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가는 블로그 메인 화면에 음식 사진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루 건너 하루 음식 사진이 올라오는 것은 집안에 꼼짝없이 갇힌 나날이 이어지는 까닭이요, 쉬이 밥때가 오는 까닭이요, 내일도 모레도 집에 머물러야 하는 까닭이요, 아직 나의 요리빨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어머니, 나는 매 끼니마다 먹고 싶은 음식 이름을 한 마디 씩 불러봅니다. 광장시장 육회와, 신촌의 즉석 떡볶이와, 평가옥의 평양냉면을 불러봅니다. 이것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천국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돼지 고기 목살에 빨간 양념을 합니다. 캔 대신 껍질까지 있는 골뱅이를 씻어 얹고, 양념장을 뿌리고 콩나물로 덮어버렸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흔들리는 앞산의 나무들은 고립되어 심심한 나날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콩나물이 푹 꺼지고, 양념이 배인 목살과 골뱅이를 씹습니다. 목살 한 점에 추억과, 골뱅이 하나에 사랑과, 콩나물 한 입에 아삭함, 국물 한 숟가락에...... 사장님, 여기 사리 추가요! 라면 말고, 쫄면 말고, 스파게티면 추가요. 그리고 사장님, 그 위에 치즈 사리도 추가요. 어머님, 이 매콤하고 찐득하여 신박한 파스타 맛에 나는 함께 먹고 싶은 이름을 불러봅니다. 나는 무엇인지 아쉬워 바닥에 남은 국물을 다시 쫄입니다. 밥 한 공기의 사랑과, 한 줌 남은 신 양배추 김치에 설탕 한 숟갈과, 김가루와, 참기름, 참기름...... 볶음밥의 완성입니다.
거리두기 2.5가 지나고, 확진자 수가 100명 아래로 떨어지고, 고립의 시간이 지나가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새로운 희망의 나날이 무성할 거 외다. 잘 될 것 이외다, 잘 될 것 이외다,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 이외다.
하동 일박 여행 중.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숙소 앞 대나무 숲 산책에 나섰다. 노랑나비 한 마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내 옆구리 쪽 어딘가를 맴돌았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한참 발길을 붙들었다. 언제부턴가 노랑, 나비, 노랑나비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들이다. 세월호의 아이들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님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냥 아쉽고 안타깝고 그리운 모든 존재들이다. 한참을 놀다 헤어졌다.
섬진강가에 서서 화장실 간 남편을 기다리는데 다시 나타났다. 작은 노랑나비가 "안녕, 여기 있었네" 하는 것처럼 다가와 팔락거렸다. 한 걸음 두 걸음, 나비 따라 옮겨 다니며 한참을 놀았다.
차밭 사이를 걷는데 또 그 노랑나비다. 이쯤 되니 예사 나비가 아니지 싶다. 자꾸 따라오는 걸 보니 나비 쪽에서도 영 발걸음이 안 떨어지는 모양. 이렇듯 나를 그리워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엄마? 엄마인가 보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가녀린 양쪽 날개는 하나는 그리움, 하나는 아쉬움. 내 마음에 있던 엄마가 나비 되어 함께 걷고 있다. 습기 가득한 산책 길이, 안개에 싸인 지리산 능선이 더욱 아련해졌다. 엄마가 보고 싶다. 많이 보고 싶다.
짧은 여행 동안 이상하리만큼 '초록 사이 노랑'이 눈에 띄었다. 초록 풀잎 사이 노랑나비는 물론이고, 섬진강변 가로수들은 초록 사이사이 노랗게 변한 잎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동네 텃밭에서는 참깨 꽃을 처음 봤는데 초록잎 사이 노란 꽃이었다. 내내 가는 곳마다 초록과 노랑만 눈에 보인다.
초록은 (나와) '동색'이다. 에니어그램 유형을 알기 훨씬 전부터 나는 초록이었다. 초록을 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고, 초록 잔디를 보면 그저 눕고 싶었다. 초록을 보면 살 것 같았다. 특히 봄의 연둣빛을 보면 그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연두 안에 숨은 '노랑'이 아픔과 슬픔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마음의 길은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좋던 한여름의 신록에도 전 같은 환호가 나오질 않았다. 그때가 언제냐 물으면 딱히 답할 수는 없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노랑을 곁들이 초록, 또는 초록 사이의 노랑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엽록소가 빠져나간 헐거워진 느낌의 초록이랄까. 근육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흔들거리는 내 뱃살과 닮았다. 빛바랜 초록이 추레해 보이기도 한다. 그 사이 노랑나비가 어른거리니 얼핏 구별이 안된다. 내 노안 탓일 수도 있고. 빛바랜 초록과 연약한 노랑의 조화가 마음 깊은 곳을 툭툭 건드린다.
하동을 출발해서 섬진강변 드라이브가 끝나고 산청에 이르렀는데 차창 밖으로 또 노랑나비! 여기까지 따라왔어? 동영상과 함께 이 얘기를 연구소 단톡에 올렸는데. 안동으로 여행 가신 선생님이 동영상을 보내셨다. "소장님 따라다니던 갸가 여기까지 왔어요." "갸가 아니고요, 저희 엄마예요. 정중하게 인사드리세요." 했다. "어이쿠, 결례를... 용서하세요." 하하. 내겐 엄마고, 선생님에겐 또 누군가이거나 무엇이겠지.
초록은 나와 동색이다. 초록이 나이고 내가 초록인, 상징색이다. 집착에 가까운 애착물로서의 작은 화분들이 그러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지휘를 그만두었던 때, 의식에선 모든 상황을 쿨하게 받아들였던 그때 꾼 꿈이 아직 생생하다. 다른 사람 눈엔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내 딴에는 정성을 다해 키우던 화분을 누군가가 싹 치워버렸다. 꿈에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며칠 몸에 두드러기가 나며 앓고 난 후에 그 상실을 받아들였었다. '지휘' 역시 내가 지나치게 동일시하던 나와 동색인 무엇이었다.
