탕탕탕. 엄마 아빠 어른들은 놀라고 당황하고 "아니, 웬일이세요. 들어오셔서 차라도 한 잔..." 하는데 아가들은 어안이 벙벙. 목욕하러 들어갔다 얼른 내복 한 벌 다시 빼입고 현관으로 달려나온 친구도 있다. ㅎㅎ 사모님 손에 든 케이크에 눈이 간다. 자꾸 눈이 간다. 백일이 안 된 아기와 엄마 뱃속에서 태명으로 존재하는 아기까지 만나고 11시가 다 되어 돌아왔다. 성탄절은 며칠 지났지만 새벽송을 돈 것 같다. 집집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찍고 돌아다닌 터라 꿈을 꾼 것 같기도 하다.
남편 말마따나 나는 아기들만 만나면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간다. 현관에서 짧게 만나고 나오는데 심장이 콩콩 뛴다. 엔돌핀 주사를 한 대 맞고 나오는 느낌이랄까. 아이들은 그렇다. 그냥 생명의 에너지를 흘린다. 20여 년 아이들 음악치료를 했지만, 돌아보면 내가 치유되고 성장하는 시간이었다. 아이들과 오래 함께 한 시간 덕에 사람들이 치유되고 성장하여 온전해질 때 어떤 모습을 띠게 되는지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아이의 모습니다. 영성치유에서는 wonderful child, 신성한 내면 아이라고 한다. 장애 비장애 할 것 없이 아이들은 그냥 생명과 신성의 존재이다. 한 살 두 살 나이 먹고 자라 가며, 지구별에서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흐릿해져 갈 뿐이다. 나도, 연구소를 찾는 사람들도 언젠가는 그런 생명 덩어리였다. 그것이 치유 가능성이다. 생명이고 신비인 아기들이 태어나자마자 따스한 돌봄을 박탈당하는 세상, 얼마나 아픈가. 아기들은 정말 내게 기쁨이고, 가능성이고 아픔이다. 곁에 이렇게 귀여운 아기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생명의 신비를, 세상에 대한 책무감을 일깨우니 말이다. 하룻 저녁 이벤트로 많이 행복했다. 행복한 만큼 기도한다. 우리 아가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안으로 오시되 서른 살의 성인이 아니라 아기로 오신 것. 얼마나 심장 뛰는 경이로움인가. 성탄절 찬송 중 '그 어린 주 예수'가 어릴 적부터 참 좋았다. 특히 3절은.
주 예수 내 곁에 가까이 계셔 그 한없는 사랑 늘 베푸시고 온 세상 아기들 다 품어주사 주 품 안에 안겨 살게 하소서
쉰둘에 대박이 난다는 얘길 들었다. 내 사주가 그렇단다. 임상 심리학 교수로 은퇴하신 선생님께서 취미 삼아 배운 역학으로 사주를 봐주셨다. "너는 진즉에 박사를 했어야 하는데..." 하시다가 "이제라도 해볼까 봐요" 하며 이 학교 저 학교 얘기를 하면 "추천할 곳이 없어." 하셨었다. 그런 얘기 끝에 "정 선생, 생년월일시 알아?" 하시더니 백지에 알 수 없는 한자를 쭉 쓰셨다. 다시 남편 생년월일시를 물으시고 또 이 얘기 저 얘기하시다 "남편하고 아주 잘 맞는구먼! 니가 지금 몇 살이야? 쉰둘에 활짝 펴겠다."라고 하셨다.
쉰둘의 한 해가 간다. '활짝 펴겠다'(정확하게 이 표현도 아니었던 것 같지만)를 내 방식대로 '대박이 난다'로 들었고, 바로 잊었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이후 한동안 4년 단위로 인생이 달라졌다. 직업, 전공, 연애, 실연, 결혼, 출산.... 4년 단위로 인생의 그래프가 꺾였다. 언젠가 한 번 꼽아보니 그랬다. 전공과 직업(본업)이 바뀌고 바뀌는 인생이다. 집도 계속 바뀌어 열두 번째 이사를 했으니 변화무쌍한 인생이다. 가끔 쉰둘에 정말 어떤 내 인생 한 방 터지는 것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쉰둘의 해 2020년, 엄마가 떠났다. 대박 사건이긴 하다. 설마 이걸로 내가 활짝 피어나겠는가. 대박 사건이 터져야 할 쉰둘에 팬더믹 세상을 사느라 '사건'이 일어날 여지가 없어져 버렸다.
사람 떠난 자리에서 비로소 그가 보인다. 엄마 떠난 자리에서 평생 알았던 엄마가 아닌 사람 '이옥금'이 보였다. 엄마 떠난 자리에서 엄마를 다시 보게 된 쉰둘의 한 해였다. 시간도 그럴 것이다. 도통 이름 붙여지지 않을 2020년의 낯선 시간은 지나고 나면 다시 보일 것이다. 그러니 쉰둘 2020년이 대박인지 한 해 두 해 지나며 두고 볼 일이고 아직 몇 시간이 남았으니 기다려 볼 일이다. 안팎으로 쉽지 않았던 2020년을 살아 냈다는 것, 엄마 따라 죽지 않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12월 31일을 맞았다는 것은 장하고 장한 일이다.
읽고 쓰고 기도하며 살아 남았다. 쓰기의 흔적은 블로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엄마 애도 일기는 출간 예정이라 비공개로 전환해 둔 상태) 알라딘 서점 통계를 보니 130여 권의 책을 구매했다. 선물한 책도 있으니 100여 권의 책을 읽었나 보다. 봄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애도'에 관한 책 외에는 읽히지 않았다. 읽기의 정상성을 회복한 후에도 어떤 편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최근 몇 년의 경향이긴 하다. 리처드 로어, 이현주 목사, 앤서니 드 맬로, 이승우, 엔도 슈사쿠, 엘리 위젤 등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 저자들이다. 한 권의 책이 마음에 들면 그 저자의 전작을 읽는 습관이 있다. 올해의 저자는 마사 C. 너스바움과 앤 윌슨 섀프이다. 몇 년 전 『혐오와 수치심』로 만났던 마사 너스바움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만나기 시작했다. 더디게 읽히는 책이지만, 전작 독서가 될 때까지 만남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앤 윌슨 섀프의 『중독 사회』는 여성들의 치유 공동체를 일구며 사는 내 손에 들려진 지침서 같았다.
무엇보다 소중한 만남은 노르위치의 줄리안, 아빌라의 테레사, 시에나의 카타리나 중세 여성 신비가들을 원저로 만난 것이었다. 전에도 한두 번 들어 읽고 밑줄을 긋곤 했지만 만남이라 하긴 어려웠다. 그냥 어려웠다. 뜻은 알아 들었지만 다른 언어로 읽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아침마다 몇 페이지 씩 읽으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딱 하루 분량의 사랑이 한 챕터에 담겨 있었다. 『계시』와 『완덕의 길』은 말라가는 영혼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였다. 무언가 그리워 다시 손에 잡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박완서 선생님과의 새로운 만남이었다. 젊은 날에 좋다고 읽었는데, 쉰둘에 다시 읽으니 책 속에 들어가 앉아 있게 된다.