빛바랜 초록과 한 마리 나비가 쓸쓸하다. 텅 비어 가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데... 텅 빈 곳이 어쩐지 알 수 없는 충만함으로 가득 차는 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상징은 설명할 수 없다. 느끼고 간직할 뿐이다. 선물 같은 천년차밭길 산책 끝에 숙소 앞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마음을 뺏는 컵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지만, 연두와 초록이 어우러진 꽃 한 송이 핀 컵에 딱 꽂혔다. 너다! 빛바랜 초록을 만난 2020년 휴가는 너로 간직하겠다! 이런 경우 흔쾌히 지갑을 열어주는 남편이 고맙고. 채윤 현승 사다 주려고 보던 팔찌 옆에 머리끈이 또 바짓가랑이를 잡네. "여기도 노랑 초록 있습니다!" 그것까지 챙겼다.
채윤이가 이유식으로 두유를 먹던 시절이었다. 밥은 물론 뭐든지 잘 먹는 아가였지만, 출근하는 엄마와 안녕하고는 할아버지 댁에 가면 치르는 의식이 있었다. '푸빵'이라 불리는 인형용 유아차에 누워(물론 크기가 작으니 꼭 끼어 누워 유아차가 터질 지경)서 비디오로 '벅스 라이프'를 틀고 '쮸쮸'라 불리는 두유를 우유병에 넣어 빠는 것이었다. "쮸쮸 한 통을 코끼리 비스께트 먹는 순식간에 치워버려" 어머님 말씀이다. 꽉 끼는 코끼리처럼 유아차에 한 병 뚝뚝하고는 바로 잠이 들어 버리는 것이다.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쪽이 새롭게 무너지는 장면이다. 아침마다 엄마랑 헤어지는 것 싫은데, 울어도 떼써도 바꿀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받아들이는... 아니 받아들이기는! 좌절하고 만 아기의 텅 빈 마음이다.
마지막 남은 두유 얘기인데. 그렇듯 두유는 그저 이유식이 아니라 엄마를 대신하는 정서적 대용물이었다. 한 박스 씩 사다두고 먹었는데 다 먹고 한두 개 남으면 애가 불안해서 어쩌질 못한다고 부모님이 보고하셨다. "하부지, 쮸쮸 사러 노넙(농협) 가자죠. 하부지, 노넙 가요." 그리고 할아버지 손잡고 노넙에서 쮸쮸 한 박스를 사서 집에 오는 길에는 기분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춘다고 하셨다. 그 말씀 전해주시던 아버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돌아보면 너무나 귀엽고, 한편 가슴 어디가 새롭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때 채윤일 보면서 젊은 시절 담배 피우는 친구들이 마지막 남은 담배 한 대를 향한 지나친 집착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걸 두고 놀리고 장난도 치곤 했었다. 마지막 남은 하나.
찌개로 찜으로 볶음밥 재료로, 정말 소중한 묵은김치가 끝났다. 한 포기가 덜렁 남아 있었는데, 아끼고 아끼며 몇 잎씩 떼서 먹다가 마지막으로 털어서 오리고기 넣고 김치볶음을 했다. 김치볶음, 김치찜, 김치찌개에 열광하는 사람은 현승이다. 집밥을 가장 충실히 먹는 구성원이기도 하고. 며칠에 한 번씩은 김치 들어간 음식을 복용해 주어야 하는 몸이기도 하다. 닭으로 하는 김치찜을 개발하여 '닭치찜' 작명을 한 것도 현승이다. "현승아, 오늘 김치찌개?" "오오, 좋아! 그러잖아도 갑자기 김치찌개 생각이 났었어."
마지막 김치를 자르는데 옆에 있던 현승이가 "엄마, 정말 이게 끝이야? 어떡하지?" 제 딴에 반은 농담인데, 한 개 남은 두유를 확인하고 불안해 하는 아기 채윤이가 떠올랐다. "어, 이거 마지막 잎새야. 너의 행복한 김치찌개 식사는 끝이야. 낄낄." 놀리기 시작했더니 진짜 좀 불안해한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더니 묘책이 나왔다. "엄마, 제천 갔다 와. 선 이모한테 가서 김치 좀 얻어 와. 선 이모 만나러 안 가?" (선 이모야, 제천 갈게,ㅎㅎ)
벌써부터 1박2일 하동 여행 계획을 세워뒀다. 숙소도 물론 예약해 두었고. 끝날 것 같지 않은 장마 속에서 꿈을 꾸었다. 맑은 하늘 투명한 공기의 지리산 자락을 걸어야지, 걷다 지치면 차가운 계곡에 발을 담그고 가만히 물소리를 들어야지, 그러면 어느 여름 지리산 뱀사골에서 실족하여 떠난 고정희 시인과 연결될까. 막연한 계획이었다. 장마로 인해 섬진강이 범람하고 화개장터며 우리가 가려던 곳이 물에 잠겼다. 여행을 취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수해복구 상황을 검색하고 또 검색하고. 숙소 취소 기한이 될 때까지 고민하다 이런 때는 그냥 가서 밥이라도 한 끼 사먹는 것이 도와드리는 것이다 싶어 강행하기로 했다. 그저 취소하지 않는 것, 수해복구 현장이라도 보고 오는 것을 목표로 아무 계획 세우지 않았다.
수해에 더하여 코로나 상황이 더 긴박해져서 다시 한 번 취소를 고민해야 했다. 숙소에 콕 박혀 있다 오자, 긴 드라이브라고 생각하자, 하고 출발했다. 이틀 내내 비 예보니 정말 아무 기대할 것이 없었다. 체크인 하고나니 아직은 그저 흐린 하늘. 이 틈에 걸어보자. 쌍계사로 갔다. 덥고 습하고. 장마 때 집에서 상상했던 그런 장면은 없었다. 그나마 한 30분이나 걸었을까. 비가 오기 시작. 비오는데 뛰어봐야 앞쪽에 있는 비를 맞을 뿐! 쫄딱 젖어버렸다. 지나서 생각하면 추억이 되겠지. 저녁 때가 되어 검색해서 찾아간 식당에선 가격에도 맛에도 배신 당하고 찜찜한 기분. 멋진 여행을 기대하지 않았고,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계획과 기대가 없어서 실망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그 밤은 위급한 상담 전화로 보냈다.
아침 먹고 언제 또 비가 쏟아질지 모르니 숙소 앞 개울가에나 빨리 다녀오자, 하고 나섰다. 그렇게 시작된 길, 결론적으로 상상 그 이상의 산책이 되었다. "저 동네 안으로 들어가 볼까?" 아무 기대 없이 내디딘 발걸음은 검색하다 본 '천년 차밭 길'로 이어졌다. 저 이정표! 지리산에 안긴 동네, 그 동네 마당 앞에 텃밭 같은 작은 차밭은 어디서 본 듯 한, 하지만 상상도 못해본 풍경이었다. 낯선 동네 골목길 걷는 것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텃밭이 차밭인 동네라니. (정말) 천년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차밭 사이를 걷는 아침이라니.
석류와 호두나무, 감나무, 밤나무, 연근, 도라지꽃까지 만나는 길이었다. 조용한 지리산 아래 마을 길이 우리 여행에 갑자기 끼어들었다. 튀어나왔다. 천 년 동안 그저 거기 있었을 마을이었으니 '갑툭튀'라 할 수는 없는데. 계획 자체가 없었으니 무엇이 튀어나오든 예상 밖의 일, 갑툭튀였을 것이다.
체크아웃 시간에 임박하도록 충분히 걷고 누렸다. 그리고 다시 아무 계획 없이, 자동차 굴러가는대로 섬진강을 끼고 달리는 길. 내 남은 생이 지리산 자락 섬진강변 어느 동네와 인연이 닿는 때가 있으면 좋겠다. 마음 깊은 곳의 그리움과 따스함을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풍경들로 왈랑왈랑 했다. "이런 동네에 살았으면......"
고속도로 피하고 국도로. 최대한 지리산 근처를 어슬렁거리기 위해서 무작정 산청 쪽으로 가기로 했다. 아이들 어릴 적 어느 겨울, 함께 했던 여행지였다. 그래서 끌렸을 것이다. 검색해서 나오는 아무 집이나 가보자, 산청의 어느 식당에 갔다. 흑돼지 소라 찜. 오, 가격도 맛도 좋았다. 사리로 스파게티 면과 치즈를 넣게 되는 신박함까지! 새로운 길, 새로운 음식, 안해본 것 좋아하는 JP님은 대만족. "집에서 할 수 있겠네. 애들 한 번 해줘야겠다." 신메뉴를 득한 나는 더욱 만족.
"지리산 근처 어디든 걸을까?" 이 계획 뿐이었고, 다가오는 일들이 그 이상의 계획을 세우지도 못하게 하더니. 결국 좋은 여행이 되었다. 나도 읽고 남편도 읽으며 각각 깊은 통찰을 얻은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책에 그런 말이 나오지. "(진실은 역설적이고 그 진실을 살기 위해서는) 최소한 얼마 동안이라도 확고한 결심 없이 살기로 마음 먹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고한 결심과 계획을 위해 너무 애쓰지 말아야 할 일이다. 계획에 어긋나는 위로와 실망이 얼마나 많았던가. 위로의 공간이라 기대하던 곳에서 상처를 받고, 찌르려고 달려오는 사람인 줄 알고 방어하던 사람의 품에서 위안을 얻고, 메마른 곳이라 여겼던 곳에 샘물을 발견하고...... 계획의 쓸모란, 그저 한 발 내딛게 하고 떠나게 하는 것.
메시지 성경 읽기 진도가 역대상이다. 사람 이름으로 한 장 다 채우는 건 마태복음 1장이 갑인 줄 알았는데, 역대상이 갑 오브 갑이었다. 이름으로 본문 채우기가 9장까지 이어진다. 어릴 때는 눈으로 휙 훑고 지나쳤었다. 하나님의 나와 상관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책에서 '감사의 글'에 따로 모은 이름들처럼 말이다. 내가 관심 있는 건 '본문'이지 저자의 인간관계가 아니다.
어쩐지 이번엔 한 사람, 한 이름을 꼼꼼히 읽게 된다. 기나긴 인생이었을 것이다. 신앙과 불신앙, 사랑과 두려움을 오가며 40년, 60년, 80년을 이 땅에 머물렀을 것이다. 강한 용사이거나, 제사장이거나, 문지기로서 역할을 살며 자기를 구축했을 것이다. 고유한 인격을 지녔을 것이다. 그 인격의 맥락 안에서 선택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 선택이 모여 인생 이야기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더 큰 이야기에 편입되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얼굴.
생각해보면, 한 사람이다. 내 마음에 울리는 끝없는 번뇌는 한 사람과 맞닿는다.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도, 삶을 향한 열정을 앗아가는 것도 한 사람의 얼굴이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에 한 사람의 얼굴이 되고 있다. 얼마나 소중하고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누군가의 지금 여기를 한 사람, 한 얼굴로 채워 생기를 앗아가거나, 삶의 기쁨을 불어 넣는다는 것. 한 얼굴, 한 이름이 가진 위력이 말이다.