이렇듯 읽으며 살았고, 또 쓰며 힘을 얻었다.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라는 이름으로 치유 글쓰기 모임을 여러 번 가졌다. 쉰둘에 있을 거라던 대박사건이 이것이었을까. 이 시간은 누구보다 나를 치유하는 시간이 되었다. 엄마 떠난 빈자리에 서서 여성들의 글을 읽다 여성들과 함께 글을 썼다. 텅 빈 엄마의 자리가 꽉 채워진 것 같다. 아, 아니다. 엄마의 빈자리는 여전하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채워진 거지? 가득 찬 상실, 따스하게 이어진 고립이다. 그 자리에서 '어머니 하나님'을 만났다. 아버지이며 동시에 어머니이신, 어머니이며 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만난 덕에 기도 시간이 얼마나 포근해졌는지. 쓰고 말하는 여성들과의 연결 덕에 내 생애 가장 큰 여자인 엄마 떠난 자리에서 '하나님 어머니'를 만났으니 쉰둘, 2020년은 대박이다.
글쓰기 모임 후기들이다. 읽어도 읽어도 좋다.
❝평생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글로 쓰고 풀어놓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수용하고 용납해야 하는 입장에서 늘 살았다. 나도 수용 받고 싶고, 용납받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호칭을 바꾸며 만난 하나님... 그간 만났던 하나님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봤다고 해야 할까? 6주간 글쓰기 역시 그렇다. 나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 것 같다. 처음에 가졌던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이 다 사라진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끝이라는 게 아쉽다. 길을 걷는데 좋은 친구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는 글을 씀으로 비로소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 신실 샘이 늘 말했던 글쓰기가 주체적 행동이라는 것에 대해 알아들어졌다.❞.❞
❝나도 몰랐던 내 상처와 교만으로 정신없이 살았다. 내 안을 박박 긁어오며 살아오다가, 너무 힘들 때 우연처럼 이곳을 만났다. 하나님은 뜻하신 대로 이곳에 불러주신 것 같다. 다른 분들의 글, 용기를 보며 같이 깊이 들어갈 수 있어서 좋았다. 마중물 같은 시간이었다. ❞
❝이렇듯 깊게 털어놓은 게 처음이다. 6주 마치면서 나이스 한 끝을 만날 걸로 기대했다. 중년, 노년 가볍게 준비하겠지 싶었다. 오늘 마지막 시간 하나님 어머니에 대해 쓸 때 가슴에 통증이 왔다. 갑자기 부정적인 것들이 나와 마음이 무겁다.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이 새롭게 뛰어넘어야 할 벽으로 느껴진다. 갑갑하다. 이 벽을 어떻게 허물까, 숙제를 안고 끝나는 것 같다.❞
❝너무 많이 울어서 쑥스럽다. 모임 마치고 나가면 눈과 코가 시뻘개서 딸들이 눈치를 본다. 이 시간에 너무 몰입되어 있었고, 전에 하지 못한 경험을 했다.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하는 시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영역에 첫발을 디딘 것 같은 느낌이다.❞
태어난 지 백일이 안 된 아이가 끙끙 몸을 뒤틀다 뒤집는 걸 보면서 놀라고 행복해 뒤집어졌던 기억. 현승이 성장을 보며 잊을 수 없던 순간이었다. 성장과 발달. 먹이고 씻기고 재웠을 뿐인데 세워 안으면 끄덕끄덕 하던 목에 힘이 들어가고, 천장만 보던 아이가 뒤집고, 혼자 앉고, 배밀이로 기동력을 장착하는 것, '엄므, 엄므'하고 부르는 것.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몸과 마음이 발달하듯 신앙과 영성도 발달단계가 있다. 애 둘 쯤 키우고 나면 말이 조금 늦는다고 안달할 일이 아니구나, 알게 된다. 개인차가 있지만 결국 말을 하고, 응가를 가리게 되더라는.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성장한다.
유아세례 받았던 현승이가 2020년 송년주일에 입교를 했다. 아이의 신앙 발달의 변화가 블로그에 그대로 남아있다. 다섯 살 현승이는 무소부재 하시는 성령님께 총을 쏠까 고민했었다. 열다섯 살 현승이는 차별과 폭력을 그대로 두시는 하나님을 견딜 수 없다고 했다. 열여섯 쯤 되었을 때, 사춘기의 정점에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운운하는 엄마 아빠를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교회를 싫어라 했고, 늘 분노에 차 있었다. "나는 하나님 안 믿어. 아빠가 목사니까 교회는 안 빠지고 가는 거야." 차라리 이렇게 말할 때가 낫다. 말보다 찰나의 눈빛, 그 강렬함이라니! 그 냉소의 눈빛은 좌우에 날이 선 검이 되어 내 마음을 베어냈다. 아이들은 내 말이 아니라 삶을 보고 배운다. 교회를 향한 실망, 그 이상의 절망, 절망 그 이상의 냉소는 내가 가르친 것일지 모른다. 강요로 얻는 건 강요하는 그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반발심일 뿐임을 안다. 더는 혼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강압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엄마, 나 하나님께 실망했어."라고 말하면 "엄마도 가끔 그래."라고 공감해 줄 수도 있었다. 헌데 그 차가운 눈빛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목사 아들이니 교회는 빠지지 않고 가지만 하나님께는 가까이 가지 않는 사람이 되면 어떡하지? 그 지점에선 심장이 툭 떨어지고 기도만 나왔다. 기도하기 때문에 포기하지는 않았지만, 기대는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신앙 발달,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났지... 이제는 제 몫이고, 그분과 현승이 둘 사이의 문제야, 하면서.
2020년 송년주일에 현승이가 입교를 했다. 자발적인 입교다. 신앙고백서를 썼다. 혼자 쓰고 입교를 집례 하는 목사인 아빠에게 제출했다. 현승이를 안고 나란히 서서 유아세례 받던 2003년에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17년 후 목사가 되어 현승이 입교 집례를 하게 될 줄이야. 현승이 신앙 고백문을 읽으며 여러 대목에서 울컥했다. 유아세례는 우리 부부의 선택이었지만 입교는 현승이 자신의 선택이다. 부족한 내 삶과 신앙으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소개했다. 그런 마음으로 키우겠노라 다짐하며 유아세례를 선택했다. 입교는 아이이 몫이다. 내 삶과 신앙이 너무 큰 걸림돌이 되지 않길. 우리 아이들이 자기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에서.