박광혜 권사님 떠나신 지 벌써 일 년이다. 1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헤아려 보면 권사님과의 만남이 3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구나! 그러나 어쩐지 권사님 이야기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다. 운을 떼어 놓고 보니 일 년 내내 그랬던 것 같다. 3년 여의 시간, 함께 한 시간이 권사님의 70년 넘는 이 땅의 시간의 마지막 시간이었다니. 돌아보고 다시 돌아보게 된다. 처음 뵈었을 때는 이렇게 빨리 이별이 있을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권사님은 떠나셨지만, 그래서 생긴 텅 빈 자리로부터 새로운 권사님을 만난다. 엄마 애도일기를 쓰고 마무리하며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배웠다. 누군가에 대해 쓰는 것은 그분의 아니라 나를, 그분의 삶에 비친 나를 해석하는 것이다. 떠난 이가 남긴 존재의 빈 자리를 응시하며 보이는 것은 그분이 내게 남긴 사랑이며 가르침이다. 그것을 알기에 쓰려고 한다. 무엇이든 쓰려고 한다. 쓰고 싶다. 써서 알아내고 싶다. 내게 남기신 권사님의 흔적을. 삶과 죽음에 관한 설교 묵상이라는 부제를 단 김영봉 목사님의 책 <사람은 가도 사랑은 남는다> 제목과 같다.
추도예배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던 중, 권사님 며느님께서 "어머님이 사모님을 너무 좋아하셨어요." 했다. 남편이 거들면서 "맞습니다. 권사님이 저보다 제 아내를 더 좋아하셨어요."라고 했다. 나도 안다. 아니 돌아보니 확실히 알겠다. 권사님이 나를 참 좋아하셨다. 내 커피를 좋아하셨고, 내가 꾸며놓은 거실을 '북카페 같다'라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시며 칭찬하셨다. 아이들 키우는 것을 보고 "이렇게 사는 사람들, 가정이 있구나! 실제로 이렇게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봤다."라고 하셨다. 교회에 처음 오던 날,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몸도 마음도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 아이들까지 어깨가 움츠러들어 내내 긴장이었다. 그날이 한참 지나고 권사님이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니, 잘 모르는 학생인데 내가 뒤따라 들어가는 걸 알고는 교회 출입문을 한참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누가 이렇게 착한가 봤더니 현승이였어. 마음 씀씀이가 보통이 아니에요."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말씀하셨다. 현승이는 이 말씀을 듣고 좋아서 콧구멍이 벌렁벌렁. "엄마, 봤지? 나 그런 사람이야." 추운 날의 따뜻한 기억이다.
채윤이에게 특별히 마음을 쓰셨다. 한창 대입 실기 시험 중이었다. 1차 발표가 속속 나고 있었고. 시험을 잘보기도 하고, 못 보기도 했다. 한두 번 실수한 것으로 크게 낙심하고 있는데, 기대했던 학교에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전망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재수를 해야 할 수도 있겠다 싶어 채윤이 모르게 남편과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권사님께서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으셨다.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권사님께서 고개를 저으시며 힘주어 말씀하셨다. "아니에요. 사모님. 우리 채윤이 꼭 합격할 거예요. 하나님이 꼭 붙여 주실 거예요!" 정말 확신에 차서 말씀하셨다. 교회 처음 부임했을 때, 권사님이 사랑하는 손녀딸이 한창 입시 중이었다. 권사님이 어렸을 적부터 혼신을 다해 뒷바라지하신 손녀이고, 서울대에 합격을 했다. 손녀딸을 위해 기도하시던 절절함과 비슷하며 다른 절절함 같았다. 결국 채윤이는 원하던 학교에 합격을 했고, 그 소식을 들으신 권사님이 환하게 웃으시며 그러셨다. "사모님, 내가 된다고 했죠? 하나님이 채윤이 같은 아이를 안 붙여주시면 누구를 붙여주시겠어요?" 눈물이 왈칵났다. 그리고 손녀딸을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요즘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브랜드, 색깔이라며 화장품을 사서 선물로 주셨다. 곱고 고운 필체로 정성스레 쓰신 카드와 함께.
돌아보면 이렇게 따뜻한 기억이다. 실은 돌아보니 비로소 이렇듯 따뜻한 것이다. 권사님은 사실 '칼같음, 철저함' 같은 형용사가 어울리는 분이다. 완벽하고 빈틈이 없으며 모든 것을 다 가진(갖춘) 분 같았고, 특유의 자부심도 충만하셨다. 아나운서 같은 낭랑하고 또렷한 발음으로 우아한 말투셨다. 그런 말투로 돌려 말하기보다 직설로 꽂으셨다. 실은 그래서 권사님이 조금 무서웠다. 부임한 첫 해, 내적 여정 세미나를 길게 진행했는데 쉽지 않은 동반이었다.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내적 여정 참여자들은 자발성 100%에 목마름 200% 정도를 장착하고 온다. 톡 건들면 그저 마음을 활짝 여는 분이 대부분이다. 교회 내적 여정은 자발성보다는 관성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내면을 깊이 돌아보는 것이 여정의 목표인데, 웬만큼 준비되지 않으면 마음의 여정에 들어서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동반하고 이끄는데 에너지가 많이 드는 게 사실이다. 권사님은 교회 에니어그램 포함, 내가 이끈 내적 여정 집단을 통틀어 최고령 수강자이시다. 정말 열심히 듣고 필기하셨고, 매주 철저하게 복습하셨다. 그리고 매 시간 "너무 어렵다."라고 하셨다. 가장 열심히 하시면서 가장 어려워하시는 모범생이었다. 상담이나 마음의 여정에서 "모르겠다"는 반응은 "마주하기 힘들다"로 받아들이곤 한다. 내적인 부침이 있다는 뜻이다. '저항'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는데, 상담자 또는 여정 동반자로서 분별이 필요하고, 버티는 힘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누구보다 질문이 많으시고, 그만큼 어려워하셨다. 왜 아니겠는가? 머리로 하는 공부가 아니고, 정직하게 내면을 마주하는 작업인데. 아무튼 권사님 뿐 아니라 전통 교회 신앙생활에 익숙한 분들과의 여정은 내게 참 어려운 시간이었다.