신앙고백_김현승
나는 작년 그리고 제 작년에 입교를 받을 상황이 되었고 받는 게 시기상 맞았지만 받지 않았다. 스스로 입교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믿음에 확신이 있고 하나님에 대해 의심할 부분이 조금도 없는 사람만 입교를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주일학교 다른 형, 누나, 동생이 입교를 받는 것이 조금 섣불러 보였고 어리석게 보였다. 이런 내가 이번에 입교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내가 아주 간단하면서 어려운 사실을 하나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확신과 의심에 관한 사실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성경에 대한 질문이 많이 있었다.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나는 성경에 오점을 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인간이 선악과를 먹을 것을 결과적으로 아셨을 것인데 그렇다면 왜 굳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놓으셨을까? 가룟 유다는 왜 스스로 죽었을까 부끄러움 때문인가? 가룟 유다가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 아닌가? 이렇게 성경에 대한 질문, 약간은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하는 질문을 많이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질문이 생길 때마다 아빠에게 물어봤다. 아빠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처음에는 ‘엥’ 했지만 결국에는 ‘아’하고 이해가 되었다. 아빠랑 입교에 관해 얘기하던 어느 날 아빠가 내가 입교를 받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고 그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다. 백 프로 확신이 없어도 입교를 받는 것도 괜찮다고 말을 하셨다. 그 말을 듣고 오래 생각해봤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백 프로 확신이 있나? 아니다. 그럼 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나? 맞다. 나는 확신이 없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많다. 성경에 대한 질문이 많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싶은 것도 많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이 있다. 생각해보니 내가 정말 힘들 때 좌절될 때 결국 내가 하는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적응이 힘들어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울 때, 유럽 여행을 가서 친구들 새로운 환경에 적응 못 해 두려워할 때 결국 나는 하나님께 나를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믿고 확신이 있다는 증거 같다. 나는 질문이 생기는 확신은 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빠의 말을 듣고 내 삶에서 하나님을 찾아보니 내가 하는 하나님, 성경에 대한 질문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구나 싶었다. 내가 질문하는 이유는 못 믿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알고 싶어서 질문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고 믿는다. 그러나 완벽하지 않다. 더 궁금하고 더 알고 싶다. 이번 입교 교육을 받고 입교, 세례에 대해 생각했던 기간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정리하고, 그다음에 정리한 다음 또 정리하는 나날. 정리 대장 아빠가 인형 보따리를 풀었다. 한 번씩 "이번엔 싹 다 버리자" 해놓고도 막상 하나 씩 눈을 맞추면 또 집어넣게 된다. 이건 할아버지가 사주신 거, 이건 학교 바자회에서 처음으로 산 것, 내가 이렇게 하고 들고 왔잖아... 한 놈 한 놈이 다 사연이 있다. 가장 오래된 미키 미니 인형은 데이트 시절 남편에게 처음을 받은 선물이다. 철학과 4학년 학생 JP가 나름 큰돈 썼던 거고, 당시 미키 미니 덕질에 빠져 있던 나는 엄청난 감동을 받았더랬다. 그래서 못 버림. 테디 베어 네 마리는 채윤이 현승이 각각 두 마리씩 소유인데, 어쩌면 그렇게 어릴 적 채윤 현승을 꼭 닮았다. 특히 교복 치마에 츄리닝 바지까지 입은 테디는 당시 중학교 1학년 김채윤 그 자체. 그래서 못 버림. 결국 하나도 못 버리고 깨끗이 빨아 각자 사연의 주인공들이 끌어안고 흩어졌다.
그 와중에 구원받을 것인가, 버려질 것인가, 기로에 서서 아니 누워서 운명의 선택을 기다리는 애들을 놓고 잔인한 놀이 중인 열여덟 살 현승이. 양손에 주방 집게 하나 씩 들고 '인형 뽑기' 놀이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노트북 쳐다보고 있다 옆에서 저러는 열여덟 살 보고 녹았다. 이런 게 그렇게 좋더라. 나는.
스물세 살 겨울, 성탄절을 꽉 채웠던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듣는다. 매년 성탄절마다 들었지만 귀와 마음을 온전히 열고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사연이 있다. 스물세 살 성탄절에 성가대에서 저 곡을 노래했고, 나는 알토 솔로를 맡았었다. 내가 부르기엔, 당시 몸담고 있던 성가대가 소화하기엔 어려운 곡이었다. 전적으로 지휘자의 열정과 실력으로 가능했던 연주였다. 지휘자님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나 하면, 솔리스트에게 각각 파트를 녹음해주었다. 나는 또 얼마나 열심이었나. 길지도 않은 레시타티브를 마르고 닳도록 부르며 연습했다. 마이마이에 끼우고 다니며 수십 번, 어쩌면 수백 번 듣고 또 들었다. 듣고 불렀으면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가사들이 입에서 줄줄 나온다.
진정 나는 간직하리라 내게 있었던 축복의 날 축복의 말씀을 결코 나는 간직하리라
그해를 마지막으로 아름답고 찬란했던 젊은 날 신앙의 봄날이 갔다. 다음 해 새로운 담임 목사 청빙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며 함께 노래했던, 존경했던, 사랑했던 분들과 마음이 나뉘었고 처절한 실망 끝에 교회를 나왔다. '나온 것'으로 끝이었으면 좋으련만 아픈 기억은 내 마음에 들어 있으니 끌어안고 나온 셈이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사람 관계는 이후로 더 추락하였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는 어떤 그리움 너머 아픔이 되었다. 그 아름다웠던 시절, 그 노래들은 '합창'이었다. 함께 부르는 노래였다. 노래는 함께 불렀던 사람들과 분리하여 떠올릴 수 없는데, 음악은 영원하건만 내 마음속 사람들의 얼굴은 달라졌다. 존경했던 만큼 실망으로, 사랑했던 만큼 분노로 떠오르니 어쩔 것인가. 참으로 오랜 세월 저 노래를 마주하지 못했다.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쩔 수 없이 CD에 손이 가곤 했지만, 귀로만 듣지 마음으로 들지는 못했다.
내 맘 속에 누우소서 좋은 방은 아닙니다.
이사 준비와 정리로 분주하여 CD를 고를 여유없이 라디오가 선곡해주는 음악을 들으며 성탄 시즌을 보냈다. 어쩌자고 낮이나 밤이나 틀기만 하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가 나오는 것이냐. 아니, 그것만 들리는 것인가.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이 음악이 마음으로 들어온다. 마음으로 들어와 그립고 아픈데, 그리움 사이사이 낀 분노가 어디로 가고 없다. 어, 어딨지? 어디 갔지? 분노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슬픔과 연민이다. 그 좋은 나날들을 오롯한 그리움과 감사로 떠올릴 수 없는 우리 모두가 슬프고 안쓰럽니다. 심지어 조금 감사한 마음도 든다. 그토록 아름다운 성가대 찬양의 기억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고, 그 기억은 모두 내 것이니. 무엇보다 그때 부른 노래의 가사를 나는 내 영혼에 새겼다. 입으로 부르지 않았고 단지 마음으로 부르지도 않았다. 부르고 또 부르는 동안 내 존재 깊은 곳에 새겨진 것이 분명하다.
주님이 다스린다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온전히 주께 맡긴 마음 주께서 다스린다
'마음'에 대한 이 레시타티브들을 나는 얼마나 간절하게 읊조렸는가. 어둡고 비좁은 마음의 방, 그분이 거하시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방이지만 "내 맘 속에 누우소서" 노래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믿었다. "좋은 방은 아니지만" 반드시 찾아오시고 살아주실 것을 믿었다. 그럴수록 부끄러웠지만 그럴수록 더욱 믿었다. 왜냐하면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으니까. "주님이 다스린다 / 주를 사랑하는 마음을 / 온전히 주께 맡긴 마음 / 주께서 다스린다" 그때 그 오라토리오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마음'을 생각했다. 비좁은 내 마음 때문에 힘겨웠고, 이 부끄러운 공간이지만 어쩐지 그분이 기꺼이 찾아와 주실 것만 같았다. 그렇게 살아온 세월로 '정신실마음성장연구소'를 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촉촉한 성탄절이다. 자꾸 눈물이 난다. 한껏 성장했으면서 자신이 성장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 '이만 하면 됐다, 나만큼만 하라고 해' 같은 자만심을 가질 수 없는 가난한 마음들에 고마워 눈물이 난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을 떠올리니 눈물이 난다. 지독히도 나를 혐오하며 확신 없이 사는 나를 구원해준 눈길들이다. 내 마음 같지 않은 사람과 세상 때문에 눈물이 난다. 연결됨이 기뻐서 눈물이 나고 외로워서 눈물이 난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좋아서 눈물이 나고, 빛이 오셨는데 여전히 어두운 세상에 눈물이 난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좁고 어두운 내 마음이라 눈물 나고, 여전히 그곳으로 오시는 분을 사랑하기에 눈물이 난다. 빛으로 오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눈물이 난다.
성탄절 아침에 블루투스 스피커 볼륨을 높이고, 큰 화면으로 영상을 보면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를 듣는다. 마음으로 듣는다.
이제 참 빛을 보리로다 구원을 나타내리로다 내 구세주는 빛이시라 이방을 밝게 비추시나 허나 그들은 주님을 아직도 알지 못하도다 진정 참빛이시로다 사랑의 예수여
마음이 열리면 눈이 열리고, 눈이 열리면 귀가 열린다. 일상의 모든 일엔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고, 치러야 할 비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한결 가벼워진다. 이미 잘 알고 있고, 늘 생각하고 있지만 열두 번째 이사로 더 잘 알게 되었다. 이삿짐 정리로 몸이 피곤한 것은 기본, 숨겨놓은 짐들이 죄 끌려 나오고 펼쳐지고 헤집어지는 것의 두려움도 마땅히 감당할 것이라 생각하니 조금 가벼워졌다. 마땅히 감당할 것을 감당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던 것을 멈추니 어차피 감당하지 못할 내 한계가 보이고, 쭈글한 내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고 자기 비하의 나락으로 떨어질 생각은 없다. 자기 연민에 빠진 불평이 줄고 '탓' 할 대상을 찾는 일도 심드렁해졌다. 탓할 대상은 결국 늘 하나님인데, 그분이 내 마음 가까이 느껴져 탓을 하기보단 "짐 정리하는 동안 옆에서 바라봐 주시는 것"도 고마운 정도가 된다. 마음이 열려 여백이 조금 생기니 눈도 귀도 더 소중한 것에 열리는 것 같다.
결혼 선물로 받은 액자가 있다. 당시 남편이 근무하던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 하시던 장로님께서 손수 써주신 글이 담긴 액자이다. 이걸 선사해주신 장로님은 이미 천국으로 가셨고, 액자는 빛이 바래 그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색하고 앉아 이 말씀을 묵상해 본 적이 없는데 가슴 깊이 새겨져 있다. 그야말로 벽에 걸린 액자로 늘 거기 걸려 있는 말씀이 일상의 눈 맞춤으로 스며든 것일까. 아니, 가끔 남편이 아이들에게 이 말씀을 읽어주곤 했다. 한자를 읽어주며 말씀의 뜻을 설명하기도 했다. 식탁에 앉아 아이들이 싸울 때, 맛있는 것이 없어서 투덜거리는 마음이 들 때 한 번씩 쳐다보면 마음에 새기는 말씀이었다. 이삿짐 정리하며 "식탁 위에 걸까?" 하는데 남편이 "굳이 걸어야 하나? 그냥 세워둬도 되잖아." 하며 커피장 빈 공간에 일단 세웠다.
이사 다음 날,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르게 정리하며 늦은 오후가 되었다. 주방 정리를 하는데 세워둔 액자 위로 또, 또 그림자놀이가 펼쳐지고 있었다. 오늘은 넘어가는 해가, 서쪽으로 스러지는 해가 주방 창틀을 가지고 하는 작품 활동.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고 말 작품이기에 멈추어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분이 보내시는 메시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멈추어 듣는다. "말씀하시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액자에 담긴 글이 말하는 것 너머, '창조의 책' 자연으로 말씀하시는 드넓고 신비한 그분의 존재를 느낀다. 당신, 여기 계시군요! 이 집에도 계시는군요! 아, 액자에 담긴 글도 다시 읽는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 17:1) 한 번도 제대로 묵상해 본 적 없지만, 결혼 22년에 열두 번 이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오늘이 이 말씀에서 얻은 힘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얄팍한 정서적 위안이 아니라 존재 깊은 곳에서 끄덕여지는 긍정이다.
잠시 머물렀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다시 분주하게 손이 가는대로 정리하다 저녁 준비를 하러 주방에 섰다. 아, 주방 창문으로 들이닥친 일몰의 풍경이라니! 이건 뭐 환영의 인사다. 만나서 반갑다고, 같이 살게 되어 좋다고, 여기까지 잘 왔다고 말하는 진정성 담긴 인사 아니고 무엇이랴. 인사를 건네는 주체는... 모르겠다. 몰라도 괜찮다. 우주가 나서서 새 집에서의 일상을 축하하고 환영하는 것을 충분히 느꼈으니!
가장 좋아하는 모임이 '꿈 모임'인데, 올해는 한 번도 꾸려보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새해 시작을 꿈모임과 함께 하려고 합니다. 치유와 성장에 목마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가는 모임입니다. 아무 준비 없이 와서 앉아만 있어도 내 마음과 영혼이 하는 말이 들리는 모임입니다. 심지어 "나는 꿈도 안 꾸는데요" 하는 분도 가능합니다. "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꿈에 메시지가 어딨어? 꿈이 다 개꿈이지." 논리와 합리성에 목숨 걸고 사는 분이라면 특히 대환영인데, 제가 좀 골치 아프긴 하겠죠. (우힛) 예수님이라면 돈 없는 자도 와서 값 없이 사라고 하셨을 텐데 그러진 못하네요. 온라인 모임입니다.