마지막 시간 소감문을 써 제출하시도록 했다. 어쩌면 그렇게도 권사님스럽게, 활자 같은 필체의 소감문을 반듯하게 접어 깨끗한 봉투에 담아 스티커로 밀봉해 건네주셨다. 역시나 권사님스러운 정직한 소감문이었다. 여정에 참여하며 겪으신 내적 갈등을 그대로 고백하셨다. 그럼에도 여정이 지향하는 지점을 명확히 알고 계셨다. 마지막 문장 '쿵쿵 울림'이란 두 단어는 내 마음에 남아 아직도 쿵쿵, 울리고 있다. 그 연세에 살아오신 세월을 돌아보며 '잘못 살았구나' 하신다. 권사님 정말 오롯이 에고의 그림자를 마주하셨었구나! 누구보다 내적 여정을 진실하게 걸으셨구나! 이제와 다시 보인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오신 삶과 신앙을 '고민하고 후회하며 다시 부끄러움'으로 마주하며 성찰하셨던 시간은 어떠했을까. 더 헤아려드릴 걸, 아쉽고 아쉽다. 쓰다 보니 더욱 아쉽고 텅 빈 마음에 아픈 바람이 스친다.
에니어그램 내적여정을 시작할 때는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워낙 나의 뇌세포는 더 이상 지식이나 감정이 들어갈 틈이 없이 평생 쓸데없는 것까지 차곡차곡 싸여 있었기에. 슬프고도 부끄러운 1강이었다. 그 혼란스러운 중에 어떤 날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뭔지 모를 충만함에 2강이 듣고 싶어서 '기도하며, 고민하며 후회하며 다시 부끄러움에......여기 저기 다 있는 나. 아직도 정확한 내 유형을 못 찾고 있긴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얻게 됨을 조금씩 느끼고 있다.여전히 난 잘못 살았구나 하는 자책감이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십자가, 예수님의 와전한 사랑이 나를 회복시키심을 믿는다. 있는 그대로.모든 학습에서 낙제였지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정말 그래라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 기울이고 싶다.
시간 시간 마음으로 쿵쿵 울림이 있었던 내 평생 처음 경험해보는 귀한 시간이었다.
권사님의 세계와 나의 세계가 멀다고 생각했다. 참으로 멀다고 생각했기에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권사님이 나를 참 좋아하셨는데 바싹 다가가 "권사님, 내면 마주하는 일이 참 힘드시죠? 권사님, 여기까지 정말 잘 살아오셨어요."라고 말씀 드릴 용기가 없었다.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사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얘기를 가끔 들려주셨다. 아들들 시험기간에는 열심히 하던 에어로빅도 쉬셨다고 했다. 엄마가 몸을 흔들고 있으면 공부하는 아이 정신 산란할까 봐 그랬다며 회한에 잠긴 표정으로 쓸쓸하게 말씀하셨다. 이런 면에서 나는 권사님의 반대쪽 끝에 있는 엄마가 아닌가. 내 또래 엄마가 같은 말을 했다면 단칼에 정죄하고 말았을 텐데. 권사님께는 조심스러웠다. 내 소신이 권사님을 아프게 할까, 회한 가득한 권사님의 눈동자를 보며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곳에 처음 이사오고 며칠 안 지나서였다. 며칠이 지나도 집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오래된 집의 좁은 주방은 많지도 않은 그릇을 다 받아내질 못했고, 대충 지어지고 무성의하게 증축되어 생긴 방과 구조에는 아귀가 맞게 들어가는 가구가 없었다. 쓰던 가스오븐레인지는 들어올 수 없었고, 휴대용 버너로 최소한의 식사를 하며 지냈다. 춥기는 또 왜 그리 추웠는지. 바닥에 앉아 배달음식 먹으며 두 아이 중 누군가가 말했다. "꼭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아. 아빠가 망해서 이사 온 집 같아." 그렇게 며칠을 지냈는데 아직 가스 연결이 안 됐다는 소식을 들으신 권사님이 저녁식사에 초대해 주셨다. 뭘 해도 완벽하게 하시는 분이다. 손수 만드신 듣도 보도 못한 맛있는 음식을 네 식구가 정말 맛있게 먹었다. 미술을 전공하신 권사님의 동양자수 작품이 갤러리처럼 걸려 있는 거실과 칼같이 정리된 주방 서랍까지. 머나먼 세계 같았다. 맛있게 먹고 돌아와 우리의 새집에 앉아 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누구나 자기 세계, 자기 우주를 산다. 사람 사람 지문이 다르듯, 살아온, 살아가는, 살아갈 세계가 다르다. 두 세계를 각각의 고유함으로 존중하고 인정하려면 갈등이 불가피하다. 갈등을 피하기 좋은 방법은 마주하는 세계를 없는 것처럼 지우는 것이다. 마주하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먹고 사는 일, 아이를 키우는 일은 어차피 내가 알 수 없으니 환상으로 치부하면 불편할 것이 없다. 나는 조금 그렇게 차단했다. 그래서 권사님께 더 가까이 가지 못했다. 돌아보면 권사님은 그 세계의 경계를 넘어 내 세계로 들어오셨다. 채윤이 대입 즈음에 보여주셨던 확신은 내 가슴에 와닿은 진정성이었다. 모든 것을 쏟아부어 키운 권사님의 손녀딸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키워진 채윤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주셨다. 망해서 이사 온 집 같은 우리 집을 안타깝게 여기시며, 그 와중에 북카페처럼 꾸며놓은 거실을 그렇게나 좋아하셨다. "어떻게든 살겠지, 내 알 바 아니다." 하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마음을 쓰며 나의 세계에 침투하셨다.
1, 2학기에 걸쳐 내적 여정을 마친 늦가을. 권사님께서 몇 번 입지 않았다면 빨간색 트렌치 코트를 주셨다. 이름만 들어본 다른 세계의 브랜드였다. 내 몸에 꼭 맞게 수선을 해야 한다시며 수선비용까지 내셨다. 다시 새로운 세계였다. 수선비가 내가 몇 년째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 가격보다 훨씬 더 비쌌다. 장롱 안에 그 코트가 있다. 권사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입고 나갔던 그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입지 못했다. 그 코트의 가격이 대충 어떻다는 것을 알고는 입어지지가 않는다. '나 이거 입는 사람이야' 보여주기 위해 명품을 입는 마음이나 그것을 입지 못하는 나나 옷을 돈으로 보며 타인의 시선에 매여있기는 매 한 가지다. 암튼, 그 코트를 입고 권사님께 데이트 신청을 했다. 단풍 끝자락의 남한산성에 모시고 가서 내 최애 점심과 커피로 함께 했다. 오가는 차 안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살아오신 이야기를 길게 들려주셨다. 참 좋아하셨다. 봄에 한 번 또 모시고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스치듯 하셨던 한 마디가 가슴에 남아 있다. "미안해요. 목사님과 사모님께 참 미안해요.” 개인적 관계에서 미안함은 아니었다. 그 순간엔 몰랐는데, 복기할수록 그 한 마디가 내 깊은 어떤 것을 건드렸다. 그때 당시 정말 듣고 싶은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어쩌면 하나님께 꼭 듣고 싶은 말이었다. 참 힘든 시간이었는데, 그 한 마디 들으면 훨씬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던 바로 그 말이었다. 바로 그 말을 권사님이 해주셨다.
권사님 장례식을 마친 자리에서 하신 아드님의 부탁이 있었다. 1년 후 추도예배를 꼭 인도해 달라는 부탁을 남편에게 하셨다고 한다. 권사님 사셨던, 흐드러지는 벚꽃이 뵈는 창이 있는 집을 정리하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그 거실에서 추도예배를 드리기 위해 1년을 기다린 것이다. 추도예배를 드리며 마음이 울렁거렸다. 권사님께 하고픈 말들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많은 것이 감사했다. '우리 사모님'의 커피를 특별하게 여겨주셨던 것, 나의 세계에 기꺼이 들어와 주셨던 것. 무엇보다 권사님 이 땅에서 보내신 마지막 3년을 함께 하게 해 주신 것. 인생 마지막 인사, 장례예배 집례를 남편 김종필 목사가 해드릴 수 있었다는 것. 완벽한 자기 관리로 일궈내신 삶과 신앙이 생애 마지막 10여 년, '교회 사태'라는 이름의 풍랑을 겪으시며 어떻게 흔들렸는지 잘 알고 있다. 울며 울며 걸으셨다는 탄천 길을 내가 함께 걸었던 느낌으로 생생하게 여러 번 들었다. 교회와 목회자로 인해 겪은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생을 마치지 않으셨다는 것에 깊이 안도하며 감사한다. 권사님 투병 중에 '목사'라는 사람과 쉬지 않고 소통하며 두려움을 내비치시고 거침없이 기도 부탁을 하실 수 있으셔서 감사하다. 권사님은 당신 큰 아들과 나이가 같은 데다, 청빙위원에 소속되어 있었던 책임감으로 김종필 목사를 안타깝게 바라보셨다. 열정을 뿜어내며 선동하는 강력한 카리스마가 없는 것을 아쉬워하셨다. 흠결 많아 마음 놓이지 않은 김종필 목사가 투병 기간 내내, 임종 직전까지 권사님의 손을 잡아드릴 수 있어서 나는 감사했다.
남편이 목사인 것이 나는 늘 부끄럽다. 목사가 쓸모 없는 시대에 목사로 사는 것이 안쓰럽다. '목사의 쓸모없음'을 전제로 세워진 교회에서 목사 노릇하는 것이 안타깝고 민망하다.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해 늘 의문하고, 기준도 높은 사람이라 더욱 그렇다. 박광혜 권사님의 투병기간과 장례식, 그 이후 일 년을 지내고 추도예배를 드리면서 남편이 목사여서 고맙고 자랑스러웠다. 목사의 아름다운 권위로, 거기에 권사님을 향한 사랑을 담아 그 시간을 함께 해드리는 것이 좋았다. 목사들에게 받은 치명적인 상처로 아직 분노와 슬픔이 가시지 않은 권사님 곁에 그저 조용히 손잡아 드리는 목사로 함께 해드릴 수 있어서. 카리스마는 없지만 대신 속 깊은 진심을 가진 사람인 걸 권사님도 아시겠지. 추도예배를 마치고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에서 아드님들과 대화하는 남편이 참 보기 좋았다. 처음으로 목사의 쓸모를 생각했다. 쓸모없음으로 깊이 좌절하고 자주 흔들리는 남편이(내가?)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것, 이 역시 권사님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뭔가 쓰고 싶은 마음으로 일 년을 보냈다. 권사님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쓰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런 기나긴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 쓰다보니 죄송함과 감사함, 그리움과 슬픔으로 마음이 쿵쿵 울린다.
사랑하는 권사님, 세계와 세계의 마주침에서 한 발 더 다가가지 못한 것 죄송해요. 감사해요, 권사님. 정말 다른 세계에 계셔서 제가 사는 삶은 알지도 못하고 안중에도 없으실 거라 생각했는데 경계를 허물고 들어와 주시고,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너무 늦게 권사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죄송해요. 권사님이 주신 빨간 트렌치코트, 평생 간직하면서 이 미안함과 고마움을 새길게요. 구분하고 나누고 벽을 세우는 것 없는 나라, 두려움 없이 만나고 거침 없이 연결될 좋은 나라에서 곧 뵈어요.