연구소의 포스터 담당 연구원은 포스터에 마음을 담을 줄 아는, 상징을 아는 타고나 '상처 입은 치유자'랍니다. 포스터 안에 담긴 모든 것이 그대로 다 치유의 메시지입니다. 저는 자꾸 들여다 보게 돼요.
꿈과 영성생활 “밤에 온 러브레터”
‘꿈은 당신에게 배달된, 봉투 안에 든 편지’라고 탈무드에서 말합니다. 혹여 어떤 메시지가 든 편지라면 발신자는 누구이며,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크리스천의 꿈은 조금 다를까요? 뱀 꿈은 마귀의 시험에 들었다는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알거나 미래를 예견하는 방법이 될까요?
프로이트(Sigmund Freud)라면 무의식의 억압된 욕구가 꿈의 발신자라 하고, 융(Carl Gustav Jung)이라면 자기 안의 신적인 자아 Self로부터 오는 것이라 합니다. 나쁜 꿈은 없고, 모든 꿈은 우리를 도우러 온다고 입을 모아 말하지요. 여러 영성가들은 존재 중심에서 우리는 붙드는 사랑의 목소리, 그분이 발신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뱀 꿈이며, 악몽을 비롯한 모든 꿈은 하나의 메시지로 귀결됩니다. “너는 사랑받는 자이다”
작은 그룹에서 꿈 여정을 하면서 "당신은 불필요한 심리치료비 1만 달러를 벌었다"는 말을 자주 떠올립니다. 가짜 자기와 그 너머의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기를 인식하는 눈이 생긴 사람에게 리처드 로어 신부가 하는 말인데요. 정직하게 꿈을 들여다보는 일은 심리상담 수십 회기의 효과라는 것을 경험합니다.
어젯밤 꿈을 통해 마음의 이야기를 나누는 집단여정에 초대합니다.
✔ 일정과 신청 안내
+ 일시 : 2021년 1월 5일(화) ~ 3월 30일(화) 오전 9시30분 ~ 12시(12주간) + 인원 : 6명 + 수강료 : 30만원 + 신청 링크 : https://bit.ly/3r2Jxga + 문의 : 010-6209-0635
이사에 관한 한 충분히 준비된 몸이다. 누군가 붙여준 별명처럼 '이사의 달인'이다. 남편은 부동산 관련 모든 업무를 꿰고 있고, 나는 미리미리 정리해야 할 짐, 바로 전날에 해야 할 일들을 잘 알고 있다. 이번 이사는 특히 집이 안 구해져 마음 졸이던 시간이 길어서 받아야 할 스트레스도 차고 넘치도록 받았다. 정서적으론 분노도 설움도 다 지나갔으니 그저 이사를 하면 되는 것이었다. 벌써 열두 번째 이사이니 덤덤할 수 있다, 덤덤해야 한다, 마음먹고 덤덤히 지냈다. 이사가 사흘 정도 남은 날, 채윤이가 "엄마, 요즘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왜애? 무슨 일 없는데..." "아니, 그냥 표정이 계속 안 좋아서..." 그리고 그다음 날, 이사 이틀 전. 아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맘에 들지 않았다. 뭐든 딴지를 걸고 싶어 눈동자를 굴리고, 예민 지수가 쭉쭉 올라가는 나를 발견했다. 다행히 그런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나를 느낄 수 있었지만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남편과 산책을 하다 "나 이사 앞두고 예민한가봐. 집이 구해져서 다행이고, 여러 모로 다 잘 됐는데, 이사 준비도 당신이 알아서 착착 잘하고 걱정할 게 없는데 자꾸 예민해져." 고해성사하듯 꺼내놓아 보았다. "나도 그래. 예민해지고 불안하고 그래. "당신도 그렇다고? 아, 내일 아침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오는 시간, 그 시간을 상상하면 벌써 스트레스 지수가 올라가. 이삿날 아침 그 시간, 아무리 여러 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고 힘들어." "나도 그래. 갑자기 군대 있을 때 훈련받던 생각이 나네. 한 달에 한 번씩 일주일 야외 훈련을 하거든. 아침에 신호 울리면 부대 안의 짐을 싹 다 싸는 거야... 이삿날 아침하고 비슷하지."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이삿 날 아침의 스트레스는 군대 훈련 스트레스를 방불케 하는구나, 싶으니 뭔가 위로가 되었다.
사람 마음이 참. "나만 그런 거 아니구나"를 확인하니 한결 여유가 생겼다. 불안하여 예민해지는 나를 느낄 수 있을 뿐 아니라 왜 그런지도 알아졌다. 이삿짐 센터 분들이 들이닥치는 순간부터 집안의 모든 것은 '이삿짐'이 된다. 그 말은 헤집어지고 풀어헤쳐진다는 뜻이다. 이삿짐을 쌓고 푸는 과정이 내 물건들이 다 까발려지는 느낌이다. 그게 그렇게 마음을 어렵게 하는 일이었다. 일하시는 분들에겐 그저 일일 뿐이지만, 내 일상의 물건들이니까. 늘 보이는 물건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까지 죄 끄집어내야 하는 일이 이사니까. 내게 속한 물건이니 나의 일부, 심지어 나 자신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이사의 달인, 이사 전문가가 되었어도 이사 당일 감내할 수밖에 없는 이 불편함. 그저 이 불편한 하루가 어서 지나길 바라며 추운 날 발을 동동 구르며 서성이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괜히 불안하고 괜히 예민해진 게 아니었어. 이렇듯 마음 먼저 정리되고 맞은 이삿날 아침은 괜찮았다. 일찍 일어나 영적독서, 기도 시간을 갖고 더욱 여유 있게 내려 커피도 한 잔 했다.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 앞에 서니 동쪽 산 끝자락에서 붉은 해가 머리를 내밀기 시작. 어설픈 각도로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러고도 여유가 있어서 집안 여기저기 눈을 맞추는데, 오메! 아까 머리를 내민 해가 베란다 이쪽으로 한참 가까워져서는 그림자놀이를 하고 있다. 선인장과 다육이를 가지고 신박한 그림자 그림을 그려냈다. 멋진 작별인사다. 아침마다 바로 이 자리에 서서 행복했다. 충분히 행복하여 아쉬울 것 없는데, 마지막 날까지 그냥 보내지 않고 이렇듯 선물을 준비해 쐈다. 아이구, 뭐 이런 걸 다!
가족 모임도 삼가야 하는 코로나 19 엄혹한 시절, 그냥 넘어가는 것은 어떤가 생각했다. 39년이나 지난 일 아닌가. 한 번쯤 각자 집에서 예배드리면 어떤가 하는 얘기도 오갔다. 결국 모인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다. 얼굴도 보지 못한 손주들에게 아버지는 기가 막힌 선물을 안기신다. 아이들에 할아버지(외할아버지) 추도식이 송년 축제와 같다. 기말고사 마치고 겨울방학과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 맛있는 것 먹고 노는 날인 것이다.