푹푹 찌는 방에서 설교 준비하다 나와 에어컨을 껴안고 있는 남편 등에 대고 "저녁 뭐 먹지?" 혼잣말처럼 물었다. 더위에 쩔고, 설교 준비로 저 세상으로 간 정신 탓이리라. ‘아무말'이 나왔다. '아무말'에 응답하여 저녁 메뉴를 정했다. 냉라면. 검색하면 다 나오니까! 낮에 끓인 김치찌개로 일찍 저녁식사를 마친 현승이가 골뱅이 캔을 사러 냉큼 다녀왔다. 이래저래 저녁은 남편 혼자 먹는 거였다. 냉라면 일 인분 만든다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라면 양이 적어 부족할 것 같다며 채윤이가 물만두를 하겠단다. 물만두 한 접시 추가요!
"만두"
믿기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남편이 전에 어느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있을 때, 담임 목사님 없는 점심식사 자리였다. 갈비탕인지 뭔지를 먹으면서 후배 전도사님들이 "만두 하나 시켜도 되겠습니까?" 하는 말에 당연히, 기꺼이 만두를 추가해서 먹었다. 나중에 담임 목사님에게 혼났다. 정말, 만두를 추가했다는 이유로. 만두가 죄는 아니었겠지. 내가 당한 것처럼 민망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여보, 앞으로 언제 어디서든 만두를 보면 내가 무조건 추가 주문해줄게!"
"만두도 있겠지"
만두에 관한 김종필스러운 에피소드가 하나 또 있다. 얼마 전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주일 점심이 없는 날. 예배 마치고 오는 길에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채윤이와 내가 한 차에, 남편은 뒤늦게 혼자 출발한 차에서 메뉴 선정을 위해 통화를 하고 있었다. 두 여자는 이미 냉면으로 합의를 본 상태고. 남편은 세 번 예배, 세 번의 설교를 한 상태라서 든든한 밥 같은 것을 먹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대놓고 말하진 않지만 "그래? 그게 좋겠어?" 이런 후렴구에 돌려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유추 가능. 나름대로 몇 번 소심한 주장을 하다가 "그래. 냉면집 가자. 만두도 있겠지." 하는 말에 이쪽 차에 나란히 앉았던 둘이 빵 터졌다. 욕구를 내려놓는 남자의 자기 설득, 또는 자기 위안이랄까. 이후로 "만두도 있겠지"는 김종필 아빠 특유의 정서와 태도를 표현하는 관용어구가 되었다.
"물만두"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물만두를 데쳐주는 채윤이 마음은 착한 아빠 마음을 알아주는 착한 딸의 마음이다.
일이 있는 날이라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내가 빠지면 당연히 무산될 줄 알았는데. 이런, 쿵떡쿵떡 시간 계획을 세우더니 셋이서만 다녀왔다. 어, 이 사람들 봐라! 마키아신실, 조폭신실(JP&SS), 우리 집 실질적 군주인 나를 제쳐두고 나들이를 도모해? 3할 정도 섭섭, 7할은 홀가분이었다. 돌베개 출판사의 책 몇 권과 도서목록을 한 보따리 싸들고 와서는 전에 없던 관심 폭발이다. 엄마 우리 집에 신영복 선생님 책이 있어? 엄마는 뭐뭐 읽었어? 감옥에 몇 년을 계신 줄 알아? 나는 이제 한자 공부를 좀 하려고. 한자를 알아야 책이 잘 읽어지는 것 같아....... 사연인즉슨, 돌베개 출판사의 편집주간이신 S선생님을 만나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꿈과 진로가 1년에 한 번씩 바뀌는 현승이가 최근 아빠에게 '책을 만드는 사람'에 대해 묻고 한참 얘길 나누곤 했다. 그 대화 끝에 아빠가 나름 뜻을 가지고 계획한 나들이였던 모양이다.
'휴먼 라이브러리'라고, 두 아이들 모두 안식년 '꽃친'을 하면서 했던 활동이다. 말 그대로 다양한 어른을 직접 찾아가 만나 대화하면서 배움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다. 영락없이 휴먼 라이브러리였다. 그 자리에 함께 하진 않았지만 두 아이 모두 새롭게 책에 관심을 가지고, 주신 책을 집에 와 앉은자리에서 읽어버렸다. 채윤이는 그 다음날 바로 중고서점에 가서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사 왔다. 현승이는 대안학교에 가서 한참 느슨한 생활을 하다 성적표 날아온 날, 조폭신실 엄마에게 벼락을 맞았다. 벼락을 내렸으니 제우스 신실. 참고 참았던 걸 한 번에 터뜨려 줬더니 식겁해서는 자발적(벼락 맞은 후니까 자발적이 아닌 건가?)으로 몇 가지 절제 규정을 정하고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책을 다시 열심히 읽겠다며 김훈의 <남한산성>을 뚝딱 읽더니 <칼의 노래>를 붙들고 있는 중이다.
정말 좋다.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으면 좋은데, 어느 새 커서 김훈, 신영복 같은 거장의 책을 함께 읽고 자연스러운 수다를 떨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어렸을 적부터 "읽고 쓰는 것을 꾸준히 하고, 즐거워한다면 어떤 직업을 가져도 된다."라는 생각을 해왔다. 그렇다고 책을 열심히 사주거나 독서 일기를 쓰게 하거나, 제대로 교육을 하지도 못했다. 억지로 시켜서 되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있고. 보니까 채윤이는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을 엉덩이가 아닌 것 같다는 섣부른 판단을 하기도 했다. 현승이가 한때 솔직한 일기를 쓰고, 시를 짓기도 했지만 정말 '한때'였다. 다 큰 아이들을 억지로 읽고 쓰게 할 방법은 더더욱 없다. 대학에 간 채윤이가 제 안의 궁금증을 책으로 풀어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도록 반가웠다. 내 책장의 페미니즘 책을 기웃거리고, 어떤 저자에 꽂혀서 읽고, 필사하고. 그 어떤 모습보다 예쁘고 사랑스럽다.