“아버지 추도식인데 엄마 생각하고 울기 없기!”
고민 끝에 모이기로 결정하고 동생이 한 농담이다. 이걸 들은 우리 애들은 “삼촌 자신에게 하는 말 아니야?” 했다. 농담이 예언이 되었다. 예견되는 일이었으니 예언도 아니다. 이번에 모이지 말지, 모이지 말까, 나도 자꾸 이랬던 이유는 아버지 추도식이 엄마 추도식 될 것 같아서였다. 무의식적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엄마 집 가는 길을 다시 달리는 것, 현관문 열고 엄마 방 앞을 지나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결국 아버지 추도식에 엄마 그리워 울고 와서는 다시 3월로 돌아간 듯, 생기가 빠져나간 몸이 되었다.
해마다 추도식 마치고 찍은 사진 속에 엄마가 있다. 셀카로 가족사진을 찍기도 하고 성경 암송하는 엄마가 담기 영상도 있다. 이미 늙은 엄마가 한 해 한 해 조금씩 더 늙어가는 모습이 그대로 담긴 사진들이 있다. 아기들이 자라서 청소년이 되는 활기찬 변화보다 가운데 앉은 엄마나 더 부각되어 보인다. 엄마는 씬스틸러다. 이번에도 습관처럼 예배 후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뭔가 부족하고 어색하다. 해마다 우리와 아버지 추도예배를 드리던 엄마. 이번에 이쪽이 아니라 그쪽 편이 되었다. 엄마 꽃을 뺏겼다. 혼자 외롭게 있던 아버지 편이 늘었다.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 이옥금 꽃을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엄마는 아버지를 만났을까? 엄마랑 아버지랑 행복할까? 아버지 추도식을 지내는 우릴 지켜보고 있을까? 둘이 손 꼭 잡고 우리가 부른 찬송 소리에 귀 기울일까? 농담하고 깔깔거리는 걸 보며 아버지는 “간나 새끼!” 하며 따라 웃을까? 엄마는 바로 작년까지 함께 앉았던 이 자리가 그립진 않을까? 엄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을까?
나는 에고가 강하고 고집이 센 편이라(같은 말이군) 남의 말을 잘 믿거나 듣지 않는 편이다. 이런 사람들이 흔히 빠지는 오류이긴 하지만 믿고자 하는 사람, 또는 상황은 거침없이 무한신뢰를 보내기도 한다. 운동이라곤 수영밖에 모르는 바보가 그나마 어렵게 친해진 수영도 연을 끊은 지 몇 년이 되어 남의 말 듣고 필라테스를 하게 된 얘기다. 누가 뭘 하라고 해서 하는 성격이 아니지만 어떤 사람들이 두 번이나 세 번 정도 말하면 그냥 무조건 들으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남편 김종필 류의 사람들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쉽게 추천하지 않는 사람, 강요는 더더욱 못하는 사람, 웬만해서는 두 번 이상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두 번 정도 말하거나, 한 번 하는 말인데 힘이 들어가 있다면 가급적 듣는 편이 좋다. 동의가 되지 않아도 듣는 편이다.
H가 허리 통증 달랠 요량으로 수개월 전, 필라테스를 시작했다. 허리 통증이 나아졌을뿐 아니라 몸과 가까워지는 좋은 운동이라고 했다. 요통은 아니지만 일찍 오십견에 테니스 엘보 같은 갱년기 질환을 겪은 내게 "언니도 해 봐"라고 했다. 한 번 아니고 여러 번 말했다. H가 같은 말을 두 번 이상 하면 그냥 이유 묻지 않고 듣는 게 좋다, 여기기 때문에 꼭 해봐야지 싶었다. 시간, 비용, 무엇보다 몸치로서 새로운 운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백 번 생각만 하고 있었다. 집 근처에 생긴 대형 헬스클럽에서 오픈 행사로 저렴하게 회원 모집하는 데 힘입어 등록을 했다. "해보고 안되면 그만두기!"용으로 시험 삼아 해보기 딱 좋은 시간과 비용의 3개월 도전이었다.
수영을 제대로 즐기기 전까지 내 몸은 정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정신만 가지고 살지, 몸은 왜 데리고 살까 싶었다. 학창 시절 체육은 내 몸을 혐오하라고 주어진 시간이었다. 체육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몸, 실기 성적 안 나오는 몸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래서일 것이다. 몸이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것은. 어쩐지 수영만큼은 꼭 해보고 싶어서 젊은 날 여러 번 시도했으나 역시 어려웠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뭘 해도 우습기만 한 부적절한 몸의 재확인이다. 자유형 호흡에서 막혀 번번이 포기하고 말았다. 채윤이를 품고 임산부 수영교실을 다니며 다시 시도. 자유형, 배영, 평영, 접영까지 진도를 빼고 출산했다. 한 생명이 들어서서 두 생명의 에너지가 된 것인지, 그저 부풀어가는 포궁의 부력 때문인지 수영이 잘 배워졌다. 그렇게 극복하고, 채윤이 낳고 현승이 낳고 두 아이 모두 어린이집 다니던 즈음부터 꾸준히 하여 수영人으로 거듭났다. 수영은 내게 영적 훈련이었다. 내 몸에 가까워지고, 조금씩 화해하며, 믿어주게 되었으니.
내 인생 운동은 수영 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H의 간증에 힘입어 시작한 필라테스다. "뭘 해도 웃긴 몸"으로 새로운 운동을 하면 또 얼마나 웃긴 몸이 될까, 시작도 하기 전에 수치심이 올라오지만 그냥 열심히 했다. 전자동으로 "어떻게 보일까, 얼마나 웃기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지만 그럴수록 더욱 내 몸에 집중했다. 다행히 편안한 선생님을 만났다. 분명 잘 못 따라가고 있는데 기다려주는 마음이 느껴졌다. 갈수록 재미가 붙어 50분이 어떻게 지나갔나 싶게 끝나곤 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추고 몸인 나로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 참말로 좋았다. 어떻게 보일까, 하는 걱정은 저 너머로.
이사가 결정되고 가장 아쉬운 것은 앞산이 아니라 모처럼 적응한 필라테스였다. 어디든 가서 다시 할 수 있겠지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이끌어주는 선생님이었다. 3개월 수강권이 끝나고 이사까지 애매하게 한 달 정도가 남았다. 원래 한 달 수강권이 있지도 않지만 굳이 등록하자면 할인된 3개월 비용과 비슷하다니, 그렇게까진 할 수 없어서 마음을 접었다. 이사 때문에 그만둔다고 하니 선생님도 많이 아쉬워했다. "어, 저 이제 오전 수업 허전해서 어떻게 해요? 신실님 늦게 오시면 막 기다리는데..." 채윤이보다 몇 살쯤 더 보이는 앳된 선생님의 말이 슬프게 들렸다. 그저 하는 말이려니 했지만, 슬픈 만큼 따뜻하기도 했고. 마지막 수업 마쳤는데 선생님이 내 팔을 잡아끌어 라커룸으로 가더니 선물 봉투 하나를 내밀어 깜짝 놀랐다. "신실님 정말 열심히 하셨는데 너무 아쉬워요. 처음부터 영상을 찍어 놓았을 걸... 했어요." 학생이 선생에게 고맙다고 선물 주는 것은 흔하지만, 선생이 학생에게, 그것도 필라테스 강사가 3개월 반짝 운동하고 그만두는 학생에게 선물이라니! 실은 나도 선생님에게 줄 기프트 카드를 준비해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선생님, 실은 저도요...." 하고 내미는데 주책맞게 안구에 습기가 차올랐다.
남편이 "셀카라도 하나 찍지 그랬어?" 했다. 그러게,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연락처도 없고,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3개월의 만남이다. 기억에만 남은 따뜻한 만남이다. 아쉬울 것은 없다. 몸에 남은 기억은 스마트폰의 사진 한 장보다 더 선명하다. 간간이 그 시간에 배운 스트레칭을 한다. 앳되고 차분한 그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짧고 흐릿하여 더 선명한 만남, 따뜻한 만남의 기억이다.
줌모임 마치는 인사로 건넸는데 '떡볶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을 듣자 떡볶이 호르몬이 폭발하여 나도 급히 만들었다. 미미-채윤네 떡볶이 변종인데, 당면 사리와 함께 냉동실에 땡땡 언 차돌박이 한 주먹을 바짝 구워 올렸다. 고기 좋아하는 고딩 현승이 취향저격이다. 역시나 맛있다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이건 팔아야 한다고, 아주 비싸게 팔아야 한다고 했다. 얼마쯤 받아야 하냐고 했더니 12,000원 정도라고. 3인분인데, 소고기도 올라갔는데 1인분에 3천 원은 너무 고딩 가격 아닌가?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내적 여정 지도자 과정', 마음 먹은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이 종강을 맞았다. 계획대로라면 11월 말에 종강 피정을, 12월 첫 주에 수료식을 하고 마침표를 찍었을 것이다. 지도자 과정 개설은 나로서는 역사적인 한 걸음이었다. 하필 코로나 19와 함께한 큰 걸음이라 더욱 드라마틱한 행보가 되었다. 마지막 피정을 위해 쏟은 마음의 에너지가 얼마나 컸던가. 어렵게 구한 맞춤형 숙소며 포기하고 감수해야 할 것이 많았지만 어쩔 수 없이 연기했다. 그러고 보면 지도자과정 포함 연구소 프로그램들을 내내 취소, 연기, 취소, 연기... 하며 올 한해를 지냈다.
종강 피정을 1월로 미루고 기약없이 텅 비어버린 12월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새 일을 도모했다. 이렇듯 예측할 수 없는 환경에 맞춰 진행하면서 더 좋은 지도자 과정 커리큘럼이 된 것 같기도 하다. 늘 만나던 목요일 오후에 줌으로 하는 책 나눔을 계획했다. 과제로 읽고 리포트 제출했던 책을 리스트에 올리고 투표를 거쳐서 선정했다. 안셀름 그륀 신부의 <아래로부터의 영성> 당첨. 안셀름 신부님 책 중 잘 알려지지 않은 ‘옛날 책’이다. 신의 한 수였다. 지도자 과정 수강자와 연구소 식구 합하면 11명인데, 모두를 위한 최적, 최선, 최고의 책이었다. 11명 벗들의 개인적 여정은 물론 개소 2주년 맞는 연구소의 방향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고 있다. 나로서는 정말 그렇다. "아, 이걸 하려고, 이걸 하다 연구소 시작했지!" 위로부터의 영성이 틀려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시작하는 영성의 부재에서 오는 불균형에 숨을 쉴 수 없던 시절이 있었지. 당시에는 숨을 쉴 수 없는 이유조차 몰랐었다. 지금 여기의 일상, 지금 나의 생각, 느낌, 상처, 질병, 실패에서 하나님을 찾는 방향성 말이다. 보석같은 이 책을 발견하고 심장 쿵쿵거리며, 눈물 찍어내며 읽던 그때를 생각하면 놀라운 오늘이다.
다시 심각해진 밖의 상황이 풍성한 영성의 샘물로 우리를 이끌었다. 더욱 고립되어야 하는 외적인 상황이지만 그로 인해 더욱 단단하게 연결되는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아쉬움으로 선택한 시간이지만, 그간의 여정을 정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었구나 싶은 것이 그분은 참 꼼꼼하신 분이다. 아름다운 그분의 꼼꼼하심을 우리는 ‘신비’라 부르곤 한다.
'연어 베이글 샌드위치'는 우리 집 조식의 시그니처 메뉴다. 아이들 친구가 집에 와서 자는 날, 손님 접대용으로 해주는 아침 특별 메뉴다. 현승이 친구가 와서 자는 덕분으로 특식 아침이 되었다. “도시락으로 싸갈까, 아침으로 먹을까" 고민하던 채윤이가 결국 우적우적 먹으며 혼잣말을 했다. "이걸로 저녁까지 버텨야지." 양재동 작업실로 연습 가는 첫날이다.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제 피아노를 사고, 오래 알아보고 발품을 팔아 작업실을 계약했다. 어제는 아빠와 함께 피아노를 들이러 다녀왔다. 복도가 좁아 들어가려나 어쩌려나, 방이 좁아서 피아노와 키보드가 함께 들어가려나 어쩌려나 걱정이 많았다. 결국 자리를 잡은 피아노 앞에 앉은 채윤이 영상이 가족 단톡방에 올라왔다. 연주하는 채윤이가 아니라 우는 채윤이다. 나는 식사 약속이 있었고, 만난 분이 화장실 간 사이 영상을 확인했는데 덩달아 눈물이 나 수습하느라 혼났다.
연어가 듬뿍 든 럭셔리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채윤이는 궁상맞은 소리를 한다. "이걸로 저녁까지 버텨야지!" 그러라고 한 적이 없는데, 채윤이는 학기 중에도 용돈 아끼기 위해 삼각김밥으로 떼우거나 쫄쫄 굶고 집에 와서 먹기도 한다. 양재동 작업실까지 신분당선을 타면 교통비가 어마어마하다며 분당선을 타고 조금 돌아서 다녀야겠단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용돈을 넉넉하게 책정해본 일이 없긴 하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인상 협상'을 각오하고 있다. 또래에 비해 용돈이 턱도 없이 적다는 걸 알기에 요구만 하면 올려줄 텐데 그런 일이 없다. 삼각김밥을 먹네 어쩌네 하는 말 듣기 싫어서 용돈을 올려줄게, 해도 "알았으니 일단 한 번 이번 달 더 살아보고 얘기하겠다"는 식이다. 그러면서 돈도 잘 모은다. 없는 중에도 돈을 잘 모으는 건 날 닮았다. 암튼, 저렇게까지 굶어가며 용돈을 아끼는 채윤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실은 그런 채윤이가 몹시 대견하면서 동시에 안쓰럽고 가슴이 저릿하니 아프다.