읽고 쓰는 힘이 제일이다. "나는 모른다. 배울 것이 있다. 배워야겠다”라는 태도로 읽고, 그러다 한 저자에게 푹 빠지고, 그 저자가 소개하는 다른 저자를 새로운 선생님으로 만나고. 이럴 수만 있다면 좋은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한다. 또 자기 경험을 글로 쓸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과 아픔을 겪더라도 결국 그 상처를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무늬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이고,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드는 확신이다.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다 보면, 어쩌면 그렇게 다양한 아픔이 있을까 싶다. 목회자 성폭력 생존자 글쓰기를 진행하던 처음 얼마 동안은 매 시간 글로 나온 고통의 무게에 압도되어 몸과 마음 가눌 수가 없었다. 회가 거듭되면서, 사람 사람 글이 이끄는 마음의 길을 따라가면서 달라졌다.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에겐 자기 존재를 지키는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이 아무리 커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 고통보다 더 큰 존재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온라인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참여자들은 글이 이끄는 길을 따라 필연 내면의 아픔을 만나게 된다. 글을 듣다 보면 늘 명치 부분에 통증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압도되진 않는다. 당사자는 모르겠지만, 아직 인정할 수 없지만 발설하는 고통보다 그분 안에 있는 더 큰 힘이 내겐 보인다. 글을 쓴다는 것, 정직한 글을 쓴다는 것을 그런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평생 쓰는 사람으로 살았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보여주기 위한 글, 허세 가득한 글이 아니라 절실하고 진실한 글 말이다. 작가가 되는 글이 아니라, 자가 치유와 자가발전의 기반이 되는 글 말이다.
성인이 되어 자기를 찾느라 흔들리고 방황하는 채윤이도, 청소년기 끝에서 막막한 나날을 사는 현승이도 그저 읽고 쓰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부추와 호박을 최대한 많이 넣어 부침가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게 반죽을 한다. 하루 지나면 호박이 제 모양을 잃고 반죽에 녹아든다. 얄팍하게 부치기 딱 좋을 반죽이 된다. 들기름 두르고 부치면, 고소한 냄새가 빗소리와 어우러진다. 간이 딱 맞는 통마늘 장아찌 국물에 찍어 먹거나, 마늘 한 알에 싸서 입에 넣으면 고소함과 개운함의 조화는 말할 수가 없다.
2014년 8월 1일 자 포스팅이었다. 매년 7월 마지막 주는 동생 네 휴가 주간이고, 엄마는 우리 집으로 휴가를 왔다. 가장 더운 때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하곤 했었다. 오늘 동생네는 오늘 휴가를 갔다. 하루 종일 마음이 이유없이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뭔가 허전하고 우울했다. 밤에 산책하다 알게 됐다. 엄마가 집에 와 있어야 하는 시간이다. 꽃게찜을 하고, 갈치조림을 하고, 팥을 삶에 팥밥을 하고. 무더위에도 따순 커피를 찾는 엄마랑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이 모든 게 힘이 들어 조금 짜증이 나고. 그래야 하는 시간이다. 엄마가 많이 보고 싶다.
오전 내 밥 하고, 설거지 하고, 청소하면서 사우나하는 셈 치자, 생각하며 참았다. 일을 다 마쳤으니 사우나에서 나온 셈 치고 딱 20분 에어컨 켜고, 커피 마시려고 한다. 동생네 휴가로 일 주일 우리 집에 맡겨진 엄마가 있다. "엄마, 더운데 커피 시원하게 마셔. 시원하게 줄게" 하니까, "아녀~어, 나는 따순 늠이루 줘" 그래서 커피 따순 늠 하나, 찬 늠 하나. (따순 늠, 찬 늠. 이토록 찰진 말의 맛)
우리 엄마 최고령 커피 광고모델. "나 커피 마시믄 잠 못 자는디....." 하면서 한 잔 쭉 들이켜셨다. 조용해서 봤더니 커피 잔 내려놓고 졸고 계신다. 오늘 아침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주무시고 나와서는 화장실 들어가려 불을 켰는데 안에서 나는 인기척을 감지. 주방으로 (지팡이 짚은 채로) 빛의 속도로 도망 오셨다. "얼라, 화장실이 김 서방 있내비다. 내가 불을 껐내벼." 떨고 계신다. 화장실 앞으로 가서 김 서방을 불렀더니 역시 어둠에 떨고 있던 김 서방은 당황했으나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불 좀 켜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위 앞에서 장모님 놀리기. "엄마, 왜 김 서방 똥 싸는데 불 끄고 도망 와?" "얼라, 나 부끄럽게 왜 자꾸 이런댜" 장모님 앞에서 사위 놀리기. "여보, 일 보는데 장모님이 불 끄고 도망가서 당황했쪄요? 말도 못 하고 깜깜한데 앉아 있었쪄요? 장모님 오셨는데 사위가 맛있는 것도 안 사 오니까 엄마가 그러지" "어머니, 저녁때 맛있는 거 사 올게요" 하고 서둘러 출근하였다.
팥이 익어가는 냄새가 집안에 가득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해줬던 찰밥을 하려고 전에 사둔 국산 팥 삶고 있다.
원고 좀 써보려고 "나 이제 원고 써야 하니까 말 걸지 마" 했더니, 엄마랑 현승이가 동시에 "알았어" 한다. 엄마가 와 계시니 하루하루 비상시국이다. 아기 하나 키우는 느낌이니, 올케 선영이의 노고에 새삼 깊이깊이 고마운 마음이다.
제 움켜쥔 주먹을 펴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더 이상 붙들 것이 없을 때 저는 누구일까요? 빈손으로 주님 앞에 설 때 저는 누구일까요? 서서히 손을 펴 깨닫게 도와주소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제가 아니라 주님이 제게 주시려는 것이 곧 저임을. 주님이 제게 주시려는 것은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이고 영원한 사랑입니다.