피아노만 해도 그렇다. 제 음악을 하기 위해 제 악기를 가질 때가 되었고, 요구하면 어떻게든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헌데 당연히 제가 사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어렸을 적 세뱃돈부터 시작하여 최근 아르바이트비까지 모은 통장을 털어 중고 야마하 피아노를 샀다. 난생처음 제 피아노를 가지고, 제 연습실을 가진 채윤이가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보다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다. 이 역시 너무나 대견하고, 대견한 만큼 아프다. 어릴 적부터 워낙 독립적인 아이였다. 내가 그렇게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타고난 아이였다. 독립적인 아이로 키우겠다는 뜻으로 내가 했던 일은 주로 채윤이에게 상처와 결핍이 되었고, 제 가진 존재의 힘으로 상상보다 더 독립적인 어른이 되었다.
나 대학 들어가던 해 엄마가 사준 영창 피아노가 있었다. 말하자면 대학 입학 선물이었다. 내가 음대를 간 것도 아닌데... 엄마 딴에는 아버지 대신 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 그 겨울, 서울 가시는 아버지의 중요한 계획은 피아노 구입이었다. 목사관을 새로 지어 내 방이 생겼다. "요번에 서울가믄 신실이 피아노 알아보고 오갔다우" 하셨었다. 그러고는 젠장, 피아노가 아니라 아버지 몸이 피아노처럼 나무 상자에 담겨 돌아왔다. 대학 입학 선물로 엄마가 피아노를 사준 건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내 마음은 1도 몰라주고 아버지 생각만 했던 엄마. 그 비싼 피아노를 안방에 떡하니 들여놓고 대학생 된 딸에게 구두 한 켤레 사주지 않았다. 그 피아노는 결과적으로 채윤이 것이 되었다. 소리 나지 않는 피아노로 바꾸는 기계를 달아 예중 입시 연습용으로 제대로 잘 썼다. 그다음부턴 채윤이 격에 맞지 않는 애물단지가 되어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채윤이가 새로 피아노를 사기로 했으니 저 피아노를 처분해야겠는데 엄마 괜찮겠냐고 물었다. 괜찮고 말고,라고 했지만 피아노 치우는 모든 과정을 내내 모른 척했던 건 괜찮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일이 자꾸 떠오르는 건 감정이 고여 있는 탓이다. 대학원 준비하며 과외 알바를 하던 시절이었다. 중고생 과외로 돈이 쑥쑥 모아졌다. 그때 집에 오래 쓰던 냉장고가 고장이 났다. 고치는 비용이면 새 것 사는 게 낫다는 엄마 말에 모은 돈을 내놓았다. 순순히 내놓았다. 순순히 내놓았으면 기억에서도 지울 일이지, 그 시절 나를 생각하면 안쓰럽기 그지 없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피아노를 팔아 냉장고를 살 걸 그랬다. 제가 모은 돈으로 제 피아노를 사는 채윤이와는 전혀 다른 상황인데 왜 이 시점에 그 일이 떠오르는 걸까. 피아노 앞에 앉아 우는 채윤이가 채윤이로만 보이지 않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너는 엄마 아빠가 있는데 왜 사달란 말을 안 해? 나야 아버지는 아예 없고 엄마는 힘이 없어서 내 살 길 내가 찾아야 했으니 그렇지. 넌 엄마도 아빠도 있잖아. 이런 지점에서 맴도는 것 같기도 하고.
물론 택도 없는 견줌이다. 제게 꼭 필요한 것을 위해 제 손으로 장만하는 일은 안쓰러운 것이 아니다. 채윤이의 독립성은 어쩔 수 없었던 나의 독립성과 다르다. 하지만 오늘 채윤이의 피아노는 내 피아노와 닿아있다. 내 것이었지만 채윤이 것이 되었다가 처분한 그 피아노와 닿아 있다. 채윤이의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그 피아노를 두들겼고, 이제 이 피아노를 두들겨댈 것이다. 아버지가 내게 사주려 했던 피아노, 그때 아버지가 사줬으면 참 좋았을 피아노, 아버지 대신 엄마가 사준 피아노, 엄마가 사줘서 결코 선물이 되지 못했던 피아노. 그 피아노를 내 마음에서 지워버리는 것은 쉬운 일인데, 내게 남은 부모님의 흔적과 그것이 채윤이에게 흘러간 것들은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것 나쁜 것 따질 수 없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님도 안다. 그래도 나는 그렇게 느껴진다.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여겨지는 부분은 좋은 것으로,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좀 나쁘게 느껴진다. 그냥 가슴이 좀 띵하게 아프다.
내남이 알아주는 떡볶이 러버로서 다양한 신메뉴 개발을 해왔다. 핸드드립 커피 사랑하지만 맥심 모카골드도 마다하지 않듯 인스턴트 떡볶이도 애용하고 있다. 다만 만족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 그런데 어제 최강자를 찾았다. 홍대 미미네 국물 떡볶이는 합정동 살 때 자주 먹었는데. (아, 그쪽은 정말... 조폭 떡볶이, 미미네 떡볶이, 망원시장 순이네 고릴라까지. 떡볶이의 천국이었다! ) 트레이더스에서 미미네 떡볶이 인스턴트 제품을 사 왔는데 거의 비슷하다. 김말이 튀김만 있으면 완벽 재현될 것 같은 느낌. 물론 기본양념에 파 마늘 듬뿍 넣어서 채윤네 떡볶이화 한 것은 당연하고. 살짝 아쉬운 건 인스턴트 떡볶이들이 공통적인 약점인 단맛이었다. 너무 달아서 죄 망쳐 버리는 거다. 이것도 조금 덜 달았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식구들도 모두 입을 모아 극찬, 어제 먹고 오늘 또 먹기로 했다. 물론 채윤네 떡볶이로 변신해야지. 모두 좋아하는 당면 사리를 듬뿍 넣었고, 당연히 간을 더 해야 하는데 유난히 칼칼한 고춧가루가 있어서 넣었고, 맛간장으로 간을 더 했다. 파 마늘 추가는 기본. 완전 성공이다. 살짝 넘치는 단맛을 잡았고 칼칼한 국물에 넉넉히 넣은 당면 건져 먹는 맛도 최고. 현승이 주문으로 급히 반숙 삶은 계란도 만들어 국물 남은 것에 적셔 먹었다. 내일도 먹을 수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